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마천
[clearfix]
1. 개요
중국 전한의 역사가이자 《사기》의 저자다. 동양 역사학의 시조, 아니 '''동양에서 역사라는 학문을 정립한 사람'''이라고 평가해도 과언이 아닌 위인이자 역사학계에서 가장 높게 평가받는 위대한 역사가 중 한 명이다.사마천의 사기는 2천 년이 지난 지금에도 위대한 유산으로 숭앙받지만 '''유철이란 이름은 누가 기억하는가?'''
중국 역사학자 펑쉐린
2. 생애
사마천은 기원전 145년 한나라 전성기 때 용문에서 태어났다. 사마천의 부친 사마담(司馬談)은 천문, 역법과 학문을 연구하는 직책인 태사령(太史令)[1] 이었다. 태사공서(사기)의 맨 마지막 부분인 《태사공자서(太史公自序)》는 사마천 자신이 쓴 자서전의 성격을 띠고 있는데, 여기에 따르면 기본적인 공부를 마친 후 관직으로 나가기 전인 20살 때부터 긴 시간동안 중국을 돌아다니며 여러 사적을 탐방하고 주민들의 이야기를 전해듣는 데 썼다고 한다. 사마천은 남쪽으로 내려가 양자강과 회하를 여행하고 회계산에 올라 우 임금의 동굴유적을 찾아보았으며, 절강성과 구의산 등을 보았다. 그 뒤 원수·상수 등의 강을 내려갔다가 북쪽으로 문수·사수를 건넜다. 제나라와 노나라의 도시에서 학업도 하고, 공자의 유풍도 관찰했다. 그 뒤 파, 설, 팽성에서 곤란을 겪었으며, 양과 초를 통과해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가 35살이던 기원전 110년 한무제는 한왕실의 봉선례를 시행했다. 사마담은 태사령인 자신도 이 역사적인 현장에 자기도 참석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으나, 참석하지 못하고 태산 아래에서 대기하란 명을 받게 되었다. 사마담은 실망한 나머지 몸이 급속도로 쇠약해져 3년 만에 세상을 떠나게 된다. 죽기 전에 사마담은 아들 사마천에게 “천하의 역사를 기록하라”는 유언을 남긴다. 사마천은 부친의 뒤를 이어 태사령이 되고 이후 황실과 조정의 석실금궤의 책들을 두루 섭렵하는 한편 수많은 사료들을 수집하고 정리한다.
참고로 봉선은 중국의 황제들이 하늘에 대해 지내던 일종의 제사로, '나처럼 위대한 황제면 봉선을 지낼 정도로 위대하도다'란 일종의 과시이다. 그 시초는 주나라 때부터라고 하나 정치적 행사(?)가 된 것은 진시황이 처음이고, 한무제가 규모를 더욱 키웠으며 이후 후한의 광무제, 송진종 등 명군 혹은 시대를 잘 탄 행운아들이 봉선 의식을 거행했으므로[2] 진짜 시대를 잘 만나고, 황제의 신임이 두터워야 간신히 참석할 수 있었다. 그러니 그런 것을 놓친 사마담이 실의에 빠질 만하다.
