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 상륙작전

 



'''인천 상륙작전'''
'''Battle of Inchon'''

'''날짜'''
1950년 9월 15일 ~ 1950년 9월 16일[1]
'''장소'''
경기도 인천시[2]
'''교전국'''
[image] 대한민국
[image] 미국
[image] 영국
[image] 캐나다
[image] 호주
[image] 뉴질랜드
[image] 네덜란드
[image] 북한
'''지휘관'''
[image] 더글러스 맥아더[3]
[image] 아서 듀이 스트러블[4]
[image] 에드워드 알몬드[5]
[image] 올리버 스미스[6]
[image] [image] 월튼 워커
[image] [image] 제임스 밴 플리트
[image] 손원일[7]
[image] 정일권
[image] 신현준

[image] 김일성
[image] 최용건
'''병력'''
75,000명
함정 261척
병력 규모 불명
'''피해'''
222명 전사
1,350명 전사
'''결과'''
UN군의 결정적인 승리
'''영향'''
UN군 반격의 시작
'''언어별 명칭'''
'''영어'''
Battle of Inchon (Operation Chromite)
'''러시아어'''
Инчхонская десантная операция
'''프랑스어'''
Bataille d'Incheon
'''독일어'''
Landung bei Incheon
'''스페인어'''
Batalla de Incheon
'''일본어'''
仁川上陸作戦
'''중국어'''
仁川登陆, 仁川登陆战
1. 개요
2. 과정
2.1. 배경
2.2. 상륙작전의 결정
2.2.1. 인천의 험준함
2.2.2. 인천이 결정된 이유
2.3. 준비
2.4. 북한군의 예측
2.5. 상륙
2.5.1. 개요
2.5.3. 월미도 상륙
2.5.4. 레드 비치와 블루 비치 상륙
2.7. 낙동강 전선의 반격
3. 평가
3.1. 6.25 전쟁의 전세 역전
3.2. 작전의 문제점
3.3. 한국 내 일부 비난
3.4. 북한의 인식
3.5. 민간인 희생
4. 기타
5. 관련 매체
6. 외부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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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950년 9월 15일, 더글러스 맥아더의 지휘 아래 조선인민군이 점령하고 있던 인천에서 유엔군대한민국 국군이 펼친 상륙작전. 2차대전에서의 스탈린그라드 전투, 미드웨이 해전과 비슷한 비중을 가지고 있다. 미군은 이 전쟁에 참전한 초기에 조선인민군에게 연패하며 경상도까지 밀려 내려오다가 결국 한반도의 허리 부분을 장악한 이 작전이 대성공을 거두면서 전황이 뒤바뀌게 된다.
코드네임은 '''크로마이트 작전(Operation Chromite)'''으로, 보안 유지에 특히 신경쓰고자 작전과 아무런 연관이 없는 단어들 중 크롬 광석에서 따와 지었다. 작전 후에는 Battle of Inchon(인천 전투)로 불리고 있다. 인천시의 현용 영자 표기인 Incheon이 아니라 당시 표기였던 Inchon을 사용했다. 부산 교두보 전투의 영어 표기가 Battle of '''P'''usan Perimeter인 것처럼.

2. 과정



유 퀴즈 온 더 블럭에 나온 이봉식 옹[8]이 언급하신 내용. (실제 참전용사)

2.1. 배경


6.25 전쟁이 개전된 이래 조선인민군대한민국 국군낙동강 전선까지 밀어내는데 성공하나, 이곳에서 전선이 고착된다. 인민군은 낙동강까지 계속 승리하며 겉보기에는 유리한 상황으로 보였지만 실상은 길어진 보급로와 계속되는 전투, 그리고 연합군이 미친듯이 쏟아부은 폭격으로 인해 정예부대의 전투력이 크게 고갈된 상태였다. 특히 북한이 소련에게 공여받은 250여대의 T-34전차의 경우, 서울에서 탱크 쇼크에 맛을 들인 북한군 수뇌부에 의해 제대로 된 제병 합동 전술을 만들지 않고 무의미하게 기갑전력을 소모시켰고, 결국 낙동강 전선에서 별다른 전술 없이 대부분의 기갑 전력을 일회용으로 소모해버린다. 당장 1950년 9월 당시 북한군이 낙동강 전선에 투입한 병력은 점령한 서울과 경기도 일대에서 강제 징집한 '''자칭''' 의용군 5만여 명을 포함해서도 10만 명이 되지 않았다. 이에 비해 한국군은 UN군의 참전 덕분에 동수 이상의 병력을 확보하고서 낙동강 전선을 유지하게 되었다.
산을 저지선으로 삼을 경우 북한군이 샛길 등으로 산을 쉽게 넘어가서 아군을 역포위하는 문제가 있으므로 한국군과 UN군은 낙동강을 주요 저지선으로 삼았는데, 수비를 할 때는 적이 보이므로 유리하지만, 역공을 하려면 도강부터 해야 하고 적에게 개활지에서 엄폐물 없이 모습을 보여야 한다는 문제점 때문에 반격도 쉽지 않았고, 북한군 역시 격심한 손실에도 불구하고 공세의 기세를 늦추려 하지 않아 낙동강 전선의 한국군 및 UN군은 마땅한 반격의 기회를 잡지 못했다. 낙동강 방어선에서 UN군이 반격을 시작할 경우, 38선까지 도달하는데만 10만 명이 넘는 사상자가 발생할 것이며, 그 기간도 상당할 것이라는 예상이 나왔다.

2.2. 상륙작전의 결정


당시 유엔군사령관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은 2차대전에서 상륙작전 성공의 주역인 본인 산하 육군과 해병대의 경험을 십분 발휘하여, 적 후방으로 상륙작전을 감행해 적을 고립시켜 전황을 일거에 뒤집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는 북한군이 빈약한 육상보급으로 현재의 전선을 유지하고 있기 때문에, 이 보급선을 잘라버리면 침략군 전체의 와해를 예상할 수 있었다. 북한군의 낙동강 전선까지의 육상 보급로인 경부선 철도와 경부 가도는 필연적으로 서울을 통과했고, 따라서 인천에 상륙해서 서울까지 진격할 경우 이 보급선을 완전히 끊을 수 있었던 것이다.
덤으로 산지가 70%인 한반도의 지형은 보급로가 끊어지면 전차 같은 중장비를 몽땅 버리고 몸만 빠져나오기도 힘들어지므로, 매우 비효율적인 후퇴를 강요할 수 있었다. 고속도로를 따라서 후퇴하면 된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이는 터널이 많아진 21세기 현재에나 어느 정도 가능한 얘기다. 게다가 한국의 고속도로는 산지와 인구밀집 지역을 피하기 위해 고가도로인 곳이 상당히 많다. 이런 가도에 탱크와 장갑차량들이 우르르 몰려다니면 붕괴 위험도 있을 뿐만 아니라, 적 포병이나 공군의 과녁이 되어버릴 게 뻔했다.

