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화(명나라)
鄭和
1371년~ 1433년
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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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명대의 환관. 전세계 환관사에 길이남는 대항해라는 업적을 남긴 전설적인 환관으로, 중국 뿐만 아니라 전세계 역사학자들의 관심을 받는 엄청난 인물이다.
본명은 마화(馬和)이다. 정이라는 성씨는 정난의 변 이후 영락제에게 하사받은 성이다.
국적은 중국이지만 중앙아시아의 이슬람교 집안 출신이다. 성의 마(馬)는 무슬림에게 흔한 '무하마드'의 음차. 윈난성(雲南省)의 한 지방 관리였던 마합지(馬哈只)의 아들로 태어났다. 역시 합지(哈只)라는 이름은 메카 성지순례를 마친 사람에게 붙는 칭호인 하지(Hajj)의 음차이다.
1382년, 윈난성이 명나라에 정복되자 명나라 군대에 포로가 되어 끌려왔다.[1] 어린 나이에 명나라에 끌려온 후 거세되어 환관이 되었고 훗날 영락제가 되는 연왕(燕王) 주체(朱棣)를 섬겼다. 정난(靖難)의 변 때에 연왕을 따라 무공을 세웠고, 연왕이 건문제를 물리치고 황제로 즉위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이후 환관의 장관인 태감(太監)에 발탁되었으며, 정(鄭)씨 성을 하사받았다.
당시 다른 국가들의 기술로는 흉내도 낼 수 없는 대규모 함대를 꾸려 인도, 아프리카까지 항해했다고 한다. 정화는 마지막 항해였던 7차 항해에서 돌아오는 중 숨을 거두었다.[2] 후세의 환관들에게 사기를 쓴 사마천과 종이를 발명한 채륜 못지 않은 영웅으로 존경받았다고 한다.[3] 정화는 유라시아 쪽 무슬림이라서 한족과는 다른 튀르크 계열로 보이기 때문에, 유라시아 나라에서도 정화의 항해에 일부 관심을 보이기도 한다. 서양권 웹에서는 Admrial Zheng He, Cheng Ho[4] 등으로 검색하면 글이 쏟아져 나온다. 중화인민공화국에서는 정화가 첫 항해를 떠난 날인 7월 11일을 '중국항해일(中国航海日)', 즉 바다의 날로 정해 기념하고 있다. 중화민국군 해군에서는 올리버 해저드 페리급 라이센스판인 성공급 호위함의 2번함에 정화의 이름을 붙여 기리고 있다. 인민해방군 해군도 사관후보생 훈련함 '정화' 함이 있다.[5]
인민해방군 해군 훈련함 '정화' 함.
2. 정화의 대원정
영락제의 명을 받아 1405년부터 1430년까지 일곱차례에 걸친 대원정을 떠난 것이 유명하며, 항해 거리만 18만 5,000km에 이른다. 정화가 이런 원정을 나선 이유는 동남아시아 등지의 조공무역국을 늘리기 위한 목적이라고 알려져있다. 하지만 정난의 변이후 생사불명인 건문제를 찾아나섰다는 설도 있다.정화의 최종목적은 무엇인가?
이른바 '정화의 원정'은 기존 서구중심의 역사관을 비판하기 위한 카드로 굉장히 많이 활용된다. 참고로 중국에서는 이 정화의 원정을 정화하서양(鄭和下西洋: 정화가 서쪽 바다로 나감)이라고 부른다. 심지어는 아메리카 대륙을 크리스토퍼 콜럼버스보다 먼저 다녀왔다는 말도 있다. 아메리카 도달설에 따르면 정화의 함대 중 분함대 하나가 해류를 타고 아프리카 해안을 따라서 북진하다가 사하라 남쪽에서 그대로 해류를 타고 대서양을 가로질러 브라질 해안에 도달했고, 다시 아메리카 해안을 따라서 남진하다가 아마도 드레이크 해협을 통과해서 태평양으로 나갔고, 남아메리카 해안을 따라서 북상하다가 남아메리카 혹은 북아메리카의 태평양 연안 어딘가에서 다시 해류를 타고 태평양을 가로지른 것이 된다. 정화는 모든 함대를 한데 모아서 항해한 것은 아니며, 중간에 여러 분함대를 파견했다. 그 중 하나가 세계일주를 했다는 것.정화(鄭和)는 도대체 어디까지 항해했는가?
