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민사소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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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보의 《형정도첩(刑政圖帖)》 中 원피고가 관아에 소장, 즉 소지(所志)를 제출하는 모습

1. 개요
2. 재판기관
2.1. 중앙
2.2. 지방
3. 당사자
4. 소송의 개시
5. 변론과 증거
5.1. 변론불출석(결석판결제도, 친착결절법(親着決折法))
6. 정송제도(停訟制度)
7. 소송의 종료
7.1. 결송입안(판결문)의 내용
7.2. 법관의 자유심증 배제와 판결의 기판력
8. 상소와 삼도득신법
9. 소송물에 따른 종류
9.1. 산송(山訟)
9.2. 노비소송
10. 단송(간이재판절차, 短訟)


1. 개요


조선시대 민사소송을 다루는 문서이다. 조선시대에는 ''''사송(詞訟)''''이라고 불렀다.[1]
조선 초만 하더라도 소송은 유교적 가치관으로 정립된 근린 사이를 해친다고 보았기에 무송(無訟)을 능사(能事)라고 생각했으나, 후대로 갈수록 권리관계가 복잡해지면서 청송(聽訟)을 중요시 여기게 되었고 다양한 유형의 소송이 벌어졌다.

子曰: 聽訟, 吾猶人也. 必也使無訟乎! (자왈 청송 오유인야 필야사무송호!)

송사를 듣고 결단하는 데 있어서는 나 또한 남과 같이 잘 할 수 있다. 그러나 내가 기필코 원하는 것은 이것이다! 사람들로 하여금 송사를 일으킬 일이 없도록 만드는 정치를 행하는 것이다.

論語 顔淵(논어 안연편)

논어에서도 무송이 만연할 때 가장 좋은 치세라고 하여 조선시대 선조들도 소송을 기피하는 경향이 있었다.

2. 재판기관


조선시대에는 행정부 산하 조직들이 왕을 최고기관으로 하여 사법부의 기능도 동시에 수행하였다.
중앙과 지방 각층의 행정기관에서 사법권을 행사하였으므로 그 심판관이 되는 관료들에게는 법전의 기초교양이 요구되었고 과거(科擧)에도 법률과목이 들어갔다. 예컨대 대과 복시(大科 覆試)에서는 경국대전(經國大典)과 가례(家禮)가 수험과목에 포함되었다.

2.1. 중앙


중앙의 민사재판기관으로서는 한성부(漢城府), 의금부(義禁府), 사헌부(司憲府), 장례원(掌隸阮)이 있었다.
한성부는 고려의 개성부제를 답습하여 경기의 과전(科田)과 관내의 토지(土地), 호구(戶口), 농상(農商), 학교(學校), 사송(詞訟) 등을 관장하였다. 형조, 의금부와 함께 사법기능을 행사하여 3법사(三法司)의 하나로도 불렸다.
그리고 장례원(掌隸阮)이 있었는데 장례원은 1467년에 설립돼 노비의 부적(簿籍)과 소송에 관한 일을 관장하였다. 사헌부, 한성부와 더불어 사법삼사(司法三司)라 하였으며, 후에 형조에 편입되었다.

2.2. 지방


지방의 재판기관으로는 관찰사(觀察使), 목사(牧使), 부사(府使), 군수(郡守), 현령(縣令), 현감(縣監) 등을 들 수 있다.
이들 지방수령은 양반출신으로서 갓 발령이 난 경우, 행정과 사법의 실제에 대한 경험과 지식을 습득하지 못한 때가 많아, 실질적으로는 중인계급인 아전에 의해 재판이 이루어졌다.

3. 당사자


원고는 원고인(原告人)·원고(元告)라 하고 피고는 피론(被論)·원척(元隻)·척(隻)이라 하였다.
계급적 신분사회이면서도 차별없이 법률상 소송능력이 인정되었으며 상민이 사대부를 피고로 하여 소송할 수 있었다.
왕족이나 양반, 토호는 자신이 직접 송정(訟廷)에 출석하는 것을 싫어하여 자서제질(아들, 사위, 아우, 조카, 子婿弟姪)이나 노(奴)로 하여금 소송하게 하였다. 조선 초기에는 타인을 고용하여 소송할 수 있었는데 이를 대송(代訟)이라 하였으며 양반부녀자는 법률상 자, 서, 제, 질, 노가 대송할 수 있었다. 다만 이런 대리인을 두는 것은 출정을 안할 뿐이지, 소제기와 판결문의 수령 등 모든 소송행위는 본인의 이름으로 수행하였다. 즉 효과귀속의 주체는 어찌 됐든 본인이다. 이 때 소송대리를 전문적인 업으로 삼고 있는 외지부를 고용하기도 하였다.
또한 누구나 자유롭게 서로 소송할 수 있으나, 특히 4촌 이내의 근친간의 소송은 친목을 망각하고 미풍을 해치므로 근친존비간에 이유없이 소송을 제기하여 그 간사함이 드러난 경우에는 엄벌에 처하였다.

