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식(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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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조식(曺植)[1]
''''''
건중(楗仲)
''''''
남명(南冥)[2], 방장노자(方丈老子)
방장산인(方丈山人), 산해선생(山海先生)
'''시호'''
문정(文貞)
'''본관'''
창녕 조씨[3]
'''국적'''
조선
'''출생지'''
경상남도 합천군 삼가면 외토리[4]
'''사망지'''
경상남도 산청군 시천면 사리[5]
'''출생일'''
1501년 7월 10일[6]
'''사망일'''
1572년 2월 21일[7]
1. 개요
2. 생애
3. 남명학파의 흥망
4. 남명 조식과 퇴계 이황
6. 기타
7. 현대 매체에서의 조식
7.1. 교과서
7.2. 창작물
8. 관련 자료
8.1. 사이트
8.3. 동영상
9.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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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內明者敬 外斷者義'''

안으로 마음을 밝히는 것은 경()이요, 밖으로 행동을 결단하는 것은 의()이다.[8]

조선 중기 남명학파를 창시한 유학자. 본관은 창녕(昌寧), 자는 건중(楗仲). 호는 남명(南冥), 방장노자(方丈老子), 방장산인(方丈山人), 산해선생(山海先生)이고 시호는 문정(文貞).
사림의 계보와 붕당을 설명할 때 '''북인시조''' 중 한 사람으로 빠지지 않고 거론되는 조선 성리학의 거두이다.

2. 생애


연산군 7년(1501) 음력 6월 26일 진시[9] 삼가현 토동[10]에 있는 외조부 이국(李菊)의 집에서 태어났다. 부친은 조언형이고 모친은 인천 이씨[11]이다.
당시 점잔을 떨던 조선의 사정에 비추어보았을 때 철저히 의(義)를 중시하고 현실 정치를 강하게 비판하여 파장을 일으킨 인물이다. 현재는 권력자들을 배출하여 후대까지 학파를 보존한 퇴계 이황율곡 이이에 비해 인지도가 낮지만 당대에는 그들에 비견되는 명성을 떨쳤으며 진주를 중심으로 한 서부 경상남도 권역에서는 이황에게 밀리지 않는 위상을 가지고 있다.[12]
학문 공부를 즐기던 성품으로 유년기부터 유교 경서 이외에도 스스로 제자백가, 불교, 노장사상, 천문, 지리, 의학, 병법, 궁마 등 다양한 분야의 학문을 섭렵했다.[13] 어릴 때에는 부친이 벼슬살이를 하던 영향으로 한양단천 등을 오가며 생활하였고 25세 때 『성리대전』에서 원나라의 유학자 노재 허형의 글[14]을 읽고 학문의 방향과 출처관[15]을 정하여 성리학을 집중적으로 공부하였다.
부친이 사망하고 삼년상을 치른 후 처가가 있는 김해[16]로 거처를 옮겼다. 김해에서 지내던 이 시기에 과거시험을 단념하여 스스로의 학문에 힘썼고 이후 합천[17], 덕산[18]을 거쳐서 생활하였다. 그 사이에 높은 학문으로 여러번 벼슬길에 오를 것을 권유받았으나 자신의 출처관에 따라 한 번도 벼슬에 나서지 않고 평생을 산림처사로 지내며 학문을 닦고 제자들을 양성했다.
별명은 '선비'. 이는 경의검(敬義劍)이라고 하는 칼을 차고 다닌데서 유래되었다. 칼에는 "안으로 밝히는 것은 경이요, 밖으로 결단케 하는 것은 의이다(內明者敬 外斷者義)"라는 글이 새겨져 있었는데 칼을 수양 도구로 삼아 안으로는 거울과 같은 마음(敬)을 유지하고 밖으로는 과단성 있는 실천(義)을 이룩하고자 하는 각오를 보여주는 것이었다. 이처럼 내면의 수양(敬)과 수양한 바의 실천(義)을 함께 중시하는 모습이 조식과 그 학맥의 특징이었다.[19]
칼 찬 선비라는 별명과 실천을 중시하였던 학풍처럼 조식은 과단성있는 행동가이자 거침없는 과격파였다. 그래서 평생 벼슬을 거절하고 처사 생활을 하면서도 시사에 관심을 두어 현실에 날선 비판을 많이 가했다. 그와 관련된 대표적인 글이 바로 명종 때 올린 단성소[20]이다. 상소에서 조식은 명종을 "선왕의 외로운 후사(孤嗣)"[21], 문정왕후를 "깊숙한 궁궐의 한 과부"라고 공개 비판하였는데, 벗이었던 성수침[22]이 아직 학문이 원숙하지 못해 이런 과격한 상소를 내밀었다고 평을 할 정도였다. 당시 서슬시퍼런 문정왕후의 권세와 전횡을 보면 이러한 일침은 용감한 것을 넘어 미쳤다는 말 밖에 나오지 않는다.
명종이 하도 기가 차서 "아무리 임금이 어질지 못하기로서니 욕을 퍼부어서야 되냐?"며 분개해 조식을 죽이려 들었지만 시골의 무식한 선비를 함부로 죽이면 언로가 막힌다 하여 결국 죽이지 못했다. 오히려 『명종실록』에 기록된 조식은 찬양 일색인데 단성소가 올라갔을 때 사관이 논한 내용을 보면 당시 관직도 마다했던 조식의 평판이 얼마나 대단했는지 엿볼 수 있다.

당시 유일(遺逸)[23]

이란 명성에 기대면서 공로와 명성을 도둑질하는 자가 많았다. 어질도다, 조식이여! 몸가짐을 조심스럽게 하고 절개를 지키면서 초야에 묻혀 있었으나, 난초의 향기가 저절로 퍼지듯 그 명망이 조정에 전달되어 이미 참봉에 임명되고[24]주부[25]에 임명된 것이 두 번 세 번에 이르렀지만 이미 모두 머리를 저으며 거절하였다. 지금 오마(五馬)의 직위[26]에 임명된 것은 영광스러울 뿐만 아니라 이를 제수한 (임금의) 은혜가 특별하다고 말할 만한데도 안빈함을 스스로 즐기며 끝내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았으니 그 뜻이 가상하다. 그럼에도 조식은 과감하게 세상을 잊어버리지 못하였기에 상소문을 올려 절개를 가지고 항의하며 당시의 폐단을 극력 논하였으니, 글이 매우 간절하면서도 뜻이 곧았을 뿐만 아니라 시대와 변란을 근심하여 우리 임금의 덕을 밝히고 백성들을 새롭게 하고자 하였고[27], 풍속과 교화가 왕도정치에 이르기를 바랐으니, 나라를 걱정하는 그 정성이 지극하다 하겠다.[28]

다음은 그의 시 한 수. 내용 자체가 화끈하다.

'''全身四十年前累'''

온 몸에 쌓인 사십년 허물

'''千斛淸淵洗盡休'''

천섬들이 맑은 물에 씻어 없애리

'''塵土倘能生五內'''

그래도 오장에 티끌이 생기면

'''直今刳腹付歸流'''

곧장 배를 갈라 흐르는 물에 부치리[29]


이같은 대범한 행동은 오히려 할 말 못하고 숨죽이던 선비들에게 큰 반향을 얻어, 재야에 있던 그에게 더 많은 인재들이 찾아와 배움을 청했다고 한다. 이리하여 그의 명성은 갈수록 높아지고 마침내는 그의 호를 딴 남명학파가 형성되기에 이른다.
한편 그는 일본왜구를 경계하면서 그들에 대해 강경한 태도를 보였다. 한때 김해에서 살았던 경험[30]과 그의 중장년기에 일어난 사량진 왜변, 을묘왜변 등의 요소가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였다. 때문에 그는 일본과 왜구에 대해 단호하게 대응할 것을 주장하였고, 역관과 조정의 내시들이 뇌물을 받고 이들과 결탁하는 행위를 비판하였으며, 제자들을 가르치면서 왜구를 방비할 대책을 주문하는 문제를 출제하기도 하였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전략) 섬 오랑캐가 난리를 일으키고 있다. (중략) 아무런 까닭 없이 남의 나라 장수를 죽이고, 나쁜 마음을 품고서 우리 임금의 위엄을 모독하였다. 제포를 자신들에게 돌려달라는 것은 조정의 의사를 시험하는 것이고, 대장경을 30부 인출해 가겠다는 것은 반드시 얻고자 함이 아니라 우리를 한번 우롱해본 것이다. 손뼉을 치면서 뺨을 튀기거나 지팡이를 잡고서 눈을 부라리며 '''"반드시 네 모가지를 뽑아버리겠다(必拔爾之項)"''' 라고 말하면 비록 삼척동자일지라도 그것이 공갈하는 것인 줄 알게 된다.

헌데 당당한 우리 조정에서는 재상과 장수들이 대책을 마련해야 함에도 저들의 허세에 벌벌 떨면서 어떻게 할 줄을 모르고 어찌 '상중이어서 정사를 논하지 못한다.'고 거짓 핑계를 대고 있는가? 이런 때에 적을 제압하자는 주장도 적의 공격을 막는 계책도 없단 말인가. 송의 한기(韓琦)처럼 (서하의) 조원호가 보낸 사신의 목을 도성 문밖에서 베기를 청하지는 못할지라도, 세상을 어지럽히는 도적에게 예물을 주라는 명을 내리는 것이 어찌 옳은 일이겠는가?(중략)

오늘날 역관들이 임금의 명을 전하는 것은 그 옛날 사신들이 외국에 나가 국가의 일을 전임하는 것과 같다. 왜인들이 우리 조정의 의도를 알고자 하여 (역관들에게) 끝없이 쌓일 정도의 이며 서각, 진주 등을 뇌물로 뿌리면, 역관들은 왕명을 출납하는 승전내시들에게 (왜인들이 뿌린 뇌물을) 나누어주니, 조정 대신들이 용상 앞에서 (왜구들에 대처할 방안을) 적극 논의하여도 그 기밀들이 이미 오랑캐들에게 새어나가게 되는 것이다.

나라 안에서 일개 역관이나 내시같은 천한 무리들의 (뇌물을 받고 기밀을 누설하는) 행위를 금하지 못하는데 어찌 외부의 교활하고 흉악한 오랑캐들을 제어할 수 있으리오. 그렇기 때문에 이 나라에 인재가 없는 것이다. 오히려 왜적들이 이 나라에 들어와 무인지경으로 휩쓸고 다니는 것이 이미 늦었으니[31]

, (이 나라가) 그들의 침략에 곤욕을 치르는 것도 당연한 일이라 하겠다.

허나 임금이 화를 벌컥 내며 위엄을 더하려 하면 '변방의 오랑캐를 도발해서 괜한 일을 일으킨다.'라 하고, 역관의 목을 베어 기밀을 누설한 죄를 다스리고자 하면 “온건한 말로 대응하느니만 못하다”고 한다. 이러하니 왜적들에 대응할 말이 나오지 못하는 것이요, 또한 그들을 방비할 대책이 없는 것이 아니겠는가? 내 이에 대한 계책을 (그대 제자들에게서) 듣고자 한다.[32]

이와 같은 그의 일본에 대한 인식은 제자들에게도 영향을 주어, 훗날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그들이 신속하게 의병을 일으키는 한 요인이 되었다.
환갑이 넘자 그는 지리산[33] 기슭 덕천동으로 이주해 산천재를 지어 10년 동안 강학에 힘썼다. 이 기간 중인 명종 21년(1566), 그는 명종의 부름을 받아 상경[34]하여 임금에게 학문과 정치의 도를 논하였으나[35], 벼슬[36]을 사양하고 7일 만에 지리산으로 돌아왔다. 명종의 뒤를 이은 선조도 조식의 고명함을 듣고 즉위 직후부터 그를 초빙하였으나[37], 그때마다 벼슬을 거절하고 임금에게 상소하였다. 이 시기에 적은 상소문 중 선조 1년(1568)에 올린 「무진봉사(戊辰封事)」는 서리들의 폐해를 논한 '''서리망국론(胥吏亡國論)'''으로 유명한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군민의 정치와 나라의 여러 사무가 모두 도필리(刀筆吏)의 손에서 나옵니다. 이들은 대가를 주지 않으면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안으로 재물을 모으면서 밖으로는 백성들을 흩뜨려 열에 하나도 남지 않게 만듭니다. 심지어 이들은 각자 주와 현을 나누어 사유물로 삼고 이를 문권(文券)으로 만들어서 자기 자손들에게 전하기까지 합니다. 뿐만 아니라 백성들이 공납으로 바치는 토산물들도 모두 물리쳐서 납부하지 못하게 합니다. 그러면 공납품을 바치는 사람들은 구족의 것을 모으고 가업을 모두 팔아넘겨 관아가 아닌 (아전들의) 사삿집에 내는데, 이때 본래 값의 100배가 아니면 받지도 않습니다. 그 뒤로도 계속 이렇게 납부할 수 없게 되니 빚을 지고 도망가는 사람이 줄을 잇습니다.

