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광조

 



조광조
趙光祖

1750년경, 국오 정홍례가 그린 조광조 초상[1]
시호
문정(文正)
본관
한양 조씨

효직(孝直)

정암(靜庵)
출생
1482년 8월 23일[2]
경기도 용인현
(現 경기도 용인시)
사망
1520년 1월 10일[3] (향년 37세)
전라도 능성현
(現 전라남도 화순군 능주면)
사인
사사(기묘사화)
비고
사림파의 사상적 중시조
위훈삭제
현량과 실시 등
1. 소개
2. 일대기
2.1. 조광조 시절의 사회
2.2. 집안 내력과 초년기
2.2.1. 사림파의 아이콘으로
2.3. '사림'에 의한 개혁을 꿈꾸다
2.3.1. 폐비 신씨 복위 논쟁
2.3.2. 정몽주김굉필의 문묘 배향에 대한 논쟁
2.3.3. 군자, 소인의 논쟁
2.3.4. 현량과(賢良科: 천거제)
2.3.5. 소격서(昭格署) 폐지 논란
2.3.6. 노비종모법과 한전제(限田制), 대공수미법
2.3.7. 정국공신 개정 시도(위훈삭제)
2.4. 기묘사화와 몰락
2.4.1. 원인
3. 평가
3.1. 긍정적 평가
3.2. 부정적 평가
3.2.1. 속고내 토벌 반대
3.2.2. 소격서 철폐
3.2.3. 현량과
3.2.4. 성리학에 대한 지나친 집착
3.3. 조광조의 승진 속도
4. 드라마
4.1. 역대 사극에서 등장한 배우들
5. 기타
6.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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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




조선 중기의 학자이자 정치인. 는 효직(孝直)[4], 호는 정암(靜庵), 사후 붙은 시호는 문정(文正)[5], 본관은 한양(漢陽). 출생지는 서울 . 참고로 이름을 거꾸로 해도 같은 몇 안 되는 사람이다.

2. 일대기



2.1. 조광조 시절의 사회


조광조가 등장한 시기는 중종 시절이었다. 중종은 연산군을 반정(反正)으로 쫒아내고 반정 공신들이 앉힌 왕으로서 실권이 약했다. 반정 공신에게는 연산군의 폭정(暴政)이라는 명분이 있었으나 조선 최초로 일어난 신하가 주동이 된 반정이라는 점에서 사회에 끼치는 영향이 컸다. 이 때문에 중종의 정통성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었고 역모 사건이 줄지어 발생할 정도로 사회는 불안정하였다. 중종 2년 김공저조광보의 옥사 및 이과의 옥사, 중종 3년 신옥의의 옥사, 중종 4년 왕실 종친들이 연루된 옥사, 중종 8년 박영문신윤무의 옥사 등이 있었다.
이 옥사들을 살펴보면 중종반정에서 보였던 논공행상(論功行賞)의 모순을 알 수 있다. 김공저와 조광보의 옥사 경우에는 유자광 같은 자가 공신으로 책봉된 것에 대한 반발 심리가 작용했으며[6] 이과의 옥사는 왕을 호위하는 내금위(內禁衛)에서 꾸민 역모로 반정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한 무사들이 온당한 포상을 받지 못한 것에 대한 불만 때문이었다. 신옥의의 옥사 역시 원종공신(原從功臣)이었다가 박탈당한 것에 대한 불만 때문이었으며 왕실 종친들의 옥사 역시 논공행상의 불만 때문이었다. 박영문과 신윤무의 옥사 경우에는 반정의 과실(果實)을 문신들은 마음껏 누리나 무신들은 제외된 현실에 대해 불만을 성토하다 모반죄가 적용된 것이었다.
중종반정에 참여한 반정 공신 책봉의 기준을 본다면 공평과는 거리가 멀었다. 공신을 선정하는 과정이 얼마나 허술했는지를 알 수 있는 예가 있는데 중종은 자신의 외척윤탕노를 정국공신(靖國功臣)에 추천하였다. 그러자 박원종, 성희안 등은

윤탕노는 반정 때 한양 밖에 있어 반정에 참여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전하를 추대하려는 마음은 다른 이들의 배가 넘었을 것입니다.

라며 정국공신 3등에 임명한 바 있다. 이때 임명된 반정 공신의 수는 110명인데 개국공신의 수가 30명임에 비해서도 나눠먹기가 지나쳤다. 게다가 '윤당(允當) 대신'이라 불리며 연산군의 말마다 "윤당하신 분부이옵니다"라고 아부를 해대던 영의정 유순, 우의정 김수동[7], 연산군이 총애하던 시인 김감, 연산군에게 여자를 바치고 임숭재 급의 총애를 누렸던 구수영[8] 등 연산군의 측근들이 일을 꾸밀 때부터 가담한 것도 아니고 중종반정 당일 가담하고도 1등공신과 2등공신에 척척 배정되었다. 그런데 웃긴 것은 이과를 비롯해서 격문을 돌리고 군사까지 모집한 진짜 정국공신이 될만한 사람들은 "결국 한양에 있던게 아니니까 무효. 연산군 미워하던거야 만백성이 한마음 아니었음?"하면서 격이 떨어지는 원종공신에 봉해버렸다. 분노한 이과는 반정을 꾀했다가 들켜서 처형당한다.
대간(臺諫)과 홍문관(弘文館)은 이것을 연이어 비판하였고 정국의 불안정이 심화되었으나 때맞춰 신복의 옥사가 일어나면서 공신 개정 문제는 잠잠해진다. 그러자 이제는 연산군 대의 과거 청산 문제가 대두되며 무오사화 관련 논쟁이 일어난다. 그 결과 무오사화를 주동했던 유자광이 유배되고 사화를 입은 사대부들이 복권되면서 일단락되었다.
이러한 논쟁을 주도한 것은 대간이었으며 대간에 맞서는 반정 공신들은 도덕적인 결함들을 안고 있었으므로 대간의 공세에 적극적으로 맞서지 못했다. 이러한 실정에다가 반정을 이끈 성희안, 김수동, 유순정 등이 모두 사망하여 국정에 공백이 생겼다.
이에 중종은 공백을 메꿈과 더불어 자신의 친정 체제를 굳히기로 결심하였고 국정의 공백을 메꿀 세력으로 반정 세력을 궁지로 몰아대던 대간(사림)을 지목했다. 조광조의 등장 이전 정세가 이러하였으므로 조광조가 정치에 전면으로 등장할 수 있는 무대가 마련되었다.

2.2. 집안 내력과 초년기


한양 조씨 조원광과 여흥 민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조광조의 5대조 조상은 개국공신[9] 출신이었지만, 아버지 조원광은 역참을 관리하는 찰방[10]을 했었고, 조광조가 태어날 당시엔 가세가 몰락해 큰 권세는 없었다. 아버지가 압록강 인근 평안북도 희천의 찰방으로 부임하였을 때 무오사화가 일어났고, 그 결과 유학자 김굉필이 그곳으로 유배를 오게 되자, 17세였던 조광조는 아버지에게 간청하여 김굉필의 밑에서 학문을 배웠다고 한다. 김굉필에게 배운 유학은 조광조의 일평생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 뒤 18세에 결혼하였고, 19세에 아버지를 여읜다. 조광조는 조광보의 옥사 때 심문당하기도 했는데 무혐의로 풀려난다. 이는 조광조가 반정공신들을 비판하는 세력들과 가깝게 지냈다는 뜻도 된다.
1510년, 조광조는 29세의 나이에 진사시를 장원으로 통과하고 성균관에서 공부한다.

"생원 김식, 조광조 등이 언행을 함부로 하지 않고 관대를 벗지 않으며, 종일토록 단정히 앉아서 손님을 대하는 듯하였다. 그리고 그들을 본받는 자도 생겼다. 성균관에서 그들이 스스로 사성십철(四聖十哲)을 일컫는다고 하여 이들을 죄로 몰아넣으려 했으나, 그렇게 하지 못하였다."

조선왕조실록

이를 보면 조광조는 자신의 행동도 철저히 성리학의 가르침에 따르려고 하였다. 주위에서는 이를 비웃었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죄악시하기까지 하였지만, 한편으로는 조정에 조광조의 이름이 잘 알려져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조광조는 유생들 중에서도 돋보이는 존재였는지, 중종 5년 사정전에서 성균관의 유생들에게 강의를 하도록 했는데, 조광조가 대표로 나와 중용(中庸)을 강(講)하였다. 그 뒤 중종의 명으로 성균관에서 학문과 인품이 훌륭한 유생을 천거(薦擧)하게 하였는데, 200명 중에서 3명 정도를 천거하는 데에 들어가게 되었다.
이때 조광조의 천거를 많은 대신들이 반대하였다. 그 이유는 조광조가 천거를 받을 경우, 받는 관직이 참봉이나 별좌였는데, 이에 쓰기에는 조광조의 학문이 아깝고, 그가 학업에 정진함이 더 중요하다는 것이었다. 이에 조광조를 6품직에 바로 올려서 등용해야 한다는 여론이 나왔고, 이후 이조판서 안당의 천거로 1515년 조광조는 조지서(造紙署) 사지(司紙)로 임명되었다. 그 뒤 34살의 나이에 성균관의 전적으로 임명되며 정치 전면에 나섰다.
이미 뛰어난 수준의 학문을 익힌 조광조였지만, 늘 선비의 초심을 잃지 않겠다는 남다른 각오로, 어린 나이에 처음으로 읽는 책인 《소학(小學)》을 늘 손에서 놓지 않고 읽었다고 한다. 이 때문에 사람들은 천거로 벼슬길에 오른 조광조를 놀리면서, "소학을 열심히 읽어라. 그러면 조지서 사지는 할 수 있다."라는 노래를 지어 불렀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이후 조광조는 사지에 임명된 지 2달 만에 알성시를 치러 급제했다.

2.2.1. 사림파의 아이콘으로


스승 김굉필갑자사화로 죽었지만, 김굉필의 동문들이 아직 살아 있었다. 그리고 김굉필에게서 배출된 다른 제자들인 김정국, 김안국 등도 있었다.
조광조는 이들을 찾아다니며 학문과 정치, 시사를 토론하였다. 그중엔 훗날 조광조의 죽음을 방관했다고 알려졌지만, 사실 조광조의 죽음만은 막아주려고 했음에도 이런저런 사정으로 후세에까지 거의 소인배, 간신으로 매장당하게 되는 남곤도 있다.
하루는 남곤과 조광조가 산책을 나갔는데, 조광조는 젊은 아가씨들이 지나가자 계속 흘끔흘끔 쳐다보게 됐다. 그러나 남곤은 눈길 한번 안주고 그대로 앞만 보고 달려갔다. 집에 돌아온 조광조는 부끄러움에 자책하며 한탄하였으나, 어머니 여흥 민씨남곤을 무섭게 생각한다.

"젊은 사내가 어떻게 여자 보고 눈이 한 번도 안 돌아갈 수 있겠느냐? 그러나 남곤이란 친구는 참으로 무서운 사람이다.

목석 같은 사람이라 젊은이의 피가 끓지 않는 차가운 사람이다. 겉으로 보면 인격적으로 수양이 된 것처럼 보이겠으나, 속으로는 그도 아가씨들에게 마음이 쏠렸을 것이다. 그것을 속으로도 참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그런데 남곤은 한눈 하나 팔지 않았다면 얼마나 차갑고 모진 사람이냐.

훗날 남곤이 정치를 한다면 인정사정을 봐주지 않을 것이다. 사람의 약한 정, 미운 정을 헤아리지 않는 판단을 내릴 것이다. 인간이 살다보면 실수할 수도 있고 잘못을 저지를 수도 있는데, 남의 윗사람이 된 자는 너그러움이 있어야 된다. 죄지은 사람을 다음에 잘 하라고 용서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남곤은 그런 아량이 적어 많은 사람을 피 흘리게 하거나 외면할까봐 무섭구나."

이 말을 마친 조광조의 어머니는 짐을 싸서 남곤의 집에서 최대한 멀리 이사했다고 한다.
이 출처불명의 일화는 전혀 말이 안 된다. 일단 유사한 민담들이 너무 많다. 《삼국지》 등에서는 이 일화가 화흠관녕의 일화로 나온다. 즉 저 일화는 표절일 가능성이 높다. 더 재미있는 것은, 삼국지의 일화에서는 관녕이 남곤 포지션인데, 세속에 얽매이지 않는 긍정적인 인물로 묘사되어서, 세속적인 인물로 묘사되는 조광조 포지션인 화흠과 인연을 주도적으로 끊는다는 것이다. 한 가지 일화를 가져다가 정반대로 해석한 것. 또 조광조 다다음 세대뻘 되는 정인홍도 저런 에피소드가 있다. 게다가 조광조는 성균관 시절에부터 자세를 절대로 흐트러뜨리지 않고, 무더운 날에도 의관을 정제하고 수양에만 몰두했던 것으로 유명한 인물이다. 반면에 남곤은 훨씬 더 현실관료에 가까운 인물이었다.

