폐비 윤씨
1. 소개
폐비 윤씨(廢妃尹氏)
1455년 음력 6월 1일 ~ 1482년 음력 8월 16일[1]
조선 제9대 왕 성종의 계비이자, 제10대 왕 연산군의 친어머니이다.
아들 연산군이 즉위 후에 올린 시호는 제헌왕후(齊獻王后)이다. 중종반정 이후 삭탈(削奪)되었다. 묘호는 회묘(懷墓)이다. [2]
판봉상시사 윤기견[3] 과 부부인 신씨의 딸이다.
고려시대 장군 윤관의 후손이다. 윤관의 장남의 후손이며, 정희왕후, 정현왕후, 장경왕후, 문정왕후, 숙빈 윤씨 등은 윤관의 4남 후손들이다. 외가 쪽으로는 친정 어머니의 사촌 오빠가 신숙주였다.
2. 일생
2.1. 중전이 되다
성종의 중전이었던 공혜왕후가 몸이 약하고, 결혼 후 6년 가까이 아이가 없어 신하들이 후궁을 들일 것을 청해 숙의 윤씨가 첫 후궁으로 간택되었다.
1년 후 공혜왕후가 세상을 떠났고, 그로부터 1년 후 성종은 따로 중전을 간택하지 않고 후궁인 숙의 윤씨를 중전으로 승격하였다. 당시 숙의 윤씨는 임신 6개월이었다.
윤씨가 평소에 허름한 옷을 입고 검소한 것을 숭상하며 일마다 정성과 조심성으로 대하였으니, 대사를 위촉할 만하다. 윤씨가 나의 이러한 의사를 알고서 사양하기를, ‘저는 본디 덕이 없으며 과부의 집에서 자라나 보고 들은 것이 없으므로 사전에서 선택하신 뜻을 저버리고 주상의 거룩하고 영명한 덕에 누를 끼칠까 몹시 두렵습니다.’고 하니, 내가 이러한 말을 듣고 더욱 더 그를 현숙하게 여겼다.
성종실록 69권, 성종 7년 7월 11일 임자 2번째기사
중전이 된 후 아들을 낳았다. 나중의 연산군이다. 성종은 적장자인 연산군을 원자로 책봉하였다.그대 윤씨는 성품이 부드럽고 아름다우며 마음가짐이 깊고 고요하여, 계명의 경계는 진실로 제나라 왕비의 현명함보다 뛰어나고, 갈담의 근검은 멀리 주나라 태사의 덕을 따르는도다.
성종실록 70권, 성종 7년 8월 9일 기묘 2번째기사
2.2. 폐위 위기를 넘기다
중전이 되고 1년이 지나지 않은 1477년 성종이 중전의 방에 갔다가 주술을 써놓은 방양서와 비상이 묻은 곶감을 발견하였다.
성종은 왕비를 폐위하고자 했지만 신하들의 간곡한 부탁으로 철회하였다. 원자가 있는데 중전을 폐위하는 것은 안된다는 것이 다수 신하의 의견이었다.
방양서와 비상을 반입한 나인 삼월과 사비에게만 죄를 물어, 삼월을 교수형에 처하고[4] , 사비를 장형 100대를 때린 후 변방의 관비로 보내는 처벌을 내리는 것으로 사건을 매듭지었다.
2.3. 폐위 이유
1479년 성종은 신하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중전 윤씨를 폐위하였다. 역시 이번에도 원자가 계신데 어떻게 어머니를 폐위하느냐며 신하들이 말렸다.
폐비 윤씨 하면 가장 유명한 이야기인 폐비 윤씨가 성종의 얼굴에 손톱으로 상처를 냈다는 이야기는 조선왕조실록에 없다. 그냥 전해내려오는 야사이다.
다음은 조선왕조실록에서 성종이 밝힌 폐위 이유이다. 성종실록 105권, 성종 10년 6월 5일 경인 4번째기사
- 지난 정유년에 윤씨가 몰래 독약을 품고 사람을 해치고자 하여, 건시와 비상을 주머니에 같이 넣어 두었으니, 이것이 나에게 먹이고자 한 것인지도 알 수 없지 않는가?
- 혹 무자(자식을 낳지 못하게)하게 하는 일이나, 혹 반신불수가 되게 하는 일, 그리고 무릇 사람을 해하는 방법을 작은 책에 써서 상자 속에 감추어 두었다가, 일이 발각된 후 대비께서 이를 취하여 지금까지도 있다.
- 엄씨 집과 정씨 집이 서로 통하여 윤씨를 해치려고 모의한 내용의 언문을 거짓으로 만들어서 고의로 권씨의 집에 투입시켰는데, 이는 대개 일이 발각되면 엄씨와 정씨에게 해가 미치게 하고자 한 것이다.
- 항상 나를 볼 때, 일찍이 낯빛을 온화하게 하지 않았으며, 혹은 나의 발자취를 찾아서 없애버리겠다고 말하였다. 비록 초부의 아내라 하더라도 감히 그 지아비에게 저항하지 못하는데, 하물며 왕비가 임금에게 있어서이겠는가?
- 위서(가짜 문서)를 만들어서 본가에 통하여 이르기를, ‘주상이 나의 뺨을 때리니, 장차 두 아들을 데리고 집에 나가서 내 여생을 편안하게 살겠다.’고 하였는데, 내가 우연히 그 글을 얻어보고 일러 말하기를, ‘허물을 고치기를 기다려 서로 보도록 하겠다.’라고 하였더니, 윤씨가 허물을 뉘우치고 말하기를, ‘나를 거제나 요동이나 강계에 처하게 하더라도 달게 받겠으며, 남방기에서 발원한 대로 사람의 허물을 무량수불 앞에서 연비하여 이를 맹세하겠습니다.’라고 하므로, 내가 이를 믿었더니, 이제 도리어 이와 같으므로, 전일의 말은 거짓 속이는 말이었다.
- 상참으로 조회를 받는 날에는 비가 나보다 먼저 일찍 일어나야 마땅할 것인데도, 조회를 받고 안으로 돌아온 뒤에 일어나니, 그것이 부도에 있어서 있을 수 있는 일인가? 항상 궁중에 있을 때에 대신들의 가사에 대해서 말하기를 좋아하였으나, 내가 어찌 믿고 듣겠는가?
- 내가 살아 있을 때에야 어찌 변을 만들겠는가마는, 내가 죽으면 반드시 난을 만들어낼 것이니, 경 등은 반드시 오래 살아서 목격할 자가 있을 것이다.
