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의 행진
1. 개요
전쟁범죄의 일종으로 포로로 잡힌 적국의 군인, 민간인 등에게 제대로 된 처우를 하지 않고 가혹한 행군을 강요하여 죽음에 이르게 하는 행각들을 말한다.
2. 사례
2.1. 태평양 전쟁
2.1.1. 바탄 죽음의 행진
해당 문서 참조.
2.1.2. 산다칸 죽음의 행진
해당 문서 참조.
2.2. 6.25 전쟁
2.2.1. 북한의 죽음의 행진
1950년 6월 25일 한국 전쟁이 개전된 이후 인민군은 개성, 서울 등지에서 교황청 특사인 벨 주교, 미 육군 제24사단장 딘 육군 소장,[1] 베아트리체, 베르나도테를 비롯한 가톨릭 교회 수녀들, 개신교 선교사, 미국 고문단을 비롯하여 상당수의 서양인들을 포로로 확보했는데, 이들을 개성에 모았다가 평안북도 지역의 포로 수용소로 이동시켰다. 그런데 상당수의 포로들이 80을 눈 앞에 두거나 80을 넘은 고령이라 몸을 제대로 가누기도 어려웠는데도 불구하고 이들에게 어떠한 탈 것을 제공하지 않았으며 먹을 것, 마실 것도 잘 주지 않은 채 엄동설한에서 행군을 강행시켜 상당수의 포로들이 동사 혹은 아사하거나 인민군들에게 살해되었다.
딘 장군의 경우, 종전 후 포로 교환으로 석방될 때까지 몇 차례 대남 선전용 삐라에 등장하기도 했는데, 양복을 입고 쌀밥에 반찬들이 놓인 밥상을 받고 있는 모습을 연출해 포로가 되면 후하게 대우해줄 거라는 환상을 심어주려 했다. 물론 형편없는 대우로 인해 수십 kg이나 살이 빠져 비쩍 마른 장군의 모습을 본 유엔군들은 아무도 안 속았다(...)
국민방위군 사건을 죽음의 행진으로 분류하는 경우도 있긴 한데, 애초에 죽으라고 굴린 것하고 극도의 무능이 낳은 참사는 일단 다른 거니까 동일선상에 놓긴 어렵다.
2.3. 인도차이나 전쟁
2.3.1. 베트남의 죽음의 행진
(1차 베트남 전쟁 또는 인도차이나 전쟁이라고도 불리는) 베트남 독립 전쟁, 특히 디엔 비엔 푸 전투 당시 베트민군도 외인부대원 등 프랑스군 포로를 상대로 장거리 행진을 시켰다. 먹을 거라곤 하루에 미숫가루나 생쌀 한 줌이나 주었을 정도였고, 베트남인들에게 식민지 프랑스인 및 용병인 외인부대에 대한 증오로 가혹하게 대하면서 1만여 명이 넘는 포로 가운데 3천 명 정도만 살아남았다. 예외적으로 독일 국적의 외인부대원 중 동독으로 귀국할 의사를 피력한 포로에 한해 동맹국과의 우호 강화 차원에서 조기 석방 및 귀국시켜줬다.
다만 이걸 원한 때문이라고는 할 수 없는 게, 2차 베트남 전쟁 때도 미군 포로들을 상대로 가혹행위가 이뤄졌다. 그나마 미군이나 다른 국가 포로는 이렇게 포로 대우를 했지만, 한국군 포로는 아예 포로로 인정하지 않고 북한으로 압송한 사례도 확인된다.
웃기게도 프랑스는 내외 선전을 위하여 베트남 포로들을 일단 배불리 먹여서인지 몸매는 그다지 마르지 않은 이들과, 이 행진으로 뼈만 남은 채로 마른 프랑스군 및 외인부대 포로들이 극과 극으로 포로 교환이 되는 일이 있었다. 물론 그렇다고 프랑스가 베트남인에게 잘 대한 건 절대 아니다. 단두대 항목에도 나오듯이 실제로는 베트남 저항인사를 고문 및 단두대로 참수하던 프랑스가 한 선전 홍보에 지나지 않았다.
이는 이후 남베트남이 멸망한 다음 벌어진, 피살자만 8~10만 명에 달하는 대규모 보복을 예고한 것이기도 했다.
[1] 이 사람은 대전 전투 패배 이후 패주하다가 포로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