2.3. '사림'에 의한 개혁을 꿈꾸다



2.3.1. 폐비 신씨 복위 논쟁


1515년, 증광문과에 합격해 본격적으로 조정에 출사하혀 3사 중 홍문관에 들어갔다.
중종 8년(1513) 박영문과 신윤무의 모반사건이 있었고, 천둥 번개가 여러 번 울리는 등의 일이 생기자 중종은 구언(求言)하라는 명을 내렸다. 이는 신하들에게 "아무 제안이나 좋으니 왕에게 상소를 올리라"는 명이었다. 이때(중종 10년) 박상과 김정은 중종의 첫 왕비였던 폐비 신씨(단경왕후)의 복위를 주장하는 상소를 올렸다. 폐비 신씨연산군의 처남이었던 신수근의 딸로[11], 중종반정 때 신수근이 살해당하고 신씨는 폐비된 바 있다. 이러한 신씨를 복위하자 함은 유교적 윤리에 입각한 것이다. "아내가 쫓겨남은 남편에게 잘못이 있거나 시부모에게 불효를 저질렀을 때에나 합당하므로, 이러한 잘못을 저지르지 않은 왕비가 폐위됨은 말도 안 된다"는 것이 이들의 생각이었다. 또한 이 폐위는 신하가 왕을 위협하여 왕비를 폐위한 것으로 해석되기도 하므로, 박상과 김정은 이를 복위함으로써 바로 잡아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때 박상과 김정은 상소문을 단단히 밀봉하고 "전하께서 직접 뜯어보소서."라는 쪽지를 위에 붙인다. 이를 본 승정원(비서실)은 뜯지 않고 중종에게 직접 올린다. 중종은 이를 읽어보고 놀라, 상소를 확인하지 않고 올린 승정원을 질책했다. 조정의 신하들은 사정을 알아내고 동요했다. 곧 대간에서는 박상과 김정을 탄핵했는데, 표면적으로는 "종묘사직을 위협하는 발언을 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내부적으로는 이들이 반정세력의 도덕성과 왕의 무능을 정면으로 꼬집었기 때문이었다. 때문에 이들은 구금되고 심문당한 끝에 결국 유배형에 처해졌다.
이때 조광조는 알성문과에 급제한 뒤 성균관 전적을 2달간 지내고 사간원 정언에 임명되었다. 이때 조광조는 상소를 제출하여,

박상과 김정은 전하의 구언의 명에 따랐을 뿐입니다. 만일 내용에 문제가 있다면 상소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되지, 처벌을 할 필요가 어디 있습니까? 대간은 나서서 이들의 처벌을 주장하였고 결국 그들을 처벌하게 되었습니다. 대간의 직분은 언로(言路)를 열어야 그들의 직분을 다하는 것입니다. 만일 재상들이 그들을 처벌하자고 해도, 대간은 그들을 용납하자고 하여 언로를 넓혀야 합니다. 저는 정언에 임명되었으나 이들과 어찌 함께 근무하겠습니까? 저와 그들은 서로 용납할 수 없으니, 사헌부사간원의 대간을 전원 파직하고 언로를 여시기 바랍니다.

라고 말하였다.
이 발언에 조정은 크게 동요하였다. 우선 박상과 김정을 탄핵한 대사헌[12]이었던 권민수의 후임 대사헌 이장곤이 이 발언을 지지하였다. 그리고 조광조와 같은 견해를 가진 관료들이 하나둘씩 발언하기 시작하였다. 그러자 대간에 남아 탄핵을 주동한 적이 있었던 사헌부의 관료들은 여전히 그들의 주장을 고집하며, "종묘사직이 언로보다 더 중요한데[13] 조광조의 처사는 옳지 못하다"고 말한다. 반정공신들 역시 조광조를 비판하는 발언을 했다.
그러자 홍문관의 전체 관원이 나서서, "조광조의 견해가 옳긴 하지만, 전 대간도 종묘와 사직을 위해 결단하였으니 그르다고 할 수는 없다"는 양시론(兩是論)을 주장한다. 그러자 중종은 "한쪽이 옳으면 옳은 것이지, 양쪽이 옳다고 하는 것은 안 된다."라고 하였다. (《중종실록》 권 23권 10년 11월) 그러자 사간원은 "사헌부가 이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 있다"고 비난하였고, 이들은 "우리는 조광조가 옳다고 생각하는데, 사헌부는 양시론을 주장하고 있으니, 이는 책임을 회피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자 중종은 당황하여, "조광조 한 사람의 발언 때문에 모든 관료들이 서로 대립하다니 매우 놀랍다. 어찌하여 이 조정에 이런 큰 변고가 있는가?"라며 질책했다.
그래도 논란이 계속되자 중종은 대신들을 불러 의견을 물었다. 영의정 유순은 "조광조나 대간의 주장이 다 옳은 것이다. 박상과 김정의 처벌을 경감하자."라고 말하며 살짝 논쟁의 핵심을 벗어난다. 그러자 좌의정 정광필ㆍ우의정 김응기ㆍ우찬성 김전ㆍ우참찬 남곤은 "조광조의 견해가 옳다."고 하였고, "이에 따라 대간의 거취를 정해야 한다."고 말하였다. 그러자 양시론을 가장 처음 주장했던 홍문관(弘文館) 부제학 김근사가 "의정부의 대신들이 화목을 도모하지 않고, 조광조의 편을 듦으로써 분란을 키운다."라고 비판했다. 대신들은 이 말을 듣고 "홍문관으로부터 비난을 받았다"며 사직을 청한다. 그러자 중종은 만류하며 수습했다.
결국 조광조의 발언 때문에 사태가 눈덩이처럼 커졌고,[14] 결국엔 좌의정 정광필을 비롯한 많은 관료들이 "박상과 김정의 죄를 용서해야 한다." 하고 주장하였다. 결국 대간은 교체되었고, 중종 11년(1516), 조광조는 3월 6일에 홍문관 부수찬이 되고, 3월 28일에는 홍문관 수찬으로 승진했다. 5월 22일에는 경연검토관이 되었고, 11월엔 박상과 김정이 복직함으로써 논쟁이 조광조의 완승으로 끝났다.

2.3.2. 정몽주김굉필의 문묘 배향에 대한 논쟁


1년 뒤인 중종 12년 10월, 정몽주를 비롯한 성삼문, 박팽년 등의 문묘 종사 논쟁이 벌어지게 된다.
이때 영의정인 정광필은, "성삼문, 박팽년에 대해서는 아직 보류하는 게 좋다"고 답했고,[15] 다만 정몽주에 대해서는 모두 문묘 배향에 동의한다. 이때 우의정 이자가 조광조의 스승이었던 김굉필을 언급하며 그를 포상하자고 하였고, 중종도 동의하여 이들의 자손을 등용하라는 명을 내린다.
이틀 뒤 성균관 생원 권전이, "정몽주뿐 아니라 김굉필도 문묘에 배향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러자 많은 신하들이, "김굉필이 뚜렷이 족적을 남긴 것도 아닌데 문묘에 배향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며 반대한다. 중종 역시 "자격이 없는 자를 문묘에 배향하는 것은 옳지 않다"라고 언급한다. 그러자 조광조는 "김굉필 같이 행실이 바른 자는 찾기 어렵다"고 발언한다.
또한 조광조는 뒤이어, "많은 유생들이 김굉필을 칭송하므로 그의 사람됨을 알 만 합니다" 라고 칭찬하며, "그는 행실로 유학의 모범을 보였으니 사람들이 그렇게 받드는 것이며, 그렇다면 배향해도 괜찮지 않겠냐"는 주장을 펼쳤다. 그러자 영의정 정광필을 비롯한 원로대신들은, "정몽주는 괜찮으나, 김굉필은 비록 그가 뛰어난 유학자이긴 했어도, 짧은 삶을 살았으므로[16] 성리학을 떨치지 못하였다"고 지적한다.
하지만 중종은 "정몽주도 배향하면 안 된다"고 하였는데, 그 이유는 "정몽주가 우왕을 섬겼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그러자 조광조는 "당시 사람들은 우왕이 왕씨인지 신씨인지 몰랐을 뿐 아니라[17] 정몽주가 그의 밑에서 벼슬을 한 것은 부귀영화를 원해서가 아니었기 때문에 흠이 안 된다"고 한다.
결국 원로대신들과 중종은 양보하여 "정몽주를 문묘에 배향하되, 김굉필은 그럴 수 없다"는 타협안을 내밀었고, 조광조와 그를 따르는 사람들은 더 이상 이를 논의하지 않는다. 그들은 정몽주를 문묘에 종사하는 것만으로도 만족한 것이다.
조광조와 그의 세력은 신진 사림파 세력이었고, 사림은 성리학을 내세우는 학파들이었다. 정몽주는 조선 성리학의 시조였고, 또한 김굉필은 사림들의 존경을 받는 사람이며, 젊은 사림들의 우두머리로 떠오른 조광조의 스승이었다. 이들 신진 사림은 이들을 문묘에 배향하게 함으로써 조선의 성리학화를 더욱 촉진하고, 나아가 자신들의 사상적 뿌리로 여겨지는 정몽주의 문묘 배향을 통해, 자신들의 학문적 권위를 높이려고 했으리라 생각된다.
하지만 중종은 신진 사림을 밀어주는 입장이면서도, 이들이 훈구세력과 적당히 균형을 이루길 원했으므로, 이들의 손을 완전히 들어줄 수는 없었다. 또한 김굉필을 배향하자는 것은 조광조에 호의적이었던 정광필 같은 대신들도 반대할 정도로 억지성이 강했다. 이들이 김굉필을 민 것은 아무리 봐도 조광조의 스승이라는 것 때문이지, 김굉필이 성리학에 큰 공헌을 해서가 아니었다.[18]
만일 김굉필을 문묘에 배향한다면, 김굉필의 제자인 조광조는 문묘에 배향된 대유학자의 수제자가 되는 셈인데, 그렇잖아도 신진 사림파의 필두(筆頭)였던 조광조는 국가 이념의 스승의 지위까지 갖게 되는 셈이었다. 이는 지나칠 정도의 권력집중이었다. 이런 그들의 속셈을 당시 반정 세력들과 왕이 눈치 채지 못할 리 없었다. 사실 김굉필의 문묘 배향은 이후에 실현되기는 하지만, 이것은 사림이 조선을 장악하고도 시간이 흐른 광해군 시기의 일이고, 그나마도 조광조를 신원해준 후의 후속 조치나 마찬가지였다. 현재의 기준으로 보아도, 김굉필의 문묘 종사는 정몽주에서 시작해서 조광조까지 이어지는 학맥을 전부 문묘에 종사하는 과정에 편승한 정도이다. 따라서 김굉필을 문묘로 모시자고 주장한 것은, 신진 사림의 권력 강화를 위한 정치적 노림수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2.3.3. 군자, 소인의 논쟁


중종 13년 5월 15일, 한양에서 큰 지진이 일어난다. 담장과 집, 성벽이 무너질 정도였다. 당시 천재지변(天災地變)은 사람의 잘못에 하늘이 노한 탓이라고 생각하였기에, 왕은 신하들을 불러 긴급회의를 갖는다.
이때의 논의에서, "지진은 음양이 쇠했기 때문이며, 음은 소인이고 양은 군자이니 조정에 소인이 가득해서 생긴 결과"라는 설이 대두된다. 이때 반정공신 중 하나였던 조계상이, "소인들의 행적은 겉보기엔 알 수 없고, 따라서 왕을 바른 도로 인도한다고 하지만, 실은 그들의 야심을 채우기 위한 수작"이라는 말을 한다.
이에 신진 사림파들은 격분하였고, 조계상과 그를 옹호한 장순손을 "군자를 해치려는 간사한 소인"이라고 지목해 탄핵하기 시작하였다. 이때 참잔관 권벌, 대사헌 고형산 등이 합세하여 탄핵한다. 결국 중종은 조계상을 파직하나, 장순손은 가볍다고 보고 파직에 동의하지 않는다. 영의정 정광필은 "단지 말 한마디 잘못한 것 가지고 재상을 처벌하는 것은 지나치다" 라고 하였는데, 대간은 이것에 동의하지 않는다.
5월 20일, 경연에서, 당시 홍문관 부제학이었던 조광조는, "대간과 홍문관의 견해는 한 사람의 견해가 아닌 모두의 공론"이라고 말하며 중종을 설득한다. 마침내 중종은 그 둘의 고신(告身)[19]을 빼앗고 파직을 명한다.
위의 논쟁은 사소한 듯 보이나, 신진 사림과 반정공신들이 직접적으로 부딪힌 최초의 사례라는 의미가 있다. 조계상은 반정에 가담하여 정국공신 2등에 임명된 데다, 조광조가 등용되기 전엔 대사헌, 예조참판, 이조참판을 지낸 거물이었다.
반정공신들은 그동안 폐비 신씨(단경왕후)에 대한 논쟁, 문묘 배향, 그리고 소격서 폐지 등, 이들 성리학을 이념으로 삼는 사림들의 행보를 방관만 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그 이유는 그들 역시 유학자 출신으로 성리학을 이념으로 삼는 것에 딱히 반대할 이유가 없었고, 또한 사림들의 행보가 그들과 직접적으로 관련이 있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군자와 소인 논쟁은 위의 사건들과 다르다고 볼 수 있는데, 그 이유는 반정공신 중 거물급에 속하는 인물들이 신진 사림의 탄핵을 직접 받아 실각한 최초의 사례였기 때문이다.

2.3.4. 현량과(賢良科: 천거제)


중종 13년 2월, 경연에서, 홍문관 부제학이었던 조광조가 다음과 같은 건의를 한다.

경연에 참여할 시종을 뽑읍시다. 그런데 경연은 왕과 더불어 강론하는 자리이므로 학문이 깊은 사람을 뽑아야 하는데, 그러한 사람들은 이미 조정의 고관들입니다. 말단의 관료들을 왕과 같이 있는 자리에 동행할 수는 없으므로, 특별히 사람을 뽑아 시종으로 등용해야 합니다.

즉 위의 말은, 상당한 고위직에 오를 사람을 천거로 통해 바로 뽑자는 뜻이었다.
그러자 대사헌 최축생도 거들었다.

그동안 유능한 인재가 천거되어도, 과거시험 급제자들과 차별되어 임용되었기 때문에 이들을 쓰지 못하였습니다. 따라서 종래의 천거제가 아닌, 과거 급제자와 동등한 취급을 받을 수 있는 천거제를 운용합시다.

뒤이어 조광조는 천거제의 방식과 과거제도의 문제점을 말한다.

지방에선 감사, 수령이, 한양에서는 홍문관, 육경, 대간이 천거한 뒤, 그 인재들을 한 데 모아 왕이 직접 면담하여 시험한다면, 많은 인재를 얻을 수 있습니다. 이는 한나라에 시행했던 현량방정과와 같은 것입니다. 과거시험의 문제점은, 글재주만 있는 자만 선발되기에 그 사람의 행실을 알 수 없다는 것입니다. 반면, 천거제는 행실 등도 모두 감안한 뒤 뽑는 것이므로 이상적입니다.

다음날 대간에서는 "천거제는 한나라의 현량과와 효렴과의 방식을 따르는 것이므로 문제가 없으며, 이는 조광조의 한 사람의 견해가 아니라, 성균관 등에서 이미 논의된 내용"이라고 말한다. 그러자 영의정 정광필은 반대하는데, 그 이유로 "과거 시험에서도 재주와 행실이 빠질 수 있듯, 천거제에서도 그러한 인물들이 빠질 수 있고, 또한 이 천거제로 인한 폐단을 알 수 없으므로 과거의 법을 그대로 따르는 것이 좋다"는 것을 들었다.
남곤 역시 현량과에 반대한다. 그는 천거제도의 폐단을 언급했다.

