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중련합사령부
1. 개요
조중련합사령부(朝中聯合司令部)[1] 또는 북중연합사령부(北中聯合司令部)[2] 는 6.25 전쟁 중 중국군의 개입으로 북한과 중국 간의 작전 수행 시 지휘통수권을 일치시키기 위해 설립한 연합사령부이다. 1950년 12월 상순 인민군 총사령관 김일성과 중국군 총사령관 펑더화이의 합의하에 대외적으로 비공개로 설립된 기구이다. 중국군이 6.25 전쟁에 개입하여 인민군과 공동으로 작전을 수행하면서 작전의 통일성을 지향하기 위해 수립하였다.
2. 인민군의 남침
1950년 6월 25일 일요일 새벽 4시, 인민군은 38도선 전역에 걸쳐 국군 진지에 맹렬한 포화를 집중시키며 기습 공격을 개시하였다. 인민군은 사흘만에 수도 서울을 점령하고 7월 20일에는 대전을 함락시켰으며 7월 말에는 경상도를 제외한 한반도 전역을 장악하였다. 국군과 유엔군은 낙동강 방어선에서 인민군의 대대적인 공격으로부터 공방전을 펼쳤다. 인민군은 8월 3일 낙동강을 도하해 안동을 점령했으며 포항과 당시 마산을 잇는 선까지 압박하였다. 인민군은 낙동강을 건너면서 8월 공세(제5차 공세)를 전개하여 한반도의 95%를 장악했다. 인민군은 전쟁을 끝내기 위해 5차 공세를 펼쳤으나 8월 18일 유엔군과 한국군에 의해 저지되었다. 이것이 유엔군과 한국군의 대반전 시작이었다.
3. 인천 상륙작전, 한국군과 유엔군의 북진
8월 초 한국군과 유엔군의 대반전이 시작되었다. 9월에 접어들면서 인민군은 그 기세가 꺾이기 시작했다. 9월 15일, 유엔군과 한국군은 인민군의 완강한 저항을 누르고 인천 상륙작전에 성공하였다. 보급로가 끊기고 심리적 충격을 겪은 인민군은 목숨을 건 후퇴를 시작하였다. 인천 상륙작전은 김일성의 8월에 전쟁을 끝낸다는 계획을 좌절시켰다. 남한 곳곳에서 빨치산 부대가 활동하기는 했지만 그들은 유엔군과 한국군의 진격을 막을 수 있는 부대가 아니었다. 한국군은 이어서, 달아나는 인민군을 추격하여 10월 1일에 38선을 돌파하여 10월 10일에는 원산을, 10월 19일에는 평양을 점령했다. 10월 2일 북진을 시작한 유엔군도 10월 7일에서 10월 14일엔 숙천•양양 공수작전을 펼쳤다. 인민군은 급기야 중국 국경을 넘기 시작했다. 김일성은 이미 만주에 임시 사령부를 설치한 상황이었다. 10월 26일, 압록강까지 진격한 한국군은 압록강 물을 마실 수 있었다. 11월 하순이 되자 전승 분위기가 만연해 졌다. 유엔군도 11월 23일까지 전쟁을 종결시킬 수 있을 거라는 기대에 가득 차 있었다. 전쟁이 한국군과 유엔군의 승리로 끝나고 통일이 현실로 다가오는 듯 했다.
4. 중국군의 개입
한국군과 유엔군이 인천 상륙작전에 성공하자, 전세가 불리해진 김일성은 중국에 구원병을 요청했다. 이에 앞서 중국은 인민군이 대전을 점령할 무렵 만주에 대규모 병력을 배치해 놓고 있었다. 1950년 10월 1일, 베이징 천안문 광장에서 건국 1주년 기념행사를 진행 중이던 마오쩌둥은 김일성과 박헌영이 보낸 구원군 요청 편지를 받고 김일성을 만났다. 10월 2일 그는 '항미원조 보가위국(抗美援朝保家爲國:조선을 도와 미국에 맞서 조국과 가정을 위하자)'을 명분으로 인민지원군 출병을 명령했다. 10월 19일 16개 사단(약 18만 명)이, 11월 초 14개 사단(약 20만 명)이 압록강을 도하했다. 전쟁은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유엔군은 중국군에 참패했다. 한국군은 10월 27일 중국군에게 대패하였다. 11월 25일 인민군과 중국군은 반격을 위한 '조중 연합군'을 창설했다.
5. 조중련합사령부 설치
김일성은 중국군 총사령관 팽더화이에게 조중 연합군을 작전체계로 묶을 수 있는 사령부 설치를 제의하였다. 김일성의 제안에 팽더화이도 동의하였다. 김일성과 팽더화이는 평양에서 회의를 열었다. 그리고 '조중련합사령부' 설치를 합의하였다. 그리고 인민군이 평양을 되찾은 지 1일 후인 12월 7일 인민군과 중국군의 연합작전을 위한 '조중련합사령부'가 공식적으로 출범하였다.
6. 인민군과 중국군의 총 반격(11.25~1951.7.9.)
인민군과 중국군은 산악지대에서 후퇴하여, 병력을 재편성하여 11월 25일에는 제50군을 박천군 및 동주 서쪽에, 제66군을 태천과 운장에 각각 배치하였고, 고성군과 그 서쪽의 군 후방지역에는 제2제대로서 계속되는 전투로
7. 한국군과 유엔군의 반격과 휴전
그러나 한국군과 유엔군은 전열을 가다듬고 반격을 개시했다. 이에 인민군은 2월경 서울을 포기하고 중국군도 서울을 2월 17일 포기했다. 3월 14일 한국군과 유엔군은 서울을 되찾고 조중 연합군을 38도선 이북으로 물리쳤다. 인민군은 다시 한 번 찾아온 적화통일의 꿈을 저버리고 38도선 이북으로 퇴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