졸업정원제
1. 개요
대한민국 제5공화국 전두환 정권 때 시행되었던 교육 정책으로, 입학시에는 학생을 선별하지 않고 졸업시에 학생정원을 설정하는 제도다.
2. 도입 배경
1970년대에 들어와 대학에 진학하려는 학생수가 급격히 증가되었다. 이에 따라 대학 입학의 문이 좁아지자 과열 과외, 재수생의 누적 등 사회문제가 제기되었다. 또한 대학의 안일한 학문풍토와 부실한 학사관리 등의 문제점이 나타나게 되었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1981년부터는 졸업정원제가 실시되었다. 이 정책은 1980년 당시 이규호 문교부장관이 입안하였다.
학과별 또는 계열별로 졸업할 때의 정원을 규정하되 입학할 때는 졸업 정원의 30%를 증원 모집하고 증원된 숫자에 해당되는 학생은 강제로 중도 탈락시키도록 규정한 것이다. 중도 탈락의 비율이나 방법에 관해서는 대체로 대학의 자율적 규정에 맡겼으나 4학년에 진학할 때 졸업 정원의 10%를 넘지 못하도록 규제하였다. 즉, 입학의 문호를 넓히되 재학중의 면학 분위기를 조성하게 하며, 대학에 들어오면 누구나 다 졸업할 수 있다는 안이한 사고방식을 시정하고자 하는 데 있었다. 제도 자체는 특별할 것이 없고,전액 국비(세금)로 고등교육 과정을 운영하는 많은 유럽권 선진국의 대학들[1] 과 일부 북미권 주립 대학들이 시행하는 것을 본 뜬 것이다.
3. 망했어요
그러나 이 제도는 증원 모집된 학생들을 성적이 아무리 우수한 편이라도 강제로 탈락시키는 문제를 안고 있었다. 단적인 사례로 서울대 법과대학에서는 B학점을 받은 학생이 탈락하기도 하였다.[2] 더 나아가 학생들 간에 경쟁을 심화시켜 학생운동에 나서지 못하게 하자는 의도도 있었다.#
문제는 제적 방식이 졸업 시점에서 하는 것이 아니라 매 학년 진급시에 하위 몇 명을 내보내는 방식이었다. 매 학년 전공과 교양, 부전공 비율과 학점도 다르고 필수와 선택 과목 배분도 다른데, 교양 필수 과목 비중이 높은 1학년때부터 실시했기 때문에 출석룰이 낮다든지 기타 이유로 교양필수 과목을 이수 못 하면 전공 과목을 아무리 잘 해도 그냥 제적된다는 문제점이 있었다. 졸업 전까지만 학점을 따면 되는 교양필수 과목의 의미가 사라지는 것. 또한 평점 평균이 낮아도, 석차가 하위 몇 %에 들어도, 미수료(F)가 기준 이상 되어도 짤렸는데, 인원이 많은 학과와 적은 학과는 나가야 하는 사람 수가 달랐기에 이렇게 상대 평가가 되면 학점 평균이 높아도 짤리는 현상이 일어날수 있어 불공평했다. 학점 짜게 주는 교수에게 걸렸을 때도 마찬가지. 일단 다 다니게 한 후 대학 생활 전체를 보고 졸업시에 심사하여 졸업과 수료로 나누는 방식이 아니라 중간 중간 기준을 못 맞추면 그냥 학교에서 쫓아낸다는 거, 특히 입학 초창기에 잘 못하면 만회할 기회를 주지 않았다는 점에서 이 제도는 폭력적이었다.
어쨌든 간에 이 졸정제는 학부모와 대학측의 반대를 불러일으켰다.[3] 한편 정부 내에서는 노신영 국가안전기획부장도 이 정책에 반대하였다. 1985년 입학정원이 대학자율에 맡겨지면서 유명무실해졌고, 1988학년도부터 입학정원제가 실시됨에 따라 완전 폐지되었다. 문교부는 대학측이 졸업정원제에 의해 탈락한 학생들을 재입학시키기 위해 학칙을 개정할 경우 전부 승인하기로 함에 따라 전원 구제하기로 하였다. 구제는 대부분 재입학 형식으로 시행되었다. 입학금을 내고 마친 학기 다음 학기로 돌아오는 식. 85년부터 유명무실해졌다고는 하나 85년 입학해서 86, 87년에도 제적된 인원이 있으며, 88년 이전까지 이 제도는 분명 존재했다. 남학생들은 제적되면 대학생 신분이 아니라 입영 연기가 안 되기 때문에 타 대학을 입시 다시 보고 들어가든지, 편입을 받아주는 2년제 전문 대학, 지방대 등 다니던 데보다 한 단계 낮은 데로 들어가 병역을 피해야 했다. 물론 등록금이 없거나 나이가 많아서 그냥 군대로 가 버리는 인원도 있는데, 제대하기 전에 이 제도가 유명무실해지면서 제대 복학생과 함께 재입학으로 돌아오게 된 경우도 많다. 하여간 남학생들은 군복무 때문에 일정 인원은 항상 비어 있어서 졸업정원제가 있었어도 그들이 학교로 돌아오기 전까지 제도가 폐기된 바람에 큰 문제 없이 넘어갈수 있었다. 다만 군에 안 가는 여학생의 경우는 84학번까지는 4년 내내 졸업정원제가 유지되고 있었기에 제적된 후 다시 돌아오지 못하고 다른 학교에서 학업을 마치거나 중퇴로 끝난 경우가 꽤 많다.