중국에서 과거제도가 마련된 것은, 현량과, 효렴과 등의 폐단을 거친 뒤의 일입니다. 당시의 천거된 사람들은 천거한 사람과 인연이 있는 사람들이었고, 정작 재주가 있던 사람들은 누락되었습니다. 그렇다고 천거를 잘못하였다고 천거한 사람을 처벌할 수도 없으므로[20]

, 이러한 폐단이 일어나는 것을 법적으로 규제할 수도 없습니다. 따라서 천거로 선발하는 것은 어쩌다 한번 할 수는 있어도, 항상 시행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자 김정은 이를 받아, "사소한 문제점을 걱정해서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으면, 어느 세월에 교화를 하겠냐"고 말한다. 조광조는 이를 받아 발언하길, "천거제를 시행하되, 과거시험 역시 유지할 것이므로, 재주가 있는 사람이 천거에서 빠졌다고 걱정할 필요는 없다"고 말하는데, 그 이유를 "재주 있는 사람은 과거시험을 치르면 되기 때문"이라고 하였다.[21]
조광조의 "천거제와 과거제를 병행하자"는 제안은 안당 같은 대신의 동의를 얻는 데 성공한다. 그리고 중종 역시 "천거제를 속히 시행하라"는 명을 내린다. 곧이어 세부적인 절차가 마련되는데, 한양의 경우 중추부, 육조, 한성부, 홍문관에서 인재를 찾아내면 성균관에 보고하고, 그러면 성균관에서는 이를 예조에 보고한다. 그리고 지방의 경우, 향약(鄕約)에서 추천된 인재들은 수령에게 보고되며, 수령은 관찰사에게 보고하고, 관찰사는 이들을 심사한 뒤 예조에 보고한다. 예조는 이들을 한 데 모아 시험을 보고, 천거자의 잘못을 막기 위해, 천거자의 이름을 그들의 이름과 나란히 적어 놓게 한다.
이렇게 중종 13년 6월에 천거제가 정해졌는데, 이의 실행은 지지부진하였다. 이는 조정에서 반대하는 세력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중종 14년 2월에 누가 대궐에 익명의 편지를 매단 화살을 쏜 일이 있었는데, 그 편지는 승정원(비서실)에서 곧바로 불태웠기에, 그 편지의 내용은 알려지지 않는다. 그런데 중종이 "소인이 군자를 해치기 위해 한 짓"이라고 말하고, 또한 신용개는, 이를 쓴 사람이 "조정에 깊이 관여하고 있는 누군가가 한 짓"이라고 말한다.
현량과로 천거된 사람들은 벼슬 초년생들임에도 불구하고, 종 6품, 7품의 (상대적으로) 고위직을 척척 받았고,[22] 이에 정광필이 "세종대왕께서도 '신하를 예우하는 방법은 자급뿐이다'라고 하셨는데, 처음부터 이런 높은 자리를 함부로 내리는 것은 폐단이 클 것입니다" 라고 다시 만류했으나 씹혔다(…).
그리고 곧이어 강윤희 고변 사건이 터진다. 강윤희는 정국공신인 김우증을 고발하였는데, 그 이유는 김우증이, "현량과 출신이 조정에 들어오면 정국공신을 다 죽일 것이다. 그 전에 이들을 쳐 없애자." 라고 말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김우증은 "화살 사건이 일어난 것도, 이를 우려했으므로 벌어진 일"이라고 말했다고 하였다.
그 사건을 조사한 결과, 김우증은 유배를 당하게 되고,[23] 현량과는 탄력을 받아, 그 결과 마침내 중종 14년 4월, 28명을 최종 선발한다.
현량과의 인재들은 과거시험을 치른 급제자들과는 달리, 상당한 지위에 등용될 만한 사람들을 뽑는 게 목적이었으므로, 평균 연령이 35세가 넘었고, 또한 그 중 12명이 관직을 갖고 있었다. 게다가 반대한 사람들이 우려한 대로, 이들은 명문 귀족 출신의 자제들로 정부와 상당한 연줄이 있었던 사람들이 대부분이었으며, 대부분 한양에 거주하였다. 이는 '숨어 있는 인재들을 널리 구한다'며 내세운 애초의 취지와는 달랐다.[24]
뿐만 아니라 천거제를 시행한 것은 조광조를 위시한 사림(士林)들이었으므로, 당연히 이들이 뽑은 자들은 전부 사림(士林)들이었으며, 따라서 이들의 유입은 가뜩이나 신진 사림의 대두로 골치를 썩이던 반정공신들에게 불리한 영향을 주게 된다. 게다가 도덕성을 내세우며 스스로를 자랑스러워한다는 그들의 말과는 다르게, 공정성과도 거리가 멀었던지, 안당의 세 아들인 안처겸, 안처근, 안처성 3형제가 전국에서 28명을 뽑는 현량과에 함께 급제하게 된다.[25] 여기에 김식, 박훈, 정완, 송효직은 분명한 조광조 일파였다. 때문에 반정공신들이 "조광조가 그의 야욕 때문에 현량과를 이용하여, 자기 파벌의 사람들의 수를 늘린다"고 판단하는 게 당연했고, 이로써 그들이 조광조에 대해 가지고 있던 적개심이 구체화된다.[26]
사실 '과거제도만으로는 인재를 뽑는데 한계가 있다'는 것은 조선왕조 내내 고민되어 온 부분이기 때문에, 옛 제도를 부활시켜 지금 제도와 병행해 보자는 발상 자체는 옳다고 볼 수도 있었다. 문제는 그 옛 제도를 부활시켜 봤더만 시행하기 무섭게 옛 제도가 가진 문제점과 폐단이 다시 튀어나왔다는 것이다. 더 큰 문제는, 천 년 전 시작된 제도를 조선 시대에 적용시키려면 그에 걸맞은 개선책이 반드시 함께 했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개선은커녕 개악을 한 수준이라[27] 제도 자체의 장점은 하나도 없는 것이나 다름 없었다. 조광조 이전에도 물론 현량과 비슷한게 없던 건 아니었다. 태종 때 태종이 하륜에게 현량을 추천하라고 했더니만 함량미달의 측근들만 추천했다는 것이나, 왕이 대신들의 추천을 받아 등용하기도 했던 것, 특히 학문적 명성을 쌓은 이들을 두고 대신이나 대간들이 벼슬을 내리자고 하는 기록은 많다. 하지만 그것들도 상설적인 건 아니었으며, 무엇보다 태종과 하륜의 사례에서 보듯 상설적이 아니라도 문제는 얼마든지 나올 수 있었다. 앞서 나온 김정의 반론은 뭘 모르고 한 소리와 다름없는 셈이다. 논리적으로 보면 남곤이 한 수 위다. 남곤이 우회적으로[28] "한나라그거 했다가 말아먹었는데요?" 라고 경고하자 김정이 "그런 사소한 거 신경 쓰지 맙시다." 라고 받아쳤는데, 나라 말아먹는 게 사소한 일인가?[29]
결과적으로 보면 현량과는 대실패였다. 1000년도 더 전 한나라가 했다가 말아먹은 걸 그대로 복사해서 조선에 갖다 붙인 셈[30]이었으니까. 또 다른 한편으로는, 사림들의 자신들에 대한 인식과 타 세력에 대한 인식이 어떤 정도로 한심하게 보고 있는지도 엿볼 수 있다.[31] 더욱이 기묘사화가 일어나지 않고 어찌저찌 넘어가서 중용되었다 한들 역시나 현량과는 폐해만 더더욱 키웠을게 뻔하다. 그 향거리선제마저 추천받은 자가 사고치면 추천한 자까지 처벌하는 등의 조치로 신중을 기하게 했는데[32] 현량과는 그것도 없었으니, 결과적으로는 조광조같이 이상만 있고 나머지는 맹탕인 이들만 남게 될 것이고, 오히려 본래의 의미를 상실해버릴 가능성이 100%다. 현량과가 정말 그렇게 좋은 제도였다면 선조 이후 집권한 사림파들이 현량과를 실시하자고 했을 텐데, 그 누구 하나 그러지 않았다. 같은 사림계열임에도 현량과의 문제점을 인정했다는 반증으로 볼 수 있을 듯하다.[33]
더군다나 현량과 실시 관련에서 보면 알겠지만 논리적으로 보면 반대파인 정광필, 남곤 등등의 논리가 더 탄탄하다. 정광필은 "과거제에 문제가 많듯 천거제에도 문제가 많을 수 있다"는 문제제기를 했으며, 남곤은 아예 실패 사례를 언급했다. 반면 조광조 일파의 논리는 어떠한가? 일단 처음 내세운 이유는 "과거제도로는 인재를 다 찾을 수 없으니 시행하자!" 라는것이다. 뭐 이 취지만큼은 좋았다. 앞서 말했듯 과거제로는 인재를 다 선발하는 게 불가능하고, 현재 과거제와 가장 유사한 공채 같은 것에서도 보면 거기서 올라온 이들이 문제를 일으키는 일이 없지 않다는데서 보듯[34], 분명 문제제기 자체는 맞는 말이었다.
그러나 이는 첫단추가 잘못되었다. 조광조가 말한대로 현량과는 향거리선제에서 따온 제도인데, 그렇다면 향거리선제의 장점과 단점을 파악하고 장점은 살리고 단점은 개선하는 방식으로 밀어야 했다.[35] 그러나 조광조는 이를 그대로 복붙만 했을 뿐이었다. 아니 오히려 그것조차도 아니다. 심지어는 향거리선제에 있었던 견제 장치는 죄다 떼어먹은 채로 올려, 오히려 향거리선제만도 못한 제도를 건의한 것이었다. 여기까지는 괜찮다. 사람은 누구나 실수를 할 수 있고, 어차피 조선 정차상 반대가 나오는 만큼 합리적인 반론이 나오면 철회 혹은 고치면 되니까. 하지만 문제는 다음부터다. 정광필, 남곤은 반대했고, 이제는 이에 반론을 제기해야 했다. 하지만 정광필, 남곤의 논리에 제대로 된 반박을 내놓기는커녕 김정은 "그까짓 거에 신경쓰면 교화는 언제 하나?" 라는 전혀 논리적이지 않는 헛소리나 하고 있었고, 조광조는 그나마 이에 개선책을 내놓았다만 여전히 반대파 입장에서는 동의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결국 조광조와 김정은 정광필남곤의 반대 논리에 대해 제대로 된 반박을 못했고, 반대파들을 끌어안지도 못했다. 어떠한 제도나 정책을 내세울 거면, 그를 뒷받침할 논리를 내세우고 장점을 강조하고 단점에 반박할 준비를 해야 한다. 그래야 반대파들을 설득하거나 반박해서 정책을 내세우는데 더 용이한 환경을 마련할 수 있다.[36] 문제는 조광조의 현량과 제시는 남곤에게 완벽히 논파되었고, 이를 반박한 김정은 논리성이 없는 주장으로 논파하려고 했다는 점이다. 조광조는 그나마 김정과는 달리 이를 개선했고, 실제로 처음 올린 것과는 달리 천거자를 분명하게 밝히고 과거제를 참고하여 그래도 처음보다는 좀 더 나아지긴 했다. 하지만 반대파들에게는 여전히 '그게 그거'라는 인식이었고, 더 문제가 되는 건 취지와는 전혀 다르게 흘러가버린 것이다.
어쩌면 이 현량과 논란은, 조광조와 김정의 현실정치가로서의 한계를 여실히 드러낸 면일지도 모른다. 김정은 논리성을 찾아볼 수 없는 반박을 했다. 조광조는 그래도 꼴에 리더라면서도 반대파를 설득시키기엔 한없이 부족한 모습을 보였으며, 결정적으로 반대파들의[37] 우려대로 자파 세력만 기용하였다. 현실을 감안한다면 (이것도 그다지 좋은 거라 말할 순 없지만) 반대파에 있던 이들 몇 명도 슬쩍 끼워주어 반대파 내부의 분열을 유도하든지, 아니면 "반대파도 우리의 동지가 될 수 있다"는 뜻을 보인다든지 할 텐데, 그런 건 없고 무조건적인 배척만 보였다. 혹여나 현대 정치에 와서 누군가 이런 제도를 실시하자고 주장한다면 그것이 허울뿐인 눈 가리고 아웅, 보여주기식이라 할지라도 지방별로 28명의 쿼터를 분산하고, 블라인드 면접을 실시하는 등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한 장치들을 어떻게든 만들었을 것이다. 조광조 측은 현실은 조금도 생각도 않은 셈. 당시 조광조 일파는 절대적으로 왕의 총애에만 기대어야 할 수준으로, 말하자면 내시와 별 다를 바 없는 권력기반을 가지고 있었다.[38] 반면 반대파들은 상당수가 공신이라는 지위, 그에 기반하는 재산과 벼슬, 그것도 아니라면 정광필처럼 명망이나 남곤 같은 실력 등이 있었다. 하지만 이들은 그 모든 면에서 불리한 채 왕의 총애만 기대야 하는 처지에 이런 무리수를 둔것이다. 비약해서 보면 결국 현량과 실시는 조광조의 몰락과 연계되어 있다고 봐도 될 듯하다.
물론 조광조의 몰락 때는 3사 관원, 대신들 심지어 유생까지 반대했다. 하지만 이후 보면 알겠지만 그들의 반대파가 돌아오자 언제 그랬냐는 듯 대간들의 요구로 현량과는 폐지되고, 그 합격자들도 모두 합격 취소가 되었으며, 조광조 사사 얘기가 나왔고(후술하겠지만 그나마 정광필남곤은 시종일관 반대), 이후 조광조 일파의 핵심 인물들도 줄줄이 죽어나간다. 즉 반대파들이 조광조를 감싸준 게 아니라, 미처 교체되지 않은 기존에 조정에 있던 이들이 조광조를 감싸준 것이다. 외려 조광조에게 크게 반대했던 정광필, 남곤이 조광조를 끝까지 지키려고 한 셈. 이것만 봐도 남곤을 소인으로 본 조광조 세력이 얼마나 어리석었는지 보여준다.