4. 소송의 개시


소송의 제기는 구술 또는 서면으로 하는데 소장(訴狀)을 소지(所志) 또는 소지단자(所志單子)라 하고 소지를 제출하는 사연을 발괄[白活]이라 하며 양반이 직접 자기 이름으로 제출하는 소장을 단순히 단자(單子)라고 하였다.
소지에는 주소·성명·청구취지·연월일을 기입하는 일정한 서식에 따랐다.
소송의 제기는 일정기한 내에 해야 하는데 이를 송한(訟限)이라 하며 일반적으로는 분쟁발생시부터 5년 내에 제기해야 하며 이 기한을 경과한 경우에는 누구도 다툴 수 없으며 송한 내에 소송을 제기하였더라도 다시 5년 내에 소송을 진행시키지 않으면 안 되었다.
예외로 토지·가옥·노비의 경우에 도매(盜賣)당한 경우, 소송이 계속중이며 확정판결이 없는 경우, 유산을 독점하고 있는 경우, 소작인이 농지를 지주에게 돌려주지 않고 점유한 경우, 가옥의 임차인이 집을 비우지 않고 계속 눌러사는 경우는 이를 일반사건과는 다른 중대사건으로 보아 송한의 제한없이 언제든지 소송을 제기할 수 있었다.
원고가 소지를 제출한 다음 피고가 출정하여 응소하는 소지를 제출함으로써 정식으로 소송이 개시되었는데 이를 '''시송(始訟)'''이라 하고 피고가 제출하는 답변서로서의 소지를 시송다짐(始訟侤音)이라고 하였다.
소송의 제기는 원고의 자유이지만 피고의 소환은 의무이며 피고가 3, 4차에 걸쳐 응소하지 않을 경우에 한하여 관령(官令)으로 강제로 소환하였다.

5. 변론과 증거


조선시대 민사소송은 철저하게 당사자주의, 처분권주의 & 변론주의를 따랐다. 피고가 시송다짐을 제출한 다음 원고와 피고는 각자 자기주장의 정당성을 다투기 위하여 제한없이 변론할 수 있다.
그리고 시송 후 원피고가 최초의 청구주장을 하는 문서를 제출하는데 이를 원정(原情)이라 하고 당사자는 이후 원정에서 주장한 사실의 입증을 위하여 서증(書證)과 증인(證人)을 제한없이 자유롭게 제출, 채택할 것을 주장할 수 있으며, 송관(訟官)은 필요에 따라 소송을 지휘할 뿐이며 당사자의 변론권을 막을 수 없었다.
소송에서는 각종 권리문서가 증거로서 가장 중요시되었고 송관은 주로 문서에 따라서 재판하여야 한다는 뜻에서 종문권시행(從文券施行)이라는 법언(法諺)이 지침으로써 지켜졌다. 문서의 진정성은 송관의 검증에 따라 확인되어 채택되는데 소송의 세부규칙으로서 통용되었던 청송식(聽訟式)에는 16가지에 걸친 검증절차가 규정되어 있었다.
증언의 경우에는 증인으로 하여금 진실을 증언하며 위반한 경우에는 처벌을 감수하겠다는 다짐문서를 제출하게 하였다. 소송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형세가 불리한 자는 소송을 중단시키기 위해 출정하지 않으며 소송이 지연되어 끝날 날이 없으므로 이를 방지하기 위한 친착결절법(親着決折法)이 있었다.
즉, 소송이 개시된 뒤 50일의 기간을 기준으로 해서 을이 이유없이 30일이 지나도록 출정하지 않은 반면 갑이 계속해서 21일 출정하여 출정의 징표로서 성명과 수결(手決)을 한 경우에는 계속 출정한 갑에게 승소판결을 내리는 법이다.
또한 을이 변론에서 패하여 퇴장한 경우에 갑의 출정일수가 21일에 가까우면 설령 을이 하루 이틀 출정하였더라도 그 일수를 갑의 출정일수에서 제외하지 않았다.