- 주상이 혹 때로 편치 않을 때가 있어도 마음에 개의치 않고 꽃 핀 뜰에서 놀고 새를 잡아 희롱하다가도, 만약 제 몸이 편치 않으면 갑자기 기도하여 이르기를, ‘내가 죽지 않기를 바라니 보여 주기를 원하는 일이 있다.’고 하였다. 평소의 말이 늘 이와 같으니 우리들은 항상 두려워하였다.[5]
- 만약 주상이 편치않을 때를 만나면 독을 어선(임금에게 올리는 음식)에 넣을까 두려워하여 여러가지 방법으로 방비하면서 중궁이 지나가는 곳에는 어선을 두지 않도록 금하였다. 우리들이 비록 이름을 국모라고 하나 본래는 평인인 것이요, 한 나라에서 높임을 받는 분은 주상이 아니고 누구이겠는가? 그런데도 매양 경멸하여 주상으로 하여금 안심하고 음식을 들 때가 없게 하였고, 제 스스로 그전에 대죄가 있다고 여기는데도 오히려 요동시킬 수 없으니, 지금에 와서 난들 어떻게 하겠는가?
- 비록 자식이 없다고 하더라도 오히려 보전하고자 할 것인데, 하물며 원자가 있었음에랴?[6] 그 악이 날로 커져서 꺼리는 바가 없었으나, 주상은 도량이 너그럽고 인자하므로 매양 비호하면서 허물을 고치게 하려고 한 것이 한 가지 일만이 아니었다. 우리들이 비록 부덕하더라도 옛 현비의 일을 인용하여 가르치기를 곡진하게 하였어도 일찍이 들으려고 생각지 아니하였다. 지금에 와서 이와 같이 결단한 것은 다시 허물을 고칠 가망이 없었기 때문이다.
- 평소에 시비에게 죄과가 있으면, 반드시 이르기를, ‘지금은 비록 너에게 죄줄 수가 없더라도, 장차는 너를 족멸시킬 것이다.’라고 하였으니, 이와 같은 마음으로써 원자를 가르친다고 하면 옳겠는가?
- 지난 해에는 중궁이 주상을 용렬한 무리라고까지 하였고, 또 그 자취도 아울러 깎고자 하므로 주상이 부득이 정승들에게 알렸던 것이다. 이제 원자에게는 가련한 일이나, 주상의 근심과 괴로움은 곧 제거될 것이고, 우리들의 마음도 놓여질 것이다.
- 무릇 불의한 일을 행했을 때에 우리들이 보고 물으면 대답하기를, ‘주상이 가르친 것입니다.’ 하고, 주상이 이를 보고 꾸짖으면, ‘대비가 가르친 것입니다.’라고 하여, 그 거짓된 짓을 행하는 것이 이와 같았다.
- 지난 정유년 3월 20일에 엄 숙의(嚴淑儀)가 정 숙용(鄭淑容)과 더불어 중궁 및 원자를 모해(謀害)한다는 글 두 통과 비상(砒礵) 약간(若干)과 압승책(壓勝冊) 한 권을 작은 상자에 담아 가지고 백저포(白苧布) 보자기로 싸서, 권 감찰(權監察)의 집 사람이라 일컫고 권 숙의(權淑儀)의 집에 던졌는데, 권 숙의의 집 사람이 그 상자를 가지고 대궐에 나아와서 숙의에게 바쳤다. 봉보 부인(奉保夫人)이 일찍이 어침(御寢)에 나아갔더니, 중궁이 신다울루목(神荼鬱壘木)을 가지고 말뚝을 박는 소리가 있었는데, 사람의 발소리를 듣고 그친 일이 있으며, 임금의 침방(寢房) 옆에 쥐구멍이 있어 쥐가 항상 드나들었는데, 중궁이 책(冊)을 가위질하고 남은 종이로 그 쥐구멍을 막았었으며, 작은 상자를 끄집어 내는 데에 미쳐서는 상자 가운데의 서책(書冊)이 모두 다 숙배(肅拜)하는 단자(單子) 종이였다. 어느 날 봉보 부인이 또 중궁의 침실에 나아갔다가 쥐구멍에서 먼저의 종이를 끄집어내어 취하여 보고는 마음에 의심스러워서 대비전(大妃殿)에 바쳤는데 그것도 숙배 단자의 종이였고, 그전에 드러난 압승서(壓勝書)와 빛깔이 같았으며 그 가위질하여 들쭉날쭉한 곳도 같았다. 이에 삼전(三殿)은 전일(前日)에 말뚝박는 소리를 내었던 것이 반드시 책을 만들 때였을 것이라고 의심하였다. 중궁은 한가지 감추는 것이 있어서 항상 친히 자신만 열고 닫았으며 다른 사람이 엿보는 것을 허락하지 아니하였고, 또 작은 상자가 있는데 그것을 감추듯이 숨기므로 주상이 자못 이를 의심하여 중궁이 세수하는 틈을 타서 취하여 보니, 가운데 한 개의 작은 주머니가 있고 주머니 안에는 비상(砒礵) 가루가 있었으며, 상자 안에 비상을 바른 건시(乾柿) 두 개가 있었으므로, 그리고 나서 중궁의 소위(所爲)인 것을 알았던 것이다.
- 비단 독약을 가지고 첩을 죽이려고 하였을 뿐만 아니라 어린 임금을 내세워 뜻을 이루어서 권력을 마음대로 하고자 기하였으니, 항상 스스로 말하기를, ‘내가 오래 살면 장차 할일이 있다.’고 하고, 또한 스스로 상복을 입는다고도 하였으며, 장막을 가리키며 말하기를, ‘소장(素帳)이라.’ 하고[7]
- 주상에게 말하기를, ‘그 눈을 빼고, 발자취까지도 없애버리며, 그 팔을 끊어버리고 싶다.’ 하였으니, 이와 같은 말들을 어찌 이루다 말하겠습니까?
- 비상 가루를 옷 속에 차고 다니며, 주상께서 편치 못할 때에는 더욱 이를 기뻐하였고, 어선이 있는 곳을 아무 때나 출입하였습니다. 우리들이 이러한 일을 막고 막았는데, 주상이 어찌 다 알겠습니까?
