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무제

 




太祖
태조 홍무제

묘호
태조(太祖)
시호
개천행도조기입극대성지신인문의무준덕성공고황제
(開天行道肇紀立極大聖至神仁文義武俊德成功高皇帝)
연호
홍무(洪武)

주(朱)

원장(元璋)[1][2]

국서(國瑞)
부황
인조(仁祖) 주세진(朱世珍)
출생지
(元) 호주(濠州) 종리(鍾離)
(현 안후이 성 펑양(鳳陽) 현)
사망지
남경 황궁 서궁(西宮)
능묘
남경 효릉(明孝陵)
황후
효자고황후
생몰 기간
음력
1328년 9월 18일 ~ 1398년5월 10일
양력
1328년 10월 21일 ~ 1398년 6월 24일
(70세, 총 25,449일)
재위 기간
음력
1368년 1월 4일 ~ 1398년 윤5월 10일
양력
1368년 1월 23일 ~ 1398년 6월 24일
(30년, 총 11,110일)
1. 개요
2. 생애
2.1. 명나라 건국 이전
2.1.1. 환영받지 못한 출생
2.1.2. 어린 나이에 부모를 잃다
2.1.3. 절에 의탁하다
2.1.4. 인생의 변환점
2.1.5. 죽마고우들과 합하다
2.1.6. 주군에 대한 충성심
2.1.7. 한족의 1인자
2.2. 명나라 건국 이후
2.2.1. 통치
2.2.1.1. 기강을 바로잡다
2.2.1.2. 치륭당송
2.2.2. 아내
2.2.3.1. 숙청 옹호론 : 이유가 없는 숙청은 아니다.
2.2.4. 대외 관계
2.2.5. 사후 후계 구도 관련 실책
3. 외모
4. 그 외
5. 대중매체에서
6.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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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명 태조는 성현의 면모, 호걸의 기풍, 도적의 성품을 동시에 가진 사람이었다.

청나라의 고증학자 조익

의 창업 군주. 묘호는 태조(太祖),[3] 시호는 고황제(高皇帝).[4] 휘는 원장(元璋).[5] 연호는 홍무(洪武). 그리고 연호를 붙여서 홍무제(洪武帝)[6]라고도 불린다. 보통 본명인 주원장으로 유명하다.
문자 그대로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는 가장 밑바닥 신분에서 출발, 중국 대륙을 통일한 국가의 황제 자리에까지 오른 말 그대로 입지전적인 인물이다.[7]
숙청의 황제로도 유명하다. 중원을 통일한 이후에는 황권의 강화를 위해 공신을 비롯한 많은 신료들과 그 가족들을 가차없이 숙청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도합 10만 명 정도의 측근과 그 일족들이 숙청으로 목숨을 잃었다.

2. 생애



2.1. 명나라 건국 이전



2.1.1. 환영받지 못한 출생


주원장은 1328년 9월 18일 원나라 안후이성 봉양현 지방에서 가난한 농부인 아버지 주세진과 어머니 진씨 사이의 막내 아들로 태어났으며[8], 아명은 중팔(重八)이었다. 그러나 그의 탄생을 누구도 기뻐하지 않았다. 그의 부모는 배고픔과 영양실조로 얼굴이 누렇게 뜬 자식들을 보며 눈물을 지었고, 입이 하나 늘었다는 부담감에 한숨을 내쉬었다고 한다. 더구나 주원장은 아버지 주세진이 46세, 어머니가 42세일 때에 태어난 늦둥이였다. 주원장의 아명이 중팔이인 까닭도 아버지의 나이와 어머니의 나이를 합치면 88, 즉 복으로 8이 있다 하여 붙은 이름이었다.[9]
태어난 시기가 원나라 말기로 국가 사회 자체는 막장일로를 걷고 있고[10], 심한 기근에 각지에서 도적들이 들끓으면서 어릴 때 꽤나 고생하였다. 주원장은 배고픔과 가난을 숙명처럼 받아들였다. 그러나 사춘기의 아이들에게 배고픔은 참을 수 없는 고통이었다.
소년 시절 지주를 치기도 했었는데, 너무 배고픈 나머지 친구들과 작당하여 송아지 한 마리를 잡아먹고 꼬리만 남겨서 바위틈에 끼워 놓고는, 지주에게 송아지가 아무리 당겨도 나오지 않는다며 얼렁뚱땅 둘러댔다. 그러나 지주도 얼간이는 아닌지라 화가 머리끝까지 나서 소년들, 특히 사건의 주동자였던 주원장을 엄청나게 때렸다고 한다.
물론 이 일로 인해 주원장은 목장 주인에게 매를 맞고 쫓겨나는 신세가 되었지만, 그의 친구들의 허기를 채워주기 위해서 과감하게 송아지를 잡고 자신이 모든 책임을 진 일은 친구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훗날 명나라의 개국 공신이 되는 서달, 탕화, 주덕흥 등이 당시 주원장과 함께 목동 노릇을 한 친구들이었다.

2.1.2. 어린 나이에 부모를 잃다


그러다가 17살이 되던 해에 심한 가뭄이 들고 메뚜기 떼에 전염병까지 돌아 마을은 줄줄이 초상집이 되었는데, 이러한 화는 주원장의 가족도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주원장은 부모와 큰 형을 잃었다.[11]
일단 주원장은 죽은 사람들의 장례라도 치르려 했지만 성대한 장례는 어림도 없는 일이었고, 심지어 가족들을 묻을 땅조차도 구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시체 썩는 냄새가 온 마을에 진동하자 마을 사람인 유계조(劉繼祖)가 그 광경을 차마 볼 수 없어서 땅을 내놓아 간신히 매장은 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훗날 황제에 등극한 주원장은 당시를 회상하며 이렇게 말했다.

짐이 옛날에 가랑이가 찢어지게 가난했을 때, 우리 가족 가운데 목숨을 부지한 자는 먹을 것과 입을 옷이 없어서 고통을 당했고 역병에 걸려서 죽은 자는 그 시체를 급히 매장할 땅조차 구하기 어려운 형편이었지. 아, 얼마나 힘들고 고통스러운 세월이었던가.

이후 황제가 된 주원장은 그 당시 아무것도 없는 자기 부모를 위해 흔쾌히 묏자리를 내준 유계조에게 의혜후(義惠侯)라는 작위를 하사함으로서 보답했다고 한다.

2.1.3. 절에 의탁하다


그러나 절도 형편이 개판이기는 마찬가지였기에 황각사에 몸을 의탁한지 50여일 만에 그는 할 수 없이 탁발승[12]을 했다. 당시의 탁발승은 승려라기보다는 걸인 취급을 받았고, 주원장은 부잣집 대문 앞에서 목탁을 치며 염불을 외는 자신을 무척 초라하고 비굴하게 느꼈다. 그리고 이 때 당한 굴욕감은 황제가 되고 나서도 지워지지 않는 상처로 남게 되었다.
그렇게 탁발승의 인생을 살다가 어렸을 적에 그와 함께 목동 노릇을 했던 죽마고우 탕화가 비밀리에 서찰을 보냈다. 곽자흥(1302~1355)이 이끄는 홍건군에 종군하라는 내용이었다. 상기한 대로 어렸을 적의 행동력이 친구의 머리 속에 인상깊게 남아있었던 덕이었다.

2.1.4. 인생의 변환점


지정 12년(1352) 정월에 안휘성 정원현의 토호 곽자흥이 손덕애와 연합하여 호주에서 반란을 일으키자 수만 명의 농민들이 호응했다. 곽자흥은 자신이 백련회의 수령이 되었음을 선포하고 호주성을 점령했다. 첫 전투에서 승리를 거둔 곽자흥은 원수를 자칭하고 호주 일대를 지배하기 시작했다. 천하 대란의 와중에 '주중팔'의 고향 호주에서 곽자흥이 실질적인 지배자가 되자 중팔은 흥분을 억제할 수 없었다.
주중팔은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곽자흥 휘하의 홍건적에 가담[13]하였는데 그 시기는 명확하지 않다. 하여튼 1352년 전후로 주원장의 나이로 따지면 대략 24~25세 정도 시기로 추정하고 있다.
처음에는 홍건적 내에서 일개 병졸에 지나지 않았지만, 공훈을 세우면서 승승장구하여 오로지 본인의 실력만으로 곽자흥 군단의 2인자 위치까지 오를 수 있었다. 이 과정에서 곽자흥의 양녀 마씨와 결혼을 하여 사위가 되었는데, 그녀는 곽자흥의 절친한 친구 마공의 딸이었다. 마공 사후에 친구의 어린 딸을 양녀로 삼아 예뻐하며 키웠는데 그런 귀한 딸을 내어준 것이다. 이는 곽자흥이 주원장에게 상서로운 기운이 있어서 사위로 삼았다는 설과, 주원장의 능력을 질시하고 두려워하여 사위로 삼았다는 설이 있다. 여하튼 이때 주원장은 곽자흥 부대에서 주공자라는 칭호를 얻었으며 이름도 주원장으로 고쳤다.
당시 곽자흥은 호주성에서 주둔하고 있던 홍건군을 완전히 장악하지 못했다. 손덕애를 중심으로 한 또 다른 일파가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곽자흥 파벌과 사사건건 대립했다. 지정 12년(1352) 가을 원나라 승상 탈탈이 기병을 거느리고 와서 홍건군의 주장 이이가 지키고 있던 서주성을 함락시켰다. 서주성의 백성들이 모조리 도륙을 당하고 이이도 포로로 잡혀 참살을 당했다. 이때 팽대와 조균용이 지휘하는 홍건군이 서주성에게 가까스로 탈출하여 호주성으로 들어왔다.
곽자흥은 지모가 뛰어난 팽대를 우대한 반면 산적 출신 조균용을 무시했다. 손덕애는 조균용을 부추겨서 곽자흥을 제거하려고 했다. 얼마 후 손덕애의 사주를 받은 조균용은 곽자흥이 혼자 군영에서 나온 틈을 타서 그를 포박하고 손덕애 진영으로 끌려가 감옥에 가두었다. 그 때 주원장은 화북지역에 있었는데 장인의 목숨이 위태롭다는 소식을 듣고 황급히 호주로 달려가서 곽자흥의 두아들을 대동하고 팽대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팽대는 즉시 병사들을 소집하여 주윈장과 함께 감옥을 습격하였고 곽자흥은 두 사람 덕분에 가까스로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 이처럼 장수들 사이에 반목이 심각했기 때문에 그들이 호주 밖으로 세력을 넓힐 수 없었던 것이었다.

2.1.5. 죽마고우들과 합하다


이러한 모습을 본 주원장은 사병을 거느리지 못하면 자신에게도 위험이 닥칠 수 있다고 생각해 곽자흥에게 장인을 위해 병사를 증원하겠다고 의심을 피하는 말을 하여 간청한 끝에 고향 종리로 돌아오게 된다. 지정 13년(1353) 주원장은 고향에서 병사를 모집했는데, 그가 홍건군의 두목이 되어 돌아왔다는 소식이 순식간에 퍼졌고 목동 노릇을 하면서 어울렸던 서달, 주덕흥, 곽영 등의 죽마고우들이 그의 수하로 들어왔다.[14] 이렇게 고향에서 그의 뜻에 감복하여 생사고락을 맹세한 병사들이 700여 명이나 되었다. 주원장은 병사들을 이끌고 다시 호주성으로 돌아와 곽자흥을 복종했다. 사위의 변함없는 충성심에 감탄한 곽자흥은 크게 기뻐하며 그를 진무로 승진시켰다.
한편 곽자흥의 고향 정원은 호주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인데, 정원의 장가보에는 원나라에 반기를 들고 일어난 민병 3천여 명이 주둔하고 있었다. 그들은 홍건군에 귀부하지 않은 세력이었고 이에 주원장이 군영으로 다가가 3일 안에 귀순을 권유했으나 수령이 거절하자 300여 명을 거느리고 계책을 세워 수령을 사로잡고 민병 3천여 명의 항복을 받아냈다. 이때 활비산에 주둔하고 있던 민병 800여 명도 주원장의 부대로 편입되었다.
이렇게 병력 증강에 성공한 주원장은 밤을 틈타 정원 횡윤산에 주둔하고 있는 원나라 군영을 공격했고 원나라 장수 무대형이 투항하여 마침내 정원성이 주원장의 수중에 들어왔다. 주원장은 항복한 병사들 가운데 한족 출신 병사 2만여 명을 뽑아 자신의 부대에 편입시켰다. 정원이 함락되자 그곳의 토호 풍국용과 풍국승 형제가 농민군을 거느리고 투항하러 왔다. 주원장은 풍씨형제가 사대부임을 알고 그들에게 천하를 취할 계책을 물었는데 이들은 금릉을 취해 근거지로 삼은 연후에 사방으로 나가 정벌하고 인의를 제창하며 민심을 수습하고 금은보화와 여색을 멀리한다면 천하는 어렵지 않게 평정될 것이라고 말했다. 주원장은 크게 기뻐하며 풍씨 형제를 군영에 머물게 하고 참예기무로 삼았다.
그가 정원을 평정하고 안휘성 저주로 진군하는 도중에 정원사람 이선장(1314~1390)을 만났다. 나이가 14세나 아래인 주원장이라는 호걸이 호주에서 일어나 정원을 평정했다는 얘기를 들은 이선장은 그가 어떤 인물인지 무척 궁금해서 직접 찾아가서 면담을 요청했다. 두사람은 만나자마자 의기가 통했고 주원장은 예를 갖추고 천하가 전란에 휩싸였는데 언제 안정을 찾을 수 있냐고 물었는데 그는 한나라 고조 유방을 언급하며 그는 도량이 넓고 사람을 잘 알아보고 적재적소에 썼으며 함부로 죽이지 않았던 까닭에 군사를 일으킨 지 5년 만에 제왕의 대업을 이루었다고 답하고는 원나라는 기강이 무너지고 사분오열로 분열되었는데 주원장의 고향 호주가 유방의 고향 패현과 멀리 떨어지지 않았으니 당신이 고향 선배의 장점을 배운다면 천하는 평정될 것이라고 답했다. 그와 면담한 주원장은 이선장이 보통 인물이 아님을 깨닫고 크게 기뻐하며 군영에 머물게 하고 각종 문서와 서적을 관장하는 서기의 직책을 맡겼고 이선장의 책략에 힘입어 저주성을 점령했다.
한편 호주성에서는 홍건군 수령들간의 반목이 여전히 끊이질 않았다. 지정 13년(1353) 겨울 팽대는 노회왕을 조균용은 영의왕을 참칭하고 세력싸움을 벌었다. 얼마 후 팽대는 병으로 사망한 후에는 조균용의 위세가 곽자흥을 능가했다. 조균용은 곽자흥을 협박하여 우이와 사천을 공격하게 하고 기회를 보아 그를 제거하려고 했다. 장인이 곤경에 처해있다는 소식을 들은 주원장은 사자를 보내 조균용에게 경고했다. 주원장의 수하에 적지 않은 군사들이 충원되었다는 얘기를 들은 조균용은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주원장은 또 조균용의 측근들에게 뇌물을 보내 장인을 돕게했다.