2.3.5. 소격서(昭格署) 폐지 논란


태조 이성계는 즉위 이전 도교에 상당한 관심을 보여 태백금성에게 제를 올리기도 했으나, 즉위 원년(1392년)에 예조의 건의를 받아들여 한 곳을 제외한 초제(醮祭) 장소를 모두 폐쇄시켰다. 유일하게 남은 곳이 소격전(昭格殿)으로 뒷날의 소격서(昭格署)이다.
태조는 이곳에서 기우제나, 하늘에 이변이 있을 시 초제를 지내곤 했다. 태조 3년(1394년) 5월 이곳에서 초제를 지냈으며, 같은 해 8월에 대신들이 천도에 관한 논의를 제대로 결론내리지 못하자 소격전에 거동해 가부를 점치기도 했다. 태종 2년(1402년) 대제학 이첨을 보내 초제를 지내고, 세종 9년(1427년)에는 왕자의 탄생을 맞아 이곳에서 개복신초례를 지내는 등, 유교국가 조선 성립 이후에도 소격전은 국가제전의 일부로서 유지되었다.
그러나 "도교와 관련되었으므로 폐지해야 한다"는 논의가 일각에서 제기되었다. 세종 7년(1425년) 7월, 세종대왕은 "도교와 불교의 가르침은 허황된 것이며 특히 도사들의 말은 더욱 허황되다"고 비판하면서도, "소격전에서 제사 지냄은 오랜 관습이므로 지금에 와서 폐지할 수는 없다"고 하였다.
세조 12년(1466년) 관제 개혁으로 소격전은 소격서로 명칭이 바뀌고 령(令)을 두어 정5품으로 하였다. 이 같은 변화는 소격서가 종교성이 약해지고 완연한 국가 기관으로 변하였음을 보여준다. 종교성은 사라졌지만 기존의 기능은 그대로 유지되어 세조 12년(1466년) 10월 사직(社稷), 종묘(宗廟)에 기제(祈祭)를 지냈다. 예종, 성종도 이를 이어갔다.
유교 원리에 충실했던 성종도, 재위 8년(1477년) 2월 왕자가 병에 걸리자 사직, 종묘와 함께 소격서에 제사를 올렸다. 성종 12년(1481년) 6월의 기사를 보면, 가뭄을 맞아 흥천사에 기우제를 지낸 것을 두고 홍문관 부제학 이맹현이 "부처님에게 빌어 비를 내리게 했다는 말은 사서를 아무리 뒤져도 상고할 수 없는데, 왜 그토록 부질없는 일에 기대십니까?"라는 상소를 올린다. 이에 성종은 그렇게 "따지면 소격서에 제사 지내는 것도 허황된 거 아니냐, 제를 지내는 것은 백성을 가엾게 여겨 정성을 다하는 것뿐이다"라고 반문했다.
그러나 재위 15년(1484년) 1월, 성종은 자신이 먼저 승정원소격서 혁파에 대해 하문한다. 이때는 오히려 좌승지(左承旨) 권건(權健), 좌부승지 이덕숭(李德崇)이 "국가의 오랜 관례를 바꿀 수 없습니다"라고 반대했다. 성종은 "소격서의 유지 관리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으며, 그곳에서 치러지는 제사도 정결하고 정성스럽지 못하다"고 지적하며, 이를 보완할 제도적 장치를 마련할 것을 지시했다. 5일 뒤 승정원에서 소격서 유지 관리 및 제사에 대한 규정을 담은 소격서검찰사목(昭格署檢察事目)을 만들어 올렸다. 성종 23년(1492년) 1월, 경연 자리에서 시독관(侍讀官) 이달선(李達善)이 "소격서는 도교를 위해 설치한 것으로 정도를 벗어났습니다"라고 간언했지만, 성종은 "정도를 벗어난 점은 인정하되, 옛부터 있던 것이므로 없앨 수 없다"고 답했다.
소격서는 중종 이전까지 그다지 중요한 관청이 아니었다. 여기에서 지내는 제사나 기도도 별로 주목받지 않아서 운영에 미비한 점이 있었다. 폐지 주장도 간간히 제기될 뿐이었고, 그나마도 중요한 쟁점이 되진 않았다.
소격서를 두고 "중국 천자처럼 산천에 제사를 지내 왕권을 강화하는 수단이었다"는 주장이 있는데, 이는 중종의 반응만 대충 보고 내린 결론으로 전혀 그렇지 않았다. 역대 국왕들이 소격서에 보인 방침은 "오랜 관례라 없앨 수 없다"는 것으로 한결같았다. 운영과 제사가 부실해서 국왕이 먼저 폐지 안건을 꺼내는 기관이, 왕권과 얼마나 연관이 있을까? 정말 왕권과 밀접한 관련이 있던 고려팔관회와 비교하면 국왕의 관심도 차이가 확연하다. 소격서는 그 자체로 단 한 번도 중요했던 적이 없었고, 그래서 중종 이전에는 큰 말이 나오지 않았던 것이다.
조선 건국 초부터 있었지만 한번도 중요시되지 않았던 소격서는 중종 13년(1518년) 음력 8월 초하루, 홍문관 부제학 조광조가 소격서 혁파를 주장하는 상소를 올리면서 매우 중요한 정치적 쟁점으로 변모한다. 발단은 종묘 대제에 쓸 제물인 가 종묘의 문턱을 넘다가 쓰러져 죽은 것이었다. 삼공과 예관 등 중요 대신들이 모두 참관한 자리였으므로 더욱 파문이 컸다.
중종은 신하들을 모아놓고 대책회의를 열었는데, 자리에서 조광조는 "조선의 제례가 옛 방식과 맞지 않아 벌어진 일입니다."라고 말하였다. 그러자 좌의정 신용개는 "제례 방식을 바로잡기 위해 우선 소격서와 같은 도교식 제례 의식을 하는 관청을 폐지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영의정 정광필은 "이는 옛날부터 해온 것이므로 굳이 폐지할 필요는 없다."면서 반대하였다.
그 뒤 잠잠해졌다가, 홍문관 관료 1명이 소격서 폐지를 청하는 상소를 제출하면서 논란이 불붙는다. 그 뒤 8월에 홍문관 부제학으로 승진한 조광조가 소격서의 폐지를 심각하게 재론하여 소격서 논쟁이 매우 격화된다. 조광조는 상소에서 "세상을 규범하는 것은 오직 성리학뿐이며, 다른 이단을 모두 혁파해야 합니다"라고 역설하고, 중종이 소격서 폐지를 망설이는 것을 강하게 비판한다.

"…왕께서는 단단하고 굳은 것은 버리고, 유약하고 부질없는 것을 생각하며, 이리저리 정처 없이 헤매며 부질없는 것에 연연해하며 용단을 내리지 못하고 계십니다…"(《중종실록》 13년 8월)

이에 중종은, "소격서는 오래돼서 혁파하지 않는 것"이라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김정이 "전대의 잘못된 일을 후대에 반복하면 안 됩니다. 전하께서 받아들이지 않으면 대간은 전원이 사직하겠습니다."라고 강경하게 대응한다. 중종이 "설령 그리 되더라도 소격서는 폐지할 수 없다." 하며 거부하자, 당시 도승지였던 문근은 "전하의 완고한 태도가 놀랍습니다."라며 비판한다.
이후 거의 1달 뒤에 영의정 정광필, 좌의정 신용개, 우의정 안당 등도 나서서, "소격서를 혁파함이 옳다." 하고 주장한다. 그런데도 중종은 거부하고, 대간은 출근을 거부한다. 이때 과거를 시행할 시기가 다가오자 중종은,

"대간은 반드시 복직하지 않을 것이다. 소격서 문제는 오래 토론해도 무관하지만, 과거는 왕정의 대사라 결코 미룰 수는 없다. 그러니 대간을 교체하는 것이 좋겠다. 오늘 중으로 빨리 다른 대간을 뽑도록 하라."

이처럼 "대간을 모두 교체하고 새로 뽑으라"는 강경한 명을 내린다. 그러자 조광조는 이를 받아,

"… 이는 암군(暗君)이 하는 일입니다. … 오늘날 일어나는 일은 너무도 그릇되어 저희들이 눈을 씻고 보기 힘들 정도입니다. 마음과 말이 격분하여 말씀드릴 바를 모르겠습니다.“(《중종실록》 13년 8월 30일)

라며 강하게 대답한다.
9월에 접어들자 마침내 조광조도 사직을 요청한다. 그런데도 중종이 뜻을 굽히지 않자 조광조는

"연산군 이후 새로운 풍조가 생겼는데, 이러한 문제로 인하여 사람들은 실망하게 되었고 이로 원기(元氣)를 배양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 국사가 날로 어지러워지니 저의 마음이 아프고 애통함을 진실로 다 아뢸 수 없습니다."

라고 답한다.
중종이 "대간을 혁파하는 한이 있어도 과거를 미룰 수는 없으며, 과거를 미룰 수는 있어도 소격서를 혁파할 순 없다"는 입장을 분명히 하자, 조광조는 거꾸로 "과거를 미루거나 일시 폐할 수는 있어도, 소격서는 당장 폐지해야 합니다!"라고 주장했다. 이때 조광조는 소격서를 연산군의 폐정에 비유하여 비판했다. 조광조는 이 문제가 중종반정 이후 조금씩 자리잡기 시작한 새로운 기풍의 진작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보았다. 소격서는 결코 대단한 기관이 아니었지만 도교와 관련되었으므로 폐지하자고 주장하였고, 더 나아가 이런 작은 것조차 바로 잡지 못한다면 성리학 이념에 의한 새로운 정치는 이루어질 수 없다고 보았다. 조광조는 연산군 같은 폭군이 언제든 다시 나타날 수 있다고 보았으며, 이를 막기 위해 성리학 원칙을 가장 위에 두고자 했다.
반면 중종은 반정공신 세력을 견제하고 왕권을 다지기 위한 친위세력으로 기묘사림을 끌어들였을 뿐, 그네들이 꿈꾸는 사회개혁에 동의할 의지가 없었다. 그저 선왕들의 정책을 이어 신하들의 견해를 물리치고 자신의 결정을 관철함으로써, 적당히 왕의 권위를 세우기만을 원했다. 그러나 이 자그마한 것도 해결하지 못하면 개혁은 없다고 본 조광조가 강력히 반발하자, 덩달아 중종의 고집도 극심해진 것이다.
조광조가 이처럼 비판하자 중종은 더이상 나아갈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조광조가 발언한 그 다음날, 중종은 "과거시험일자가 임박해서 대간을 교체했을 뿐 다른 뜻은 없으며, 소격서 폐지에 관한 문제는 대신들과 의논해서 결정하겠다"고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중종은 그 자리에서 소격서를 폐지하겠다고 명백하게 말하지는 않았지만, 조광조는 중종이 사실상 자신들의 주장을 받아들여 소격서를 폐지하기로 결정했다고 간주하고 "이런 전하의 말씀을 들으니 감격스럽기 짝이 없다." 하며 경하를 올린다.
이후 소격서 폐지는 절차상의 문제만 남게 되었다. 그리하여 중종 13년(1518년) 9월 3일, 중종은 소격서 폐지를 기정사실로 인정하였으며, "사직하고 물러난 대간들은 속히 복직하여 밀린 업무를 처리하라"고 명령하였다. 조광조의 상소로 격화된 소격서 폐지에 대한 논쟁은 이로써 2달 만에 종결되었다.
기묘사화(己卯士禍)로 조광조가 실각하자 중종은 곧 소격서를 부활시키고자 하였다. 중종 15년(1520년) 1월 17일, 중종은 남곤, 이유청 등과 국정을 논의하는 자리에서 "기우제, 기청제나 지내는 소격서를 혁파함은 잘못된 일인 듯하다"며 소격서를 부활시킬 의사를 내비친다. 남곤 등은 "혁파한 지 얼마 안 된 것을 바로 부활시키면 모양새가 좋지 않습니다"라는 이유로 반대한다. 그러자 중종은 "소격서를 부활시키지 않더라도, 기우제나 기청제를 소격서가 있던 자리에서 지내는 게 좋겠다"는 의견을 낸다.
이처럼 소격서를 부활시키고자 하는 중종의 뜻이 확실하게 드러나자, 영의정 정광필은 "당초 (소격서) 혁파에 관한 논의가 있었을 때 재상들은 역대 선왕들께서 설치한 것을 경솔하게 없앨 수는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이미 혁파한 것을 이제 와서 다시 세울 수는 없습니다."라며 반대하였다. 소격서 부활을 반대하는 대신들의 입장은 정광필이나 남곤의 생각과 다름이 없었다. 중종은 더 이상 소격서를 부활시키자는 자신의 주장을 밀고 나갈 수 없었다. 결국 소격서 문제는 한동안 수면 아래로 가라앉는다.
그러나 거의 3년이 지난 중종 17년(1522년) 12월, 중종은 어머니 자순대비(정현왕후) 윤씨의 병환을 핑계로 다시 소격서 문제를 거론하였다. 중종은 "어머니의 병환이 6달이 지나도록 차도가 없어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면서 말을 꺼냈다. 중국 황제의 전례에 따라 자신도 필요할 때는 종묘 사직은 물론 산천에 기도할 수도 있다는 뜻을 밝힘으로써, 소격서 부활의 필요성을 강조한 것이었다. 정광필을 비롯한 대신들은 "어머니의 병환이 위독해서 종사와 산천에 제를 지내려 한다"는 중종의 말에 쉽사리 반대할 수가 없었다.
중종은 주장이 먹혀들었음을 감지하고, 이번에는 "어머니의 희망"이라는 이유로 소격서 부활을 주장했다. 소격서를 부활시키자는 사람은 어머니 자순대비이며, 그 어머니가 지금 매우 위독한 상태에 있음을 강조하였다. 그리고 "자식으로서 어머니의 마지막 소원을 이룰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대신들에게 부탁하면서, 소격서를 부활시킬 자신의 의지를 밝혔다. 결국 정광필을 위시한 대신들은 "소격서의 부활에 찬성하지는 않지만, 대비 마마의 병환을 걱정하는 전하의 마음을 거스를 수 없기에 반대하지는 않겠습니다"라는 뜻을 밝혔다. 그리하여 소격서는 복구된다. 다시 대간들이 반대했으나 중종의 뜻은 완강했다. 결국 소격서는 쭉 유지되었으나 임진왜란을 맞아 선조가 파천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와해되고, 이후 복구가 되지 않아 사라진다.
소격서는 정말 대수롭지 않은 기구였다. 가뭄이나 한파의 피해가 클 때 나라에서 종묘사직과 산천, 일월성신(日月星辰)에게 제사를 지내는 관례는 매우 오래된 것이었다. 그래서 도교에 관계된 기관임에도 본격적으로 이단(異端)논쟁에 휩싸인 적이 없었다.
그러나 중종 13년(1518년) 8월 조광조가 "소격서를 폐지해야 합니다"라고 주장했을 때는 그 의미가 전혀 달랐다. 조광조는 "왕도 성리학의 가르침에 따라야 합니다"라고 주장했고, "만약 이단을 택한다면 전하께서 연산군과 같은 군주가 되려 함이므로, 결코 용납할 수 없습니다"라는 결의를 표명했다. 중종은 소격서가 중요해서가 아니라, '조광조의 주장을 그대로 받아들이면 왕권에 손상이 온다'고 판단하여 매우 적극적으로 반대하였다. 중종의 뜻이 완강한 만큼 조광조의 주장도 강하였다. 거의 2달 이상 지속된 논쟁 끝에 소격서는 폐지되었으며, 그때까지 반대한 것에 대한 반동으로 중종의 권위는 상당히 크게 손상되었다. 그만큼 조광조의 정치적 영향력은 크게 확대되었다.
조광조는 관직에 진출한 이후 여러 가지 일에 관여하였다. 특히 조광조는 연산군이 크게 훼손한 성리학적인 이념을 다시 세우는 일에 전념하였다. 그리고 이런 일은 연산군대 이래의 중신들의 정치적 영향력을 감소시키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중종반정을 주도한 사람들은 모두 연산군대의 중신들이었기 때문에 연산군대의 학정을 비판하고 성리학적 이념을 바로 세운다는 주장은 매우 효과적인 정치적 공세였다.
정국공신들의 위세에 눌려있던 중종도 이러한 전모를 잘 알고 조광조를 비호했으나, 왕권 위에 성리학을 둘 생각까지는 없었다. 그러나 소격서 폐지를 반대하는 중종의 입장에 적극 동조하는 대신들은 없었다. "국초의 관례를 함부로 폐할 수 없다"는 입장을 제시하기는 하였지만, 이것을 폐지해야 한다는 조광조의 주장이 지니는 명분에는 이들도 반대하지 않았던 것이다. 중종은 완전히 고립무원의 상태에서 권위의 온존을 위해 소격서를 유지하고자 하였지만, 결국 조광조의 적극적인 주장 때문에 소격서는 폐지되었다.
명심해야 할 점은 소격서 논쟁을 제기하기 전까지 조광조가 강경하게 개혁을 밀어붙인 적은 없었다는 점이다. 소격서 논쟁에서 조광조가 중종에게 보여준 태도는, 이전에 보였던 행동과 너무도 달랐다. 결국 조광조가 중종의 뜻을 꺾었으니 자연히 조광조의 정치적 위상도 크게 확대될 터이나, 이는 조광조가 이후 개혁활동의 전면에 설 수밖에 없도록 한 요인이기도 했다. 조광조는 이후 현량과와 위훈삭제에 적극적으로 나서야 했으나, 중종의 적극적인 지지를 기대할 수 없었다. 그러나 이런 점을 알아도 절충할 수 있는 입장이 아니었다. 백성의 절반이 노비가 되어가는 현실을 타파하려면 토지개혁, 신분제 완화 등 강도높은 개혁이 필요한데, 고작 소격서조차 어떻게 하지 못하고 물러선다면 이후의 개혁들도 막힐 수밖에 없었다.[39]
즉, 이런 것이다. 소격서는 전혀 중요한 기관이 아니었기에 부담 없이 개혁의 시발점으로 폐지논의를 시작했다. 그러자 중종은 여태까지 선왕들이 그래왔던 것처럼 "옛 제도를 가벼이 없앨 수 없다"고 답했다. 실권을 가진 공신세력에게 명분 하나로 맞서던 조광조는 '이 작은 개혁도 해내지 못하면, 유일한 무기인 명분도 꺾이고 미래가 없다'고 보고 점차 강경하게 밀어붙인다. 조광조의 명분이 탄탄하고 솔직히 소격서는 별로 중요한 기관도 아니어서, 원로대신들도 별다른 반대를 안 한다.
그저 공신세력을 견제할 친위세력이 필요해 조광조를 끌어들인 중종은, 점점 당혹스럽고 짜증이 난다. 중종은 소격서 폐지 논란의 뒤에 있는 정치적 전말을 헤아리기보다는 자신이 키워준 이들이 자신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음에 분노하고, 결국 별 것 아닌 일이 왕권을 둘러싼 자존심 싸움으로 비화되어 결국 기묘사림에 대한 신뢰를 거둔다.

