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희제

 


'''
仁宗
인종 홍희제
'''
'''묘호'''
'''인종(仁宗)'''
'''시호'''
경천체도순성지덕홍문흠무장성달효소황제
(敬天體道純誠至德弘文欽武章聖達孝昭皇帝)
'''연호'''
홍희(洪熙)
'''성'''
주(朱)
'''휘'''
고치(高熾)
'''생몰 기간'''
1378년 8월 16일 ~ 1425년 5월 29일(46세)
'''재위 기간'''
1424년 9월 7일 ~ 1425년 5월 29일(264일)
'''황후'''
성효소황후(誠孝昭皇后)[1]
'''부황'''
주체
'''모후'''
인효문황후
1. 개요
2. 생애
2.1. 재위
3.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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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중국 명나라의 제4대 황제. 묘호는 인종(仁宗), 시호는 경천체도순성지덕홍문흠무장성달효소황제(敬天體道純誠至德弘文欽武章聖達孝昭皇帝). 이름은 주고치(朱高熾)이고, 연호는 홍희(洪熙)이다.
영락제인효문황후의 큰아들이며, 선덕제의 아버지이며, 정통제경태제의 할아버지이다. 참고로 어머니 인효문황후는 명나라 개국공신인 서달의 딸로 홍희제는 서달의 외손자다.

2. 생애


영락제가 18세에 얻은 자식으로 1395년 당시 연왕이었던 주체의 후계자로써 연왕 세자(世子)에 책봉되었다. 정난의 변 당시에는 연의 땅을 맡아 지켜 주체의 총애를 받았고, 주체가 황제로 즉위하자 황태자가 되었다. 주고치는 항상 인자했으며, 자상했다고 한다. 주고치의 이러한 성격은 어머니 인효문황후의 영향을 받았다.[2]
문무에 뛰어났지만, 어릴때부터 병약하였으며 건강이 좋지 않다는 문제가 있었다. 게다가 비정상적으로 뚱뚱하여, 성인이 되었을 무렵에는 스스로 걷기도 힘들어 가마나 수레를 타고다녀야할 정도였다고 한다.(...)[3] 때문에 영락제는 그를 폐위하고 차남인 한왕 주고후를 새로운 황태자로 삼는 걸 염두에 두기도 했지만, 주고치가 장자인데다가, 주고후의 성격이 너무 거칠어서 무산되었다.[4] 그 후에는 그의 장남인 주첨기(선덕제)가 어렸을 때부터 황제의 자질을 보였고, 자신의 부인인 황태자비 장씨[5]에 대한 총애가 있었기 때문에 황태자 자리를 유지할 수 있었다.

2.1. 재위


영락제는 궁궐을 자주 비우고 외정을 나갔으므로, 그럴 때마다 태자로서 황제를 대신하여 황제의 업무와 정사를 맡아 보았다. 때문에 홍희제는 즉위하자마자 능숙한 유교 정치를 펼쳐, 정난의 변 당시 멸문당한 일가를 신원하는 등의 선정을 펼쳤다.
재위 시절 종 5품의 내각 대학사를 겸직 벼슬 임명으로 정 3품까지 품계를 올렸다. 명 태조 시기에 승상 폐지 이후 대체 수단으로 만든 황제의 단순비서였던 이 직책은 홍희제 시대에 변화되어 다음 황제였던 선덕제 시기엔 표의권[6]이 부여되고 육부 상서들[7]의 겸직등으로 정1품까지 상승되어 내각 대학사들은 국가 정책에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게 되었다.
아버지의 팽창 정책에 부정적이었던[8] 황제로, 정화의 원정을 취소했으며[9] 또한 홍희제는 태생이 남경 출신인지라, 춥고 황량한 북경을 싫어하였다. 말년에는 명을 내려 남경천도를 검토하고, 황태자 주첨기를 보내어 천도를 준비하도록 일렀으나, 원래부터 몸이 약하고 병치레가 잦았던터라 황제가 되어서도 병에 시달리다 재위 10개월만에 사망, 1년도 채 재위하지 못한 채 죽고 말았다. 그래서 천도는 흐지부지되고 북경은 제국의 수도로서 그 위상을 지금까지 굳건히 지키게 된다.
가족으로는 성효소황후 장씨와 3남 1녀가 있다. 사후 맏이인 황태자 주첨기가 황위를 계승하니 그가 바로 선덕제이다.

