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수전
[image]
1956년 제1기 국수전 출범식 기념사진. 가운데 앉은 사람이 각천 최두선 당시 동아일보 사장이다.
國手戰
1. 역사
국내 바둑 기전인 국수전을 말하는 것으로 한국에서 시작한 최초의 정식기전이다. 주최사는 동아일보로 그 시작은 1956년부터 시작되었으며 후원사는 기아자동차.
[image]
1966년 국수전 도전국 복기 장면. 오른쪽은 그 유명한 조남철, 왼쪽은 그의 아성을 깬 김인. 김인은 조남철의 10년 권좌를 무너뜨렸다. 결승대회는 운당여관에서 진행되었다. 결정국은 당시 백번이었던 김인의 반면 2집[1] , 총 6집반승을 거두었다.
1956년 당시 정식 명칭은 '''국수 제1위전'''. 제1기 대회에는 조남철 九단[2] 이 전승으로 국수에 등극했고, 이후 10년 가까이 국수전 반상을 지배하게 된다. 당시 국수전은 엔터테인먼트가 절대 부족한 전후 한국에 가장 큰 재미였으며, 現 일민미술관이자 당시 동아일보 사옥이었던 광화문 네거리 앞은 국수전 실황 중계로 인산인해였다.[3]
[image]
1969년 제13기 국수전의 야외 공개해설. 지금의 일민미술관인 동아일보 舊사옥 앞에서 진행되었다. 사진 중앙의 세모꼴 기와지붕은 고종 황제 즉위 40년 칭경 기념비전으로 지금도 그 자리에 남아있다. 왼쪽 검은 지붕 자리는 1966년에 완공된 광화문 지하보도 출구로, 지금의 수도권 전철 5호선 광화문역 출구다.
당시 그의 권좌를 깨러 등장했던 김인은 1대 3이라는 끔찍한 전적에 실망하고 곧바로 도일하여 공부를 계속한다. 귀국 직후 가진 국수전에서는 곧바로 조 국수를 꺾어 김인 시대를 개막한다.
[image]
1972년 제16기 국수전 도전 4국. 왼쪽이 김 국수, 오른쪽이 윤기현 기사. 장소는 최고위전과 마찬가지로 운당여관에서 열렸다.
이후 국수전 반상은 김 국수가 점령하게 된다. 약 7년여간 타이틀을 방어한 김 국수는 1972년 제 16기 국수전에서 새롭게 등장한 윤기현을 꺾지 못하고 자리를 내주게 된다. 이 시기부터 본격적인 반상의 군웅할거가 시작되었다.
[image]
1972년 제16기 국수전 도전국 계가 직후. 오른쪽이 조 국수의 권좌를 무너뜨린 김인 국수. 왼쪽은 신예로 등장한 윤기현 九단. 윤 국수의 저지로 김 국수의 7년 치세는 막을 내렸다.
2. 폐지
한국 바둑의 전설들이 한데 모인 역사적인 대회를 동아일보[4] 는 계속 유지하려 하고 있으나 한국기원은 방관 상태. 프로바둑기사 김영삼, 조혜연, 송태곤 등 SNS하는 기사들이 공히 2016/2017 국수전 예선 모집이 취소[5] 된 상태라서 알려지기 시작했다가 나중에 기아차가 후원을 끊은 것이 알려진 것이다.기사
조선일보와 중앙일보 공히 국수전은 후원사(기아차)의 후원 중단 통보로 기전이 중단되었다고 기사를 냈다. 기사 기사2 동아일보는 국수전을 해볼 생각은 있었던 것 같으나, '''기아자동차가 후원을 철회'''했고 경기 침체로 후원사가 나오지 않아 제 60회 대회가 미뤄지고 있으며 다음 후원사를 찾지 못하면 jTBC 생기기도 전에 사라진 왕위전과 마찬가지로 채널A 중계조차 한 번도 못한 채 사실상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질 수도 있다.
동아일보에서 기전 중단을 계속 부인했으나, 2017년 들어서도 기아자동차의 대체 후원사를 전혀 구하지 못하여 공식 폐지되었다. '''한국기원에서도 공식적으로 폐지 기전 항목에 편입'''하여서 완전 폐지가 확정되었다. 공식 폐지를 인정한 동아일보는 알파고 vs 알파고 기보를 동아일보에 전재하는 것으로 '''바둑 란을 대체해버렸다.'''
3. 상금 규모
2010년 기준으로 총상금 한화 4억5000만원, 우승자에게는 4500만원, 준우승자에게는 1/3수준의 상금이 돌아갔다.