2.3.6. 노비종모법과 한전제(限田制), 대공수미법


참고 링크

2.3.7. 정국공신 개정 시도(위훈삭제)


조광조가 추진한 현량과에 대한 정국공신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았는데, 이는 화살을 날린 사건이나 김우증의 모반사건을 보면 알 수 있었다. 이러한 정국에서 조광조는 정국공신들에게 먼저 정면공격을 시도함으로써, 이들의 심상치 않은 움직임을 막으려 했으니, 이는 곧 정국공신 개정 시도였다.
중종 14년 10월 25일, 대사헌 조광조는 중종에게 다음을 건의한다.

"정국공신 중엔 연산군의 총신도 있고 이들의 죄는 용서할 수 없습니다. 또한 이들이 만일 반정 때 공을 세웠다면 몰라도, 이들은 공도 없이 기록된 자들입니다. 이러한 자들은 사리사욕을 앞세우는 자들로, 이로움이 있다면 왕도 시해하고 나라도 빼앗는 자들입니다. 따라서 현명한 임금은 이러한 일의 근원을 막아야 하며, 따라서 정국공신을 개정하지 않으면 국가가 유지되지 않을까 걱정됩니다."

그러며 조광조는 "공신 2등, 3등 중 개정할 자가 많고, 4등 50명은 대부분 공이 없는 자들"이라고 하였다. 이때 중종이 공신의 개정을 반대하자, 홍문관 부제학 김구가 대간의 뜻을 따를 것을 촉구한다. 대간들과 승정원에서까지 공신의 개정을 촉구했지만, 중종은 이러한 주장을 모두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러자 대간은 전원 사직을 요청한다. 또한 조광조와 대사간 이경동은 밤이 깊어 새벽 1시가 되었는데도 거듭 정국공신 문제를 거론한다.
정광필, 안당을 비롯한 대신들은 "처음에는 그 많은 공신들을 어떻게 다 개정하겠냐. 1등, 2등, 3등은 놔두고 4등에서만 문제되는 자들을 개정하자."는 의견을 내었다. 이에 중종은 반색하였으나, 대신들은 이내 "다시 생각해보니, 다 개정하는 것이 맞겠습니다"라는 의견을 내었다. 이에 빡친 중종이 "그럼 처음부터 다 개정하자고 할 것이지 왜 말을 바꾸고 난리냐"고 한소리를 했고, 이에 대간들이 "대신들이 생각을 바꿀 수도 있는 것을, '말을 바꾸었다'고 구박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라고 중종을 꾸짖어 중종의 속을 더 긁었다(…). 박시백 화백 등은 "그동안 조광조를 견제하던 정광필을 비롯한 대신들마저도 조광조의 개정안을 전폭적으로 지지하는 모습을 보고, 중종은 더 위기를 느꼈을 것이다"라고 해석했다.
중종 14년 11월 8일, 결국 대간 전원이 사직을 요청하자, 중종은 한발 물러서 19명의 명단을 제외하였는데, 그러면서도 반대한다는 뜻을 분명히 밝힌다.
중종 14년 11월 9일, 영의정 정광필은 삭제할 명단을 작성해 제출한다.
그리고 중종 14년 11월 15일 밤, 기묘사화가 발생한다.

2.4. 기묘사화와 몰락


그날 밤 자정, 승지 윤자임 등은 승정원에서 숙직을 하다가, 경복궁 안이 소란스러운 것을 보고 밖으로 나왔다. 이때 서문인 영추문이 활짝 열려 있었고, 영추문을 군인들이 지키고 있었다. 그리고 경복궁의 중심부인 근정전에선 군인들이 계단 아래 좌우로 정렬해 있었고, 안팎이 모두 등불이 환하게 밝혀져 있었다. 그리고 그 건물 안엔 병조판서 이장곤, 판중추부사 김전, 호조판서 고형산, 화천군 심정, 병조참지 성운 등이 있었다.
윤자임이 그들에게 "왜 여기에 있냐"고 물어보자, 이들은 "주상 전하께서 부르셨기 때문"이라고 답했다. 그러자 "승정원(비서실)을 거치지 않고 불렀다면 말이 안 된다"고 항의하며, 내전으로 들어가 왕을 만나려 하였다. 그때 안에서 승전색(承傳色)이었던 신순강이 나와 병조참지 성운에게, "지금부터 승지가 되었으니, 가서 왕의 전교를 받으시오"라고 말한다. 군졸들은 계속 항의하는 윤자임을 밀쳐내고 성운을 들여보냈고, 성운이 나오면서 의금부에 투옥해야 할 사람들의 명단을 가지고 나온다.
새벽 5시경, 중종승정원, 홍문관, 대간을 다 교체하고 새로 승지가 된 성운에게,

"조정의 큰일이 이미 결정되었으니 지체해선 안 된다. 빨리 조광조를 처형하라는 전지를 내려라. 두세 번 재촉하였는데 밤이 새도록 결정을 못하는 것은 옳지 않다."

라고 말한다.
누가 주도적으로 조광조 처형과 같은 문제를 논의했는지는 구체적으로 알 수 없으나, 그를 처형하는 문제를 쉽게 결정하지 못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때 대신들은 소식을 듣고 속속 입궐하고 있었으며, 도착한 영의정 정광필, 좌의정 안당 등의 의정부 대신들은 "조광조 등을 붕당(朋黨)죄로 처형하겠다"는 것을 듣고 강하게 반발한다.

정광필: 전하께서 그들을 등용하고 그들의 청을 들어주었는데, 붕당죄가 적용되는 것은 말이 안 됩니다.

중종: 내가 그러한 게 아니라, 조정에서 그리 말하였다.[40]

정광필: 제가 도착하였을 때 이미 와 있던 사람들은 모두 "전하께서 죄를 청하라고 시키셨고, 따라서 이는 모두 전하의 뜻입니다"라고 했습니다. 특히 조정의 뜻이라면, 어째서 의정부의 대신인 제가 왔을 때, 이미 그들의 죄를 다스리는 것이 결정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중종: 일이 이 지경이 된 것은 대신들이 잘못한 것이다. 빨리 조광조에 대한 형을 결정해 올리라.

중종은 그러면서 정광필, 안당의 면담을 거절한다.
그러자 정광필은 "조광조 등을 전하께서 뽑아 높은 지위에 임명하고 그들의 말을 다 들어주었으면서, 하루아침에 처형하는 것은 그들을 함정에 빠뜨리는 것입니다"라면서 반발한다. 뒤이어 의정부, 육조, 한성부에서 모두 "조광조가 붕당죄를 저지른 것은 사실이 아닙니다"라고 하였고, 뒤이어 성균관에서 공부하는 유생들 150명이 궁궐 안으로 난입해 통곡하며 항의하는 일이 발생한다. 결국 중종은 한발 물러서, "조광조의 죄는 사형이 마땅하나, 곤장 100대에 유배형으로 경감한다"라고 명한다. 정광필은 이것도 부당하다고 항의하나, 중종은 "사형을 감형하는 것이므로 사정을 둘 수 없다"고 말한다.
다음날, 왜 이러한 중대한 결정이 밤에 갑자기 이루어졌는지, 또한 왜 신하들 몰래 비밀스럽게 했는지 신하들이 따지기 시작한다. 이때 정광필남곤을 노려보고, 남곤도 부끄러웠는지 눈을 피하다가, 조광조 사사(賜死) 건에 대해서는 반대한다. 당시 기록을 하던 사관(史官)도, "조광조를 총애하던 왕과, 지금 조광조를 죽이기 위해 악을 쓰는 왕이 같은 사람인가?"라고 사론(史論)에 남겼을 정도.[41]

사신은 논한다. 대간이 조광조의 무리를 논하되 마치 물이 더욱 깊어가듯이 아직 드러나지 않았던 일을 날마다 드러내어 사사하기에 이르렀다. 임금이 즉위한 뒤로는 대간이 사람의 죄를 논하여 혹 가혹하게 벌주려 하여도 임금은 반드시 유난하고 평번(平反)하였으며, 임금의 뜻으로 죽인 자가 없었는데, 이번에는 대간도 조광조를 더 죄주자는 청을 하지 않았는데 문득 이런 분부를 하였으니, 시의(時議)의 실재가 무엇인지를 짐작해서 이렇게 분부하게 된 것이 아니겠는가? 전일에 좌우에서 가까이 모시고 하루에 3번씩 뵈었으니 정이 부자(父子)처럼 아주 가까울 터인데, 하루아침에 변이 일어나자 용서없이 엄하게 다스렸고 이제 죽인 것도 임금의 결단에서 나왔다. 조금도 가엾고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없으니, 전일 도타이 사랑하던 일에 비하면 마치 두 임금에게서 나온 일 같다.

신하들은 "전하의 말씀으로는 '조정이 청했다'고 했는데, 대체 누가 전하에게 처음 청했습니까?"라고 묻는다. 중종은 이를 밝히기를 거부하였는데, 새로 교체된 대간에서 이를 비판하며,

"왕이 신하를 처벌하는 것을 몰래 명을 내려 깊은 밤중에 비밀리에 처리하실 이유가 어디 있습니까? 왕께서 신하를 신임하신다면 진심으로 대해야 합니다. 그런데 겉으로는 신임하는 척하며 속으론 죽일 생각을 가지셨으니, 임금의 마음이 이러하면, 이는 나라가 위태로워질 조짐이라 하겠습니다."

라고 말한다.
그러자 중종은 드디어 내막을 털어놓는데, 홍경주가 남곤, 송질, 김전의 집에서 "무사 30명이 조광조 등을 제거하려 한다"는 소문을 들었다고 한다. (홍경주는 중종의 후궁희빈 홍씨의 아버지이다.) 그리고 홍경주는 중종에게 "무사들의 공기가 심상치 않으므로, 이를 무마하려면 조광조를 죽이지 않을 수 없습니다"라고 말했다고 밝힌다. 무사들이 사사로운 감정으로 조정의 대신을 죽이는 것은 쿠데타를 의미하고, 이를 왕에게 밀고가 아닌 통보식으로 언급한 것은 노골적인 쿠데타 위협이었다.
중종이 내막을 털어놓자, 다급해진 홍경주가 나서서 해명한다.

제가 남곤, 김전 등과 의논한 뒤 "조광조의 죄를 바로잡자"고 청했고, 이때 남곤은 "훗날 내가 '소인이 군자를 해쳤다'라는 평을 듣게 되더라도 상관하지 않겠다"고 단언하기까지 했습니다.