- 우리들은 주상이 계신 곳이 좁기 때문에 수강궁으로 옮겨갔는데, 그 때 우리들은, ‘우리들이 비록 있어도 어떻게 구하겠는가? 그런데도 그가 하는 짓을 알지 못하는구나.’ 하고 생각하면서 매우 상심하며 눈물을 흘리고 떠났습니다. 종묘 사직에 복이 있어서 주상이 그의 독해를 당하지 아니하였으니, 다행입니다.
2.4. 최후
폐위 전날 성종은 당시까지는 중전의 신분이었던 윤씨에게 하례를 금지하는 어명을 내렸다.[8]
폐위되고 3년 후 사사(賜死)되었다.
성종 뿐만 아니라 인수대비와 정희왕후까지 폐위의 정당성을 설명해야 했던 이유는 신하들의 반대가 워낙 거셌기 때문이다. 성종이 영원히 살게 아니고 그 다음에는 폐비 윤씨의 아들이 왕위에 오를 것인데, 어머니의 폐위와 사사에 관여했다는 의심을 사면 멸문지화를 당할지도 모를 일이다. 신하들은 한뜻으로 그냥 성종이 참고 살길 바랐다. 폐비 윤씨에게는 동정론이 우세했고 조선 시대 동안 세종보다도 더 성군으로 칭송받은 성종을 욕할 순 없으니 많은 야사에서 불쌍한 폐비 윤씨와 악독한 시어머니 인수대비로 묘사되었다.
야사에 폐비 윤씨가 죽을 때 피를 토했고 자신의 피 묻은 적삼을 어머니에게 주며 후에 이것을 자신의 아들에게 전해달라 했고, 커서 이것을 본 연산군이 정신이 이상해져 폭군이 되었다는 이야기가 정사처럼 퍼져있다. 실록에 기록이 없는 그냥 야사이다.
연산군 때 제헌왕후로 다시 추숭되고 능도 보수하여 회릉이라고 부렀지만, 중종 때 호칭을 되돌렸다. 묘를 부수진 않았다.
3. 평가
'제 명을 재촉한 어리석은 인물'이라는 첫 번째 평, 그리고 '과거의 부조리와 왕실의 권력 다툼 속에서 희생된 비운의 인물'이라는 두 번째 평으로 나뉜다. 하지만 후자는 야사에 지나치게 의존한 감이 있어 신빙성이 좀 떨어진다. 당장 《성종실록》에 실린 기사만 해도 윤씨의 죄에 대한 서술이 가득하고, 결정적으로 《성종실록》은 비록 사림 출신 사관들의 입김이 강하긴 했지만, 윤씨의 아들인 연산군 때 쓰였다.
실록에는 윤씨에 대해 부정적인 기사가 많다. '''독살을 하기 위해 독이 든 곶감을 은닉했다고 하고''', 야사에도 손톱으로 성종의 얼굴, 즉 용안(龍顔)에 상처를 내었다거나, 식사 도중 화를 참지 못해 국그릇을 엎어 왕의 옷을 더럽히는 등, 기록만 놓고 본다면 분노조절장애 증세가 의심될 정도다.
성종은 윤씨를 내치는 이유로 소문으로 들은 카더라가 아닌, "'''비상을 가지고 다니더라니까? 사람 해치는 법 책을 가지고 있었다니까? 내 발자취를 없애버리겠다고 욕했다니까? 도저히 못 살겠다!'''"라고 자신이 직접 당한 일을 들었다.[9] 링크.
야사에 후궁들이 윤씨를 모함하여 죽게 만들었다는 이야기가 있지만 근거가 있지 않다. 연산군이 이 사실을 진실로 믿어 귀인 엄씨와 귀인 정씨를 죽이고 젓갈로 담궜다. 정사에는 폐비 윤씨가 귀인 엄씨와 귀인 정씨가 자신을 쫒아내려 한다는 언문 투서를 만들었다가 조사 결과 자작극으로 밝혀진 내용이 나온다.
야사 중 윤씨의 질투심이 대단해 궐 내의 궁녀들에게도, "누구든 상감을 모시는 날에는 나에게 죽을 줄 알아라."라고 말하고 다녔다는 이야기가 있다.
애초에 후궁이 아들까지 낳은 정실 왕비에게 개긴 일은 조선 역사상 단 한 번도 없다. 조선왕조에서 왕이 그 외의 모든 사람들 위에 있는 절대적인 존재인 것처럼, 내명부 내에서 왕비의 지위도 절대적이었다. 이를 흔들 수 있는 사람은 임금뿐이다. 그 손 귀한 조선 후기 숙종의 유일한 원자를 낳았던 장희빈조차 겉으로는 정실부인인 인현왕후에게 고분고분하는 모습을 보였는데, 하물며 직접 아들을 생산한 중전 윤씨에게 후궁들이 참소를 했다면, 뒷날 연산군이 어쩌기 전에 참소를 접수한 그 시점에서 성종이나 윤씨 중 한 명이 먼저 나서서 그 후궁들을 끝장냈을 것이다. 대비들 역시 중궁을 폐위하기에 앞서, 내명부(內命婦) 전체에 도전장을 내민 것이나 다름없는 무개념 후궁들을 먼저 박살내려 들었을 거고.
후궁을 남들 보는 앞에서[10] 매질로 혼쭐을 내도 '기강을 다잡았다'는 호평이 기록되는 왕후와, 후궁이 자기 친자식에게 '너'라고 했다는 이유만으로 죽이네, 살리네 소리가 임금 입에서 나올 정도로 왕비와 후궁의 차이는 그 정도로 크다.[11]
이러한 악평과는 다르게, 연산군을 낳기 전까지 선량하고 예의 바르며 검소한 성품이었다. 웃어른들을 매우 공경하고 깍듯히 대해 대비와 왕대비의 총애를 받았고, 후궁들과도 사이가 나쁘지 않았다.
윤씨는 평소 허름한 옷을 입고 검소한 것을 숭상하며 매사에 정성과 조심성으로 대하였고, 자신이 왕비로 간택되었다는 말을 듣자 "저는 본디 덕이 없고 과부의 집에서 자라나 보고 들은 것이 없으므로, 주상의 거룩하고 영명한 덕에 누를 끼칠까 몹시 두렵습니다"라고 하니, 내가 이러한 말을 듣고 더욱 더 그녀를 현숙하게 여긴다.