2.2.1. 인천의 험준함


이에 참모들이 처음 생각한 곳은 군산시였다. 하지만 군산은 상륙조건 자체는 좋으나 북한군의 보급선을 하나도 끊지 못하며, 북한군 병력도 하나도 포위하지 못하는 문제점이 있었고, 이런 점 및 맥아더 장군 자신의 소신으로 인해 맥아더 장군은 혼자서 끊임없이 인천 상륙을 주장했다.
하지만 참모들과 상륙작전을 실제로 수행할 미 합동참모본부(합참)와 해군본부도 인천에 대해서는 반대 의견을 굽히지 않았는데, 아래와 같은 이유 때문이었다.
  • 조수간만의 차가 최고 수치는 9m, 최소 수치도 7m라서 대한민국 2위의 수치이므로 밀물 때 상륙하지 않으면 상륙군이 수백 미터 이상을 엄폐물도 없이 질주해야 하는 상황이 닥친다. 그리고 밀물 때 상륙한 상륙선은 다음 밀물이 올 때까지 좌초하므로 북한군의 반격 시 탈출하기도 힘들다.
  • 썰물이 되면 나타나는 갯벌은 수백 미터 이상의 폭과 길이를 가지고 있으며, 도보 및 차량통행이 거의 불가능하다.
  • 위 두 항을 이유로 선발대는 상륙 후 최소 9시간 동안 어떠한 지원이나 보급도 받을 수 없다.
  • 상륙지 주변에 모래사장은 없다고 봐야 하고, 보통은 돌로 쌓은 높은 방파제와 축대로 구성되어 있다. 이는 배타고 방파제에 다가가서 사닥다리 놓고 올라가는 전근대적 공성전을 벌여야 상륙이 가능하다는 이야기인데, 당연히 방어군에 절대적으로 유리하다.
  • 방어시설이 잘 갖추어진 항구를 직접 점령하는 것은 디에프 상륙작전 이후 거의 금기시된 일이며, 설령 상륙이 성공적이더라도 적과 치열한 시가전을 치르면서 인천을 점령해야 하는 등 난제가 산적해 있다.
  • 만조 시 선박이 통과할 수 있는 수로가 비어수로라고 불리는 좁은 통로에 국한되므로 상륙작전을 하는 선박 및 지원포격을 하는 선박이 모두 좁은 단일 통로에 밀집한다. 이는 방어군의 해안포 입장에서는 그냥 고정표적이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비어수로의 유속이 매우 빨라서 주의하지 않으면 엇 하는 사이에 엉뚱한 곳으로 배가 떠내려가기 일쑤다.
이렇게 인천이 상륙하기 힘든 특징이라는 특징은 거의 모두 보유하는 바람에 일부 참모는 과장삼아 '''"성공율은 1/5000도 되지 않을 것이다"'''라고 주장했고 그들은 대안으로 전라북도 군산이나 경기도 평택군 포승면 앞바다로 장소 변경을 권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2020년 6월 12일 국방TV 프로그램 '순삭밀톡'에서 6.25 전쟁 70주년 특집을 다루며 인천상륙작전 기밀문서 등을 소개하였는데, 미군이 인천상륙작전의 성공확률을 대단히 낮게 보고 있었다거나 미 수뇌부와 맥아더 장군과의 마찰이 대단히 첨예하였다 등의 이야기들은 기밀문서가 해제되기 전 인천상륙작전을 다루던 소설 등에 의해 과장, 왜곡된 부분이 크다고 지적하였다.

2.2.2. 인천이 결정된 이유


인천이 이렇게 상륙하기 힘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상륙지로 결정된 것은 일단 인천 이외에 맥아더 장군이 원하는 '''적 후방의 완전 단절'''이라는 조건을 만족할 만한 장소가 달리 없었기 때문이다.
  • 군산시의 경우 상륙하기는 양호하나 앞서 언급했듯이 군산에 상륙해봐야 북한군의 보급선을 절단하지도, 적 병력을 포위하지 못한다. 이런 곳에 상륙하느니 해당 병력을 부산으로 증원하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는 결론이 난 지 오래였다.
  • 평양 이남의 남포도 기대할 수 있었으나, 이 지역은 수도 턱밑이므로 방어가 튼튼한데다가 가장 중요한 원산-서울-낙동강 보급선을 막지 못하는 것으로 예상됐다.
  • 포승면(현 평택시 포승읍)은 현재 해군 제2함대사령부가 있는 평택항 근처로, 이 곳이 바로 대한민국 1위의 조수간만의 차를 자랑하는 아산만 유역이다. 그나마 수도에서 정서방에 다다르는 인천과는 달리 수도와의 거리도 형편없이 먼 데다 조수 간만의 차도 극복하기 어려워 한반도 역사 동안 아예 버려진 땅이었다.[9] 또한 북한군이 인천항을 폭파해서 못 쓰게 만들 시간을 준다는 문제가 발생한다. 당장 상륙작전 시는 물론이거니와, 이후 북진 때도 인천항을 주보급항으로 사용해야만 작전이 가능하다는 결론이 나 있었다.
  • 인천이 유일하게 유리한 점이 있다면 배치된 병력이 매우 적을 것으로 예상된다는 점이다. 대략 1,000명 이내의 병력만이 인천을 지키고 있을 것으로 예상되었다.
위와 같은 이유를 들어 맥아더는 합참과 해군본부를 설득했고 결국 1950년 8월 28일, 크로마이트(Chromite) 작전은 최종 승인을 받게 된다. 다만 인천 상륙작전의 구상에 대해서는 맥아더 이전에, 심지어 6.25 전쟁 발발 이전에 이미 미군 내에서 충분히 유력한 작전으로 검토되었다는 지적도 있다. Clay Blair의 『The Forgotten War』에 따르면, 1950년 6월 19일 미 국방부가 소위 SL-17 계획을 승인, 배포했는데, SL-17 계획은 북한군의 남침 시에 낙동강 선까지 후퇴하여 전선을 안정화하고 9월 30일까지 인천 인근에서 상륙작전을 하여 서울을 탈환하고 북한군을 고립시킨다는 내용을 포함하고 있었다. 1950년 6월 26일에 연합군 최고사령부(맥아더사령부)가 SL-17의 복사본 50개를 요구했다고 한다.
이러한 내용으로 미루어보면 맥아더와 별개로 이미 미군은 북한군의 침공에 대응하는 작전 전반을 구상한 상태였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곧 앞서 언급한 인천의 험준함으로 인해 '''해당 계획은 그냥 서류상에만 남았으며,''' 맥아더가 이 계획을 현실화하려고 지속적으로 노력한 것을 볼 때 인천 상륙작전은 맥아더의 작품이 맞다.