사실 아메리카 도달설은 함대 활동에 대한 여러 공상적인 설명 중 일부에 불과하며, 그 이상의 주장도 많다. 아메리카 남쪽에서 다시 함대를 나누어 일부 함대는 남극 대륙을 발견했다거나, 다른 함대는 대서양을 가로지르지 않고 그대로 아프리카와 유럽 해안을 거쳐서(그런데 왠지 유럽인들에게는 전혀 목격되지 않고) 북유럽을 돌아서 시베리아 북쪽의 북극권을 항해한 후 베링 해협을 통해서 중국으로 되돌아왔다는 주장 등이다. [8] 당연히 이런 주장들은 아메리카 도달설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사람들 중에서도 극소수만이 관심을 보인다. 그 외에도 정화의 함대 중 일부가 오스트레일리아에 도달했다는 설도 있다. 이 역시 근거는 박약하지만, 아메리카 도달설 등과는 달리 오히려 항해 난이도상으로는 크게 무리는 없다. 또한 오스트레일리아가 당대로써는 문자가 쓰이고 거대한 국가들이 여럿 나올정도로 번화했던 인도네시아 일대의 여러 섬과 그리 멀리 떨어져있지 않았기에 동남아시아 상인 중 일부는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과도 소규모이지만 무역을 하고 있었으므로, 동남아시아에서 오스트레일리아에 대한 정보를 얻었을 가능성도 있다. 그러나 오스트레일리아의 거친 자연, 뒤떨어진 문명수준, 극히 낮은 인구밀도를 고려할때 이곳에 닿았다고 해도 유의미한 교역을 하지 못했을 것이고 그곳이 거대한 신대륙인지, 그저 작은섬의 일부 지역인지조차도 몰랐을 가능성이 높다. 다만 이후로 일부 중국인 상인들이 진짜로 호주로 찾아와서 호주의 해삼을 수입했다는 얘기가 나온것을 보면 교류가 없지는 않았다. 단지 문자같은 선진문물 전파나 국가형성같은것과는 거리가 있을뿐이었지. 서양사로 비유하자면, 일부 바이킹들이 북아메리카의 뉴펀들랜드 지방에 정착하여, 일부 아메리카 원주민들과의 교류 및 분쟁이 있었던 것과 비슷한 맥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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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화의 함대가 어디를 항해했는가에 대한 이설이 나오는 것은 무엇보다도 정확하게 어디를 항해했는지에 대한 기록이 남아있지 않기 때문이다. 정화의 항해는 국가적 사업이었으므로 당연히 자세한 보고서가 작성되었겠지만, 현재 남아있는 것이 없어서 이것을 확인할 방법이 없다. 대신에 정화의 원정에 따라간 사람들이 남긴 기록이나, 원정에 참여한 사람들 무덤의 묘비와 같은 자료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따라서 아프리카에 도달했다는 기록도 사실 남아있지 않지만, 정화의 항해와 관련하여 아프리카의 기린으로 보이는 동물의 그림이 남아있고 케냐의 한 부족 가운데는 조상이 중국인이었다는 전설이 내려져 오고 있으며, DNA조사 결과 실제로 중국인의 DNA가 있는 것도 확인되었기 때문에 최소한 동아프리카에 도달한 것은 일반적으로 인정받고 있다(최소 소말리아, 탄자니아 인근의 해안까지 갔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말레이시아, 자바섬, 인도, 실론섬, 페르시아 남부, 아라비아 반도 등의 지역은 송나라, 원나라 때 이미 바닷길이 알려진 지역이며 중국과의 교역에 대한 기록과 유물이 많은 편이라 정화의 원정 주요 지역으로 추정되고 있다.
