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식(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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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선 중기 남명학파를 창시한 유학자. 본관은 창녕(昌寧), 자는 건중(楗仲). 호는 남명(南冥), 방장노자(方丈老子), 방장산인(方丈山人), 산해선생(山海先生)이고 시호는 문정(文貞).'''內明者敬 外斷者義'''
사림의 계보와 붕당을 설명할 때 '''북인의 시조''' 중 한 사람으로 빠지지 않고 거론되는 조선 성리학의 거두이다.
2. 생애
연산군 7년(1501) 음력 6월 26일 진시[9] 삼가현 토동[10] 에 있는 외조부 이국(李菊)의 집에서 태어났다. 부친은 조언형이고 모친은 인천 이씨[11] 이다.
당시 점잔을 떨던 조선의 사정에 비추어보았을 때 철저히 의(義)를 중시하고 현실 정치를 강하게 비판하여 파장을 일으킨 인물이다. 현재는 권력자들을 배출하여 후대까지 학파를 보존한 퇴계 이황과 율곡 이이에 비해 인지도가 낮지만 당대에는 그들에 비견되는 명성을 떨쳤으며 진주를 중심으로 한 서부 경상남도 권역에서는 이황에게 밀리지 않는 위상을 가지고 있다.[12]
학문 공부를 즐기던 성품으로 유년기부터 유교 경서 이외에도 스스로 제자백가, 불교, 노장사상, 천문, 지리, 의학, 병법, 궁마 등 다양한 분야의 학문을 섭렵했다.[13] 어릴 때에는 부친이 벼슬살이를 하던 영향으로 한양과 단천 등을 오가며 생활하였고 25세 때 『성리대전』에서 원나라의 유학자 노재 허형의 글[14] 을 읽고 학문의 방향과 출처관[15] 을 정하여 성리학을 집중적으로 공부하였다.
부친이 사망하고 삼년상을 치른 후 처가가 있는 김해[16] 로 거처를 옮겼다. 김해에서 지내던 이 시기에 과거시험을 단념하여 스스로의 학문에 힘썼고 이후 합천[17] , 덕산[18] 을 거쳐서 생활하였다. 그 사이에 높은 학문으로 여러번 벼슬길에 오를 것을 권유받았으나 자신의 출처관에 따라 한 번도 벼슬에 나서지 않고 평생을 산림처사로 지내며 학문을 닦고 제자들을 양성했다.
별명은 '칼 찬 선비'. 이는 경의검(敬義劍)이라고 하는 칼을 차고 다닌데서 유래되었다. 칼에는 "안으로 밝히는 것은 경이요, 밖으로 결단케 하는 것은 의이다(內明者敬 外斷者義)"라는 글이 새겨져 있었는데 칼을 수양 도구로 삼아 안으로는 거울과 같은 마음(敬)을 유지하고 밖으로는 과단성 있는 실천(義)을 이룩하고자 하는 각오를 보여주는 것이었다. 이처럼 내면의 수양(敬)과 수양한 바의 실천(義)을 함께 중시하는 모습이 조식과 그 학맥의 특징이었다.[19]
칼 찬 선비라는 별명과 실천을 중시하였던 학풍처럼 조식은 과단성있는 행동가이자 거침없는 과격파였다. 그래서 평생 벼슬을 거절하고 처사 생활을 하면서도 시사에 관심을 두어 현실에 날선 비판을 많이 가했다. 그와 관련된 대표적인 글이 바로 명종 때 올린 단성소[20] 이다. 상소에서 조식은 명종을 "선왕의 외로운 후사(孤嗣)"[21] , 문정왕후를 "깊숙한 궁궐의 한 과부"라고 공개 비판하였는데, 벗이었던 성수침[22] 이 아직 학문이 원숙하지 못해 이런 과격한 상소를 내밀었다고 평을 할 정도였다. 당시 서슬시퍼런 문정왕후의 권세와 전횡을 보면 이러한 일침은 용감한 것을 넘어 미쳤다는 말 밖에 나오지 않는다.
명종이 하도 기가 차서 "아무리 임금이 어질지 못하기로서니 욕을 퍼부어서야 되냐?"며 분개해 조식을 죽이려 들었지만 시골의 무식한 선비를 함부로 죽이면 언로가 막힌다 하여 결국 죽이지 못했다. 오히려 『명종실록』에 기록된 조식은 찬양 일색인데 단성소가 올라갔을 때 사관이 논한 내용을 보면 당시 관직도 마다했던 조식의 평판이 얼마나 대단했는지 엿볼 수 있다.
다음은 그의 시 한 수. 내용 자체가 화끈하다.당시 유일(遺逸)[23]
이란 명성에 기대면서 공로와 명성을 도둑질하는 자가 많았다. 어질도다, 조식이여! 몸가짐을 조심스럽게 하고 절개를 지키면서 초야에 묻혀 있었으나, 난초의 향기가 저절로 퍼지듯 그 명망이 조정에 전달되어 이미 참봉에 임명되고[24] 또 주부[25] 에 임명된 것이 두 번 세 번에 이르렀지만 이미 모두 머리를 저으며 거절하였다. 지금 오마(五馬)의 직위[26] 에 임명된 것은 영광스러울 뿐만 아니라 이를 제수한 (임금의) 은혜가 특별하다고 말할 만한데도 안빈함을 스스로 즐기며 끝내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았으니 그 뜻이 가상하다. 그럼에도 조식은 과감하게 세상을 잊어버리지 못하였기에 상소문을 올려 절개를 가지고 항의하며 당시의 폐단을 극력 논하였으니, 글이 매우 간절하면서도 뜻이 곧았을 뿐만 아니라 시대와 변란을 근심하여 우리 임금의 덕을 밝히고 백성들을 새롭게 하고자 하였고[27] , 풍속과 교화가 왕도정치에 이르기를 바랐으니, 나라를 걱정하는 그 정성이 지극하다 하겠다.[28]
이같은 대범한 행동은 오히려 할 말 못하고 숨죽이던 선비들에게 큰 반향을 얻어, 재야에 있던 그에게 더 많은 인재들이 찾아와 배움을 청했다고 한다. 이리하여 그의 명성은 갈수록 높아지고 마침내는 그의 호를 딴 남명학파가 형성되기에 이른다.'''全身四十年前累'''
온 몸에 쌓인 사십년 허물
'''千斛淸淵洗盡休'''
천섬들이 맑은 물에 씻어 없애리
'''塵土倘能生五內'''
그래도 오장에 티끌이 생기면
'''直今刳腹付歸流'''
한편 그는 일본과 왜구를 경계하면서 그들에 대해 강경한 태도를 보였다. 한때 김해에서 살았던 경험[30] 과 그의 중장년기에 일어난 사량진 왜변, 을묘왜변 등의 요소가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였다. 때문에 그는 일본과 왜구에 대해 단호하게 대응할 것을 주장하였고, 역관과 조정의 내시들이 뇌물을 받고 이들과 결탁하는 행위를 비판하였으며, 제자들을 가르치면서 왜구를 방비할 대책을 주문하는 문제를 출제하기도 하였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이와 같은 그의 일본에 대한 인식은 제자들에게도 영향을 주어, 훗날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그들이 신속하게 의병을 일으키는 한 요인이 되었다.(전략) 섬 오랑캐가 난리를 일으키고 있다. (중략) 아무런 까닭 없이 남의 나라 장수를 죽이고, 나쁜 마음을 품고서 우리 임금의 위엄을 모독하였다. 제포를 자신들에게 돌려달라는 것은 조정의 의사를 시험하는 것이고, 대장경을 30부 인출해 가겠다는 것은 반드시 얻고자 함이 아니라 우리를 한번 우롱해본 것이다. 손뼉을 치면서 뺨을 튀기거나 지팡이를 잡고서 눈을 부라리며 '''"반드시 네 모가지를 뽑아버리겠다(必拔爾之項)"''' 라고 말하면 비록 삼척동자일지라도 그것이 공갈하는 것인 줄 알게 된다.