- 성종실록 7년 7월
세월이 지나며 성종의 애정이 식어 다른 후궁에게 총애를 뺐길 수는 있지만 '''가만히만 있으면''' 아들이 왕위에 오르고 편안하게 왕실의 최고 어른 대접을 받으며 호강할 수 있었다. 하지만 쓸데없는 패악질을 부려 주변 사람들이 학을 떼게 만들어 결국 제 명을 재촉했다.돌아보건대 숙의 윤씨는 성품이 부드럽고 아름다우며 마음가짐도 깊고 고와서, 효성은 세 대비를 움직이고, 공손하고 검소한 몸가짐은 왕을 보필하는 자리에 진실로 으뜸으로서 마땅하다고 여겼다.
- 폐비 윤씨가 중전이 되던 날, 반포했던 글에서
세종의 왕비 소헌왕후와 여러 모로 대조된다. 성군 이미지 때문에 간과되는 사실이지만 세종은 조선 역대 임금 중 성종처럼 후궁을 많이 들인 임금 중 한명이었다. 하지만 폐비 윤씨와 다르게 소헌왕후는 질투하지 않고 후궁들과 사이좋게 지내면서 현명하게 내명부를 다스려 조선 최고의 왕비로 칭송받았다.
야사 중에 폐비 윤씨는 마치 선녀와도 같고, 등장하는 것만으로도 주위가 서늘해질 만큼의 미녀였다고 한다. 연산군은 키가 크고 말랐다는 기록이 있는데 키는 아버지 성종을, 전체적인 외모는 어머니 윤씨를 닮았을 수 있다. 야사에 연산군이 "어머니의 얼굴이 보고 싶다"고 했을때, 한 신하가 "그러면 거울을 보십시오"라는 말을 한 적이 있다고 한다.
3.1. 현대 평가
<역사저널 그날>에서 폐비 윤씨가 출산 후 급격하게 성격이 변한 원인이 산후 우울증이 아닐까라는 주장이 나왔다.
경계선 성격장애가 아니냐는 추측도 있다. 감정 기복이 심하면서도 충동적인 성격에 식사 도중 화를 참지 못해 상을 엎었다는 등 분노 조절에 문제를 보이는 데다가, 성종과 후궁들과의 사이가 매우 나빴고, 후궁들에게 협박을 한다던가, 성종을 죽여버리고 싶다고 하는 등 사람을 극도로 혐오하면서 성종의 처소에 무단침입을 하거나, 궁녀들에게 "전하를 모시면 죽을 줄 알아라"라는 협박을 하는 등 성종에게 심한 집착을 보이는데, 이건 전부 경계선 성격장애 환자들이 보이는 대표적인 모습들이다. 경계선 성격장애는 청소년기와 성년기 초기 때 잘 나타나며, 폐비 윤씨가 이러한 성향이 된 나이도 20살 때부터다. 경계성 성격장애였다면 폐비 윤씨가 비상을 들고 다닌 이유는 성종이나 성종의 총애를 받는 후궁을 독살하려 한 게 아니라 자신이 먹고 자살하거나 자살 시늉을 하려 한 것일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성종에게 내뱉은 폭언의 수위를 감안한다면 후궁들을 독살하려고 했을 가능성도 충분히 있으며, 애초에 왕궁에 독약을 가지고 온다는 것 자체가 중죄이기 때문에, 폐비 윤씨에 대한 처우가 부당했다고 볼 수 없다.
어린 시절 아버지를 잃고 자신이 직접 짠 베를 팔아 겨우 먹고 살았던 불행한 과거와 성종의 여자를 좋아하는 성격, 자신보다 친정 배경이 좋은 후궁의 임신으로 왕비 자리를 빼앗길지도 모른다는 심리적인 불안이 경계선 성격장애로 만들었다는 설이 있다. 아들 연산군 역시 경계선 성격장애 환자라는 추측이 있다. 허나 이러한 평가는 조심해서 내려야 하는 것으로, 과거의 인물에 대한 정신 감정을 교차검증이 되지 않는 소수의 사료를 통해 판단하는 것은 TV쇼에서 나오는 흥미 위주의 픽션이 아닌 실제 정신과 전문의도 선뜻 판정하기 어려운 일이다. 단적인 예로 서진의 사마충 같은 경우 누가 봐도 지적장애를 앓은 환자로 보이지만, 아직까지 이에 대한 반론이 있다. 단순히 사료의 취합만 가지고 역사의 인물에 대한 정신 감정을 하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이다.
폐비 윤씨의 폐출 및 사사는 드라마에서 묘사되는 것과는 달리, 시어머니 인수대비가 아닌 남편 성종이 가장 열렬히 추진했다. 정희왕후와 인수대비가 성종에게 찬성했고 신하들은 반대 분위기가 역력했다.
폐비 윤씨가 어떤 마음을 품었든 간에 실질적으로 폐비당한 계기는 성종에게 '죽여버리겠다!'고 욕을 퍼붓고 독을 가지고 다니다가 걸린 것이다.[12] 조선 뿐 아니라 어느 왕정국가에서도 이런 짓을 한 사람은 살아남기 어렵다. 애초에 현대법에서도 살인예고 혹은 살해 협박은 중범죄이다.
부모를 처벌하지 않고 당사자인 윤씨로 사건을 마무리한 것은 성종이 아량을 베푼 것이라는 의견도 있다. 장례 때 군관을 보내 장례를 도왔다. 7년쯤 후 폐비 윤씨의 무덤을 윤씨지묘라 부르며 해당 고을 수령에게 '절기마다 제사를 올리고, 제사에 쓰이는 용품은 왕비의 예에 준하게 마련하도록 하라.'는 지시까를 내렸다. 아마도 아들인 연산군의 정통성 문제 때문에 배려한 모양인데, 명령이 제대로 안 지켜졌는지 연산군은 내시를 보내 묘의 상태를 알아볼 때에는 엉망이었다고 한다.