후대의 문관들이 황제들이 다시 항해사업에 관심을 가질 것을 우려하여 기록을 불태워버렸다는 설이 있으나 정화의 기록이 완전하게 말살된 것이 아니며 무엇보다도 이게 말이 안 되는 것이, 정화의 원정에 관한 기록이 명실록에 있다. 기록을 말살하려 했다면 이것부터 지웠을 것이다. 정화는 환관이었고 따라서 공식 관료조직의 외부에 존재했다. 병부나 공부 등 문관으로서의 신분이 있었다면 해당 관청과 교환한 문서가 남았겠지만, 정화의 모든 활동은 황제 직속의 특사로서 진행된 것이었다. 다른 관료집단을 거치지 않았기 때문에 기록이 많이 남지 않았으며, 정화 자체도 자신의 활동에 관한 기록을 남기지 않았다.
하지만 개빈 멘지스 등이 주창한 정화 아메리카 발견설을 비롯한 세계일주설은 증거가 매우 부족해서 학계에서는 인정하지 않고 있으며, “1421 - 중국, 세계를 발견하다”의 저자인 개빈 멘지스의 경우에는 부정확한 근거를 대거나 불리하면 학술적으로 해결하기 보다는 대중들을 상대로 여론전을 펼치는 등 전형적인 역사 왜곡의 행태를 벌이고 있어 학계에서는 취급이 좋지 않다. 애초에 정식 역사학자도 아니며, '''아시아의 신비'''라는 장사 아이템을 가지고 대중에 영합하여 책이나 팔아먹으려는 전형적인 '''유사역사가'''의 행태를 보이는 중.
3. 기함의 크기 논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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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있는 것이 산타 마리아호.
이 모형으로 재현된 정화 보선의 크기는 과장되었다는 것이 정설이다. 실제 크기는 산타 마리아호의 2배 정도밖에 안되었을 것이고 이조차 정확한 추정치가 아니다. 아래 기술된 내용 참조. 심지어 무려 17000톤이라는 어처구니 없는 헛소리까지 인터넷에 퍼져 있었는데, 이는 러일전쟁때의 '''전 드레드노트급 전함'''을 능가하는 배수량으로서 17000톤 짜리 목재범선이 건조되고 항해하는건 애당초 목재의 한계로 인해 불가능하다.[9]
- 정화의 기함인 보선의 크기 문제
사료에는 정화의 보선이 길이 44장 4척, 너비 18장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 기록대로 한다면 보선은 축구장보다 긴 길이 134.5m(44장 x 3.03m + 4척 x 0.303m), 너비 54.5m(18장 x 3.03m)에 이르게 된다. 멘지스도 이 사료를 인용하여 보선이 “길이 150m, 폭 60미터로서 당시 세계 최대였다”고 적었는데, 서울대학교의 주경철 교수 또한 이 주장을 아무런 검증 없이 사실처럼 인용하고 있다(『대항해시대』, p.14).
그러나 보선이 크기를 신뢰할 수 없는 본질적인 문제가 있다. 첫째는 사료의 신빙성에 의문이 간다는 것이다. 보선의 크기에 관해서는 정화 당대의 원사료가 모두 파기된 뒤, 후대에 라무등(羅懋登)이라는 작가가 쓴 『三寶太監下西洋記通俗演義』라는 다소 허황된 창작집에 기록된 길이 44장 4척, 너비 18장이라는 수치를 『明史』의 「정화전」 등의 사료에 그대로 옮긴 것이다. 둘째는 목선으로서 150미터에 이르는 선박을 건조한다는 것이 현대의 조선공학으로도 불가능에 가깝다는 점이다.[10]
따라서 정화 보선의 크기에 대해서는 중국 조선사가들조차도 의견이 천차만별이다. 대만 해양대학의 수밍양은 길이 74m, 너비 12.8m 정도로, 상해교통대학 교수였던 신웬어우 교수는 600톤 내지 800톤급으로, 중국 해군 공정학원의 탕즈바는 정화 보선을 길이 55.5m, 선폭 15.3m, 배수량 1500톤급으로 각각 축소해서 추정하였다.
