모가미급 중순양함

 


'''모가미급 중순양함'''
모가미
미쿠마
스즈야
쿠마노
[im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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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最上型重巡洋艦'''
1. 제원
2. 개요
3. 개함우월주의
4. 순양함의 대형화
5. 문제점
6. 실전
6.1. 모가미의 함생
6.2. 자매함들의 함생
7. 평가
8. 대중매체에서의 모가미급
9. 관련 서적
10. 관련 문서


1. 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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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가미급 중순양함의 제원
주문
1931년
건조 시작
1931년 12월 24일
진수
1934년 5월 31일
취역
1935년 8월 29일
기준 배수량
공식
8,500톤[1]
실제
12,400톤
만재 배수량
공식
10,980톤[2]
실제
15,057톤[3]
길이
공식
197m
실제
198m

공식
18m
실제
20.2m
흘수선
공식
5.5m
실제
5.9m
속력
공식
37노트
실제
34.9노트
모가미급 경순양함의 무장(건조시)
함포
15 × 155 mm(6.1인치)/60-cal guns (5x3)
대공포
8 × 127 mm/40-cal guns (4x2)
4 x 40 mm AA guns
어뢰
4 × 610 mm 3연장 어뢰발사관(적재탄 24발)
모가미급 중순양함의 무장(1939년 이후)
함포
10 × 203.2mm(8인치)/50 3rd Year Type naval guns (5x2)
대공포
8 × 127 mm/40-cal guns (4x2)
8 x 25 mm AA guns[4]
4 x 13.2 mm AA guns
어뢰
4 × 610 mm 4연장 어뢰발사관(적재탄 24발)

2. 개요


일본 제국 해군의 중순양함 '''모가미급 중순양함(最上型重巡洋艦)'''.
함명의 명명에서 1번함 모가미(最上)는 야마가타 현의 모가미 강에서 유래한 명칭이며 2번함 미쿠마(三隈), 3번함 스즈야(鈴谷), 4번함 쿠마노(熊野) 모두 강의 이름[5] 에서 명칭을 따왔다.
모가미급은 설계상으로는 일본 제국 해군의 순양함 중에서 가장 우수한 성능을 발휘할 것으로 기대되었지만 준공 당시 여러 가지 크고 작은 트러블이 있었고 실전에서도 여러가지 문제로 큰 활약을 하지 못하였다. 즉, 고유의 설계 사상으로 인해 근본적으로 기대만큼의 성능을 내기 어려운 순양함이었다.

3. 개함우월주의


[im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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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레 항구의 모가미급 경순양함 1번함 모가미[6]
1935년 시험항해 중인 모가미급 중순양함 1번함 모가미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일본 제국의 함선 설계사상은 철저한 ''''개함우월주의''''였다. 개함우월주의 사상에 따라 일본은 자국의 중순양함을 무조건 서방의 중순양함보다 우수한 성능을 가지게 하려고 노력하였다. 이것은 역사적인 사건과도 연관이 있는데 바로 1922년에 발효된 워싱턴 해군 군축조약과 1930년에 발효된 런던 군축조약이다. 런던 조약에 의해서 일본은 12척의 중순양함만 건조할 수 있었다. 같은 시기 미국은 18척의 중순양함을 건조할 수 있었다.
이렇게 되자 일본은 런던 조약의 허점을 이용하였다. 그것은 여유 배수량이 있는 경순양함을 건조하는 것으로, 경순양함의 최대 배수량(기준 1만톤 미만) 안에서 6척의 중순양함급 경순양함을 건조하는 계획이었다. 런던 조약은 경,중 순양함을 구분하는데 있어 주포 구경 6.1인치(155mm)와 8인치(203mm)에만 차이를 두었을 뿐, 배수량에는 제한이 없었다. 때문에 일본은 조약 탈퇴 이전까지는 6.1인치(155mm) 함포를 모가미급에 장착하였고 조약 탈퇴후 바로 8인치 함포로 환장할 수 있도록 바벳의 크기를 공용화하는 등의 사전 작업을 건조 초기 단계부터 진행했다.

