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열후

 


'''조(趙)씨 가문 10대 종주
조(趙)나라 초대 국군
열후
列侯
'''
''''''
영(嬴)
''''''
조(趙)
''''''
적(籍)
'''아버지'''
조헌자(趙獻子) 조완(趙浣)
'''생몰 기간'''
음력
기원전 ???년 ~ 기원전 400년
'''재위 기간'''
음력
기원전 408년 ~ 기원전 400년
1. 개요
2. 재위 기간에 일어난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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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趙)나라의 초대 군주.[1] 조무후의 형. 조경후의 아버지.

2. 재위 기간에 일어난 사건


조열후 원년(기원전 408년), 중산 무공(中山武公)이 삼진을 위협했는데, 그 당시 삼진 중 최약체인 조나라를 쳤다.[2][3] 이에 조열후는 위(魏)나라의 군주 위문후(魏文侯)에게 구원을 요청한다. 위문후는 장수 악양(樂羊)을 보내 조나라를 구원했고, 중산에게 빼앗긴 땅을 회복했다.[4]
조열후 2년(기원전 407년), 위문후는 악양과 태자 위격(훗날 위무후)을 보내 중산국을 멸망시켰다. 그 땅은 위나라에서 멀었으므로 조나라에게 돌아갔다.
조열후 6년(기원전 403년), 위열왕은 위나라, 한(韓)나라, 조나라를 후작으로 봉해 진(晉)나라는 3개로 갈라지게 되었고, 그리하여 위나라, 한나라, 조나라 3국은 삼진(三晉)이라고 불리게 된다. 조열후는 아버지 조완을 후작으로 추숭하여 조완을 달리 조헌후라고도 한다. 조열후는 가수에게 땅을 주려 하는데, 공중련이 말로만 그렇다고 하고 주지 않았다. 이때 파오군이 공중련에게 인재 추천을 권하니 공중련은 한동안 조회에 나서지 않다가 다시 참여했는데 가수들에게 줄 땅을 선정하고 있다고 했다. 우축, 순흔, 서월을 추천해 조나라는 강성해졌다.
조열후 9년(기원전 400년), 조열후가 죽었는데, 그 아들 조장(趙章)이 아직 어려 조열후의 동생이 뒤를 이었다. 그가 조무후이다.
[1] 단 공식적으로 제후가 된 시기로 따지면 초대 군주가 되지만, 조씨 종주(趙氏宗主)로서는 제10대 종주가 된다.[2] 최약체가 된 이유는 지백이 살아있을 때 조양자가 있는 진양(晋陽)을 수공을 써서 개판을 쳐놨기 때문이다. 반대로 위씨(훗날 위(魏)나라)와 한씨(훗날 한(韓)나라)는 지백의 명을 받아 조나라를 치다가 조양자의 설득을 받아 조양자를 도와 지백을 쳤기 때문에 조나라가 자연스럽게 최약체가 되었다.[3] 물론 최약체인 것도 있지만 중산국과 조나라가 지리적으로 가까운 탓도 있다.[4] 악양은 연나라의 명장 악의(樂毅)의 조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