http://news20.busan.com/controller/newsController.jsp?newsId=20110602000160
그러나 보선이 크기를 신뢰할 수 없는 본질적인 문제가 있다. 첫째는 사료의 신빙성에 의문이 간다는 것이다. 보선의 크기에 관해서는 정화 당대의 원사료가 모두 파기된 뒤, 후대에 라무등(羅懋登)이라는 작가가 쓴 『三寶太監下西洋記通俗演義』라는 다소 허황된 창작집에 기록된 길이 44장 4척, 너비 18장이라는 수치를 『明史』의 「정화전」 등의 사료에 그대로 옮긴 것이다. 둘째는 목선으로서 150미터에 이르는 선박을 건조한다는 것이 현대의 조선공학으로도 불가능에 가깝다는 점이다.[10]
따라서 정화 보선의 크기에 대해서는 중국 조선사가들조차도 의견이 천차만별이다. 대만 해양대학의 수밍양은 길이 74m, 너비 12.8m 정도로, 상해교통대학 교수였던 신웬어우 교수는 600톤 내지 800톤급으로, 중국 해군 공정학원의 탕즈바는 정화 보선을 길이 55.5m, 선폭 15.3m, 배수량 1500톤급으로 각각 축소해서 추정하였다.
http://news20.busan.com/controller/newsController.jsp?newsId=20110602000160
- 발견된 유물의 크기도 이 이론을 지지하지 않는다.
- 남경 삼차하명대 보선창에서 11.07미터 길이의 타간이 발견되었는데 이를 토대로 중잉, 황건위는 선박의 배수량을 1,251톤으로 추정했으며 천얜항, 시륭페이 등은 17,000톤의 배에는 최소 22미터의 타간이 필요했다고 계산했다. 한편 11미터 타간에 적합한 배는 5972료, 길이 220척, 폭 41척, 높이 14.8척에 970명이 타는것으로 계산했다. 신웬어우는 11미터 타간에는 배수량 800톤의 선박이 적합하다고 계산한다.
- 또한 천얜항과 시륭페이의 연구에 따르면 17,000톤급 목선에는 적어도 13톤의 철묘가 필요하지만 실제 발견된 유물은 모두 1톤 이하였다
- 나라의 조선능력도 17000톤급 건조에 부적합하다.
- 18세기 영국의 1천톤 - 1,500톤급 전열함 건조에 조선공1천명이 투입되어 1년이 소요되었다. 용강선창지에 따르면 400료선(적재량28톤, 배수량56톤)의 건조에 2487노동일이 필요했다.
- 정화의 하서양에 필요한 배 대부분을 건조한 용강선창의 조선공은 400가구에 달하므로 건조비는 배수량이 증가함에 따라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지만 계산의 편의를 위해 일정하다고 가정하면 배수량 17,000톤의 보선은 75만 4982 노동일이 필요하며 400명으로 나누면 5년이상 걸린다.
- 보선62척을 건조하는데 317년이 소요되어 원정의 수요를 대기에 부족한 것은 물론 만일 총창 4개, 분창 82개, 선공 3천명을 보유한 청강선창이 합세했더라도 건조에만 38년이 소요되어 실제 기록의 1년8개월간 보선건조 및 5년간 98척 건조기록과 큰 차이를 보인다.
- 근거 기록의 신빙성이 낮다.
- 원래 17000톤의 추정치는 삼보태감서양기통속연의(약칭 서양기),영애승람,객좌췌어에 나오는 치수 기록, 길이44장,폭18장에 따라 계산한 것이다.
- 서양기는 라무등이 1597년 지은 소설로서 1456척에 91만7280명이 탑승했다고 주장하는 등 정사와 큰 차이를 보이며 사료적 가치가 희박하다. 서양기에서 출간 날짜를 판정가능한 날짜로는 처음으로 선박의 치수 기록이 등장한다.
- 영애승람은 원본에는 정화 보선의 크기가 기록에 없었고 서양기가 출간된 당시의 20여종 판본 중 어디에도 없이 호설집본 삼보정이집에 처음으로 길이 44장, 폭 18장 기록이 나타난다.
- 객좌췌어는 1617년 처음 출간되었고 현재 남은 판본은 광서32년본으로서 서양기보다 한참 후다.
- 1621-55년 집필된 곡각에서 보선 63척의 크기가 44장, 18장으로 등장한다. 전근대의 중국에서는 기록을 다른 서적에서 베끼는 것을 당연시했다. 소설 서양기에서 처음으로 기록이 등장한 후 나머지 책들이 서양기를 베꼈을 가능성이 높다.