조종(祖宗)의 주현 백성들이 바치는 공납을 새앙쥐 같은 놈들이 나누어가질 줄 어찌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전하께서 누리시는 온 나라의 부(富)가 이들방납한 물자에 의지한 것일 줄 어찌 상상이나 하셨겠습니까? 왕망이나 동탁처럼 간악한 놈들도 이러지는 않았고, 망할 나라의 세상이라도 이런 적은 없었습니다. 이들은 이러고도 만족하지 못해서 국고의 물건까지 다 훔쳐내니 비축된 것은 아무것도 없고 나라꼴은 말이 아니게 되었으며 도성에는 도적들이 가득합니다.

나라가 한갓 텅 빈 그릇처럼 앙상하게 서 있습니다. 온 조정의 사람들은 목욕재계하고 마음을 가다듬어 이들을 쳐야 할 것이며, 힘이 모자라다면 사방에 명령을 내리시어 사람들을 불러모아 침식의 겨를도 없이 분주하게 임금님을 돕게 하시옵소서.[38]

이후에도 두어 차례 조정의 부름을 받았으나, 그때마다 벼슬을 사양하고 당시의 폐단을 간하는 상소들을 올렸다.
선조 5년(1572) 음력 2월 8일, 덕산의 산천재에서 72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사망으로부터 약 2개월 전에 발병한 등창이 직접적인 사인이었다. 죽음에 임하여 제자들에게 자신의 사후 칭호를 '''처사(處士)'''[39]라고 할 것을 당부하였으며[40], 방의 벽에 붙여두었던 경(敬)과 의(義) 두 글자를 가리키며 그 중요성을 강조하였다고 전해진다.[41]
사후 사간원 대사간[42], 영의정[43] 등에 추증되었지만 문묘에는 종사되지 못하였다.[44] 후학들은 덕천서원[45], 회산서원[46], 신산서원[47], 백운서원[48]을 건립해 스승의 업적을 기렸다.

3. 남명학파의 흥망


조식의 남명학파는 경상우도 지역을 중심으로 형성되었으며, 이황의 퇴계학파와 더불어 영남 지역의 학풍을 양분하였다. 퇴계학파가 성리학의 이론적 심화를 중시했다면, 남명학파는 성리학의 학문적 실천과 의(義)를 중시한 것이 특징이다.
남명학파를 계승했다고 공인되는 인물로는 정인홍곽재우[49], 최영경[50]이 있다. 그 외에 남명과 퇴계 이황을 공동스승으로 모시고 공부한 제자들도 있었는데, 김우옹[51], 김우굉[52], 정구, 오건[53], 정탁, 김면[54], 김효원[55] 등이 대표적인 인물들이다.
조식이 죽고 3년 후 동서분당이 일어났을 때. 그의 제자들은 서경덕, 이황의 학맥과 함께 동인으로 모여 서인과 대립했다. 이후 동인들은 정여립의 난으로 촉발된 기축옥사로 큰 피해를 입었는데, 이때 조식 학맥과 서경덕 학맥의 피해가 특히 컸다.[56] 그로부터 2년 후, 옥사를 지휘한 정철이 세자 건저의(建儲議) 문제로 실각하자 그의 처리문제를 두고 동인은 남북으로 분열하였다. 이때 정철에 대한 강경한 처벌을 주장했던 조식 계열(& 서경덕의 후학 약간)은 북인, 온건한 처벌을 주장했던 이황의 후학은 남인에 다수 참여한다.[57]
훗날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남명의 제자 중 정인홍[58], 곽재우, 김면[59] 등은 의병을 일으켜 명성을 떨쳤다.[60] 이는 생전에 일본과 왜구에 대해 경계하면서 제자들에게 대책을 주문하였던 스승 남명의 영향이 컸다. 북인은 임진왜란 때 의병활동으로 조선왕조를 위기에서 구하는데 큰 역할을 하여 조정에 세력을 넓혀갔고, 마침내 정인홍이 류성룡을 실각시키면서 집권당이 되었다. 하지만 영창대군의 계승 문제를 놓고 북인은 대북소북으로 분열되었다.
광해군 즉위 이후, 대북의 영수가 된 정인홍은 스승인 조식을 추존코자 하였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변척소」로 인해 청금록 사건 등을 일으키면서 정적들을 늘렸고, 남명학파 내부에서도 일부 분열이 일어났다.[61] 애초에 남명학파는 퇴계학파나 율곡학파에 비해 학술적인 구심점이 상대적으로 미약했기에[62] 이러한 분열은 뼈아픈 것이었다. 설상가상으로 대북세력도 영창대군과 인목대비의 문제를 놓고 다시 골북, 중북, 육북으로 분열되는 사태가 벌어진다.
이후에 인조반정이 일어나면서 대북세력의 사상적 기반이라는 이유로 남명학파에도 철퇴가 가해진다. 그 결과 88세의 노인인 정인홍이 참형에 처해지면서 남명학파는 사실상 몰락하였고[63], 학문적 근거지였던 경상우도 지역에 대한 그들의 영향력 또한 줄어들었다. 이러한 이유로 이후 경상우도 지역에는 다른 지역의 여러 학맥들이 들어왔는데, 19세기를 기준으로 영남 남인인 한주 이진상[64]의 한주학파와 전라도 지방의 노사 기정진의 노사학파, 그리고 근기 남인인 성재 허전의 학파 등이 대표적이었다. 비록 인조반정으로 지리멸렬하게 되었다지만, 본래 이 지역에서 명맥이나마 잇고 있던 남명학파 또한 이들과 공존하면서 학맥을 따라 남인이 되거나 조식의 일부 종친들을 중심으로 서인-노론이 되기도 하였다.[65]

4. 남명 조식과 퇴계 이황


생몰연도에 나와있는 것처럼 남명과 퇴계는 동갑내기로[66], 생전에 일종의 라이벌 플래그를 형성하였다.[67] 그도 그럴것이 두 사람은 기질과 문체, 출처관, 학문관 등 여러 측면에서 서로 달랐기 때문이었다.
기질 면에서 퇴계가 온후한 문사였다면 남명은 칼 찬 선비라는 별명답게 상무적인 호걸풍이었다. 그래서 퇴계의 행동거지가 조심스럽거나 신중한 경우가 많은데 비해 남명의 행동은 분명하고 단호하였다.[68] 이는 문체에서도 반영되어, 퇴계가 당송 이후의 순후한 문체를 즐겨쓴데 비해 남명은 『춘추좌씨전』이나 유종원의 글과 같은 남성적 문체의 고문을 좋아하였다.[69]
이러한 기질의 차이는 대외관계를 보는 시각에도 반영되었는데, 일본에 대한 태도의 차이가 대표적이었다. 사량진 왜변 이후 대마도 측에서 다시 교류를 요청해왔을 때, 퇴계는 그들의 사신을 물리치지 말고 강화를 하자는 상소를 올렸고[70], 조정의 명으로 무로마치 막부쇼군과 대마도주에게 보내는 답서를 쓰기도 하였다.[71] 이에 비해 남명은 단성소에서 일본에 대해 단호하게 대응할 것을 주장하였고, 군대군량을 넉넉히 하여 국방을 강화할 것을 역설하였으며[72], 제자들에게 왜구들을 방비할 대책을 낼 것을 주문하였다.[73]
출처관에서도 서로 차이가 있었다. 퇴계가 벼슬을 여럿 지냈음에도 학문 이론을 중시하고 현실정치의 비판에는 가급적 거리를 뒀다면, 남명은 자신의 출처관에 따라 벼슬은 멀리 해도 현실정치의 비판에는 앞장서는 태도를 보였다.[74] 이 과정에서 서로 간에 출처관의 차이를 드러내는 서신들[75]이 오고간 적이 있었고, 인물에 대한 평가를 달리하기도 하였다.[76]
학문 면에서는 더욱 그 차이가 드러난다. 퇴계가 상대적으로 성리학의 이론적 심화를 중시했다면, 남명은 성리학의 이론이 이미 염락제현(濂洛諸賢)[77]을 통해 다 갖추어졌으므로 남은 것은 하학이상달(下學而上達)[78]을 통한 학문적 실천에 달렸다고 보았다. 이것은 동갑인 두 사람의 성격이나 기질 이외에 서로가 계승한 학풍의 세대차이에서 비롯된 것이기도 하였다. 남명이 『소학』과 학문적 실천을 중시한 김종직, 정여창, 김굉필, 조광조의 학풍을 계승했다면, 퇴계는 조선 성리학의 이론적 심화를 시작한 이언적[79]의 학풍을 계승하였기 때문이었다.[80] 이 과정에서 퇴계와는 서로의 인식차이를 보이는 편지를 주고받기도 하였으니, 퇴계와 고봉 기대승 사이의 사단칠정논변을 비판하는 아래의 편지가 바로 그것이다.

'''요즘 공부하는 자들을 보건대 손으로 물뿌리고 비질하는 절도도 모르면서 입으로는 천리를 담론하여 헛된 이름이나 훔쳐서 남들을 속이려 하고 있습니다. 그러다 도리어 남에게서 사기나 당하고 그 피해가 다른 사람에게까지 미치니''' 아마 선생같은 어른이 꾸짖어 그만두게 하시지 않기 때문일 것입니다. 저같은 사람은 마음을 보존한 것이 황폐하여 배우러 찾아오는 사람이 드물지만, 선생같은 분은 몸소 상등의 경지에 도달하여 우러르는 사람이 참으로 많으니 십분 억제하고 타이르심이 어떻겠습니까? 삼가 헤아려 주십시오.[81]

즉 기본도 서있지 않은 당시 유생들이 사단칠정논쟁으로 아는 척만 하며 헛바람이 든 모습을 비판하는 내용이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퇴계의 책임을 거론하는 편지를 제자 오건에게 보내기도 하였다.

요즘 세상에서 숭상하는 것을 자세히 보니, 당나귀 가죽(驢鞹)에 기린의 모형을 뒤집어 씌운 것 같은 모습이 고질이 되었습니다. 온 세상이 그러하여서 혹세무민하는데 급급하니 비록 큰 현인이 있다고 하더라도 이미 구제할 수 없을 지경입니다. 이는 실로 사문(斯文)의 종장인 분이 상달(上達) 만을 주장하고 하학(下學)을 궁구하지 않아서 구제하기 어려운 습속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내 일찍이 와 서신[82]

을 통해 논란을 주고받았지만 돌아보려 하지 않았습니다. 공은 지금 이 폐단이 수습하기 어려운 것임을 몰라서는 아니됩니다.[83]

남명이 성리학의 실천이란 측면에서 퇴계를 비판하였다면, 퇴계는 주로 성리학의 순수성이라는 입장에서 남명을 비판하였다. 퇴계가 이단이라 생각되는 을 배척한 반면 남명은 노장사상을 비롯한 제자백가와 불교, 도교의 내단학, 병법 등 여러 학문에 개방적인 태도를 취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남명에 대한 퇴계의 비판은 주로 그가 노장사상을 좋아했던 것에 집중되었다. "우리 학문에 있어 의리가 투철하지 못하고 의 빌미(老莊爲祟)가 있다"[84], "그 논설의 광탕현막(曠蕩玄邈)함은 노장의 책에서도 보지 못했다"[85], "장주의 견해에서 한층 더 나아갔다"[86], "남화의 학문을 주창한다"[87]라는 내용이 바로 그것이다.
또한 퇴계는 남명의 성정이나 호방한 태도에 대해서도 비판을 가했다. 남명의 사람됨을 두고 "고상하고 뻣뻣한 사람(高亢之士)"[88]이라고 하거나 다른 사람의 조식에 대한 평을 빌려 "기이한 것을 숭상하고 좋아하여 중도를 지키기 어렵다"[89]라고 굳이 쓴 일도 있었고, 단성소를 두고는 "남명이 비록 스스로 성리학으로 자부하지만 사실은 기이한 선비일 뿐이라. 그 논의와 식견은 매양 새롭고 기이한 것을 높이 여기고 세상을 놀라게 하는 논의에만 힘쓰니 이 어찌 도리를 아는 사람이겠는가?"[90]라고 논하기도 하였다.[91]
학문에서의 차이는 독서와 저술의 차이로도 연결된다. 퇴계는 독서를 할 때 경전의 구절 하나하나를 이해하는데 신경을 썼지만, 남명은 경전의 큰 줄기를 파악하면서 자신에게 절실한 부분을 받아들일 뿐 난해하거나 덜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부분은 대강 지나가는 타입이었다.[92] 성리학의 이론적 심화에 중점을 둔 퇴계가 경전에 자세한 주석을 달면서 활발한 저술활동을 하였다면, 성리학의 학문적 실천에 중점을 둔 남명은 경전의 내용 중 절실하다고 느끼는 부분을 뽑아 독서노트[93]를 만들었고, 굳이 저술을 하더라도 퇴계의 『성학십도』에 비해 간결하고 전투적인 수양방식을 제시한 『신명사도(神明舍圖)』[94]를 짓는 정도에 그칠 뿐 기록을 많이 남기지 않았다.[95]
제자들을 교육하는 방법도 서로 달랐다. 퇴계는 강학을 할 때 책의 세세한 내용들을 빠짐없이 강론하는데 힘썼으나, 남명은 자신이 경서를 풀이해주는 것보다 제자들이 스스로 이해하고 체득하는 것을 중시하였다. 그랬기에 남명과 퇴계를 모두 스승으로 모시고 공부하였던 정구는 선조의 앞에서 두 사람의 학문하는 모습을 아래와 같이 비교하였다.