폐서인 조치 후 2년간 사가에 유폐시켰다가 사사시킨 일을 두고 뒤통수를 맞았니, 어쩌니 하는 것도 당시 시스템을 전혀 모르고 그저 결과만을 보고 하는 소리에 지나지 않는다. 왕실 사람이 사형을 받는다면, 이맹종이나 단종의 경우처럼 '''작위추탈 - 폐서인 - 형 집행'''이 기본 테크였고, 각 단계별로 테크가 진행될 때까지는 짧게는 1년, 길게는 3년 가량 유예기간을 두었다. 이괄의 난이 진압된 후 흥안군은 이 테크를 따르지 않고 체포하자마자 급하게 사형을 집행했는데, 전후 처리 과정에서 문제가 되기도 했다. 쉽게 말하면 폐비 윤씨는 폐서인되어 사가로 내쫓긴 그 순간부터, 본인이 아무리 뉘우치더라도 살아날 가능성은 0%에 가까웠다. 후대의 인현왕후가 괜히 복위되고 얼마 안 있어 죽은 게 아니다. 사실상의 사형 선고인 폐서인이 된 상황에서 받은 스트레스는 상상을 초월했을 것이다. 물론 정치적 역학 관계에 의해 희생당한 인현왕후와 본인의 귀책 사유로 폐비된 폐비 윤씨는 그 경우가 다르긴 하지만. 폐비 윤씨는 동정 여론이 생길 정도로 가만히 있긴 했으니, 윤씨 입장에서는 냉정하고 잔인한 처벌이었을 것이다.
나중에 인조가 며느리 민회빈 강씨를 후원에 감금한 뒤 "전복구이에 독을 넣어 시아비를 죽이려고 든 죄"라며 누명을 씌워 강씨를 죽이려고 할 때 신하들이 극구 말리자 인조가 들고 나온 것이 성종의 폐비 윤씨에 대한 처분이었다. "성종 때에 연산의 어미가 폐출된 후 딱히 도리에 어긋나는 행실을 한 것도 없었지만 그 당시의 신하들은 후환을 걱정해서 죽이라고 청했다. 나라 걱정하는 신하란 이래야지. 왜 니들은 그렇게 시아비 죽이려는 패악한 여자를 감싸고 도는 거냐? 왜, 나중에 강씨의 자식들이 연산군처럼 니들한테 해코지할까봐 겁나냐?"라면서 인조는 기어코 강씨에 대한 처분을 밀어붙였다. "옛 사람들 말씀에 요순을 본받으려거든 조종을 본받으라 했으니, 나는 성종대왕을 본받겠다"면서. 이쪽은 차남 효종의 승계를 확정짓기 위해선 장남 소현세자의 가계를 정리할 필요성이 있었기에, 어린 손자들 대신 강씨를 공격해 처리한 것이다.
4. 무덤
경기도 고양시 서삼릉 경내에 있는 회묘(懷墓). 중종반정으로 인하여 왕후의 자격을 다시 박탈당하였으나, 반정 세력들이 무덤에는 손을 대지 않아서 연산군에 의하여 왕후의 예로 단장된 모습이 그대로 남아 있다. '''비공개 능역'''이라 들어가 볼 수 없지만, 매월 마지막 주 토요일 오전 10시에 안내자의 인솔 하에 비공개 능역을 들어갈 수 있으니, 이때 시간 맞춰서 서삼릉에 가면 답사해 볼 수 있다.
본래 서울특별시 동대문구 회기동[13] 경희대학교 정문 옆 경희의료원 자리에 있었으나, 경희의료원 건축을 하면서 1969년에 서삼릉 내의 후궁들 묘역인 현재 자리로 이장한것이라 한다.
5. 관련 야사
폐비 윤씨의 사사와 관련된 야사가 하나 있다. 성종 때의 유명한 재상인 허종과 허침 형제가 "폐비 윤씨에게 사약을 내리기 위한 어전회의에 참석하라"는 명을 받고 궁궐로 가려던 도중에 누나의 집에 들렀는데, 누나가 "만약 어느 양반집 주인이 종들과 상의하여 부인을 내쫓았는데, 훗날 그의 아들이 주인이 된다면 그 종들은 과연 어떻게 될까?" 라고 말했다.
허종과 허침 형제는 그 말의 뜻을 이해하고는, 누나[14] 의 집을 나와서 계속 궁궐 쪽으로 말을 몰고 가다가 어느 다리에서 일부러 굴러 떨어졌다. 그래서 낙상(落傷)을 핑계 삼아 어전 회의에 참석하지 않았다.
훗날 연산군이 갑자사화를 일으키고, 당시 어전 회의에 참석해 폐비 윤씨의 사사에 동의했던 신하들을 모조리 숙청했는데, 당시 회의에 참석하지 않았던 허종과 허침 형제는 숙청을 피해 갔고, 허종과 허침 형제가 일부러 굴러 떨어졌던 다리는 '종침교'라 불리게 되었다. 야사의 판본에 따라서는 허종만 말에서 굴러 떨어져 회의에 불참하고 허침은 참석했는데, 그 자리에서 다른 신하들은 다 동의했는데 허침 혼자서만 이의를 제기했다가 좌천되었다고도 한다. 실제로 허침이 윤씨의 폐비를 반대했음은 사실이다.
또한 허침은 연산군의 어릴 적 스승이었는데, 연산군이 공부를 게을리 해도 자상하게 타이르고 칭찬해 연산군이 매우 좋아했다. 반대로 다른 스승 조지서는 늘 꾸짖고 성종에게 일러바치겠다고 협박해 연산군이 싫어했다. 연산이 벽에다 '조지서는 소인배이고 허침은 대인배이다' 라고 썼고, 이 낙서를 조지서가 보고 불 같이 화를 냈다. 장난이라고 말했지만 머리 끝까지 화가 난 조지서는 연산군을 심하게 나무랐고, 이에 앙심을 품고 훗날 허침에게는 큰 상을 내렸지만 조지서는 트집을 잡아 죽였다.[15] 아무튼 여기서도 훗날 갑자사화에서 허종과 허침 형제가 모두 숙청을 피해갔다는 건 변함이 없다. 다만 허침과는 달리 허종은 갑자사화가 벌어지기 전인 1494년에 이미 사망했다(허침은 1505년에 사망). 그래도 죽은 뒤에도 허종이 부관참시 등의 처벌을 받지 않았음은 사실이다. 그리고 폐비를 결정한 회의 때 두 형제가 불참한 것 또한 사실이지만, 공식적인 사유는 두 형제의 할머니의 장례 때문이었다. 즉 운 좋게 화를 면한 유형에 각색이 더해진 것.
참고로 종침교는 현재 철거되어 터만 남았다. 종침교 터 부근에 있는 '종교 교회'(감리회)라는 교회의 이름도 이 종침교에서 유래되었다.