그 뒤 홍경주를 시켜, 무사 30명의 불온한 행동을 고했다는 박배근에 대해 조사하게 했는데, 이때 무인들은 아직도 "조광조의 처벌이 너무나 가볍다"고 생각하고 있으며, 또한 유생들의 집단 상소에 이 일이 무마될 것 같자, 추가적인 집단행동을 계획 중이었음이 드러난다.
이것은 완벽한 역적모의였고, 이것이 밝혀진 이상 대역죄인으로 처벌이 가능하였으나, 중종과 조정은 이에 맞설 의지를 전혀 보이지 않았다. 이들은 조광조에 대한 논의를 중단하였고, 조광조의 죄를 기정사실화 한다. 즉 중종은 그때도 무인들에 대한 통제수단이 없었고, 이를 여전히 반정공신들이 가지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11월 20일, 중종은 정국공신 개정 논란을 취소하였고, 조정을 장악한 정국공신들은 "현량과도 파방(罷榜)해야 합니다"라고 주장한다. 이때 유관은 "현량과를 통해, 행실이 보잘것없는 사람들이 단지 아는 사람이라 하여 등용되었으므로, 모든 이들이 이를 분하게 여길 뿐 아니라, 이런 행위는 왕을 기만하는 짓입니다"라고 말한다.[42] 뒤이어 유관이 안당의 세 아들이 모두 천거된 후 합격한 것을 근거를 들어 안당을 비난한다.

설과(設科)를 처음에 발의한 사람이 안당(安瑭)인데, 그 세 아들 【처겸(處謙)ㆍ처함(處諴)ㆍ안처근(安處謹)이다.】 은 재행(才行)이 높지 않은데도 다 천과(薦科)에 들었습니다. 몰라서 피혐(避嫌)하지 않았겠습니까? 알면서 피혐하지 않았으므로 이것은 곧 부정이니, 어떻게 정승의 자리에 두겠습니까? 빨리 가소서.

이에 대해 중종은 "안당이 나쁜 의도는 없었겠지만, 그렇게 하면 안 되지."라며 맞장구를 친다.
이후 조침이 말하길, "정광필이 영의정으로서 조광조의 일파들이 과격한 것을 한탄하였다고 하는데, 대신이 되어서 바로잡지는 않고 한탄만 하고 있었으니 이런 사람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라는 말로 디스하였다.

정광필은 범상한 재상(宰相)이 아니나, 당초에 신진의 일 좋아하는 사람들이 저러한데도 일찍이 조처하지 않고, 신이 하료(下僚)로서 늘 듣건대는 정광필이 한밤에 남몰래 한탄하였다 합니다. 대신으로서 한밤에 남몰래 한탄만 하고 바로잡지 못하였으니 위태로울 때에 무엇을 돕겠으며, 이것이 어찌 사직(社稷)의 신(臣)이겠습니까?

중종은 이 발언에도 "대신으로서는 조짐이 있을 때 도모해야 한다"며 맞장구를 친다.
뒤이어 조광조가 심문받을 때의 일이 알려졌는데, 조광조가 병조판서 이장곤의 자를 부르면서 "못난아, 못난아, 섭섭하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리고 다른 심문관 홍숙의 이름을 부르면서 "네가 어찌 감히 우리를 심문하느냐!"라고 호통을 쳤다는 것이었다. 이 일이 전해지자 중종은 노여워하면서, 심문관으로 참여한 김전과 홍숙을 불러 더 자세히 말하게 하였다. 그러자 김전과 홍숙이 말하길, "조광조는 그 날 술에 만취한 상태로 끌려나왔으며, 어린아이처럼 울부짖었고, 또한 이장곤을 '못난아, 못난아'라고 부르며 대청에 뛰어오르려 했습니다"라는 것이었다. 중종은 이에 나름 충격을 받았는지, 그 이후로 3일 동안 "조광조의 교만함이 너무하다, 기강이 너무 떨어졌다"라고 계속 불평하였다.
그때까지 중종은 "현량과를 파방하지 말되, 현량과 합격자들에게 현직을 제수하지 말자"고 하는 등 나름 온건론을 펼치고 있었고[43], 신하들은 이에 기가 죽어 있었다. 그런데 중종이 조광조의 심문시의 불손한 태도에 크게 언짢아해하자, 이를 본 신하들은 노골적으로 천거된 인재들을 헐뜯고 "조광조가 자기 입맛대로 사람을 구별하여 급제시켰습니다"라고 성토를 시작하였다.

(숨은 인재를 찾는다며 무려 수십 명을 급제시킨 걸 두고) 숨은 인재가 한두 명이면 몰라도 이렇게 많을 수 있습니까?

자기 도당의 사람만 뽑고, 심지어 미리 문제까지 알려주고 시험을 치르게 하였습니다. 밤마다 자기 도당끼리 모여 인물을 품평한 뒤 뽑자, 뽑지 말자 논의하면 그것으로 곧 합격, 불합격이 결정되었습니다.

성수종이란 인물은 문장이 너무 천박하여 알아볼 수 없는 답안지를 제출하였는데도, 조광조가 '성수종의 인물이 쓸 만하니 뽑아야 한다'고 주장한 뒤 뽑았습니다.

뒤이어 대간에서 이들 의정부의 대신들을 탄핵하였다. 그러자 중종은 남곤과 이유청을 영의정, 좌의정에 임명하여, 정광필, 안당을 실각시킨다. 그리고 중종은 정광필이 교체되는 그날, "조광조를 사사(賜死)하고 현량과도 파방하라"는 전교를 내린다.

2.4.1. 원인


조광조의 개혁 정책들은 성리학적 이념하에서 이루어진 것들이지만, 문제는 조광조 자신이 너무 성급하게 완급 조절을 하지 못한 채 자신이 옳다고 믿는 정책들을 중종에게 강요한 데서 불거지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조광조의 왕도정치(王道政治)에 공감했던 중종도, 자신을 마구 굴리고 갈구는 조광조를 점점 꺼리기 시작했다. 더욱이 반정 공신들이 폐비 신씨(단경왕후) 복위 문제와[44] 소격서 혁파, 위훈 삭제 등으로 조광조와 사림파들에게 감정이 격해지면서, 중종은 조광조와 반정 공신 중 어느 한쪽을 택해야 하는 지경에 몰리게 되었다.
문제는 중종 자신은 그다지 적극적인 개혁 의지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 애시당초 중종은 개혁 그 자체보다 자신의 정국의 안정을 위해 기묘사림을 중용했을 뿐이었기에 일단 사림들의 지지를 얻기 위해 이들이 추구하는 개혁에 대해 지지하고 따르기는 했지만 점차 자신에게 고분고분하지 않은 조광조를 위신한 사림들에 대해 불신하게 된다. 소격서 폐지 사안만 하더라도 성리학의 나라 유교에서 유지할 명분 자체가 없었어서 일부 기성 사림들을 위시한 훈구 공신들조차도 폐지 여론에 가세해서 중종이 마지못해 폐지한 것이다. 오해와 달리 훈구 공신들이 전부 다 조광조의 개혁에 대해 무작정 반대한 것은 아니다. 훈구 공신들도 사림과 갈등하기는 하나 엄연히 유교와 성리학을 가치관의 근본으로 삼는 유학자들임에 유의해야 한다. 이후 중종은 소격서를 다시 부활시킨다.
또한 기묘사화 때 궁궐에 호출되어 있던 인물들의 벼슬을 살펴보면, 군에 관련된 인물들이 눈에 띄는 것을 알 수 있다.[45] 이를 보면, 조광조의 개혁에 반발하는 세력은 정국 공신들이었는데, 이들은 군권을 장악하고 있었다.
또한 과거 5번의 모반을 본다면, 공신호에 대한 문신과 무신들의 알력이 상당하였는데, 이는 논공행상(論功行賞)에서 정작 위험을 무릅쓴 무신들보다, 문신들에게 더 많은 공이 돌아갔기에 불만이 많았던 탓이다.
또한 공신호에서 주로 문관들이 높은 등수에, 그리고 무관들은 낮은 등수에 올랐는데, 여기서 조광조가 공신호 삭제를 하며 낮은 등수는 대거 삭제하기에 이르렀고, 이는 안 그래도 세운 공에 비해 낮은 등수를 받아 억울해하면서도 참고 있던 무관들을, 다시 한 번 대거 희생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이에 무관들은 공신들과 호응해 그들의 군사력으로 이를 제재(制裁)하려 한 것이었고, 군에 대한 통제 수단이 전혀 없었고, 또한 이를 전혀 신경 쓰지도 않았던 조광조와 그의 일파들은 아예 무방비로 노출된 것이었다.
반면 중종은 이들이 벌인 중종반정의 중심에 있었던 경험이 있었고, 또한 연산군이 축출되는 것을 옆에서 지켜봤으므로, 군의 반란 조짐에 매우 예민하게 반응했다. 그 결과 그는 무관들을 대표하는 반정공신의 의견대로 조광조를 처형함으로써, 이러한 사태를 진정시키고 싶어 했던 것이었다.
중종에 따르면 홍경주가 자신에게 "무인들이 정변을 일으키려고 하니, 이를 무마시키려면 조광조 일파를 제거해야 합니다!"라고 주장하여 이를 따라 진정시켰다고 하였는데, 신하들이 "이 말을 한 자들이 누구입니까?"라고 묻자 홍경주가 박배근과 정귀아를 지목한다. 이들을 심문하니 사실이었다. 이 부분은 역적모의에 해당되나, 놀랍게도 중종은 이들에게 형 백장을 치고 귀양시키는 정도로 무마시켰으며, 이마저도 시행되지 않고 마침내 방면되기에 이른다.

우의정(右議政) 이유청(李惟淸)이 의논드리기를, “순전히 저들을 분하게 여기고 미워하여 말한 것이니, 무슨 뜻이 있었겠습니까?” 하니, 전교하기를, “김우증은 놓아 주어야 하겠으나, 박배근(朴培根)ㆍ정귀아(鄭歸雅) 등의 죄도 우증과 같으니, 삼공에게 물으라.” 하매, 삼공이 아뢰기를, “배근ㆍ귀아가 망언(妄言)을 내기는 하였으나 일은 성사하지 않았으니, 놓아 주어도 됩니다.” 하니, 상(중종)이 "죄다 놓아 주라"고 명하였다.

즉 중종을 비롯한 조정은 그때까지도 무인에 대한 통제수단이 없었고, 이들이 실력행사 하는 것을 진압할 수 있는 무력도 없었던 것이었다. 즉 중종은 '반정세력에게 옹립된 왕'이라는 한계가 뚜렷하였고, 조광조 일파는 이런 무력한 왕의 권위만 믿고 반정공신을 정면으로 공격하였던 것이었다. 특히 이들이 추진한 반정공신 삭제의 대상은 4등 이하를 차지하고 있던 무인들이었다.
뿐만 아니라 중종 자신도 조광조에 대한 두려움과 그의 개혁 정책에 대해 슬슬 질렸을 가능성이 높다(중종 문서 참조). 중종이 소격서를 폐지하는 것을 반대한 것이나 문묘 배향을 반대한 것, 또한 공신 삭제 등을 반대하거나 군자 소인 논쟁에서 처벌을 반대하는 것을 볼 때, 조광조의 개혁에 대해 중종이 썩 내켜 하지 않았다고 추측할 수 있다. 조광조를 발탁하고 그 일파를 상당한 위치까지 등용한 것이 중종 자신이었음은 사실이나, 이들이 개혁 정책을 실행하는 과정은 중종이 원하는 것 이상으로 급진적이었고, 중종의 입장에서는 통제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던 것이었다.[46]
중종실록》에는 없지만 《선조실록》에는 다른 설도 언급하는데, 남곤 등이 궁궐 후원의 나뭇잎들에 로 글씨를 새긴 뒤, 개미들로 하여금 그 잎을 파먹게 하여, "주초위왕"[47]의 글씨를 만들게 하고, 이를 중종에게 이것을 고해바쳐 중종을 분노하게 했다는 이야기가 있으나 이는 어디까지나 야사(野史)에 불과하다. 실제로 KBS 1TV역사스페셜》에서 실제 실험한 결과 사실무근으로 밝혀졌다. 벌레들은 나뭇잎에 묻은 꿀만 먹었고, 설령 잎을 먹는 벌레에게 주더라도 잎을 남김없이 먹는다.
결국 조광조는, 이후 능성[48]으로 유배되었지만, 결국 유배 1달 만에 사약을 받고 사사되었다. 조광조는 최후에 금부도사(禁府都事)[49]에게 "전하의 편지 같은 것 없냐"고 물어보았는데, 달랑 쪽지 한 장 을 받자 "내가 이래봬도 대부였는데" 하며 기막혀했다고 한다.
당시 사약의 효능이 그저 그랬던지라 1그릇을 먹어도 죽지 않았는데, 군자다운 고요하고 차분한 태도로, "허허, 내가 죽지 않았으니 1그릇 더 주시구려"라고 했다고도 한다. 다만 실제는 이와 다르다는 말도 있다. "좀 기다려달라"고 금부도사(禁府都事)에게 거듭 청한 뒤, "이제라도 사약을 취소한다는 교지를 갖고 사자가 뛰어오지는 않을까" 하여, 창밖을 내다보며 노심초사했다고 한다. 그러다 금부도사가 독촉하자, 다 포기하고 사약을 마시고 죽었다고 한다.
일단 실록(중종실록 37권, 중종 14년 12월 16일 병자 2번째)에 실린 조광조의 최후는 이렇다. 금부도사에게 조정의 일을 묻고 나서 자신이 살 길이 없다는 것을 안 조광조는 한탄하며 유언을 남긴다.

