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탄 죽음의 행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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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합군 포로들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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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포로 이송 장면
일본군의 포로 학대를 표현한 일러스트
1. 개요
2. 바탄 전투의 패배
3. 참상
4. 사건 이후
5. 일본의 반응
6. 기타


1. 개요


영어: Bataan Death March
일본어: バターン死の行進
태평양 전쟁 기간인 1942년 4월 9일부터 시작된, 일본군이 바탄 반도를 점령하여 76,000명 규모의 연합군 포로들을 잡아 마리벨레스에서 카파스까지 120㎞를 강제이동시키면서, 포로 다수를 학대하고 살해한 행위. 일본군의 주요 전쟁범죄 중 하나로 기록되어 있다.

2. 바탄 전투의 패배


태평양 전쟁이 시작된 이후 일본군의 공격에 필리핀이 거의 함락에 몰리자 더글러스 맥아더 미합중국 육군 대장필리핀군 육군 원수는 가족 및 참모 일부와 함께 프랭클린 D. 루스벨트 미합중국 대통령의 명령에 따라 미합중국 해군 PT보트 편대를 통해 오스트레일리아로 탈출했다. 남겨진 7만여 명의 미군과 필리핀군은 바탄 반도에 몰려 저항을 계속했으나 물자 보급이 차단되고 보유한 물자는 거진 소모한 상태이며 말라리아까지 발생하자 지휘권을 인계받은 조너선 웨인라이트 육군 중장은 저항을 계속할 힘도 없는 현상황을 프랭클린 D.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보고하고 항복을 승인 받은 후 1942년 4월 9일자로 일본군에게 항복한다.
수만 명의 포로들을 붙잡은 일본 육군은 이들을 바탄 반도에서 내륙의 수용소로 이송시켰다. 이때 싱가포르를 접수한 야마시타 토모유키 장군의 간청으로 그 유명한 츠지 마사노부 육군 중좌가 필리핀 14군으로 파견 나와 있었는데,[2] 그는 여기서도 근성을 외치는 지휘를 하다가 자신의 지위를 이용해 명령을 왜곡, 14군 전체에 "포로 감시를 엄중히 하라"는 명령을 "미군과 필리핀군 포로를 처형하라"는 지시로 바꾸어 내렸다.

3. 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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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은 승리했으나 내부적으로 보급선이 한계에 달한 상황이었고 부대의 기계화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데다가 포로의 규모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해 포로를 처형하라는 지시는 실탄을 소모하지도 않고 운송 수단도 필요가 없는 '''식량 배급 없는 장거리 행군'''이라는 형태로 실행되었다.
포로들은 바탄 반도의 남쪽 끝 마리벨레스에서 북쪽 산페르난도까지 약 88㎞를 행군한 뒤 여기서 카파스까지 열차를 타고 이동한 뒤 카파스에서 오도넬 수용소까지 약 13㎞를 행군하였다. 항복 직전까지 체력이 매우 저하되어있고 식수식량도 주어지지 않은 상태에서의 행군은 수많은 탈락자들이 발생되었는데, 일본군은 상부지시에 따라 이들을 총검으로 살해하였다. 그런데 한 육군 대좌 하나가 이런 지시에 의구심을 품고 대본영에 확인해보았는데 대본영은 "그러한 명령을 내린 적이 없다"는 답을 보내어 14군측이 조사에 나서보니 츠지 마사노부가 자신의 지위를 이용해 지시를 '''날조한 것으로 밝혀졌다.'''
일본군 내에서 미국통으로 통하는 14군 사령관 혼마 마사하루 육군 중장은 서구권에서 포로 수용소를 운용하는 일반적인 방식인, 포로 간의 자치 조직을 결성해서 간접적으로 지배하고 노동을 시키는 형태를 주장했다. 포로 처형 지시가 한 파견참모의 날조라는 것을 알아차린 14군은 즉각 지시를 철회했으나 이미 10,000여 명의 포로가 사망해버렸다.
여기까지는 혼마 장군의 주장이지만 실상 혼마의 14군은 가혹한 환경 하에서 대규모 포로들을 장거리 이송하는 과정에서 포로의 숫자도 파악하지 않고 이동수단도 제대로 마련하지 않았으며 심지어 포로들이 먹고 마실 식수와 식량조달조차 신경쓰지 않았다. 기본적인 계획조차 세우지 않은 상태에서 포로들을 죽음의 길로 몰아넣고 휘하 육군 장병들이 체력이 약해질대로 약해진 포로들에게 폭행 등의 가혹행위를 가하는데도 일선 지휘관들은 이를 저지하기는 커녕 방관하거나 조장하기까지 했고 또한 숫자는 적지만 처형된 인원도 있었다. 필리핀군 포로 중 400명은 참수당했고 낙오한 포로는 가차없이 살해, 먹을 것이나 마실 것을 애원하는 포로도 살해당했다.
이것은 전적으로 사령관인 혼마 장군의 책임이며 처형이니 가혹행위니 이전에 포로들의 처우에 대한 기초적인 조치조차 하달하지 않은 시점에서 책임을 피할 방법은 없다. 바탄에서 사실상 살해된 사망자 중 절대다수는 이런 가혹한 대우에서 발생한 탈진과 질병 등이 원인이 되어 죽은것이지 츠지 마사노부가 처형 명령을 날조해서 죽은게 아니었다. 당연히 이에 대한 책임을 질 사람은 14군 사령관 혼마 장군 본인이다. 당사국인 미국에서 혼마를 전범재판에 기소한 것도 이런 이유에서 였다. 이러고도 혼마는 위에서 서술한 것처럼 포로들을 공정히 대우했다고 진술했으니 유죄판결이 나온 것은 당연지사다.