- 목선으로 크기를 키우는데 재료의 구조적 한계로 인한 제한이 있다.
현재까지 건조된 가장 큰 목선은 USS 와이오밍으로 길이 329피트(약 90m), 배수량 6천톤에 달했지만 방수 문제가 해결되지 못해 항상 펌프질로 물을 빼내야 했다. 따라서 길이 90미터 이상의 목선은 재료 자체의 구조적 한계로 인해 실용적인 건조가 불가능했다. 또한 44.4장의 배는 돛대가 90미터여야 하며 최소한 길이 30미터 재목 3개를 이어붙여야 한다. 재목을 이어붙이면 강도와 내구성이 극히 떨어지며, 장거리 항해에 견딜 수 있다고 보기 힘들다. 그나마 길이30미터의 재목은 사천 오지의 깊은 산중에서만 구할 수 있었다.
- 이전과 이후의 최대 선박 크기와도 격차가 매우 크며 기술적으로 연속성이 없다.
송대의 최대 해선은 배수량550톤이며 청대 후반의 기영호는 배수량830톤에 달했지만, 정화 보선으로 주장된 17000톤과 격차는 20배 이상으로서 갑작스러운 크기 증가를 설명할 추가 기술개발 등의 증거가 없다.
- 보선을 운영하기 위한 승무원 숫자가 부족하다.
- 르네상스시대 1,500톤급 베니스선에 1200명의 운용인력이 필요했으며 1588년 스페인 무적함대는 130척, 배수량 3만 톤에 30,493명이 탑승했다. 반면 상륙을 위한 육군이 탑승하지 않았던 영국함대는 총17,472명이 197척,배수량31985톤에 탑승했다.
- 중국의 400료선(배수량56톤)에 필요한 인력은 65명이었다. 이를 토대로 외삽하면 17,000톤의 거선에만 1만명의 운용인력이 필요하게 된다.
- 실제 발견된 비석의 기록 역시 17000톤 설을 지지하지 않는다.
남경에서 발견된 정해사잔비에는 1,500료, 2,000료선(각 배수량 210톤, 280톤)만이 언급되어 있다. 현재 정화함대는 17000톤급의 거선들로 이루어진 것처럼 주장하는 경우가 있으나, 현실적인 제반여건으로 볼 때 그것은 불가능하다고 볼 수 있다.
4. 대중매체에서
- 정화하서양이라는 중국 드라마도 있으며, 한국에서도 여러 차례 방영하였다. 드라마 CG질이 안 좋지만 제왕배우로 유명한 당국강(84부작 삼국지의 그 제갈량)이 스폰서인 영락제로 분하고 항해 시작 이전까지 정화는 페이크 주인공에 가깝고 영락제가 주인공이다. 대항해를 시작하면서 군사를 관장하는 장군의 지속적인 배신과 위협 보수관료의 반대를 통해 꾸준히 일한다. 정화의 대항해의 목적을 상당히 중화사상을 바탕으로 한, 한(漢)족 중심적으로 그리고 있으나 유럽인의 만남과 대화를 통해 유럽을 경계하는 내용이 비중 있게 나온다. 현재까지 나온 정화 관련 작품중 내용이 많은 작품은 이 작품 뿐이며, 그 외는 1~2편 분량의 다큐멘터리 뿐이다.(420년 뒤에 중화제국이 본격적으로 붕괴되는 것을 생각하면)
- 로맨싱 사가 2에도 무장 상선단 중 1명으로 그의 이름을 딴 '테이와'(정화의 일본식 독음)라는 캐릭터가 나온다.
- 에이지 오브 엠파이어 3: 아시아 왕조(2번째 확장팩)의 중국 캠페인에서 정화 함대의 아메리카 도달설을 채용하였다. 캠페인 중 나오는 지도 역시 다른 국가 캠페인과는 달리, 위에 소개한 천하전여총도로 되어 있다. 해당 캠페인 함장인 지안 후앙 참조.
- 징기스칸 4 시나리오 4를 하다보면 재야 장수로 등장하는데 여기서의 능력치는 정치가 87에 전투, 지력은 70대 중반을 찍는 준 먼치킨이다. 적성은 bbbS.