헌데 당당한 우리 조정에서는 재상과 장수들이 대책을 마련해야 함에도 저들의 허세에 벌벌 떨면서 어떻게 할 줄을 모르고 어찌 '상중이어서 정사를 논하지 못한다.'고 거짓 핑계를 대고 있는가? 이런 때에 적을 제압하자는 주장도 적의 공격을 막는 계책도 없단 말인가. 송의 한기(韓琦)처럼 (서하의) 조원호가 보낸 사신의 목을 도성 문밖에서 베기를 청하지는 못할지라도, 세상을 어지럽히는 도적에게 예물을 주라는 명을 내리는 것이 어찌 옳은 일이겠는가?(중략)
오늘날 역관들이 임금의 명을 전하는 것은 그 옛날 사신들이 외국에 나가 국가의 일을 전임하는 것과 같다. 왜인들이 우리 조정의 의도를 알고자 하여 (역관들에게) 끝없이 쌓일 정도의 금은이며 서각, 진주 등을 뇌물로 뿌리면, 역관들은 왕명을 출납하는 승전내시들에게 (왜인들이 뿌린 뇌물을) 나누어주니, 조정 대신들이 용상 앞에서 (왜구들에 대처할 방안을) 적극 논의하여도 그 기밀들이 이미 오랑캐들에게 새어나가게 되는 것이다.
나라 안에서 일개 역관이나 내시같은 천한 무리들의 (뇌물을 받고 기밀을 누설하는) 행위를 금하지 못하는데 어찌 외부의 교활하고 흉악한 오랑캐들을 제어할 수 있으리오. 그렇기 때문에 이 나라에 인재가 없는 것이다. 오히려 왜적들이 이 나라에 들어와 무인지경으로 휩쓸고 다니는 것이 이미 늦었으니[31]
, (이 나라가) 그들의 침략에 곤욕을 치르는 것도 당연한 일이라 하겠다.허나 임금이 화를 벌컥 내며 위엄을 더하려 하면 '변방의 오랑캐를 도발해서 괜한 일을 일으킨다.'라 하고, 역관의 목을 베어 기밀을 누설한 죄를 다스리고자 하면 “온건한 말로 대응하느니만 못하다”고 한다. 이러하니 왜적들에 대응할 말이 나오지 못하는 것이요, 또한 그들을 방비할 대책이 없는 것이 아니겠는가? 내 이에 대한 계책을 (그대 제자들에게서) 듣고자 한다.[32]
환갑이 넘자 그는 지리산[33] 기슭 덕천동으로 이주해 산천재를 지어 10년 동안 강학에 힘썼다. 이 기간 중인 명종 21년(1566), 그는 명종의 부름을 받아 상경[34] 하여 임금에게 학문과 정치의 도를 논하였으나[35] , 벼슬[36] 을 사양하고 7일 만에 지리산으로 돌아왔다. 명종의 뒤를 이은 선조도 조식의 고명함을 듣고 즉위 직후부터 그를 초빙하였으나[37] , 그때마다 벼슬을 거절하고 임금에게 상소하였다. 이 시기에 적은 상소문 중 선조 1년(1568)에 올린 「무진봉사(戊辰封事)」는 서리들의 폐해를 논한 '''서리망국론(胥吏亡國論)'''으로 유명한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이후에도 두어 차례 조정의 부름을 받았으나, 그때마다 벼슬을 사양하고 당시의 폐단을 간하는 상소들을 올렸다.군민의 정치와 나라의 여러 사무가 모두 도필리(刀筆吏)의 손에서 나옵니다. 이들은 대가를 주지 않으면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안으로 재물을 모으면서 밖으로는 백성들을 흩뜨려 열에 하나도 남지 않게 만듭니다. 심지어 이들은 각자 주와 현을 나누어 사유물로 삼고 이를 문권(文券)으로 만들어서 자기 자손들에게 전하기까지 합니다. 뿐만 아니라 백성들이 공납으로 바치는 토산물들도 모두 물리쳐서 납부하지 못하게 합니다. 그러면 공납품을 바치는 사람들은 구족의 것을 모으고 가업을 모두 팔아넘겨 관아가 아닌 (아전들의) 사삿집에 내는데, 이때 본래 값의 100배가 아니면 받지도 않습니다. 그 뒤로도 계속 이렇게 납부할 수 없게 되니 빚을 지고 도망가는 사람이 줄을 잇습니다.
조종(祖宗)의 주현 백성들이 바치는 공납을 새앙쥐 같은 놈들이 나누어가질 줄 어찌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전하께서 누리시는 온 나라의 부(富)가 이들이 방납한 물자에 의지한 것일 줄 어찌 상상이나 하셨겠습니까? 왕망이나 동탁처럼 간악한 놈들도 이러지는 않았고, 망할 나라의 세상이라도 이런 적은 없었습니다. 이들은 이러고도 만족하지 못해서 국고의 물건까지 다 훔쳐내니 비축된 것은 아무것도 없고 나라꼴은 말이 아니게 되었으며 도성에는 도적들이 가득합니다.
나라가 한갓 텅 빈 그릇처럼 앙상하게 서 있습니다. 온 조정의 사람들은 목욕재계하고 마음을 가다듬어 이들을 쳐야 할 것이며, 힘이 모자라다면 사방에 명령을 내리시어 사람들을 불러모아 침식의 겨를도 없이 분주하게 임금님을 돕게 하시옵소서.[38]
선조 5년(1572) 음력 2월 8일, 덕산의 산천재에서 72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사망으로부터 약 2개월 전에 발병한 등창이 직접적인 사인이었다. 죽음에 임하여 제자들에게 자신의 사후 칭호를 '''처사(處士)'''[39] 라고 할 것을 당부하였으며[40] , 방의 벽에 붙여두었던 경(敬)과 의(義) 두 글자를 가리키며 그 중요성을 강조하였다고 전해진다.[41]
사후 사간원 대사간[42] , 영의정[43] 등에 추증되었지만 문묘에는 종사되지 못하였다.[44] 후학들은 덕천서원[45] , 회산서원[46] , 신산서원[47] , 백운서원[48] 을 건립해 스승의 업적을 기렸다.