4. 사건 이후


14군 사령관 혼마 장군은 이후 수상 도조 히데키와의 마찰로 예편되었으나 전후 민간인 신분으로 필리핀으로 압송되었고 바탄 반도에서 펼쳐진 '죽음에 행진'에 관하여 인도에 반하는 죄(crimes against humanity)로 전쟁범죄 재판에 기소되었다. 재판 과정에서 당시 혼마 장군이 직접적인 학대 지시를 내린 것은 확인되지 않았으나 휘하 장병들의 학대 행위를 방조했다는 점이 인정되어 유죄 판결을 받고 사형이 선고되었다. 다만 본인이 명예롭게 죽겠다는 요청이 받아들여져서 민간인 신분이었지만 일본 육군의 군복을 입고 총살형을 선고받고 죽었으며, 거기다가 후하게 예우를 받고 사형 이전에 최후의 만찬으로 비프스테이크맥주, 샌드위치까지 청해서 다 맛있게 먹고 식후 커피까지 전부 주문해서 다 마신 이후 사형이 집행되었다. 사실 총살형도 명예롭게 죽게해주겠다는 것이니 상당히 온정 섞인 판결을 받은 것이다. 비슷한 사례의 야마시타 도모유키 장군은 죄수복을 입고 교수형으로 죽었다. 츠지 중좌는 당시 사태에 공식적인 개입이 확인되지 않고 그가 내렸던 지시들이 일선부대에서 보통 이행된 경우가 거의 없었다는 것이 고려되어 아예 기소되지도 않았다.
이 참상이 알려진 이후 미국 전역에 극도의 적개심과 일본에 대한 응징의 의지가 충천했다. 논픽션 더 퍼시픽에 의하면 43년 초기까지만 해도 미국민들은 필리핀의 참상을 전혀 몰랐으며 필리핀에서의 미군이 짊어졌던 역할에 대한 온갖 의문으로 가득했으나, 퍼시픽의 주인공 중 한 명인 오스틴 쇼프너 미합중국 해병대 보병 소령을 비롯한 일단의 미군 포로들이 수용소를 탈출, 잠수함 등의 루트로 본토로 귀환하면서 실상이 알려졌고 범국민적 보복여론의 형성에 큰 일조를 했다. 이후 전쟁 말기에 벌어진 도쿄 대공습원자탄 투하의 실행엔 보복여론의 정당성이 뒷받침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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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자 쪽바리들을 다 쓸어낼 때까지 임무를 계속하자'''' 라고 쓴 당시의 포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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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생자들의 유해가 담긴 관이 성조기로 덮여있다.
사건 직후에는 본래 미합중국 해군클리블랜드급 경순양함 USS 버팔로로 기공되던 함선이 인디펜던스급 경항공모함 USS 바탄으로 변경되어 일제에 대한 분노를 드러냈다. 전후에도 이 죽음의 행진을 기억하기 위해 미군 부대 곳곳에서 바탄 행진이라는 이름으로 마라톤 대회를 개최하고 있으며, 해군와스프급 강습상륙함의 5번함도 바탄으로 명명했다.
필리핀군민간인도 많이 희생되었기 때문에 4월 9일필리핀의 공휴일인 용사의 날로 지정되어 있다.
1945년 1월 30일, 미 육군의 레인저 부대와 필리핀 게릴라 부대가 포로수용소를 습격해, 수감되어 있던 포로들을 구출하는데 성공한다. 당시 패퇴하던 일본 육군이 증거를 인멸하기 위해 포로들을 학살하라는 명령을 내릴지도 모른다는 가정하에 작전을 벌였다. 이것이 카바나투안 포로 구출작전이다.
1945년 1월에는 산다칸에서 산다칸 죽음의 행진을 하였다. 바탄 죽음의 행진에 비해서 잘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그 비참함은 상상을 초월한다.