5.1. 변론불출석(결석판결제도, 친착결절법(親着決折法))


원래는 당사자주의를 관철하기 위해 변론을 위한 쌍방당사자의 출석을 강제하였으나 상기 지적한 바와 같이 소송지연을 방지하기 위해 결석판결제도도 인정되었다.
특히 소송당사자가 소송개시 후 출정하지 않고 도망가거나, 다른 지방으로 숨는 경우, 당사자가 그 소송관할지에 소재하지 않은 경우에 소송경제를 위해 속행을 할 수밖에 없었다. 다만 이 경우 결석당사자의 패소판결을 하였는데 이를 친착결절법이라고 한다.
경국대전 시행 전에는 없던 규정이나, 조선 건국초부터 논의는 되었다. 예컨대 노비소송의 경우, 경중(京中)에 거주하는 피고에 대해 소송을 벌인 경우, 피고가 관할지 거주하는 경우에는 20일. 근역(外方近道)에 거주하는 경우에는 1개월, 먼 타지(遠道)에 거주하는 경우 2개월 내에 응소하지 않으면 원고에게 승소판결을 선고하자는 논의가 있었다.[2]

6. 정송제도(停訟制度)


['''詞訟務停務開''']

['''原'''] 外方詞訟, 務停後·務開前 ①, 除十惡·奸盜·殺人·捉獲付官逃奴婢·仍役據奪奴婢等 ②, 一應關係風俗·侵損於人外, 雜訟並勿聽理。京中, 則惟恒居外方者, 聽歸農。其臨決觀勢, 欲歸農者, 勿聽。

① 以春分日爲務停。秋分日爲務開。

② 據執·盜耕·盜賣他人田地同。[3]

['''續'''] 遇荒年, 則本曹取旨, 行移該道, 凡推奴·徵債等項, 一切停止。

[사송의 중단과 개시]

['''원'''] 지방의 사송(詞訟)은 업무를 정지한 이후와 업무를 개시하기 이전에는 ① 십악(十惡)·강간이나 절도·살인·도망친 노비를 체포하여 관(官)으로 넘긴 경우·빼앗은 노비에게 계속 일을 시키며 점유하고 있는 경우 등 ② 일체 풍속에 관계되거나 다른 사람에게 침손(侵損)을 끼친 경우를 제외하고는 잡다한 소송은 모두 청리(聽理)하지 않는다. 서울에서는 지방에만 상주(常住)하는 자의 소송을 들어 주어 귀농(歸農)하게 한다. 소송을 판결할 때에 임박하여 형세를 보아 귀농하고자 하는 것은 들어주지 않는다.

① 춘분(春分) 날에 업무를 정지하고 추분(秋分) 날에 업무를 개시한다.

② 다른 사람의 전지(田地)를 속임수로 점유하거나 도경(盜耕), 도매(盜賣)를 한 경우에도 똑같다.

['''속'''] 흉년을 만나면 형조가 왕명을 받아 해당 도(道)에 공문을 보내 노비 추쇄(推刷), 채무 징수 등의 사항을 모두 정지하게 한다.

대전통편 형전 정송 사송무정무개(大典通編 刑典 停訟 詞訟務停務開)

소송의 진행중에 농사철을 당하면 소송을 정지하는 정송제도(停訟制度)가 있었다. 춘분부터 추분까지를 무정(務停)이라 하고 추분부터 춘분까지를 무개(務開)라고 하여 무정에는 잡송(雜訟)의 심리를 중지하여 당사자로 하여금 농사일에 전념하게 하고 농한기인 무개에 소송을 속개하였으며 무정기간에는 잡송의 소송제기도 금하였다.또 판결이 임박하였는데 형세가 불리하므로 정송을 신청한 경우에는 들어주지 않았다. 특히 오늘날의 변호사 제도와 같은 직업적인 대송인(법률대리인, 代訟人)인 외지부(外知部)의 관행이 공인되어 있었는데 이들이 소송을 지연시키므로 1478년(성종 9년) 8월부터는 엄금하게 되어 그 뒤로는 은밀히 숨어서 영업하였으며 제도로서 발전하지 못하고 말았다.