3. 남명학파의 흥망
조식의 남명학파는 경상우도 지역을 중심으로 형성되었으며, 이황의 퇴계학파와 더불어 영남 지역의 학풍을 양분하였다. 퇴계학파가 성리학의 이론적 심화를 중시했다면, 남명학파는 성리학의 학문적 실천과 의(義)를 중시한 것이 특징이다.
남명학파를 계승했다고 공인되는 인물로는 정인홍과 곽재우[49] , 최영경[50] 이 있다. 그 외에 남명과 퇴계 이황을 공동스승으로 모시고 공부한 제자들도 있었는데, 김우옹[51] , 김우굉[52] , 정구, 오건[53] , 정탁, 김면[54] , 김효원[55] 등이 대표적인 인물들이다.
조식이 죽고 3년 후 동서분당이 일어났을 때. 그의 제자들은 서경덕, 이황의 학맥과 함께 동인으로 모여 서인과 대립했다. 이후 동인들은 정여립의 난으로 촉발된 기축옥사로 큰 피해를 입었는데, 이때 조식 학맥과 서경덕 학맥의 피해가 특히 컸다.[56] 그로부터 2년 후, 옥사를 지휘한 정철이 세자 건저의(建儲議) 문제로 실각하자 그의 처리문제를 두고 동인은 남북으로 분열하였다. 이때 정철에 대한 강경한 처벌을 주장했던 조식 계열(& 서경덕의 후학 약간)은 북인, 온건한 처벌을 주장했던 이황의 후학은 남인에 다수 참여한다.[57]
훗날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남명의 제자 중 정인홍[58] , 곽재우, 김면[59] 등은 의병을 일으켜 명성을 떨쳤다.[60] 이는 생전에 일본과 왜구에 대해 경계하면서 제자들에게 대책을 주문하였던 스승 남명의 영향이 컸다. 북인은 임진왜란 때 의병활동으로 조선왕조를 위기에서 구하는데 큰 역할을 하여 조정에 세력을 넓혀갔고, 마침내 정인홍이 류성룡을 실각시키면서 집권당이 되었다. 하지만 영창대군의 계승 문제를 놓고 북인은 대북과 소북으로 분열되었다.
광해군 즉위 이후, 대북의 영수가 된 정인홍은 스승인 조식을 추존코자 하였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회퇴변척소」로 인해 청금록 사건 등을 일으키면서 정적들을 늘렸고, 남명학파 내부에서도 일부 분열이 일어났다.[61] 애초에 남명학파는 퇴계학파나 율곡학파에 비해 학술적인 구심점이 상대적으로 미약했기에[62] 이러한 분열은 뼈아픈 것이었다. 설상가상으로 대북세력도 영창대군과 인목대비의 문제를 놓고 다시 골북, 중북, 육북으로 분열되는 사태가 벌어진다.
이후에 인조반정이 일어나면서 대북세력의 사상적 기반이라는 이유로 남명학파에도 철퇴가 가해진다. 그 결과 88세의 노인인 정인홍이 참형에 처해지면서 남명학파는 사실상 몰락하였고[63] , 학문적 근거지였던 경상우도 지역에 대한 그들의 영향력 또한 줄어들었다. 이러한 이유로 이후 경상우도 지역에는 다른 지역의 여러 학맥들이 들어왔는데, 19세기를 기준으로 영남 남인인 한주 이진상[64] 의 한주학파와 전라도 지방의 노사 기정진의 노사학파, 그리고 근기 남인인 성재 허전의 학파 등이 대표적이었다. 비록 인조반정으로 지리멸렬하게 되었다지만, 본래 이 지역에서 명맥이나마 잇고 있던 남명학파 또한 이들과 공존하면서 학맥을 따라 남인이 되거나 조식의 일부 종친들을 중심으로 서인-노론이 되기도 하였다.[65]
4. 남명 조식과 퇴계 이황
생몰연도에 나와있는 것처럼 남명과 퇴계는 동갑내기로[66] , 생전에 일종의 라이벌 플래그를 형성하였다.[67] 그도 그럴것이 두 사람은 기질과 문체, 출처관, 학문관 등 여러 측면에서 서로 달랐기 때문이었다.
기질 면에서 퇴계가 온후한 문사였다면 남명은 칼 찬 선비라는 별명답게 상무적인 호걸풍이었다. 그래서 퇴계의 행동거지가 조심스럽거나 신중한 경우가 많은데 비해 남명의 행동은 분명하고 단호하였다.[68] 이는 문체에서도 반영되어, 퇴계가 당송 이후의 순후한 문체를 즐겨쓴데 비해 남명은 『춘추좌씨전』이나 유종원의 글과 같은 남성적 문체의 고문을 좋아하였다.[69]
이러한 기질의 차이는 대외관계를 보는 시각에도 반영되었는데, 일본에 대한 태도의 차이가 대표적이었다. 사량진 왜변 이후 대마도 측에서 다시 교류를 요청해왔을 때, 퇴계는 그들의 사신을 물리치지 말고 강화를 하자는 상소를 올렸고[70] , 조정의 명으로 무로마치 막부의 쇼군과 대마도주에게 보내는 답서를 쓰기도 하였다.[71] 이에 비해 남명은 단성소에서 일본에 대해 단호하게 대응할 것을 주장하였고, 군대와 군량을 넉넉히 하여 국방을 강화할 것을 역설하였으며[72] , 제자들에게 왜구들을 방비할 대책을 낼 것을 주문하였다.[73]
출처관에서도 서로 차이가 있었다. 퇴계가 벼슬을 여럿 지냈음에도 학문 이론을 중시하고 현실정치의 비판에는 가급적 거리를 뒀다면, 남명은 자신의 출처관에 따라 벼슬은 멀리 해도 현실정치의 비판에는 앞장서는 태도를 보였다.[74] 이 과정에서 서로 간에 출처관의 차이를 드러내는 서신들[75] 이 오고간 적이 있었고, 인물에 대한 평가를 달리하기도 하였다.[76]
학문 면에서는 더욱 그 차이가 드러난다. 퇴계가 상대적으로 성리학의 이론적 심화를 중시했다면, 남명은 성리학의 이론이 이미 염락제현(濂洛諸賢)[77] 을 통해 다 갖추어졌으므로 남은 것은 하학이상달(下學而上達)[78] 을 통한 학문적 실천에 달렸다고 보았다. 이것은 동갑인 두 사람의 성격이나 기질 이외에 서로가 계승한 학풍의 세대차이에서 비롯된 것이기도 하였다. 남명이 『소학』과 학문적 실천을 중시한 김종직, 정여창, 김굉필, 조광조의 학풍을 계승했다면, 퇴계는 조선 성리학의 이론적 심화를 시작한 이언적[79] 의 학풍을 계승하였기 때문이었다.[80] 이 과정에서 퇴계와는 서로의 인식차이를 보이는 편지를 주고받기도 하였으니, 퇴계와 고봉 기대승 사이의 사단칠정논변을 비판하는 아래의 편지가 바로 그것이다.