2.3. 준비


참가부대
  • 제7합동기동부대 Joint Task Force SEVEN - 지휘관: 아서 듀이 스트러블 해군 중장
    • 미군
      • 혼성[10] 제10군단 - 지휘관: 에드워드 알몬드 육군 소장[11][12]
      • 해병대 제1해병사단 - 지휘관: 올리버 스미스 해병대 소장
      • 육군 제7보병사단 - 지휘관: 데이비드 G. 바 육군 소장
    • 한국군
      • 해병대 제1연대[13] - 지휘관: 신현준 해병대 대령[14](미 제1해병사단에 배속)
      • 육군 제17연대 - 지휘관: 백인엽 육군 대령[15](미 제7보병사단에 배속)
    • 영국군 - 지휘관: 앤드류스 해군 소장
한편 아무리 무리해서 인천으로 계획을 잡았더라도 그러한 사실을 은폐하는 것이 중요했다. 따라서 상륙작전을 준비하는 듯한 공격이 다른 곳에도 실시되었는데 이런 양동작전이 시행된 곳으로 삼척시, 남포특별시, 군산시, 영덕군 장사리 등이 있었다. 9월 4일부터 9월 14일까지 F4U 콜세어를 동원하여 폭격을 하였다. 상륙 이틀 전, 9월 13일에는 강원도 삼척시아이오와급 전함 BB-63 USS 미주리 함을 출동시켜 삼척 일대에 함포 사격을 가하여 적들의 눈을 돌리려고 하였다. 또한 같은 날 낙동강 전선의 총사령관인 미 제8군 사령관 육군 중장 해리스 월튼 워커 장군은 기자회견에서 "유엔군과 한국군은 10월 중순 즈음에 총반격을 감행할 것입니다"라고 발언함으로써 기자들이 유엔군과 한국군이 당시 시점에서 한두달 뒤인 10월 즈음에나 총반격을 한다는 기사를 앞다투어 내도록 유도하였다. 이 소식을 접한 북한군 수뇌부에서는 '''후방에 남아있는 예비 부대를 모두 낙동강 전선에 투입'''해 전쟁을 빨리 끝내기로 결정하였다.
8월 20일, 캐나다 해군 구축함 Athabaskan의 상륙반이 팔미도에 상륙하여 등대 내부의 통신시설을 파괴했다.
한편 미 해군 첩보수집 특공대에 배속된 임병래 중위를 비롯한 해군 공작조는 X-ray 작전을 수행. 미리 인천에 잠입하여 인천의 장비배치도, 배치병력, 고지 등의 정보를 수집하는 활동을 벌였으며 월미도에서 북한군 군관 2명을 생포하였다.
상륙 작전 사흘 전, 9월 12일에는 미 육군 루이스 엘리(Louis Eli) 대령이 지휘하는 미-영 혼성기습부대(미 육군 제1레이더스 중대(8227부대)와 영국 해병대 제41코만도로 구성)가 전라북도 군산에 상륙기습을 시도하였으나 가벼운 교전 후 별다른 성과없이 철수하였다.
상륙 바로 전날 9월 14일에는 서해안의 인천과 정반대 방향인 동해안에 있는 경상북도 영덕군 장사리의 북한군 점령지에 학도병을 상륙시키는 장사 상륙작전을 시행해 북한군이 상황을 오판하도록 기만 작전을 벌였다.
그러나 같은 날 9월 14일, 앞서 첩보 수집을 위해 투입되었던 임병래 중위의 해군 공작조가 북한군에게 발각되자 위기에 놓였고 퇴각할 시간을 벌기 위해 임병래 중위는 홍시욱 하사와 둘이 남아 북한군과 교전하였다. 그가 벌어준 시간 덕분에 해군 공작조는 무사히 퇴각할 수 있었으며 그들은 북한군에게 생포되었을 경우, 고문당하여 정보를 누설할 것을 염려하여 마지막에 자결하였다. 후에 대한민국 정부는 그들의 전공을 기려 1계급 특진과 함께 을지무공훈장을 추서하였고, 2012년에는 윤영하급 고속함 10·11번함 PKG-722·723에 그들의 이름을 붙였으며 미국 정부 역시 은성무공훈장을 추서하였다.

2.4. 북한군의 예측



북한군의 공세가 낙동강에서 저지된 이후 인민해방군은 역습 가능성을 검토하면서 UN군이 후방에 상륙작전을 실시할 것이라고 예상했고, 이를 마오쩌둥에게 보고하였다. 이 보고를 받은 마오쩌둥은 북한에 UN군이 후방에 상륙작전을 실시할 수 있다고 경고하였고, 김일성 또한 정확한 위치는 몰라도 UN군이 상륙작전을 실행할 것까지는 예상했다. 다만 마오쩌둥은 남포, 원산, 군산 중 하나일 것으로 잘못 예상했고 저우언라이가 인천이 상륙지점일 것 같다고 정확하게 예상을 했다고 한다. 따라서 저우언라이는 김일성에게 "인천을 조심하라"고 전문을 보냈고 김일성 또한 나름대로 대비를 하라고 지시를 하기는 했다.
이에 따라 북한군은 인천에 유엔군이 상륙할 때를 대비해 서해안 방어사령부를 신설하고 육군 제18사단과 조선인민군 해군[16] 공군에서 차출한 육전대 병력 등으로 여러 방어용 신규 부대를 편성하는 한편 월미도에 해군 인원들로 구성된 방어진지를 만드는 등의 준비를 하기는 했다. 그러나 빨치산 중대장 출신으로 백명 미만을 지휘한 경험밖에 없는 소련 육군 대위 출신인 김일성은 낙동강 전선에 집착하여 기껏 인천을 방어하기 위해 확보한 육군 병력도 낙동강 전선으로 보냈다가 날려먹는 삽질을 해버린다. 덕분에 인천 상륙작전 당시의 기록을 보면, UN군과 한국군이 조선인민군과의 교전 끝에 적 수병항공병 등을 사살 혹은 생포했다는 내용이 여럿 나온다.
게다가 김일성은 낙동강 전선에서 9월 공세를 밀어붙이면서 병력과 장비가 모자라자 이렇게 경기도 일대에 준비해 둔 방어 부대까지 빼서 동원했고, 그 결과 9월 15일 인천 월미도에 미 해병대 1사단 5연대 병력이 처음 상륙했을 때 당장 인천 일대에서 방어에 임하고 있는 병력은 월미도의 해군 육전대 2개 중대 규모의 병력과 인천 시가지의 2개 대대 병력 정도밖에 없었다. 그나마 가장 쓸만한, 앞서 언급한 육군 18사단도 인천상륙작전 직전에 낙동강으로 가라는 김일성의 지시에 따라 낙동강 전선으로 가 버렸다.
물론 북한도 이런 문제에 대해 어느 정도 인식은 하고 있었는지, 소련 해군의 도움을 받아서 주요 항구에 기뢰를 부설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인천에 기뢰를 부설하기 시작한 시점이 너무나 늦어서 몇 개 부설하지도 못했으며, 그나마 기뢰 부설함들이 들켜서 공격을 받고, 부설한 기뢰도 거의 다 발견돼서 조기에 제거되었다.

2.5. 상륙



British Pathè의 기록영상. 상륙 초기의 모습이 담겼다.

함대의 포격 엄호 속에 해안으로 돌진하는 유엔군 상륙정들.

2.5.1. 개요


인천 상륙작전은 크게 세 가지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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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월미도 제압(그린 비치): 해안포와 동굴진지가 갖추어진 월미도와 소월미도를 제압해서 상륙작전의 안전을 도모하고 인천항과 시가지 등에서 날아오는 반격에 대항할 토대 및 방패막을 만든다.
  • 인천항 상륙(레드 비치)[17]: 인천항에 직접 상륙해서 항구를 조기에 확보한다. 가장 어려운 임무이므로 미해병대 중 가장 베테랑인 부대를 동원한다. 이때 높은 방파제를 돌파하기 위해 일본에서 나무사다리 수천개를 긴급히 제작해서 공수했다고 한다. 아래 사진에서 사용하는 사다리가 바로 그 사다리다.
  • 인천 남동부 상륙(블루 비치)[18]: 인천항에서 북한 방어군이 방어작전에 임하고 있을 때 후방으로 우회해서 경인가도를 장악하여 인천을 고립시킴과 동시에 서울방면에서 오는 북한군의 증원군을 차단한다.
상륙 하루 전 9월 14일, 인천 방면에 주둔하던 북한군은 평양으로 다음과 같은 전보를 보냈다.
  • 적 함정들이 인천에 접근 중. 다수의 항공기가 월미도를 폭격 중. 유엔군 상륙기도가 극히 농후함.
  • 휘하 전 부대에 전투준비를 명하였음. 적이 상륙을 기도하면 저지 및 격멸할 것임.
이를 들은 김일성은 소련의 스탈린에게 급히 전화를 걸어 도움을 요청했지만 소련이라고 한들 별 도리가 없었다.[19]
'''그리고 1950년 9월 15일. 인천 상륙 작전 당일 새벽''' 제7합동기동부대 아서 듀이 스트러블 제독의 지휘 아래 항공모함, 구축함, 순양함 등 '''8개국 261척'''[20]의 함정이 인천 앞바다에 집결하였다.