(전략) 또 거느린 사람들에게 이르기를 ‘내가 죽거든 관을 얇게 만들고 두껍게 하지 말아라. 먼 길을 가기 어렵다’ 하였다. 자주 창문 틈으로 밖을 보며 글을 쓰고 분부하는 일을 끝내고, 드디어 거듭 내려서 독하게 만든 술을 가져다가 많이 마시고 죽으니, 이 말을 들은 사람들이 다 눈물을 흘렸다. (후략)

사족으로, '조광조를 죽인 원흉'이라며 이후 비난을 받는 남곤은 사실 조광조와 같은 사림파였다. 같은 김종직 계열이긴 했지만, 조광조는 김굉필 문하의 급진 사림이었고, 남곤은 김일손 문하의 사장파[50]였다. 조광조의 사사가 확정되자 남곤은 눈물을 흘렸으며, 자신의 일을 후회해 유언으로 자신이 평생 쓴 모든 글을 불태우게 했다. 이로서 당대 최고의 문사(文士)였던 남곤의 글은 후대에 전하지 않고, 오직 시 한 수만 전해진다.
중종 말년에는, "젊은 친구들이 나름 잘해보려고 했던 일인데, 우리가 너무 지나치게 처벌한 것은 아닌가 싶다" 란 분위기가 대세가 되어, 그때까지 살아있던 김안국이 복직되었고[51], 죽은 이들은 다수가 복권되었으나, 유독 조광조만은 선조 대에 와서야 복권되게 된다. 아마도 훈구세력의 견제, 무엇보다도 중종의 혐오가 작용하지 않았나 하는 분석이다.[52]

3. 평가


정치철학자나 유학자, 교육자로는 몰라도, 정치가나 행정가로선 낙제점인 인물. 오늘날로 치면 폴리페서나 정치철학자가 어쩌다 공무원이 되어 장관이나 비서실장 등 주요 요직을 맡고 비현실적인 정책을 입안하다가 숙청당하여 몰락한 케이스. 먼저 들어가기 전에, 조광조에 대한 평가는 그 개인에 대한 평가를 넘어서 실제로 관학파사림파에 대한 평가와 일치하는 경우가 많으니까 참조.

3.1. 긍정적 평가


조광조는 향약(鄕約)을 널리 보급했다. 그리고 향약은 서원과 함께 사림파의 기반을 튼튼히 하여, 선조 때에 이르러서는 그야말로 조선을 사림파의 세상이 되게 하였다. 조광조에 대해 '실패한 개혁자'라는 인식도 있는데, 조광조 이후, 조선이 사림파의 세상이 되었다는 결과를 놓고 생각해보면 조광조는 결코 실패하지 않았다.
꼿꼿하고 청렴결백한 성격으로, 아무리 고관이라 할지라도 자신이 인정하지 않으면 절대 인사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를 다르게 말하면, "세상에서 오직 나만이 올바른 판단과 생각을 갖고 있다"는 독선적인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었다고 할 수도 있다. 이런 성격은 자신보다 능력이 모자라거나 대가 약한 사람들을 수하나 추종자로 만들 수 있지만, 그와 능력이 비슷하거나 뛰어난 사람, 혹은 그 못지 않게 심지가 강한 사람들의 혐오감과 적대감을 불러일으키기 일쑤이다. 즉 학자로서나 정치인으로서도 스스로 적을 만드는 유형이라고 할 수 있다. 결국 그 성격이 자신을 죽음으로 몰고 간 셈인지도.
그 외에도 조광조는 키가 좀 작은 편이었는데, 부패한 대신들이 자신을 내려다보는 게 싫다고 하여 고개를 빳빳이 쳐들고 다녀서, "조광조가 오면 멀리서부터 콧구멍만 보였다"는 우스갯소리도 있다. 말 그대로 우스개니 너무 진지하게 받아들이지는 말아야 하겠지만, 조광조의 꼿꼿한 성격을 보여주는 이야기로 보인다.
조광조 일파의 개혁이 무조건 부정적인 것만은 아닌 게, 조광조 일파는 노비종모법, 한전제, 대공수미법 같은 진보적인 주장을 하기도 하였다. 비록 조광조가 현량과 실시 주장이나 국방에 대한 인식 반대파에 대한 편향적인 시각등이 문제가 되긴 했지만, 조광조는 대공수미법, 노비종모법, 한전제를 주장했다 저 주장들만으로도 충분히 개혁가 소리를 들을 만했고, 실제로 저 정책들은 민생 안정에 도움이 되는 진보적인 개혁이었다. 위훈 삭제의 경우 비록 조광조의 실제 언행을 보면, "해당 공신들은 실제 공이 없고 인간성이 좋지 않은 자들"이라는 공격만을 하고 "공신들의 과도한 기득권이 민생에 부담을 준다"는 종류의 발언은 보이지 않았지만, 위훈 삭제의 궁극적인 목표는 공신전의 특혜와 공적 영역으로의 환수였다.
조광조 일파가 과격하고 편향적이라 남곤을 포용하지 못한 건 사실이지만, 남곤 일파 역시 비판받을만 하긴 했다. 남곤 무리들은 각 개인이 깨끗했을지는 몰라도 엄연히 구체제의 모순에 영합한 인물들이었다. 기묘사림이 등장하고 그들이 개혁을 외친 건 세조때부터 시작된 훈구파들의 의한 조선의 모순을 고치기 위해 노비종모법, 한전제, 대공수미법도 주장했지만, 남곤은 이들의 개혁을 반대하고 중종과 영합하여 기묘사림을 숙청했다.
조광조 일파의 개혁 목표는 조선 초기의 국가운영 시스템으로 설정되었던 국역체제의 재확립이었다. 국역체제는 연산군 대의 폭정을 경험한 이래 본격적으로 붕괴되기 시작했으며, 반정으로 집권한 중종 대에 이르러서도 개선되기는커녕 도리어 악화일로를 걸어가고 있었다. 국역체제가 붕괴되는 상황에서 국가운영의 기반이라 할 수 있는 양민과 수세전은 점차 흩어지고 버려지기 시작했고, 이는 양민들이 국가권력과 관료들이 주도하는 수탈의 심화로 인해 자신들의 경제적 기반을 유지해나가기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었기 때문이다. 조광조 일파는 이러한 시대적 상황에 맞서 조선초기의 국역체제를 복구하기 위한 개혁의 구체적인 방안으로서 노비종모법과 한전제를 들고 나왔다.
그러나 조광조 일파의 개혁론은 노비 증식과 농장 확대를 재산을 불리는 수단으로 사용하던 훈구파들에게는 치명적인 개혁론이였고, 훈구파들은 조광조 일파의 개혁에 강력하게 저항해 조광조 일파의 개혁론을 좌절시키기 까지 하였다. 훈구파는 사실 국역체제가 붕괴되는 상황을 이용하여 재산 축적에 성공하였기 때문에 국역체제의 복구를 주장하는 어떠한 논의도 달갑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기묘사화는 이런 점에서 훈구파와 조광조 일파 간 국역체제의 복구 추진을 둘러싼 찬반 대립이 빛어낸 파국으로서의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조광조 일파가 제거되고 조광조 일파의 개혁 활동이 조정에서 전면적으로 부정되자 그 결과 노비의 급증과 훈구파의 농장 확대는 꾸준히 계속되었고, 명종 재위 10년대 이후가 되면 국역체제는 회복 자체가 불가능한 수준에 이르렀다. 양민이 줄어들고 노비가 증가하는 양소천다 현상, 그리고 국가재정의 만성적인 적자 상황과 같은 위망에 직면하여 훈구파는 국가를 통제하고 운영할 수 있는 능력을 상실했다. (김성우,「16세기의 사림파, 진보세력이었던가?」(『한국사시민강좌』33, 2008).)

3.2. 부정적 평가


(조광조 일파를 두고) 왕망(王莽)의 일에 비유해서 말하는 것 같습니다

금부도사 유엄, 조광조가 사약 받기 직전 자신의 일파와 조정 상황을 묻자 답하며. 원래 왕망유교국가에서 역적의 대표주자로 자주 비유되는 인물이지만, 왕망과 조광조의 행보를 비교해 보았을 때 지향점이 비현실적인 유교국가로의 개혁임을 생각해보면 상당히 적절한 평이다.

개혁에 적극적이었으나, 이는 밝은 정치적 감각에 의한 시대 개혁이 아니라, 단지 성리학 이념에 충실했던 한 학자의 성리학 독재로 보는 견해도 있다.
조광조가 정치가, 행정가라기보다는 이론에 치우친 학자라는 단점을 보여주는 사례를 몇 가지 소개하자면 다음과 같다.

3.2.1. 속고내 토벌 반대


가장 대표적으로 여진족 속고내의 토벌 관련 논의가 있다. 속고내는 여진족으로 과거 1512년(중종 7년)에 자신의 여진족 무리 400명을 이끌고 조선함경남도 갑산 일대를 약탈하고 도망간 범죄자였다[53]. 그러던 중종 13년 8월 조선 정부는 "속고내가 함경도 인근에서 사냥을 한다"는 보고를 받았고, 중종을 필두로 영의정 정광필, 병조판서 이장곤, 무신 유담년 등은 속고내 토벌을 논의하여 "몰래 기습을 하자"는 쪽으로 의견이 모아졌다. 그런데 마침 입궐했던 조광조가 "이 일은 가벼이 결정할 일이 아닙니다"라고 하자 중종은 다시 신하들을 불러들여 의견을 물었다.
그런데 이때 조광조가 한다는 말이, "여진족 추장 속고내에게 글을 보내 꾸짖고, 말을 안 들으면 그때 죄를 묻는 군사를 일으켜 성대하게 토벌해야 합니다"라고 떠들어 듣고 있던 무신들의 어이를 날려버렸다. 정광필과 이장곤이 "말은 맞는 말인데, 오랑캐가 득실거리는 변방에서 조광조가 하는 고매한 말은 통용되기 어렵습니다."라고 완곡하게 제지하려 했으나, 중종도 조광조도 막무가내였다. 옆에서 듣다가 어이가 없어진 무신 유담년이 "밭 가는 일은 종에게 물어보고, 길쌈하는 일은 여종에게 물어 보라고 했습니다. 다른 건 몰라도, 북방의 일은 저희 무신들의 의견을 들으셔야 합니다."라고 했으나, 중종이 조광조의 손을 들어줘 결국 속고내 생포 시도는 무산되고 말았다.[54]

조광조의 주장을 정리하자면 이렇다. "속고내는 반역할 마음이 없는데 군사를 보내 기습하는 것은 안 될 말이며, 잡아보니 속고내가 아니면 그것대로 곤란하고, 속고내여도 기습하여 사로잡는 것은 도적의 짓"이라며 극구 반대했다. "속고내가 죄를 지은 뒤에야 죄를 묻는 군사를 보내야지, 기습은 의리에 어긋난다"는 논리였다.
그러나 하나하나 따져보면 논리라고 하기도 민망해지는데, 우선 속고내는 이미 중종 7년에 400명의 무리를 이끌고 갑산 지역을 습격한 범죄자였다. 범죄자가 아닌 단순한 여진족 추장이었어도 조선 국경을 침범해 무단으로 사냥을 저질렀으니 조선이 충분히 처벌할 수 있다. 그리고 사냥을 할 때는 대규모 인력이 모이는데, 2차 왕자의 난처럼 이를 반란이나 전쟁에 악용하는 사례가 잦았다.[55] 때문에 속고내가 아니라 다른 여진족이나 조선인이었어도 충분히 견제해야 하는 일이었다. 그러므로 조광조의 주장은 송양지인보다 더한 삽질이라고 할 수 있다. 하다 못해 송양공의 경우 전술의 변화 등 변호할 여지라도 있지만, 조광조의 경우는 범죄자 가운데 무조건 범죄현장에서 현행범들만 체포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식의, 그냥 상식적으로 이해가 안되는 행동이었다.

3.2.2. 소격서 철폐


또 유명한 사례로는 소격서 철폐에 관한 것이다. 이 소격서 철폐 주장으로 조광조는 당당하게 골수 사대주의자임을 증명했다. 국가에서 하늘에 대한 제사를 주관하는 소격서(昭格署)라는 곳이 있었는데, 조광조가 이것의 철폐를 위해 밤새도록 무릎 꿇고 궁궐에서 상소를 읽은 것은 유명하다. 그런데 소격서 폐지 이유로 내세운 게 2가지인데, 첫째는 "성리학으로 운영되는 나라에서 도교 따위 미신에 의지한 기관을 운영한다는 게 말이 안 됩니다"라는 것이다. 여기까진 당시 사상적, 학문적 근거 등을 보아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2번째가 문제였다. "하늘에 대한 제사는 하늘의 아들, 즉 천자인 명나라 황제가 할 일이지, 일개 제후왕인 전하께서 할 일이 아닙니다"라고 주장한 것(…). 사실 이것도 후술할 세종대왕의 오점 운운만은 못해도, 중종 입장에서 꽤나 자존심 상하는 발언이다. 게다가 조광조는 엄연히 조선 국왕의 신하인데 자신이 모시는 왕의 권위를 폄하했으니, 솔직히 역적으로 몰리기 충분하다. 그리고 당시 조선은 아직 명나라를 진심으로 상국으로 섬기던 때가 아니라, 그저 국익을 위해 충성하는 척 연기할 때였다. 외왕내제가 완전히 폐지된 간섭기 고려와 달리 조선은 원 간섭기 전의 고려에 비해 외왕내제 요소가 많이 없어졌을 뿐 흔적 자체는 여전히 남아있었다. 멸망하는 순간까지 묘호 사용을 폐지하지 않은 게 그 증거다.
여기까지도 그렇다 치자. 이때 중종은 폐지를 요구하는 조광조에게 "세종께서도 소격서를 철폐하지 않았다"며 반론하자, 조광조는 대뜸 "세종대왕의 유일한 오점이 바로 소격서를 남긴 것입니다"라고 떠들었다.[56] 이게 얼마나 발칙한 언행이냐면, 이때는 신하가 공을 세우면 왕의 덕으로, 왕이 실수하면 신하의 실수로 치부되던 시절인데다가, 깐 상대는 한국사 최고의 성군세종대왕중종의 아버지성종이다. 세종도 엄밀히 말하자면 성종의 증조할아버지요, 세종은 조선 시대에도 최고의 성군으로 여겨졌고 성종도 그에 준하는 취급을 받았다. 이건 "왕 모욕+조상 모욕=불충"으로, 역적 취급도 얼마든지 가능한 발언이다.
물론 왕이 의견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다소 과격한 발언을 할 수는 있지만[57] 선왕의 오점 운운하는 이 발언은 지금 봐도 상당히 무례한 말인데, 그걸 면전에서 들은 중종은 대놓고 너 처형은 못할지라도 화를 꾸역꾸역 참으며 마음에 담아두고 있었을 확률이 높다. 이는 조광조가 관료로서의 개념은 제로였던 학자에 가까운 모습을 잘 드러내 주는 사건이다.
하지만 이러한 왕의 권위에도 도전하는 모습에서만큼은 보통 성리학 근본주의자라 비판받는 부분과 정반대로 오히려 성리학적 명분론에서 자유로운 모습이다.[58] 다만 이건 듣기 좋게 표현한 말이고, 자기가 그렇게나 절대시하던 성리학의 명분론을 정작 본인은 지키지 않으면서, 왕을 함부로 비판했다는 의미도 된다. 쉽게 말하자면 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 자기가 믿는 종교에 광적으로 집착하면서도 그 종교의 가르침 중 자신에게 불리하다 싶은 내용은 과감히 무시해버린 점에서 현대의 이슬람 근본주의자들과 다를 바 없던 셈이다.
조광조는 조선성리학적 이념에 근거하여 국가를 운영하기를 원했고, 그의 정책들은 한결같이 이런 기반 위에서 움직이고 있었다. 성리학을 통한 이상적인 국가의 형성을 기대했지만 흑백논리를 앞세워 너무 과격하고 성급하게 개혁정책을 밀어붙였고, 중종에게도 한계가 있었기 때문에, 조광조는 결국 실패하여 죽음을 맞았다.[59] 그러나 조광조가 뿌려놓은 성리학에 기반한 조선이라는 이상은 결국 선조대에 이르러 사림파들이 조정을 장악하면서 현실화되었다.

