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열왕

 


'''시호'''
위열왕(威烈王)
''''''
(姬)
''''''
오(午)
'''아버지'''
고왕
'''생몰 기간'''
기원전 ???년 ~ 기원전 402년
'''재위 기간'''
기원전 425년 ~ 기원전 402년
1. 개요
2. 생애
2.1. 삼진 분립과 전국 시대의 시작


1. 개요


주나라의 제32대 . 고왕의 아들이자 안왕의 아버지. 고왕이 병으로 죽어 왕이 되었다. 바로 이때 진(晉)나라한(韓)나라, 위(魏)나라, 조(趙)나라로 갈라져 삼진(三晉)이 생겨나고, 춘추시대가 끝나고 전국시대가 비로소 시작된다. 사마광(司馬光)이 주도해 지은 자치통감은 이때부터 기록이 시작된다.[1]

2. 생애



2.1. 삼진 분립과 전국 시대의 시작


위열왕 23년(기원전 403년), 진(晉)나라의 대부들인 위사(魏斯), 한건(韓虔), 조적(趙籍)이 위열왕에게 자신들을 제후로 임명해줄 것을 요청했다. 원칙대로라면 이들을 물리치고, 진나라를 되일으켜 주는 것이 바로 봉건 제도의 질서 체계다.[2] 그러나 주나라는 이미 실질적인 군사력은 약체였고, 말만 천자지 애왕, 사왕, 고왕이 왕위를 갈아치우는 사건이 일어나 권위는 바닥을 기었다. 그러니 진나라를 부흥시킬 여건이 되지 못했고, 그들을 제후로 인정해 버리고 말았다. 그리하여 위사는 위나라, 한건은 한나라, 조적은 조나라를 세웠다. 위에서 언급했듯이 사마광의 자치통감은 이때부터 기록되었다. 그리하여 진(晉)나라의 대부분의 땅은 삼진이 가져가고, 진(晉)나라는 곡옥#s-2(曲沃)과 (絳)만 남았다.
이 당시에 위나라의 위사 즉, 위문후는 이리(李悝)를 등용하여 그 계책에 따라 위나라는 전국 시대에 최초로 부국 강병을 이룩해 최강국 자리에 올랐다.
조나라의 조적 즉, 조열후는 공손련을 등용하여 그에게 정사를 맡겨 강성해졌다.
위열왕 24년(기원전 402년), 위열왕이 병으로 죽고 그의 아들인 희교가 왕위에 오르니 그가 바로 안왕이다.

[1] 그리고 오대십국시대에 끝이 난다.[2] 그래서 환왕이 진후를 들어내려는 곡옥을 친 이유도 바로 거기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