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고후
朱高煦
(1380~1426)
1. 개요
명나라의 황족. 영락제의 차남. 어머니는 인효문황후 서씨다.
2. 행적
용모가 뛰어나고 문무를 겸비할정도로 재주가 뛰어났지만 인성이 막장이었다. 특히 성품이 흉악하면서 사나웠는데, 학문을 싫어하고 놀기 좋아하며 경박했고 품행이 단정치 못했다. 홍무제 때 왕자들을 모두 불러 경사에서 학문을 배우게 했는데 주고후만은 배우려 하지 않으면서 언동이 가벼워 홍무제는 손자 주고후를 미워했다. 홍무제가 붕어하자 아버지 주체를 따라 도성으로 와서 인종과 함께 경사를 지키다가 주고후의 외삼촌인 서휘조가[1] 주고후의 오만방자한 성격을 보고는 법도를 지키라고 충고했으나 듣지않았고 멋대로 서휘조의 말을 훔쳐 타고는 서휘조와 건문제한테 인사도 없이 도성을 떠나는 무례함을 보였다. 도성을 떠나는 과정에서도 백성들과 관리들에게 행패를 부리며 백성과 관리를 죽이기까지 했다.
정난의 변 때 아버지 주체를 따라 종군해 수천의 기병을 거느리고 나아갔다.[2] 동창에서 패해 주체가 달아나고 장옥이 전사하자 고후는 군대를 거느리고 싸워 조정의 남군을 격퇴했으며, 연의 군사가 포자구에서 서휘조에게 패하자 기병을 이끌고 돌아왔다. 주체가 내 힘이 피곤하지만 용감하게 다시 싸워야 한다고 하자 주고후는 직접 선봉장이 되어 기병을 이끌고 남군을 물리쳤으며, 이 공으로 영락제는 주고후를 형 주고치보다 더 총애한다. 그러나 주고후는 자기 능력만 믿고는 교만하고 방자해 법을 지키지 않았다.
영락제가 즉위하자 황태자를 세우는 것에 논의하면서 무신들과 일부 대신들은 장남인 주고치 대신 주고후를 후계자로 삼을 것을 주장했고, 기국공 구복, 부마 왕녕선 등이 주고후가 공이 많다는 것을 들어 주장했다. 그러나 영락제는 주고후가 공이 많고 재주가 뛰어났지만 성질이 난폭하고 언행이 좋지 못한 것으로 인해 대신들의 반대에 부딪혔고 주고치도 몸이 좋지 않아서 고민했는데, 해진의 조언으로 주고치의 아들이자 영락제의 장손인 주첨기를 염두에 두어 주고치를 황태자로 세운다.
주고후는 영락제가 한왕에 봉해 영지는 운남에 있었지만 귀양이라고 항의하며 남경에 남아 봉지에 가지 않았고, 자신을 당태종에 비유해 천책위의[3] 호위를 받으며[4] 오만방자하게 행동했다. 1415년에 청주를 봉지로 고쳐받았지만 부임하지 않고 그대로 도성에 남았다. 영락제가 북방을 순시하러 도성을 떠나있는 도중 주고후는 군사들을 몰래 모아 사병을 양성하는것은 물론 도성의 백성들을 약탈하는 행패를 부린다. 이때문에 병마지휘사 서아려가 주고후의 일당을 벌하자 격분하여 직접 찾아가 철퇴로 서야려를 때려죽였다. 게다가 황제의 기물까지 멋대로 사용하는 등[5] 더욱 오만방자하게 행동한다. 나중에 북방을 순시하고 돌아온 영락제는 자신이 없는동안 주고후가 도성에서 저지른 악행과 아버지의 기물을 멋대로 사용했다는것을 알게되자 크게 분노하여 주고후를 체포한다음 그의 의관을 벗겨 서금문에 가둔다. 영락제는 주고후를 서민으로 폐하려 했지만 형인 황태자 주고치가 사정해서 무사했으나 주고후는 군대를 몰수당하고 안주를 봉지로 고쳐받은다음 도성에서 쫓겨나 영락제가 죽을 때까지 도성으로 오지 못한다.
영락제가 사망하고 홍희제를 거쳐 선덕제가 즉위하고 주고후는 선덕제로부터 하사품을 다른 황족들보다 많이 받는 특혜를 누렸으나 여전히 오만방자했다. 나중에는 1426년 8월에 안주에서 오군도독부를 세워 산동 도지휘인 근영과 함께 반란을 일으키기로 하며, 목청을 북경에 보내 영국공 장보와 내통하게 했다. 그러나 장보가 목청을 붙잡아 명 조정에 알리면서 발각되었다.
주고후는 맨처음에는 낙안주의 군대를 소집하여 저항했으나 선덕제가 직접 대군을 이끌고 출정해 낙안주 성까지 오면서 민심이 흩어지고 병사들도 전의를 상실하자 투항하기로 하는데, 항복 의사를 밝히면서 하룻 동안 시간을 달라고 했다. 그러면서 무기와 반란 문서들을 불태우고 지하 갱도로 도망치다가 관군에게 붙잡혔다. 주고후는 서민으로 폐하여 아들과 함께 서안문 안의 소요성에 감금되었고, 그의 부하들과 내통한 사람들은 전부 처형되거나 유배되고 변방으로 추방된다.[6] 이후 소요성에 감금되어 살다가 선덕제가 소요성으로 찾아오자 갑자기 주고후가 뛰쳐나와 선덕제의 다리를 걸어 넘어뜨렸다.
이에 화가 치민 선덕제가 근위병들을 시켜 주고후를 제압한 다음 300근이나 되는 구리독에 집어 넣어 덮게 했으며, 주고후의 힘이 세서 구리독을 머리에 이고 있는 채로 일어섰다. 그래서 더욱 화가 난 선덕제가 다시 집어넣은 다음 독 위에 불을 피우게 하자 구리독이 불에 녹으면서 주고후는 불에 타 죽었다. 그의 아들들 역시 모두 처형된다.
전체적으로 보면 뛰어난 인재였으나 난폭하고 오만한 막장인성 때문에 화를 초래하여 결국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 인물. 영락제의 걱정대로 황제가 됐다면 폭군이 되었을 것이다. 무엇보다 영락제가 나름대로 명분이 있는 쿠데타를 통해 황위에 오른 것과 달리 주고후는 명분도 없는 쿠데타, 그것도 조선의 계유정난보다도 더더욱 명분이 없는 쿠데타를 일으켰으니, 정통성 문제 또한 영락제보다 훨씬 심해졌을 것이다.
[1] 홍무제의 측근이자 충신인 서달의 아들.[2] 주고후는 힘이 세고 승마와 궁술을 잘했다.[3] 명나라에서 황궁을 지키고 황제를 호위하는 황제 직속의 근위대다. 인원은 5천명이다.[4] 물론 주고후 독단으로 하지 못하고 영락제에게 간청하여 호위를 받게 되었다.[5] 영락제의 용포와 말, 수레를 멋대로 썼다. 이정도면 패륜에다 반역죄나 다름없는 셈이다.[6] 640명이 처형되고 1500명이 유배되었으며 720명이 변방으로 추방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