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수

 

(1449년 - 1515년)
조선 중기의 문신, 학자. 호는 懶齋('''난재''' 또는 나재)[1]
세종 30년(1449년)에 인천에서 출생하여 세조 14년(1468년)에 생원시에 급제한 뒤 이듬해 예종 1년(1469년)에 식년 문과에 장원 급제하여 사헌부 감찰을 제수받았다. 보통 과거 급제 나이가 30대였으므로, 21살 나이에 매우 빨리 합격한 것이다.
채수의 본격적인 관직 커리어는 성종 시기로 홍문관에서 교리, 지평을 지냈고 인사권의 요직인 이조정랑을 지내기도 했다. 이후 홍문관 응교로 재직하던 중 임사홍의 비리를 탄핵하는 상소를 올렸으며, 폐비 윤씨에 대한 동정론이 일었을 때 폐비 윤씨가 원자의 생모이므로 합당한 예우를 해야 한다는 주장을 펼치는 바람에 성종과 인수대비에게 노여움을 사서 삭탈 관직을 당했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이때의 행동으로 연산군 시기에는 큰 화를 면했으니 다행이라면 다행이랄까.
이후 성종의 노여움이 풀리면서 다시 충청도 관찰사가 되었고 명나라 사신으로 두 번 다녀온 후에 성균관 대사성을 거쳐 호조참판이 되었다. 그러나 성종이 죽고 연산군이 등극하자 연산군이 폐비 문제를 거론할까 걱정되어 중앙 관직보다는 지방 수령직을 전전했다. 이런 처신으로 김종직과 친분이 있었고 신진 사림들과도 연관이 있었지만 무오사화의 화를 면할 수 있었다. 무오 사화 이후에는 아예 관직도 사퇴해버렸다. 연산군이 예조참판, 형조참판, 평안도 관찰사[2]를 연달아 제수했으나 모두 병을 핑계로 고사했다.
이렇게 지내다가 연산군이 어머니의 폐비 문제를 정면으로 제기하며 피바람을 일으키는 갑자사화가 일어난 가운데, 채수가 사관에게 정희 왕후가 언문으로 내린 폐비 윤씨의 죄상 기록 문서를 건넸다는 사실이 드러나 곤장을 맞은 뒤(사실 본래 처벌은 사형이었으나, 성종 대에 폐비를 옹호하다 파직된 사실이 드러나서 운좋게 곤장 100대에서 끝난 것이다. 다른 이들에 비하면 운이 좋은 케이스였다.) 경상도 단성으로 유배되었다가 곧 풀려났다. 이후 중종반정이 일어나자 반정 측에 가담했고 이 공으로 정국 공신 4등에 녹훈되었다.
사실 여기에는 여러 사실이 복합적으로 얽혀있는데 채수 본인은 반정 자체에 관심이 없었다. 애초에 공신 4등은 반정에 아예 참여하지 않다가 나중에 인맥, 뇌물로 공신에 편입된 어중이 떠중이들을 위한 자리였기에 후대에 조광조위훈삭제의 첫 타깃이 된다. 아무튼 반정의 명분을 세우기 위해 박원종이 명망 높은 선비들을 강제로 포섭하던 중 학식 높은 채수를 포착했고, 채수의 사위였던 김감이 한탕해보자는 심산에(...) 장인에게 독한 술을 먹여 곯아떨어지게 한 후 반정에 합류했다.[3] 정작 채수는 반정이 다 끝나고서야 술이 깼고 모든 사태를 알아차린 후 크게 한탄했다고 한다. 설공찬전에 보이는 반정의 회의적인 요소는 이러한 점이 적용된 듯 하다.
하지만 박원종, 성희안 등 반정 공신들에게 휘둘리는 중종을 보며 안타까워했고 결국 다시 관직을 버리고 경상도 상주로 낙향하여 쾌재정을 짓고 은둔하며 여생을 마쳤다.
시문에 능하고 음악에도 조예가 깊어 당대의 문객이자 풍류객으로 명성이 자자했던 인물이었다. 유학자이긴 했으나 엄격한 성리학보다는 풍류가 더 좋았던 모양인지 신진 사림의 대표주자였던 김종직과 친분이 있었고 신진 사림들과 교류하긴 했지만, 이들의 성리학 교조주의적 태도에는 별로 동의하지 않은 듯하. 신진 사림의 기록들에서 채수는 '''재주는 있는데 사람이 영 경박하고 행동이 거치네요''' 하는 평이 많음이 이를 반증한다고 할 수 있을 듯.
유학자였지만 유교에만 머물지 않고 불교와 선도에도 관심을 가져 유불선에 통달했다는 이야기가 많았다. 심지어는 하찮은 잡문으로 여겨지던 패관 소설에도 관심을 가져 설공찬전을 저술해 후대의 국문학계에도 큰 기여를 하였다. 또한 <용재총화>의 저자인 용재 성현과도 친분을 맺었고 이 둘이 어울려 풍류를 즐긴 일화도 여럿 전한다.
설공찬전은 유불선에 조예가 깊었던 채수의 특성이 잘 드러난 작품이다. 여기서 채수는 불교의 윤회 전생과 괴담 같은 형식 뿐만 아니라 주전충을 언급하며 아예 '''중종반정의 정통성까지 부정해버리는''' 짓을 저질렀다! 지옥의 일을 이야기하는 설공찬의 말이나 주전충 언급으로 미루어보면 채수는 중종반정에 큰 기대를 걸고 연산군 시대의 악정을 종식하리라 기대했지만 현실은 '''연산군의 자리에 박원종, 성희안 등이 들어앉음에 불과하다고''' 판단했던 것. 설공찬전의 이러한 파격적인 서술은, 비록 형식은 다르나 남명 조식의 '''단성소'''[4]와 크게 다를 바가 없었다.
이런 내용 때문에 설공찬전은 사회적으로 큰 논란을 일으켰다. 연산군 시대와 크게 달라지지 않은 정치에 실망한 백성들은 이 소설을 좋아했지만, 당연히 반정 공신파와 중종은 좋아할 리가 만무했다.(...) 게다가 신진 사림들도 불교의 윤회 화복을 이야기한 소설 내용 때문에 '''이런 이단 사설을 끄적이나!'''라면서 채수를 맹비난했다. 결국 설공찬전은 금서가 되어 보는 족족 압수되어 불태워졌다. 현존하는 설공찬전은 이문건의 묵재일기 뒷장에 몰래 필사했는데 기적적으로 전해졌던 것.
설공찬전의 내용이 내용이라 채수는 반역죄로 몰려서 죽을 수도 있었겠지만, 반정 공신이기도 하고 고령의 나이를 감안해서 그냥 책을 압수해서 불태우는 것으로 마무리한 듯하다. 채수는 설공찬전 논란 이후 4년 뒤인 중종 10년(1515년)에 세상을 떠났다.
이런 탓인지 한동안 잊혀졌다가 숙종 이후에 상주의 선비들이 채수의 공적을 현창해야 한다는 상소를 올려 채수를 비롯한 상주의 명현 3명의 위패를 봉안한 임호 서원이 건립되었다. 저서로는 자신의 시문을 묶어 편찬한 나재집 2권이 전한다.
야사에는 어릴 적에 귀신의 무리를 목격했고, 그 와중에 막내 동생은 귀기에 닿은 즉시 즉사했으나 채수는 이무 탈 없이 멀쩡해 주변 사람들이 기이하게 여겼다는 일화가 있다. 또한 맹꽁이 서당에서는 매우 총명한 손자가 있어 자주 시 짓기와 수수께끼로 손자를 시험했고 그때마다 손자가 똑부러지게 맞받아쳐 굉장히 흐뭇해 했으며 크게 될 아이라고 예견했다. 채수의 예견대로 손자는 후에 요직에 등용됐다고 한다.

