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남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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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3. 11. 30 ~ 2006. 7. 2.
대한민국 바둑계의 최고 원로. 한국 바둑의 개척자로 평가받는다. 조남철-김인-조훈현-이창호-이세돌로 이어지는 대한민국 바둑 최강자 계보의 시초이다.[1]
1956년 초대 국수전 우승[2]
1983년 九단 승단 (특별승단)
1984년 한국기원 명예이사장
1989년 은관문화훈장[3]
1994년 제18기 국기전 최고령 본선진출(당시 나이 71세)
1997년 명지대학교 바둑지도학 교수
2000년 6월 1일 국가유공자 지정[4]
2006년 7월 2일 사망
2006년 7월 4일 금관문화훈장 추서
2006년 사후 '''대국수(大國手)''' 칭호 헌정
전라북도 부안군 줄포면에서 1923년 11월 30일 태어나 1937년 교동보통공립학교를 졸업했다.[5] 생년을 보면 알수있듯 일제강점기, 8.15 광복, 한국전쟁이라는 한국 현대사의 질곡을 모두 겪었으며 이러한 사회적 급변에서도 바둑외길을 걸어왔다. 한국전쟁때는 피난보따리에 생필품이 아닌 기보를 챙겨 다녔다는 일화도 유명하다. 조국수가 없었다면 한국의 바둑이 지금과 같은 위상을 갖추기는 거의 불가능 하였을 것이다.
한성기원(現 한국기원) 설립자. 일본의 기타니 미노루 九단의 문하생 출신. 우리나라 세번째 九단. 참고로 우리나라 최초의 九단은 조훈현 九단이다. 90년대 이전까지만 하더라도 우리나라의 승단은 과거 한중일 3국중 가장 어렵다고 정평이 나있었고 단의 권위또한 가장 높았다.[6] 조훈현 九단이 최초의 九단이 된 것은, 조남철 九단이 八단으로 승단한 후(대략 1960년대 초중반) 승단 대회에 출전하지 않고 바둑 보급에 힘썼기 때문이다.[7] 그렇지 않고서야 당대 최강자가 八단에서 20여년동안 머무를 턱이 없었다.
조훈현 九단이 승단대회를 통해 九단 승단이 확실시되자 한국기원 일각에서는 이제라도 조남철 국수에게 특별승단을 통해 九단 승단을 했어야 한다는 주장 또한 제기되었지만, 이행되진 않았다. 1982년 조훈현이 九단에 오르고, 1983년 김인이 두번째로 九단에 오른 뒤, 그제서야 조남철도 특별 승단 형식으로 九단에 올랐다.[8]
조남철은 조치훈 九단과 같은 집안이며, 조치훈의 숙부이다. 참고로 이 집안은 프로기사를 여럿 배출했는데 조상연 七단, 최규병 九단, 이성재 九단, 최영찬 二단 등이 조남철 집안의 기사들이다. 관련기사
해방 당시까지 우리나라 바둑은 대부분 순장바둑[9] 이었는데, 조남철 九단이 일본식 규칙을 강력하게 주장해서 현재에 이르게 되었다. 물론 순장바둑에서도 최강자.
초대 국수위에 올라 국수위를 9연패하는 등 한국바둑의 초장기에는 그야말로 적수가 없던 최강자였다. 일본 유학을 다녀온 김인이 등장하며 최강자에서 물러났으며, 신인 서봉수에게 패하며 '서봉수가 3단만 되었어도...'라고 말했던 일화도 유명하다.
2006년 7월 2일 노환으로 임종했다. 향년 82세. 돌아가셨을 때 국가로부터 금관문화훈장과 한국기원/동아일보로부터 대국수(大國手) 칭호를 받았다. 대한민국의 유일무이한 대국수인 셈.
바둑에 관한 여러가지 일화가 있다.
어느날, 어떤 기자가 "선생님, 바둑을 잘 두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라고 물었더니, '''"바둑 잘 두는 방법? 그런거 있으면 나 좀 가르쳐 주게"'''라고 되물었다고 한다.
전성기시절에는 한참 수읽기를 하다가 갈!이라고 외치며 바둑돌을 바둑판에 소위 두드렸는데 심심치 않게 바둑돌이 부서졌다고 한다.
한국기원이 아직 생기기 전에 명동에서 송항기원을 운영하고 있었는데, 조훈현과 그의 아버지인 조규상 씨가 방문했다. 목포에서 온 어린아이와 3시간 동안 바둑을 두어 이겼더니 그 꼬마가 우는 것을 보고 다시 한번 두었다고 한다.[10]
이렇게 두 판을 두고 조훈현의 기력을 강한 8급으로 인정해 주었다고.