즉 기본도 서있지 않은 당시 유생들이 사단칠정논쟁으로 아는 척만 하며 헛바람이 든 모습을 비판하는 내용이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퇴계의 책임을 거론하는 편지를 제자 오건에게 보내기도 하였다.'''요즘 공부하는 자들을 보건대 손으로 물뿌리고 비질하는 절도도 모르면서 입으로는 천리를 담론하여 헛된 이름이나 훔쳐서 남들을 속이려 하고 있습니다. 그러다 도리어 남에게서 사기나 당하고 그 피해가 다른 사람에게까지 미치니''' 아마 선생같은 어른이 꾸짖어 그만두게 하시지 않기 때문일 것입니다. 저같은 사람은 마음을 보존한 것이 황폐하여 배우러 찾아오는 사람이 드물지만, 선생같은 분은 몸소 상등의 경지에 도달하여 우러르는 사람이 참으로 많으니 십분 억제하고 타이르심이 어떻겠습니까? 삼가 헤아려 주십시오.[81]
남명이 성리학의 실천이란 측면에서 퇴계를 비판하였다면, 퇴계는 주로 성리학의 순수성이라는 입장에서 남명을 비판하였다. 퇴계가 이단이라 생각되는 학문들을 배척한 반면 남명은 노장사상을 비롯한 제자백가와 불교, 도교의 내단학, 병법 등 여러 학문에 개방적인 태도를 취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남명에 대한 퇴계의 비판은 주로 그가 노장사상을 좋아했던 것에 집중되었다. "우리 학문에 있어 의리가 투철하지 못하고 노장의 빌미(老莊爲祟)가 있다"[84] , "그 논설의 광탕현막(曠蕩玄邈)함은 노장의 책에서도 보지 못했다"[85] , "장주의 견해에서 한층 더 나아갔다"[86] , "남화의 학문을 주창한다"[87] 라는 내용이 바로 그것이다.요즘 세상에서 숭상하는 것을 자세히 보니, 당나귀 가죽(驢鞹)에 기린의 모형을 뒤집어 씌운 것 같은 모습이 고질이 되었습니다. 온 세상이 그러하여서 혹세무민하는데 급급하니 비록 큰 현인이 있다고 하더라도 이미 구제할 수 없을 지경입니다. 이는 실로 사문(斯文)의 종장인 분이 상달(上達) 만을 주장하고 하학(下學)을 궁구하지 않아서 구제하기 어려운 습속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내 일찍이 그와 서신[82]
을 통해 논란을 주고받았지만 돌아보려 하지 않았습니다. 공은 지금 이 폐단이 수습하기 어려운 것임을 몰라서는 아니됩니다.[83]
또한 퇴계는 남명의 성정이나 호방한 태도에 대해서도 비판을 가했다. 남명의 사람됨을 두고 "고상하고 뻣뻣한 사람(高亢之士)"[88] 이라고 하거나 다른 사람의 조식에 대한 평을 빌려 "기이한 것을 숭상하고 좋아하여 중도를 지키기 어렵다"[89] 라고 굳이 쓴 일도 있었고, 단성소를 두고는 "남명이 비록 스스로 성리학으로 자부하지만 사실은 기이한 선비일 뿐이라. 그 논의와 식견은 매양 새롭고 기이한 것을 높이 여기고 세상을 놀라게 하는 논의에만 힘쓰니 이 어찌 도리를 아는 사람이겠는가?"[90] 라고 논하기도 하였다.[91]
학문에서의 차이는 독서와 저술의 차이로도 연결된다. 퇴계는 독서를 할 때 경전의 구절 하나하나를 이해하는데 신경을 썼지만, 남명은 경전의 큰 줄기를 파악하면서 자신에게 절실한 부분을 받아들일 뿐 난해하거나 덜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부분은 대강 지나가는 타입이었다.[92] 성리학의 이론적 심화에 중점을 둔 퇴계가 경전에 자세한 주석을 달면서 활발한 저술활동을 하였다면, 성리학의 학문적 실천에 중점을 둔 남명은 경전의 내용 중 절실하다고 느끼는 부분을 뽑아 독서노트[93] 를 만들었고, 굳이 저술을 하더라도 퇴계의 『성학십도』에 비해 간결하고 전투적인 수양방식을 제시한 『신명사도(神明舍圖)』[94] 를 짓는 정도에 그칠 뿐 기록을 많이 남기지 않았다.[95]
제자들을 교육하는 방법도 서로 달랐다. 퇴계는 강학을 할 때 책의 세세한 내용들을 빠짐없이 강론하는데 힘썼으나, 남명은 자신이 경서를 풀이해주는 것보다 제자들이 스스로 이해하고 체득하는 것을 중시하였다. 그랬기에 남명과 퇴계를 모두 스승으로 모시고 공부하였던 정구는 선조의 앞에서 두 사람의 학문하는 모습을 아래와 같이 비교하였다.
두 사람이 여인의 정절을 두고 간접적으로 다툰 일도 있었다.[97] 이정이란 사람이 죽은 친구 이희안의 첩을 음행죄로 고발한 것이 사건의 시작이었다. 경상도관찰사 박계현으로부터 사건을 인계받은 김해부사 양희는 사위 정인홍을 통해 남명의 자문을 얻고자 했다. 남명이 이정과 이희안 두 사람 모두와 가까운 사이였기 때문이었다. 이에 대해 남명은 "이정이 이희안 집안의 일을 고발한 것은 하종악의 후처 함안 이씨[98] 의 음행을 감추기 위함이다"라고 증언하였다.[99] 이로 인해 수사는 이희안의 첩에서 함안 이씨에게로 전환되었고, 이 과정에서 남명은 이정과 절교하였다.[100] 결국 함안 이씨에 대한 수사는 증거불충분으로 인해 무혐의로 끝났고, 증언을 한 남명의 처지가 곤란해졌다.[101] 그리고 이 사건은 남명의 제자 각재 하항이 함안 이씨의 집을 헐어 그들을 쫓아내는 훼가출향을 저지르면서 전국적으로 공론화된다.[102] 이후 퇴계가 친구 사이에 그만한 일을 가지고 절교하는 것은 자신으로서는 이해하기 어렵다는 내용의 편지를 이정에게 보냈고[103] , 이 글이 1600년 『퇴계집』을 간행하는 과정에서 알려지게 되었다. 이에 남명의 수제자인 정인홍은 「발남명집설」[104] 과 「정맥고풍변」[105] 및 「회퇴변척소」[106] 등의 글을 통해 이황을 대대적으로 비난하였다.[107] 서인 측에서도 이용하는 듯한 모습을 보인[108] 이 사건은 이후 남명학파의 내부 분열로까지 이어졌고[109] , 심지어 훨씬 뒤에 허목이 쓴 남명의 신도비인 덕산비의 내용과 그 비의 철거 문제[110] 와도 관련되는 등 오래도록 지속적인 영향을 미쳤다.이황은 도량이 너그럽고 실천함에 독실하며 공부는 순수하면서도 깊이가 있고 그 순서가 분명하니 배우는 사람이 쉽게 들어갈 수 있습니다.