3. 평가


영락제의 대외 사업 전반에 제동을 걸어 명나라 역사를 (어쩌면 필연적으로) 다시 '중화의 길'로 복귀시킨 인물이다.
그리고 조선시대에 비교하면 세대상 세종 포지션이라 할 수 있지만, 재위 기간이 짧고 병마에 시달리고 아버지 재위시절 오랫동안 보좌했으므로 문종 격이라 할 수 있다. 성격이 온화하고[10] 뛰어난 재능을 지녔지만, 병마에 시달려 요절한게 공통점이다.[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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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월 복속기의 역대 군주'''
영락 주체

'''홍희 주고치'''

선덕 주첨기

[1] 선덕제를 낳았던 사람이다. 이 사람도 남편이 재위한지 1년도 안되어 먼저 보냈고, 아들 선덕제도 10년 년 재위해서 세상을 떠나서 이런 아픔을 겪었다. 후일 손주인 주기진이 황제가 되었는데, 손주의 황후인 효장예황후 전씨를 이 사람이 직접 뽑았다. 다행히 손주 부부는 금실이 좋았지만.[2] 실제로도 인효문황후는 남편 영락제와 금슬이 좋았으며 그녀가 영락제보다 먼저 사망했을때 영락제는 죽을때까지 황후를 들이지 않았다.[3] 이는 주고치가 학문을 좋아한 나머지 무예와 같은 활동적인 운동을 싫어했기 때문이다.[4] 사실 거친걸 넘어서 오만하고 난폭한 성격에다 예의가 없어 각종 문제를 일으키다보니 즉위할 경우 폭군이 될까봐 영락제와 신하들이 우려했다.[5] 성효황후 장씨[6] 황제에게 올라오는 각종 상소에 자신의 의견을 덧붙일 수 있는 권한. 대개의 표의들은 그대로 황제의 명령으로 실행되었다.[7] 명. 청 시대의 6부 상서들은 조선의 판서와는 다르게 품계가 종 1품이었고 제1, 2차관격인 좌.우시랑이 각각 정 2품, 종 2품이었다.[8] 왜냐면 아버지의 팽창 정책으로 인해 비용부담이 심했다.[9] 하지만 정화의 기록을 모조리 말살했다는 것은 또 사실과 다르다. 그렇다면 후에 편찬 된 명사에 정화의 기록이 남을리가 없다.[10] 실제로 홍희제는 홍무제부터 억눌려졌던 내각의 권한을 부활시켜주고 신하들과 항상 의견을 상의하며 그들을 존중해주었기에 신하들과의 관계가 좋았다.[11] 그리고 한왕 주고후는 용맹하고 몸이 건강하지만 난폭하고 야심만만해 황태자가 될수 있음에도 신하들의 우려를 받아 취소되었다. 특히 조카의 황위를 찬탈하려는 야심을 지닌 면에서 세조와 비슷하다고 할 수 있는데, 차이점은 세조는 주고후 정도로 인성이 완전히 막장은 아니었고 단종도 어렸으며 숙부인 세조에게 권력을 찬탈당했다는 점이다. 반면 선덕제 주첨기는 즉위 당시 성인이였고 제왕학을 다 배운 상태라서 권력 찬탈을 시도한 숙부 주고후를 역관광보냈다. 그리고 살려주려 했더니 주고후가 적반하장격으로 그를 걷어차며 안하무인하게 굴어서 화가 머리 끝까지 난 선덕제가 주고후를 역모죄를 적용하여 극형에 처했다는게 다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