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원희(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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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북송의 황족으로 북송의 2대 황제 태종 조광의의 아들.
2. 상세
원래의 이름은 덕명(德明)이었으며, 태종 재위기에 검교태보, 동평장사로 임명되었고 광평군왕의 봉작을 받았다. 이후 진왕(陳王)이 되어 원우(元佑)로 이름을 고쳤다.
당시 북송의 황실은 매우 시끄러웠는데, 조원희의 숙부였던 조정미가 역모를 꾸미려 했다는 누명을 받고 984년에 죽자 이듬해에 형인 조원좌가 조정미의 죽음에 대한 슬픔 속에 미쳐버려 결국 자신의 궁궐에 불을 놓는 사건이 있었다. 조원좌는 이 사건으로 인해 폐서인되었고, 당시의 조원우는 이후 988년에 개봉윤과 시중을 겸하면서 작위가 허왕이 되었고 이름을 원희(元僖)로 고쳤다. 조원좌가 전술한 사건으로 인해 황위 계승 순위에서 밀려나면서, 다음 순서는 자연스레 조원희에게로 향하였는데, 문제는 조원희마저 992년에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태종은 조원희의 죽음을 매우 슬퍼하여 한동안 폐조를 하였으며, 조원희를 황태자로 추존하고 시호를 공효(恭孝)라고 하였다. '''여기까지는 좋았는데...'''
조원좌 사후 기가 막힌 사건이 발생했으니, 바로 조원희의 애첩 장씨에 대한 문제가 수면 위로 떠오르며 조정을 발칵 뒤집은 것이다. 조원희의 애첩이었던 장씨가 조원희를 현혹하며 집안에서 전횡을 일삼은 사실이 속속 보고되었는데, 장씨가 노비를 때리고 하인을 숨지게 한 일이 조원희가 모르는 사이에 벌어지거나, 개봉의 서불사에서 장씨 부모의 초혼장을 지냈다는 등의 내용들이 사실로 드러난다. 이에 태종이 이를 추궁하였는데 결국 장씨는 목을 매어 죽고, 장씨 부모의 무덤이 훼손되었으며, 친족들은 모두 유배되었고, 조원희의 무리들은 모두 숙청되었다.
조원좌의 사건과 조원희의 죽음으로 인해, 황위 계승 순위는 조항[1] 에게 오게 되었으니, 이가 바로 북송의 제3대 황제가 되는 진종이었다. 진종은 형의 처지를 동정하여, 그를 다시 태자로 추증하고 인종 재위기에는 시호를 소성(昭成)이라고 하였다.[2]
조원희는 후사 없이 세상을 떠나서 조윤성[3] 의 아들인 조종보를 그의 후사로 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