7. 소송의 종료


소송의 종료는 송관이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원피고가 남김없이 변론을 하여 소송을 종결시켜도 좋다고 생각하면 서로 합의하여 연명문서(連名文書)로 판결해줄 것을 청구하면 비로소 판결을 하였다.
판결서를 입안(立案)·결송입안(決訟立案)·결절입안(決折立案)·단결입안(斷決立案)이라고 했는데 입안을 받기 위해서는 승소자가 소송물가격에 따라 법정(法定)된 수수료인 작지(作紙)를 납부해야 했다. 작지는 백지(白紙) 또는 포목(布木)이었으며 소송물가격이 아무리 많더라도 백지 20권을 넘을 수 없었다.입안의 기재내용은 그 사건의 시초에서부터 변론종결시까지에 제출된 모든 소지, 서증, 증인의 증언내용, 중간결정문 등 모든 사실과 문서의 전문(全文) 등을 빠짐없이 소송진행의 일순(日順)에 따라 기입하고 마지막에 판결사항을 기입하였다. 따라서 큰 소송일수록 입안의 길이가 길었는데 한 예로 1661년(현종 2) 6월 19일의 한성부결송입안은 폭이 42㎝, 길이가 10.3m에 이른다.판결은 먼저 구술로 언도했는데 구술결 후 입안작성 전에 송관이 경질되면 신임관(新任官)은 구관이 내린 판결초안 그대로 입안을 작성해야 하였다. 입안이 내리면 소송은 종료되며 패소자는 다시는 승소자의 권리를 침범하지 않으며 위반한 경우에는 엄벌을 달게 받겠다는 다짐을 문서로써 제출하였다.

7.1. 결송입안(판결문)의 내용


결송입안에는 소송요지 뿐만 아니라 조서와 증거까지 전부 기재하였다. 주문은 시송다짐이라고 하여 당사자간 합의로 대체되었다.

ⓐ 판결문을 발급한 날짜와 관청(송정, 訟庭) 이름

ⓑ 소지(所志, 소장을 의미)의 내용

ⓒ 시송다짐(소송 개시에 대한 양 당사자의 합의)

ⓓ 원피고의 최초진술

ⓔ 이후 당사자의 사실 주장과 제출증거

ⓕ 결송다짐(양 당사자의 변론종결 확인과 판결요청)

ⓖ 판결(주문 포함)

이러한 기재사항 때문에 복잡한 소송에서 제출증거가 많아질 경우 결송입안의 길이도 길어졌다. 1578년 경상도 흥해군에서 이준 형제에게 발급한 판결문은 길이만 무려 32.4m에 달하였다. 그래도 법제사적으로 이 결송입안만을 가지고 소송의 전말을 확연히 파악할 수 있다는 것은 연구자로서 좋은 부분이라고 할 것이다.

7.2. 법관의 자유심증 배제와 판결의 기판력


흔히들 조선시대 재판을 두고 '원님재판'이라고 하여 인치적인 재판이 시행될 것이라 추단하는데 이는 사실이 아니다. 조선시대 재판정(송정)의 송관은 엄격하게 법정증거주의에 따라야 했고 또 판결문(결송입안)에 기속되고 법관의 자유심증(결절)도 법전을 일탈할 수는 없었다. 뿐만 아니라 확정판결이 나오면 기판력이 발생하여 당사자를 구속하였다.

"결송(決訟)의 도(道)는 무슨 신명(神明)한 견해로 하는 것이 아니고 오직 법전(法典)을 준수(遵守)하는 길일 뿐."

1698년의 청도군 결송입안 中 관찰사의 논변


8. 상소와 삼도득신법


조선은 삼심제와 유사한 득신법을 채택하였다. 수령의 판결에 불복한 경우에는 관찰사에게 항소할 수 있으며 이를 의송(議送)이라 했는데 관찰사는 사실심리를 하지 않고 자기 의견을 원심인 수령에게 지시하면 수령이 재심하였다. 의송의 결과에 불복하면 형조에 항소하고 그래도 불복하면 국왕에게 상언(上言)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상소절차는 엄밀한 의미의 심급제(審級制)가 아니고 판결의 최종적 확정은 심급과는 관계없이 따로 득신법(得伸法)에 따랐다.
삼도득신은 처음에는 초심(初審)·재심(再審)·삼심(三審)에서 승소하는 것을 의미하였다. 그러나 『대전회통 大典會通』 형전(刑典) 청리조(聽理條)에 의하면 “삼도득신이란 소송의 수리(受理)를 삼도 이내에 원척(피고, 元隻)이 재승(再勝)함을 말하는 것이다. 두 번 패소한 뒤에도 다시 기송(起訟)하는 자에게는 비리호송률(非理好訟律)로써 논죄한다.”고 하여, 세 번의 소송에서 두 번 승소하는 것으로 하였다. 가령, 한 번 패소하고 한 번 승소하게 되면 다시 송사(訟事)하고 두 번 승소한 뒤면 다시 송사함을 허락하지 않았다. 또한, 간단한 송사에서 두 번 연승하면 그 판결이 확정되었다.[4]
고려 말에는 다섯 번의 소송에서 세 번 승소한 자에게 유리한 판결을 확정하고(五決從三), 세 번의 소송에서는 두 번 승소자를 확정했으며[三決從二], 조선시대에는 처음에는 두 번의 소송에서 두 번 승소한 자를 확정시키는 이도득신법(二度得伸法)이었는데, 『경국대전』에 이르러 세 번의 소송에서 두 번 승소한 자를 확정시키는 삼도득신법(三度得伸法)으로 되었고, 숙종 37년부터는 간단한 소송인 단송(短訟)에서는 세 번 승소자를 확정하도록 하였다.

