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희황후 등씨

 


'''후한의 황후
和熹皇后 | 화희황후
'''
<colbgcolor=#a11> '''시호'''
화희황후(和熹皇后)[1]
'''성씨'''
등(鄧)
''''''
수(綏)
'''출생'''
불명
'''사망'''
159년
'''재위'''
'''후한의 황후'''
102년 ~ 105년
'''후한의 황태후'''
105년 ~ 121년
'''부군'''
화제(和帝)
'''가족'''
조부 등우(鄧禹, 부친 등훈(鄧訓)
1. 개요
2. 남양 등씨 가문의 딸에서 황후로
3. 섭정태후로서 후한을 통치하다
4. 둘러보기

[clearfix]

1. 개요


후한 화제의 두 번째 황후이자, 후한에서 임조칭제하였던 두 번째 황태후.[2] 이름은 수(綏). 『후한서』 「황후기」에 관련 기록이 있다.

2. 남양 등씨 가문의 딸에서 황후로


후한의 개국공신에 해당하는 운대 28장에서 제1위로 기록된 태부(太傅) 등우(鄧禹)의 손녀이자 호강교위(護羌校尉) 등훈(鄧訓)의 딸이다. 등씨 일족은 형주 남양군의 유력 재지 세력으로 보이는데 유학에 대한 깊은 관심과 근신하는 자세가 가풍이었다고 보인다. 등수는 어린 나이부터 효심이 깊어 할머니가 등수의 머리를 잘라주다가 목에 상처를 냈을 때에도 마음을 상하게 할까봐 아픔을 참았다는 일화가 있다. 또한 여성임에도 불구하고 여공(女工)보다는 유학(儒學)에 관심을 보였으므로, 집안 사람들이 등수를 제생(諸生;태학에서 유학을 공부하는 학생이라는 의미)이라고 불렀다. 이러한 학식과 시사에 대한 출중한 식견은 등수의 아버지 등훈이 대소사를 10살 남짓한 어린 딸 등수와 상의했다는 것에서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화제 영원(永元) 7년(95), 간택되어 궁중에 들어갔는데 미색이 출중하니 황제의 총애를 받아 귀인(貴人)이 되었다. 항상 공손하고 조심스러우며 행동거지에 법도가 있었고, 황제의 후사가 많지 않음을 염려하여 자주 재인(才人)을 뽑아 황제에게 바치니 황제의 총애가 더욱 커졌다. 이때 황후였던 효화황후 음씨는 등씨를 질투하여 무고하고 저주하다가 폐위되니, 등씨가 새 황후가 될 수 있었다.

3. 섭정태후로서 후한을 통치하다


화제 원흥(元興) 원년(105), 화제가 붕어하고 태어난 지 100일밖에 안된 상제가 즉위하니 황태후가 되어 임조칭제하였다. 상제는 즉위 1년을 간신히 넘기고 붕어하니, 공석이 된 제위에 안제를 옹립하고 여전히 임조칭제하였다. 이 두 차례의 신제(新帝) 옹립에서 화제의 장자인 유승(劉勝)이 살아 있었지만, 고질병이 있다는 이유로 물리친 이후 원망을 품었을까 염려하여 끝내 옹립하지 않았다. 백관들의 의중이 유승에게로 향해 있었고, 황제 후보에서 밀려난 후 평원왕(平原王)으로 봉함받고도 8년을 더 살아있었기에 고질병이 아닐 가능성도 농후하다. 상제 옹립 때에는 상제도 화제의 친자였기 때문에 둘 중 하나를 고르면서 어린 쪽을 택하였고, 안제 옹립 때에는 유승이 살아있어서 화제의 혈통이 단절된 것도 아님에도 방계인 안제를 데려다 세웠기에 등태후의 집권욕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라 할 수 있다.
등수는 유학적 소양을 갖추고 비교적 덕정(德政)을 펼친 편이었다. 외척들의 발호를 항상 경계하였고, 재물을 아끼는 등 훌륭한 조처를 내렸다. 하지만 전통적으로 황제만이 가질 수 있다고 여겨지는 권능을 많이 침해하기도 하였다. 이를테면, 한나라 황실의 역대 황제들이 모셔져있는 태묘(太廟)에 대한 제례가 화희황후 본인의 주도로 이루어진 점, 황태후 명의의 조서로 사면령을 발한 점, 자기 친족 등씨 일가뿐 아니라 황족 유씨에도 통제를 가한 점 등이 그것이다. 하지만 이는 임조칭제하였던 황태후들의 전형적인 통치 행위이자 지향점임을 간과할 수 없지만, 등태후처럼 장기간에 걸쳐 실권을 장악한 경우는 또한 특수한 사례이기도 하다.
화희황후는 약 17년 동안 임조칭제하였는데, 후한이 존속한 196년을 백분율로 환산했을 때 약 8.67%나 점하는 시기였다. 또한 종신토록 섭정하였기에 관례와 혼인도 치르고 현대적 관점에서도 이미 성인이었던 안제가 직접 친정하였던 기간은 3.5년에 지나지 않는다. 안제 재위기간(106년 9월 21일 ~ 125년 4월 30일)의 대부분이 등태후의 통치 하에 있었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안제 영녕(永寧) 2년(121) 3월에 붕어하니 나이 41세였다.
하희황후 등씨가 사망하고 석 달 뒤 외척의 자격으로 정계에서 활약했던 등씨 일족은 안제의 유모 왕성(王聖) 등에게 황제를 바꾸려 시도했었다는 모함을 받아 숙청되었다. 다만 당시의 사인들이나 관료들 중에 자신의 목숨을 걸고 등씨 일족의 무고함을 신원하는 이들의 상주가 연이었고, 이에 깨달은 바가 있었던 안제에 의해 등씨 일족은 유배에서 해재되어 낙양으로 돌아오는 등 일부 복권되기도 하였다.

4. 둘러보기






[1] 후한대 황후의 시호는 황제의 시호에서 한 글자를 따오고, 그 다음에 황후 자신의 시호 한 글자를 붙인 두 글자였다. 예컨대 광무제의 황후이자 명제의 어머니 음씨는 광열황후이고, 명제의 황후이자 장제의 어머니 마씨는 명덕황후이다. 폐위된 황후는 별도의 시호가 없이 'X제황후'로만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화는 남편 화제의 시호에서 따온 것이고, 희는 공적이 있어 다른 사람을 편안하게 했다(有功安人曰熹)는 의미에서 올려진 것이다. 蔡邕集謚議曰:「漢世母氏無謚, 至于明帝始建光烈之稱, 是後轉因帝號加之以德, 上下優劣, 混而為一, 違禮『大行受大名, 小行受小名』之制. 謚法『有功安人曰熹』. 帝后一體, 禮亦宜同. 大行皇太后謚宜為和熹.」[2] 후한의 첫 번째 임조칭제는 장덕황후 두씨화제 즉위 이후 실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