- 대항해시대2의 해킹 모드 중에는 정화가 등장하는 것도 있으며 '대항해시대2 정화편'으로 알려져 있다. 추가된 컨텐츠들을 보면 상당히 고퀄이다.
- 겁스 무한세계에서는 정화의 대원정을 시작으로 중국판 대항해 시대가 시작되어서 대명제국이 전 세계에 영향을 끼치고 중국에서 산업혁명이 일어난 평행세계인 명-3이 있다.
- Hearts of Iron II의 모드인 동방의 빛에서는 정화의 대원정으로 대명제국이 부흥하다가 명의 4대 암군에 의해서 명나라가 망하고 청나라가 홀라당 그걸 집어먹고 대청제국을 건설했다 라는 뒷설정이 있다.
5. 중화 패권주의의 상징
정화의 해외원정은 중화인민공화국으로부터 의도적인 재평가를 받아서, 현재의 정화의 해외 원정은 중국의 내셔널리즘의 상징으로 이용되고 있다. 함대 이름에 정화를 붙이는 것은 물론, 중국 패권주의를 정당화하는 도구로써 정화의 해외 원정을 악용하고 있다.
오늘날의 일대일로가 유달리 일방적으로 진행되어 현지인들의 불만을 사는 것에 대조적으로, 정화의 원정단은 방문한 지역들의 종교와 문화, 주권을 존중하였다.[11] 대표적인 사례로 정화 함대가 스리랑카에 남긴 비문은 중국어, 타밀어, 페르시아어 세 가지로 되어있었는데 페르시아어 비문은 하나님 덕분에 무사한 항해가 가능했다는 종교적인 내용이, 타밀어 비문은 현지 타밀 힌두교도들을 고려하여 힌두교 관련한 내용이, 중국어 관련한 내용은 외교 성과 관련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었다. 애초에 정화가 대항해 지도자로 추천받은 이유 중 하나가 무슬림 출신이지만 불교와 도교, 유교에 대한 이해도도 무척 높았던 것도 있다. 문화 교류 측면에서만 놓고 보면 정화의 해외 원정이 오늘날의 중국의 패권주의 외교, 일대일로보다 훨씬 더 앞선 면모를 보여주었다.
6. 한계
비슷한 시기의 서양의 대항해시대와 비교해 보아도 역사적인 의의가 매우 큰 사건이다. 허나, 정화의 대원정이 끝이 나고 명나라는 더 이상 해상 진출에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 정화의 원정에 비해서 훨씬 적은 지원을 받으며 소규모 선단을 꾸린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작은 배 몇척으로 신대륙을 발견하고 탐험한 것이 이후의 세계사를 크게 바꾸고, 여러 차례 탐험에 대한 상세한 기록까지 남겨진 것에 비하면 정화의 원정이 남긴 영향과 기록은 지엽적인 수준이다. 물론, 명나라처럼 대륙통일을 이룩한 역대 중국 왕조들은 이미 큰 영토를 통치하는 제국인 만큼 바다 건너 먼 유럽까지는 관심영역 밖인게 너무 당연했을 것이다.[12]
그러한 의미에서 정화의 대원정은 오랜 중국 역사에서 특이한 것이다. 그나마 잠재적인 위협이 되는 오랑캐를 정벌하기 위한 원정은 시도하지만, 물산이 풍부하고 인구가 넘사벽 수준인 중국은 중원만 잘 경영하고 주변 국가들의 세력를 잘 관리하는 것만으로도 벅차다. 명나라 멸망 이후 들어선 청나라 역시 서양과 일정한 통상무역은 하였지만 서양문물을 받아들이는 데는 소극적이었다. 청나라 시절의 아담 샬과 같은 예수회 선교사가 중국인들보다 중국과 유럽 이외의 세계에 대해서 더 상세하고 정확한 지식을 갖고 있었다는 것으로 보아도 정화의 원정에 의해 습득된 외부 세계에 대한 지식이 중국 지식층들에게는 널리 퍼지지 못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로써 정화의 대원정은 중국의 사실상 첫 해양진출이자 마지막 원정이라는 상징적 의미는 있으나 대원정이 없었더라도 중국 역사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을 것이다. 어차피 대서양같은 어마어마한 대양을 건너는 것도 아닌 철저하게 연안항해라는 점에서 처음부터 한계가 명확했다.