태사공서를 집필하던 도중, 사마천은 보병 5천으로 분전하다가 흉노족 8만에게 포위당해 항복한 장군 이릉(李陵)을 변호했고 이로 인해 한무제의 노여움을 샀다. 사실 사마천은 이릉과는 친한 사이가 아니었지만,[3] 그의 견해를 피력했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것이 오히려 무제의 미움을 사 옥에 갇히고 만다.[4]
무제는 옥에 갇힌 사마천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이때 사마천이 택할 수 있는 길은 1) 돈 50만 전을 내고 서민으로 풀려나기, 2) 사형,[5] 3) 궁형[6] 셋 중 하나였는데, 당시 50만 전은 병력 5천을 1년 동안 유지할 수 있을 정도[7] 로 거금이었는데 거부나 권세가가 아니었던 사마천이 이를 감당할 수 있을 리는 만무했고,[8] 결국 선친의 유지를 받들기 위해 궁형을 받고 고자가 되었다. 《태사공자서》에 의하면 궁형을 당했을 때 '''"이것이 나의 죄인가! 이것이 나의 죄인가! 내 몸이 훼손되어 쓸모가 없어졌구나!"'''[9] 라고 절규했다고 한다. 이 궁형으로 그는 몸에도 마음에도 크나큰 상처를 입었다. 그나마 죄를 지어 받은 게 아니라 황제에게 억울한 누명으로 미움을 받아 궁형을 받은지라 가족들과 사람들의 동정을 샀다. 특히 감염증에도 불구하고 결국 살아남는 행운(?)까지 누렸다지만 대신 여름에는 냄새 때문에 가족들도 멀리했다고 하며(...) 보임안서에서는 하루에도 장이 아홉 번 뒤틀린다(장일일이구회腸一日而九回)며 육체적인 고통을 호소했다. 게다가 얼마나 마음 고생이 심했는지 이후 친구 임안(任安)[10] 에게 보내는 편지 보임안서(報任安書)에 '''죽고만 싶다'''고 쓴 기록이 보인다. 이후 옥중에서도 역사서를 계속 집필했으며, 훗날 무제의 신임을 되찾아 중서령의 자리까지 올랐다.[11]
사마천은 왜 죽음보다 더한 치욕의 궁형을 당하면서도 살아남는 길을 선택했는지, 왜 끝내 <사기>를 남겼는지에 대한 자신의 심정을 편지 하나에 담아 후대에 남겼다. 사형수로서 죽음을 기다리고 있던 익주자사 출신의 친구 임안에게 보낸 편지가 그 처절한 문학성으로 동양 최고의 명문장으로 꼽히기에 손색이 없다.[12]
사실 한무제가 대노한 이유도 꽤나 어이없었는데 이릉과 같이 출전한 이광리는 여동생 이부인이 무제의 애첩이라 '편애 모드'가 없다고는 말하기 힘들었다. 반면 이릉은 조손 삼대가 무제와 꼬인 관계였는데 그의 할아버지 이광은 비장군으로 불리며 손꼽히는 명장이었지만 무제의 사주를 받은 위청에게 힐문을 당하자 분을 참지 못하고 자살했다. 또 작은 아버지 이감도 나름 흉노를 토벌하여 공적이 있었지만 이를 위청에게 따졌다가 사냥터에서 곽거병에게 살해당한다.[13] 물론 공식적으로는 사슴뿔에 찔려 사망했다고 했지만 이릉이 그걸 모르지는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총대장 이광리는 패했는데 이릉은 압도적인 열세를 무릅쓰고 8일 동안 저항하다 끝내 투항한다.“죽음은 단 한 번이지만, 다만 그 죽음이 어느 때는 태산보다도 더 무겁고, 어느 때는 새털보다도 더 가볍습니다. 그것은 어떻게 죽느냐에 따라 달라집니다. 먼 옛날 주나라 서백은 제후의 신분이면서도 유리에 갇힌 몸이 되었으며, 이사는 진의 재상까지 지냈으면서도 다섯 가지 형벌을 다 받고 죽었고, 팽월, 장오는 한때 왕의 칭호까지 받았으나 갖은 문초를 받아야 했고, 강후 주발은 한나라 가문과 원수지간인 여씨 일족을 주살해 권세가 비할 데 없는 몸이면서도 취조실에 들어갔습니다. 협객으로 유명한 계포는 노예로 팔려가기까지 했습니다…
예로부터 어려움을 극복해 고난 속에서도 남달리 뛰어난 일들을 이뤄낸 인물들은 몇 세기가 지난 지금까지도 그 이름이 칭송되고 있습니다. 주나라의 문왕은 감옥에 갇혀서 <주역>을 연구해 글로 남겼으며, 공자는 곤액을 당하고 나서 <춘추>를 썼습니다. 좌구명은 두 눈이 먼 뒤에 <국어>를 지어냈고, 손빈은 두 다리를 잘라내는 형벌을 받고서 그 유명한 <병법>을 완성시켰습니다. 여불위는 촉에서 유배생활을 했기 때문에 <여씨춘추>가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으며, 한비자는 진나라에 갇혔기에 <세난> <고분>의 글을 썼습니다. <시경>에 실린 시 300편도 대부분은 성현께서 분발해서 지으신 것입니다.