이황은 도량이 너그럽고 실천함에 독실하며 공부는 순수하면서도 깊이가 있고 그 순서가 분명하니 배우는 사람이 쉽게 들어갈 수 있습니다.
조식은 도량이 엄정하고 재기는 호매하며 초연히 자득하여 우뚝 서 자기 갈 길을 가니 배우는 사람이 요령을 잡기 어렵습니다.[96]

두 사람이 여인의 정절을 두고 간접적으로 다툰 일도 있었다.[97] 이정이란 사람이 죽은 친구 이희안의 첩을 음행죄로 고발한 것이 사건의 시작이었다. 경상도관찰사 박계현으로부터 사건을 인계받은 김해부사 양희는 사위 정인홍을 통해 남명의 자문을 얻고자 했다. 남명이 이정과 이희안 두 사람 모두와 가까운 사이였기 때문이었다. 이에 대해 남명은 "이정이 이희안 집안의 일을 고발한 것은 하종악의 후처 함안 이씨[98]의 음행을 감추기 위함이다"라고 증언하였다.[99] 이로 인해 수사는 이희안의 첩에서 함안 이씨에게로 전환되었고, 이 과정에서 남명은 이정과 절교하였다.[100] 결국 함안 이씨에 대한 수사는 증거불충분으로 인해 무혐의로 끝났고, 증언을 한 남명의 처지가 곤란해졌다.[101] 그리고 이 사건은 남명의 제자 각재 하항이 함안 이씨의 집을 헐어 그들을 쫓아내는 훼가출향을 저지르면서 전국적으로 공론화된다.[102] 이후 퇴계가 친구 사이에 그만한 일을 가지고 절교하는 것은 자신으로서는 이해하기 어렵다는 내용의 편지를 이정에게 보냈고[103], 이 글이 1600년 『퇴계집』을 간행하는 과정에서 알려지게 되었다. 이에 남명의 수제자인 정인홍은 「발남명집설」[104]과 「정맥고풍변」[105] 및 「회퇴변척소」[106] 등의 글을 통해 이황을 대대적으로 비난하였다.[107] 서인 측에서도 이용하는 듯한 모습을 보인[108] 이 사건은 이후 남명학파의 내부 분열로까지 이어졌고[109], 심지어 훨씬 뒤에 허목이 쓴 남명의 신도비덕산비의 내용과 그 비의 철거 문제[110]와도 관련되는 등 오래도록 지속적인 영향을 미쳤다.
훗날 퇴계가 죽었을 때, 남명은 “이 사람이 세상을 버렸다 하니, 나 또한 세상에 살아 있을 날이 오래지 않겠구나!”라고 하면서도, 퇴계가 무덤에 비석을 세우는 대신 작은 돌에 퇴도만은진성이공지묘(退陶晩隱眞城李公之墓)[111]라 쓰게 했다는 말을 듣자, "퇴계는 이 묘호를 감당하기에 부족하다. 평생동안 벼슬하지 않은 우리같은 사람도 은자라고 하기에 부끄럽거늘"이라 하였다고.[112] 어찌보면 대학자들의 인간적(?)인 면모랄까.
성호 이익은 『성호사설』에서 남명과 퇴계 두 사람을 나란히 두고 이렇게 평가하였다.

중세 이후 퇴계가 소백산 아래에서 태어나고, 남명이 두류산 동쪽에서 태어났다. 이곳은 모두 영남 땅으로, 상도(上道: 경상좌도)에서는 인(仁)을 숭상하고 하도(下道: 경상우도)에서는 의(義)를 주장하여 유학의 교화와 기개 그리고 절조가 넓은 바다와 높은 산과 같았다. 우리 문화의 빛은 여기서 극에 달하였다.[113]

팬텀 하록웹툰 포천에서 두 사람의 관계를 간단명료하게 묘사해 놓았다.
이성무 前 국사편찬위원장이 남명과 퇴계의 관계를 정리한 글.

5. 야사야담


  • 이렇게 근엄한 선비였음에도 불구하고 일종의 벽이 있었는데, 화려하게 수놓은 이불을 수집하여 이를 전부 깔아놓고 관상하길 즐기는 것이었다. 어느 날은 친구 서경덕의 제자로 알고 지내던 토정 이지함고청 서기가 찾아와 일부러 그런 이불 위에서 냅다 뒹굴고 하는 기행을 벌였다고 한다.[114] 집에 돌아온 조식은 지저분해진 방을 보고 화내긴커녕 역시 토정이 한 짓이 분명하다며 호탕하게 웃었다고.
  • 남명 조식과 화담 서경덕, 대곡 성운[115], 토정 이지함에 얽힌 야담. 한 번은 이들 넷이 모여서 누가 더 잠을 오래 참는가 하는 시합을 벌이기로 하였다. 화담과 대곡은 일 주일을 버티다 잠에 들었고, 토정은 보름을 버티다 열여섯 날 만에 잠이 들었으나, 남명은 스무 날까지 버티다 잠에 들어 결국 승리했다고 한다. 이는 남명이 어릴 때부터 담력을 기르기 위해 극기훈련을 했다는 내용과 비슷한 맥락에서 나온 이야기로 보인다.
  • 이덕무『한죽당섭필』에 따르면 본래 남명은 매우 검소한 사람이었다고 한다. 하루는 평소처럼 거친 베옷과 꾸미지 않은 말을 타고 들에 나갔다가 어느 장사꾼과 서로 길을 비키라고 말다툼을 벌였다. 결국 장사꾼이 남명을 밀어 말 아래로 떨어뜨리고 욕지거리를 하면서 떠나는 것으로 다툼이 끝났다. 남명은 "사군자가 옷차림이 허술하니 장사하는 놈에게도 업신여김을 당하는구나"라고 탄식하면서 그 뒤부터는 화려한 옷을 입고 좋은 말을 타며 수행하는 종을 다 호걸스럽고 건장한 사람들로 뽑았다. 그러자 사람들이 모두 길을 양보하고 감히 거스르는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고 한다. 이를 본 남명은 또 다시 탄식하면서 "사군자는 외모 꾸미기를 응당 이와 같이 해야 한다"라고 말하였다고. 그 뒤로는 너무 사치한 것으로 소문이 났다고 한다.(...) 당시에도 진주(晉州)ㆍ단성(丹城) 사람들이 성대하게 의복과 말을 단장하는 것은 대개 그의 유풍(遺風)이라고 전하고 있다.
  • 퇴계 이황과의 라이벌 플래그에 관련된 관련한 민간의 야담. 공부를 마친 숫돌장수 남명이 어느 날 숫돌을 팔러 단성과 의령, 합천을 오가던 중 솟을령 꼭대기에서 점심을 먹고 있었다. 때마침 솥장수 퇴계가 의령에서 산청으로 가던 중 솟을령에서 남명과 마주쳤다. 도술을 부릴 줄 알던 퇴계는 남명에게 자신의 도술을 뽐냈지만, 마찬가지로 도술을 부릴 줄 알았던 남명이 더욱 수준 높은 도술을 보여주자 아연실색했다고. 이 민담은 당시 경상도권을 중심으로 한 남명 문하와 퇴계 문하의 경쟁구도를 도술이라는 이름으로 반영한 내용으로 볼 수 있다.
  • 조선의 야담집인 『어우야담』에는 남명과 퇴계가 서로 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내용이 있다. 퇴계가 “술과 여색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인데, 술은 그래도 참기가 쉽지만 여색은 가장 참기 어렵다.”라면서 소강절(邵康節)의 시를 인용하자, 남명은 자기 스스로를 여색에 있어서는 전쟁터의 패장과 같다고 응하였다. 이에 퇴계는 자신은 젊었을 적에는 아무리 해도 참을 수 없었는데 중년 이후에 제법 참을 수 있게 됨은 정력(定力) 때문인 것 같다고 대답하였다. 이때 동석하였던 구봉 송익필이 두 사람에게 아래와 같은 시를 지어 올렸다.
>玉盃美酒全無影
>옥 술잔과 좋은 술 모두 그림자가 없는데,

>雪頰微霞乍有痕
>눈처럼 흰 뺨에 엷은 노을은 살짝 흔적이 남았네.

>無影有痕俱樂意
>그림자가 없건 흔적이 있건 모두 즐길 만한 것.

>樂能知戒莫留恩
>즐거움을 경계할 줄 안다면 은애는 남기지 마소서.[116]
이러한 구봉의 시를 보고 퇴계는 시가 좋다고 칭찬하고, 남명은 시가 패군지장에게 경계가 되겠다고 하며 웃었다고 한다. 물론 위에서도 언급되었듯 실제로는 남명과 퇴계가 서로 만난 적이 없다는 것이 정설이고[117], 그들보다 서른 세 살 연하인 구봉 송익필이 갑자기 등장한다는 점에서 이 이야기는 책의 제목대로 야담으로 받아들이는 편이 나을 것 같다.[118]
  • 마찬가지로 여자에 얽힌 야담. 젊은 시절 보검, 준마, 미녀에 뜻을 두었던 남명은 보검과 준마는 얻었으나 오직 미녀만을 얻지 못하였다. 어느 날 강원도를 지나가다 빨래하는 예쁜 여자를 만났는데, 그녀는 남명에게 진짜 절세미인을 보고 싶으면 자신을 따라오라고 하였다. 그녀를 따라간 곳에는 웬 과 음란하게 놀아나는 미녀가 하나 있었고, 남명은 두 사람이 잠들기를 기다렸다가 칼을 뽑아 그들의 목을 베었다. 그러자 빨래하던 여자가 남명에게 고맙다고 절을 하는 것이 아닌가. 자초지종을 들어본즉 남명이 죽인 여자는 본래 빨래하던 여자가 모시던 집안의 며느리였는데, 중과 눈이 맞아 불륜도 모자라 함께 시집 일가를 몰살시키는 패륜까지 저질렀다는 것이었다. 이에 느낀 바가 있던 남명은 말을 놓아주고 칼을 부러뜨린 후 공부에만 매진하여 훗날 대학자가 되었다고 한다.
  • 꺽지와 관련된 민담이 있다. 한 번은 남명이 친구인 도구 이제신의 초대를 받고 덕천강에 갔다가 꺽지회를 대접받았다. 남명이 꺽지를 집어 한 입 깨물려 할 때 중종이 승하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원래 국상 때는 고기를 먹지 않는 것이 예법이었기에 남명은 입에 깨물던 꺽지를 바로 뱉어 강가에 던졌는데, 그로 인해 살아난 꺽지가 이후 새끼를 많이 쳐서 덕천강의 꺽지는 머리에 이빨자국이 있다고 하는 내용.[119]
  • 『청야담수』라는 책에서는 남명이 그의 처제호랑이의 중매를 섰다는 야담이 전해지고 있다. 이 이야기에서의 남명은 처제와 호랑이의 사이에서 서로의 소식을 전하는 매개자의 역할을 맡고 있다.
  • 이이의 『석담일기』와 그 내용을 인용한 이긍익의 『연려실기술』에 따르면, 격암 남사고가 "올해는 처사성[120]에 광채가 없다"라 예언하였고 오래지 않아 조식이 죽었다고 한다.[121] 비록 이 내용이 그 당시를 살았던 율곡이 지은 『석담일기』에 들어있다고는 하나, 남사고는 남명보다 두달 전인 1571년 음력 12월에 죽었기 때문에[122] 여기서는 야담으로 분류하였다.
  • 처사성과 관련된 또 다른 야담. 천문을 잘 보던 수암 박지화가 처사성이 빛을 잃어가는 것을 보고 동문인 토정 이지함에게 변고가 생길 것이라 생각하여 그의 집에 찾아갔다. 이에 이지함은 자신이 아니라 남명 조처사의 변고를 나타내는 것이리라 답했고, 얼마 안 있어 남명이 죽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 남명의 맏아들인 조차산(曺次山)에 대한 야담. 이야기에서 차산은 도술에 뛰어난 아이로 나오는데, 자식이 도술을 악용할 것이라 염려한 남명은 아이를 김해 집 뒷산에 굴을 파 감금하였다. 차산이 굴 속에서 탈출하려고 온갖 꾀를 쓰자 산도 함께 부풀어 올랐고, 이를 본 사람들이 갇혀있던 아이의 이름을 그 산에 붙여서 조차산이라 불렀다는 이야기이다. 허나 이는 야담일 뿐인데, 실제 조차산에 대한 이야기는 아래의 기타 문단 참고.
  • 외손녀들의 혼인에 대한 야담. 남명에게는 본부인[123]과의 사이에 낳은 딸이 하나 있었는데, 그 딸이 만호 김행에게 시집가 두 딸을 낳았다. 이후 남명의 중매로 큰외손녀와 작은외손녀는 각기 김우옹과 곽재우에게 시집갔는데, 중매를 설 때마다 외손녀들을 두고 남명이 했던 말은 “족히 군자배필이 될 만하다”였다. 헌데 이 외손녀들의 외모와 성격, 살림 솜씨에 약간 모가 났는지라 결혼생활에서 꽤 마찰이 있었다고 한다. 결국 버티다 못한 김우옹과 곽재우 두 사람은 스승인 남명을 찾아가 왜 이런 결혼을 주선했는지 따져 물었다. 이에 남명이 한 대답이 걸작이었다. “그렇게 거칠고 솜씨 없는 아이니까 군자다운 사람이라야 데려다 살 수 있는 거지. 내가 그대들을 군자 같은 사람으로 인정했으니까 이 혼사가 이루어지도록 한 것이다.” 이것이 옛 경상우도 지역에 남아있는 “중매할 적에는 건중(楗仲: 남명의 자)이도 거짓말 한다”라는 속담의 유래라는 일화.[124]
  • 외손녀들의 혼인에 대한 또 다른 야담. 한 번은 남명이 큰외손녀 사위후보로 점찍은 정인홍과 김우옹을 시험하기 위해 소태나무의 껍질로 끓인 국을 마시게 했다. 정인홍이 소태국을 뱉은 반면 김우옹은 쓴 맛을 참으며 남김없이 다 마셨는데, 이에 남명은 김우옹을 큰외손녀 사위로 삼았다고 한다. 작은외손녀의 혼인에 대한 야담도 맥락이 비슷한데, 남명이 작은외손녀와 혼인하려고 몰려든 사내들을 시험하기 위해 소태국을 먹였더니 오직 곽재우 한 사람만 뱉지 않고 전부 다 마셨다고 한다. 어떻게 그 쓴 국을 다 먹었냐는 남명의 물음에 곽재우는 "국과 밥은 서로 섞여야 하기 때문에 입에 써도 다 먹은 것"이라고 답했다. 이에 남명은 곽재우를 작은외손녀 사위로 삼았다고.