5. 일본의 반응


일본 우익이 점령한 일본어 위키백과에 따르면 전범행위를 부정하는 시각에서는 약 100㎞를 행군시킨 것도 없고 바란가에서 산페드로에 이르는 53㎞ 구간은 트럭을 동원해서 이송했고 산페드로에서 카파스까지의 48㎞ 구간은 철도로 이동했으니 행군은 42㎞에 불과했고 '일본군에게 하루 10 ~ 20㎞를 행군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 포로들이 몇 십㎞를 행군했다고 죽을거라곤 생각을 못한 것이지 잔혹행위를 벌인 것이 아니다'라고 주장한다. 변명으로 일관된 일본어 위키백과 문서
그런데 당시 일본군이 보유한 트럭은 약 200대, 저 주장에 따르면 약 7만 6천명의 포로를 트럭 200대로 이송했다는 것으로 트럭당 약 380명을 태웠다는 말도 안되는 결론이 나온다. 게다가 철도 구간에서는 열차 한 칸에 100명 이상씩 탑승했다는 소리인데 이 같잖은 소리를 믿어준다고 한들 가혹한 열대환경에서 환기도 안되고 온도조절도 안되고 화장실도 없는 운송 수단으로 포로들을 이송했다면 이건 사실상의 학살행위이다. 되려 포로들을 행군시키는게 희생자가 덜 발생할 것이다.
또한 학대행위 자체를 부정하며 당시 말라리아가 원인이 되어 사망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학대 행위를 인정하는 쪽에서도 혼마의 14군이 아니라 츠지 마사노부 개인의 책임이 크다고 주장하고 있으나 애초에 위에서 서술했듯이 전범재판에서도 '츠지 마사노부의 지시는 이행된 사례가 거의 드물어 학살의 적극 가담 혹은 기여했다고 보기 힘들다'로 결론내려 미국측에서도 츠지를 기소하지 않았다.
마찬가지로 일본 타츠노코 프로에서 제작한 애니멘터리 결단(1971) 에서는 2300명이 희생되기는 했지만 7만 명이 그대로 방치되어 전멸하는 것보다는 그나마 나은 결정이라며, 일본군에는 전혀 문제가 없다는 식으로 평가하였다. 88km를 걸어야 했다는 점은 나오지만 포로를 학살, 학대 및 살해했다는 서술은 전혀 없다. 애니멘터리 결단 11화 바탄 코레히도르 공략(19분부터)

국내에도 번역되어 출판된 <어느 하급장교가 바라본 일본제국의 육군> (야마모토 시치헤이 저)에서는, 일본군 쪽에서는 '포로 행군'이라는 것이 잔혹행위라는 인식을 가지지 못했고, 오히려 온정을 베푸는 것쯤으로 생각했다고 서술한다. 당시 일본군은 6km 행군에서조차 10~20%가 쓰러지며 낙오되었기 때문에, 걸어가는 중에 포로 손실이 발생하는 것도 특별한 문제로 여기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전후에 혼다의 재판 소식을 들었을 때, (저자 자신을 포함한)일본군은 부당한 재판이라고 생각해 분노했다고 한다. 여기에 대한 저자의 평가는, 당시의 자세한 내막이나 미국인들이 분노한 이유를 알려고 하지 않은 채로 재판 소식만 듣고 분노만 앞세운 것은 잘못되었다며, 비판적인 시각으로 이야기하고 있다. 일본군이 저지른 악명 높은 잔학한 사건이라는걸 부정하지도 않는다. 한편으로는 일본 내에서도 잘못을 인정하고 이 사건에 대해 비판하는 시각이 존재함을 알 수 있다.