조식은 도량이 엄정하고 재기는 호매하며 초연히 자득하여 우뚝 서 자기 갈 길을 가니 배우는 사람이 요령을 잡기 어렵습니다.[96]
훗날 퇴계가 죽었을 때, 남명은 “이 사람이 세상을 버렸다 하니, 나 또한 세상에 살아 있을 날이 오래지 않겠구나!”라고 하면서도, 퇴계가 무덤에 비석을 세우는 대신 작은 돌에 퇴도만은진성이공지묘(退陶晩隱眞城李公之墓)[111] 라 쓰게 했다는 말을 듣자, "퇴계는 이 묘호를 감당하기에 부족하다. 평생동안 벼슬하지 않은 우리같은 사람도 은자라고 하기에 부끄럽거늘"이라 하였다고.[112] 어찌보면 대학자들의 인간적(?)인 면모랄까.
성호 이익은 『성호사설』에서 남명과 퇴계 두 사람을 나란히 두고 이렇게 평가하였다.
팬텀 하록의 웹툰 포천에서 두 사람의 관계를 간단명료하게 묘사해 놓았다.중세 이후 퇴계가 소백산 아래에서 태어나고, 남명이 두류산 동쪽에서 태어났다. 이곳은 모두 영남 땅으로, 상도(上道: 경상좌도)에서는 인(仁)을 숭상하고 하도(下道: 경상우도)에서는 의(義)를 주장하여 유학의 교화와 기개 그리고 절조가 넓은 바다와 높은 산과 같았다. 우리 문화의 빛은 여기서 극에 달하였다.[113]
이성무 前 국사편찬위원장이 남명과 퇴계의 관계를 정리한 글.
5. 야사 및 야담
- 이렇게 근엄한 선비였음에도 불구하고 일종의 벽이 있었는데, 화려하게 수놓은 솜이불을 수집하여 이를 전부 깔아놓고 관상하길 즐기는 것이었다. 어느 날은 친구 서경덕의 제자로 알고 지내던 토정 이지함과 고청 서기가 찾아와 일부러 그런 이불 위에서 냅다 뒹굴고 하는 기행을 벌였다고 한다.[114] 집에 돌아온 조식은 지저분해진 방을 보고 화내긴커녕 역시 토정이 한 짓이 분명하다며 호탕하게 웃었다고.
- 남명 조식과 화담 서경덕, 대곡 성운[115] , 토정 이지함에 얽힌 야담. 한 번은 이들 넷이 모여서 누가 더 잠을 오래 참는가 하는 시합을 벌이기로 하였다. 화담과 대곡은 일 주일을 버티다 잠에 들었고, 토정은 보름을 버티다 열여섯 날 만에 잠이 들었으나, 남명은 스무 날까지 버티다 잠에 들어 결국 승리했다고 한다. 이는 남명이 어릴 때부터 담력을 기르기 위해 극기훈련을 했다는 내용과 비슷한 맥락에서 나온 이야기로 보인다.
- 이덕무의 『한죽당섭필』에 따르면 본래 남명은 매우 검소한 사람이었다고 한다. 하루는 평소처럼 거친 베옷과 꾸미지 않은 말을 타고 들에 나갔다가 어느 장사꾼과 서로 길을 비키라고 말다툼을 벌였다. 결국 장사꾼이 남명을 밀어 말 아래로 떨어뜨리고 욕지거리를 하면서 떠나는 것으로 다툼이 끝났다. 남명은 "사군자가 옷차림이 허술하니 장사하는 놈에게도 업신여김을 당하는구나"라고 탄식하면서 그 뒤부터는 화려한 옷을 입고 좋은 말을 타며 수행하는 종을 다 호걸스럽고 건장한 사람들로 뽑았다. 그러자 사람들이 모두 길을 양보하고 감히 거스르는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고 한다. 이를 본 남명은 또 다시 탄식하면서 "사군자는 외모 꾸미기를 응당 이와 같이 해야 한다"라고 말하였다고. 그 뒤로는 너무 사치한 것으로 소문이 났다고 한다.(...) 당시에도 진주(晉州)ㆍ단성(丹城) 사람들이 성대하게 의복과 말을 단장하는 것은 대개 그의 유풍(遺風)이라고 전하고 있다.
- 퇴계 이황과의 라이벌 플래그에 관련된 관련한 민간의 야담. 공부를 마친 숫돌장수 남명이 어느 날 숫돌을 팔러 단성과 의령, 합천을 오가던 중 솟을령 꼭대기에서 점심을 먹고 있었다. 때마침 솥장수 퇴계가 의령에서 산청으로 가던 중 솟을령에서 남명과 마주쳤다. 도술을 부릴 줄 알던 퇴계는 남명에게 자신의 도술을 뽐냈지만, 마찬가지로 도술을 부릴 줄 알았던 남명이 더욱 수준 높은 도술을 보여주자 아연실색했다고. 이 민담은 당시 경상도권을 중심으로 한 남명 문하와 퇴계 문하의 경쟁구도를 도술이라는 이름으로 반영한 내용으로 볼 수 있다.
- 조선의 야담집인 『어우야담』에는 남명과 퇴계가 서로 색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내용이 있다. 퇴계가 “술과 여색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인데, 술은 그래도 참기가 쉽지만 여색은 가장 참기 어렵다.”라면서 소강절(邵康節)의 시를 인용하자, 남명은 자기 스스로를 여색에 있어서는 전쟁터의 패장과 같다고 응하였다. 이에 퇴계는 자신은 젊었을 적에는 아무리 해도 참을 수 없었는데 중년 이후에 제법 참을 수 있게 됨은 정력(定力) 때문인 것 같다고 대답하였다. 이때 동석하였던 구봉 송익필이 두 사람에게 아래와 같은 시를 지어 올렸다.
>옥 술잔과 좋은 술 모두 그림자가 없는데,
>雪頰微霞乍有痕
>눈처럼 흰 뺨에 엷은 노을은 살짝 흔적이 남았네.
>無影有痕俱樂意
>그림자가 없건 흔적이 있건 모두 즐길 만한 것.