6. 기타


  • 경의검과 함께 성성자(惺惺子)라는 방울 한 쌍을 늘 차고 다녔다. 거동할 때 들리는 방울소리를 통해 늘 깨어있는 마음가짐을 유지하기 위함이었다.
  • 죽기 전 경의검은 강직하고 불같은 정인홍에게, 성성자는 온화하고 부드러운 성격의 맏외손녀 사위인 김우옹에게 각각 물려져 학통을 이어받는 상징이 되었다. 허나 아쉽게도 지금은 둘 다 행방을 알 수가 없는데, 성성자는 김우옹 이후 행방이 묘연하고 경의검은 조식의 종손이 대대로 가지고 있다가 한국전쟁 이후에 분실하고 말았다. 현재는 분실 전에 촬영한 흑백사진을 기반으로 만든 복제품 경의검을 남명기념관에서 전시하고 있다.
  • 경의검 이외에도 남명에게는 장검 한 자루가 더 있었는데, 이것은 한국전쟁인민군 장교가 가져가서 분실했다고 한다.
  • 연구에 따르면 경의검은 정인홍에게 전해진 것 외에도 네 자루가 더 있었다고 한다. 현재는 모두 행방이 묘연한 상태이다.
  • 병풍에 손수 공자, 주돈이, 정명도[125], 주희 네 사람의 초상화를 그려서 아침저녁으로 받들었다고 한다. 현재 이 병풍은 남아있으나, 세월 탓에 안의 그림을 알아보기 힘든 상태이다.
  • 이윤경, 이준경 형제와는 한양에 살던 어린 시절부터 죽마고우로 지냈다. 동생인 이준경은 어릴 때부터 “나는 장차 종묘사직을 안정시킬 대신이 될 것이다”라고 말하고 다녔는데, 조식이 자신은 어떨 것 같으냐고 묻자 이준경은 “자네는 산골 바위 틈 움막에서 말라 죽을 사람이다”라고 답했다. 훗날 동고 이준경은 재상이 되고 조식은 세상에 대한 관심을 끊지는 않았어도 평생 출사는 하지 않았으니 결국에는 이준경의 말처럼 되어버린 셈.[126]
  • 부친인 조언형도 생전에 대쪽같은 성격으로 유명했다고 한다. 한번은 고향친구였던 강혼이 연산군에게 아부하는 시를 바치자 그와 절교를 선언한 일이 있었다. 중종반정이 일어난 후 조언형은 단천에 군수로 부임해 있었는데, 어느 날 강혼이 상관인 함경도관찰사가 되어 단천을 순시하러 나온다는 소리가 들려오자 밤중에 강혼을 찾아가 꾸짖고 다음 날 벼슬에서 물러나 낙향했다. 이후에도 그는 여러 벼슬을 역임하던 중 제주목사로 임명되었는데, 마침 병에 걸려 있어서 벼슬을 고사하였다. 하지만 이 일을 빌미로 그를 눈엣가시로 본 훈구파 대신들에게 참소당하여 삭탈되었다. 1526년에 58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는데, 이후 아들인 남명이 조정에 그의 신원을 요구하는 상소를 올려서 복관되었다. 조언형의 묘갈문은 자식인 남명이 썼다.[127]
  • 장남인 조차산은 불과 아홉 살의 나이에 요절하였다. 아들의 죽음에 남명은 "차산이 죽은 6월 11일이 되면 해마다 길게 통곡한다" 라거나 "집도 아들도 없는 모습이 스님과 같고, 뿌리도 꼭지도 없는 구름이 내 모습과 같구나"라는 내용의 시를 지으며 심회를 토로하기도 하였다.[128] 차산은 남명이 당시 살고 있던 김해 집 뒷산[129]에 묻혔는데, 이것이 계기가 되어 사람들은 그 뒷산을 본래의 이름 외에도 아이의 이름인 차산 또는 조차산으로 부르기도 했다고 전해진다.
  • 조차산이 죽은 후에는 외조카이준민을 유독 아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오래된 병풍를 써서 그에게 주기도 하였고, 이준민의 사위 조원[130]이 급제했을 때에도 그의 칼자루에 를 지어 써주었다.
  • 회재 이언적에 대해 비판적이었다. 두 사람의 출처관이 서로 다른 것도 있었고[131], 결정적으로 남명의 절친한 친구인 규암 송인수[132]가 화를 당한 을사사화 당시 이언적이 사화에 항거하기는 커녕 추관(推官)으로서 사림파를 심문하였기 때문이었다.[133] 훗날 이언적이 강계로 유배되었을 때 아들인 이전인이 유배지로 찾아와 학문에 대한 문답을 나누고 이를 「관서문답」이라는 책으로 엮었는데, 여기에는 회재 부자가 남명의 처신에 대해 논한 부분이 있었다. 이에 대해 남명은 「해관서문답」이라는 글을 지어 대응하였다. 남명 사후에 공개된 이 「해관서문답」의 내용은 훗날 남명과 퇴계의 제자들, 그리고 이언적의 후손들끼리 갈등을 불러일으키는 한 계기가 되었다.[134]
  • 고봉 기대승과도 그리 좋은 사이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애초에 기대승이 사단칠정논변의 당사자이기도 했으니 그에 대한 남명의 인식이 좋다고 보기는 어려웠고, 기대승 또한 남명을 일컬어 "무딘 자를 흥시키고 나약한 자를 일으켜 세울 만하나 학문은 법도를 따르지 않는 병통이 있다"[135]라고 평하였기 때문이다. 이들의 관계에 대해 제 3자들이 남긴 기록도 몇 있는데, 율곡 이이와 그의 제자 사계 김장생이 대표적이었다. 이이는 『석담일기』에서 두 사람의 사이가 좋지 않았음을 기록하였고[136], 김장생은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 자신이 쓴 편지정철의 행록 등을 통해 두 사람의 관계가 매우 험악한 것처럼 묘사하면서 대곡 성운이 지은 남명의 행장(또는 묘비문)[137]이 그 근거라고 썼다. 허나 김장생이 편지에서 언급한 남명의 행장은 『대곡집』에서 찾을 수 없고, 정철의 행록에서 언급한 조식의 묘비문에도 기대승이 직접 언급된 내용이 없다. 묘비문에서 굳이 비슷한 뉘앙스로 쓰인 기록을 찾자면 남명의 사람 보는 안목에 대한 일화로 거론된 어느 익명의 인물에 대한 남명의 평가[138]가 있기는 한데, 그 사람이 기대승이라는 확증 또한 없다. 여담이지만 남명의 묘비문에서 지목된 이 익명의 인물이 기대승이 아니냐는 의심 자체는 그 당시에도 있었던 모양으로, 정철의 아들이자 송익필-김장생의 문인인 기암 정홍명도 이러한 설이 나도는 것에 괴이함을 표하는 기록을 남겼다.[140]
  • 이황과 기대승 사이에 오고간 사단칠정논변에 비판적이었고 그 자신이 이기론에 관해 언급을 꺼리긴 했으나[141], 그렇다고 이기론과 관련해 남긴 기록이 아예 없는 건 아니었다. 앞서 이야기한 「해관서문답」에서 “이목구비가 발하는 것은 성인이나 보통사람이 같으며, 똑같은 하늘의 이치이다. 그 발함이 선하지 않은 곳으로 흘러간 이후라야 욕심이 된다. 다만 인심과 도심의 구별은 형기(形氣)와 의리(義理)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그래서 인욕이 아니라 인심이라고 하는 것이다”[142] 정도가 이기론에 대한 그의 얼마 없는 언급이다. 후대의 인물이 남명의 이기론을 간접인용한 것으로는 면우 곽종석[143]이 지은 남명의 묘비문이 있는데, 여기에는 “마음이 발하지 않은 것이 성(性)이요, 이미 발하면 정(情)이다. 발함에 사단과 칠정이 되는데, 여기에는 이발(理發)과 기발(氣發)의 분수가 있다. 이목구비의 욕망은 모두가 천리(天理)에서 함께 나온 것이다.”[144] 라고 기록되어 있다.[145]
  • 단성소에서 그는 이치를 통달함에 있어서는 유교나 불교나 같다고 보았다. 다만 그 이치를 사람에게 적용할 때에는 불교가 발디딜 곳이 없으므로 유학자들은 불교를 배우지 않는다고 말했다. 실록에서 단성소 부분의 기사를 적은 사관은 이와 관련해서 "석가모니의 학설에 위로 하늘의 이치를 통달하는 것이 있겠느냐"며 조식을 깠다.[146]
  • 일생 동안 지리산을 여러 번 올랐는데, 58세 때 유람한 후에는 「유두류록(遊頭流錄)」이라는 기행문을 짓기도 하였다.[147]
  • 고령 지산동 대가야 고분군을 보고 경탄하였다는 일화가 있다. 어지간히 인상 깊었는지 고령에 살던 매부 월담 정사현[148]의 집에서 시를 지을 때 시구절에 이 고분군을 넣어 읊었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
>伽倻故國山連冢
>가야 옛 나라의 산에는 무덤들이 늘어섰고,

>月器荒村亡且存
>황량한 월기마을[149]은 사라진 듯 남은 듯.

>小草班班春帶色
>파릇파릇 봄색을 띤 여린 풀은

>一年銷却一寸魂[150]
>해마다 마음을 한 치씩 녹이누나.[151]
  • 사명대사와도 교분이 있었다. 문집에 그에게 보내는 시가 한 수 전해진다.
>花落槽淵石
>조연(槽淵)[152]의 돌 위에 꽃이 떨어지고,

>春深古寺臺
>옛 절[153] 축대에는 봄이 깊었소.

>別時勤記取
>이별하던 때를 잘 기억하구려.

>靑子政堂梅
>정당매(政堂梅)[154]푸른 열매가 맺었을 때이니.[155]
  • 말년에 산청으로 이주한 후 산천재 뜰 앞에 매화나무 한 그루를 심었다. 남명매(南冥梅)라고 불리우는 이 매화나무는 약 46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살아 있으며, 이미 고사한 정당매 및 원정매(元政梅)와 함께 '산청 3매'의 하나로 불리운다.
  • 봉우 권태훈 계열에서는 매년 칠석마다 계룡산에서 계룡구선을 기리는 칠석제를 지내는데, 남명을 이 계룡구선의 한 사람으로 받들고 있다.[156]
  • 열린민주당의 21대 총선 비례대표 8번 후보자였던 황희석 전 법무부 인권국장이 "조국 전 법무부장관은 남명 조식 선생의 후손"이라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조식의 직계 후손이라고 밝힌 조영기 씨는 "황 전 국장 주장이 알려진 뒤 내가 모르는 내용이어서 족보를 다시 들여다봤지만 조국 전 장관과의 연관성은 전혀 없음을 다시 확인할 수 있었다"며 "조 전 장관을 남명 선생과 연결 지으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억지이자 모독"이라고 했다.[157] 이후 황희석은 "남명 선생이 조국 전 장관의 직계 선조는 물론 아니다"라고 말을 바꾸었다.