이렇게 모든 훌륭한 일들은 생각이 얽혀서 잘 풀리지 않고 마음이 통할 곳을 잃었을 때 이루어집니다. 즉 궁지에 몰려 있을 때라야 지나간 일을 돌이켜보면서 미래를 바라볼 수 있는 지혜를 얻기 때문입니다. 좌구명이 시력을 잃고 손자가 다리를 절단당했을 때 세상 사람들은 그들이 다시 일어서게 되리라고는 상상조차도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들이 그러한 참혹한 고통을 당했기 때문에 물러나서 글을 쓰고, 방책을 저술했으며, 울분을 토로했고, 문장을 남겨서 자신의 진정을 표현했습니다.”
이런 일로 궁형을 당해야 했던 사마천은 그야말로 안습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때 총대장이었던 이광리 또한 나중에 무제 말년의 후사문제에 휘말리게 되자 흉노와 싸우라고 준 군사들을 끌고 망명해버렸고, 사마천을 성불구자로 만들면서까지 이광리를 두둔했던 무제는 화가 머리 끝까지 올라 장안에 남아 있던 그의 일족을 모두 몰살해버렸다. 투항한 이광리는 호록고 선우의 사위가 되어 떵떵거리며 살았지만 오래 권세를 누리지 못하고 호록고의 모친인 전대 선우 저저후의 연지가 병에 걸리자 산 제물로 바쳐지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이는 먼저 투항해서 정령왕이 되었던 위율이 호록고에게 받던 총애를 이광리에게 뺏기자 위기감을 느낀 나머지 꾀를 써서 무당을 매수했고, 무당은 위율과 함께 선우한테 이광리를 제물로 바치면 모친이 나을 거라고 꼬드겼기 때문...
그래도 나중에는 한무제가 이 일을 후회했는지 당시 사마천을 비방하거나 처벌하라고 했던 사람들을 싹 다 죽여버리고 사마천을 불러 '남자가 그까짓 거(?) 없는 게 뭐 대수냐! 겨우 그런 걸로 너무 절망하지 말고 당당하게 어깨 펴고 다녀라 하하하'라고 호탕하게 웃으며 위로했다는 기록이 있다.[14]
2.1. 말년
《태사공서》 작성 이후의 기록은 전무해서 알 수가 없다. 다만 한서 사마천 열전에 ''''그 재능에도 불구하고 또다시 고통을 당했으니 그 최후가 평안하지 않았다.\''''라는 기록으로 볼 때 말년이 영 좋지는 않았는 듯.[15] 그의 사망연도 또한 정확하게 기록된 바는 없으나 기원전 86년 즈음으로 인식되고 있다.
사마천의 고향이라는 섬서성 한성시에는 그의 후손들인 동(同)씨와 풍(馮)씨들이 거주하고 있다. 사마(司馬)라는 성이 아니어서 이상할 듯 하지만 동(同)은 사(司), 풍(馮)은 마(馬)를 변형한 것인데 이것은 사마천의 죽음과 관련이 있다. 사마천의 죽음에는 자살설을 비롯해 여러 설이 있는데, 그 후손들은 사마천이 상기 행적 이후 또 한번 황제를 비판해 노여움을 사 처형되었다고 말한다. 그래서 그 일족들은 성씨를 둘로 나누어[16] 사(司)씨, 마(馬)씨, 아니면 성씨 한자를 변형시켜 동(同)씨, 풍(馮)씨 등으로 바꾸면서 숨어 살아왔다고 한다. 그래서 상당히 먼 후대에 와서야 사마천의 후손으로 다시 공인되었기 때문에 가문의 역사에 비해 대수가 상당히 적다. 《태사공서》가 걸출하긴 하지만 후한시대까지도 방서(謗書), 즉 정부를 비방하는 위험한 책으로 불렸다는 점, 그리고 한무제의 까탈스러운 성격만 보더라도 개연성이 전혀 없는 이야기는 아니다.[17]
하지만 이미 전한 말기에 세상에 나와 <태사공서>를 면학하고 초사하는 사람이 있었다고 하며, 다행히도 지금까지 <태사공서>는 전해지고 있다.