[1] 이 당시 아직 연왕 주체였던 영락제는 곤명성의 성인 남자를 학살하고, 어린 남자아이는 거세해버렸다고 한다.[2] 한국어 위키백과에서는 1433년 7차 항해에서 돌아온 직후 병사했다고 하는데, 정화는 7차 원정중 사망한 것이 맞다. 출처 : 郑一钧,《郑和死于一四三三年》,光明日报 1983년 3월 16일 기고문.[3] 채륜과 달리 사마천은 궁형을 받아 고자가 되었을 뿐 환관은 아니다. 어쨌든 환관들은 사마천을 일종의 비조로 보아 떠받들었다.[4] 전자는 한어병음 표기, 후자는 웨이드-자일스 표기. 더 정확한 한어병음 표기는 Zhèng Hé이고 더 정확한 웨이드-자일스 표기는 Chêng⁴ Ho²이다.[5] 해방군 쪽에서는 전통적으로 인명은 훈련함에 붙이고, 주력 전투함은 지명을 따와서 이름짓는 명명법이 있다.[6] 1418년에 제작된 천하제번식공도(天下諸番識貢圖)라는 원본지도를 필사했다고 한다. 아메리카가 나와있는 건, 원본을 필사할 때 당시까지 알려져 있던 지리 정보를 추가해서 업데이트한 것이다.[7] 이 지도와 관련하여 중국 네티즌들 사이에서도 치열한 논쟁이 벌어졌다.유럽의 지리적 대발견은 "지도를 보고 찾아간 것"에 불과하다[8] 온난화로 빙산이 감소중인 요즘도 아니고, 유빙이 가득했을 당시의 남극해와 북극해를 목선이 탐험하는 것은 극히 어렵다. 기술이 더 발달한 19세기 유럽 탐험가들도 북극항로를 개척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지만 모두 실패했고 프랭클린 탐험대처럼 전멸하기도 했다.[9] 이 문제에 대해서 예전에 중국에서 올라온 논문이 있었는데 저자가 한국인이었다. 그 논문에 의하면 실제로 중국 남경에서 커다란 닻의 유물이 발견되었고, 그 닻이 지탱하는 배의 크기를 측정해본 결과 거의 120미터 가량의 거대한 목제 선박이라는 결론이 나왔다. 문제는 거센 파도가 계속 부딪치는 바다로 나가게 되면 그 배에 물이 새어 부서진다는 것. 하지만 커다란 닻의 유물이 실제로 발견된 것은 엄연한 사실이라서 과연 이 모순을 어떻게 해결할지가 고민이었는데, 그래서 내린 결론은 저렇게 커다란 닻을 달았던 목제 선박은 물결이 잔잔하거나 거의 없어서 배가 안전한 내륙의 강이나 호수 및 인공 호수에서 황제가 개인적으로 유흥을 즐기기 위해 만든 용도였다는 것이다. 실제로 전한의 한무제가 곤명지라는 커다란 인공 호수를 만들게 했고, 그 위에 1만 명이 탈 수 있는 거대한 목제 선박을 띄우고 그 안에 궁녀와 시종들을 태우고 유흥을 즐겼다는 기록이 있다.[10] 20세기에 만든 140m 목선인 와이오밍에 대한 블로그글# [11] 이는 당시 기준으로 놀랍도록 신사적인 방식이었는데 대항해시대에 포르투갈 등이 보여준 초창기 제국주의에 해당하는 면모, 폭력적인 충돌이나 노예 무역, 강제 개종 등이 흔했던 것과 명백한 대조를 이루었다.[12] 원나라와 청나라를 제외하고 나머지 명나라를 포함한 대다수의 중국 왕조들은 항상 북쪽의 유목세력들, 서쪽의 토번 위구르 세력들의 견제를 막아내기 바빴다. '''그 천하의 당나라 조차도 토번, 돌궐, 거란등 여러 유목 세력들에게 여러번 저지를 당했고, 심지어 토번한테는 수도인 장안마저 털린 적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