7. 현대 매체에서의 조식




7.1. 교과서


7차 교육개정 이후 초등학교 5학년 국어교과서에는 그의 일대기가 소개되기도 했다. 첫 머리부터 그가 지은 단성소가 나온다. 물론 조선내내 세를 떨친 후학들의 버프로 지금까지도 조선 성리학 하면 튀어나오는 이황이나 이이만큼 유명하진 못하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에 대한 조명이 계속 이뤄지는 추세라 인지도는 점점 상승하고 있다. 게다가 그의 날선 비판은 요즘 정치판에 대입해도 훨씬 싱크로가 잘 맞아서….

7.2. 창작물


퇴계 이황과 마찬가지로 대학자의 이미지가 강해서 사극 등의 창작물에선 잘 등장하지 않는다.
벽초 홍명희의 소설 『임꺽정』에서는 단역으로 잠시 등장한다. 조식이 나룻배를 타고 가는데 당시 세도가인 윤원형의 차지(윤원형의 하인을 부르는 이름)가 무리한 대우를 요구하며 시비를 걸자, 조식이 아랫사람을 시켜서 차지를 혼쭐낸다. 이후 차지가 윤원형에게 이 일을 고하며 '자신을 영남 조 판관이라 한 자에게 당했다'라고 말하자 윤원형은 '조식이구나. 그 자는 나도 꺼리는데 네가 잘못 걸렸다.'라고 달래준다. 위에서 언급된 『백야기문』의 야담을 각색한 것으로 보인다.
이두호의 만화 『임꺽정』에서는 이 부분에 대한 묘사가 더 추가되는데, '백주 대낮에 윤원형의 개가 사람을 문다!'라고 호통을 친 조식에게 차지가 막 주먹질을 할 찰나 임꺽정이 나타나서 차지를 제압하고 조식을 구해준다. 그런데 그 차지는 과거 임꺽정의 친구인 마빡 김달평이었고, 서로의 정체를 안 뒤 술을 마시며 오해를 푼다. 이후 김달평이 이 일을 윤원형에게 고하고 조식의 정체에 대해 아는 것은 소설과 동일하다.

8. 관련 자료



8.1. 사이트


  • 경상대학교 남명학연구소
  • 남명학연구원
  • 남명학고문헌시스템[158]

8.2. 비문


  • 대곡 성운이 지은 묘비문[159] - 원문, 관련 논문
  • 면우 곽종석이 지은 묘비문[160]원문, 관련 논문
  • 내암 정인홍이 지은 신도비문[161] - 원문, 관련 논문
  • 용주 조경이 지은 신도비문[162]원문, 관련 논문
  • 미수 허목이 지은 신도비문[163]원문
  • 우암 송시열이 지은 신도비문[164] - 원문, 관련 논문

8.3. 동영상


  • 책을 뚫고 현실로 나아가라-남명 조식, KBS 역사스페셜 2012. 7. 5.
  • 남명 조식의 신명사도 강의, 홍익학당 2012. 11. 17.
  • 선비의 발자취 '남명 조식', 천지매거진 2013. 2. 7.
  • 국회 인문학 아카데미 5회 남명 조식, 대한민국 국회 2014. 12. 1.
  • 청비이공 선비열전 21강 칼을 찬 선비 남명 조식, 청년선비포럼 20 2017. 9. 4.
  • 퇴계 이황과 남명 조식, 도올 TV 01 02 2019. 9. 4 ~ 9. 5