6. 대중 매체
워낙 드라마틱한 요소가 많은 인물인지라, 드라마나 영화에서도 여러 번 등장하였다. 특히나 고도의 연기력이 필요한 인물인지라 연기력이 검증된 배우들이 맡는다는 것도 특징. 그리고 다들 '''예쁘다'''(...)[16] 다만 대부분의 드라마에서는 정사와 달리, 윤씨의 폐출의 계기가 성종에게 손톱 자국을 낸 것으로 그린다. 또 윤씨가 사약을 마실 때 흰 적삼에 피를 토하고 이를 친정어머니 신씨에게 건네며 "훗날 내 아들에게 전해 달라." 하고 부탁하는 이야기를 차용한다.
1984년 드라마 《조선왕조 500년-설중매》에서는 이기선이 윤씨 역할을 맡았다. 당시 폐비 윤씨가 등장하면서 드라마에서 가장 긴장감이 고조되는 부분이었다. 참고로 인수대비는 고두심이 맡았다.
1994년 드라마 《한명회》에서는 장서희가 열연하였다. 이 드라마에서는 윤씨 사사 장면(94회)에서 윤씨의 아비가 윤기견인지, 윤기무인지 불분명한 것에 대해 윤씨 족보를 참고하여 해설을 덧붙였는데, 윤기무는 윤기견의 동생인 것이 분명하므로 윤기견의 딸이 맞다고 나온다. 참고로 장서희는 훗날, 자신이 맡았던 배역 중 폐비 윤씨가 가장 기억에 남는다고 밝혔다. 기사. 인수대비는 김영란이, 성종은 박진성이 열연하였다.[17]
1995년 드라마 《장녹수》에서는 직접적으로 등장하지는 않는다. 이야기 시작이 윤씨가 사사된 후부터 진행되기 때문. 그러나 20회에 연산군(유동근)의 회상으로 잠깐 등장하는데, 그 인물은 다름아닌 월산대군 부인 박씨 역할의 양미경. 나름 1인 2역인 셈이다. 인수대비는 반효정이, 성종은 현석이 열연하였다.
1999년 드라마 《왕과 비》에서는 김성령이 열연하였다. 여기서 윤씨는 상당히 표독스럽지만 원자와 성종에 대한 그리움을 잘 나타냈다. 다만 중궁이 되자마자 내/외명부 부인들을 불러놓고 왕비 행세를 톡톡히 하는데, 이 시점에서 이미 시어머니 인수대비의 눈 밖에 나버린다. 또 걸핏하면 인수대비는 윤씨를 두고 "천한 피가 흐르고 있음이야." 운운하며 천대한다. 그 밖에 윤씨가 대궐에서 울부짖는 장면이나, 채시라와 김성령의 실감나고 소름 끼치는 고부갈등은, 지금 봐도 정말 간담이 서늘해진다. 윤씨의 친정어머니 신씨 역할로 고 여운계가 열연을 펼쳤다. 피가 말라붙은 적삼을 외손자 연산군에게 건네며 딸의 최후를 설명하는 장면은, 그야말로 피를 토하는 절규였다. 인수대비는 채시라, 성종은 이진우가 열연하였다. 좀 웃긴 것은, 시어머니인 채시라는 68년 생, 아들인 이진우는 빠른 69년 생으로 채시라와 사실상 동갑이며, 며느리인 김성령은 빠른 67년 생이란 거다.
2003년 드라마 《대장금》에서는 이주희가 1회에서 사약을 마시고 사사당하는 장면으로 잠깐 등장한다.[18]
2007년 드라마 《왕과 나》에서는 윤씨의 이름을 '윤소화'로 정하고, 성종과 같은 1457년 생으로 설정하였다. 아역은 박보영이, 성인 이후는 구혜선이 연기하였는데 아역이였던 박보영의 연기는 호평을 받았으나, 성인 역인 구혜선은 형편없는 연기를 보여주며 혹평을 받았다. 이 드라마에서는 기존의 질투심 많은 이미지와는 달리 비교적 인간적이고 선한 이미지로 그려졌다. 단 이 드라마에서는 내관 김처선과의 묘한 러브 스토리가 등장하는데, 물론 허구다. 인수대비는 전인화, 성종은 고주원이 연기하였다.
왕과 비의 리메이크작인 2012년 드라마 《인수대비》에서는 어린 시절을 진지희가 연기하고, 성인 시절을 전혜빈이 아주 표독스럽지만 남편과 아들을 애타게 그리는 모습으로 열연하였다. 특히 윤씨가 사약을 받는 장면(54회)는 이 드라마의 분당 최고 시청률인 5.53%를 기록하였다. 당시 종편이 생긴 지 6개월 정도밖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을 생각하면 놀라운 시청률(당시 기사)이다. 다만 이 작품에서는 같은 정하연 작가의 전작 <장녹수>, <왕과 비>와 달리 폐비 윤씨를 성종보다 12살 많은 '윤송이'라는 이름으로 설정하고, 단종 때 궁녀로 들어가 성종의 시녀 등을 거쳐 후궁이 된 것으로 나온다. 물론 윤씨는 1455년생이므로 이는 허구다. 인수대비는 채시라, 성종은 백성현이 연기하였다.
드라마 7일의 왕비에선 잠깐이지만 우희진이 연기하였다.
영화에서는 《연산일기》(1988년)에 등장하며, 김영애가 배역을 맡았다. 참고로 김영애는 여기서 월산대군부인 박씨와 1인 2역을 맡았다. 인수대비는 원로배우 한은진이 연기하였다.
서적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에서는 시어머니 인수대비처럼 될 야망을 품었기에, 신뢰를 잃어 폐위되었다고 주장한다. 간단하게 인용하면, 너무 일찍 샴페인을 터트려서 문제였다. 왕비로 오르기 전 기록을 보면 '어른을 공경하고 예절도 바르다.'는 호의적인 내용도 있음을 감안하면, 야망을 너무 일찍 품음이 화근이었다는 것이다. 실제로 세자를 두고 폐비 윤씨가 했던 발언이나 복수를 다짐하는 표현 등이 너무 위험 수위가 높았다고 평가하는 이는 박시백 말고도 많다.[19]
조선공주실록에서 윤씨의 이야기를 다룬 외전이 나온다. 윤미래라는 이름으로 나오며, 한미한 가문 탓에 사랑하는 한건의 정실부인이 될 수 없었고, 대신 성종의 부인이 되었다. 그 후에 한건과의 사이에서 아들 연산군을 낳았으며, 성종이 연산군이 자신의 친자가 아님을 깨닫자 한건은 외눈이 되었고 본인은 폐비가 된 후 사약을 받고 죽었다. 본편의 모든 비극을 불러온 시발점.
