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무후

 


'''위(魏)씨 가문 9대 종주
위(魏)나라 2대 국군
무후
武侯
'''
''''''
희(姬)
''''''
위(魏)
''''''
격(擊)
'''아버지'''
위문후(魏文侯) 위사(魏斯)
'''생몰 기간'''
음력
기원전 424년 ~ 기원전 370년
'''재위 기간'''
음력
기원전 395년 ~ 기원전 370년
1. 개요
2. 생애
2.1. 명재상 이회의 죽음과 재위 초기
2.2. 위무후의 정복 활동
3. 최후와 위나라의 왕자의 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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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전국시대 위나라의 제2대 군주. 위문후의 아들. 양혜왕의 아버지. 아버지 위문후 대에 비해 정복 활동에 많이 나서서 영토를 넓혔지만 반대로 위나라 몰락의 단초가 된 군주기도 하다.

2. 생애



2.1. 명재상 이회의 죽음과 재위 초기


원래는 위의 태자로써 조나라에 둘러싸여 있던 위나라의 월경지이자, 악양이 멸망시킨 중산땅을 봉지로 가지고 있었던 중산후였다. 위문후가 위독해지자 황급히 수도로 복귀해 지위를 이었다.
위무후 원년(기원전 395년), 불행히도 명재상 이회(李悝)가 죽었다. 이회는 위문후 밑에서 법을 제정하여 위나라를 부국강병의 길로 이끌었었다. 이회 사후 무후는 전문(田文)[1]상방으로 삼았다.

2.2. 위무후의 정복 활동


위무후 3년(기원전 393년), 위나라는 정나라진(秦)나라를 쳐서 산조를 차지하고 거기에 성을 세웠다. 명장 오기(吳起)는 주성에서 진(秦)나라를 이겼다.[2]
위무후 5년(기원전 391년), 위무후는 한(韓)나라, 조(趙)나라와 힘을 합쳐 삼진(三晉) 동맹을 결성했다.[3] 그리고는 대량(大梁), 유관에서 초군을 물리쳤다. 그리고 초나라의 양릉 땅을 차지했다. 이에 초나라에서 그들의 위력을 실감하고는 초도왕이 사신을 보내 삼진에 강화를 요청하니 삼진은 그 말에 따랐다. 그리고 초도왕은 진(秦)나라 및 제나라와 동맹을 맺었다.[4]
위무후 6년(기원전 390년), 위무후는 한나라와 함께 진나라 군대를 맞아 무성과 섬현에서 크게 싸웠으나 승부를 내지 못했다. 무후는 오기로 하여금 심현을 설치해 진나라의 상황을 감시하게 했다. 제나라의 전화가 양릉성을 쳐서 점령했다.
위무후 7년(기원전 389년), 진나라에서 군사를 동으로 보내 음진(陰晉)에 포진하게 했다. 위무후는 병사들을 위해 잔치를 벌여 위로하였고, 오기가 전차 500승, 기병 3,000명을 거느리고 진군에게 반격해 대패시켰다. 이를 음진 전투라고 한다.
위무후 9년(기원전 387년), 오기가 병사를 거느리고 진군을 쳐 무하에서 패배시키고 진나라 땅을 얻었다. 위무후는 공숙좌(公叔座)[5]의 말을 듣고 오기를 의심해 오기가 초나라로 도망갔다.[6]
위무후 10년(기원전 386년), 위무후의 위명[7]이 천하를 울렸다. 전화는 당시 제나라의 군주인 제강공을 몰아내고 나라의 주인이 되었다.[8] 이때 조경후가 한단으로 천도했다. 조무공의 아들 조조(趙朝)가 반란을 일으켰다.[9] 그러나 일에 실패해 위나라로 달아났다. 이에 위무후는 조조에게 한단을 치게 했으나 승부가 나지 않았다. 오히려 조나라와의 우호 관계만 금이 가고 말았다.
위무후 13년(기원전 383년), 조경후가 위(魏)나라의 속국인 위(衛)나라를 치니 위선공이 위무후에게 구원을 청했으나 토대 땅에서 패배했다. 이 일로 조나라와 위나라는 원수지간이 되었다.
위무후 14년(기원전 302년), 조경후는 위(魏)나라가 속국인 위(衛)나라를 장악한 것이 불만이었다. 그래서 강평성을 건설했다. 위무후가 제후 섬과 함께 조군을 쳐서 조나라의 하동 땅을 얻었다.
위무후 15년(기원전 381년), 조나라가 위(衛)나라를 치자 위(魏)나라가 조나라를 쳤다. 조나라가 초나라에 구원을 청하자 초도왕은 위나라의 뒤를 쳤다. 위군은 혼란에 빠졌고, 조경후가 위나라의 극포읍을 차지했으며, 오래지 않아 황성까지 차지했다. 이 일로 위무후가 조경후에게 강화를 청하니 삼진이 다시 결합하였다.
위무후 16년(기원전 380년), 제후 섬연나라를 쳐서 상구를 차지하니, 연간공이 조경후에게 구원을 청했고, 위무후와 한문후가 연나라를 구했다.
위무후 17년(기원전 378년), 전제가 삼진에게 복종하지 않으며 연나라를 치자, 연간공이 다시 삼진에게 도움을 청하니 조경후, 위무후, 한문후가 함께 제나라를 쳤다. 그리하여 제군은 삼진 연합군에 의해 크게 패배했다. 그리고 삼진군이 전제의 영토인 영구에 들어왔다. 이 사이 중산이 다시 일어났다.
위무후 18년(기원전 377년), 중산 환공이 회수(澮水)를 점령했다.
위무후 20년(기원전 375년), 초나라를 선제공격해 유관을 점령했다.
위무후 22년(기원전 373년), 전제의 진후 섬이 진후 오에게 죽자 나라가 혼란해졌다.[10] 위무후는 그 틈을 타서, 연나라, 노나라 등과 함께 전제를 쳐 임호 땅에서 연군이 패했으나 노군은 양관에서 제를 쳤으며, 위군은 박릉에 이르렀다.
위무후 23년(기원전 372년), 위무후가 전제의 설릉을 취했다. 조성후가 위(衛)나라를 들이쳐 73개 읍을 점령하자 위성공이 위무후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위무후가 조군을 치니 조군은 난(蘭)에서 패배했다.