2.5.2. 팔미도 등대 점령


9월 15일 00시 05분 유진 클라크 미 해군 대위와 KLO부대, 그리고 한국 육군 및 해군 장교들로 구성된 연합작전팀이 팔미도의 등대를 무혈 점령하고 등대를 수리해 불을 켜서 상륙부대들의 중요한 길잡이가 되었다.#

2.5.3. 월미도 상륙


9월 15일 05시 00분 미 해군이 월미도에 상륙 준비 사격(로켓을 퍼부었다)을 감행하였고, 05시 45분에는 미 제15항모부대의 F4U 콜세어 10대가 출격하여 해안가 지역에 폭격을 감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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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파제를 넘는 미 해병대
(1950년 9월 15일 오전 6시경, 인천, 신원미상의 미 해병대 사진병 촬영)[22]
USS 마운트 매킨리 함상에서 지휘부는 상륙시간(L-아워)을 06시 30분으로 확정한다. 미 해병대의 제1사단 제5해병연대 3대대원들은 06:00시까지 여러 척의 차량 및 병력 상륙정에 옮겨 탔다. 그 상태에서 신호가 떨어지자 월미도 북단의 그린 비치로 돌격한다. 상륙 제1파에 속한 차량 및 병력 상륙정 7척이 해안에 도달했을 때 시간은 06시 33분이었다. 미 해군 수중폭파대가 해안에 있는 침몰선의 잔해를 제거하는데 실패해 차량 및 병력 상륙자들은 우회 기동을 펼쳐야 했다.
전투기들이 불과 45미터 전방을 기총사격으로 훑는 가운데 제1파 인원들은 해안 상륙에 성공한다. 상륙 제2파는 2분 뒤인 06시 35분 추가로 2개 중대를 싣고 온다. 북한군의 저항으로는 산발적 무지향 사격만이 있을 뿐이었다. G중대는 재정비를 위해 잠시 정지했다가 방향을 남쪽으로 바꿔 무선전신국 언덕으로 돌진했다. 그곳에서도 북한군의 저항은 약했고, 공황상태에 빠진 북한군은 항복을 했다. 06시 55분 성조기가 언덕에 게양된다.
한편 H중대는 월미도 북단의 산업지역의 잔적을 소탕하고 인천과 연결된 방파제를 차단하였다. I중대는 참호 속에 숨어있던 북한군 1개 소대로부터 수류탄 기습공격을 당했다. 그러나 미 해병대 전차소대가 전차포를 참호 속에 발사했고, 약 30명의 북한군이 투항한다. 투항하지 않고 동굴에서 저항하던 북한군은 해병들이 대동한 M4A3 셔먼 불도저 2대에 그대로 생매장 당했다. 미 해병들이 월미도를 휩쓸고 다니며 소탕작전을 계속했고, 08시 00분 미 해병대는 무선으로 기함에 월미도 점령을 보고한다.
10시 00분, G중대의 전차와 보병 전투단은 남쪽 제방을 통해 소월미도로 진격한다. 이곳은 조선인민군 1개 소대가 방어하고 있었으나 곧 박격포와 해병 전투기의 폭격으로 초토화되었으며, 오전 11시 15분쯤 소월미도의 점령이 완료된다. 이때까지 사상자는 미군은 부상자 17명이 전부인 반면, 북한군은 사망자 108명에 부상자가 137명이었다. 월미도 곳곳에 널려있던 동굴째로 생매장 당한 100 ~150여명을 더하면 격차는 더 벌어질 것이다.

2.5.4. 레드 비치와 블루 비치 상륙


9월 15일 14시 30분부터 미 해군이 다른 상륙 지점 중 하나였던 인천항(Red Beach)과 인천 남동부(Blue Beach)에 함포 사격을 감행한다. 미군의 함포사격이 진행 중일 때 선봉 상륙부대인 미 해병대 제5연대의 1대대와 2대대가 상륙돌격 준비를 마쳤고, 미 육군 7사단, 대한민국 육군 제 17연대와 해병 제 1연대 역시 미군 상륙주정에 옮겨서 상륙을 대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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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아워 8분 전에 미 해병대 제5연대전투단은 차량 및 병력 상륙정을 타고 공격개시선을 넘어 레드 비치로 돌진했다.
레드 비치의 상륙 제1파는 차량 및 병력 상륙정 4척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각각의 차량 및 병력 상륙정에는 사다리를 2개씩 보유하고 있었고, 각 소대는 차량 및 병력 상륙정 2척에 나누어 타면서 각각 20명 내외의 인원으로 구성된 주정조(boat team)[23]를 형성했다.
여기 탑승한 미 해병대 제5연대 제1대대 A중대 돌격소대들은, 레드 비치 좌익에 상륙해 공동묘지 고지를 점령하는 임무를 담당했다. 추가로 차량 및 병력 상륙정 4척에 타고 있는 E중대 2개 돌격소대는 레드 비치 우익에서 영국 영사관 고지 점령을 맡았다. 미리 월미도에 상륙한 제3중대에서 박격포 엄호사격을 했다.
공병 1개 팀이 방파제를 따라 전진해 전차의 통로를 개척하면, 그곳을 지나간 전차들이 북한군과 교전을 벌일 예정이었다. 미 해병대 전투기들이 연속적으로 급강하하면서 방파제 뒤편을 공격했다. 해변에 접근하는 차량 및 병력 상륙정들은 만조에 편승할 수 있었고 북한군의 저항은 심하지 않았다.
레드 비치에 상륙한 미 해병대 제5연대의 1대대와 2대대는 곧바로 인천 시가지 소탕작전을 개시했고, 일부 병력은 해안 경비를 맡으며 후속 상륙 병력을 도왔다. 인천 곳곳에 위치한 벙커에서 저항하던 북한군에 맞서 불도저로 짓눌러 벙커를 땅 속으로 묻어버리는 효율적인(?)[24] 전술로 사상자 없이 빠르게 진격해갔다. 북한군의 잔존병력이 몇 없었기에 허를 찌른 격이 되어서 미군은 인천항의 도크를 손쉽게 확보하였고 감제고지 탈환에 성공하였으며 잔존 북한군을 시가지 내부에 몰아넣어 포위해서 일사천리로 소탕해 나갔다.
그리고 블루 비치에는 루이스 풀러 대령이 지휘하는 미 해병대 제1연대가 역시 큰 저항을 받지 않고 상륙하였다.
이어서 대한민국 해병 제1연대와 대한민국 육군 제17연대가 상륙하는 것을 끝으로 인천 상륙작전은 성공적으로 끝나게 되었다. 그 후 유엔군과 한국군은 경인가도 방면으로 진출하면서 인천 상륙작전을 완벽히 성공시켰다.
작전의 총 지휘는 미 육군 맥아더 장군이 했으며 상륙작전에 참가한 한국군 병력의 총지휘는 해군참모총장 손원일 제독이 했다.[25] 손원일 제독은 단순히 기함에서만 지휘를 한 것이 아니라, 해병 전투복을 입고 소총을 들고 해병대와 함께 상륙, 서울 수복시까지 해병대원들과 일선에서 함께 했다. 이로 인해 그는, 서울에 입성한 한국군 최선임자라는 기록을 세웠다. '대한민국 국군은 서울을 수복했다'는 포고문 역시 그의 명의로 작성된 것이다.