결국 이 제도로 증원된 대학의 정원이 다시 일부 줄어들기는 하였으나, 1990년대의 폭발적인 대학 설립, 전문대학의 업그레이드 허용 등과 함께 대학생 급증의 원인이 되었다.[4][5]
이 폭탄은 2010년대 입학생 감소와 더불어 부실대학 문제가 불거지자 대학 구조조정이 가시화되기 시작하면서 터질 조짐을 보이고 있다. 사실 지방 대학들은 이미 십여 년 전부터 입학생이 부족해 장학금을 줘 가면서까지 외국인 유학생을 유치했다. 학생이 너무 줄면 경영이 어려울 뿐 아니라 지명도도 떨어지고 교육부의 지원금이 줄어 불이익을 받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2020년 동부산대학교와 서해대학이 자진 폐교 신청까지 갔다.
4. 의외의 효과
한편 민주화운동에 있어서는 의외로 긍정적인 요소로 작용했다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이전까지 대학생들은 미래사회를 이끌 동력이자 지식인으로서 대우받았지만 그만큼 소수집단이었기에 사회 곳곳에까지 영향력을 행사하기 어려운 측면이 있었다. 그러던 것이 대학생들이 급증하면서 단순히 대학생으로서 고등교육을 받을 뿐만이 아니라 학생운동 문화를 접하는[6] 사람의 숫자가 많아지면서 운동권의 인재 풀이 넓어지는 효과를 낳게 되었던 것이다. 본래 속셈은 대학교에 면학 분위기를 조성해 학생운동을 막아보고자 했던 것이지만, 오히려 대학생들이 늘어나면서 자승자박의 효과를 낳은 것이다.
또한 제적된 학생들의 경우, 학교와 교육 당국, 정부에 대한 반감을 가지게 되었고 타 학교로 가든 제도 폐지 후 재입학을 하게 되었든 자연스럽게 운동권에서 활동하거나 최소한 그 쪽에 대한 반감을 갖지 않는 쪽으로 성향이 바뀌었기 때문에 정부의 대학생 통제를 꾀했던 정책은 반대 효과를 내게 된 것이다.
이 졸업정원제 세대가 386세대로 불리면서 대한민국 민주화 운동에 한 축이 되었던 것도 이와 무관하지는 않을 것이다.
[1] 특히 학비를 국가나 지방정부에서 책임지고 지원하는 나라들이 이런 경우가 많다. 학생들이 세금으로 학자금 지원 받고 놀지 말라고... [2] 그러나 유급이나 탈락자가 발생하는 것은 비슷한 제도를 운영하는 세계의 모든 대학에 공통된 특징이다. 정부쪽에서 제도를 만들며 탈락자에게 길을 마련해주지 않은 실책은 있지만, 경쟁심화를 탓하거나 자살소동이 벌어진 것은 유별난 평등의식을 보여주었다고 할 수 있다.[3] 입학정원이 늘면서 학부모는 대입 재수 걱정을 덜었고 대학은 등록금 수입이 늘었다. 졸업정원제가 폐지되면 이 둘은 더 이익인데도.[4] 동문회 사석에서 할아버지 학번(84~87학번)들이 옛날 이야기를 하며 가끔, 졸업정원제 후에 입학생 질이 떨어졌다고 푸념할 정도다. 그런데 실제로는 그들의 비뚤어진 부심이고, 별 차이가 나지 않았다. 이를테면 서울대에 10% 추가 인원으로 들어갈 실력이 되는 사람이 다른 데는 못 가겠는가? 제적된 인원 중 학력고사 더시 보고 더 좋은 학교로 간 인원도 적지 않다는 것도 반증이다.[5] 이 대학생 정원 증가의 가장 큰 이유는 전후 베이비 붐에서 이어져 60~70년대에 태어난 사람이 급격히 늘어난 것이다. 결국 00년대 이후 출생이 대학에 입학할 시점인 20년대 이후로는 고3 학생 수보다 대학 정원이 더 많아지는 사태까지 온 것이다.[6] 국가보안법으로 가혹하게 국민을 감시 조련하고 정부의 잘못을 감추던 당시에는 대학교에 들어가기 전까지는 인권, 노동 3권, 4.3 사건, 광주민주화운동 등에 대한 것을 접할 기회가 전혀 없었다. 젊은이들은 대학교에 가서야 그런 것을 접하고 대부분 큰 충격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