2.1.6. 주군에 대한 충성심


마침내 곽자흥은 병사 1만여 명을 거느리고 호주성을 떠나 사위가 있는 저주성으로 입성할 수 있었다. 곽자흥 군의 합류는 그만큼 주원장의 세력이 커졌다는 것을 의미했다. 당시 곽자흥의 실력은 주원장에게 미치지 못했다. 주원장이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곽자흥을 제거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는 예전에 곽자흥 수하에서 발바닥에 땀이 나도록 뛰어다닌 보졸이 아니라 이제 천하의 패권을 장악하려는 야망을 가진 장수였다. 하지만 그는 권력을 쥔 자의 일반적인 속성과는 다른 행보를 보여주었다. 곽자흥이 입성하자마자 그에게 3만 대군의 병권을 즉시 넘겨 주었다. 자기는 영원히 곽자흥의 충실한 부하임을 행동으로 보여주었다. 곽자흥은 이런 사위가 얼마나 고맙고 사랑스러웠겠는가? 더구나 병사들의 군기가 엄정하고 사기충천의 모습을 보니 기쁨에 겨워 춤이라도 덩실덩실 추고 싶은 심정이었을것이다.
지정 13년(1353) 겨울 탈탈이 거느린 대군이 고우에서 장사성의 군대를 격퇴하고 저주성에서 멀지않은 육합성을 포위했다. 북방에서 질풍노도처럼 밀려온 원군에 주원장도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육합성이 함락되면 저주성도 재앙을 면치 못할것이라 두려워했다. 그는 심복 경재성과 함께 와양루(강서성 육합현 서쪽에 있는 고와양성)에서 진지를 구축하고 육합성을 도왔다. 그가 육합성의 노약자들을 호위하고 저주성으로 돌아오자 탈탈은 즉시 추격해와 저주성을 공격했다. 주원장은 병사들을 매복시키고 유인 작전으로 탈탈의 군사를 격퇴했다. 하지만 맹호처럼 날랜 원나라 기병의 재침을 우려하여 포로로 잡은 병사들과 노획한 말들을 탈탈의 군영으로 돌려 보내주고 아울러 지역의 원로를 사자로 보내 슬과 고기로 원나라 장수들을 위로하게 했다. 그러면서 나는 다른 도적떼로부터 저주성을 지킬 뿐인데 왜 더 큰 도적을 쫒지않고 선량한 백성만 살육하냐고 읍소했다. 탈탈은 원나라 지배층 중에서 보기 드물게 한학에 정통한 정치가이자 군사 전략가였다. 중서성 우승상 직책을 맡았을 때 과거제를 부활시켜 한족 출신 사대부들을 적극적으로 포용할 정도로 국정을 다스리는 안목이 있었다. 주원장은 탈탈에게 철군을 요구했다. 과연 탈탈은 그의 뜻대로 철군했다.
지정 16년(1356) 주원장이 일거에 화주를 함락시켰다. 곽자흥은 그를 총병관에 임명하고 화주를 지키게 했다. 이 시기에 떠돌이 중에 불과했던 주원장의 비범한 능력을 알아보고 군웅의 한명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결정적인 도움을 준 곽자흥이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곽자흥이 병사하자 소명왕[15]은 곽자흥의 아들 곽천서를 도원수로, 주원장을 좌부원수로 임명했다. 소명왕에게 관직을 받은 주원장은 푸념했다. 그는 마음 속으로 한림아를 인정하지 않았다. 하지만 한림아의 송나라가 위세를 떨쳤기 때문에 그도 겉으로는 한림아의 신하로서 군대를 통솔했다.
지정 16년(1356) 원군이 강남의 중심 집경(지금의 남경)을 공격할 때 곽천서가 잡혀 살해당했다. 이때 주원장은 대원수로 승진하고 곽자흥의 군대를 전부 거느리게 되었다. 화주에 주둔한 지 얼마 안 되어 군량미 공급에 차질이 생기자 장강 남안의 태평과 무호를 공략하기로 결심했다. 그러나 주원장에게는 수군과 선박이 없었는데 때마침 안휘지방 소호에 주둔하고 있던 홍건군의 수군이 주원장에게 귀부의사를 밝히고 원군의 봉쇄를 뚫고 화주에 도착했다. 주원장은 병사와 군마를 배에 태우고 장강을 건너 우저산에 진을 치고 휘하장수 상우춘을 선봉에 세웠다. 그의 저돌적인 공격은 우저산을 주원장의 수중으로 들어가게 했다. 그리고 내친김에 장강 하류의 태평(지금의 안휘성 안산시 당도현)으로 진격해 역시 수중에 들어오게 된다. 성에 입성하자마자 노략질을 엄금하고 백성의 재물을 보호했으며 민폐를 끼치는 병사가 있으면 즉시 참수형으로 다스렸다. 그는 그곳에 태평흥국익원수부를 설치하고 난 뒤 스스로 원수의 지위에 오르고 이선장을 수부도사로 임명했다. 태평을 근거지로 세력확장을 본격적으로 시도한 것이다.

2.1.7. 한족의 1인자


주원장은 이제 곽자흥이 사망하고 그의 아들 곽천서까지 죽자 명실상부한 반란군의 지도자로 추대되었으며 1356년에 난징을 점령하면서 남부 지방에 할거하던 군벌의 한 세력으로 굳건히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특히 여러 지역을 공격하면서 만난 지식인과 사대부들과 교류를 하면서 그들의 조언에 따라 세력을 운영하는 한편 이들을 기용하여 효과적인 행정 정책을 수립하며 비약적인 성장을 이루게 된다. 그리고 이들에게서 중국어와[16] 중국 역사, 각종 지식, 유교 경전을 배우면서 사실 상의 제왕 수업을 받았다. 이 시기까지 주원장은 상당한 세력을 갖추고 있었지만, 스스로를 오국공(吳國公)이라 칭했을 뿐이며 홍건적의 우두머리이자 의 후계자를 자칭하고 있던 한림아의 신하에 머물러 있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주원장은 원나라와는 직접 많이 싸우진 않았다. 오히려 주원장은 다른 한족 군벌들과 세력을 다퉜을 뿐, 원나라와의 다툼은 다른 한족 군벌들이 상대하도록 내버려 뒀는데 이게 오히려 득이 되었다. 원나라를 뒤엎을 정도로 강력한 세를 가졌던 홍건군의 유복통이 차칸 테무르에게 박살난 뒤에 주원장의 세력이 원나라의 사정거리 안에 들게 되었지만 운 좋게도 차칸 테무르가 원 내부의 내분에 휘말려 남하를 못하게 된 덕에 주원장은 안심하고 진우량과의 결전을 준비할 수 있게 되었다.
파양호 대전에서 승리한 후, 1364년 최대의 적이었던 진우량의 세력을 격파하고 그 영역을 흡수한 후에는 스스로 '오왕'임을 선포하였고, 1367년 몽골족의 위험에서 한림아를 보호하기 위해 난징으로 모시고 오던 중에, 주원장이 의도적으로 일으킨 것으로 추정되는 침몰 사고로 한림아가 익사하고, 또 다른 적수였던 장사성이 원에 투항하면서 사실상 남부 지방의 패권을 장악하는데 성공한다.
이후 서달과 상우춘에게 25만 대군을 주어 북벌을 단행하는 한편, 1368년 초 신하들의 권유를 받아 스스로 의 황제가 되었음을 선포하기에 이르렀다.

2.2. 명나라 건국 이후



2.2.1. 통치


[image]
치륭당송(治隆唐宋), 강희제 어필, 난징 효릉
(명나라의 치적이 당나라와 송나라보다 더 융성했다)
계속 북벌을 단행하면서 원나라 군대를 상대로 연전연승을 거둔 끝에 1368년 여름에 원나라의 수도 대도(현재의 베이징)를 점령하고, 원나라를 만리장성 북쪽으로 몰아내면서 중국 대부분의 지역을 장악하는데 성공했다. 하지만 그 뒤로도 계속해서 중국 각지에 남아 있는 몽골의 잔여 세력과 끊임없이 전쟁을 해온 까닭에 실질적으로 중국 전 지역을 완전히 통일했다고 할 수 있는 것은 중국 내 마지막 원나라 세력이던 윈난의 양왕을 제압한 1382년이 되고 나서부터였다.
수도도 지금의 북경이 아니라 남경에 있었는데, 명나라는 중국 역사에서 최초이자 유일하게 강남에서 들고 일어나 전국을 장악하는데 성공한 왕조였다.[17] 중국 대부분을 장악한 것은 훨씬 전이지만, 1382년을 기점으로 잡는 이유는 이때부터 확장을 멈추고 수성으로 돌아섰기 때문.[18]

2.2.1.1. 기강을 바로잡다

하여튼 명나라 초기에는 몽골족과 싸우면서, 착실하게 원나라 말기 막장이 되었던 사회 기강을 바로잡고, 행정 체제를 정비하면서 명나라의 기틀을 닦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원나라 시기에 있었던 과거 제도를 철저하게 시행 및 감독하여, 유능한 인재들을 관료로 등용하려 하였다.[19]

2.2.1.2. 치륭당송

특히 어렸을 적 고생의 영향으로 탐관오리의 부정 부패를 끔찍히도 싫어했기에 관료들의 기강을 철저하게 단속하였다. 그리고 오랜 혼란으로 황폐화된 토지 개간을 장려하여 농업 생산력을 끌어올리며 사회를 안정시켰다. 훗날 청나라 강희제가 강남을 순행하면서 홍무제가 안장된 효릉에 참배한 후 홍무제를 기리는 의미에서, 그의 치세가 중국 역사에서 번영의 상징으로 꼽히는 당나라, 송나라와 같다는 의미의 '치륭당송(治隆唐宋)'이라는 네 글자를 친필로 써 비석을 세웠던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였다.
명 태조 주원장은 왕후장상의 씨가 따로 있지 않다는 것을 몸소 보여준 황제다. 서민 신분의 사람이 통일 왕조의 황제가 된 것은 전한유방에 이어서 두 번째였다.[20] 아무것도 없는데 허세만 부릴 줄 알았던 유방이나 돗자리를 팔던 유비와 마찬가지로 주원장도 하루하루 먹을 것을 걱정해야 하는 궁핍한 평민이었다. 그는 가장 밑바닥 계층 출신으로 시작하여 천하의 대권을 잡은 황제로 성공을 거둔 인물이었다. 사실 그 하나만으로도 민중의 영웅이 될 수가 있었다.
이러한 출신 성분과 이후의 치적으로 백성들 사이에서는 명군이란 평가를 받기도 하였지만, 신하들 사이에서는 폭군이란 다소 상반된 평가를 받기도 하였다. 이는 개국공신들을 쥐 잡듯이 족쳤기 때문이다. 개국 3대 공신 중 유기, 이선장 등도 비참한 말로를 겪었으며 살아남은 공신이 거의 없을 정도로 족쳤다.[21] 게다가 신하들의 사소한 잘못에도 노발대발하면서 두들겨 패는 일이 잦아서[22] 더더욱 심했다.
다만 백성들에겐 명군인데 신하들에겐 폭군이라고 엇갈린 평가를 받는 이유는, 아무래도 역사를 쓰는 사람들이 신하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지도자의 권력 한계상 백성과 신하 둘 중 하나만을 챙길 수밖에 없는데, 신하들은 자기들이 잘 살아야 태평성대라고 봤기 때문이다.[23][24] 다만 이를 감안해도 주원장의 잔혹함은 여느 폭군 못지않았다. 자세한 것은 하술.
특히 황권의 전제화를 최우선으로 삼았기 때문에 걸핏하면 공신들이 숙청의 칼날에 희생되었다. 숙청의 규모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인데, 명나라 건국 이후 죽어나간 공신과 그 가족들의 수는 수만 명에 이를 정도. 주로 초창기에는 공신들 중에서도 무장들이 많이 숙청되었으며, 말기로 가면서 행정 체제가 점점 안정 궤도에 접어들자 권신들까지 싸그리 제거해버렸다.
또한 엄청난 워커홀릭으로 유명했다. 명군이나 명재상으로 이름난 사람들의 대표적인 특징 중의 하나가 엄청나게 부지런했다는 것. 1390년 승상 호유용을 숙청하고 승상제도를 폐지했는데 이것은 황제가 승상의 일을 대신했다는 뜻으로도 풀이할 수 있다. 승상제를 폐지한 다음부터 죽을 때까지 20년 동안 엄청난 양의 업무를 일일이 소화하는 강행군을 이어나갔다. 그 아들이나 손자부터는 그 업무량을 감당하지 못하고 결국 보조하는 신하를 두기 시작했고 이것이 사실상의 승상제도처럼 변해버렸다. 그런데도 주원장은 죽을 때까지 승상을 두지 않고 본인이 직접 정무를 돌보았다. 기록에 따르면 한번은 얼마나 업무를 처리하는지 계산을 해봤는데 8일 동안 문서 3391건을 처리했다고 한다. 대략 하루에 처리한 것이 400건이 넘는 것이다. 이런 사정이라서 누가 1만 5천 자나 되는데 내용은 쥐뿔도 없고 쓸데없는 문서를 올렸는데 빡치지 않으면 그게 이상할 일...