2.6. 서울로의 진격




2.7. 낙동강 전선의 반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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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상륙작전의 시기에 맞추어 낙동강 전선 일대에서도 대대적인 반격 작전이 벌어졌다. 하지만 북한군의 두 배가 넘는 병력을 유엔군이 확보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반격은 지지부진한 성과만 보였는데, 9월 20일 무렵 인천 상륙작전이 성공했다는 사실이 낙동강 전선의 북한군에게 알려지자 북한군은 붕괴되고 말았다. 한반도의 서부가 유엔군에게 장악당했으므로 보급선을 동쪽으로 이동시켜야 했는데, 이는 백두대간의 험산준령 때문에 거의 불가능했다.[26] 어떤 전쟁이라도 최전선 전투부대의 보급선을 끊으면 승리한다는 것은 상식이다.
낙동강 전선 일대의 북한군 병력들은 2만이 넘는 정도의 병력만이 제대로 후퇴하는 데 성공했다. 북한군중 만이천명 정도가 포로가 되었고, 만 명이 좀 넘는 정도의 병력은 지리산 일대에서 빨치산이 되었으며, 낙동강 일대의 북한군 병력 상당수를 차지하고 있던 남한 내에서 강제징집된 인원들은 도망쳐서 원래 자신들의 집으로 돌아갔다.
이 작전으로 북한군이 입은 타격은 그냥 '전멸했다'고 표현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 그 뒤는 쭉쭉 밀려날 수 밖에. 대한민국 한국군과 UN군은 파죽지세로 저멀리 압록강까지 진격하게 된다.

3. 평가



3.1. 6.25 전쟁의 전세 역전


인천상륙작전은 대한민국 국군UN군의 열세에 있었던 6.25 전쟁의 전황을 단숨에 뒤집었다. 이 작전으로 인해 인천과 서울에서 조선인민군을 쫓아낼 수 있었다.
당시 한반도에서 38선 이북과 이남을 오가는 대용량 수송 가능한 교통수단은 모두 서울을 거쳐갔다. 따라서 인천상륙작전과 서울 수복 성공은 38선 이남의 조선인민군에 대한 보급이 끊기고 조선인민군이 낙동강 전선과 인천-서울의 한국군-UN군에 포위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상륙작전 성공 이후 이남의 북한군은 급격히 와해되었고, 오히려 한국군과 UN군이 38선 이북으로 진군하게 된다.
많은 군사학자들도 이 작전을 20세기 역사상 최고의 군사작전이라 평한다. 미국의 군사역사학자인 스펜서 C. 터커(Spencer C. Tucker)는 인천 상륙작전을 "훌륭한 성공이며 거의 결점 없이 실행되었다"(a brilliant success, almost flawlessly executed)고 극찬했다.

3.2. 작전의 문제점


1990년대 이후 현대 군사학자들은 인천 상륙작전 자체는 흠이 없었지만 이후 대응에 심각한 문제가 있었다고 보고 있다. 인천-서울 라인. 즉 한반도의 서부를 장악한 후, 바로 기동병력을 동쪽으로 보내 한반도의 허리를 장악했어야 했다고 평가된다. 그러면 북한군의 보급로와 퇴로를 장악해 당시 북한군의 주력을 싸그리 포위 섬멸할 수 있었다. 이 작전이 성공했다면 중공군이 개입하기 전 전쟁을 끝낼 수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맥아더 원수는 인천을 점령한 후 바로 병력을 다시 배에 태워 원산 상륙작전을 계획했으나 그 과정에 시간이 너무 걸려 오히려 한국군 기동병력이 원산시에 더 빨리 도착하는 사태가 벌어진다. 아군의 진격이 적군의 후퇴보다 더 빠를 리가 없으니, 이는 상당수의 북한군이 백두대간을 넘어 후퇴 후 재편성할 시간을 벌어주었다. 이것이 전쟁을 종결 짓지 못한 결정적인 원인이라고 볼 수는 없으나, 최소한 도움은 되지 않았을 것은 확실하다.
일본에서 저술된 6.25 전쟁에 따르면 유엔군이 청천강 전투에서 패배한 결정적인 원인을 이 원산 상륙으로 꼽는다. 여기서 언급한 바로는 맥아더는 아이젠하워에 비해서 경력과 학업성적 그리고 1920년도에 육군참모총장을 역임했을 정도로 아주 고참이였다. 맥아더가 육참총장을 할 때 아이젠하워 장군이 부관이였다. 그 정도로 차이가 났지만 2차대전 중에 맥아더는 필리핀 철수를 하였고 대규모 병력을 지휘하지 못했다. 반면에 아이젠하워 장군은 유럽전선 총사령관으로서 대규모 병력을 지휘하였고 이러한 사실에 맥아더는 약간의 컴플렉스를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인천 상륙작전을 성공으로 이끈 후 유엔군 사령관으로서 무소불위의 권위를 가지게 된 맥아더는 실제 10군단을 미8군에 배속시키지 않고 직할부대로서 2개의 군을 지휘하는 고집을 부렸다. 이에 따라 백두대간을 기점으로 전선을 나누어 10군단을 원산 상륙 후 함경도 방면으로 진격하게 명령했다. 여기서 원산 상륙을 고집한 또 하나의 이유는 이때까지 미국 정부와 유엔군의 작전목적이 38선의 회복에 있었다는 점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더이상 북으로 진격도 안 되었고 차량이동이 기본인 10군단이 동쪽으로 진격해도 애매한 상황이였다. 이왕 병력은 빠져나와야 하고 도로는 엉망인데 북한군은 괴멸되지 않았을 거고 평양도 사수할 거니까 원산으로 상륙해서 평양을 치자 이것이 맥아더의 주장이었다. 하지만 미 태평양 사령부에 속하는 모든 배를 동원해서 원산상륙을 시도 했지만 서울에서 병력을 다시 인천으로 빼서 다시 장비를 하역하고 병력을 탑승시킨 후 원산으로 갔지만 그전에 미리 벌써 한국군 1사단이 점령을 하였고 이 병력들은 행정상륙을 하게 되었다.
여기서 갑자기 아주 큰 문제가 생기게 된 것이다. 이미 원산 앞 바다는 기뢰천지가 되어있었고 소해병력은 일본 소해정까지 다 끌고 와서도 한 달 이상을 소해 해야했고 모든 수송선은 여기서 열중쉬어 하게 되었다. 사실 처음부터 무리한 계획이여서 유엔군 참모부는 반대했지만 맥아더가 원산상륙을 결정하는 것을 감히 막지 못했다고 한다. 만약에 이러한 미 10군단 병력이 뒤로 돌아서 인천으로 돌아가지 않고 태백산맥을 넘어가지는 못하더라도 경춘가도를 따라 춘천으로 진격했으면 그만큼 인천상륙작전의 성과가 더 나왔을 거라고 판단되었고 원산상륙의 보급상의 문제로 반대했지만 맥아더는 북한군이 그렇게 빨리 후퇴할지를 생각하지 못한 결정적인 판단미스였다. 이때 참모진의 원산상륙의 가장 큰 반대 이유는 탄약보급선의 문제였는데 인천항과 김포공항, 경부철도로 보급선을 유지하게되는 유엔군 입장에서 부분 파손된 김포공항과 철도가 중간중간에 끊겨서 긴급복구를 했지만 아주 서행 운전해야하며 중간중간에 잔류 북한군의 습격으로 보급선 유지가 힘든 입장에서 인천항은 유엔군의 생명줄이였다. 하지만 이 원산 상륙에 의해서 탄약 재고량이 2일치로 간당간당하게 되고 원산 상륙 후에도 이 탄약재고량은 겨우 예비분 2일치를 유지하는 상황이 청천강 유역에 유엔군이 도착한 시점의 일이다. 이때 충분한 탄약 재고량이 있었다면 평양도 포기 하지 않았을 것이고 청천강 패전 후에 임진강 유역까지 밀려나지 않았다. 평양 철수의 제일 큰 이유가 중공군을 파악하지 못한 것도 못한 것이지만 보급량의 부족으로 미군의 강점인 화력을 쏟아 붓지 못하는 상황이 가장 큰 이유이다. 대동강 방어선, 그러니깐 평양-원산선은 한반도에서 가장 종심이 좁은 지역으로서 충분한 화력을 사용할 수 있다면 방어가 가능했을것이지만, 여기서 이 보급선의 문제로 대동강 방어선을 방어하지도 않고 급하게 포기하게 된 것이다. 여튼 맥아더는 인천 상륙작전까지는 명장 소리를 들을 대단한 업적을 이룩했지만, 그 후의 북한군 잔존세력의 전력을 과대 파악 하는 바람에 한번 잘못 끼운 단추가 다른 단추까지 계속 잘못 끼우게 하는 것을 보여주고 말았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 원산상륙을 위해서 춘천으로 급하게 진격을 안하고 10군단을 회군시킨 것은 결정적인 실수다.
  • 원산상륙으로 결국 지금의 휴전선이 그어지게 되었다. 이 원산상륙이 없었다면 대동강선으로 휴전선이 그여졌을 확률도 있다.
  • 만약에 춘천으로 진격했다고 하더라도 교통 때문에 더 이상 가지를 못했고 그 당시 경부가도 말고는 장비를 가지고 후퇴할 수 없었으며 춘천으로 진격했다고 하더라도 패잔병 몇 명을 더 잡을 정도지 한반도를 횡으로 진격한 것은 전세에 큰 영향을 주지 못했다. 특히 북한군은 잔존 빨치산의 안내를 받아 태백산맥을 따라 장비를 버리고 총만 들고 북으로 올라갔고 그 당시 우리나라 형편상 그것을 막을 수는 없었다.
  • 그때 인천상륙작전은 북한군에게 괴멸적인 타격을 준상황이였고 오히려 그 피해상황을 적게 판단하였기 때문에 엉뚱한 원산 상륙작전이 계획되었고 삽질작전의 대명사가 된 것이다.
  • 인천 상륙작전은 더 할 수 없을 정도로 대단한 작전이였다. 하지만 너무 작전이 잘 이루어졌기 때문에 그 이후로 판단미스가 되어서 이런 상황이 되었다.
  • 중공군들은 10월 10일 유엔군이 38선을 넘자마자 압록강과 두만강변에 대기하고 있으면서 넘기 시작했다. 그래서 중공군 개입 전이라는 것은 엉터리다.
  • 마오쩌둥의 참전선언으로 긴가 민가한 트루먼 대통령이 북진명령을 계속 미루고 있었다.
일단 군사학자들의 의견 중 일부는 타당하다. 김일성이 서울에 병력을 집결시키기도 전에 위험을 무릅쓰고 빨리 서울로 진격했으면 서울 시가전이 그렇게 치열하지 않을 수 있으며, 원산 상륙작전의 경우 효용성 자체도 문제가 있고, 꼭 하더라도 이미 상륙한 부대를 다시 인천항에 집결시켜서 다시 배에 탑승시킨 다음, 동해안까지 빙 돌아서 항해한 다음에 상륙하는 시간낭비를 하지 말고 별도의 부대를 빨리 보내는 편이 바람직했다.
그런데 이 의견에는 당시의 강원도백두대간의 험준함과 교통시설 미비를 전혀 감안하지 않았다는 반론이 있다. 지금도 강원도는 다른 지역에 비해 교통시설이 미흡하며, 특히 대량의 물자를 육로로 운송할 수 있는 철도 시설은 21세기의 시점에서도 그다지 좋지 않다. 특히 서울에서 정동쪽 방향으로 진격할 경우, 경기도 경계를 넘어서부터는 도로라고 이름 붙이기도 뭐한 험준한 비포장도로를 이용해야 하며, 지독한 산악지대를 횡단해야 동해안에 이르게 된다. 서울 탈환 시 치열한 전투가 벌어져서 수원 방면을 맡은 부대의 일부가 서울 남쪽에서 한강을 도하해서 남산을 점령하고 시가전을 지원한 사실이 있을 정도였는데, 소수의 기동부대가 험준한 산골짜기를 횡단한다고 하면 북한군의 저항이 없다고 해도 속도도 느리며, 포위망을 구축했다고 해도 간신히 길만 막은 상태라 능선을 따라 도주하는 북한군을 완전히 포위섬멸하기에는 무리가 많다. 이는 북진 작전에서 이미 산악지대에 아군이 맹진격하고 있었으나, 금천에 포위된 북한군이 장비를 버리고 인원만 탈출한 것을 막지 못한 것으로 이미 증명된다. 게다가 북한군도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므로 재수 없으면 기동부대가 역습받아서 괴멸당할 수도 있는 것이다. 이미 산악전의 쓰라림은 한국군이나 UN군이 엄청나게 겪은 일이다. 좋은 것을 알면서도 능력이 못 따라가서 시행하지 못한 것이다.