여담으로 상대전적은 조남철 九단 기준으로 4승 15패이다.
국내 최초 바둑 입문서인 위기개론, 바둑첫걸음, 바둑에 살다 등 26권을 비롯하여 행마의 기초, 행마의 급소 등 이론서를 내놓았다. 일본어 일색이던 바둑용어를 단수, 빵때림, 끝내기 등 우리 말로 바꾼 것으로도 유명. 나중에 '''걸어다니는 바둑법전'''이라는 별명이 붙었다.
1960년대부터 70년대 까지 상황이 다 끝나서 도저히 역전이 불가능한 상황에서 자조적으로 던지는 말로 쓰던 표현이다. 이후에 이것이 '조훈현이 와도 안 돼', '이창호가 와도 안 돼', '이세돌이 와도 안 돼', '알파고가 와도 안 돼'로 발전.
쉽게 말해서 바둑의 신이 와도 안 된다는 표현.
- 조남철이 일본에서 유학하던 시절. 조남철(오른쪽 여성 대국자 뒤편의 소년)이 다른 원생들과 대국을 지켜보고 있다.
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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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3. 11. 30 ~ 2006. 7. 2.
대한민국 바둑계의 최고 원로. 한국 바둑의 개척자로 평가받는다. 조남철-김인-조훈현-이창호-이세돌로 이어지는 대한민국 바둑 최강자 계보의 시초이다.[1]
1956년 초대 국수전 우승[2]
1983년 九단 승단 (특별승단)
1984년 한국기원 명예이사장
1989년 은관문화훈장[3]
1994년 제18기 국기전 최고령 본선진출(당시 나이 71세)
1997년 명지대학교 바둑지도학 교수
2000년 6월 1일 국가유공자 지정[4]
2006년 7월 2일 사망
2006년 7월 4일 금관문화훈장 추서
2006년 사후 '''대국수(大國手)''' 칭호 헌정
2. 상세
전라북도 부안군 줄포면에서 1923년 11월 30일 태어나 1937년 교동보통공립학교를 졸업했다.[5] 생년을 보면 알수있듯 일제강점기, 8.15 광복, 한국전쟁이라는 한국 현대사의 질곡을 모두 겪었으며 이러한 사회적 급변에서도 바둑외길을 걸어왔다. 한국전쟁때는 피난보따리에 생필품이 아닌 기보를 챙겨 다녔다는 일화도 유명하다. 조국수가 없었다면 한국의 바둑이 지금과 같은 위상을 갖추기는 거의 불가능 하였을 것이다.
한성기원(現 한국기원) 설립자. 일본의 기타니 미노루 九단의 문하생 출신. 우리나라 세번째 九단. 참고로 우리나라 최초의 九단은 조훈현 九단이다. 90년대 이전까지만 하더라도 우리나라의 승단은 과거 한중일 3국중 가장 어렵다고 정평이 나있었고 단의 권위또한 가장 높았다.[6] 조훈현 九단이 최초의 九단이 된 것은, 조남철 九단이 八단으로 승단한 후(대략 1960년대 초중반) 승단 대회에 출전하지 않고 바둑 보급에 힘썼기 때문이다.[7] 그렇지 않고서야 당대 최강자가 八단에서 20여년동안 머무를 턱이 없었다.
조훈현 九단이 승단대회를 통해 九단 승단이 확실시되자 한국기원 일각에서는 이제라도 조남철 국수에게 특별승단을 통해 九단 승단을 했어야 한다는 주장 또한 제기되었지만, 이행되진 않았다. 1982년 조훈현이 九단에 오르고, 1983년 김인이 두번째로 九단에 오른 뒤, 그제서야 조남철도 특별 승단 형식으로 九단에 올랐다.[8]
조남철은 조치훈 九단과 같은 집안이며, 조치훈의 숙부이다. 참고로 이 집안은 프로기사를 여럿 배출했는데 조상연 七단, 최규병 九단, 이성재 九단, 최영찬 二단 등이 조남철 집안의 기사들이다. 관련기사
해방 당시까지 우리나라 바둑은 대부분 순장바둑[9] 이었는데, 조남철 九단이 일본식 규칙을 강력하게 주장해서 현재에 이르게 되었다. 물론 순장바둑에서도 최강자.
초대 국수위에 올라 국수위를 9연패하는 등 한국바둑의 초장기에는 그야말로 적수가 없던 최강자였다. 일본 유학을 다녀온 김인이 등장하며 최강자에서 물러났으며, 신인 서봉수에게 패하며 '서봉수가 3단만 되었어도...'라고 말했던 일화도 유명하다.