2.2.2. 아내


[image]
위 사진의 사람은 주원장의 아내 효자고황후(孝慈高皇后) 마씨(1332년 ~ 1382년)였다. 이름은 수영(秀英). 회서 숙주 신풍리 출신이라고 하며 위에서 언급된 곽자흥의 양녀다.
그리고 중국사 최고의 국모로 꼽히는 여인 중 하나이다. 자세한 건 효자고황후 항목 참고

2.2.3. 숙청


주원장의 커리어 중 역사에서도 손꼽히는 유명한 행적이라면 숙청을 단연 빼놓을 수 없다. 주원장의 숙청은 그 규모와 잔혹성에 있어서 비교 대상을 찾기 힘들정도로 엄청난 규모였는데 그나마 주원장의 숙청에 그나마 비견될 수 있는 사례로는 '10족을 멸'한 것으로 유명한 주원장의 아들 영락제의 대숙청이다. 주원장은 자신을 도와 목숨을 걸고 싸웠던 공신들과 그 일족을 모조리 죽였는데, 숙청이 대상이 된 사람들과 학연 등 인맥이 있는 사람들까지 모조리 잡아 죽였기 때문에 주원장의 숙청으로 죽임을 당한 이들은 9만 또는 10만 명 이상에 달하는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 숙청이 비록 구세력을 구축하며 들어선 신생 국가에게 필요한 것이라고 변론하는 이도 있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주원장의 숙청은 필요 이상으로 너무나 대규모였던 데다가 너무나 잔혹했다. 참고로 송나라의 경우만 봐도 비교적 온건한 숙청이 이루어졌다.
주원장의 숙청은 그 규모도 어마어마하지만 그 방법 또한 너무나 잔인했다. 주원장은 어지러워진 치안과 사법 체계를 다시 세우기 위해 굉장히 잔인한 고대의 형벌로 범죄를 다스렸다. 특히 반역죄로 처형했을 때에는 허리를 자르는 요참형, 사지를 찢어 죽이는 거열형, 사람의 살을 포 뜨듯 떠내서 죽이는 능지형은 물론이고, 부정부패를 저지른 관리에게는 특별히 박피형을 내렸다.
여기서 박피형이란 말 그대로 그대로 사람의 가죽을 벗기는 형벌이다.[25] 주원장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벗긴 가죽을 허수아비 위에 둘러씌워 관청 문 앞에 세워놓게 했다. 흠좀무.[26] 심지어 그는 직접 형벌을 고안해내기도 했는데, 돼지 털을 벗기는 것에서 착안하여 소세(梳洗)라는 형벌을 만들었다, 빗으로 씻긴다는 뜻인데, 그 방법이 소름끼칠 정도로 잔인했다. 벌거벗은 죄수의 몸에 펄펄 끓는 물을 여러 번 뿌린 뒤, 철로 만든 빗으로 쓸어서 피부를 벗겨내는 형벌이다. 이는 피부만 벗기는 것이 아니라 뼈가 드러날 때까지 했다고 한다.
이 밖에도 무릎 연골을 빼내는 알슬개(揠膝蓋), 내장을 꺼내서 죽이는 추장(抽腸)을 비롯하여, 전갈을 풀어서 물려 죽이기도 했다. 그 가운데 가장 치욕스럽고 고통스러운 형벌이 바로 장형(杖刑)이었다. 자세한 내용은 문서 참고. 그러나 그는 이러한 끔찍한 형벌들을 즐겼는지, 아니면 죄인이 죽어가는 모습을 지켜보고 싶었는지, 이러한 형벌들을 집행하는데 직접 나와서 자신이 이러한 형벌들을 주도했다.
특히 형벌을 가할 때에도 천천히 매우 고통스럽게 죽이게 했다. 능지처참을 할 때에도 칼로 살살 피부를 그어가다가 중간중간 쉬어가면서 최대한의 고통을 느끼고 죽게 하였으며, 박피형을 행할 때에도 살을 천천히 벗겨서 죽기 직전까지만 살을 벗긴 다음에 잔혹하게 죽였다. 그리고 만약 중간에 형벌을 당하는 사람이 죽게 되면, 그 형을 집행했던 망나니가 사형을 당하게 되기 때문에, 망나니 또한 죽지 않기 위해서 더욱 더 고통스럽게 죽였다고 한다. 문제는 범죄를 다스리기 위한 엄벌주의와 별개로 순수하게 정치적인 숙청에까지 이런 혹형들을 폭넓게 활용해서 셀 수 없이 많은 공신들과 신하들이 끔찍한 고통 속에 죽어가게끔 하였다는 것이다.
마 황후가 살아 있던 시절에는 그런대로 이성적인 브레이크를 걸어가면서 숙청을 진행했던 거 같지만, 마 황후가 세상을 뜨자 폭주하는 기관차처럼 공신들을 무자비하게 공포와 폭압, 죽음으로 몰아넣은 것 같다. 이러한 온갖 잔혹한 형벌들은 조정을 공포 분위기에 휩싸이게 했고 신하들은 모두 황제를 무서워했다. 아침에 신하들이 등청하여 주원장을 배알할 때, 만약 옥대(玉帶)가 배꼽 위에 있으면 오늘은 사람을 죽이지 않거나 적게 죽이겠다는 뜻이어서 신하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지만, 만약 그가 옥대를 배꼽 아래로 누르고 있으면 그날은 사람을 대량으로 참혹하게 죽이겠다는 신호였으므로, 문무백관들이 모두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 공포에 떨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현대인들의 생각으로는 그렇게 두려우면 관직을 그만두고 낙향(樂鄕)하거나 은거(隱居)하면 되지 않나 하겠지만, 주원장은 그것조차도 용납하지 않았다. 주원장이 신하들에게 내린 명령들 중 '모든 백성들과 신하들은 오직 황제를 위하여 행동하여야 한다.'는 것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게 무슨 소리냐 하면, 이 명령을 어긴 신하, 한마디로 일을 고의로 대충 하거나 일을 그만두는 관리가 나오게 되면, 그 사람뿐 아니라 그 집안까지도 말 그대로 쑥대밭을 만들었기 때문에, 관리들은 관직을 함부로 그만둘 수도 없었다.
특히, 호유용 옥사의 잔재를 핑계삼아 일어난 남옥의 옥사 때 남옥을 포함한 호서파가 1만 5천명이 넘게 죽어나가서, 황태손 주윤문(후대의 건문제)이 제발 사람 좀 죽이지 말아달라고 직접 간청했다고 한다. 그러자 주원장은 "황위는 가시나무 몽둥이 같은 것이니, 자기 생전에 가시들을 다 제거해주려고 이런 짓을 한다"고 말했다는 일화도 있다. 다른 버전으로 황태손에게 가시 막대기를 들어보라고 했는데 들지 못하자, "내가 그 가시들을 전부 없애줄 것이다."라고 말했다고도 한다.[27] 또 명산장이라는 사료에서는 주표가 이에 대하여 "위에 요순같은 임금이 있으면 아래에 요순의 백성이 있는 법"이라고 반박하자 주원장은 화가 나서 주표에게 의자를 던졌다는 이야기도 있다. 그러고도 성이 차지 않아서 주표를 쫓아가며 때리려고 할 때 마침 주표가 그림 한 장을 떨구었는데 그 그림의 내용이 옛날에 마황후가 전장에서 홍무제를 업고 도망치는 장면이라 마황후 생각이 나서 멈췄다고 한다.
가장 유명한 것으로 좌승상 호유용을 비롯한 권신과 그 일가족 3만여 명(!)이 처형당한 사건인데, 이를 계기로 재상 제도를 폐지하고 중서성을 황제의 직속으로 두는 황제 친정 체제를 구축하였다.
주원장은 관료들을 황제의 통치를 위한 것, 현대식으로 따지면 컴퓨터 작업을 위해 필요한 키보드나 마우스 정도로 봤다. 말 안 듣는 마우스는 부셔버리고 새 거 사서 쓰면 되니, 아끼고 소중히 한다는 마음이 전혀 없었던 것. 그래서 사대부나 권신들이 크게 반발하였지만, 반발했던 권신들은 죄다 찍어 눌렀고, 그럴 만한 가능성이 있는 권신들도 죄다 죽어나갔기 때문에, 나머지는 그냥 황제의 지시대로 열심히 일을 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주원장이 중요 관료가 아닌 실무자는 가급적 건드리지 않았다는 것. 그래야 일을 하니까. 숙청의 목적은 언제까지나 황권 확보였기에, 황권을 침범할 가능성이 없거나 그럴 야망이나 능력 자체가 없는 자들은 가급적 손을 대지 않아서, 최소한의 신뢰성은 확보할 수 있었다.[28]
그 영향으로 홍무제의 황실 공식 어진은 위에 나온 것처럼 상당히 선하고 어진 임금의 인상이지만, 사대부 쪽에서 그린 어진은 아래에 나오는 것처럼 흉악한 폭군이나 다름없다. 다만 이렇게까지 한 것에는 어렸을 때 국가 막장 테크를 직접 체험하여 벼슬아치(혹은 높으신 분들)에 대한 혐오감이 심했던 탓일 수도 있으며, 실제로 명 초기에 부정 부패나 계급 고착화가 사라진 데는 주원장의 역할이 상당했던 것도 사실이다.
그의 숙청으로 수많은 개국 공신들이 죽었는데, 숙청 이전에 전사하거나 병사한 사람들을 제외하면 목영, 탕화[29], 경병문, 곽영, 장룡, 고성만이 숙청을 피했다.
이들 중에 경병문, 곽영, 고성은 정난의 변에도 관련된 인물[30]이다. 여기에 너무 만연하게 늘어지던 문장을 일소하고 실용적이며 간소한 문장을 지향한다면서 관리들을 후려쳤는데, 이 과정에서 관리들을 처벌한 것까지는 좋았지만, 문자의 옥마냥 여러 꼬투리를 잡아 죽이거나 탄압하고 연관되지 않은 사람들까지 희생시킨 점은 비난받는다. 문자의 옥만이 아니라 유학 경전을 탄압해서 절대 왕권에 방해가 될 만한 요소들을 모두 제거했다. 그리하여 나온 것이 진심편 등을 대거 덜어낸 맹자절문.
게다가 지나친 숙청으로 명대부터 강대한 황제의 권한을 견제할 수 있는 신권(臣權)의 위력이 송대에 비해 급격하게 줄어들었고, 이는 암군과 환관들의 발호 등을 불러왔다는 점에서 비판을 받기도 한다. 다만 환관이 날뛰는 것은 아들 영락제의 중용 때문이었고, 홍무제는 환관들을 확실히 찍어누르며 관직 임용에 제한을 가했다.
후대에는 자신과 같은 가혹한 형벌을 관리들에게 가하지 않게끔 조치하기도 하였지만 그래도 지나친 숙청과 잔혹한 형벌 그 자체로 비판을 받는다. 명 초기의 고문과 형벌은 전대의 왕조들보다 잔혹하기로 악명이 높았지만, 홍무제의 말에 따르면 그것은 왕조 초기에는 법이 엄해야 한다는 원칙과 더불어 기존 공신 집단 숙청 등에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이후에는 그럴 필요성이 없어졌기에 국가 반역자나 연쇄 살인범과 같은 중범죄자가 아닌 이상 혹형을 집행하지 않았으며, 초기를 제외하면 명대의 형벌이 지나치게 잔혹했다는 근거는 없다. 다만 황제 직속의 특무 기관인 금의위의 감시와 고문은 여전히 악명이 높았는데, 이들은 황제의 명령만 있으면 정식 사법기관의 절차를 거치지 않고 고문을 집행하여 무고한 자들이 끌려가 극심한 고통을 당하였다.
나중에 무고가 증명된다고 해도 과실을 인정하여 사과와 손해 배상만을 했을 뿐, 그 누구도 어떤 법적 책임을 직접 지지 않았다.명 왕조에서 공식적으로 규정된 형벌은 태장도유사의 5형이었지만, 홍무제는 자주 임의적인 형벌을 가하곤 했는데, 대표적으로 능지처사(陵遲處死)가 있다. 이러한 정식 형벌(5형)과 임의처벌(능지처사)이 공존하는 형태는 명대의 특징적인 모습으로, 한 - 당 - 송으로 이어지는 전통적인 5형과, 요 - 금 - 원으로 이어지는 이민족 왕조의 유산이 결합된 결과다.

2.2.3.1. 숙청 옹호론 : 이유가 없는 숙청은 아니다.

주원장의 숙청에 대한 변론을 하자면 위의 내용만 보면 그냥 닥치는 대로 사람을 죽인 미치광이 살인마로 보이나, 당시 시대적 상황상 숙청은 필요악이라고 볼 수도 있다.
  • 명나라는 중국 사상 기존의 한족 왕조나 한화족 왕조를 전조로 두지 않은 유일한 통일 왕조였다는 것이다. 무슨 말인가 하면 다른 신생 왕조들과 달리, 오랑캐의 침탈과 방만한 통치로 인해 흩어진 한족 중앙 정부와 황실의 권위를 처음부터 다시 세워야할 필요가 있었다는 것이다. 가뜩이나 송나라가 오랑캐 몽골에게 망해서 한족 중앙 정부와 황실의 권위가 바닥을 쳤던 데다 몽골인들의 행정력이 워낙 엉망이었던 탓에 명나라 건국 직전의 남중국에서는 신사-향리층이라 불리는 토착 세력가들이 중앙이고 뭐고 상관없이 알아서 멋대로 놀고 있었다. 중앙을 우습게 여기는 풍토를 없애려면 어느 정도의 숙청이 필요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마치 옆동네 왕조 국가였던 고려광종같이 말이다.
  • 이러한 숙청을 통해 그의 후대 황제들이 신하들에게 권력을 빼앗겨서 좌지우지되는 것을 막았고, 황후를 중심으로 한 외척 세력이나 환관들이 정치에 얼씬도 못하게 만드는 것에는 성공했다. 무엇보다 국가 성립 초기부터 개천에서 용이 나올 길이 막히면 그 나라가 어떻게 될지는 안 봐도 비디오라[31] 군주 입장에서 필요하다면 인위적으로라도 기존 지배 계층을 어느 정도 정리할 필요가 있었다.[32]

앞서 언급한 15,000명이 갈려나갔던 남옥의 옥사 때도 남옥은 공신인데다 황태자의 장인으로 당대 장수들의 성이 남씨라는 말이 돌 정도로 막강한 권력을 쥐고 재산을 거두고 있던 인물이었다. 몸을 사려도 모자랄 판에 더욱 기세가 등등해지니 홍무제 입장에서는 자신의 후대를 위해서 강경대응을 나설 수밖에 없었는데, 거기에 장환(蔣瓛)의 고발로 인해 모반 혐의까지 뒤집어 지는 바람에 엄청난 수의 사람들이 죽어 나간 것이다.
  • 밀수무역에 가담해 큰 돈을 벌어들인 그의 사위 구양륜을 자결케 하고[33], 자신의 딸이자 구양륜의 아내인 안경공주도 죽일 만큼 부정부패에 무척이나 민감해 했다. 차 때문에 딸 참수한 명 태조 주원장
  • 주원장의 출신도 한 이유가 될 것이다. 아무리 주원장이 몽골족을 쫒아내고 한족 왕조를 다시 세운 영웅이었다 해도 그는 본질적으로 찢어지게 가난한 농부의 집안에서 태어난 흙수저였고, 머리 깎고 중이 된 것도 말이 좋아 중이지 사실상 먹고 살 길이 없어 절로 들어간 거지와 다를 바가 없어서, 좀 지나서는 탁발이라는 명목으로 구걸하러 다니느라 바빴다. 그마저도 안 되니 도적단에 들어갔다가 본격적으로 일어선 바 있었다. 길바닥에서 언제 비명횡사해도 이상하지 않은 거렁뱅이 도적놈이 시류를 타고 능력을 발휘해서 중국 대륙을 통일한 새로운 나라의 태조가 됐긴 했지만, 냉정하게 말해서 그는 흙수저 부모 밑에서 태어나 자리잡기 전까지는 한 마디로 밑바닥 노숙자에 책 한번 펴볼 경제적 여유가 없어 공부 한번 제대로 못 해보고 승려 출신에다가 도적 집단에서 능력을 발휘해 어떻게 황제까지 된 인물로, 기존 기득권층은 그를 겉으로는 존중하는 척했지만 실제로는 무시하고 경멸했다.
이 상황에서는 좋게 가자고 착한 아이 모드로 일해봐야 호구 취급만 받을 뿐이다. 따라서 황제가 안 됐으면 모르되, 황제가 된 이상 숙청을 통해서라도 권위를 세울 필요성은 분명했고, 때려잡지 않으면 자기가 개같이 맞아죽을 상황이니 살고 싶으면 잔인해져야 했다. 주원장 본인이 잔인한 걸 좋아해서 숙청을 한 게 아니라 숙청을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특히 탁발승 시절과 도적 시절은 주원장의 대표적인 역린이어서 주원장은 그 시절을 수치로 여겨 그 앞에서 일체 옛날 일을 꺼내지 못하게 했고, 승려 생활 때 머리를 깎은 것 때문에 '빛날 광(光)'[34], '대머리 독(禿)' 자를 쓰거나 '승려 승(僧)' 자와 그것과 발음이 같은 '생(生)' 자를 쓰는 행위, 도적이란 의미의 '적(賊)'과 발음이 비슷한 '칙(則)' 자를 쓰는 행위를 무조건 처벌했다. 명 태조가 문자의 옥을 일으킨 것도 이러한 자격지심 때문이었다.