3.3. 한국 내 일부 비난


2005년 9월 23일 맥아더 동상 철거 문제로 시끄러웠을 때 SBS 시시비비에 출연한 철거 찬성자들은 맥아더는 인천 상륙작전의 패전에 대해 책임져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왜 패전이냐는 물음에 "인천에서 상륙했지만 인민군은 압록강까지 질서정연하게 다 철수했다. 따라서 실패한 작전이다."라고 대답했다. 또한 그들은 "인천상륙작전이란 것이 자체가 야비한 것이다. 북한군 본대가 낙동강에 내려와 있었는데, 맥아더가 북한군 후방인 인천을 쳤다. 비겁한 작전이다."라고 주장했다.
전 통일부 장관이자 제 16대 경기도 교육감 이재정은 2013년 10월 2일 10·4 남북정상선언 6주년 기념 참여네트워크 초청 강연회에서 인천상륙작전으로 인해 중공군이 개입했고 분단이 고착화됐다는 뉘양스의 강연을 해 논란을 일으키고 많은 비난을 받았다.#

3.4. 북한의 인식


북한에서는 인천 상륙작전은 사실인즉 9월 13일에 시작되었고 사흘 동안 월미도에서 해군 병력으로 구성된 수비대가 안전한 철수를 위해 처절하게 싸워서 미일 연합함대의 군함 '''144척을 침몰시키고 수십만 미군을 섬멸하는 대승'''을 거두고 옥쇄했으며 맥아더가 패배를 덮고자 9월 15일로 날짜를 조작했다고 한다.
실상 월미도의 해군 육전대는 개전 당일 미 해병대에 의해 단 두 시간 만에 반도 넘는 190명이 전사[27]하고 나머지는 포로가 되어 전멸했다. 월미도 수비대가 이러면서 거둔 전과는 '''아군 사살 1명'''. 게다가 북한쪽 기록에는 일본 해군도 참전했다고 되어 있지만 이건 사실무근.[28]
여기서 해군 전투라면서 해군 군함이 안 나오고 해안포 부대가 주역으로 나오는 것은 북한 해군의 함선 전력이 미미했기 때문이다. 원래 6.25 개전 당시 북한 해군은 어뢰정 4척 등 고속정과 상륙정 몇 척을 보유하고 있었으나 개전 초 어뢰정 두 척을 UN 해군에게 상실한 뒤로 수상전을 사실상 접고, 위장어선을 이용한 기뢰 부설 정도의 임무만 종전 시까지 수행했다. 그러니 해안포 부대가 작품의 주역이 된 것이다.[29]
그런 이유로 북한에서는 월미도 승전을 대대적으로 기념하고 있다. 황건의 불타는 섬이라는 대하소설이 바로 이 월미도 승전을 다루고 있으며 영화 월미도#[30] 역시 이 사건을 다루고 있다. 북한 해군 해안포병들이 ZiS-3 야포와 자돌폭뢰(…)로 미국 신형 구축함을 격침시키는 장면이 압권인 작품. 해당 신형 구축함은 기어링급 구축함으로 추정되는데, 구축함이 포탄과 연료가 모두 바닥나(…) 멈춰있지 않은 이상은 76㎜ 구경의 소구경 야포로는 못 잡는다. 몇 발을 맞춰도 구축함은 큰 피해가 없고 오히려 야포만 함포에 걸려 박살나는 일이 보통이다. 게다가 야포탄 한 발만 맞아도 구축함이 폭발해 가라앉는다. 이것도 최초로 찍은 판이 '''수령에게 충성하는 모습이 안 나오고 전투 장면에만 치중했다'''는 이유로 전부 다시 찍었다고 한다.
탈북자주성하 동아일보 기자는 북한의 선전만 믿고 '월미도의 영웅'들에 대한 환상을 품고 월미도를 방문했다가 뒤통수를 후려갈기는 충격과 배신감을 느끼고 더욱 북쪽에 대한 환멸을 느꼈다고 한다. 대다수 북한 사람들은 "다른 건 몰라도 우리가 월미도에서 미제놈들에게 한방 먹이지 않았는가"하고 자위하고 있다고. 그래서 자유북한방송을 통해 '환상 깨쇼'하고 방송을 내보내기도 했다.
인천상륙작전을 북한이 언제 예측했는지에 대해서 북한의 공식기록은 김일성의 뛰어난 예지력(...)으로 개전 3일차에 이미 인천상륙이 있을 것을 알고 대비했다고 한다.[31] 문제는 박헌영 일당이 미제 간첩인지라 고의로 작전기동을 방해해서 안타깝게 사전대비에 실패했다는 이야기다.[32] 어떤 식으로 방해할지는 예지 못한 반쪽짜리 예지력이 돋보인다(...).