4. 순양함의 대형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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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4년에 해군 조약에 대해서 불만을 품고 있던 일본의 군부는 1934년에 조약에서 탈퇴할 것을 선언하였고 이후 2차 조약 또한 거부하면서 조약에 제한을 받지 않게 된다. 일본은 조약형 경순양함인 모가미급(건조시 기준)을 건조했고 조약 탈퇴 후 계획했던 대로 8인치 함포로 교체하여 중순양함으로 변경하였다.[7] 당시 일본이 공식적으로 발표한 배수량은 8,500톤이었으나 영국 해군성에서는 실제 배수량은 이보다 더 클 것으로 보고 있었다.[8] 일단 설계상으로는 9,600톤이었지만 실물은 11,169톤이었다고 한다.[9] 8인치 함포로 교체하고 그 외 벌지 등이 추가되어 최종적으로는 기준 배수량이 13,670톤을 넘어가지만 이 때는 이미 조약 파기 이후였다. 8인치 함포를 교체한 후에도 서류상으로 모가미급은 여전히 경순양함이었다.[10]
1930년 런던 군축조약 이후 기준 배수량 1만톤 이상 중순양함[11]
연도
국가
함급
기준 배수량
만재 배수량
1935년
일본
모가미급 중순양함
11,196 톤
15,057 톤 이상
1939년
독일
아드미랄 히퍼급 중순양함
16,170 톤[12]
18,200 톤
1943년[13]
미국
볼티모어급 중순양함
14,733 톤
17,273 톤
1948년
미국
디모인급 중순양함
15,653 톤
18,991 톤
확실한 것은 일본이 모가미급을 건조하면서 기준 배수량 10,000톤을 넘는 순양함을 건조하여[14] 조약을 위반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배수량을 다소 초과했지만 주포는 '''조약에서 정한 6.1인치를 탑재해 경순양함이 맞다'''. 또한 중순양함의 의미가 변질된 것이 모가미급인지는 좀 애매하다. 애초에 조약의 제한 때문에 중순양함의 성능을 타협해야 했었던 것이 조약이 효력을 잃어버리면서 최대한 성능을 뽑기 위한 결과물이라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5. 문제점


이렇게까지 큰 문제를 만들어낼 정도로 성능에 집중했다면 능력도 뛰어나고 실전에서도 활약을 해야 하는데, 현실은 시궁창이라고 모가미급 중순양함이 얻은 칭호는 '''트롤짓의 귀재''' 였다.
  • 제아무리 경순양함인 척하고 중순양함을 만들었다고 해도, 일본군 내부에서의 구분도 있기에 일본군의 중순양함보다는 약간 배수량이 적었는데, 그에 비하면 강력한 무장과 장비, 엔진을 가지고 있어서 함체 복원성에 상당한 이상이 생겼다. 하다못해 풍랑이라도 만나면 전복되어 침수할 위험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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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가미급 3번함 스즈야
결국 이 문제는 제4함대사건에서 함수부 외판이 떨어지고 균열이 발생하는 큰 사고를 겪은 후 추가로 벌지를 부착하면서 배수량을 2,000톤 이상 늘려서 부력을 강화하고 함체도 강화하면서 겸사겸사 함내 구성도 바꾸면서 개선했다. 물론 이 과정에서 37노트의 속도는 35노트로 줄어들었다. 준공중이던 3번함 스즈야, 4번함 쿠마노는 그런 개량을 해서 나왔고 보일러도 함본대형 보일러 8개 소형 보일러 2개였던게 대형 보일러 8개로 만들면서 흡기구를 줄이고 굴뚝을 줄여서 자료에 따라서는 따로 스즈야급이라고 분류하기도 한다.
  • 성능을 늘리기 위해서 당시 기술력으로는 아직 실험단계였던 전기용접을 건조시에 대량으로 사용했다. 전기용접 자체는 기존의 리벳 접합식보다 중량을 경감하고 접합도 튼튼하며 작업속도도 빠르지만, 당시 미국도 그러한 관점에서 전기용접을 전적으로 사용한 결과가 리버티급 수송선이였다.[15][16]
상정된 최고속도인 37노트를 내려고 하면 함체 전체가 부르르 떨리거나, 항해한지 얼마 지나지도 않았는데 용접면을 포함한 선체 각부에 균열이 발생하는 등 큰 문제가 발생했다. 역시 이 문제로 인해 다시 도크에 들어가서 벌지를 부착하는 작업과 함께 균열이 일어난 부위를 교체하고 다시 용접을 실시했다.
  • 3, 4번 주포탑이 종종 선회불능이 되는 등 사용이 힘들었다. 이는 선체 중앙부에 한 계단 더 높은 고각포 갑판을 강도 갑판(피칭, 롤링시 인장력을 견디는 갑판)으로 하고 이 전후단을 3, 4번 주포탑의 바벳에 직결한 구조를 채택한 탓에, 온도 변화에 따라 일어나는 선체의 신축이 그대로 포탑으로 전해져서 포탑이 작동하지 못하게 한 것이 이유였다. 즉 뜨거운 햇빛을 몇 시간 맞으면 그냥 주포탑 2개를 못쓰게 되므로 화력이 격감한다. 결국 이 문제도 고각포 갑판과 바벳을 분리하는 작업을 실시해서 해결했다.