예를 들면, 항주의 유생 서일기가 올린 하표에 "광(光)천지하 천생(生)성인 위세작칙(則)"이라는 문구가 있었다. 이것은 '빛나는 하늘 아래 하늘이 성인을 낳아 세상을 다스리는 법칙으로 삼았다'라는 뜻으로 주원장을 성인으로 추켜세운 극찬의 글이었다. 그러나 정작 주원장은 이 문구를 읽고 분노를 터뜨렸다. 그는,

생(生) 자는 승(僧) 자와 발음이 비슷하니 그가 중 노릇을 했다고 비난했고

광(光) 자는 독(禿) 자와 의미가 통하므로 그가 대머리라고 비난했고,

칙(則) 자는 적(賊) 자와 발음이 비슷하니 그가 도적 노릇을 했다고 비난한 것.

이라 주장하며 참수하라고 명했다. 물론 억지였지만, 황제의 명령이고 반발을 잘못했다가는 공신 숙청 대상자 명단에 같이 올라갈 판이니 그대로 집행되었다.
그뿐만이 아니다. 뛰어날 수(殊)자를 쓴 사람도 죽였다. 이유가 뭐냐면 저 글자를 파자(破字)해보면, 살바른 뼈 알(歹)자와 주원장의 성씨 주(朱)로 나뉘니, 이것은 주씨 일족의 살을 발라 죽이겠다는 뜻이라고 해석한 것이다.
다만 과거 유생들이 이런 파자와 비유로 사람을 놀리는 것은 현대의 세로드립처럼 고의적인 경우도 많았다. 서일기의 진정한 의도가 무엇이었는지 모르나 황제의 처지에서는 설령 동기가 순수해도 그냥 넘어가면 무식한 티를 낸다는 말을 듣게 된다. 현대라면 우연히 세로 드립이 욕이 되었는데 모르고 넘어가는 일이 망신이지만, 저 시대에는 더 심각한 일일 수 있다.
그러나 어찌됐든, 초기의 숙청에 비해 후기로 갈수록 숙청은 잦아지고 그 정도 역시 가혹해져 갔고 무고한 사람들까지 숙청당했다. 이는 분명한 비판점이다. 일례로 훗날 소련의 대숙청에 다른 성격이 있었다 한들 그 자체를 옹호할 순 없는 노릇인 것과 같다.
그리고 이렇게 신하를 잔혹하게 다루는 풍조는 영락제에게도 계승되었다. 훗날 멸망할 때 명을 위해 싸운 사대부가 송조에 비해 상대적으로 적게 나타나고 대부분이 명의 적인 청나라와 이자성군에 가담한 것이 우연은 아니리라.

2.2.4. 대외 관계



2.2.4.1. 고려 ~ 조선

이러한 점은 외교 관계에도 적용되어, 주원장 시절 조선과 명나라의 관계는 험악해져 갔다. 조선의 왕 이성계는 상당한 무공을 세운 명장이었고, 명나라 건국 이후 철령위 설치 등의 문제로 인해 위협적인 존재로 여겨졌기 때문. 여기에 정도전이 사병 혁파를 위해 군제 개혁을 벌이는 것을 주원장을 자극해 매우 험악한 분위기가 연출되었고, 정도전 파 사신들이 명에서 모욕을 받거나 사사당하면서[35] 급기야 양국 간 무력 충돌로 발전될 기미까지 보이기 시작한다. 물론 주원장과 정도전이 죽으면서 명나라와 조선의 관계는 우호적으로 변한다.
하지만 조선이 명나라 내부 사정을 몰라서 이렇게까지 경계한 측면도 있는데, 실제 주원장의 정책은 겉으로만 엄포를 놓고 전쟁에 대비한 방어만 철저하게 하지, 실제 대외전쟁은 꺼리는 성격이었다. 당장 위화도 회군 직전 공요군의 진격 당시에도 주원장이 한 조치는 방어 강화밖에 없었다는 것이 그 증거다.[36]

사방의 제이(諸夷)는 모두 산으로 막히고 바다로 떨어져 있어 단지 한 모퉁이에 치우쳐 있을 뿐이다. 그러니 그 땅을 얻어도 산물을 가져올 수가 없고, 그 백성을 얻어도 감히 부릴 수 없다. 만약 그들 스스로가 살피지 못하고 우리 변경을 소란하게 한다면, 이는 그들에게 좋지 못할 것이다. 마찬가지로, 그들이 중국의 걱정이 되지 않는데도 우리가 가벼이 군사를 일으켜 침공한다면, 역시 좋지 못할 것이다.

나는 후세의 자손이 중국의 부강함을 믿고 단지 한때의 전공을 탐하여 이유 없이 군사를 일으켜 인명을 살상할까 그것이 두려우니, 그래서는 안 된다는 것을 깊이 명심하라. 다만, 호융(胡戎: 몽골)과 중국은 국경이 붙어있어 오랫동안 전쟁을 펼쳐왔으니, 반드시 좋은 장수를 가려 뽑아 병사를 훈련시켜 그들에게 대비하여야만 한다.

이제 나는 정벌하지 말아야 할 여러 나라의 이름을 열거하겠다.

동북에서는 조선국. 정동편북에서는 일본국. 정남편북에서는 대유구국, 소유구국. 서남에서는 안남국(베트남), 진랍국(캄보디아), 섬라국(태국), 점성국(참파), 소문달랍국(수마트라), 서양국(인도 남부), 일형국(말레이시아), 백화국(자바 섬), 삼불 제국(팔렘방), 발니국(브루나이).

─ 황명조훈 中

짐이 조선과의 분쟁을 그치고자 하는 것은 단지 백성을 편안케 하기 위함이라! 군사를 일으켜 그들을 정벌하는 것은 과히 어렵지 않다. 하지만 그 과정이란 백성들에게 있어 재앙이 되지 않겠는가? 예부로 하여금 문서로 그들(조선)을 질책하도록 하고, 그래도 그들이 뉘우치지 않는다면 그때 토벌을 이야기해도 실로 늦지 않을 것이다.

─ 명 태조 실록 권 257

그러면 고려와의 철령위 분쟁이나 조선 초 갈등 등은 무엇인가 할 수도 있는데, 본래 주원장은 고려 외에 일본에 대해서도 실제 칠 생각은 전혀 없었으면서도 틈만 나면 '내가 친히 군사를 몰고 가서 너희들을 치겠다. 알아서 잘 해라.'는 식의 협박을 반복했다. 진짜로 전쟁할 의사가 전혀 없었기 때문에 오히려 더욱 유난스러울 정도로 블러핑을 적극적으로 일삼았다는 것. 외교에서 흔하게 나오는 말인 '요란하게 짖는 개는 물지 않는다.'에 가깝다.
고려가 멸망한 뒤 조선이 들어선 뒤에도 조선의 국왕 이성계에게 대놓고 '내가 보기에 넌 왕노릇을 할 자격이 없다. 자꾸 까불면 치겠다.'고 서신으로 협박을 일삼으면서도[37], 실제로 조선을 치자는 여론이 나오자 이를 대번에 묵살해버렸다.
주원장의 인식에서 중국과 그 주변에 대한 인식은, 중국은 이미 충분히 큰 나라이자 자급자족할 수 있는 농업국이고, 노동력도 충분한 데다 당시의 수준으로 상공업 및 국외 시장이 필요하지도 않으니 '경제적 차원'에서 다른 나라를 공격하기란 '무의미한 짓'이었고, 이미 중국에 땅이 충분하고 사람 또한 넘치도록 있는데 풍속이 전혀 다른 나라를 점령해봐야 쓸모 있는 영토를 얻을 수도, 의미 있는 노동력을 얻을 수도 없었다는 인식이었다는 것이다.
얄궂게도 그의 아들 영락제는 아버지 홍무제가 신신당부라고 남긴 황명조훈을 곧바로 위반하는 웃픈 상황에 직면하고 만다. 영락제는 '대외원정을 자제하라. 아니, 하지 말라.'는 유훈을 깔끔하게 무시하고 50만 대군을 다섯 차례 동원하여 북방 원정에 나섰고(오출삼려五出三犁), 남으로는 왕좌를 되찾기 위해 명나라에 지원을 요청한 쩐티엠빈을 돕고 역적 호꾸이리를 처단한다는 구실로 20만 대군을 이끌고 당시 대우국으로 불리던 베트남을 침공하여 당시 베트남 호왕조의 상황 호꾸이리와 황제 호안트엉을 잡아 북경에서 처형한다. 이후 베트남은 명나라에 합병되어 20년 동안 잠깐의 식민지배를 받다가 레러이가 등장하여 명나라로부터 완전독립한다. 군사원정 이외에도 그 유명한 '정화의 대함대' 를 조직하여 아프리카 해안까지 진출하고, 명나라에 조공을 바치는 나라는 영락제 시기에 이르러 주원장 말기에 비교해 60개국 이상 늘어났다. 그렇다고 유럽처럼 대항해시대를 열고 자체 발전에 뭔가를 투자한 것도 아니다. 그저 돈만 잔뜩 썼을 뿐.

2.2.4.2. 일본

일본과는 왜구문제로 골머리를 썩었는데 일본에 사절을 3번 보내서 단속을 요청했지만 일본 막부도 별 힘이 없던 시절이라 형식적인 답변을 듣는 것으로 그쳤다.

2.2.4.3. 대월

대월(베트남)과는 1372년 안남왕 책봉 문제가 잠시 불거졌다. 당시 안남왕은 진숙명이었는데 진숙명은 선왕 일례를 이유 없이 폐위시켰다는 이유로 정식 국왕으로 책봉하지 않고 전왕인친사(前王印視事)라는 애매한 작위로 책봉했으며 진숙명이 죽었을 때도 애도하지 않고 진숙명을 비판하였다.

「安南自陳叔明逼逐其陳日熞,使不得其死,因篡位,廢置相,仍未來告。叔明懷奸挾詐,殘滅其王,以圖富貴,不義如此,庸可與乎?今叔明之死若遣使吊慰,是撫亂臣而與賊子也。異日四夷聞之,豈不效尤,狂謀踵發,亦非中懷憮外夷之道也。爾禮部咨其國知之。」

진숙명이 진일견(양일례)을 강제로 쫒아내어, 죽게 한 건 그릇된 일이고, 찬위 등 여러 문제가 있으며 숙명이 간사한 마음을 품고 일례를 멸하고 부귀를 탐하는 것은 불의에 해당하니 어찌 그럴 수 있겠는가? 지금 숙명의 죽음을 사자를 보내서 조위하는 것은 난신[38]

을 위로하고 도적과 함께 하는 것이다.


2.2.4.4. 티무르 제국

성조(영락제)는 무력으로 천하를 평정하고 자신의 위광으로 만국을 통제하기를 바랐기에 사방에 사자를 보내 조공을 재촉했다. 이에 서역의 대소 국가들은 신종하지 않을 수 없어 앞을 다투어 조공을 했다. 그래서 북으로는 사막에 닿고 남으로는 대해에 이르렀으며, 동서로는 태양이 뜨고 지는 지점까지 이르렀으매, 대략 배와 마차가 갈 수 있는 곳이라면 모두 성조의 위광이 미치지 않는 곳이 없었다.

─ 명사 서역전

이렇게 서로는 티무르 제국과 다시 연결되고 동쪽으로는 일본의 아시카가 요시미츠와 관계를 맺었으며, 브루나이말라카, 술루 등 머나먼 곳에 있는 나라의 국왕들은 자신들의 일족과 수하 수백 명을 이끌고 쉴 새 없이 자금성에서 영락제를 알현했는데, 홍무제가 알았다면 아마 기겁을 했을 듯 뭐 아들인 영락제와 증손자인 선덕제도 홍무제처럼 조선을 들들 볶았다. 자국에선 명군 소리 듣는 황제가 조공국에선 폭군으로 보일 정도니...
티무르와의 관계는 극도로 험악해서 서로 전쟁 직전까지 갔으나 서로 여건이 좋지 않아 일단 화해하고 티무르가 사절단을 보냈는데 홍무제는 이를 조공사절로 여겼다. 결국 화가난 티무르가 명나라를 정벌하기 위한 결심을 굳히게 된다. 다만 그 전에 홍무제가 사망하고 이후 티무르도 사망하여 두나라의 드림매치는 이뤄지지 않았다.