3.5. 민간인 희생


인천상륙작전 직전 실시된 미군의 폭격에서 무고한 민간인 희생이 있었다. 미군의 폭격은 상륙작전을 염두에 둔 전략 폭격이었지만 월미도 주민과 신원불명의 희생자 100여 명이 폭격으로 인해 죽었다. 이때 죽은 사람들과 폭격에서 살아남은 생존자들은 국가로부터 별다른 보상을 받지 못했다. 이후 한국 정부와 미국 정부가 합의해 피해 보상과 귀향 조치를 취했다.
다만 인천광역시의회에서 인천 상륙작전 피해 보상을 하겠다고 입장을 보여 논란이 있었다. 인천시는 과거에도 피해 보상은 UN 참전국들과 한국 정부가 줘야 한다는 입장도 보여줬기에, 비판하는 측은 전국민이 피해자인데 특정 지역만 피해 보상을 해준다는 것을 문제삼고 있다. 또한 전쟁을 일으킨 건 북한인데 정작 그 북한에는 한마디 말도 없이 한국 정부와 UN군만 비난하냐는 비판도 잇따랐다.
당시 북한군은 상당수가 인천 시가지에 배치되어 있었다.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도 알 수 있듯 황량한 해변에서 두들겨 맞기보다는 건물을 엄폐물로 삼아 시가전을 벌이는게 효율적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시가지에서 농성하는 적들을 상대하려면 우선 포격과 폭격(특히 네이팜탄이 효과적.)으로 건물째 부숴버리고, 보병과 기갑부대를 같이 투입하는게 가장 좋다. 실제로 이라크 전쟁에서 팔루자 전투나 바그다드 전투도 이와 비슷한 형태로 진행되었고[33], 스탈린그라드에서도 독일군이 소련군의 위협을 배제하기 위해 Ju87등으로 폭격을 실행했다.
게다가 인천 시내의 북한군이 적다곤 해도 시가전에 발목잡힐수록 상륙작전 및 포위 효과가 그만큼 반감되어 버리는데,[34] 이 때문에 진로상의 건물들은 싸그리 부수고 나아갔고 이 과정에서 민간인 사상자도 속출했다.[35]

4. 기타


  • 미 해군의 이오지마급 강습상륙함의 마지막 함정인 LPH-12는 인천 상륙작전에서 이름을 따와서 USS Inchon으로 이름지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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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함정은 1995년 3월에 기뢰전 지휘함으로 개수되었다. 이후 2002년 6월 21일 퇴역하였다.
  • 작전을 참관하던 당시 해군참모총장 손원일 제독이 작전중에 실종된 사건이 있었는데, 한국 해병대원들과 함께 상륙해 서울 해방까지 함께했으며 덕분에 손원일 제독은 서울 탈환 직후 자신의 이름으로 포고령을 발표하는 영광을 누렸다.
  • 2015년 9월 인천 월미도 일대에서 65주년 인천상륙작전 전승행사가 거행되었다.

  • 작전지역인 인천광역시를 연고로 하는 프로야구단 SK 와이번스가 작전 감행일인 9월 15일 즈음에 열리는 홈경기를 '인천 상륙작전 메모리얼 데이'로 명명하면서 밀리터리 유니폼을 입고 경기를 치르기도 한다.

5. 관련 매체


  • 돌아오지 않는 해병 - 시작 부분에서 실제 역사적 사실과는 상당히 다르긴 하지만 역시 인천 상륙작전을 담고 있다.
  • 오! 인천 - 통일교 희대의 괴작 영화.
  • 인천상륙작전(웹툰) - 만화 미생으로 유명한 윤태호 작가가 매주 연재했다. (지금은 서비스가 종료되었다고 뜬다.) 인천 상륙작전만 바로 보여주는 것이 아닌, 일본 패망 이후 대한민국 정부의 수립 과정과 인천 상륙작전까지의 6.25 전쟁 초반의 전개 과정을 그리고 있다. 2015년 부천만화대상을 수상했다.
  • 인천상륙작전(영화) - 2016년 영화. 문서 참조
  • 유녀전기에서 본 작전이 주인공의 생각을 통해 언급된다.
  • 네이버 웹툰 기사도의 작가로 잘 알려진 환쟁이의 블로그에 가 보면 인천 상륙작전이 관한 만화가 올라 와 있다.(#) 6.25 60주년 기념으로 연재한 만화중 인천 상륙작전에 대한 부분인데 상당히 자세히 서술되어 있다.