[1] 흔히 생년이 확실하지 않다고들 하나, 1455년생이 정확하다. 실제 국립고궁박물관의 폐비 윤씨 태실(胎室) 속 태지문(胎誌文)에, 단종 3년(1455년) 음력 6월 1일 생으로 확실하게 기록되어 있다. 어째서인지 네이버 백과사전 등에는 성종과 연상의 띠동갑인 1445년 생으로 나와 있고, 드라마 《인수대비》, 도서 《왕을 낳은 후궁들》,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개정 전 판본에서도 이 설을 채택하여 성종과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것으로 잘못 알고 있는 경우가 있다. 이는 당연히 말이 안 된다. 실제로 1445년 생이라면 29살에 후궁으로 궁에 들어왔다는 것인데, 당시 여성의 결혼 적령기는 10대 후반이었고, 늦어도 20살에는 결혼하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했다. 1900년대 초, 구한말에도 20살까지 자식이 미혼인 것을 수치스럽게 생각하는 풍조가 흔했을 정도이다. 사실 이 시기면 동양뿐만 아니라 서양에서도 10대 중후반에 결혼하는 것이 흔한 건 마찬가지였다. 현대보다 평균수명이 현저히 낮은 시기였기 때문에, 자식 보고 생전에 손자까지 보려면 빨리 결혼하는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가난한 집안이었어도 엄연히 양반의 딸인 윤씨가 29살까지 미혼으로 있다가 후궁이 되었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요즘 독신주의자나 노처녀/노총각들이 가장 듣기 싫어하는 '결혼은 인륜지대사니 빨리 해라'는 말은, 조선시대에서 나온 말이다. 조선시대 성리학 문화에서, 혼인은 무척이나 중시되어 '인륜지대사(人倫之大事)'라는 말은 과장이 아니라 진짜였다. '결혼 = 축제, 결혼 안 함(못 함) = 본인+가족+ 마을 양반가 전체의 죄악, 혹은 사회 비주류(승려나 천민)' 이런 취급이었다. 그 시대에 결혼을 피하려던 양반가 사람들은, 지금 결혼 안 하는 사람들이 가족에게 받는 압박과는 비교도 안 되는 어마어마한 고통과 압박을 받았다. 가족만 압박하는 게 아니라 그 마을 전체 양반가가 다 나서서 압박했기 때문이다. 고위직 관료 자제가 19살 넘어 결혼 못할 경우는 임금의 수치로도 간주되기도 하여, 임금까지 나서서 '왜 자식 혼인 안 시키냐.'고 힐문했다. 그리고 전 세계를 막론하고 20세기 중반 이전까지, 여자 홀몸으로 사는 건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던 현실적인 이유도 컸다. 비구니나 수녀가 되지 않는 이상.심지어 30살 가까이까지 가난, 어버이의 병구완 등 집안 사정, 혹은 전쟁 등의 특별 사정을 이유로 결혼을 못 할 시에는 나라에서 혼수품을 챙겨주며 결혼시키는 정책까지 있던 시절이었다. 이런 특별 사정이 없으면 여성이 19~20살쯤에는 자연재해 직전 상황급으로 취급하기 때문에, 가족뿐만 아니라 그 지역 관리들까지 다 나서서, 자기 고을뿐만 아니라 다른 고을로 출장도 가서 처녀총각 있는 집을 찾아다니며 어떻게든 결혼시키려고 생난리를 쳤고, 방문을 받은 고을에서도 당연하게 생각하고 자연스럽게 협조했을 정도니 결혼 못할 일은 없다. 물론 양반 가문일 때의 이야기다. 혼인은 철저한 유교 사회이던 당시, 양반 가문이라면 집안 최고의 행사였다. 양반 가문의 딸이 결혼을 못할 경우, 그 집안은 실제로 딸 시집 보내는 데 온 가족이 다 나서서 모든 정성을 올인할 만큼 대형 비상사태였다. 나이 먹도록 시집 못 간 딸의 아버지가 고위직일 경우 다른 신하들이 뒤에서 욕할 수도 있을 만큼 심각한 수준이며, 나이 먹고 결혼 못한 자제를 둔 신하가 모시는 왕이 되는 것 자체도 성리학에서 왕의 부덕이나 큰 수치로 간주하기에, 왕의 명예까지 손상시킬 수도 있는 일이라 왕까지 그 신하를 따로 불러 다그칠 만한 수준의 일이었다. 다시 말해 차라리 출가해서 스님(비구니)이 되면 모를까, 그것도 아닌데 양반 딸이 특별한 문제 없이 20살을 한참 넘어 결혼 못하는 경우는 없었다고 봐야 한다. 자식이 못생기건, 뚱뚱하건, 키가 작건 말건 아무 상관도 없었다. 심지어 고위직 관료 딸이면 장애인도 왕이 다른 신하 하나 잡아 강제로 사돈을 맺어 시집 보낼 수 있었다. 혼전 교제와 사랑, 혹은 개인의 판단을 중시하는 21세기와는 관점이 뿌리에서부터 다르고, 서양에서도 대동소이했다. 결혼하고 싶지 않다고 결혼하지 않고, 처녀가 20살 훌쩍 넘어 혼자 사는 건 당시 양반 집안에서 존재할 수 없었다. 수녀원에라도 들어가지 않는 이상. 유럽에서도 마찬가지로 사교계에서는 비웃음, 정치계에서는 비난의 구실도 되는 문제였다. 사실 귀족과 왕실이 아직까지 존재하는 유럽 지역의 유서 깊은 가문에서는, 가문의 대를 잇는 결혼을 무척 중시한다. 한 예로 우리나라나 일본, 중국 등에서 아버지의 이름을 그대로 물려받아서 2세, 3세로 이름을 짓는 경우는 극히 드물지만, 유럽에서는 유서 깊은 가문과 왕가일수록 흔하다. 당장 황제, 왕의 이름만 봐도 알 수 있다. 그렇기에 양반 집안에서 그런 경우는 아예 없었다고 봐야 할 정도이고, 무슨 이유든 정말 그 나이까지 (중병, 심각한 장애 등) 결혼 못하는 상황이 있었다면, 당연히 후궁으로 궁궐에 들어갈 수도 없었을 것이다. 