9. 관련 문서


[1] 현재는 중국 삼국시대조식(曹植)과 성씨의 획 수를 구분해서(曹와 曺 - 세로획 개수가 다름) 표기되고 있으나 사실 曹와 曺는 같은 글자의 이체자라 통용됐었다. 사실 과거 문헌에도 두 글자는 통용되는 걸 볼 수 있다. 오늘날 曺씨로 알려진 수많은 인물들이 조선시대 문헌에 曹로 적혀 있거나 반대로 중국의 曹씨들이 중국 옛 문헌에 曺로 돼 있는 일이 허다했다. 과거에는 같은 한자에 모양이 다른 여러 이체자가 통용이 됐고 지금보다 그런 글자들의 사용이 자유로웠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실상 중국 삼국시대의 조식과 조선시대의 조식은 한자까지 같은 동명이인으로 볼 수 있다. 물론 오늘날 한국에서는 曺-한국의 성씨에 사용, 曹-중국의 성씨 또는 기타 어휘에 사용한다는 표기 원칙이 세워졌으니 적어도 한국어에서 한자를 표기할 때는 여기에 따라 구분을 지어주는 게 좋긴 하다. 참고로 현재의 중국어일본어에서는 曺 자가 사용 가능한 한자로 채택되지 않았기 때문에 한국의 조씨들도 전부 曹로 표기하는 경우가 많다.[2] 여러 호 가운데 대중에게 가장 잘 알려진 이 명칭의 출처는 『장자(莊子)』 「소요유(逍遙遊)」편으로, 대붕이 날아가는 곳이다. 조식은 젊어서부터 노장사상의 글을 좋아하여 학생들을 가르치는 공간의 이름도 『장자』에서 따오기도 하였는데, 이는 후에 퇴계 이황 등으로부터 "노장의 빌미가 있다"라는 비판을 받기도 하였다.[3] 문정공파의 파조다.[4] 외조부 이국(李菊)의 고향으로, 현재도 인천 이씨 집성촌이다.[5] 현재도 창녕 조씨 집성촌이다.[6] 음력 1501년 6월 26일[7] 음력 1572년 2월 8일[8] 남명이 차고 다니던 경의검(敬義劍)에 새겼던 글이다. 그가 중시한 경의협지(敬義夾持), 즉 내면의 수양인 경(敬) 뿐만이 아니라 외적 행위의 기준이 되는 의(義) 또한 겸비해야 한다는 사상을 압축한 글이라 하겠다.[9] 60갑자로 환산하면 신유년 을미월 임인일 갑진시(辛酉年 乙未月 壬寅日 甲辰時)이다.[10]경상남도 합천군 삼가면 외토리.[11] 인천 이씨의 모친은 조선 전기 4군을 개척한 최윤덕의 손녀.[12] 진주에 자리잡은 경상국립대학교는 주기적으로 학회도 열고 남명학관이라는 건물도 지어놓는 등 남명 사상 연구에 많은 투자를 하고 있다.[13] 이외에 스스로의 정신력과 담력을 기르기 위한 극기 훈련의 차원에서 두 손에 물그릇을 받쳐들고 밤을 새는 등의 행위도 하였다고 전한다.[14] 해당 부분은 "이윤의 뜻을 뜻으로 삼고 안연의 학문을 배움으로 삼아서 출사하면 경륜을 펴야 하고 재야에 있으면 지조있게 지켜야 한다. 대장부는 마땅히 이렇게 해야 하나니 출사해서 한 것도 없고 재야에 있으면서 지조가 없으면 뜻하고 배운들 장차 무엇에 쓰겠는가!(志伊尹之志 學顔淵之學 出則有爲 處則有守 大丈夫當如此 出無所爲 處無所守則 所志所學將何爲)"이다.[15] 남명의 출처관은 앞서 인용한 노재 허형의 글 중 "출사하면 경륜을 펴야 하고 재야에 있으면 지조있게 지켜야 한다(出則有爲 處則有守)"로 요약된다. 남명은 허형의 글에서 깨달음을 얻어 학문관과 출처관을 확립했으나, 역설적이게도 허형에 대해서는 스스로가 말한 출처관에서 벗어났다 하여 못마땅하게 여겼다.[16] 30세 때부터 모친의 삼년상을 치른 48세 때까지 김해에 머물렀다. 관련 유적으로는 경상남도 김해시 대동면 주동리에 있는 산해정(山海亭)이 있다.[17] 고향으로 모친이 별세하고 삼년상을 치른 후에 48세 때부터 61세까지 머무르며 학생들을 가르쳤다. 관련 유적으로는 뇌룡정(雷龍亭)이 있다.[18] 현재의 경상남도 산청군 시천면. 61세부터 남명이 별세하는 72세까지 머물렀다. 관련 유적으로는 산천재(山天齋)와 덕천서원(德川書院)이 있다.[19] 이는 상대적으로 성리학의 이론적 심화를 중시한 동갑내기 이황과 대비되는 모습이다.[20] 단성현감을 사직하면서 올린 상소문이라 이런 이름이 붙었는데 을묘년(1555)이었으므로 을묘사직소(乙卯辭職疏)라고도 부른다. 상소 자체는 대단한 명문으로 요즘의 정치판에도 시사하는 면이 많다. 자세한 것은 해당 문서 참고.[21] 말이 이렇지 사실상의 의미는 '고아'란 소리다.[22] 우계 성혼의 부친이다.[23] 재야에 은거하면서도 명망이 높은 사람[24] 중종 34년(1539) 이언적의 추천으로 헌릉참봉에 임명되었던 일을 말한다.[25] 명종 8년(1553) 전생서 주부에 임명된 일을 말한다.[26] 태수의 이칭으로, 태수의 수레에는 사두마차(駟馬)에 말 한필을 더하였기에 오마(五馬)라고 한 것에서 유래되었다. 조선에서는 수령의 이칭으로 쓰였으며, 본문에서는 조식이 단성소를 쓴 계기가 된 단성현감의 직위가 내려진 것을 뜻한다.[27] 원문에서는 明新之地라 하였는데, 이는 『대학』 첫 머리에 나오는 "대학의 도는 명덕을 밝히고 백성을 새롭게 하며 지극한 선에 머물게 함에 있다(大學之道 在明明德 在親民 在止於至善)"는 구절을 이야기한 것이다.[28] 『명종실록』 19권, 명종 10년(1555) 11월 19일 경술 첫번째 기사[29] 『남명집』 권 1, 「욕천(浴川)」[30] 부산포제포에 설치된 왜관 이외에도, 낙동강 수로 주변에는 한양으로 상경하던 왜인들이 묵은 소왜관(小倭館)들과 그들이 가져온 물화를 저장한 창고인 왜물고(倭物庫)라는 곳이 있었다. 김해는 소왜관이 설치된 곳 중 하나였다. 그리고 부산포왜관이 소속된 이웃 고을 동래부에서는 왜인들과의 밀무역이 성행하는 폐단이 있었고, 지척에는 왜구들이 성했던 대마도가 있었다. 그래서인지 조식은 친구인 성수침에게 보내는 에서 당시 자신이 살던 김해를 "대마도와 가까운 바닷가요 남극노인성이 뜨는 끄트머리(馬之島海 老人之角)"라고 표현하면서 대마도를 의식하는 듯한 글을 남겼다.[31] 나라의 기강이 엉망이 된지 이미 오래되어서 진작부터 왜적들이 이 나라를 휩쓸고 다녔어도 이상하지 않다는 뜻.[32] 『남명집』 권 2, 「대책문제(策問題)」[33] 일생 12번을 등정했는데 유토피아 청학동을 찾기 위해서라고 한다.[34] 이때는 문정왕후윤원형이 죽고 명종이 친정을 하던 상황으로, 조식 외에도 임훈, 이항, 남언경, 한수(韓修, ?~?) 등 재야의 여러 인물들이 임금의 부름을 받고 상경하였다. 그리고 명종은 이들과 접견한지 불과 8개월 만에 사망하였다.[35] 『명종실록』 33권, 명종 21년(1566) 10월 7일 갑자 첫번째 기사[36] 당시 명종이 상서원 판관의 벼슬을 내리며 그를 불렀다.[37] 즉위한 1567년만 해도 11월과 12월 두 차례에 걸쳐 그를 부르는 교서를 내렸고, 그 후 1570년까지 매년 한 차례씩 벼슬을 내렸다.[38] 『선조실록』 2권, 선조 1년(1568) 5월 26일자 기사, 『남명집』 권 2, 「무진봉사(戊辰封事)」[39] 평생 벼슬길에 오르지 않고 초야에 묻혀 산 선비[40] 『남명집』 권 4, 「행록(行錄)」, 김우옹이 "만약에 돌아가신다면 스승님을 무엇이라 칭해야 하는게 옳을까요?"라고 묻자, 남명이 말했다. "처사라고 하는 것이 옳다. 이것이 나의 평생 뜻이다. 만약 처사라고 하지 않고 관직으로 나를 칭한다면 이는 나를 버리는 것이다(宇顒請曰。萬一不諱。當以何號稱先生乎。曰。用處士。可也。此吾平生之志。若不用此而稱爵。是棄我也。)"[41] 『남명집』 권 4, 「행록(行錄)」, "벽에 써놓은 경의(敬義) 두 글자는 지극히 중요한 것이니 배우는 사람은 여기에 숙달되도록 힘써야 한다. 그리 되면 마음 속에 무엇 하나 걸림 없게 될 것이다. 나는 그러한 경지에 이르지 못하고 죽는다(書壁敬義二字。極切要云云。學者要在用工熟。熟則無一物在胸中。吾未到這境界以死矣。)."[42] 사망했던 1572년에 내려졌다[43] 1615년에 추증되었는데, 시호인 문정(文貞)도 이때 하사했다.[44] 1616년 진주의 생원 하인상을 시작으로 영남에서 7번, 충청에서 8번, 호남에서 4번, 성균관의 사부학당에서 12번, 개성홍문관, 사간원사헌부에서 각각 한 번씩 조식의 문묘종사를 건의했으나 끝내 허가받지 못했다고 한다.[45] 조식이 말년에 은거한 산청군 시천면에 있으며, 1576년에 세워지고 1609년에 사액되었다. 정조 때에는 채제공이 이곳의 원장을 지내기도 하였다. 이후 흥선대원군서원 철폐 때 없어졌다가 1926년에 다시 복원되었다.[46] 본래는 1576년 조식의 고향인 합천군 삼가현에 세워진 서원으로, 회현서원이라고도 하였다.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가 이후 장소가 협소하다 하여서 1601년에 인근 황강에 있는 향천서원으로 옮겨졌고, 이곳이 1609년에 용암서원(龍巖書院)이란 이름으로 사액되었다. 용암서원도 덕천서원과 마찬가지로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훼철되었고, 이후 서원이 있던 터가 1987년 합천댐 공사로 수몰되자 2007년 현재의 위치에 복원되었다. 이 복원된 서원의 옆에는 남명이 합천에 머무를 때 학생들을 가르치던 뇌룡정이 있다.[47] 김해시 대동면 소재. 본래 이곳은 산해정이라 불리웠는데, 조식은 김해에 머무르던 48세 때까지 여기서 제자들을 가르쳤다. 1588년 서원으로 착공되었다가 전쟁으로 중지되었고, 1609년 완공되면서 신산서원이란 이름으로 사액되었다. 덕천서원, 용암서원과 마찬가지로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 때 훼철되었다가 이후 일부가 복원되었고, 1999년에 이르러 전체가 복원되었다.[48] 북한산 백운봉 아래에 있었다고 전해지며, 1616년에 건립되어 같은 해에 사액되었다. 인조반정 이후 서인들이 철거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정확히 언제 사라졌는지는 밝혀지지 않았다.[49] 참고로 곽재우는 조식의 둘째 외손녀 사위이다. 즉 김우옹과는 동서지간.[50] 1589년에 기축옥사가 일어났을 때, 정여립과 친밀하다고 알려진 정체가 불분명한 인물 길삼봉으로 무고되어 옥사하였다.[51] 조식의 큰외손녀 사위로, 뒤에 언급될 한강 정구와 더불어 남명 문하에서는 양강(兩岡)으로 불리웠다. 조식이 죽기 전에 늘 가지고 다니던 방울인 성성자(惺惺子)라는 방울을 물려주었다. 다만 이황보다는 조식의 문하에 출입한 세월이 더 길었고, 그 자신도 임금 앞에서 조식의 문하로 자처하였다.[52] 동강 김우옹의 형이다. 조식의 학문에 노장의 빌미가 있다는 이황의 발언을 듣고 반론을 제기하는 편지를 보내기도 하였다.[53] 조식과 이황 이외에 하서 김인후의 문하에서도 공부하였다.[54] 19세(1559년)에 지리산 아래 덕산으로 남명선생을 찾아가 제자, 김면 장군 유적[55] 동서분당 과정에서 심의겸과 함께 논의되는 그 사람이 맞다.[56] 이 옥사의 희생자 중 이발은 서경덕의 학맥인 민순의 문인이었고, 길삼봉으로 무고되어 희생된 최영경은 위에서도 언급되었듯 남명 조식의 수제자 중 한 사람이었다. 이들은 지역적으로 호남과 서부 영남의 인물들로 분류되는데, 실제로 이 두 지역의 동인들이 기축옥사 당시 많이 희생되었다.[57] 사실 동인 내부에는 정철의 처리문제로 갈등하기 이전부터 분열이 일어날 요소가 꽤 있었다. 조식 학맥과 이황 학맥 간에는 스승들이 서로 라이벌 플래그를 꽂으면서 생긴 잠재적인 갈등요소들이 몇 있었고, 기축옥사 당시에는 이황의 문인들이 서인의 공세를 막아주지 않았다는 이유로 불만이 많았기 때문이었다.[58] 동아일보 1986년 5월 17일 참고. 당시 정인홍의 나이는 60이 넘은 상태였다. 환갑이면 묫자리 알아보러 다니던 그시대에, 그것도 왜군의 초입 루트였던 영남에서 의병을 지휘했으니 그 불같은 성품을 짐작할수 있다.[59] 임진왜란 시기 고령 지역의 의병운동과 의미, 임진왜란 (고령 사건사고와 사회운동)[60] 그 외에 남명 문하 및 그 계열로서 의병장으로 활동한 인물로는 전치원, 이대기, 변옥희, 박경신, 오장, 문경호, 이로, 조종도, 여대로, 박경인(朴慶因, 1542~1592), 정경운(鄭慶雲, 1556~?) 등 50여 명이 있다.[61] 그 대표적인 예로 정인홍과 동문으로 퇴계에게서도 수학했던 정구, 그리고 정인홍의 제자였던 동계 정온이 있었다.[62] 스승인 조식이 실천을 중시하여 저술을 많이 남기지 않는 사람이었고, 제자들 또한 그 영향으로 스승의 문집을 간행하는 것 외에는 그의 학문을 이론적으로 심화시키는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63] 원래 남명학파 자체가 조식의 영향으로 조정에 출사하지 않는 경향이 있었는데, 정인홍이 처형된 이후 그러한 경향이 더욱 강해진 것도 여기에 영향을 주었다.[64] 경상북도 성주 출신의 유학자. 퇴계 이황의 주리론을 연구하여 44세 때에 심즉리설을 주장하면서 일대 파란을 일으켰는데, 이는 왕수인이 주장한 심즉리와는 다른 이발일로(理發一路)의 사상이란 점에서 차이가 있다. 허나 심즉리설이란 이름으로 인해 그의 사상은 당시 퇴계 학맥에게 이단으로 취급받았고, 사망 이후에 발행되어 각지에 보내진 그의 문집은 반환되거나 심지어 상주지방에서 처럼 문집이 태워진 일도 있었다. 그의 제자들 중 가장 뛰어난 여덟 명을 주문팔현(洲門八賢)이라 부르는데, 이들 중에는 대계 이승희면우 곽종석이 유명하다. 이진상의 자식이기도 한 이승희는 고종의 강제퇴위를 계기로 블라디보스토크로 망명하여 러시아와 중국을 오가면서 항일운동을 하다가 병사하였고, 곽종석은 이진상의 심즉리설이 퇴계의 주리론을 더욱 강조하였다는 것을 학문적으로 논증하는 한편 제자인 심산 김창숙과 함께 파리 강화 회의에 국내 유림들의 독립청원서를 보내는 파리 장서 사건을 일으켰으나, 이로 인해 일제에 체포되어 옥고의 후유증으로 병사하였다. 