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륜
蔡倫(50? ~ 121년)
1. 일생
후한의 환관으로, 계양군 사람이며 자는 경중(敬仲)이다. 젊어서부터 학문에 큰 관심을 두었다고 한다. 명제 후기에 입궁하여 장제 때 소황문이 되었고, 즉위 후 중상시가 되어 정사에 참여하였으며 상방령을 겸하였다. 원초 원년(114년)에 용정후로 봉해졌고, 이후 장락태복이 되었다.
중상시로서 환관으로서는 최고의 자리에 올라서 명제, 장제, 화제 안제 등 4명의 황제를 보필하였으며, 장덕황후 두씨와 화희황후 등씨 등 2명의 섭정 황태후를 보좌하며 40여년간 궁성에서 봉직하였다. 이보다 몇십년 후에 나오는 십상시들의 더러운 오명과는 달리 청류파였고, 그나마 정화와 더불어 후대에도 평가가 그나마 나쁘지 않은 편이었다. 하지만 그는 조정의 궁중암투에 깊이 개입했으며 화제 시절 두황후를 지지하고 송귀인을 자살로 이끌었는데, 이후 두씨일족이 몰락하고 송귀인의 손자인 안제가 제위에 올라 이 일을 추궁하자 채륜은 자살했다고 한다(당시 사대부에게는 형벌을 내리지 않는 관습이있어 형장으로 출두하라는 사자가 가지고 온 독약을 먹고 자살했다고한다).
1.1. 제지법 표준화
상제 원흥 원년(105년)에 나무껍질, 베옷, 고기잡이 그물 등을 사용하여 채후지(蔡侯紙)[1] 를 발명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 채후지는 당대 중국에 존재하던 제지 기술을 개량하고 체계화하여 실용적인 목적으로 생산한 종이로써, 당대에 높이 평가 받았다. 채륜이 정립한 제지법은 후대에 종이를 만드는 표준 방법이 되었고, 중국에서 세계 각지로 전해졌다.[2]
2. 여담
후대의 환관들에게는 전한 시대의 사마천, 명나라의 정화와 함께 유능한 환관으로 추앙받았다고 한다. 이외에도 삼국지연의 초반에 원소가 명환관의 예로 태사공(사마천)과 용정후를 언급하는데, 여기서 용정후가 바로 이 사람.
이 외에 채륜과 같은 청류파 환관은 후한 말에 여강이라는 인물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