[1] 懶의 원음은 "란"(《廣韻》落旱切《集韻》魯旱切)으로 이체자인 嬾(게으를 란)에 흔적으로 남아 있다. 현 중국어에서도 lǎn으로 발음한다. 무엇보다 채씨 문중에서 전통적으로 "난재"라고 명명하고 있다. 그러나 문중 외에서는 흔히 '나재'로 통용된다.[2] 소위 말하는 평앙감사가 바로 이거다.[3] 사위 김감도 이 공로로 공신 2등에 책록된다. 그런데 김감은 전형적인 기회주의자로 본래 연산군의 총애를 받아 임사홍과 갑자사화를 주도했고, 반정 직전 줄타기에 성공에 반정 공신이 된 인물. 인과응보로 반정 직후 말년에 박경의 역모에 연루되어 귀양을 갔고, 죽어서도 사림 세력에게 지탄받았다. 여담으로 김감은 연안 김씨로 이 사람의 6촌 형제가 기묘사화의 주도자인 김전이며, 김전의 형제 김흔의 아들이 바로 권신 김안로이다.[4] 관직을 거절하며 조식이 명종에게 올린 상소. 국정 개혁을 주장했지만 문제는 '''명종을 고아로, 문정 왕후를 뒷방의 과부로''' 신랄하게 까버렸다는 데에 있었다. 여기에 빡친 명종이 이 놈을 죽여 살려 할 정도였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