그래도 남편 성종(1457년생)보다는 나이가 실제로 2살 많기는 한데, 정안왕후, 원경왕후, 소헌왕후 등 조선 초기 대부분의 왕비들은 남편보다 2살 연상이었다. 그러니 이 정도 나이 차이가 지극히 정상이다. 10세 전후에 초혼을 하는 왕족 남성들의 경우 아내가 연상인 경우가 많다. 합방의 가능 여부를 아내의 성숙도로 가늠하는데, 연상의 아내이면 빨리 합방을 시켜 후사를 보게 하려는 것이었다.[2] 추존된 왕비로 보는 경우가 있는데, 본인이 살아 있는 동안에 성종이 책봉한 정실 왕후였기 때문에 추존이 아니라 복위로 보는 것이 맞다.[3] 집현전(集賢殿) 학자 출신으로, 《세종실록》과 《고려사절요》 편찬에 참여했다. 딸이 추존되자 부원군(府院君)이 되었으나, 반정으로 삭탈관직되었다.[4] 저주에 민감한 조선의 풍습상, 왕실에서 저주행각을 할 경우의 처벌은 군기시 앞 대로에서 시행하는 거열형이었다. 다만 이때는 윤씨가 폐비되지 않고 사건이 마무리되어, 소란이 커질 것을 꺼린 성종의 의도로 교수형으로 조용히 처리된다.[5] 임금이 아플 때는 신경 안 쓰고 탱자탱자 놀다가 자기가 아프면 낫게 해달라고 빌고 했다는 말이다. 지금도 부모가 아프면 자식의 병을 감추는 문화가 있음을 생각할 때, 당시로서는 웃전을 능멸하는 일이다. 비슷하게 장희빈이 인현왕후가 아픈 데 세자의 병이 낫기를 빌며 방술을 했다고 사약을 받았다. 후궁이 그랬어도 중전이 불러다 혼낼 일인데 하물며 중전 자신이 그랬다면...[6] 자식이 없었어도 자기 자리를 지키려고 할텐데 원자가 있으니 더욱 탐욕을 부렸다는 말.[7] 궁궐에 장막이 쳐진 것을 보고 초상집 같다고 했다는 뜻. 정희왕후의 증언이므로 따로 증거는 없으나 폐비 윤씨가 실제로 했다면 심각한 발언이다. 궁에서 초상 치르는 예식을 갖추는 것은 후궁이나 종친, 공주 따위도 안되고 왕가의 정실 직계, 즉 대비나 왕, 왕비 정도가 죽어야 가능하다. 궁궐 장식을 보고 초상집 같다고 한 것은 즉 대비나 왕, 왕비가 죽었으면 좋겠다 혹은 죽은 것 같지 않느냐고 한 것이나 비슷한 말이 된다. 하지만 본인이 왕비니까, 결국 이 말이 가리키는 대상은...[8] http://sillok.history.go.kr/id/kia_11006001_001[9] 성종이 순화해서 말한 것이고 정희왕후의 말에 의하면 "'''그 눈을 빼고, 발자취까지도 없애버리며, 그 팔을 끊어버리고 싶다!'''"는 폭언이었다.[10] 영조의 후궁인 숙의 문씨는 사도세자의 생모 영빈 이씨에게 대들었다가, 영조의 적모(嫡母)인 인원왕후에게 회초리를 맞았다. 그것도 사도세자가 보는 앞에서. 영화 사도에서도 이 장면이 그대로 묘사된다. 세자의 생모이며 직첩도 더 높은 '빈'(정1품, 중전 바로 아래)에게 '숙의'(종2품) 따위가 대든다는 것은 심각한 하극상이었기 때문이다. 조정으로 따지면 종2품 참판이 정1품 영의정에게 덤빈 꼴이다. 인현왕후도 장희빈에게 매질을 가한 적이 있다.[11] 효종의 후궁 안빈 이씨는 자기 외동딸인 숙녕옹주에게 '너'라고 했다가 효종이 죽이네, 살리네 한 것을 효종비 인선왕후가 말렸다고 한다.[12] 정확하게 말하면 '눈알을 뽑고 팔을 잘라내버리겠다.였다. 전제군주제에서 국왕에게 이런 말을 한다는 것 자체가 사실상 반역이나 다름없다.[13] 회기동(回基洞)의 이름 유래가 회묘(懷墓)에서 비롯된다. 처음에는 회묘동이었으나 후대에 묘(墓)를 모양이 비슷한 기(基)로 바꾸고, 회의 글자도 懷에서 回로 바뀌었다.[14] 야사에 따르면, 이 식견 높은 누나는 후에 100세까지 살아 사람들이 '100세 할머니'라고 불렀다 한다.[15] 트집의 이유는 연산군 즉위 후 조지서가 올린 글에서 자신이 좀 더 잘 계도했다면 실수를 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건데, 그래서 조지서의 죄명은 '제 스스로 잘난 척하며 군주를 능멸했다'는 것이었다.[16] 기록에는 연산군이 키가 크고 왕의 풍채가 없으며 여자 같이 생겼다고 한다. 잘 생각해보면, 지금의 꽃미남 같은 스타일(...) 이전의 왕들은 대체로 우람한 장군 스타일이었던 것을 생각해보면(조선 왕들은 다 이성계의 자손들이니 덩치가 큰 건 당연하다.), 연산군의 이런 외모는 모계에서 왔을 가능성도 크다.[17] 재미있게도 여기서 연산군 역을 맡은 이민우와 김영란은 용의 눈물에서도 할머니와 손자로 나온다. 단, 김영란의 신덕왕후는 양할머니에다가 일찍 죽었기에 한 번도 만나지 못했다.[18] 서장금(이영애)의 아버지인 군관 서천수(박찬환)가 점을 쳤는데, 도사가 "첫 번째 여인(폐비 윤씨)은 네가 죽이고, 2번째 여인(아내 박명이)는 네가 살리고, 3번째 여인(딸 서장금)은 너를 죽이나 많은 사람들을 살릴 것이다."라는 점괘를 내놓는다. 그 점괘대로 서천수는 폐비 윤씨에게 사약을 전달해 죽게 만들고, 죽어가던 박명이(김혜선)를 살려 혼인한다. 박명이와의 사이에서 딸 장금을 낳지만, 장금이 실수로 서천수가 군관이라는 사실을 밝혀 서천수를 죽게 만든다. 그러나 점괘대로 장금은 훗날 의녀가 되어 많은 사람들을 살린다.[19] 이전에 출간된 임용한의 《조선국왕 이야기》에도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