6. 외부 링크



[1] 9월 16일 인천을 탈환했다.[2]인천광역시.[3] UN군사령관 겸 미국 극동군사령관[4] 미 해군 제7합동기동부대 사령관[5] 미 육군 제10군단 군단장 [6] 미 해병대 제1사단 사단장 [7] 대한민국 해군참모총장[8] '''해병대 1기'''시다. 실제 참전도 하셨던 용사이며, 맥아더 장군과 같이 인천상륙작전을 참전하셨다. 자세한 시각과 함께 진격 위치를 언급하신 영상.[9] 오늘날의 평택항의 개발이 이루어진 건 토목 기술이 괄목할 정도로 발전한 1990년대 이후의 이야기이다.[10] 미 10군단은 맥아더가 인천 상륙작전을 위해 육군, 해군, 해병대로 구성시킨 혼성군단이다. 그야말로 주문제작된 군단.[11] 소장이라도 군단장에 임명되었다. 미8군 사령관이 중장인 워커 장군인 관계로 소장들 중 기수가 높은 알몬드 장군을 뽑아 군단장에 임명했다. 1군단장 9군단장도 소장 계급이었다. 이것은 사단-군단-야전군-집단군 체계를 가지고 있는 미군의 특징으로, 군단의 장은 소장 고참이나 중장 초임이 임명된다.[12] 그런데 맥아더의 참모장을 맡다가 10군단장을 겸직하게 됐다.[13] 당시 우리 해병대에는 제1연대가 없었고, 미군이 편의상 붙인 호칭이다.[14] 일제시대 만주군 간도 특설대 출신이다. 1949년 4월 15일에 창설된 해병대의 초대 사령관이 되었다. 당시 계급은 중령. 한국 전쟁 중 인천 상륙 작전과 도솔산 전투 등에서 해병대가 전과를 올리는 데 공을 세웠고, 1953년 해병대 사령관 임기를 마친 뒤 새로 창설된 해병대 제1여단(현 해병대 제1사단)의 초대 여단장을 맡았다. 국방부 차관보를 거친 뒤 1961년 해병 중장으로 예편[15] 8월경 북한 육군 12사단 766부대를 궤멸시키고 사단장으로 임명되었으나 인천 상륙작전 참가를 위해 본인의 요구로 연대장을 맡게 되었다. 여담으로 이때가 리즈시절이였다. 예편 후 그 유명한 인천막장사학재단의 주역이였으니... 자세한 내용은 백인엽을 참고하기 바란다.[16] 이쪽은 작살나기 전에도 전력이 변변찮았다는건 넘어가자(...).[17] 현재의 북성동 대한제분 공장 일대. 과거 버전에는 만석동으로 표기됐는데 정확히는 북성동 쪽이 맞다. 대한제분 공장 입구에 상륙지점 기념비가 있다.[18] 현재의 용현동 낙섬사거리. 지금은 매립되어 내륙이 되어버렸지만 상륙지점 기념비는 세워져 있다.[19] 스탈린은 미국과 정면으로 싸우는 것을 꺼렸고 이 때문에 한반도에 파견한 공군도 소련군 소속이란걸 들키지 않기 위해 위장했다. 스탈린이 돕기로 마음 먹는다 해도 어차피 상륙 하루 전에야 그 사실을 알았기 때문에 인천의 북한군을 도울 수가 없었다. 실제 도우려고 했어도 인천에 상륙하려는 미 해군을 공격해야 하는데 당시의 빈약한 소련 해군, 그것도 최정예 발트해 함대가 아닌 2선급인 태평양 함대로 당시 최강이었던 미 해군을 공격한다는 건 자살행위나 마찬가지다.[20] 미국 225척, 대한민국 15척, 캐나다 3척, 호주 2척, 뉴질랜드 2척, 네덜란드 1척, 프랑스 1척.[21] USNS 1st LT. Baldomero Lopez, T-AK-3010, 말 그대로 발도메로 로페즈 중위함이다.(#)[22] 이 사진에서 소대원들을 이끌고 가장 앞장서서 장애물을 오르고 있는, 제1해병사단 제5연대 제1대대 A(에이블) 중대 3소대장 발도메로 로페즈 중위는 이 사진이 찍힌 바로 몇분 후, 주둔하고 있던 북한군을 공격하기 위해 첫 번째 수류탄을 투척 후 곧바로 두 번째 수류탄을 투척 도중 적군 자동화기에 가슴과 오른 어깨를 피격당해, 막 투척하려던 수류탄을 땅바닥에 떨어트렸다. 자신이 떨어트린 수류탄 때문에 소대원들이 위험에 처하게 되자, 온몸으로 막아 대원들을 구하고 '''그 자리에서 전사했다.''' 발도메로 로페즈 중위는 고등학교 학군단(JROTC)에서 연대장 후보생을 지냈고, 미 해군 수병으로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 1년간 수병으로 복무 중 미 해군사관학교 수병 특별전형에 선발되어 사관학교 졸업 후 1947년 미 해병대 보병 소위로 임관, 박격포반장과 소총소대장으로 중국 상하이와 칭타오 파병을 다녀왔다. 이 사진은 인천 상륙작전의 기념비적인 사진으로, 쌍안경을 들고 있는 맥아더 원수의 사진과 함께 역사에 길이 남을 사진이 되었으며, 발도메로 중위는 그 전공을 기려 사후 미국 군인이 받을 수 있는 최고의 무공훈장인 명예 훈장(Medal of Honor)에 추서되었으며, 그의 이름을 딴 해상 수송선인 '발도메로 로페즈 중위함'[21]이 있다. 수송선이긴 하지만, 위관급의 이름이 붙었다는 것으로 그의 영예를 존중하는 미군의 자세를 알 수 있다.[23] 주정조는 제2차 세계대전 때 구체화된 개념으로, 각 주정조는 장교 또는 부사관의 지휘를 받는 임무 지향적 조직이다. 중대 화기소대와 대대 돌격소대로부터 기관총과 3.5인치 바주카포, 화염방사기 등을 배속받아 화력을 보강하고, 주정조 단위로 싸우며 내륙으로 진격하다가, 상황이 안정되면 원 분대 및 소대로 복귀한다.[24] 첫 도입은 2차대전 당시 일본군에게 먼저 썼다.[25] 홍은혜 여사의 회고집인 '우리들은 이 바다 위해' 수록[26] 억지로 , 사람 등에 지우고 보급을 할 수야 있었겠지만. 사람이고 우마고 죄다 낙동강 전선에 동원한데다가 차라리 그 인력을 전력으로 쓰는 게 나았을 것이다.[27] 진지에 숨어 저항하다 불도저를 동원해 진지를 파묻어 버리는 바람에 생매장당한 인원도 상당수 있다. [28] 구 일본 해군의 소해정들이 원산 등지의 기뢰 제거에 투입되어 1척이 기뢰에 접촉해 가라앉고 승조원 1명이 사망하는 피해를 입은 게 전부이다. 원산소해작전에 구 일본 해군이 투입되는것에 말이 많았지만 원산은 기뢰밭이였고 이 당시 미 해군의 소해정은 거의 없는 수준이었으며, 그러면 미 본토나 유럽에서 소해정들이 증원을 와야하는데 함정의 크기상 장거리 항해와 빠른 항해가 불가능한 점 등으로 강행되었다. 인천에서 작전하진 않았다는 것까지 합치면 그야말로 답이 없다.[29] 개전 초에 어뢰정이 미 해군 순양함 USS 볼티모어 함을 격침시켰다는 구라는 치고 있다. 그 순양함은 6.25 전쟁에 참전은커녕 미국 본토에 있었다(…). 일각에선 이들이 동해상에서 작전하던 소련 해군 태평양 함대의 순양함을 오인 공격(…)하고 나서 거짓 보고를 한 것이라 여긴다. 소련 해군측에서 어뢰맞아 가라앉았다는 배가 있었단 얘길 안 하고 있는 걸로 보아 빗나간 듯하다.[30] 북한 영화라도 체제 찬양이나 이적 행위 목적이 없는 단순 감상은 처벌 사유가 아니다.[31] 물론 위에서 말한대로 북한이 사전에 인천에 상륙할 것이라는 것을 모른 것은 아니다. 단지 그게 3일 전이 아니며 북한 스스로 알아낸게 아니라 중국에서 그럴거라고 알려준 것일 뿐이다.[32] 북한에서는 정권 초기 부수상을 역임했던 이정 박헌영이 미제간첩이라 하지만, 이 또한 북한측의 거짓 선동이다. 박헌영은 1925년 조선 공산당 창립 일원이자, 당시 국내 사회주의 독립운동을 이끌었던 인물이다. 1930,40년대도 독립운동을 이끌었고, 해방 후에는 조선 공산당을 재건하여 미군정에 맞섰던 인물이다. 거기다 박헌영은 1952년 미군의 세균전을 비난하는 연설을 했다.[33] 물론 네이팜탄은 쓰지 않았다는 점은 차이.[34] 일단 남쪽에 내려가 있는 주력이 인천을 방어하거나 포위를 뚫기 위해 인천으로 올라올 수 있다.[35] 사실 2차 세계대전 때에도 그래왔지만, 포격 실시 전 피폭지 일대의 민간인들만 선택적으로 전부 피난시킬 순 없다. 게다가 이를 경고하기 위한 침투조를 투입해도 모든 민간인들이 순응할지도 의문이거니와 이 과정에서 적군도 알아채 대비할게 뻔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