9. 소송물에 따른 종류



9.1. 산송(山訟)



고려시대만 하더라도 '남귀여가혼(男歸女家婚)'이라고 하여, 여자가 시집을 오는 게 아니라 남자가 장가를 갔다. 즉 처가살이를 하였다. 예컨대 할아버지가 서울로, 아버지가 부산으로, 아들이 대전으로 장가를 간다면, 3대가 묫자리를 원지에 쓰게 되는 것이라 '선산(先山)', 즉 종지(宗地)라는 개념 자체가 생길 수 없었다. 뿐만 아니라 고려조에는 화장이 만연했기 때문에 더욱이 그러했다.
그러나 조선시대 성리학이 보급되면서 부계의식이 확립되었고 선산을 쓰는 것에 대한 관심이 늘어났다. 16세기 이후 주자가례가 보급되면서 효를 실천하자는 차원에서 조상의 묏자리를 잘 쓸 것을 위시하였기 때문에 분묘수호에 대한 의식이 커졌다.
이것이 국내의 풍수지리와 결합하면서 소위 말하는 명당, 길지찾기 열풍이 불게 된 것이다. 사대부들은 지관을 섭외해서 명당 찾는데 혈안이었고 길지라고 얘기하면 천장(遷葬)도 서슴지 않았다. 그러나 토지 선점에 대한 열망이 커질수록 분쟁이 일어날 소지가 커졌고 이로 인해 생긴 소송이 바로 산송이다.
산송(山訟)은 일명 ‘묘지 소송’으로, 노비·전답 소송과 함께 조선시대의 3대 사송(詞訟)의 하나이다. 특히 16세기 이후 성리학적 의례의 정착과 종법 질서의 확립 과정에서 부계 분묘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높아지면서 등장하여 조선 후기 사회 전반으로 확산되었다. 조상의 분묘를 수호하는 사대부가로 산송을 겪지 않은 집안이 드물 정도로 한 시대를 풍미하였다.[5]

9.2. 노비소송


조선시대 가장 빈도가 많았던 민사소송은 바로 노비소송이다. 태종 6년(1406년) 6월만 해도 노비 문제로 소장을 낸 것이 얼마나 되냐고 물었을 때 월 12,797건이라는 보고가 올라왔을 정도였다.
노비소송은 '확인의 소'였는데 신분의 변동을 주는 소송인 만큼 당사자에게 가해지는 타격이 컸다. 대표적인 노비소송사건으로는 유학자 송익필을 피소로 하는 '안가노안(安家奴案) 사건'이 있다. 70년을 양반 사대부로 살았던 송익필을 하루 아침에 노비로 만든 판결인 만큼 그 안의 법적논증이 상당히 정교하고 공방이 치열하였다. 이 당시 피고 송익필은 송정, 즉 재판정에서 "나는 양반이로소이다"라고 외쳤던 것으로 유명하다.[6]

10. 단송(간이재판절차, 短訟)



[1] 사사로울 사를 쓰는 게 아니라 말씀 사자를 쓴다.[2] 태조실록, 제12권, 1397(태조6년) 7월 25일[3] http://db.history.go.kr/id/bj_e_019_0010[4]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삼도득신법(三度得伸法))[5]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산송(山訟))[6] 이 소송으로 송익필을 포함한 집안 사람 70명이 노비가 되었으나 전부 도망쳤고 송익필 본인도 은둔생활을 하다 1589년 친구인 정철과 함께 기축옥사를 막후에서 조종하면서 화려하게 부활하였다. 이후 사면을 받아 다시 양반의 신분으로 돌아왔고 벼슬생활을 하지않은체 1599년 세상을 떠났다. 사헌부 지평에 추증되었고 시호는 문경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