6. 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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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2년 6월 6일, 미 해군 항공대의 공습을 받아 침몰 직전의 미쿠마.[17]
어찌되었든 겉으로 보기에는 훌륭한 중순양함이었으므로 모가미급은 개전하자마자 중순양함으로 사용되었다.

6.1. 모가미의 함생


1번함 모가미는 네덜란드의 인도네시아 식민지를 공격하는 임무에서 자바 섬에 상륙하는 선단을 호위하던 중, 미국의 중순양함인 휴스턴이 습격해오자 어뢰를 휴스턴을 향해 날렸는데, 정작 목표물은 명중시키지 못하고 아군의 수송선만 몇 척 격침시켰다. 게다가 그 중 한 척은 상륙부대의 기함인 신슈마루라는 '''일본군 육군 소속 강습상륙함'''이었고, 이 배에는 자바 방면 육군 사령관 이마무라 히토시가 승좌하고 있었기에 육군 사령관이 바다에 빠지는 대형 사고를 만들었다. 당시 일본군의 육해군 대립을 생각해보면 난리가 나도 아주 큰 난리가 날법했지만 물에 물탄듯 넘어갔다. 자바 해전에선 육군이 요청한 것 이상으로 해군이 대대적으로 상륙지원을 해주었고, 이에 육군 지휘관인 이마무라가 없는 일로 치자며 넘어가주었기 때문이다.
1942년 4월, 모가미가 속한 제7전대는 제4전대와 함께 나구모 함대의 일원으로 실론 해전에 참가, 여객선과 증기선 등을 격침시켰다.
미드웨이 해전에서 모가미급 중순양함 2번함 미쿠마를 들이받아 손상을 입혔다. 다만 모가미의 책임이라고 하기 뭐한게, 기함이었던 모가미급 4번함 쿠마노가 코앞에서 미 해군의 잠수함을 발견하고 충돌을 피하기 위해 급히 항로변경 명령(좌현 45도 변침)을 내렸는데, 잠수함과 충돌할까봐 좌현 90도로 변침해버렸다. 쿠마노도 "좌현 45도 변침"이라는 신호를 다시 보내기는 했지만, 똑같은 신호를 두 번 보내는 바람에 "아까 보낸 지시를 확인하나 보다"라고 판단한 제7전대가 그냥 좌현 45도로 키를 꺾었기에 대혼란이 일어난 것. 어쨌든 명령대로 했다가 쿠마노와의 충돌 코스로 들어간 3번함 스즈야는 급히 우현으로 항로를 틀어서 충돌을 면했고, 미쿠마도 좌현으로 급선회해서 쿠마노와의 충돌을 피했다. 그러나 가장 뒤에서 따라가던 모가미는 쿠마노를 신경쓰다가 미쿠마를 놓쳤고, 결국 두 배는 충돌하고 말았다. 이 충돌로 인해 미쿠마는 속도가 떨어지면서 미군에게 따라잡혀 공습을 당했고, 산소어뢰가 유폭을 일으켜 침몰로 이어졌다. 자세한 내용은 링크 참조.#
간신히 살아돌아온 모가미도 손상을 입어서 대수리가 필요하자, 정규 항공모함의 손실로 인한 항공력 보충을 위해 모가미의 후방을 개조해서 작은 비행갑판을 깔고 수상기를 운영하는 항공순양함을 만들었다. 이는 이세급 전함을 항공전함으로 만든 것과 마찬가지의 이유였다. 하지만 일본군의 능력으로는 항공순양함이나 항공전함에 실릴 함재기를 양산하고 거기에 맞는 조종사를 배치하는 것도 힘들었기 때문에 함재기가 없는 항공순양함이 되어 사실상 별 쓸모도 없게 되었다. 이후 수송선단 호위에 종사하다가 1943년 11월 5일 항공모함 사라토가의 함재기들의 공습을 당해 500파운드 폭탄을 맞고 화재가 발생, 19명이 전사했다.
필리핀 해 해전에서는 항공모함 히요를 호위했으나, 히요는 미군의 공습으로 침몰했다.
레이테 만 해전에서는 조공이자 구식 수상함 위주로 구성된 니시무라 함대에 배속돼서 수리가오 해전에 참여했다가 매복한 미군의 집중포화를 얻어맞고 상부구조물이 개발살난 상태에서 간신히 후퇴했으나, 지원함대 소속인 묘코급 중순양함 나치와 충돌하면서 손상을 추가로 입고 미군이 다시 추격을 개시하자 더 이상 도망쳐봤자 소용없음을 깨닫고 자침하는 것으로 한심한 함생을 마쳤다.