2.2.5. 사후 후계 구도 관련 실책


원래 장남인 주표황태자로 책봉되어 후계자로 공인되어 있었으나, 주원장은 넷째 아들인 주체에 대한 호감을 은근히 비추고 있었다고 한다. 게다가 주원장은 '공신들은 닥치고 버로우!'로 일관하고 있었고, 그에 대한 반발 심리였는지 태자는 공신들을 옹호하는 입장이었으며, 상당히 유약한 성격이었다고 언급되고 있다. 그래도 후계자를 갈아버리는 사태는 벌어지지 않았는데, 이는 장자 계승 원칙을 지키기 위함으로 추정된다. 태자가 일찍 사망한 뒤에도 주체가 아닌 적장손인 주윤문(건문제)을 황태손으로 봉하여서 계승 원칙을 계속 지키려 노력했다. 명나라를 건국한 지 얼마되지 않은 상황에서 왕실의 정통성 문제는 매우 중요하므로, 적장자 계승 원칙을 지키려 한 홍무제의 의도 자체는 옳다고 할 수 있다.
다만 정말로 장자 계승을 확립하려는 사람 치고는 다시 없는 삽질을 했는데, 바로 황자들을 번왕으로 책봉하여 각 지역에 보낸 것이었다. 번왕들은 백성을 직접적으로 통치하진 않고 국경 수비만 맡았지만 그래도 군사력은 보유하고 있었다. 장수들을 보내면 자기들끼리 군사를 키워 반란을 일으키지 않을까 하여 장수들 대신 아들들에게 맡긴 것인데, 국경 수비 지휘를 효과적으로 할 수 있을 정도로 인망 있고 유능한 황실 적자가 군사력을 가지고 있으면 과연 무슨 짓을 할까? 역사적으로 번왕 제도는 사후에 제위 계승권을 놓고 다툼이 벌어지게 했다면서 일부 신하들이 이를 거두어주도록 요청하였지만, 주원장은 주청한 신하들을 족치고 그대로 강행하였다. 결국 영락제에 의해 이 문제가 현실화 되면서, 나중에는 가까운 황족들에게는 봉토를 적게 주거나 아예 주지 않는 친왕 제도로 바뀐다.
물론 주원장은 아들들을 모아놓고 '늬들을 임명하는 것은 그만큼 신뢰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신하들의 이야기 역시 사실이니까, 마음 깊이 잘 새겨두고 나중에 형의 핏줄이 계승한 중앙 정부와 협력하는 것을 원칙으로 삼아라.'면서 은근한 협박 기술을 시전하였다. 그리고 딴에 대비를 안 한 건 아니라서 나이도 많고 비교적 황위에 가장 가까운 둘째 주상, 셋째 주강, 넷째 주체까지의 봉지는 시안 - 타이위안 - 베이징 순으로 붙어 있게 하여 한쪽이 딴 생각을 하면 다른 둘이 견제할 수 있게 했다. 하지만, 의도와는 다르게 주상과 주강이 먼저 죽어버렸다.
이러니 당장 할아버지의 뒤를 이어 즉위한 건문제는 군사력을 가진 숙부들에게서 위협을 느낄 수 밖에 없었고, 그중 연왕 주체(후일 영락제)는 가장 큰 경계의 대상이었다. 결국 번왕 숙청 프로젝트가 가동되자, 어차피 가만히 있다가 일족까지 전부 환생특급 편도룰렛 돌리기 vs 어차피 가만히 있어도 사형장 갈거 한번 도박 해보고 실패하면 돌리기가 연왕 주체에게는 유일한 선택거리가 되었고, 바보가 아니고서야 할 일은 당연히 도박 해보는 거다. 둘 다 죽는 건 매한가지고 도박이 성공하면 황제가 되니까. 이런 점에서 보면 영락제 입장에서 무고한 조카의 제위를 찬탈했다는 말이 억울한 것이다.[40] 애초에 장자 계승을 확립하고 싶었으면 번왕제를 쓰지 말든지, 죽기 전에 자기 손으로 아들들을 숙청하든지, 아니면 처음부터 영락제에게 제위를 물려주든지 했어야 했다. 이 점에서 주원장은 공사를 구분하는 정치적 소양이 부족했다 할 수 있다. 태종 이방원도 그렇게까지 아들 바보였지만 자기 손으로 양녕대군을 폐세자해서 내치고, 마지막엔 불가피하다면 죽이라고 세종대왕에게 지시까지 내려놓았다. 이와 비교하면...
결국 의문 태자는 아버지보다 일찍 죽었는데, 아버지의 막나가는 숙청으로 인해 마음 고생이 심했기 때문이라는 설이 있다. 이에 따라 4남 주체가 태자로 책봉되는 것이 아니냐는 이야기가 대두되었지만, 장자 계승 원칙을 지켜 적장손인 주윤문황태손으로 지명하였다. 이로 인해 연왕으로 책봉되어 베이징에 머무르고 있던 주체가 상당히 격분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이러한 모습은 주원장의 시골 출신 때문이라는 분석도 있다. 같은 공동체 안에서는 훈훈한 인정미가 넘치는, 이른바 시골인심을 보여주지만 외부인들에 대하여는 어떠한 짓을 해도 죄책감을 느끼지 못하는 시골 사회의 특성이 황족 우대/공신 박대라는 주원장의 모습에 상당히 맞물린다는 것이다.
다만 이 후계 구도 관리 문제를 굳이 옹호하자면... 황자들(즉 차기 황제나 차차기 황제의 형제, 숙부나 백부들)에게 어느 정도의 세력을 허용해야 하는지는 원래 답이 없는 문제라는 점을 들 수 있겠다. 제위 계승의 안정성과 정통성을 생각하면 황자들에게 세력(특히 군사력)을 가질 여지를 주지 않는 것이 좋지만 대신 이 경우 황족의 세력이 미약해져서 그만큼 황가가 취약해지는 것. 세력을 가진 황족들은 황가 내부적으로는 황제에 대한 위협이 되지만 반대로 황가 외부에 대해서는 황제의 권위를 보호하는 방파제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서진의 경우 황족인 사마씨들을 각지의 왕으로 봉하여 세력을 구축하게 한 탓에 황족 사이의 권력 분쟁인 팔왕의 난으로 멸망하였지만... 반면 그 전 왕조인 위(삼국시대)의 경우 조비 이후 황족인 조씨가 독자적인 세력을 갖추고 성장하지 못하도록 강하게 억제한 탓에 조방의 즉위 이후 사마씨가 쿠데타로 정권을 장악하자 얼마 버티지 못하고 제위를 빼앗기고 만 것. 만약 조조의 후손들이 군사력과 영지를 가지고 있었다면 사마의가 쿠데타를 시도하기도 힘들었을 것이고, 시도했다 하더라도 제압 가능했을 것이라는 가정은 충분히 가능성이 있다. 즉, 황가의 세력이 미약해질 경우 권신의 발호에 취약하다는 약점이 생기는 것이다. 애초에 서진 자체가 이를 거울삼아 황가의 세력을 의도적으로 키워주다가 그 부작용으로 망한 것이기는 하지만. 요컨데, 중요한 것은 한쪽 노선에 치우치지 말고 균형을 잡아야 한다는 것[41]
따라서 차기 황제 개인의 입장에서 보면 다른 황자들이 세력을 가지는 것은 곧 자신의 황권에 대한 심각한 위협의 요소가 되지만... 왕조 전체, 또는 왕조 창시자의 입장에서 보면 의외로 나쁜 상황이 아닐 수도 있다. 황족들끼리 권력분쟁을 벌여 황제가 갈린다고 하더라도 어쨌건 새 황제 역시 황족, 즉 왕조 창시자의 후손이기는 마찬가지니까. 물론 주원장의 입장에서도 자기 자식이나 후손들이 서로 싸우고 죽여대는 것이 달가운 일일 리는 없고, 이런 일이 자주 반복될수록 국력의 약화나 정통성의 실추와 같은 심각한 부작용도 발생하겠지만... 어쨌건 왕조 자체의 존속이 목적이라면 황자들이 세력을 구축할 수 있도록 허용함으로써 얻는 효과가 분명히 있다는 것. 어쨌거나 정난의 변 이후 등극한 영락제 역시 주원장의 아들이므로 왕조 자체는 유지되었다는 것이다. 특히 아직 왕조의 권위가 불안정한 개국 직후, 게다가 빈민 출신으로 가문의 세력과 명망 역시 변변찮은 상황이었던 주원장의 입장에서는 일단 자식들에게 군권을 맡김으로써 주씨 왕조의 기반 자체를 튼튼히 다져야 한다고 판단했더라도 이상한 일은 아닌 것이다.
물론 여러 문제로 인하여 주원장의 최초 복안이었던 장자상속 전통의 확립이 실패한 것은 분명 사실이지만 '왕조 자체의 유지'는 '장자상속 전통의 확립' 보다 더 상위의 목표일 수밖에 없다. 그런데 주원장이 장자상속 전통의 확립을 위해 정말 황자들을 숙청하거나 정치적으로 무력화했다면 정작 건문제가 즉위한 이후 숙부가 아닌 다른 권신들에 의해 황위를 위협받았을 가능성도 있다는 것. 왕조 창시자의 입장(즉 자기 왕조가 혈통적 정통성이 아니라 힘과 실력으로 만들어진 것임을 자기 스스로 잘 알 수밖에 없는 입장)이었던 주원장의 입장이라면 전자보다 후자에 더 큰 우려를 가지고 있었다고 해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주원장은 1398년 사망하였는데 죽기 전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그동안 모든 것을 혼자서 담당해왔으나, 돌이켜 보면 이는 너무나도 괴로운 일이었다. 다음 대를 잇는 이는 신하를 믿고 일해야 한다.

1398년 주원장이 숨을 거두면서 손자 주윤문이 건문제에 올랐지만, 1402년 정난의 변으로 연왕 주체가 조카를 쫓아내고 스스로 제위에 올랐다. 이 사람이 바로 영락제로, 정화의 해외 원정과 몽골 원정, 북경 천도 등을 단행한 황제다.

3. 외모


[image]
어진이 서로 다른 두 가지 얼굴로 그려졌다는 특징이 있다. 왼쪽처럼 훈훈하게 후덕하게 잘생긴 초상화도 있는 반면, 오른쪽같이 얼굴형이 스크루지 맥덕이나 다크윙 덕처럼 턱과 입이 길게 나온 데다 곰보 자국 투성이인 못생긴 도날드 상 초상화들도(최소 2점 이상. 얼굴에 곰보 자국은 없지만 턱은 여전히 튀어나온 초상화도 존재) 있다.[42] 그러나 기록[43]을 볼 때는 오른쪽처럼 곰보가 많은 얼굴이긴 했던 것 같다.
이처럼 상대적으로 잘생기게 보이는 초상화가 주원장의 이미지와 위엄을 고려하여 미화한 것이라고 보는 견해가 있기도 하지만[44] 반면에 요즘 기준으로 못생기게 보이는 초상화가 오히려 당시 기준에는 귀와 코가 크고 턱이 튀어나온 것은 오악과 같고, 얼굴의 곰보 자국은 하늘의 72 별자리와 같아 천하 영웅의 상에 부합하는 것이라 하여, 잘생긴 초상화가 사실에 가깝고 오리처럼 턱과 입이 나온 못생긴 초상화가 프로파간다용이라는 주장도 있다.[45]
여담으로 이 두 초상화는 언뜻 보면 굉장히 달라 보이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이목구비와 수염의 형태는 거의 똑같다. 정형화된 형식이 다를 뿐, 같은 얼굴을 묘사한 것이 맞는 듯하다. 당장 중국의 역사 인물들 문서에 실린 초상화들은 오른쪽처럼 단순화되어 비슷한 그림체가 많은데, 실제 얼굴은 세밀하게 묘사된 좌측의 어진이 더 실제와 가깝다고 보는 게 타당하다. 다만 어떤 의미에서는 문서 상단의 청대의 학자 조익의 평가인 "성현의 면모, 호걸의 기풍, 도적의 성품을 모두 갖춘 사람"이라는 평가가 어진에도 그대로 적용되고 있는 셈이라 재미있는 부분. 호군 주연의 드라마 주원장에도 두 개의 다른 어진과 관련한 에피소드가 묘사된다.