6. 기타


  • 존 웨인이 주연한 영화 "바탄으로의 귀환" 에서 이 사건이 묘사된다. 영화는 전반적으로 엄친아 미군과 동맹자 필리핀 민중들이 나쁜놈에 찌질이[3] 일본군을 물리친다는 수준의 영화이지만 죽음의 행진은 나름 잘 묘사한 편. 영화 앞부분과 뒷부분에 포로 수용소 해방 장면에서 출연하는 엑스트라들은 실제 죽음의 행진의 생존자들이다.[4] 극중에서 학살 현장에서 구조된 필리핀군 장교가 바로 안소니 퀸.
  • 바탄의 천사들이라는 이름으로 이 행진에 참가한[5] 미국 간호원들의 이야기도 있다. 이들을 다룬 수전 서랜던 주연의 TV 영화가 있었고 한국에서도 방영되었다. 다만 쓸데없는 노출과 실제는 없었던 강간 장면이라든가 바탄 전투를 겪은 여자들이 너무 깨끗하다는 평을 들었다.
  • 유유백서에서 "죽기 위해 행진하는 사람들을 본 적 있냐" 는 말이 나오는데 이걸 말하는 건지는 불명.
  • 한편 일본은 역사부정행위 중 하나로 이 사건에 대하여 '포로들에게 우엉을 식량으로 지급했는데 식문화적 차이로 우엉을 나무뿌리로 착각한 포로들에 의해 일본군이 가혹행위로 전범재판에서 억울한 유죄판결을 받았다'는 날조를 주장하기도 하였다. 이 헛소리는 워낙에 오래된 기원을 지닌 헛소리인지라, 심지어는 전쟁의 참혹함과 역사적 책임을 인정하여 명작으로 평가받는 맨발의 겐에서조차 '문화적 차이로 발생한 씁쓸한 일'이라고 언급하는 장면이 들어가있을 정도로 뿌리깊게 자리잡았다. 이는 이후에도 고쳐지지 않아서 2012년부터 연재된 식극의 소마에서는 우엉을 쓰는 요리를 묘사하며 '2차 대전 중 일본의 포로가 되었던 병사의 식사에 우엉이 쓰여 일본인이 나무 뿌리를 먹게 했다며 국제재판으로까지 발전했다'는 오류가 포함된 장면이 나오기도 했다.
이게 왜 문제가 되는가 하면 일본이 미군 포로들에게 지급했다는 그 우엉은 문제가 되는 지역에서는 재배가 불가능한 작물이기 때문이다. 우엉은 냉대 한대기후에서 자라는 작물로, 말인즉 사건의 무대가 되는 동남아 지역에서는 재배가 불가능했다. 일본의 주장대로 우엉을 지급했다면 그것은 우엉이 재배되는 중국, 일본, 조선 등지에서 수확한 우엉을 필리핀의 바탄까지 운송한 뒤 지급했다는 소리인데, 즉 해당 지역에서는 사치품에 해당되는 우엉을 포로에게 줄 정도면 현지의 더 좋은 고기, 쌀, 물 등을 포로들에게 충분히 지급하고도 남았을 것이란 뜻이다. 그런데도 포로들이 몰살당한건 어떤 이유에서인가? 애초에 포로는 물론이고 현지의 일본군 또한 우엉을 구경이나 했을지 의문이다.
굳이 이를 사실로 간주한다면 우엉을 구할 수 있는 본토 포로수용소에서 있었던 일을 남양에서 있었던 일이라고 조작해서 퍼뜨렸을 수는 있다.
  • 필리핀의 유명한 수영선수 테오필로 일데폰소가 이 사건의 희생자이다. 1928년, 1932년 올림픽 200m 평영에서 동메달을 땄으며(동남아시아 최초의 올림픽 메달) 필리핀인 중에서는 유일하게 올림픽에서 하나 이상의 메달을 딴 선수이다. 죽음의 행진에서는 살아남았으나 1942년 6월 19일 타를락 주 카파스에서 결국 쇠약으로 사망했으며 그에 관한 자료들은 복구되지 못했다.
  • 바탄 전투와 죽음의 행진에서 희생된 이들을 기리기 위해 필리핀의 바탄 주 사맛산에는 사맛산 십자가 기념관이 세워졌다.
[1] 사진의 인물 3명중 1명은 종군기자로 나중에 적성국 민간인의 교환협정으로 송환되었고 후일 1945년 2월에 벌어진 마닐라 전투에 종군하여 옛 포로전우들을 다시 재회하게된다.[2] 싱가포르에서 필리핀으로 파견 나간 거다. 그러니까 야마시타는 츠지를 자기에게 보내 달라고 간청한 게 아니라 자기한테서 떨어뜨려 다른 데로 보내 버리라고 간청한 것이다. 츠지가 이시하라 간지 계파에서 도조 히데키 계파로 줄을 갈아타기도 했을뿐더러, 대본영 참모였기에 일선 부대의 장군들에게 맞먹기까지 했기 때문이다.[3] 실제의 혼마 중장은 영관급시절 미국 유학 경험이 있어서 상당히 후덕하고 네이티브 수준의 영어를 구사하줄 알았는데, 41-42년 필리핀 전역 당시에 미군의 항복을 받을땐 기선 제압을 위해 일부러 영어를 쓰지 않은 전적이 있으나 전범재판에서 최후진술을 주장할땐 영어로 말했다. 반면 작중의 그는 비리비리 마른 히틀러 체형에 알아듣기 어려운 억양의 영어로 찌질거린다. 그리고 필리핀 패망 때까지 존 웨인에게 발린다.[4] 일부 엑스트라들이 손발이 없는 장애인으로 나오는데 실제 그때 장애를 입은 사람들.[5] 정확하게 이 사람들은 완주하지 않고 중간에 차량을 이용했다. 완주했으면 전멸 크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