3. 최후와 위나라의 왕자의 난


위무후 25년(기원전 370년), 위무후가 죽으니 그의 두 아들인 위완(魏緩)과 위앵(魏罃)이 후위를 다투었다. 조나라와 한나라가 그 일에 개입하여 위앵이 위완을 쳐서 이기니, 그가 위무후의 뒤를 이어 위후가 되었다. 그가 바로 위혜왕 즉 양혜왕이다.[11]
[1] 이름이 맹상군과 같지만 동명이인이다.[2] 이 사람이 바로 오자병법의 저자인 오기다.[3] 이게 가능한 이유는 춘추시대 말기, 전국시대 초기에 진(晉)나라의 삼경인 한씨와 위씨, 조씨가 지백을 함께 물리쳤고, 위문후가 그들의 사이를 중재해줬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위문후의 중재의 내용은 위문후 문서를 참조할 것.[4] 사기에서는 이때 이미 전제가 되었으나 죽서기년에서는 아직 강제(姜齊)로 나오니 참조하기 바란다.[5] 이 사람이 바로 양혜왕에게 상앙을 추천한 바로 그 사람이다.[6] 이 사건으로 인해 초나라의 국력이 강해졌다.[7] 위엄 넘치는 명성.[8] 참고로 이것이 훗날 전제(田齊)다.[9] 간웅으로 유명한 삼국지조조가 아니다.[10] 왜 진후냐면 진(陳)은 제나라 땅에서 전(田)과 통했기 때문이다.[11] 단 양혜왕은 처음부터 왕을 칭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