3. 평가
죽음 대신 치욕스러운 궁형을 택한 선택을 두고 가족들과 지인들을 제외하면 당시 사람들은 두고두고 그를 멸시했다. 그러나 개의치 않고 더욱 발분해 기원전 90년 경, 중국 역사서 중 가장 중요한 책으로 손꼽히는 《태사공서》를 완성한다. 이 태사공서가 훗날 이름이 바뀌어 전하니 그 이름이 바로 '''사기'''다. 사기는 그 책이 사찬서(私撰書)임에도 중국의 정사인 24사에 항상 포함되면서 나머지 사서를 압도하는 위엄을 뽐냈다. 사기와 한서, 삼국지, 후한서의 이른바 '전사사(前四史)'를 제외한 다른 정사서는 모두 관찬서(官撰書)이다.
《태사공서》는 그동안 춘추로 대표되는 편년체(編年體) 역사 서술 방식과 구별되는, 본기(本紀)·열전(列傳)·지(志)·연표(年表) 등으로 구성하는 그만의 독특한 방식인 기전체(紀傳體)를 확립하는 시발점이 되었고 이후 동양 역사서의 기본 방침이 되었다. 사기는 중국 고대사를 사관에 입각해 기록한 최초의 역사서라는 의미를 넘어선다. 이는 사마천 개인이 보여 준 불세출의 통찰력과 날카로운 안목에 힘입은 바가 크다. 사기는 ‘기전체’라는 형식에 바탕을 둔 정확한 기술과 투철한 역사관으로 동양 역사 서술의 기본이 되는 책일 뿐 아니라, 행간 행간에 작가의 숨결이 느껴지는 문학서이자 학문의 전 분야를 아우른 백과전서이다. 이러한 사기는 우리나라에도 큰 영향을 끼쳐,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역사서인 김부식의 삼국사기나 고려사도 기전체로 쓰였다. 사기의 쉼 없는 생명력의 원천은 처절한 인간적 고뇌를 통해 이루어진 산물이라는 데 있다. 사마천이 사기의 완성을 위해 심혈을 기울인 것은, 그것이 깊은 절망의 늪에 빠진 자신이 건재하다는 것을 입증할 수 있는 일이라고 믿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현세에서 받은 치욕과 오명을 사후의 언제라도 씻어 버릴 수 있다고 믿었던 그였기에 모든 것을 사기의 완성에 내걸었다.
《태사공서》에는 한무제에 대한 내용도 있는데 아무리 자신을 고자로 만들었다고 해도 당대의 권력자이며 황제인 한무제를 사마천 자신이 비판했으리란 근거가 부족하다는 이유로 후세의 가필이란 의혹을 받는다. 하지만 사마천은 잃을 게 없는 인물이었기에(본인 스스로도 자기는 궁형을 받고도 "치졸하게"[18] 살아있는 이상 자기는 이미 죽은 거나 마찬가지란 말을 여러 차례 했다) 어차피 죽을 마당에 황제를 욕한다 해도 별 페널티는 없었기 때문에 이판사판으로 나왔을 가능성도 무시할 수 없는 데다가 가필이라는 물증도 없다.[19] 한문학자들 가운데서는 효무제 본기의 문체가 지나치게 다른 부분과 달라 후대의 가필이라는 의견이 대다수이다.
그 외에도 한무제의 전 황제인 한경제 본기도 그 내용이 너무 단조롭다는 이유로 가필 의혹을 받고 있다.
사마천 이전에 역사라는 개념은 주로 역(歷)이라는 한자로 표기했는데 이것은 1년의 개념을 준 달력에 중심을 둔 생활중심의 개념이었다. 하지만 사마천 사후로 역사(歷史)라는 단어가 탄생했는데, 이는 역사의 개념이 도덕적인 평가를 중심으로 한 지금의 역사로 바뀌었다는 것이자 '''태사공 사마천의 업적을 기리겠다는 뜻'''이 담겨있기도 하다. 사마천의 위대함을 엿볼 수 있는 가장 대표적인 상징이다.