6.2. 자매함들의 함생


2번함 미쿠마는 자바 섬에 상륙하던 선단을 호위하던 중, 미군 중순양함 휴스턴에게 피격되어 6명이 전사하고 11명이 부상당했다. 모가미가 휴스턴을 잡겠다고 어뢰를 발사했다가 '''일본군 수송선들을 무더기로 침몰시킨 팀킬'''을 벌인 바로 그 전투다. 이후 미드웨이 해전에 참가했다가 모가미와 충돌하면서 큰 피해를 입었고, 후퇴하던 중인 1942년 6월 5일에 미군의 공습을 당했으며, 리처드 E. 플레밍이 탄 빈디케이터를 대공사격으로 대파시켰지만 플레밍은 불덩어리가 된 비행기를 몰고 미쿠마를 들이받아 후부 포탑을 대파하고 전사한다(이런 자폭은 없었다는 주장도 있다.). 이후 미쿠마와 모가미는 6월 6일에 엔터프라이즈와 호넷의 함재기들에게 공습을 당했고 모가미는 6발, 미쿠마는 5발의 폭탄을 맞았다. 그러나 모가미는 산소어뢰를 버린 반면에, 미쿠마는 그러지 않았기에 산소어뢰가 유폭했고 결국 침몰했다.[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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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번함 스즈야 : 항목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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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번함 쿠마노 : 항목 참조.