두 사람 모두 독립유공자로 추서되었다.[65] 현재 『남명집』의 판본이 20여 가지 가까이 되거나 조식과 관련된 신도비들의 비문을 쓴 사람들의 면면이 학파를 초월하게 이유도 이와 같은 대북세력의 몰락 및 잔존한 남명학파의 분화 등에 영향을 받은 것이라 볼 수 있다.[66] 심지어 사망 시기도 얼마 차이 나지 않는데, 퇴계가 남명보다 1년 정도 앞서 사망하였다.[67] 그러다보니 서로 북극성 같은 존재니 천리신교(千里神交)라느니 하며 칭찬도 하긴 했지만 실제로는 가까운 곳에 있으면서도 둘이 한번도 만난적도 없고 서신으로 논쟁을 자주 했다고 한다.[68] 이를 잘 나타내는 일화가 하나 있다. 퇴계가 학생들을 가르쳤던 도산서당 앞강에서는 진상품인 은어가 많이 잡혔다. 관에서 은어잡이를 하는 기간이 되면 퇴계는 도산서당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것을 중단하고 상계(上溪)에 있는 자택으로 철수하곤 하였다. 혹여나 왕에게 진상할 물고기에 손을 댄다고 의심을 사지 않도록 사소한 것에서부터 조심하기 위한 태도였다. 퇴계의 이러한 이야기를 들은 남명은 웃으며 "어찌 그리 자질구레한 일에 신경을 쓰는가? 자신이 하지 않으면 그만인 것을. 관청에서 은어 잡는 통발을 놓았든 말든 무엇을 꺼리고 피한단 말인가?"라 이야기하였다고 전해진다. 출전은 『학봉선생문집속집』 권 5, 「퇴계선생언행록(退溪先生言行錄)」[69] 이러한 문체의 차이에 대해 남명은 말년에 "퇴계의 문장은 오늘 날의 문체이나 성취된 것이다. 비유컨대 나는(또는 내 문체는) 비단을 짜다가 한 필을 다 못 짠 것이므로 세상에 쓰이기 곤란하고, 퇴계(의 문체)는 명주를 짜서 한 필을 이루었으므로 세상에 쓰일만 하다." 라고 평했다. 퇴계 또한 남명의 문체를 성품과 연결지어 평가한 일이 있었다. 한번은 친구 구암 이정이 남명에게는 부친의 묘비문을 부탁하고 퇴계에게는 묘비에 새길 글자를 써달라고 요청하였는데, 이때 묘비문의 글자를 쓰기 위해 남명이 쓴 비문을 읽은 퇴계는 "예스럽고 기개가 높으나 격식을 따르지 않는 부분이 있다"는 요지로 평하면서 이를 산림이 세상을 피해 은거하는 것을 좋아하는 뜻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말했다. 즉 남명의 세상을 꺼리는 성품이 그의 고문 문체에 영향을 주었다고 인식한 것. 관련 내용의 출처는 각각 『남명집』 권 4, 「행록(行錄)」『퇴계집』 권 21, 「답이강이(答李剛而)」.[70] 『퇴계집』 권 5, 「걸물절왜사소(乞勿絶倭使疏)」. 조선이 여진족들과 틈이 벌어지고 있는 상황이라 남북으로 적을 만들 수 없고 왜구가 침공하는 동남지방은 공물이 나오는 곳이니, 대마도와 강화하고 그들을 왕도정치로 포용하면서 피해를 줄이자는 내용으로 요약할 수 있다.[71] 『퇴계집』 권 8, 「예조답대마도주종성장(禮曹答對馬島主宗盛長)」, 『퇴계집』 권 8, 「예조답일본국좌무위대장군원의청(禮曹答日本國左武衛將軍源義淸)」[72] 『남명집(정유본)』 권 3, 「답오자강정자정(答吳子强鄭子精)」. "나라의 큰 일은 군대와 군량을 넉넉히 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國之大事 不過兵食)"라는 대목이 그것이다.[73] 『남명집』 권 2, 「대책문제(策問題)」[74] 오늘날로 비유하자면 퇴계 이황은 저명한 연구 업적을 쌓으면서 정/관계에도 자주 영입되어 장관이나 국회의원으로 활동했던 당대의 석학이었고, 남명 조식은 지방대 교수로 활동하면서 정/관계의 직책을 한 번도 맡지 않았지만 주요 정치/사회적 현안마다 공개적인 비판-성명에 꾸준히 참여하여 세간의 주목을 받아온 실천적 지식인-재야 원로라고 할 수 있겠다.[75] 명종 8년(1553)에 조식이 조정에서 내린 전생서 주부(정 6품)의 벼슬을 거절한 일이 있었다. 이때 성균관 대사성에 취임했던 이황은 조식에게 벼슬에 나올 것을 권하는 편지를 보냈다. "사람들이 그대를 몰라주는 것도 아니요, 임금이 어진 인재를 기다리니 벼슬할 때가 아닌 것도 아니며, 그대의 출처에 대해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있다"라는 내용이었다. 이에 조식은 “나는 매우 몽매함에도 헛된 이름을 얻은 사람이라 벼슬에 나갈 수 없고, 눈병을 얻어 사물을 볼 수 없으니, 발운산(撥雲散: 안약의 일종)이 있으면 좀 보내달라”는 답장을 보냈다. 발운산이라는 비유법과 반어법으로 ‘지금이 벼슬을 할 시국이라고 생각하느냐?’고 반문하면서 퇴계의 처신과 시국을 보는 안목을 은근히 비판하는 뜻이었다. 이에 퇴계는 “나도 당귀를 구하지 못하고 있는데 어떻게 그대에게 발운산을 구해 줄 수 있겠느냐”는 답장을 보냈다. 이황 자신도 지금은 벼슬을 할 시국이 아니라고 여겨서 향리로 물러나려 하는데 그러지 못하고 있으니, 조식 당신의 처신을 어떻게 충고할 수 있겠느냐는 의미이다. 참고자료[76] 남명이 주로 출처관으로 인물의 평을 하였다면, 퇴계는 출처관 외에도 다른 여러 종합적인 측면을 같이 봐야 한다는 입장을 보였다. 때문에 두 사람의 평이 갈린 대표적인 인물로 포은 정몽주회재 이언적이 있었다.[77] 북송-남송 시대에 성리학의 발전에 큰 영향을 준 인물들을 나타낼 때 쓰는 말로, 대개 북송시대의 주돈이, 정호, 정이, 장횡거, 소강절(이상의 다섯 사람을 북송오자 라고 칭함)과 남송의 주희가 여기에 포함된다. 염(濂)은 주돈이의 호가 염계(濂溪)인 동시에 말년의 거처가 여산 연화동의 염계서원(濂溪書院)이었던 데서 유래되었고, 락(洛)은 주돈이의 제자인 정호(程顥)와 정이(程頤) 형제를 지칭하던 말로 그들이 강학하던 곳이 낙양이었기에 그리 불렀다. 이들 염락제현은 달리 염락관민(濂洛關閩)이라고도 하는데, 관(關)은 관중지역에서 학맥을 형성하던 장횡거를, 민(閩)은 복건성에서 제자를 길러냈던 주희를 지칭한다.[78] 하학상달(下學上達)이라고도 한다. 출전은 『논어』 「헌문편」. 직역하면 아래로부터 배워서 위로 올라간다는 뜻으로, 좀 더 구체적으로는 일상생활의 일들로부터 배워나가면서 마침내는 궁극적인 이치를 깨우치는 것을 의미한다. 이처럼 일상생활로부터 학문으로부터 시작하기 위해 조식이 중시한 책은 『소학』이었는데, 이는 조식만의 특징이 아니라 그보다 한 세대 앞선 김굉필조광조 등의 학풍이기도 하였다.[79] 김종직, 정여창, 김굉필보다 한 세대 뒤의 사람이다.[80] 공교롭게도 이언적에 대한 남명과 퇴계 두 사람의 시각은 정 반대였다. 남명이 출처관에 따라 이언적을 못마땅하게 여긴 반면 퇴계는 그를 높이 받들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언적에 대한 인식차이는 그들의 사후 생전의 소소한 갈등들과 함께 엮여서 정인홍의 「회퇴변척소」로까지 이어졌다.[81] 『남명집』 권 4, 「퇴계에게 드리는 편지(與退溪書)」[82] 위에서 인용한 편지글을 말한다.[83] 『남명집』 권 2, 「여오자강서(與吳子强書)」 中[84] 『퇴계집』 권 19, 「답황중거(答黃仲擧)」 中[85] 『퇴계집』 권 20, 「답황중거(答黃仲擧)」 中[86] 『퇴도선생언행록』 권 5, 「숭정학(崇正學)」 中[87] 『퇴도선생언행록』 권 5, 「숭정학(崇正學)」 中[88] 『퇴계집』 권 7, 「걸퇴차자(乞退箚子)」 中[89] 『퇴계집』 권 43, 「서조남명유두류록(書曹南冥遊頭流錄後)」 中[90] 『퇴도선생언행록』 권 5, 「기선생논인물(記先生論人物)」 中[91] 조식에 대한 이황의 이러한 비판들은 남명학파와 퇴계학파 간의 잠재적인 갈등요소로 작용하다가 이후 정인홍이 「발남명집설」과 「정맥고풍변」, 「회퇴변척소」 등을 통해 이황을 비판하는 큰 계기 중 하나가 되었다.[92] 이러한 남명의 독서 스타일과 비슷한 방식은 제갈량 문서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다만 남명은 출처관에 있어서는 제갈량을 비판적으로 바라보았다. 『명종실록』 33권, 명종 21년(1566) 10월 7일 갑자 첫번째 기사[93] 이 노트의 이름이 『학기유편(學記類篇)』이다. 본래는 남명이 공부하던 유교경전의 내용 중 절실하다고 생각되는 부분을 뽑아서 기록한 것이라 하여 이름이 『학기(學記)』였으나, 그의 노년에 이 노트를 빌려간 제자 정인홍이 『근사록』의 체제에 따라 분류(類)-편집(篇)하면서 지금의 이름으로 불리운다. 참고로 남명은 정인홍이 이 노트의 편집을 완성하기 전에 사망하였다고 한다. 이 책은 성현들의 어록과 유교의 가르침을 도식화한 24개의 그림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그림 중 17개는 남명 자신이 그린 그림으로 알려져 왔지만 연구가 진행되면서 24개의 그림 중 남명이 그린 것은 5개이고 14개는 원나라의 유학자 임은 정복심(林隱 程復心, 1257~1341)이 지은 『사서장도(四書章圖)』의 초간본에서 나온 것임이 밝혀졌다. 이에 대해선 『사서장도』 초간본이 조선에서도 본 사람이 얼마 없을 정도로 희귀한 책이었기에 편집자들이 이 그림들을 남명이 그린 것으로 착각한 것이라 추정하고 있다고. 관련링크 일본국립공문서관 소장 『사서장도』[94] 마음의 작용과 수양방법을 신명사(神明舍)라는 집과 임금이 나라를 다스리는 태도에 비유하여 나타낸 그림이다.신명사도 해설 영상신명사도를 간략하게 해설한 내용(pdf)[95] 참고로 『남명집』이 소략해진 것에는 남명이 저술을 대하는 태도 이외에 정치적인 맥락도 한 몫을 했다. 인조반정으로 인해 대북세력이 몰락하자 남명의 후학들은 정치적 혐의를 피하기 위해 정인홍의 이름을 『남명집』에서 지우는 등 수 차례에 걸쳐 문집을 재편집했는데, 이 과정에서 안 그래도 적었던 문집의 내용이 더욱 줄어든 것이다.[96] 『여헌집』 권 13, 「한강선생행장」, 『공백당집』 권 5, 「성현기상집설」[97] 이 다툼의 계기가 된 사건을 다룬 논문 01, 02, 03[98] 이정과는 인척 관계였다.[99] 여담으로 하종악의 전처는 남명의 형의 딸이었는데, 남명이 함안 이씨에 대해 이야기한 것은 형의 딸을 위해 의도적으로 모함한 것이 아니냐는 풍설도 함께 떠돌았다. 이러한 인식을 바탕으로 기록된 저술이 유희춘의 『미암일기초』이다.[100] 제자 정탁과 오건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남명은 이정이 이 문제에 대해 세 차례나 말을 바꿨기 때문에 절교하였다고 주장하였다. 이정 측은 이를 부인하였고, 이 문제에 대한 논쟁은 이후 조식과 이정 두 사람의 자손 간에도 계속되었다. 다만 누구의 주장이 맞는지에 대해서는 현재까지도 알 수 없는 상태이다.[101] 이 옥사의 원인을 남명 때문이라 생각한 관련자들의 가족들이 조식과 그의 친족들을 해하려는 동향도 예측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시기 조식과 그 가족들은 덕산과 김해를 오가며 생활하였다.[102] 이때 퇴계의 제자인 기대승은 함안 이씨 사건과 훼가출향 사건 모두 조식이 떠들어서 생긴 일이라고 이야기하였다. 이 훼가출향 사건도 결국 함안 이씨의 옥사와 마찬가지로 흐지부지되고 말았다.[103] 『퇴계집』 권 22, 「답이강이 경오(答李剛而 庚午)」[104] 원문. 달리 「남명선생과 구암 이정의 절교사(南冥先生與李龜巖絶交事)」라고도 한다.[105] 원문 01, 원문 02, 번역 01, 번역 02, 관련 기사[106] 『광해군일기(정초본)』 39권, 광해 3년 3월 26일 병인 5번째 기사[107] 이와 같은 정인홍의 행동은 퇴계가 자신의 스승을 뒷담화한 것에 대한 분노와, 그런 내용이 실린 퇴계의 문집과 퇴계학파의 인식에 대응하여 스승과 남명학파의 명예를 지키기 위한 태도가 결합된 것이었다. 실제로 이 사건을 통해 이정과 더욱 친밀해진 퇴계가 남명을 폄하하였고, 이러한 퇴계의 인식이 퇴계학파를 통해 사림들의 여론에 영향을 미쳤기 때문이었다. 물론 정인홍이 그러한 글을 쓰게 된 동기는 제자로서 당연한 것이었지만, 그 내용이 지나치게 과격하여 다른 당파들의(심지어 일부 남명학파 동문들에게도!) 어그로를 끈 것이 문제였다. 이로 인해 벌어진 청금록 사건과 대북의 정치적 고립, 그리고 남명학파 내부의 분열을 생각하면 결과적으로 득보다는 실이 컸던 셈.[108] 김장생이 대표적이다. 그는 신경진이귀에게 보내는 편지(일부 내용은 김장생이 지은 송강 정철의 행록에도 실린다)에서 이 사건을 언급했는데, 사건의 내용을 과장하여서 퇴계와 남명의 관계를 필요 이상으로 벌리고 영남 유림의 화합을 저해하려 했다고 보는 견해가 있다. 이 편지에서 김장생은 "남명은 자신의 문하생들을 사주하여 하종악의 집을 훼가하면서 이 문제와 관련된 함안 이씨를 쫓아냈고", "덕산에 있던 구암 이정의 기와집을 부수었다"고 했으며, 이어서 조식이 “기대승의 예전 언행이 지극히 흉악하여 나는 항상 반드시 그가 나랏일을 그르치리라고 생각했는데, 훗날 과연 생각한 대로였다" 라는 말을 했다고 주장하면서 그 출처에 대해 "이는 성대곡(대곡 성운)이 지은 남명의 행장에 나타나 있습니다"라 언급했다. 하지만 내용을 뜯어보면 사실과 다른 측면이 상당히 많은데, 먼저 하종악의 집을 훼가한 것은 남명의 문하인 각재 하항이지만 이것을 남명이 사주했다는 기록은 지금껏 발견되지 않았고, 산청에 있던 이정의 집이 훼가되었다는 것 또한 사건과 관련된 1차 자료들에는 없는 내용이다. 마지막으로 남명이 기대승에 대해 언급했다는 부분인데, 성운의 『대곡집』에는 김장생이 근거로 제시한 행장 대신 남명의 묘비문만 있다. 