>樂能知戒莫留恩
>즐거움을 경계할 줄 안다면 은애는 남기지 마소서.[116]
- 마찬가지로 여자에 얽힌 야담. 젊은 시절 보검, 준마, 미녀에 뜻을 두었던 남명은 보검과 준마는 얻었으나 오직 미녀만을 얻지 못하였다. 어느 날 강원도를 지나가다 빨래하는 예쁜 여자를 만났는데, 그녀는 남명에게 진짜 절세미인을 보고 싶으면 자신을 따라오라고 하였다. 그녀를 따라간 곳에는 웬 중과 음란하게 놀아나는 미녀가 하나 있었고, 남명은 두 사람이 잠들기를 기다렸다가 칼을 뽑아 그들의 목을 베었다. 그러자 빨래하던 여자가 남명에게 고맙다고 절을 하는 것이 아닌가. 자초지종을 들어본즉 남명이 죽인 여자는 본래 빨래하던 여자가 모시던 집안의 며느리였는데, 중과 눈이 맞아 불륜도 모자라 함께 시집 일가를 몰살시키는 패륜까지 저질렀다는 것이었다. 이에 느낀 바가 있던 남명은 말을 놓아주고 칼을 부러뜨린 후 공부에만 매진하여 훗날 대학자가 되었다고 한다.
- 꺽지와 관련된 민담이 있다. 한 번은 남명이 친구인 도구 이제신의 초대를 받고 덕천강에 갔다가 꺽지회를 대접받았다. 남명이 꺽지를 집어 한 입 깨물려 할 때 중종이 승하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원래 국상 때는 고기를 먹지 않는 것이 예법이었기에 남명은 입에 깨물던 꺽지를 바로 뱉어 강가에 던졌는데, 그로 인해 살아난 꺽지가 이후 새끼를 많이 쳐서 덕천강의 꺽지는 머리에 이빨자국이 있다고 하는 내용.[119]
- 『청야담수』라는 책에서는 남명이 그의 처제와 호랑이의 중매를 섰다는 야담이 전해지고 있다. 이 이야기에서의 남명은 처제와 호랑이의 사이에서 서로의 소식을 전하는 매개자의 역할을 맡고 있다.
- 조석주가 편저한 『백야기문』에 실린 야담에서는 배를 타고 가다가 윤원형에게로 가는 철과 구리를 강에 내다 버리게 하는 패기를 선보인다. 이 야담과 비슷한 맥락의 이야기가 벽초 홍명희의 소설 『임꺽정』에서도 나오는데, 이와 관련해서는 아래의 창작물 문단 참고.
- 이이의 『석담일기』와 그 내용을 인용한 이긍익의 『연려실기술』에 따르면, 격암 남사고가 "올해는 처사성[120] 에 광채가 없다"라 예언하였고 오래지 않아 조식이 죽었다고 한다.[121] 비록 이 내용이 그 당시를 살았던 율곡이 지은 『석담일기』에 들어있다고는 하나, 남사고는 남명보다 두달 전인 1571년 음력 12월에 죽었기 때문에[122] 여기서는 야담으로 분류하였다.
- 처사성과 관련된 또 다른 야담. 천문을 잘 보던 수암 박지화가 처사성이 빛을 잃어가는 것을 보고 동문인 토정 이지함에게 변고가 생길 것이라 생각하여 그의 집에 찾아갔다. 이에 이지함은 자신이 아니라 남명 조처사의 변고를 나타내는 것이리라 답했고, 얼마 안 있어 남명이 죽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 남명의 맏아들인 조차산(曺次山)에 대한 야담. 이야기에서 차산은 도술에 뛰어난 아이로 나오는데, 자식이 도술을 악용할 것이라 염려한 남명은 아이를 김해 집 뒷산에 굴을 파 감금하였다. 차산이 굴 속에서 탈출하려고 온갖 꾀를 쓰자 산도 함께 부풀어 올랐고, 이를 본 사람들이 갇혀있던 아이의 이름을 그 산에 붙여서 조차산이라 불렀다는 이야기이다. 허나 이는 야담일 뿐인데, 실제 조차산에 대한 이야기는 아래의 기타 문단 참고.
- 외손녀들의 혼인에 대한 야담. 남명에게는 본부인[123] 과의 사이에 낳은 딸이 하나 있었는데, 그 딸이 만호 김행에게 시집가 두 딸을 낳았다. 이후 남명의 중매로 큰외손녀와 작은외손녀는 각기 김우옹과 곽재우에게 시집갔는데, 중매를 설 때마다 외손녀들을 두고 남명이 했던 말은 “족히 군자의 배필이 될 만하다”였다. 헌데 이 외손녀들의 외모와 성격, 살림 솜씨에 약간 모가 났는지라 결혼생활에서 꽤 마찰이 있었다고 한다. 결국 버티다 못한 김우옹과 곽재우 두 사람은 스승인 남명을 찾아가 왜 이런 결혼을 주선했는지 따져 물었다. 이에 남명이 한 대답이 걸작이었다. “그렇게 거칠고 솜씨 없는 아이니까 군자다운 사람이라야 데려다 살 수 있는 거지. 내가 그대들을 군자 같은 사람으로 인정했으니까 이 혼사가 이루어지도록 한 것이다.” 이것이 옛 경상우도 지역에 남아있는 “중매할 적에는 건중(楗仲: 남명의 자)이도 거짓말 한다”라는 속담의 유래라는 일화.[124]
- 외손녀들의 혼인에 대한 또 다른 야담. 한 번은 남명이 큰외손녀 사위후보로 점찍은 정인홍과 김우옹을 시험하기 위해 소태나무의 껍질로 끓인 국을 마시게 했다. 정인홍이 소태국을 뱉은 반면 김우옹은 쓴 맛을 참으며 남김없이 다 마셨는데, 이에 남명은 김우옹을 큰외손녀 사위로 삼았다고 한다. 작은외손녀의 혼인에 대한 야담도 맥락이 비슷한데, 남명이 작은외손녀와 혼인하려고 몰려든 사내들을 시험하기 위해 소태국을 먹였더니 오직 곽재우 한 사람만 뱉지 않고 전부 다 마셨다고 한다. 어떻게 그 쓴 국을 다 먹었냐는 남명의 물음에 곽재우는 "국과 밥은 서로 섞여야 하기 때문에 입에 써도 다 먹은 것"이라고 답했다. 이에 남명은 곽재우를 작은외손녀 사위로 삼았다고.
6. 기타
- 경의검과 함께 성성자(惺惺子)라는 방울 한 쌍을 늘 차고 다녔다. 거동할 때 들리는 방울소리를 통해 늘 깨어있는 마음가짐을 유지하기 위함이었다.
- 죽기 전 경의검은 강직하고 불같은 정인홍에게, 성성자는 온화하고 부드러운 성격의 맏외손녀 사위인 김우옹에게 각각 물려져 학통을 이어받는 상징이 되었다. 허나 아쉽게도 지금은 둘 다 행방을 알 수가 없는데, 성성자는 김우옹 이후 행방이 묘연하고 경의검은 조식의 종손이 대대로 가지고 있다가 한국전쟁 이후에 분실하고 말았다. 현재는 분실 전에 촬영한 흑백사진을 기반으로 만든 복제품 경의검을 남명기념관에서 전시하고 있다.