2006년 7월 2일 노환으로 임종했다. 향년 82세. 돌아가셨을 때 국가로부터 금관문화훈장과 한국기원/동아일보로부터 대국수(大國手) 칭호를 받았다. 대한민국의 유일무이한 대국수인 셈.
3. 일화들
바둑에 관한 여러가지 일화가 있다.
3.1. 바둑 잘 두는 법
어느날, 어떤 기자가 "선생님, 바둑을 잘 두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라고 물었더니, '''"바둑 잘 두는 방법? 그런거 있으면 나 좀 가르쳐 주게"'''라고 되물었다고 한다.
3.2. 바둑돌 부수기
전성기시절에는 한참 수읽기를 하다가 갈!이라고 외치며 바둑돌을 바둑판에 소위 두드렸는데 심심치 않게 바둑돌이 부서졌다고 한다.
3.3. 조훈현과의 만남
한국기원이 아직 생기기 전에 명동에서 송항기원을 운영하고 있었는데, 조훈현과 그의 아버지인 조규상 씨가 방문했다. 목포에서 온 어린아이와 3시간 동안 바둑을 두어 이겼더니 그 꼬마가 우는 것을 보고 다시 한번 두었다고 한다.[10]
이렇게 두 판을 두고 조훈현의 기력을 강한 8급으로 인정해 주었다고.
여담으로 상대전적은 조남철 九단 기준으로 4승 15패이다.
3.4. 저서와 별명
국내 최초 바둑 입문서인 위기개론, 바둑첫걸음, 바둑에 살다 등 26권을 비롯하여 행마의 기초, 행마의 급소 등 이론서를 내놓았다. 일본어 일색이던 바둑용어를 단수, 빵때림, 끝내기 등 우리 말로 바꾼 것으로도 유명. 나중에 '''걸어다니는 바둑법전'''이라는 별명이 붙었다.
3.5. 조남철이 와도 안 돼
1960년대부터 70년대 까지 상황이 다 끝나서 도저히 역전이 불가능한 상황에서 자조적으로 던지는 말로 쓰던 표현이다. 이후에 이것이 '조훈현이 와도 안 돼', '이창호가 와도 안 돼', '이세돌이 와도 안 돼', '알파고가 와도 안 돼'로 발전.
쉽게 말해서 바둑의 신이 와도 안 된다는 표현.
[1] 조남철과 김인은 완벽한 독주체제였고, 조훈현에게는 서봉수라는 반발짝 뒤에서 쫓아오는 경쟁자가 있었다. 이창호 역시 유창혁이라는 경쟁자가 있었고 전성기가 지났음에도 노익장을 불태우는 스승 조훈현은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이세돌은 1인자라 부르기에 부족함은 없었지만 최철한, 박영훈 등을 상대로 압도적 우위를 점하지는 못했다. 이는 한국바둑의 저변이 활성화되고 발전하면서 선수층 역시도 두터워졌다는 것을 보여주는 역사다.[2] 초대대회 포함 9연패 달성[3] 당시 조훈현 九단이 예상을 뒤엎고 1회 응씨배에서 우승하면서 대대적인 바둑열풍이 일어나자 정부에서 조훈현 九단에게 은관문화훈장을 주려고 했는데 조훈현 九단이 대한민국 바둑의 개척자인 조남철 九단이 먼저 받아야 한다는 의견을 강하게 어필했고 결국 두 사람이 같이 받게 되었다.[4] 6.25 전쟁 참전 중 부상[5] 고향의 전북 줄포국민학교를 다녔다는 기사도 있다.[6] 일반대국이 아닌 승단대국에서는 프로끼리 단에 따라서 돌을 접어두고 대국을 했고 신문기전의 1차예선은 저단자들끼리두고 고단자들은 2차예선부터 출전하였다.[7] 다른 프로기사들과 단수 차이가 너무 많이 난 것에 부담을 느낀 것도 있다.[8] 참고로, 이 두분의 조국수 이전에 이승만 재임시절 그에 대한 아첨으로, 이승만이 九단을 받은 흑역사가 있긴 하다. 1950년대 중반 대만과의 교류전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이승만이 배려해 준 적이 있는데, 그에 대한 보답 차원에서 나온 일이다. 자유당 3인자였던 장경근이 바둑광이라 한국기원 이사장을 지내기도 했는데 이 연줄로 이루어진 일.[9] 17수까지 고정된 포석을 두고 시작하는 전통 바둑. 현재는 사장되었다.[10] 별일 아닌 것 같지만, 당시부터 조국수로 불리던 한국 바둑계의 거성이 어린이와 바둑을 3시간이나 둔 것도 모자라 한 번 더 두는건 놀라운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