사마천은 분서령 이후 아직 여러 군데에 여러 형태로 상당히 잔존해 있던 자료들을 모으고 모아 <사기>에 담았다. 프랑스의 사마천 연구자 샤반은 사마천이 종종 지방의 역사를 그대로 옮겼다는 증거가 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예컨대 사마천은 위나라(권 44), 연나라(권 34)에 대한 사건을 서술하면서 ‘우리 군대’, ‘우리 성’, ‘우리 도읍’ 등으로 쓰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사례는 사마천이 사라질 위기에 놓인 사료들을 얼마나 살려내려 노력했는지 간접적으로 증명하는 것이다. 사마천은 <열전> 등을 쓰기 위해 수많은 책을 모으고 읽어야 했다. 이런 과정을 겪으면서 망실 위기에 놓인 역사들이 <사기>에 수록되거나 녹아들어 살아남는다. 나아가 사마천은 <사기>를 만들기 위해 사료의 저자는 물론 그의 문장 스타일, 그의 생애, 나아가 저작 자체도 모으고 연구했다. 그래서 저작에 나오는 주요한 문장이 발췌돼서 실리곤 했다. 바로 이 덕분에 고대의 진귀한 문장들이 후세까지 살아남을 수 있었다.
예컨대 사마천은 천재적인 학자 가의의 ‘과진론’(過秦論·진나라의 실책에 관한 연구)과 시 2수도 발굴해 보존시키고 있다. 나아가 사마상여의 이색적인 작품인 부(賦·중국 시문의 한 형식), 굴원이 멱라수에 몸을 던져 죽기 전에 지은 부, 한비자의 ‘세난’(說難·유세하는 것의 어려움을 주제로 쓴 글), 명의 편작의 의론(醫論·의학에 관한 글) 등 수많은 작품들이 이렇게 해서 후세에 전해질 수 있었다. 사마천은 동시대의 자료를 수집하고 보존하는 데도 큰 역할을 했다. 진시황이 전국 각지에 남긴 5개의 각석(刻石)을 비롯해 한나라의 황제들이 그 황자들에게 광대한 영토를 줄 때의 수령문, 항우와 유방의 시 같은 게 그런 예이다.
수많은 공적인 보고서, 명령문서, 변론, 담화 등도 모두 사마천의 손을 거쳐 후세에 전해질 수 있었다. 그 결과 우리는 마치 눈앞에서 오자서와 손빈이 울분을 딛고 복수에 성공하며, 노자와 공자가 천지와 인간에 대해 대화하는 것을 생생하게 경험하는 감동을 만나게 된다. 영원히 소멸될 수도 있었던 고대의 영웅들은 사마천의 손을 통해서 부활한 것이다. 사마천은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사기’를 저술했다. 사마천은 ‘사기’를 집필했던 14년 동안 수많은 과거의 인물들이 살고 죽은 이유를 기록하고 전하면서 그 인물들의 원한을 풀어주었고, 동시에 자신도 해원했다. “같은 종류의 빛은 서로가 비추어 주고, 같은 종류의 물건은 서로가 감응한다.”는 믿음으로 자신의 억울함과 치욕을 알아줄, ‘사기’ 저술의 집념을 알아줄 또 다른 청운지사를 기다렸다. 사마천의 그 바람은 이루어졌고 ‘사기’와 더불어 지금까지 사마천은 불멸의 존재로서 살아있다.‘내 힘은 산을 뽑을 수 있고 기는 세상을 뒤덮을 수 있건만
때가 불리하여 추(騶·항우의 오추마)도 나아가지 않네
추가 나아가지 않으니 어쩔 수 없지만
우(虞·항우의 총희 우희)여! 우여! 너를 어찌 하리.’(항우의 마지막 시)
사마천은 단순히 역사서에만 영향을 준 것이 아니라 문학의 영역에도 큰 영향을 줬다. 서사문학으로서의 전(傳)이라는 장르는 사마천의 태사공서 중 열전에서 비롯되었다. 동북아시아에서는, 특히 한문학에서는 문학과 비문학 간 경계가 불분명하여 상호 영향을 주고 받았는데, 열전의 구조와 정신을 그대로 본딴 실전이 나타나고, 여기에 허구적 형상화를 거친 탁전,[20] 가전 등의 형태가 등장했다고 보는 것이 통설이다. 몇몇 전들의 경우 아예 사마천의 열전을 언급하는 경우도 있다. 이 가전은 훗날 소설(小說)로 이어지는데, 주로 단일 인물의 일대기를 그린 전책 양식의 소설에 영향을 미쳤다.