- 연구에 따르면 경의검은 정인홍에게 전해진 것 외에도 네 자루가 더 있었다고 한다. 현재는 모두 행방이 묘연한 상태이다.
- 병풍에 손수 공자, 주돈이, 정명도[125] , 주희 네 사람의 초상화를 그려서 아침저녁으로 받들었다고 한다. 현재 이 병풍은 남아있으나, 세월 탓에 안의 그림을 알아보기 힘든 상태이다.
- 이윤경, 이준경 형제와는 한양에 살던 어린 시절부터 죽마고우로 지냈다. 동생인 이준경은 어릴 때부터 “나는 장차 종묘사직을 안정시킬 대신이 될 것이다”라고 말하고 다녔는데, 조식이 자신은 어떨 것 같으냐고 묻자 이준경은 “자네는 산골 바위 틈 움막에서 말라 죽을 사람이다”라고 답했다. 훗날 동고 이준경은 재상이 되고 조식은 세상에 대한 관심을 끊지는 않았어도 평생 출사는 하지 않았으니 결국에는 이준경의 말처럼 되어버린 셈.[126]
- 부친인 조언형도 생전에 대쪽같은 성격으로 유명했다고 한다. 한번은 고향친구였던 강혼이 연산군에게 아부하는 시를 바치자 그와 절교를 선언한 일이 있었다. 중종반정이 일어난 후 조언형은 단천에 군수로 부임해 있었는데, 어느 날 강혼이 상관인 함경도관찰사가 되어 단천을 순시하러 나온다는 소리가 들려오자 밤중에 강혼을 찾아가 꾸짖고 다음 날 벼슬에서 물러나 낙향했다. 이후에도 그는 여러 벼슬을 역임하던 중 제주목사로 임명되었는데, 마침 병에 걸려 있어서 벼슬을 고사하였다. 하지만 이 일을 빌미로 그를 눈엣가시로 본 훈구파 대신들에게 참소당하여 삭탈되었다. 1526년에 58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는데, 이후 아들인 남명이 조정에 그의 신원을 요구하는 상소를 올려서 복관되었다. 조언형의 묘갈문은 자식인 남명이 썼다.[127]
- 장남인 조차산은 불과 아홉 살의 나이에 요절하였다. 아들의 죽음에 남명은 "차산이 죽은 6월 11일이 되면 해마다 길게 통곡한다" 라거나 "집도 아들도 없는 모습이 스님과 같고, 뿌리도 꼭지도 없는 구름이 내 모습과 같구나"라는 내용의 시를 지으며 심회를 토로하기도 하였다.[128] 차산은 남명이 당시 살고 있던 김해 집 뒷산[129] 에 묻혔는데, 이것이 계기가 되어 사람들은 그 뒷산을 본래의 이름 외에도 아이의 이름인 차산 또는 조차산으로 부르기도 했다고 전해진다.
- 조차산이 죽은 후에는 외조카인 이준민을 유독 아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오래된 병풍에 시를 써서 그에게 주기도 하였고, 이준민의 사위 조원[130] 이 급제했을 때에도 그의 칼자루에 시를 지어 써주었다.
- 문익점이 목화를 들여온 것을 기리기 위해 「삼우당문공묘사기(三憂堂文公廟祠記)」와 『목면화기(木綿花記)』를 지었다. 전체적인 맥락은 신진사대부들이 만들어낸 문익점에 대한 통념과 똑같다. 이러한 통념에 관련된 내용은 문익점#s-4 문서를 참고할 것.
- 회재 이언적에 대해 비판적이었다. 두 사람의 출처관이 서로 다른 것도 있었고[131] , 결정적으로 남명의 절친한 친구인 규암 송인수[132] 가 화를 당한 을사사화 당시 이언적이 사화에 항거하기는 커녕 추관(推官)으로서 사림파를 심문하였기 때문이었다.[133] 훗날 이언적이 강계로 유배되었을 때 아들인 이전인이 유배지로 찾아와 학문에 대한 문답을 나누고 이를 「관서문답」이라는 책으로 엮었는데, 여기에는 회재 부자가 남명의 처신에 대해 논한 부분이 있었다. 이에 대해 남명은 「해관서문답」이라는 글을 지어 대응하였다. 남명 사후에 공개된 이 「해관서문답」의 내용은 훗날 남명과 퇴계의 제자들, 그리고 이언적의 후손들끼리 갈등을 불러일으키는 한 계기가 되었다.[134]
- 고봉 기대승과도 그리 좋은 사이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애초에 기대승이 사단칠정논변의 당사자이기도 했으니 그에 대한 남명의 인식이 좋다고 보기는 어려웠고, 기대승 또한 남명을 일컬어 "무딘 자를 흥시키고 나약한 자를 일으켜 세울 만하나 학문은 법도를 따르지 않는 병통이 있다"[135] 라고 평하였기 때문이다. 이들의 관계에 대해 제 3자들이 남긴 기록도 몇 있는데, 율곡 이이와 그의 제자 사계 김장생이 대표적이었다. 이이는 『석담일기』에서 두 사람의 사이가 좋지 않았음을 기록하였고[136] , 김장생은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 자신이 쓴 편지나 정철의 행록 등을 통해 두 사람의 관계가 매우 험악한 것처럼 묘사하면서 대곡 성운이 지은 남명의 행장(또는 묘비문)[137] 이 그 근거라고 썼다. 허나 김장생이 편지에서 언급한 남명의 행장은 『대곡집』에서 찾을 수 없고, 정철의 행록에서 언급한 조식의 묘비문에도 기대승이 직접 언급된 내용이 없다. 묘비문에서 굳이 비슷한 뉘앙스로 쓰인 기록을 찾자면 남명의 사람 보는 안목에 대한 일화로 거론된 어느 익명의 인물에 대한 남명의 평가[138] 가 있기는 한데, 그 사람이 기대승이라는 확증 또한 없다. 여담이지만 남명의 묘비문에서 지목된 이 익명의 인물이 기대승이 아니냐는 의심 자체는 그 당시에도 있었던 모양으로, 정철의 아들이자 송익필-김장생의 문인인 기암 정홍명도 이러한 설이 나도는 것에 괴이함을 표하는 기록을 남겼다.[140]
- 이황과 기대승 사이에 오고간 사단칠정논변에 비판적이었고 그 자신이 이기론에 관해 언급을 꺼리긴 했으나[141] , 그렇다고 이기론과 관련해 남긴 기록이 아예 없는 건 아니었다. 앞서 이야기한 「해관서문답」에서 “이목구비가 발하는 것은 성인이나 보통사람이 같으며, 똑같은 하늘의 이치이다. 그 발함이 선하지 않은 곳으로 흘러간 이후라야 욕심이 된다. 다만 인심과 도심의 구별은 형기(形氣)와 의리(義理)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그래서 인욕이 아니라 인심이라고 하는 것이다”[142] 정도가 이기론에 대한 그의 얼마 없는 언급이다. 후대의 인물이 남명의 이기론을 간접인용한 것으로는 면우 곽종석[143] 이 지은 남명의 묘비문이 있는데, 여기에는 “마음이 발하지 않은 것이 성(性)이요, 이미 발하면 정(情)이다. 발함에 사단과 칠정이 되는데, 여기에는 이발(理發)과 기발(氣發)의 분수가 있다. 이목구비의 욕망은 모두가 천리(天理)에서 함께 나온 것이다.”[144] 라고 기록되어 있다.[145]
- 단성소에서 그는 이치를 통달함에 있어서는 유교나 불교나 같다고 보았다. 다만 그 이치를 사람에게 적용할 때에는 불교가 발디딜 곳이 없으므로 유학자들은 불교를 배우지 않는다고 말했다. 실록에서 단성소 부분의 기사를 적은 사관은 이와 관련해서 "석가모니의 학설에 위로 하늘의 이치를 통달하는 것이 있겠느냐"며 조식을 깠다.[146]
- 김우옹이 쓴 남명의 행장에 따르면, 그는 내단학의 바이블이라 일컬어지는 『참동계(參同契)』를 즐겨보면서 내용 중 좋은 부분이 있으면 학문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여겼다고 한다. 이외에도 『남명집(병오본)』에 수록된 「신명사명(神明舍銘)」의 주석에서는 도교의 호흡 수련법이 언급되기도 했다.