4. 그 외


  • 명 실록에 따르면 조선(이성계)이 '20만 강병'을 동원해서 요동 정벌을 시작하면 답이 안 나온다는 보고를 듣고 우려했다는 기록이 있다. 그러나 이는 명나라가 당시 조선 내부의 상황을 잘 몰라서 그랬을 가능성이 크다. 당시의 조선은 고려 말부터 홍건적·나하추·여진족·왜구 등의 침략으로 인하여 나라가 극심하게 혼란한 상황이었고, 주원장이 저 발언을 하기 고작 7년 전에 있었던 위화도 회군을 보면 알 수 있듯이 당시 조선이 실제로 북벌에 동원할 수 있는 병력은 5만 명 정도에 불과했다.[46][47]
  • 이성계의 선조가 황해도 모처에 자손이 황제가 될 묏자리와 왕이 될 묏자리를 두고는 선친을 묻으려고 했더니, 주씨 성의 노비가 몰래 묏자리를 바꾸어서 후손들이 각각 명 태조, 조선 태조로 뒤바뀌었다는 이야기가 유명하다.[48] 우연히 만난 스님과 장수가 훗날 각각 명 황제, 조선 왕이 되었다는 이야기는 '압록강은 흐른다'에도 나올 만큼 유명한 이야기다. 그것도 한 두 군데가 아니라 여러 군데에서 이성계와 주원장의 인연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탁발승에 도적 출신 주원장과 군벌 가문 출신 이성계는 출신은 다르지만, 변방 출신이라는 공통점도 있다.
  • 이성계키배를 뜬 적이 있다(…). 링크 참조. 또 이성계와 사돈을 맺을 뻔한 적도 있었는데, 잘 안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 있었던 혼담으로 1396년 6월-1397년 4월까지 진지하게 명나라와 조선 양측에서 논의되었던 사안이라고 한다. 만약 성사되었다면 이방석의 세자빈이 명나라 황녀가 되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실록의 기록을 보면 일단 주원장이 먼저 사돈관계를 맺자고 주장했던 것으로 보이는데 태조실록 9권, 태조 5년 6월 13일 기해 1번째 기사. 황제가 혼사 맺자고 했다는 것을 종묘에 고유하였다. 그 이후 진지하게 명나라와 조선 양측에서 혼담이 오가면서 서로 잘 풀리는 듯 싶더니 1397년 4월에 주원장이 갑자기 이성계에게 "내가 이렇게 진지하게 사돈 맺으려고 했는데 니가 X같이 굴어서 파토났다 씨X아!" 라고 공문을 보내면서 결국 파토가 났다고 한다. #
  • 어느 날 주원장이 맹자를 읽다가 갑자기 미친 듯이 소리치며 신하들에게 명령했다. "이 늙은이가 지금 살아 있다면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다. 당장 이 자의 신주를 사당에서 내치고 책을 불태워라." 어떤 대목이 그를 그렇게 광분하게 했을까? 바로 "임금이 신하를 지푸라기처럼 여기면 신하는 임금을 원수처럼 여긴다(君之視臣 如土芥 則臣視君 如寇)"고 한 대목. 그가 보기엔 그런 말은 신하로서는 절대 해서는 안 될 말이다. 명령을 내린 뒤 그는 이 문제로 간하는 자가 있으면 대불경죄로 다스릴 것이라고 신하들에게 경고했다. 형벌에 '대' 자가 붙으면 '죽인다'는 뜻이다. 하지만 당시 전당(錢唐)이라는 신하가 '죽음을 무릅쓰고' 그에게 간했다. 주원장이 죽이겠다고 하자 그는 이렇게 받아쳤다. "신이 맹자를 위해 죽는다면 죽어서 영예가 길이 빛날 것입니다." 전당은 끔찍하게 살해당할 각오를 하고 맹자의 복권을 위해 간했다. 그것도 두 번씩이나. 어쩐 일인지 사람을 밥 먹듯이 죽이던 주원장도 전당의 말이 일리가 있다고 생각하여 죽이지 않았다.[49] 또 얼마 후 그의 간언을 따라 맹자를 공자의 사당에 함께 배향하도록 허락하였다. 목숨을 걸고 간했던 전당은 자신의 말처럼 죽어서 맹자의 사당에 배향되어 명조가 망할 때까지 제삿밥을 받아먹었다.
하지만 주원장은 끝내 맹자를 용납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전당 같은 신하가 목숨을 걸고 간하는데 맹자를 불태우거나 하지는 못했다.[50] 결국 그는 한림학사였던 유삼오(劉三吾)를 불러서 맹자 다이제스트, 곧 '맹자절문(孟子節文)'을 만들게 했다. 맹자에 있는 글 중 내용이 불온하다 싶은 부분을 삭제하고 검열판을 만든 것이다. 유삼오는 모두 260장인 맹자 중 무려 88개장을 삭제하고 172개장만 남겨두었는데 글자수만 따진다면 거의 절반을 삭제했다. 어떤 대목을 삭제했을까? 맹자가 폭군을 비난하는 대목은 모두 삭제했다. 물론 맹자가 백성이 존귀하다고 한 대목도 삭제했다. 인정을 말하는 대목, 왕도를 말하는 대목도 삭제하고, 혁명을 말하는 대목은 당연히 삭제되었다. 그렇게 만든 맹자절문을 과거 시험 교과서로 지정했다. 하지만 맹자절문은 오래가지 못했다. 홍무 27년(1394년)에 반포되어 과거 시험 교재로 쓰이다가 영락 12년(1414년) 성조의 명으로 호광(胡廣) 등이 찬한 사서대전의 맹자를 과거 교재로 쓰면서 맹자절문은 세상에서 잊혀졌다. 주원장의 맹자 탄압은 고작 20여 년 만에 끝난 셈이다.
사실 주원장의 맹자 탄압은 주원장 특유의 의심많은 성격과 명 건국 초기에 나라를 안정시키는 과정에서 반대세력이 나타나지 않도록 하기 위한 정치적 안배가 합쳐진 결과였다. 당시 명나라에서는 고아에 천민 출신이 황제가 되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주원장에 반발하는 세력이 적지 않게 있었고, 이를 가차없는 숙청으로 억누르고 있는 상태였다. 그러다보니 주원장 입장에서는 군주의 덕치를 주장하고 지방의 지주들인 사대부들이 주도하는 신권정치를 주장하는 맹자는 결코 용납할 수 없던 것이다. 사대부 우월론에 사대부는 아무나 될 수 없다고 대놓고 말했으니[51] 주원장의 표적이 되기 딱 좋았던 것. 그러나 영락제가 즉위할 때 쯤이면 이미 황권은 안정되어 있었고, 때문에 굳이 맹자를 검열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 서민 출신으로서 한 군세의 대장이 되었다가 제국을 개창했다는 점과 말년의 토사구팽 때문에 전한 태조 고황제 유방과 이미지가 묘하게 겹친다. 비교도 자주 되는 편. 물론 유방의 토사구팽은 중앙 집권에 방해가 되거나, 확실하게 반란을 일으킨 분봉 왕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으로[52] 주원장의 무분별한 공신 살해와는 다르고, 또한 유방은 진나라가 망하기 전까지만 해도 별다른 문제 없이 동네 형님 취급받으며 잘 살았던 인물이므로, 부모가 병으로 죽고[53] 굶으며 살아온 과거를 생생하게 기억하며 백성들을 다스린 주원장에 비해 심정적으로 여유로웠던 건 당연하다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54] 주원장 본인도 백성들에게는 매우 동정적이었고, 그래서 인기가 많은 군주였다.
  • 신하들을 견제하기 위해 무지막지하게 숙청해대고, 또 권력 강화를 위해 어지간한 일은 직접 처리한지라 업무량이 엄청났다. 이건 홍무제가 황제권을 강화하느라 재상을 폐지하면서 생긴 현상이니 어떻게 보면 자업자득. 결국 일감이 너무 많아지자 황제를 보좌하는 기구가 생겼으니 바로 내각이다. 신권이 강해지는 걸 막기 위해 정5품짜리의 낮은 관리들을 채용했으며, 이들을 대학사라 하며 모든 상소문에 각자의 의견을 덧붙여서 황제의 업무를 도왔다. 허나 낮은 직급 출신이다 보니까 고위 관료들의 미움을 받게 되었고, 결국 원활한 업무 처리를 위해서 내각의 직품은 점점 높아져, 나중엔 고위 관료들이 내각의 일을 겸하게 된다. 장거정은 명나라에 본래 없었던 재상 자리나 다름없는 수석대학사 또는 내각수보에서 국정을 담당하기도 했다. 그러나 어쨌든 직급이 낮았기에[55] 황제가 맘먹고 근무를 태만하게 하면 답이 없었다.
  • 중국의 베이징커리 신문은 역대 황제 중에서 심리적 소양이 가장 떨어지는 황제로 명 태조 주원장을 꼽았다고 한다.
  • 빈민 출신이어서 적어도 백성들에게는 어진 군주라는 인상이 강하지만, 또한 빈민 시절의 아픈 기억을 극복하지 못하고 오히려 백성들에게 큰 실책을 저지른 바도 있다. 명나라 건국 후 자신의 가난한 고향을 크게 발전시켜보자고 수도를 자기 고향인 봉양으로 옮기려고 했는데, 결국 입지조건이 적절치 않아서 포기하고 만다. 문제는 작고 가난한 고을인 봉양을 수도로 건설하기 위해 다른 곳에서 주민들을 강제로 이주시킨 것인데, 천도가 취소되었음에도 큰 도성으로 발전시키겠다는 생각은 못버려서 이곳 주민들이 되돌아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고, 좁고 척박한 땅에 갑자기 수많은 인구가 모여들다보니 도리어 자기 고향인 봉양의 경제가 파탄이 나 버렸다.[56] 또한 주원장은 어려서 찢어지게 가난해서 툭하면 부모 형제 일족이 쫄쫄 굶은 트라우마가 너무 큰 나머지 자기 자손들은 절대 굶는 일이 없도록 하겠답시고 황실 후손들에게 녹봉을 지급하는 제도를 확립했는데, 일단 조금이라도 자기 피를 이은 주씨 성의 남계 후손이기만 하면 최소 200석의 녹봉을 받을 수 있었다.[57] 물론 이것도 8대 이상까지 거리가 멀어진 방계의 경우[58]에 해당되는 최저 녹봉이고, 친왕 급으로 가면 더 높았다. 그리고 황실 자손들은 눈덩이 굴리듯 불어서 명나라 말기에는 무려 20만이라는 숫자를 자랑했다. 이 20만 인구를 전부 명나라 재정으로 먹여 살려야 했으니, 결과적으로 그 부담이 누구한테 갔는지 생각해보자.
  • 일에 대한 이야기로 이런 게 있다. 洪武十七(1384)年九月,給事中張文輔曰:『自十四日至二十一日,八日之間,內外諸司奏劄凡一千六百六十件,計三千二百九十一事。』」(孫承澤:《春明夢餘錄》)홍무 17년인 1384년의 9월, 급사중 장문이 말하길 "(황제 폐하)는 9월 14일부터 21일까지 딱 8일 동안 나라 안 팎에서 겁나게 올린 1,660개의 상소문에 올라와 있던 3,291건의 일을 해결하셨다." 이는 기록에 남을 정도로 빡세게 일했던 일화로 보이지만 주원장이 얼마나 일을 많이 처리했는지 엿볼 수 있는 일화다.
  • 하루는 형부 주사(刑部主事) 여태소(茹太素)가 올린 상소문을 읽고 있었다. 그런데 그가 보기에 상소문의 서문에 있는 황제 찬양이 지나치게 길었고, 정확히 6370자까지 읽자 짜증이 폭발한 그는 여태소를 끌고 와 손수 두들겨 팼다. 다음 날, 아무래도 상소문의 뒷부분이 신경 쓰였던 그는 이걸 도로 찾아다 계속 읽었고, 총16500자를 넘어가자 겨우 서문이 끝났다. 반면에 본문의 글자 수는 총 500자로 5건의 건의사항이 담겨있었는데, 읽어보니 취할 점이 꽤 있다 싶었던 그는 이 가운데 4건을 즉시 실행했다. 그 뒤 홍무제는 여태소를 불러서 오해가 있었다는 언급을 하고 사과한 뒤 그의 정책을 칭찬하면서 달랬고, '앞으로는 글을 번잡하게 쓰지 말라'고 한 뒤 이 일화를 전국에 널리 알렸다. 주원장이 무식해서 벌어진 일. 전근대 중국에는 당팔고주의란 것이 있어 관공서용 문서 작성, 특히 황제에게 올리는 보고서의 형식이 있었고 여러 문학적인 기교가 가미된 황제 찬양을 넣는 것이 당연한 것이었다. 중국 뿐만이 아니라 전근대 왕조 국가에서 왕실의 권위를 드높이기 위해 흔히 행했던 것인데 한마디로 주원장이 흙수저 출신이라 이게 황실 권위를 세우는 방편이라는 걸 몰라서 벌인 일이다. 참고로 당팔고주의는 주원장의 시대로부터 5세기가 지난, 중화인민공화국이 건국된 시점에야 없어진다. 주씨 황실의 권위 확립을 위해 공포 정치도 마다하지 않았던 주원장인 만큼 만연체(蔓衍體) 황제 찬양의 목적을 알았더라면 여태소를 그렇게 두들겨 패지는 않았을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주원장이 권위에 극단적으로 집착하면서도 정작 자기는 무식해서 권위를 세우는 관행을 갖고도 트집을 잡았기 때문에, 주원장의 신하들은 이래도 처맞고 저래도 처맞고 더러워서 그만둘 수도 없는 거지 같은 상황에 처해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래도 황제 생활을 오래 하면서부터는 공부도 하고 사람이 좀 바뀌긴 했다.
  • 이희안(李希顏)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크게 대단한 학자는 아니었고, 다만 인품이 뛰어나서 벼슬을 하라고 주위에서 권유를 받던 그런 인물이었다. 하지만 그는 벼슬에 관심이 없이 은거하던 기인이었는데, 어디서 그에 대한 소문을 들은 홍무제는 '당신이 학문 좀 한다면서? 이번에 우리 황자들이 공부할 대본당(大本堂)을 지었는데, 황자들을 가르칠 선생이 필요하니 좋게 말할 때 와서 벼슬 받아라?' 라고 직접 손으로 편지를 써서(手書) 보냈다. 이 초대를 빙자한 협박[59]에 이희안은 조정에 들어와 벼슬을 받았는데, 비단 옷을 걸치고 사립(蓑笠)을 쓰는 해괴한 패션으로 주목을 받았다. 왜 그러고 다니냐는 물음에 "(머리에 쓴) 삿갓은 (나라는 사람의) 본질이고, 비단 옷은 황제께서 하사한 거(라 입고 다닌)다(笠本質, 緋, 君賜也)"고 말했다나.
이런 기인이었는데, 이희안이 들어가게 된 곳은 대본당이고, 역할은 황자들을 가르치는 사부 노릇이었다. 일개인으로 살 때는 자유분방을 추구했어도 교육자로서는 엄격한 규범을 중시한 이희안인데, 나이도 어린 데다[60] 주원장이 홍건적으로 활동할 때 태어나 도적들 사이에서 제멋대로 자란 황자들은 규범은 고사하고 어른을 대하는 황실의 예법도 잘 지킬 줄 모르는 개구쟁이들이어서 수업을 제대로 할 수가 없었다. 그러면 보통은 아이고 하고 혀나 좀 차면서 적당히 공부 가르치는 시늉만 하는 게 보통일 텐데, 하필 또 이희안은 적당히란 것을 모르는 사람이었다. 어느 날 다시 규범을 가르치려고 시도하던 이희안은 황자들이 하도 말을 안 들어먹자 성질이 확 치솟아서 (자기가 대본당에 있다는 사실도 잠시 잊고) 그중 하나를 붙잡은 다음, 자기가 시골에서 마을 아이들 가르칠 때마냥 머리통을 잡고 이마를 후려깠다(擊其額)! 먼 방계 황족도 아니고 황제의 아들에게 물리적 타격을 입힌 이 사건을 두고 '엄히 벌하였다' 정도로 돌려 말하지 않고 떡하니 '칠 격(擊)' 자를 써놓은 게 압권. 북원의 코케 테무르가 이끌고 있는 수만 기병도 명나라 황제 아들에게 擊이라는 단어를 쓸 상황을 만들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아무튼 살면서 처음 얻어맞았을 이 어린 황자는 '나를 이렇게 친 건 네가 처음이야'라고 하며 스승을 잘 모시…지는 않고 아버지 홍무제에게 쪼르르 달려갔다. 이를 본 '황제가 (이마를) 어루만지며 성을 냈다(帝撫而怒)'는 것이 이에 대한 기록이다. 천하의 대명 제국 황제가 마치 유치원에서 자기 아들이 친구에게 얻어맞다 오자 "아이고, 우리 아들이 이마를 이 정도나 다쳤네!" 하는 보통 아버지들처럼 아들의 부어오른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화를 냈다는 것이다. 평소 황실의 권위에 극단적으로 집착하는 주원장의 성질대로라면 이희안은 산 채로 끓는 물에 데쳐진 후 온 몸의 가죽이 벗겨진 다음 근육과 힘줄을 한점한점 발리고 배가 갈려 온갖 내장들이 쏟아진 후 사지와 모가지가 끊어져 죽었을 것이지만, 이때도 마 황후가 한 발 앞서서 "선생께서 스승으로서 우리 아이들을 바른 길로 이끌어 주시려는 것이니, 이는 노하실 일이 아니옵니다(烏有以聖人之道訓吾子, 顧怒之耶)" 라고 말하며 이희안을 두둔했고, 그 말을 듣고 생각을 바꾼 홍무제는 이희안의 벼슬을 되려 좌춘방(左春坊)의 우찬선(右贊善)으로 올려줬다. 황제의 아들을 두들겨 패고 벼슬이 올라가는 이 조화를 보고 이희안은 뭔 생각을 했을까.
  • 자신이 나중에 묻힐 장소 근방에 오나라 황제 손권의 무덤이 있어서 황제의 무덤을 만들기 위해 다른 무덤들처럼 파헤쳐질 상황에 놓이나, 주원장이 묘지기로 활용하자며 그대로 두라 지시한 덕분에 무덤은 무사했다. 때문에 명효릉 내에서 손권 묘를 볼 수 있다. 이 일화가 무조건 다 사실이라고 볼 수는 없지만. 재밌는건 600여년이 지난 뒤 한족국가를 회복한 주원장 이상의 영향력을 가진 인물이 사망한 뒤 그의 무덤이 명효릉 바로 옆에 지어졌고 황제가 아니었지만 중산 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규모와 상징성이 주원장의 명효릉 보다 거대하기에 명효릉은 중산릉을 본 다음 사이드로 들리는 마치 묘지기 같은 위치에 있다.
  • 공신들에게는 무자비한 황제였지만, 자신이 정벌한 군벌들의 자손들에겐 되려 온화하고 자비로운 모습을 보여주었다. 진우량의 아들 진리, 명옥진의 아들 명승을 고려로 보내 융숭한 대접을 받도록 배려해 주었고, 붙잡은 몽골의 황족에게도 굴욕을 주지 않고 곱게 대접하였다. 항상 그렇지만 주원장의 숙청 기준은 언제까지나 자기에게 위협이 되느냐 마느냐였기 때문에, 공신들은 눈치를 봐도 사소한 걸로 트집을 잡아 쳐죽이기 일쑤였던 반면 일개 백성은 자기를 뒤에서 욕한다고 해도 대놓고 선동하거나 하는 정도가 아닌 불평불만 표시 정도로는 딱히 크게 문제삼지 않았다. 그냥 욕만 하고 끝이니까.
  • 편집증적인 꼼꼼함과 기억력 덕분에 스탈린처럼 은원을 모두 잊지 않는 인물이었다. 즉 잘해준 사람들은 그만큼 대우를 받았고, 주원장에게 정당하지 않은 걸[61]로 원한을 샀으면 당장 황궁 찾아가 빌어야 했다. 한편 정몽주는 그 기억력 덕에 목숨 걸고 사신으로 왔다가 공을 세울 수 있었다. 홍무제의 강박증 때문에 공을 세울 수 있었던 사람
  • 본인이 신자였던 것은 아니지만 이슬람교에 매우 호의적이었다. 직접 모스크 건설을 지시하고 무함마드를 찬양하는 시를 쓰기도 했다. 대신 원나라 때 유입된 회회인들에게 남녀를 불문하고 무조건 한족과 통혼하도록 하는 법을 제정하였다. 원나라 때 전래된 중세 이슬람 역법을 한문으로 번역할 것을 명령하면서 회족 천문학자와 한족 천문학자에게 협업을 지시했는데 그 결과물이 회회력이다.
  • 중국 요리 중에는 홍무제와 연관된 설화가 있는 음식들이 몇가지 있다. 가령 중국식 두부전인 샹또우푸(鑲豆腐)의 경우, 주원장이 빈곤한 시절 샹또우푸를 만드는 가게에서 일하면서 그 맛을 알았고, 황제가 된 후 궁중 요리사에게 이 음식을 만들도록 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또한 두부를 곰팡이로 발효해서 요리하는 호피모두부(虎皮毛豆腐)의 경우, 훔친 두부가 썩어서 곰팡이가 피자 주원장이 아까워서 그거라도 먹었더니 의외로 맛이 좋아서 황제가 된 이후에도 두부를 발효해서 만든 음식을 즐긴 게 현대의 호피모두부라는 이야기가 있다.
  • 명사(明史) 권 300 외척전에 따르면 주세진(주오사)의 장인, 즉 홍무제의 외조부는 원나라와 남송의 마지막 혈전인 애산 전투의 생존자라고 전해진다. 몽골에 의해 한족왕조가 종언을 고한 애산 전투 생존자의 후손이 몽골이 세운 원을 멸망시키고 명을 세웠으니 역사의 아이러니. 명사를 집필한 주체는 청나라이므로 청나라에서 명나라 황실을 띄워주기 위해 거짓 내용을 남겨놓을 리도 없고, 일부러 윤색을 하려면 친조부로 하는 게 더 좋다는 점을 감안하면 세부적인 내용에서 어느 정도의 과장이나 허구는 있을 수 있어도 그가 애산 전투의 참전자라는 것 자체는 사실일 가능성이 높다.
  • 어진과 관련된 야사가 있는데 황제 등극 후 어진을 그리게 했는데 화공이 실제 홍무제와는 전혀 다른 미남으로 그려놓자 아첨꾼이라며 죽였다. 이에 다음 화공은 홍무제의 얼굴을 사실대로 그렸는데 못생기게 그려 기분 나쁘다고 죽였다. 결국 세번째 화공이 묘안을 냈는데 곰보 투성이의 못생긴 외모는 그대로되 인자하고 푸근한 모습으로 그려놓자 아주 마음에 들어했다고 한다.
  • 홍무제의 치세는 고려 공민왕(1351~1374) , 우왕(1374~1388), 창왕(1388~1389),공양왕(1389~1392) 조선 태조 (1392~1398) 과 겹친다