4. 대회 방식
1956년의 첫 대회에서는 참가한 기사들이 리그전을 치뤘으나 차회부터는 일종의 플레이오프제인 도전기 방식을 채용하여 전 대회 국수에게는 자동으로 도전기에 진출하여 타이틀 방어전을 갖는 형식을 취했다. 도전기는 더블 엘리미네이션 방식으로 치뤄지며, 최종 결승전인 도전자 결정전은 3전 2선승제로 진행한다. 브라켓 리셋은 없었다. 이 결승기에서 직전 대회 우승자가 단 한번도 이기지 못하고 방어에 실패할 경우에는 빼도박도 못하고 전패준이 되어 버린다. 첫 도전기는 무려 '''13전 7선승제(!!!)'''였으며 그 다음부터는 7전 4선승제 방식을 쓰다가 5전 3선승제 방식으로 정착되었다. 한때는 3전 2선승제를 채택한 적이 있으나 현재는 5전 3선승제로 돌아왔다.
2009년 한정으로 이세돌 기사의 휴직과 관련하여 2008년의 우승자였던 이세돌 기사의 타이틀을 반납받으면서 도전기 방식을 치룰 수 없게 되자 토너먼트 우승자가 바로 타이틀을 획득하는 방식을 채택하였다.
5. 전패준
역사가 오래되었고 도전기라는 대회 방식 때문에 전패준이 나온 경우도 많은데, 총 6회가 나왔다. 그런데 전패준은 이전 대회 우승자만이 달성할 수 있는 기록이기에, 여기에 이름을 올렸다는 이야기는 최소한 국수전에 우승해서 '국수' 타이틀을 한번은 보유했다는 의미가 되기도 한다. 그리고, 전패준에 대해서는 조훈현 九단이 어마어마한 활약을 했는데, 일단 본인이 2번이나 기록했다. 뿐만 아니라, 조훈현은 3번이나 상대방에게 전패준을 안겨 주기도 하였다. 전패준을 주고 받는 조훈현-서봉수 라이벌 관계와 조훈현-이창호 사제 관계가 무시무시하다.
6. 대회 연혁
아래의 표는 우승연혁과 우승한 기사의 당시 단수를 적는다. 년도는 결승 1국이 시작된 해 기준.[9]
7. 역대 우승자
아래는 역대 국수 칭호를 가졌던 기사들이며, 총 12명의 기사가 이 영광의 타이틀을 거머쥐었다. 기록 순서는 최초 타이틀을 딴 번기의 오름차순으로 정렬함을 기준으로 한다.
[1] 덤을 적용하지 않은 상태에서 계가된 결과의 경우 '반면'이라는 용어를 쓴다. 만약 당시 김인이 흑번인 상태에서 이 결과가 나왔다면 덤에 걸리게 되므로 조남철의 2집반승이 되었을 것이다.[2] 당시 기력은 四단이었다.[3] TV 보급이 매우 더뎠기에, 엄청 큰 바둑판을 걸고 수순에 따라 돌을 두는 형식이었다. 지금의 TV 바둑 중계에서 해설자들이 해설하는 형식.[4] 동아일보는 사시로 "문화주의를 제창함"이 있을 정도로 문화에 쏟는 관심이 지대하다. 그 일례로 바둑에 대한 지원이 국수전이다. 아쉽게도 채널A에선 방송을 못했지만...[5] 한국기원 서버 내에 프로기사들이 예선 등록하는 프로그램이 있다. 이 예선 등록을 해야 하는 것.[6] 3전2선승제[7] 결승 대국 기준[8] 결승 대국 기준[9] 예를 들어 43번기는 1999년에서 예선이 시작되었으나, 결승전은 다음 해인 2000년 1월 17일에 1국이 시작되었기에 2000년으로 기록함.[10] 지금도 전설로 추앙받는 전승 우승의 기록으로 남아있다. 이때는 리그전이었음에도 전승으로 우승[11] 조훈현의 3차 전관왕을 무너뜨리며 우승을 차지. 국수전 도전 10년 만에 우승한 것이라 그 자체로도 의미가 컸다. 당시 언론도 조-서 10년 대결을 특집으로 다뤘다.[12] 이창호가 3:2로 조훈현을 꺾고 타이틀을 방어. 특히 마지막 5국은 밤 11시 5분까지 가는 혈전 끝에 이창호가 반집승을 거뒀다. 1994년 당시 이창호는 무려 13개의 기전을 석권하며 사이클링 히트 기록을 세울 만큼 극강의 위력을 보여줬다.[13] 43번기는 결승이 해를 넘어감에 따라 2000년 1월 17일에 도전기 1국이 시작되었다.[14] 사상 최초로 여성기사 우승이자 외국인 기사의 우승이다. 결승 번기의 대전 상대는 국수전 최강자인 조훈현 九단, 준결승전에서는 이창호 九단을 이기고 올라왔다.[15] 52번기는 결승까지 빠르게 진행되어 도전1국이 11월 13일에 시작되었다.[16] 휴직 사건으로 인해 현재 타이틀은 반납되었다. 즉, 흑역사가 되었지만 나무위키에서는 우승했던 기록으로써 남겨둔다.[17] 이때는 이세돌 九단의 국내기전 휴직 사건으로 이세돌 九단이 결승기에 나오지 않았다. 때문에 도전기 방식을 제외하고 풀 토너먼트로 우승자를 가렸다.[18] 59기는 도전 1국이 2015년 12월 5일에 시작되었으나 도전 2국부터 해를 넘겨 진행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