- 일생 동안 지리산을 여러 번 올랐는데, 58세 때 유람한 후에는 「유두류록(遊頭流錄)」이라는 기행문을 짓기도 하였다.[147]
- 고령 지산동 대가야 고분군을 보고 경탄하였다는 일화가 있다. 어지간히 인상 깊었는지 고령에 살던 매부 월담 정사현[148] 의 집에서 시를 지을 때 시구절에 이 고분군을 넣어 읊었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
>가야 옛 나라의 산에는 무덤들이 늘어섰고,
>月器荒村亡且存
>황량한 월기마을[149] 은 사라진 듯 남은 듯.
>小草班班春帶色
>파릇파릇 봄색을 띤 여린 풀은
>一年銷却一寸魂[150]
>해마다 마음을 한 치씩 녹이누나.[151]
- 사명대사와도 교분이 있었다. 문집에 그에게 보내는 시가 한 수 전해진다.
>조연(槽淵)[152] 의 돌 위에 꽃이 떨어지고,
>春深古寺臺
>옛 절[153] 축대에는 봄이 깊었소.
>別時勤記取
>이별하던 때를 잘 기억하구려.
>靑子政堂梅
>정당매(政堂梅)[154] 에 푸른 열매가 맺었을 때이니.[155]
- 말년에 산청으로 이주한 후 산천재 뜰 앞에 매화나무 한 그루를 심었다. 남명매(南冥梅)라고 불리우는 이 매화나무는 약 46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살아 있으며, 이미 고사한 정당매 및 원정매(元政梅)와 함께 '산청 3매'의 하나로 불리운다.
- 열린민주당의 21대 총선 비례대표 8번 후보자였던 황희석 전 법무부 인권국장이 "조국 전 법무부장관은 남명 조식 선생의 후손"이라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조식의 직계 후손이라고 밝힌 조영기 씨는 "황 전 국장 주장이 알려진 뒤 내가 모르는 내용이어서 족보를 다시 들여다봤지만 조국 전 장관과의 연관성은 전혀 없음을 다시 확인할 수 있었다"며 "조 전 장관을 남명 선생과 연결 지으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억지이자 모독"이라고 했다.[157] 이후 황희석은 "남명 선생이 조국 전 장관의 직계 선조는 물론 아니다"라고 말을 바꾸었다.
7. 현대 매체에서의 조식
7.1. 교과서
7차 교육개정 이후 초등학교 5학년 국어교과서에는 그의 일대기가 소개되기도 했다. 첫 머리부터 그가 지은 단성소가 나온다. 물론 조선내내 세를 떨친 후학들의 버프로 지금까지도 조선 성리학 하면 튀어나오는 이황이나 이이만큼 유명하진 못하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에 대한 조명이 계속 이뤄지는 추세라 인지도는 점점 상승하고 있다. 게다가 그의 날선 비판은 요즘 정치판에 대입해도 훨씬 싱크로가 잘 맞아서….
7.2. 창작물
퇴계 이황과 마찬가지로 대학자의 이미지가 강해서 사극 등의 창작물에선 잘 등장하지 않는다.
벽초 홍명희의 소설 『임꺽정』에서는 단역으로 잠시 등장한다. 조식이 나룻배를 타고 가는데 당시 세도가인 윤원형의 차지(윤원형의 하인을 부르는 이름)가 무리한 대우를 요구하며 시비를 걸자, 조식이 아랫사람을 시켜서 차지를 혼쭐낸다. 이후 차지가 윤원형에게 이 일을 고하며 '자신을 영남 조 판관이라 한 자에게 당했다'라고 말하자 윤원형은 '조식이구나. 그 자는 나도 꺼리는데 네가 잘못 걸렸다.'라고 달래준다. 위에서 언급된 『백야기문』의 야담을 각색한 것으로 보인다.
이두호의 만화 『임꺽정』에서는 이 부분에 대한 묘사가 더 추가되는데, '백주 대낮에 윤원형의 개가 사람을 문다!'라고 호통을 친 조식에게 차지가 막 주먹질을 할 찰나 임꺽정이 나타나서 차지를 제압하고 조식을 구해준다. 그런데 그 차지는 과거 임꺽정의 친구인 마빡 김달평이었고, 서로의 정체를 안 뒤 술을 마시며 오해를 푼다. 이후 김달평이 이 일을 윤원형에게 고하고 조식의 정체에 대해 아는 것은 소설과 동일하다.
8. 관련 자료
8.1. 사이트
8.2. 비문
- 대곡 성운이 지은 묘비문[159] - 원문, 관련 논문
- 면우 곽종석이 지은 묘비문[160] – 원문, 관련 논문
- 내암 정인홍이 지은 신도비문[161] - 원문, 관련 논문
- 용주 조경이 지은 신도비문[162] – 원문, 관련 논문
- 미수 허목이 지은 신도비문[163] – 원문
- 우암 송시열이 지은 신도비문[164] - 원문, 관련 논문
8.3. 동영상
- 책을 뚫고 현실로 나아가라-남명 조식, KBS 역사스페셜 2012. 7. 5.
- 남명 조식의 신명사도 강의, 홍익학당 2012. 11. 17.
- 선비의 발자취 '남명 조식', 천지매거진 2013. 2. 7.
- 국회 인문학 아카데미 5회 남명 조식, 대한민국 국회 2014. 12. 1.
- 청비이공 선비열전 21강 칼을 찬 선비 남명 조식, 청년선비포럼 20 2017. 9. 4.
- 퇴계 이황과 남명 조식, 도올 TV 01 02 2019. 9. 4 ~ 9.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