7. 평가


의도하지 않게 경순양함 설계 사상을 바꾸어 버렸으나 정작 당사자인 일본은 이를 깨닫지 못하고 중순양함으로 교체하였으나 별 활약도 못한 함선. 정작 이런 경순양함의 대형화로 재미를 본 것은 영국과 미국이니 결과적으로는 모가미급은 일본의 경순양함들에게까지 민폐를 끼친 셈이다.
게다가 건조과정에서부터 상당한 문제점이 나타났으며 이걸 해결하려고 많은 비용과 노력을 들여서 다시 개보수하는 일이 잦았고 후기에는 항공순양함으로 개장까지 했는데도 불구하고 실전에서의 결과가 한심해서 모든 비용과 노력이 허공으로 사라졌다는 것은 모가미급의 평가를 더더욱 깎아먹었다. 모가미급을 본 미군과 영국군이 크고 아름다운 경순양함을 잔뜩 건조하는 바람에 남 좋은 일만 시켜줬다는 것은 덤이다.
'''와레 아오바'''로 유명한 아오바와 비교되기도 하나, 와레 아오바 일화에 신빙성이 없음이 밝혀진 후에는 그렇지도 않다. 전쟁기간 내내 수많은 수훈을 세운 아오바와, 팀킬만 일삼은 모가미급은 비교 자체가 안된다.
이젠 아예 트롤러 라고도 불린다.

8. 대중매체에서의 모가미급


네이비필드에서는 경순양함, 중순양함, 항공 순양함 사양이 모두 등장한다. 함포전우선으로 디자인된 게임 성격상, 그리고 일본 군함에 공통적인 실전에서의 문제는 게임에 거의 반영되지 않기에, 성능이 꽤 좋은 배로 여겨졌다.
배틀스테이션 시리즈에서 2번째 중순양함으로 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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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드 오브 워쉽일본 순양함 트리의 8티어로 나온다. 위 모델링처럼 155mm 3연장포나 203mm 연장포를 장착할 수 있다. 203을 쓰면 평범한 일본 중순양함이지만, 155를 쓰면 워쉽 내에서 2번째로 많은 포문 수를 자랑하는[19] 커다란 경순양함이 된다. 일본 트리 특유의 고화력 고폭탄과[20] 고폭탄 관통력을 올려주는 함장스킬과 조합하면 매 사격마다 뼈저리게 아픈 데미지를 입힐 수 있다.
콘솔 버전인 월드 오브 워쉽 레전드에서는 최종 7티어 순양함으로 나오며 203mm 연장포만 사용가능한 중순양함으로 나온다.
함대 컬렉션 같은 경우에도 굉장히 애매한 포지션의 중순양함으로 나왔다. 연비는 후루타카/카코 자매에게 밀리고, 성능으로는 타카오급 4자매에게 밀리고, 그나마 항공순양함으로서의 메리트도 if 개장이 나온 토네/치쿠마 자매에게 밀린다. 게다가 일반해역 드랍으로 자주 튀어나오는 모가미를 제외하면 미쿠마/스즈야/쿠마노 모두 쓸데없이 레어도가 높아서 관련 퀘스트나 해역 고정 루트의 발목을 잡는 주범이 되었다. 다만 스즈야, 쿠마노의 경우 2차 개장+경항모로의 컨버트 개장이 이루어지면서 재평가되었다. 나머지 자매함은 모가미, 미쿠마 항목 참조.
Naval front line에서 일본트리 경/중 순양함으로 나온다. 경순양함 모가미와 중순양함 모가미가 공존하는데 경순양함 모가미를 얻고 난 뒤 개조하면 중순양함 모가미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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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val Creed:Warships에서 4티어 프리미엄 순양함으로 나온다, 155mm와 203mm를 자신의 입맛대로 선택이 가능하고 어뢰또한 좋은성능을 지녔으나 물장에 후방을 보는 어뢰각이 크게 붙잡는 함선, 잘 운용하면 장거리 포격으로 적함에게 곶통과 화재를 안겨주는 불뿌리개, 못몰면 포탄 맞고 단번에 터지는 폭죽이 되는 함선.
전함소녀에서 모가미, 미쿠마, 스즈야, 쿠마노가 모두 등장한다. 개장하면 항공순양함이 된다.
벽람항로에서는 대형이벤트 '홍염의 방문자'에서 모가미미쿠마가 같이 나왔고
이후에 스즈야, 3주년 기념 방송 때 쿠마노까지 공개되면서 모든 자매함이 나왔다.
모가미와 미쿠마는 경순으로 모가미는 개장시 중순으로 분류, 스즈야는 처음부터 중순버젼으로 나왔다.
워 썬더에서도 1.91 업데이트로 추가되었다.
어비스 호라이즌에 1번함인 모가미와 2번함 미쿠마가 등장한다.
Hearts of Iron IV에서 1936년형 일본 경순양함, 중순양함으로 경 모가미급과 중 모가미급이 등장한다.