5. 대중매체에서


  • 인물이 인물인만큼 중국에서도 주역으로 등장할 정도로 자주 영상화되거나 주역이 아니라도 비중있는 주변인물로도 자주 등장했지만, 그를 다룬 드라마로는 2006년 제작된 호군(胡軍)[62] 주연의 46부작 드라마 <주원장>이 대표적이다. 어린 시절부터 홍건적의 수령, 군벌을 거쳐 황제가 되기까지의 인생역정을 다루고 있는데 특히 홍건적의 리더에서 잔혹한 숙청을 일삼으며 고독한 황제로 변모해 나가는 주원장의 변화를 배우 호군의 열연이 어우러져 잘 묘사한 작품이다.
  • 영화로도 나온 《비천무》 원작 만화책에 그에 대한 설명이 이렇게 나온다. "가난한 농민 태생이라는 점 때문에 황제가 되어 공신들을 무척 괴롭혔지만, 중국 역사에서 그만큼 백성들을 위한 군주도 좀처럼 없었다." 만화에서 그다지 비중은 없으나, 새로운 왕조를 건국하면 백성들을 위할 것이라는 뜻을 보였다.
  • 게임 《징기스칸 4》에서 시나리오 2와 4에서 등장. 정치는 90대에 전투, 지모는 70 ~ 80 이상의 무장. 시나리오 2는 미등장이지만, 시나리오 4는 명나라 군주다. 시나리오 4의 명나라는 국력도 세계 최강급이고 무관으로는 서달이나 이문충, 남옥 등이 부하로 있고 내정으로는 요광효나 호유용, 이선장 등이 부하로 있으며 후계자인 영락제 역시 중국문화권 최강의 장군이라 세계구급 인재가 널려 있어서 적당히 플레이해도 충분히 세계정복을 할 수 있다. 오프닝 이벤트로는 원의 카라코룸을 정복하면 주원장의 능력치도 상승한다. 다만 이 시나리오의 주역이 티무르이고, 티무르가 명으로 원정을 가던 도중 사망했다는 역사적 사실을 생각해 보면 여러 모로 티무르로 플레이했을 때의 최종보스 포지션을 염두에 두고 설정한 듯. 참고로 이전 시나리오의 남송 이상으로 호전적이라서 명 주변의 국가로 플레이할 경우에도 최종보스 포지션에 가깝다.
  • 김용의 장편 소설 《의천도룡기》에서는 파계승으로 등장하며 몇몇 친구들과 함께 어린 장무기와 잠깐의 만남을 가진다. 이때 이미 명교 소속이었는데, 훗날 명교 교주가 된 장무기와 재회하게 된다. 후에 장무기를 반쯤 속이고 반쯤 겁박해서 교주직에서 물러나게 만들고, 다른 경쟁 군벌들마저 모두 날려버린 끝에 을 건립한다. 명교 세력의 공을 잊지 않았기에 국호를 명으로 정했지만, 훗날 명교가 백성들을 감싸고돌며 조정에 반항하자 탄압했다고 묘사된다. 1990년대 영화판에서는 장무기를 은근히 부추기다가 속내를 들키는 인물로 나오고 2019년판 드라마에서는 검열 때문인지 주 대장으로 불리는데 상당히 거칠게 나오는 외모나 독자적으로 세력을 구축하고 민심 장악을 위해 지도자로 한림아를 내세우는 등의 전략적인 행보를 보이며 교주인 장무기 몰래 여양왕을 암살하는 등의 행동이 실제 주원장에 가깝다.
  • 태규의 첫 무협 소설 《풍사전기》에서는 조연 백가흔(남궁검가 창천의혈문의 하부 세력인 제검장의 셋째 아들)으로 출연하며, 위에서 언급한 실제 역사의 인물들도 무림 고수로 출연한다.
  • 기황후에서는 51회 마지막에서 언급만 되었다.
  • KBS 1TV 사극에서도 등장. 용의 눈물정도전에 등장하였다. 용의 눈물의 주원장은 두 개의 초상화 중 온화한 인상의 초상화와 비슷한 통통한 인상의 배우 김순철을 섭외했고 정도전의 주원장은 심술굳은 표정의 두 번째 초상화에 가까운 마른 체형의 배우를 섭외했다. 이는 두 드라마의 주인공이 다르기 때문인데 이방원이 주인공인 용의 눈물의 주원장은 조선에서 사신으로 온 이방원을 환대하며 그를 높게 평가해주지만 제목 그대로 정도전이 주인공인 정도전의 주원장은 끊임없이 조선을 의심하고 압박하는 적이기 때문이다.
  • 무협소설 신승에서는 주인공의 스승인 절세신마 공손억에게 참혹하게 살해당한다. 묘사가 상당히 끔찍하다.
  • 영화 무사에서는 얼굴은 한번도 비추지 않는데 반해 자주 언급되는데, 어째 영 나쁜놈 포지션이다. 극 시작과 동시에 사이가 좋지 않던 고려의 사신단을 고비사막으로 유배 보내버렸고, 북원의 장수 쿠쿠 테무르에게는 자신의 누이를 납치해간 천하의 개쌍놈 취급을 받는다. 작중 장쯔이가 연기한 부용 공주는 주원장의 막내 딸이라는 설정. 고려인들은 북원의 기병들에게 납치당한 그녀를 구해 남경으로 돌아가 주원장에게 신뢰를 얻는다는 작전을 세운다.