헌데 그 묘비문에서도 기대승이 직접 언급된 기록은 없고, 몇몇 사람들이 기대승이 아니냐고 의심했던 어느 익명의 인물에 대한 남명의 비판적인 평가가 있을 뿐이다. 이와 관련된 자세한 내용은 기타 문단에 적힌 기대승 관련 내용을 참고할 것.[109] 앞에서 이야기한 정인홍과 한강 정구의 결별이 바로 그것이다.[110] 인조반정 이후 남명의 후손들은 정인홍이 비문을 쓴 남명의 신도비를 철거하면서 서인과 남인의 명망가들에게 새로 세울 신도비의 비문을 부탁하였다. 이때 남인 측에서 부탁받은 사람 중 하나가 허목이었다. 그러나 허목은 이정의 집안에 많은 신세를 지고 있었기에 남명보다는 이정에 대해 각별한 감정을 가지고 있었고, 위 사건과 관련하여 남명과 이정의 후손 사이에 일어난 논쟁에서도 이정의 편을 들었다. 이러다보니 허목이 쓴 조식의 신도비문은 송시열이 쓴 조식의 신도비문에 비해 그 내용이 조금 상세하지 않았고, 이에 대해 남명의 후손들은 내심 불만을 갖고 있었다. 이후 미수의 저작인 『미수기언(眉叟記言)』이 간행될 때 그 안에 수록된 「답학자서(答學者書)」라는 글에서 허목이 남명과 정인홍을 비판한 내용이 알려지자, 19세기 말부터 남명의 후손들과 노론계 학자들이 덕산비의 내용에 문제를 제기하기 시작하였다. 마침내 1926년에 이르러 남명의 후손들은 덕산비를 철거하여 땅에 묻었고, 이에 남인계열의 후손들이 조식의 후손들을 성토하면서 소송을 일으켰지만, 3심에서 법원이 조식 후손들의 손을 들어줌으로써 덕산비는 다시 서지 못한다. 현재 남명의 신도비는 송시열이 비문을 쓴 것만 세워져있고, 덕산비는 행방이 묘연한 채 비석받침인 귀부만 남아있다. 관련된 내용을 다룬 논문[111] 퇴도만은(退陶晩隱)이란 '도산으로 물러난 만년의 은자'라는 의미이고, 진성은 이황의 본관이다. 즉 "도산으로 물러난 만년의 은자 이황의 묘" 정도로 해석하면 되겠다.[112] 『동각잡기(東閣雜記)』 하권, 『연려실기술』 권 18, 「선조조고사본말」.[113] 『성호사설』 권 1, 「천지문(天地門)」[114] 이야기의 바리에이션에 따라서는 조식의 방이 지나치게 화려한 것을 본 토정 이지함과 고청 서기가 흙이 잔뜩 묻은 신발로 방석을 짓밟고 돌아갔다거나 방에 을 누고 이부자리에 발라버렸다는 버전도 있다.[115] 조식, 이준경과는 어릴 때부터 친구사이로, 우계 성혼의 부친인 청송 성수침의 사촌동생이기도 했다. 을사사화 때 친형인 성우(成遇)가 연루되어 죽자, 평생을 보은 속리산에서 은거하며 살았고, 남명이 먼저 죽었을 때 그의 묘갈문을 써주기도 하였다. 문인으로는 미수 허목의 외조부이자 유명한 시인이요 호걸이었던 백호 임제가 있다.[116] 참고로 이 시는 송익필이 지은 「추야련당(秋夜蓮堂)」의 일부분이다.[117] 다만 1569년 장의동에서 열린 박태수라는 사람의 회갑연에 두 사람 모두 공식 초청되어 수연첩(壽宴帖)에 그 이름이 올라와 있는데, 이때 두 사람이 만났을 것이라고 추측하는 견해도 있다.[118] 참고로 여색과 관련하여서, 어느 날 남명이 제자 김우옹에게 "천하에서 가장 굳센 관문(鐵門關)이 바로 화류관문(花柳關)이다. 그대들은 이 관문을 넘었는가 그러지 못했는가?"라고 물으며 장난스레 "이 관문은 금석(金石)도 녹여버린다."라고 이야기한 일이 있다. 출처는 『남명집』 권 4, 「행록(行錄)」.[119] 참고로 이 이야기에 나오는 임금은 중종이 아니라 명종이라고 하거나 꺽지가 깨물린 자리는 아가미라거나 하는 식의 바리에이션도 있다. 그 외에 위에서 언급한 남명 문하와 퇴계 문하 간의 경쟁구도를 반영하는 버전의 민담도 있다. 여기서는 남명과 퇴계가 꺽지를 먹다가 뱉어 강으로 던졌는데, 남명이 뱉어 낸 꺽지는 완전한 모습으로 헤엄을 치며 갔으나 퇴계가 뱉어 낸 꺽지는 이에 미치지 못하고 눈이 하나 돌아가 버렸다는 식의 이야기이다.[120] 동양의 고천문학에서 처사성은 소미성(少微星)이라고도 하며, 삼원(三垣) 중 태미원(太微垣)에 소속된 별자리이고 네 개의 별로 이루어져 있다. 『천문유초』에서는 이 별자리에 대해 이렇게 적었다. "소미성은 사대부의 별자리로 달리 처사라고도 부르며, 별들의 이름은 맨 아래로부터 처사, 의사, 박사, 대부이다(少微 士大夫之位也 一名處士 一曰 南第一星處士 第二星議士 第三星博士 第四星大夫)."[121] 『석담일기』 상권, 「융경 6년 임신(1572)」, 『연려실기술』 권 11, 「명종조고사본말」[122] 『시암집』 권 14, 「격암남선생묘갈명(格庵南先生墓碣銘)」, 선조 초기 관상감 천문교수로 임명되어 벼슬에 나아갔다가 병이 들어 사망했으니, 이 때가 융경 신미년(1571) 12월 3일이요 향년 63세였다.(穆陵初除天文學敎授。就職尋病卒。卽隆慶辛未十二月三日。而壽六十三。)[123] 남평 조씨. 위에서 언급된 조차산을 낳았다. 남명이 모친의 삼년상 이후 김해에서 합천으로 거처를 옮기려 할 때 김해에 남아있겠다고 하여서 계속 그 곳에서 살았다. 이후 남명은 합천에서 송씨를 부실로 맞이하여 그녀와의 사이에서 세 아들을 얻었다.[124] 출처: 허권수, 『절망의 시대, 선비는 무엇을 하는가』, 한길사[125] 여담으로 남명이 병풍에 정명도를 그려넣은 것과 관련하여서, 그가 정이천보다 정명도의 영향을 더 많이 받았음을 연구한 논문이 있다.[126] 그 후로도 두 사람의 우정은 변치 않았다. 조식이 병중에 있거나 연말이 되면 이준경은 약이나 달력을 챙겨 보내고, 성리학 관련 서적도 보내주면서 안부를 묻기도 하였다.[127] 이 묘갈문을 본 남곤은 남명의 문장이 고문의 법도에 맞고 정자(程子) 집안 조상들이 전기를 쓰는 방식이라고 평하였다고 하는데, 이는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 묘갈문이 쓰여진 가정 7년은 1528년인데 남곤은 그보다 1년 전인 1527년에 사망하였기 때문이다.[128] 관련된 링크는 『무민당선생문집』 권 5, 「남명선생연보」, 『남명집』 권 1, 「아들을 잃고(喪子)」[129] 참고로 이 뒷산은 중국국제항공 129편 추락 사고가 일어났던 김해 돗대산이다.[130] 여류시인으로 유명한 이옥봉의 남편이기도 하다.[131] 이언적이 남명을 헌릉참봉에 천거한 적이 있었으나 남명은 이를 거절하였고, 또 이언적이 경상감사가 되어 남명과 만나고자 하였을 때에도 이언적이 벼슬에서 물러나 귀향하였을 때 찾아도 늦지 않을 것이라고 답하는 편지를 보내며 거절하였다.[132] 여담으로 송인수의 형은 송구수이고, 송구수의 증손자가 바로 우암 송시열이다. 즉 송시열에게 규암 송인수는 종증조부인 셈.[133] 남명과 같은 이유로 이언적을 비판한 대표적인 인물로는 율곡 이이가 있다. 이들과는 반대로 이언적이 을사사화 때 추관을 맡으면서 사림을 심문하기는 하였으나, 연루된 사림의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노력하였다고 보는 인식도 있다.[134] 「해관서문답」 관련 참고자료, 「관서문답」과 「해관서문답」 관련 논문[135] 『선조실록』 1권, 선조 즉위년(1567) 11월 17일 무진 첫번째 기사[136] 『석담일기』 상권, 「융경 6년 임신(1572)」, 젊었을 적에 조식이 를 보고 "이 사람이 뜻을 얻으면 반드시 시사(時事)를 그르치리라" 말하였고, 대승 또한 조식을 유자(儒者)로 여기지 않으며 서로를 용납하지 않았다. 대승이 조식의 과실을 말한 까닭에 조식의 학도들은 대승을 미워하였다(少時曺植見之曰。此人得志。必誤時事。大升亦以植爲非儒者。兩不相許。大升言植過失。故植之學徒惡之。)"[137] 신경진과 이귀에게 보낸 편지에서는 '행장(行狀)'이라 쓰여 있고(此說見於成大谷所製南冥行狀), 편지와 같은 내용이 일부 실린 정철의 행록에는 행장 대신 '묘비문(碣文)'이라 쓰여 있으므로(此說見於成大谷所製南溟碣文) 이와 같이 쓴다.[138] 『대곡집』 下卷, 「남명선생묘갈(南溟先生墓碣)」, "글재주는 있으나 과거에 급제하지 못한 선비가 있었는데, 사람됨이 음험하고 (타인을) 시기질투하며 어진 이를 원수보듯 하였다. 여러 사람이 모인 자리에서 공(조식)이 이 사람(선비)을 만났는데 (모임에서) 물러나온 후 벗들에게 이야기하길, '내가 그의 얼굴을 살펴보니 사람됨을 알겠더군. 외모는 당당하고 듬직해보이나 속으로는 남을 해칠 마음을 품고 있어. 이 사람이 벼슬을 얻어 자신의 뜻을 펼치면 착한 사람들이 위태로울 것일세!(又有士子。有文才未第。其人陰猜媢嫉。仇視賢人。公偶見於群會中。退而語友人曰。吾察於眉宇之間。而得其爲人。貌若坦蕩。中藏禍心。如使得位逞志。善人其殆乎。)' 라 하였다"[139] 앞서 김장생이 신경진과 이귀에게 보낸 편지에서 언급한 남명의 행장과 마찬가지로 성운의 문집에 없는 글이다. 이 행록이 『대곡집』에 수록된 남명의 묘갈문을 이르는 것인지, 아니면 묘갈문과 약간 내용이 다른 행록이 따로 있었으나 현재 전해지지 않는 것인지는 불명.[140] 『기암집』 권 12, 「만술(漫述)」, 성대곡이 지은 「남명행록」[139]에 이르길, 공(조식)이 두류산을 유람할 때 어느 소년을 만나고 다른 사람에게 "(그 소년은) 음험하고 남을 시기질투하며 착한 사람을 마치 원수 보듯 하는 것이 뒷날 뜻을 얻으면 선한 사람들이 화를 입을 것이다" 라 말하였다고 한다. 후인들이 간혹 기고봉을 (남명이 언급한 어느 소년이라고) 지목하며 의심하는데, (지목된 대상이 기대승이라고 의심하는) 그 근거가 뭔지 모르겠으니 참으로 괴이하다!(成大谷作南冥行錄。有云公遊頭流時。遇一少年。語人曰。陰猜猖嫉。仇視善人。後日若使得志。善類赤矣。後人或疑其指奇高峯。而不知何所據也。可怪。)[141] 제자 오건에게 보낸 편지에서 "입으로 성리를 말하고자 하면 어찌 남들보다 못하겠냐만, 그에 대해 기꺼워하며 말하고 싶지가 않다" 라고 쓰기도 했다.[142] 『남명집』 권 2, 「해관서문답」, 耳目口鼻之發。雖聖人亦同。同一天理也。流於不善而後。方可謂之欲也。但有人心道心之別者。有形氣義理之間已。故不曰人欲。曰人心。[143] 1898년에 후산 허유와 함께 진주 청곡사에서『남명집』 의 교열을 맡기도 했다.[144] 『면우집』 권 149, 「남명조선생묘지명(南冥曺先生墓誌銘)」, 如以心之未發爲性。已發爲情。而其發也四端七情。有理發氣發之分。旋曰耳目口鼻之欲。同出於天理。[145] 다만 곽종석의 글 중 “이목구비의 욕망은 천리에서 함께 나온 것이다” 부분의 출처는 앞서 언급된 「해관서문답」의 글인 듯 한데, 맨 앞의 사단칠정 부분의 언급은 출처가 어디인지 현재까지 알 수 없다.[146] 관련 기록은 『명종실록』 33권, 명종 21년(1566) 10월 7일 갑자 첫번째 기사, 『남명집』 권 4, 「행장(行狀)」[147] 원문번역문[148] 鄭師賢. 초명은 鄭思賢이다. 조식의 매부이자 그 문하에 출입하기도 하였다. 그가 1555년에 죽었을 때 조식은 "젊었을 때 문장의 성취는 미진하였으나, 그 부친의 업은 넉넉히 할 수 있었다"라는 묘갈문을 썼다. 정사현의 부인 즉 조식의 여동생도 죽은 남편을 정성껏 애도하다가 세상을 떴고, 이후 나라에서 정려비가 내려졌다.[149] 고분군이 있는 지산리의 옛 이름이다.[150] 寸이 番으로 기록되어 있는 곳도 있다.[151] 『남명집』 권 1, 「정사현의 사랑채에서 짓다(題鄭思玄客廳)」. 여기서는 해당 시의 절반만 인용하였다.[152] 산청군 단성면에 있던 단속사 밑을 흐르는 개울 이름[153] 단속사를 말한다. 현재는 만 남아있다.[154] 단속사지 앞에 심어져 있던 매화나무. 고려 말에 강회백이 심었는데, 그의 벼슬이 정당문학인 것에서 정당매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수령이 640여 년에 이르렀지만 2014년에 완전히 고사하였고, 현재는 옆에 후계목을 심어서 관리하고 있다.[155] 『남명집』 권 1, 「유정산인에게 줌(贈山人惟政)」[156] 다만 권태훈 계열이 구봉 송익필에 대한 관심이 지대한 편이기 때문에 남명은 크게 언급되지 않는다.[157] 참고로 황희석은 이전에도 조국조광조에 비유하고 윤석열윤임, 윤원형에 비유했다가 한양 조씨 대종회로부터 항의를 받은 바 있다.[158] 조식 뿐만 아니라 경상남도 지역의 유학자들의 문집이나 고문헌들도 확인할 수 있다.[159] 덕산에 있는 남명의 묘소에는 이 비문을 새긴 묘비가 세워져 있다.[160] 이진상의 문인인 곽종석이 지은 묘비문으로, 1912년에 완성되었다. 남명과 관련된 비문 중 그 내용이 가장 상세하나, 일부 내용을 두고 면우와 남명의 후손 간에 갈등이 있었기 때문에 이 비문을 바탕으로 한 묘비가 세워지지는 못했다.[161] 광해군 9년(1617)에 지어졌고 이 문장을 바탕으로 신도비가 세워졌으나, 인조반정 이후에 헐렸다.[162] 인조반정 이후 남명의 후손들은 정인홍이 비문을 지은 남명의 신도비를 철거하면서 이를 대신하기 위한 신도비문을 조경과 허목, 송시열, 김상헌 등에게 의뢰하였다. 조경이 지은 신도비문에서는 남명과 퇴계 사이의 갈등을 최대한 무마하려는 모습을 보인다. 여담으로 이 비문을 바탕으로 한 신도비가 세워진 적은 없다.[163] 용주 조경과 마찬가지로 인조반정 이후 남명 후손들의 의뢰로 지어졌다. 이 비문을 바탕으로 한 신도비가 덕산에 세워졌으나, 앞서 이야기했듯 1926년에 헐려서 묻혔다.[164] 조경, 허목과 마찬가지로 인조반정 이후 남명 후손들의 의뢰로 지어졌다. 전체적으로 허목의 신도비문보다 그 내용이 자세하다. 이 비문을 바탕으로 한 신도비는 남명의 고향인 합천에 세워졌는데, 덕산에는 이미 허목의 비문을 바탕으로 세워진 신도비(덕산비)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후 덕산비가 1926년에 헐리면서 합천에 있는 신도비와는 별개로 이 비문을 새긴 새로운 신도비가 덕산에 세워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