9. 관련 서적


  • 군함 이야기 - 허홍범
  • 미드웨이 해전(원제 Shattered Sword) - 조너선 파셜, 앤서니 털리[21]

10. 관련 문서



[1] #[2] #[3] 모가미급 실제 만재배수량 정보[4] 전쟁 후반엔 50정으로 증설[5] 당시 일본군은 함명 명명방식상 중순양함은 산의 이름, 경순양함은 강의 이름을 따서 이름을 지었다. 이는 아래에서도 서술되었듯이 중순양급급인데도 대외적으로는 경순양함으로 발표했던 것이 그 이유로 후속함인 토네급 중순양함 또한 강 이름을 따서 함명을 지었다.[6] 잘 보면 3연장 주포를 단 경순 시절이다.[7] 처음 사용했던 주포와 주포탑은 야마토급 전함의 부포로 사용되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야마토의 방어력에 심각한 문제가 발생하게 된다. 자세한 내용은 야마토급 전함 참고[8] 당시 해군성의 해군 건설 국장(Director of Naval Construction)은 이에 대해서 배를 마분지로 만들었거나 거짓말을 하고 있는게 분명하다고 이야기했다고 한다.[9] 영어 위키피디아에서는 브라운의 'Nelson to vanguard'를 출처로 제시하고 있다.[10] 히에이도 연습전함인채 태평양 전쟁에 참전했고 연습전함인 채 최후를 맞이했다.[11] 취역시기 기준.[12] #[13] 이 시점에서 조약은 효력을 상실했으므로 제한이 없음.[14] 영문 위키피다아에서는 초기 설계는 9,600톤이지만 실제로 건조했더니 11,169톤을 넘겼다고 하고 출처로 브라운의 'Nelson to vanguard'를 제시하고 있다.[15] 전기용접은 용접봉 선정, 전류, 전압, 용접속도에 따라 품질이 천차만별이 되기 때문에 철저한 관리감독과 용접사의 실력이 필요하다. 현재도 비숙련 용접사와 숙련 용접사가 동일한 용접기와 용접봉을 사용해도 품질에 격차가 있다.[16] 기갑장비는 이런문제가 해결이 되었는지 전기용접을 잘만 사용했다. 특히 독일의 실력이 뛰어나 독일의 전차를 노획한 연합국은 독일 기술에 대해 감탄을 금치 못하였다.(기록이 남아있는 건 3호전차) 물론 이럴 수 있던 배경에는 연합국처럼 용접을 기계를 이용한 자동용접을 하지않고 숙련된 용접사에게 일을 맡겨서 진행했었던 뒷사정이 있었다. 제품 품질에 신경을 쓰다보니 연합국처럼 비숙련 용접사 또는 급조한 용접사들을 적극적으로 쓰지 않았다. 덕분에 성능은 좋았을지언정 생산성은 바닥이었다.[17] 사진을 자세히 보면 어뢰 유폭의 여파로 선체 측면에 어뢰발사관이 삐져나와 있는 것이 보인다.[18] 미군과 일본군 모두 플레밍의 최후 공격을 목격했고, 플레밍은 사후에 명예 훈장을 수여받았다. 다만 플레밍이 정말로 미쿠마를 들이받았는지는 아직도 논쟁중이다.[19] 미국 경순양함 트리의 헬레나와 공동 2위. 1위는 프랑스 7티어 전함 리옹으로 무려 16문이나 탑재했다.[20] 155mm인데도 타국가 203mm 고폭탄에 근접한 화력을 낸다[21] 후반부에 모가미와 미쿠마의 충돌사건 및 뒤이은 미군 공격대와의 전투경과 서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