6. 둘러보기



원 반란기 홍건적의 수장
곽자흥

주원장

칭왕
홍건적의 오왕
칭왕

주원장

명 건국
명의 역대 황제
명조 건국

초대 태조 홍무제 주원장

2대 혜종 건문제 주윤문

[1] 초명은 중팔(重八)로 알려졌지만 기록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중팔'은 사촌들 이름을 바탕으로 추정한 것이다. 중팔이 아니라 중칠일 가능성도 있고 전혀 다른 이름일 가능성도 있다. 이후 흥종(興宗) → 덕유(德裕) → 원장(元璋) 순으로 개명했다. [2] 그런데 주원장이라는 이름은 해석을 하면 "원나라를 주살하는 날카로운 무기"라는 뜻이 된다.#[3] 明太祖(병음: Ming Taizu / 밍 타이주).[4] 병음: gāo huángdì / 가오황디.[5] 병음: zhūyuánzhāng(주옌장, 다이어크리틱 제외: Zhu yuanzhang)[6] 병음: Hongwudi (홍우디).[7] 이런 점에서 한 고제와 함께 이야기 되기도 한다. 한 고조 역시 전국시대 말, 진나라 초기라는 혼란한 시대에 태어나 평민 출신으로 통일 제국을 창업했다. 자세한 내용은 한 고조 문서와 아래 명 태조의 생애 부분을 참고할 것.[8] 주세진은 이후 아들이 황제가 된 뒤 인조의 묘호를 받아 황제로 추존된다. 주원장의 알려진 형제들 중에서는 넷째 아들.[9] 사실 예전에는 뭔가 조금이라도 관련이 있는 것으로 이름을 붙이는 단순한 작명이 허다했다. 성씨의 경우 보통 시조가 살고 있는 지역의 지리적 특성(예: 강이 있다, 산이 있다, 돌이 많다, 바람이 심하다 등)에서 따오는 경우가 많았고, 이름의 경우도 단순하게 첫째, 둘째, 셋째 같은 식으로 붙이는 경우가 많았다. 일례로 일본에서 -로(郎) 라는 글자로 끝나는 이름인 이치로(일남), 지로(이남), 사부로(삼남), 시로(사남), 고로(오남) 등은 그냥 태어난 순서대로 붙인 이름이다. 이런 이름이 있으면 이름만 보고도 '이 사람의 집안은 몇남몇녀구나' 하는걸 바로 알 수 있을 정도. 서양도 다르지 않아서 붉은 흙으로 이루어진 절벽이 존재하는 지역 출신이면 '레드클리프', 신발을 만들던 수공업자 출신이면 '슈마허(영어로는 슈메이커)' 라고 하는 식.[10] 그가 태어난 해인 1328년 한 해에만 진종(원), 천순제(원), 문종(원)의 세 황제가 연달아 재위했을 정도로 원나라의 상황은 매우 심각했다.[11] 중세시대에는 16살 이상이면 성인으로 보기 때문에 16세~17세에 부모를 잃은 주원장은 고아라기보다는 갓 성인이 되자마자 일가족을 잃은 큰 비극을 당한 어른에 가깝다.[12] 사원의 비용을 유지하기 위한 기금을 동냥하는 승려를 말한다.[13] 이때 생긴 게 첩자 같이 생겼다고 가담은 커녕 처음부터 체포되었다. 하지만 곽자흥이 그의 담력과 성품을 알아본 덕택에 무사히 합류했다.[14] 위에서 언급한 시간대를 보면 알겠지만 주원장이 곽자흥 세력으로 들어간 시기는 불과 1년전인 1352년이었다. 동네 탁발승으로 끼니를 연명하던 젊은 청년이 불과 1년만에 나름 독립군벌 내에서 성공하여 직위도 얻고 결혼도 했으니 사람들이 놀라는 것도 무리는 아닌 셈이다.[15] 본명 한림아[16] 중국인이 왜 갑자기 중국어 수업을 받겠냐고 의아해 하겠지만, 주원장의 출신상 상류층에서 쓰는 교양 있는 단어와 말투 등을 따로 배울 필요가 있었다. 요새로 치면 스피치 테라피. 여담으로 주원장이 중국을 통일해 명을 건국한 뒤 고려에선 젊은 시절 원에서 유학해 중국어에 능통했던 이색을 사신으로 보냈다. 이색이 중국어에 능하다는 말을 전해들은 주원장은 통역없이 그와 대화하려 했는데 막상 이색이 중국어를 하자 알아듣질 못했다. 분위기 싸해질 뻔한 걸 배석해있던 예부 관리가 급하게 끼어들어 입조한 지 오래되어 말을 잊어먹은 모양이라고 둘러대고 통역을 했다. 이때 주원장은 이색의 말이 꼭 나하추 같다고 했는데 바로 여기서 원인을 짐작할 수 있다. 원에서 유학한 이색은 몽골의 영향을 받은 북경어를 구사했는데 주원장은 오늘날 오어가 된 남부 방언이 모어라서 못 알아들은 것.[17] 왕조가 아닌 국가까지 포함하자면 540여 년 뒤 장제스가 이끄는 중화민국에 의한 국민당의 통일이 있었다.[18] 일단 그 곳을 점령하면 안정과 정비를 위해 군사와 관리들을 보내야 하는데, 가만히 내버려두면 그들이 나중에 반란을 일으킬지도 모르고, 바깥 지역은 교역할 것도 없고(어떻게 보면 중화 사상), 지금 있는 땅으로도 농사 지어먹기 충분하니까 그랬다고.[19] 제일 많이 신경을 쓴 것들 중 하나가 지역별 과거 합격자 안배였다. 이 문제는 북송 때부터 주된 정치 현안이었다. 남송 멸망 후에도 반쯤 자치를 누리며 학맥을 이어온 강남인들이 몽골의 지배하에 신음하던 화북인들을 제치고 합격을 독식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다만 방법이 상당히 과격해서 부정이라며 급제한 강남 출신 유생들을 죄다 죽여 버리는 것도 불사했다.[20] 통일 왕조와 상관 없이 단순히 서민 출신 '황제'만을 따지자면 너무 많아진다. 촉한유비, 후량주전충, 후조석륵 등등. 그러나 한고조는 농민출신이라고는 하지만 그래도 지금의 읍면동장급은 되는 정장 자리는 별 노력 없이도 20대 때 이미 했으므로 적어도 자기네 동네에서 유지급은 되는 부농이었다고 추정한다는 점을 감안하면 주원장이 더욱 극적이다.[21] 그나마 3대 공신 중 다른 한 명인 서달은 일찍 죽은 덕분(?)에 숙청의 화를 면했으며 그의 가문은 명 왕조 내내 명문가문으로 잘 살았다.[22] 이러한 태형을 정장(廷杖)이라고 부른다. 이전 왕조에도 있었지만 홍무제 대에 이르러 유례 없이 자주, 혹독하게 시행되었다.[23] 고려최승로성종에게 시무 28조를 바치면서 선왕들을 두고 자기 중심적인 평가를 내린 것을 보자.[24] 실제로 서양 역사를 봐도 귀족층을 때려잡은 루이 14세 시대에 상공업과 중산층이 발전했고 반대로 귀족들의 힘이 강했던 러시아 제국에서 서민들의 삶은 시궁창이었다. 다만 루이 14세의 경우 말년에는 일반 백성들의 시점에서 봐도 확실히 암군으로 타락했음을 감안해야 한다.[25] 다만 살가죽을 벗기는 박피형이 명나라에서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고, 명나라와 같은 시기 오스만 제국에서도 반역자 같은 중죄인들한테는 살가죽을 벗기는 박피형을 내렸다.#[26] 다만 이렇게 했음에도 정작 부정부패를 막는 데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고 한다. 사실 옛날의 형벌 제도 대부분이 잔혹하기 이를 데 없는 데 반해, 범죄율 감소에는 별다른 기여를 하지 못한 게 사실이다.[27]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에는 두 가지가 모두 실려 있다.[28] 숙청한답시고 인재풀을 싸그리 날려버리면 그건 그거대로 엄청난 부작용이 발생한다. 인재가 없으면 나라를 굴릴 수가 없다.[29] 탕화는 주원장의 성격을 어렸을 적부터 잘 알던 사이였고, 또한 일찍이 벼슬에서 물러나 귀향하였기 때문에 숙청을 피할 수 있었다. 주원장은 숙청 대상자들에게 개인적인 원한은 없었기에 미리 알아서 물러나거나 해서 위협이 되지 않으면 해치지 않았다.[30] 이들 중에 경병문은 정난의 변으로 처형되고, 곽영은 쫓겨나서 귀향했으며, 고성은 도중 붙잡힌 이후에 영락제를 도왔기 때문에 즉위 후에도 쫓겨나지 않았다.[31] 거의 대부분의 국가가 국가 막장 테크에 접어드는 시기가 개천에서 용이 나오지 못하게 된 시기와 일치한다는 점을 생각하면 가볍게 볼 문제가 아니다. 게다가 이게 극심해지면 기존 지배 계층의 수준까지도 떨어진다. 이게 최악까지 치달은 국가가 바로 여말선초 시기의 고려세도정치 시기의 조선. 권문세족들과 세도가문들이 다 해먹고 아예 외부 세력의 진입을 차단해 버렸다. 전자는 이성계를 위시한 군부가 신진사대부와 손잡고 싹 정리한 뒤 왕조 자체를 바꾸고 나서야 개선됐으나 후자는 그런것 조차 없었기에 나중에 일본한테 비참하게 멸망한다.[32] 후일 영락제와는 이 점에서 많이 다르다.[33] 심지어 이쪽은 단속반으로 나선 관리를 폭행한 혐의도 있었다.[34] 지금도 중국어에서 대머리를 뜻하는 단어가 바로 광터우(光头)다.[35] 이와는 반대로 정도전의 반대파인 이방원과 그의 측근들은 우대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일종의 '견제'를 벌인 것.[36] 왜냐하면 당시 명은 천하를 제패했다고는 하나 어디까지나 신생국이었고, 아직 북원이 잔존하고 있었고, 남쪽의 이민족들이 버티고 있는 상황이었다. 아직 내부정리가 제대로 끝나지도 않은 상황인데다가 한반도를 제외하고도 이미 몽고와 이민족 등을 모두 견제해야하는 상황이었다. 즉, 명나라 입장에서는 정말 조선과 전쟁이라도 했다가는, 내부 분란이나 북원의 재침입 등 자국에 큰 피해가 되거나 멸망의 원인이 될 만한 위험요소들이 많았다. 그리고 이는, 정난의 변 이후 명 내부가 안정되고, 태종 대에 조선과의 관계가 안정되자, 북원을 비롯한 이민족들에 대한 대원정을 시작하면서 비로소 마무리를 짓게 된다.[37] 하도 갈궈대니 열 받은 이성계가 "황제란 작자 하는 짓이 어린아이에게 공갈이나 치는 수작 아닌가?" 하고 벌컥 화를 내기도 한다. 하지만 정작 이성계 본인도 신하들이 "그래서 어쩌실려구요?"라고 물으면 "내가 더 사려야지 뭘 어쩌겠냐."는 식으로 대답해 화만 냈을 뿐 명나라를 침공하거나 하진 않았다.[38] 나라를 어지럽히는 신하.[39] 오히려 명분 면에서는 태종 이방원 쪽도 만만찮았는데 태조는 신덕왕후 소생을 세자로 밀고 있었지만 세간에서는 나이도 능력도 충분한 신의왕후의 아들들이 왕위에 올라야 한다고 여겼다. 오히려 어린데다 검증도 안된 이방석을 억지로 세자로 올린 게 태조쪽이었다. 그렇다보니 제1차 왕자의 난이 일어났는데도 이방원에 대한 역풍은 거의 없다시피 했다.[40] 여기에 건문제는 치명적인 실수를 저질렀는데 번왕 숙청의 최종타깃은 연왕 주체였다. 문제는 그럴 거면 처음부터 주체를 잡아죽일 것이지 다른 번왕들부터 치는 바람에 주체에게 명분을 주었다. 제1차 왕자의 난을 일으킨 태종의 명분은 억지스러운 면이 있긴 했지만 정난의 변을 일으킨 영락제의 경우엔 나름의 사유가 있긴 했다.[39][41] 중국 외의 사례에서도 오스만 제국의 경우 메흐메트 2세 이후 황권에 도전할 수 있는 술탄의 형제들을 모두 죽이다가 아흐메트 1세의 법 개정 이후 죽이지는 않지만 하렘 내의 밀실에 감금하도록 한 사례를 찾을 수 있다. 전자의 경우 황가가 단절의 위험에 쉽게 노출되고, 후자의 경우에도 수년에서 수십 년간 갖혀있느라 세상 물정 모르는 인물이 술탄으로 즉위하여 국가를 막장화시킨다는 문제가 있는 것.[42] 박시백조선왕조실록에서는 저 도날드스러운 얼굴을 바탕으로 홍무제를 나타냈다. 세상에서 가장 재미있는 세계사에서도 저 초상화를 바탕으로 주원장을 그려놓고 '돼지 같은 얼굴과 엄청난 정치적 수완을 가진 인물'이라 평했는데, 부하들을 돌아보며 진격을 명령하자 부하들이 전부 화들짝 놀라는 게 백미.[43] 귀와 코가 크고 턱이 이마보다 튀어 나왔다든지. 참고로 얼굴의 곰보는 전염병에 걸렸다가 살아남은 흔적이라고 한다.[44] 실제로 소련의 서기장 이오시프 스탈린 또한 곰보였는데, 자신이 나온 사진에 에어브러쉬질을 해서 곰보 자국을 지우는 일을 밥 먹듯이 했다.[45] 조선미 저, '왕의 얼굴'에서 참조.[46] 물론 공민왕 때 요동 정벌을 한 적이 있고 홍건적과의 전투에서 고려가 20만 병력을 동원한 적이 있으나, 20만 병력에는 유생들+노비들까지 포함된 사실상 활동 가능한 남성들은 다 모은 군대라서 숫자만 많지 전투력은 의문이다. 이때 20만 군대의 선봉에 서서 개경에 입성한 부대가 바로 이성계의 가별초이다. 그리고 홍건적과의 전투는 국가 방위전이었기에 장거리 원정인 요동 정벌과는 상황이 다르다. 게다가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알 수 있지만 주원장이 저 발언을 하는 당시에 조선은 왜구의 침략을 받고 있었기에 요동 정벌은 꿈도 꾸지 못할 상황이었으며, 각종 기록에서 이 왜구를 막지 못한 군관들이 줄줄이 처벌당한 기록들을 매우 쉽게 찾을 수 있는 데다 심지어 부산에서는 동래·기장·동평성이 함락당하는 등 한반도 남부가 왜구에게 말 그대로 탈탈 털리고 있었기 때문에 전쟁은 커녕 당장 국가 방위에 급급한 것이 이 당시 조선의 현실이었다.[47] 대조적으로 주원장부터 영락제에 이르는 수십년동안 명나라는 몇차례씩이나 수십만 대군을 초원지대로 진격시키는 대규모 북벌을 단행하던 가공할 만한 국력을 보유하고 있었다.[48] 비슷한 전설을 가진 곳이 전국에 꽤 있다. 전라남도 해남 '한영정'이라는 사람 집의 머슴이었는데 주인 딸인 '한여비'와 눈이 맞아 지나국으로 도망갔다던지. 경상남도 진해시의 천자봉 이야기라든지.[49] 늘 그랬듯이, 마황후가 말린거겠지만...[50] 게다가 맹자는 공자와 더불어 유교의 쌍두마차와 같은 사람이다. 그런 맹자를 탄압했다가는 전 중국의 유학자들이 들고 일어날 것이고, 이는 아무리 주원장이라도 감당할 수 없는 문제였다.[51] 일부 주장에서는 누구나 될 수 있다고 말하지만 이것은 자기가 보고 싶은 부분만 보고 매몰되는 것으로 기본적으로 맹자의 태도는 아무나 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사대부처럼 행동할려면 기본적 재산과 가문이 갖춰져야 하는데 이미 그 조건을 갖추거나 갖출 수 있는 사람은 지방지주들인 사대부뿐이다.[52] 조참, 소하, 진평 등 나머지 한나라 개국 공신들은 자연사할 때까지 살아남았다.[53] 여기서도 유방과의 차이가 있는데, 유방의 경우는 아버지 태공이 아들이 황제가 되는 걸 보고 태상황이 될 때까지 살아있었다.[54] 오히려 숙청 및 학살에 주도적이었던 건 여후였다. 반면 주원장의 정실인 마 황후는 어질었고 주원장의 살인 행각을 자제하는 포지션이었다고 전해진다.[55] 이것은 홍희제 때 편법으로 겸직 벼슬로(2, 3품직)로 품계가 상승했고, 이어서 고위급 명예직의 겸직(태자 태, 소OO)으로 종1품, 정1품으로 상승시켰다. 이때쯤이면 사실상의 재상이었지만, 단지 재상(승상)이라는 직명을 쓰지 않을 뿐이었다. 또한 명나라 특유의 절대군주권으로 인해 황제가 허수아비가 되는 일은 거의 없었다. 대학사들은 말 그대로 재상급 비서로서 황제를 보좌했다.[56] 재밌게도 이것도 유방과 반대되는 사례인데, 유방은 패현 땅에 애정이 없진 않았지만 옹치와 함께 자신을 배신했던 섭섭함도 컸기 때문에 굳이 애써서 특별대우하려고 하지는 않았다. 아버지 유태공이 고향을 그리워할 때도 고향 땅 자체를 건드리진 않고 수도 주변의 마을을 비슷하게 꾸민 뒤 고향 이웃들을 불러오는 식으로 일을 처리했다. 죽기 직전에 향수병이 북받쳐서 세금과 복역을 면제시켜주긴 하지만, 그때도 풍읍은 제외하려고 했다.[57] 참고로 당시 한 개 현을 관리하는 지현의 녹봉이 겨우 90석이다.[58] 한나라로 치자면 유비 정도가 되겠다.[59] 황제의 친필 서한을 무시하거나 거절하면 좋은 꼴 못 본다. 하물며 신하들 족치는 걸로 악명 높았던 홍무제라면…….[60] 홍무 원년(1368년)에 맏이인 태자 주표가 13세였다.[61] 다만 개인 원한을 숙청에 써먹지는 않은 듯싶다. 그랬으면 아예 국가 유지가 안 됐을 테니까.[62] 영화 적벽대전에서 조운 역으로 출연했다. 천룡팔부 2003년 드라마 버전에서 소봉역을 하기도 했다. 재미있게도 이 배우는 한족이 아니라 만주족이다. 만주족이 세운 나라에 의해 망하는 나라의 시조를 연기한 셈. 게다가 호군은 이후 건원풍운에서 주인공 쿠빌라이 칸을 맡았는데, 이렇게 되면 만주족의 조상의 나라를 멸망시킨 나라의 군주까지 연기한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