대표적인 예로 사기 중 회음후열전은 한 고조 유방을 도와 천하 통일의 큰 역할을 맡은 한신의 이야기다. 여기서 한신이 젊은 시절 건달의 가랑이 밑을 기어가는 수모를 당했다는 유명한 에피소드가 나온다. 그런데 사마천은 의도적으로 한 구절을 끼워 넣었다. '한신은 한참 동안 그를 쳐다봤다(信孰視之·孰은 熟과 통하는 글자)'는 네 글자다. 심리적 갈등과 인내, 내면적 성장의 깊이가 함축된 문장이다. 사마천은 기존 자료로 작업하면서도 그것을 재구성해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냈다. 사기의 문학성이야말로 인간을 입체적이고 폭넓게 묘사할 수 있었던 열쇠다. 유방과의 싸움에서 패해 비장하게 자결한 항우, 진시황을 암살하려다 실패한 형가, 자신을 알아준 사람(지기·知己)을 위해 칼을 뽑아든 예양 등은 그런 사마천의 붓끝에서 피와 살을 얻어 입체적인 캐릭터로 살아난다. 결국 인간을 이해하는 감성과 깊이, 현대 시나리오를 방불케 하는 치밀한 설정과 구성, 롤러코스터를 타는 듯 자유자재로 상승과 하강을 그리는 변화무쌍한 문장이 '사기'를 불멸의 고전으로 만들었다. 이 때문에 사마천이 '백이열전'에서 불행한 삶을 산 의인과 천수를 누린 악인을 대비시킨 뒤 돌연 간결한 문장으로 '천도란 옳은가, 그른가(천도시야비야·天道是耶非耶)'라고 절규할 때, 독자도 함께 괴로움에 빠지게 된다.
4. 기타
- 사마천이 남긴 대표적인 글로 알려진 ≪사기≫와 <보임안서(보임소경서)> 외에도 몇 편이 더 남아 있는데[21] 반고의 ≪한서≫·<예문지>에 따르면 여덟 편의 산문과 ≪사마천집≫ 한 권, ≪소왕묘론≫ 두 권이 더 있다고 한다. 다만, 이들 중 상당수는 현재 전해지지 않고 있고, 두 편의 산문[22] 과 ≪소왕묘론≫ 일부만이 다른 책들에 남아 전해지고 있다고 한다.[23]
- 궁형은 나이가 들면 들수록 수술 후 생존확률이 줄어드는데 당시의 수술기술로 40대 후반인 사마천이 궁형을 택했다는 건 자존심은 자존심대로 잃어버리고 자칫 목숨까지 같이 잃을 수도 있는 위험천만한 도박이었다. 특히 사마천은 궁형으로 인해 '하루에 9번씩 창자가 뒤틀린다'라고 할 정도로 신체적 고통을 받았다. 하지만 그는 사기를 완성하기 위해 이 수모와 고통을 감당하였고 결국 동양 역사학의 시조로 평가받는 대업을 이루게 된다.
- 돈을 내고 형을 면제받지 못한 것이 너무나 큰 아쉬움으로 남았는지, 사마천은 경제적인 면을 주로 다룬 화식열전(貨殖列傳)에서 여러 부자들의 이야기와 함께 돈만 많으면 황제 부럽지 않게 떵떵거리며 살 수 있으니 가급적 돈을 많이 버는 게 좋다는 식의 서술을 써놓는다.
- 사료 문제로 공자의 견해에 대놓고 반대하기도 했다. [24]
- 그의 아내는 유씨(柳氏)였고 그 딸[25] 이 낳은 외손자 양운(楊惲)[26] 은 사기를 보관하고 있으면서 이를 익히다가 세상에 내놓았으며 전한을 멸한 왕망이 사마천의 후손을 찾아서 사통자(史通子)라는 사관 벼슬을 주었다.
- 후대의 환관들에게는 강철장군이라는 칭호와 함께 환관들의 시조로 추앙받았다. 물론 사마천 훨씬 이전에도 환관은 있었지만 상징적 의미의 시조.
- 그를 소재로 한 시들도 있다.
긴 낮 긴 밤을
멀미같이 시간을 앓았을 것이다.
천형 때문에 홀로 앉아
글을 썼던 사람
육체를 거세당하고
인생을 거세당하고
엉덩이 하나 놓을 자리 의지하며
그대는 진실을 기록하려 했는가||
세상의 사나이들은 기둥 하나를 사랑하는 사마천 당신에게
세우기 위해 산다
좀더 튼튼하고
좀더 당당하게
시대와 밤을 찌를 수 있는 기둥
그래서 그들은 개고기를 뜯어먹고
해구신을 고아먹고
산삼을 찾아
날마다 허둥거리며
붉은 눈을 번득인다.
그런데 꼿꼿한 기둥을 자르고
천년을 얻은 사내가 있다.
기둥에서 해방되어 비로소
사내가 된 사내가 있다.
기둥으로 끌 수 없는
제 눈 속의 불
천년의 역사에다 당겨 놓은 방화범이 있다.
썰물처럼 공허한 말들이
모두 빠져 나간 후에도
오직 살아 있는 그의 목소리
모래처럼 시간의 비늘이 쓸려간 자리에
큼지막하게 찍어 놓은 그의 발자국을 본다.
천년후의 여자 하나
오래 잠 못 들게 하는
멋진 사나이가 여기 있다.||
- 일본의 소설가인 시바 료타로가 그를 매우 존경했으며, 필명(본명은 후쿠다 사다이치)을 시바 료타로(司馬 遼太郎)로 만든 이유도 '자신은 사마천을 따라가려면 멀었다'는 뜻으로 지었다고 한다.
- 사마천 사후 훗날의 진태조 사마의는 같은 가문의 사람이지만 사마천의 직계후손은 아닌 관계. 즉, 전주 이씨로 비유하면 조선 태조 이성계와 이안사의 후손이긴 하지만, 조선왕조 직계가 아닌 전주 이씨 가문의 한 위키니트 이 아무개의 관계-본관은 같으나 분파는 다른 관계-로 볼 수 있다.
- 사기에 의하면 사마천의 가문은 원래 주나라 때부터 이어진 가문으로 사관으로서 역사를 기록하는 일을 했다고 한다. 그렇게 이어진 가문은 주나라를 떠나 위(衛)나라, 조(趙)나라, 진(秦)나라 등으로 흩어지게 되었다.
- 한편 진나라로 간 사마씨 중에 사마착이라는 인물이 있었는데 진왕 혜문왕에게 촉을 정벌할 것을 고하였고 이에 사마착이 촉을 정벌하여 진왕으로부터 촉의 수장으로 임명된다. 그 후 사마착의 손자 사마근은 장평 전투에서 조나라를 대파하는데 크게 기여하였으나 백기가 숙청될 때 두우에서 함께 처형당하고 만다. 사마근의 손자 사마창은 진나라에서 철을 관장하는 관리가 된다. 사마창의 아들 사마무택은 시장(상업 지역을 담당하던 관리)이 되었고 사마무택의 아들 사마희는 오대부의 작위를 받았으며 사마희의 아들 사마담은 태사공에 이르렀다. 사마천은 이 사마담의 아들이다.
- 한편 조나라로 들어간 사마씨의 후손인 사마앙은 진나라가 망할 무렵에 무신군의 장수가 되어 조가를 함락하는데 항우에 의해 은왕으로 봉해졌고 고조가 항우를 정벌할 때 한나라에 귀순하여 하내군을 영지로 받게 된다. 이 사마앙의 11대손이 경조윤 사마방이며 방의 차남이 사마의다. 이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 주나라의 사마씨 가문 → 조나라로 간 사마씨 분파 → 사마앙 → 사마방 (앙의 11대손) → 사마의 (방의 아들)
- 심영물을 통해 사마천이 궁형을 당한 뒤 사기를 저술하게 되는 과정을 담은 작품이 만들어지기도 했다. 제작자는 차커. 여담으로 차커는 서울대학교 서양사학과 출신이며 작품 내에 고증도 잘 따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