3.2.3. 현량과


사실 조광조의 정치도 그렇게 이상적이지는 않았다. 현량과에서 나타나는 공정성 문제도 그렇고, 김식은 아예 대놓고 시험지의 이름 가려놓은 봉인을 찢고 과거제에서 사림들을 뽑았으며, 조광조 일파였던 이조의 낭관들은 자신들의 편이 아닌 관료들을 큰 잘못을 하지 않아도 "자질이 없다"는 파면해서 쫓아내기도 했다. 명백한 월권행위였는데도 조광조는 "내가 쫓겨난 사람들하고 같이 공부해봐서 아는데, 걔들 소인임 ㅇㅇ"이라며 무마시켰다.[60] 흑백논리는 더 심해져서 조정 신료를 군자와 소인으로 나누고, "군자와 소인은 함께 일할 수 없다"면서, 소인무리, 즉 소인배(小人輩)들을 정치판에서 배제시키려 했다. 당연히 그들이 말하는 소인은 조광조의 반대파와 훈구세력이었다.
당연히 말이 안 되는 게, 후술하겠지만 그들의 세력인 김정은 옥사자를 여럿 생기게 한 데 비해 반대 세력인 정광필, 남곤은 되려 현실정치가로서 능력은 괜찮았고, 정광필의 경우엔 훗날 유배되자 백성들이 슬퍼했다는 기록이 남을 정도로 인망도 높았다. 이장곤 또한 문신이였지만 문무를 겸비하고 있고 군사적 식견 또한 조광조 일파보다 훨씬 높았다. 그러나 조광조는 훈구파뿐만 아니라 심정, 이행, 이항, 홍경주 등 기존 관료들도 자신의 뜻에 맞지 않으면 전부 소인 취급했다. 당연히 이는 매우 무례한 게, 정치나 행정에서 자신보다 행정 능력과 정치적 관록이 많고 먼저 등용된 선배 관료들이다. 이것을 오늘날로 치면, 초선에서 재선 정도의 국회의원이 자신의 정책을 반대한다는 이유로 한참 나이 많은 총리와 장관이나 상대당의 다선 선배 국회의원에게 욕짓거리와 인격모독적 발언을 한 거나 다름없다. 무엇보다도 조광조 일파 중 안당은 훈구세력은 아니었지만 신진세력과도 거리가 멀었다. 남곤도 마찬가지로 조광조의 등장 이전엔 신진 세력의 리더이기까지 했다. 한마디로 "내 편 아니면 다 소인 ㅋㅋ"라고 한 것에 더 가깝다.[61]
특히 현량과의 공정성 문제는 조광조의 도학정치, 원칙주의 자체에 치명적인 도덕적 타격을 가하는 문제였다. 현량과의 원형인 향거리선제의 경우, 이것이 시행되던 당시에도 심각한 문제를 발생시켰으며,[62] 구품관인법으로의 변화를 거친 육조시대에는 문벌귀족이라는 정치적 괴물을 만들어버렸다. 따라서 현량과 시행에 반대하던 대신들 역시 이런 과거의 선례에 따라 반대론을 펼친 것. 그리고 조광조가 이를 강경하게 밀어붙여 현량과를 시행하자마자 예상됐던 문제들이 바로 터져나왔다. 이는 행정적인 측면에서 보면, 부작용이 뻔히 예측되는 정책을 억지로 시행하다 개망신당한 꼴이고, 도덕적인 측면에서도 "도학정치를 위한다던 현량과를 악용해서 자기 당파의 세력확대를 추구했다"는 오명을 뒤집어쓰기 딱 좋은 일이다.
그렇지만 이런 한나라의 향거리선제에서 따왔다는 현량과는 서로 비교를 해 보면 그래도 향거리선제쪽이 더 낫다고 볼 수 있는데 이유는 다음과 같다.
먼저 향거리선제에서 관리들을 추천할 수 있는 권한은 지방관들에게 있었다. 향거리선제를 시행한 한나라에서는 매년 각 군국에서 수재[63] 1명 각 현에서 효렴 1명씩 추천했다. 물론 실제 시스템이 100% 이렇게 돌아간 것만은 아니지만[64] 그래도 시스템상으로는 지방민들이 추천될 확률이 높았고 실제로 후한 말 삼국시대초의 많은 인물들이 지방 출신임을 확인할 수 있다.[65] 그리고 또 지방관리들이 이렇게 추천을 했다고 황제가 곧이곧대로 믿고 임용한 것도 아니었다. 천거된 이들 역시도 과거제 수준은 아니겠지만 어쩼든 시험을 쳐서 들어왔다. 그리고 향거리선제에서는 그 추천을 받을 자격조건이 분명해서 수재, 방정, 현량, 계리, 직언, 문학 등으로 정해져 있었다. 여기에 천거한 이와 천거받은 이 간에 연좌제도 적용해서 천거받은 이가 죄를 저지르면 천거한 사람도 같이 처벌했고 이 때문에 둘간에 인맥이 형성되는 부작용도 있긴 했지만 어쨌든 태수 등 천거할 권한이 있는 이들은 이것 때문에 조심스레 천거하거나 아니면 아예 안 하기도 했다.
반면 현량과는 천거되고 합격한 이들이 대게 중앙의 명문가 출신이란데서 보면 지방관들에게 직접적인 천거 권한이 있었다고 보기는 어렵고 그나마 나은 것은 이렇게 추천된 이들을 왕이 직접 실력을 검증한다는 거지만 이미 중앙이 추천을 틀어쥔 이상 큰 의미가 있다고 보긴 어렵고 향거리선제와는 달리 '현량'이라는 조금 애매한 기준만을 보고 선출하기에 당연히 공정성이 보장되기 더 어렵고 잘못 뽑았다고 벌을 주는 것도 없어 추천하는 사람은 자기 맘대로 추천한다고 해도 상관없는 환경이 조성되었다. 이 점에서 보면 조광조와 그 일파는 현량과는 향거리선제에서 따왔다고 했지만 실상은 구품관인법에 더 가깝다.[66]
여기에 김정이 대간, 형조판서에 있을 때에는 감옥에 사람이 넘쳐나고 죽는 사람이 너무 많아 특별조사까지 해야 할 정도였으며, 이들 대부분은 천인 신분에서 출세한 사람들이었다. 이는 조광조의 개혁안 역시 철저한 신분차별, 혹은 성리학적 신분질서에 기반하고 있음을 보여준다.[67] 결국 조광조는 훈구파의 모순은 인식했으되, 그 해결책을 제시하면서 사림파의 독단적인 방식으로 진행했고, 여기에 대한 비판을 군자-소인론으로 막아버렸다. 대표적으로 남곤은 '사림의 지도자'에서 졸지에 '훈구파의 일원'으로 낙인찍혔다.[68] 남곤이 "조광조를 등용해야 합니다"라고 중종에게 간하면서 조광조에게 우호적인 태도를 취했음에도. 남곤이 조광조 일파에게 제일 욕먹은 것이, “유교 경전 읽고 마음 닦기도 바쁜데 어디서 시나 글을 좋아하느냐? 이런 막돼먹은 인간 같으니!”[69]라는 것이었다.[70]
그러자 남곤은 "그럼 명나라외교할 때 시나 글 짓는 재주 없으면 어떻게 할 건데?"라며 반론했다. 실제 그는 영의정 재직 시절은 물론, 그 전에도 뛰어난 글 솜씨로 명과의 외교를 전담한 사람이었다. 당시 명과의 외교의 중요성을 감안한다면, 남곤의 반론이 정론(正論)이고, 조광조 일파의 말이 억지였다. 즉 사림파들은 달리 대책이 있는 것도 아니면서, 모호한 기준을 들먹이며 일단 매도부터 하고 본 것이다.[71] [72][73]
조광조의 개혁 내용을 보더라도, 민생이나 국방 등의 현실에 대한 문제인식에 한계가 많고,[74] 그에 대한 현실적 대책도 부실하다.

3.2.4. 성리학에 대한 지나친 집착


사실 당시 사림파들은 민생과 부국강병보다는, 성리학 이념 전파의 중점으로 두었다. 그런 사림파들이 민생안정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 때는 붕당의 형성 시기부터이며, 이는 현실에 눈을 돌린 것에 가깝다. 붕당들은 다 같이 민생에 관심이 깊었지만,[75] 서인들이 특히 민생안정에 깊은 관심을 가졌다. 이통기국론(理通氣局論) 자체가 민생을 중요시 여기기 때문. 또한 인조반정 이후 서인은 상당기간 동안 집권상황이었기 때문에, 민생에 신경을 안 쓸 수가 없는 처지였다.
흔히 비교되곤 하는 송나라대의 개혁자 왕안석과 대조되는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다만 왕안석은 조선시기 간신으로 여겨지기까지 할 정도로 사림파 전반에 걸쳐 부정적 평판을 받았다는 점을 잊으면 안 된다. 실제 개혁의 실패나 부작용 측면에서도 그렇고, 보수적 지주층인 사림파[76] 입장에서 불편하기도 했으며, 국가의 부(富) 확보와 국력강화라는 것은 민생안정을 내세우는 성리학자들에게 호응받기 어려운 일이었다. 대동법 논의와 시행에서도, 왕안석은 김육을 비롯한 추진론자들에 대한 강력한 견제로 작용하였다. 그런데 사실 좀 웃긴 게, 조선의 사대부들이 받드는 주자는 왕안석을 명신이라고 평가했다는 것이다. 또한 송시열이나 정조, 채제공은 왕안석을 높이 평가한 바 있다. 유교적 이념의 현실화를 추구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조광조는 오히려 왕망에 더 가깝다. 실제로 유엄도 왕안석이 아닌 왕망에 빗대기도 했으니 말이다.
이에 대해서 성리학 자체의 보수성과 수신(修身)을 통한 어짊의 확대라는 측면을 볼 때, 그리고 당시 사회의 최대 모순이 훈구파의 토지겸병과 수탈이라는 것을 생각한다면, 훈구세력에 대한 공격과 그 부의 축소가 국가와 백성을 위한 급선무임은 분명하다는 견해도 있다. 그 자체로는 맞는 말이지만, 제도나 사회구조상의 변화가 없이 훈구파만을 공격한다면, 그 다음 집권세력이 그 위치를 차지하고, 똑같은 일을 반복하며 사태를 악화시킬 게 당연하다. 실제로 조광조가 의도한 대로 사림파가 집권한 후 바로 그렇게 되었다.
방납의 폐단을 거론했고 이에 대한 계책으로 수미법(收米法)을 주장했지만, 이것이 본격적으로 논의가 된 건 이이류성룡 때다. 당시 조광조의 주장은, 훈구파세조, 중종 때 받은 방납의 권리 때문에 전황이 일어나는 걸 비판하는 것에 불과하다. 즉 방납의 폐단을 없애기 위해서는, 훈구파를 싹 쓸어버리고 사림파의 세상을 만드는 것 말고는 특별한 해결책이 없다는 의미. 다르게 말하자면 그에게는 성리학 빼고는 아무것도 없다는 의미다. 실전에 투입할 관료로 쓰자면 빵점이었다는 것.
조광조는 신진 사림 중에서 가장 온건파에 속했으며, "땅은 좁고 인물이 없으니, 노비서자라도 능력이 있다면 관직에 뽑아 써야 한다"라는 지론(持論)을 내세워, 하인들에게도 공손히 대했다고도 한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공손히 대했다는 게 전부다. 상술(上述)했듯, 실제 기록을 보면, 조광조 일파가 세력을 잡고 있을 때 투옥되거나 쫓겨나거나 죽은 사람들은, 천인(賤人)에서 관직 등에 올라 출세한 사람들이 대다수였다. 그런데 이는 성리학의 기본 입장이기도 하다. "백성과 아랫사람에게 자상하게 대하고 보살피되, 신분의 구분은 철저히 해야 한다"는 게 이들의 기본입장이었다. 따라서 이들은 자신들이 보기에 '분수에 넘게' 행동하는 천인들을 결코 가만 두지 않았다.
그나마 구신(舊臣)들의 토지 독점을 비롯한 각종 사회문제에는 적극적이었다고 할 수 있고, 생의 마지막 순간 금부도사를 맞이하면서도 낯빛 하나 변하지 않는 기개를 보여주었다 한다. 하지만 상술(上述)했듯, 금부도사에게 "잠깐만 시간을 달라"고 한 뒤, 날이 저물도록 방에 들어가서 가끔 밖을 내다보며 다른 사자(使者), 즉 사약(死藥)이 취소되었거나 연기되었음을 알리는 사자가 오지 않나 기다렸다고 한다. 금부도사가 기다리다 지쳐 투덜대자 그때야 자진했다. 덤으로 조광조는 "남곤, 심정이 좌의정, 이조판서가 되었다"고 하자, "내가 죽는 게 당연하다"고 탄식했지만, 그때 남곤은 조광조를 살리려고 노력하고 있었다.[77][78] 심정도 흔히 알려진 것과는 달리 조광조 사형에는 별로 적극적이지 않았다. 실록을 보면, 조광조의 최종 처리를 위해 중종과 대신들이 모였을 때 정광필은 적극적으로 반대했고, 남곤도 사형만은 면하게 하자는 입장이었고, 심정은 "대신들의 중론을 따라야 하며, 중도를 잃어서는 안됩니다" 정도의 의견만 내고 있다. 적극적으로 조광조가 죽어야 한다고 고집하는 건 중종 하나 뿐이다.(중종실록 14년 11월 16일 기사)
그러나 조광조에 대해 변호해주자면, 조광조가 중시한 건 《소학》으로, 요즘으로 치자면 초등학교 1학년 때 배우는 바른생활 교과서쯤 된다.[79] 그런데 위키러들 중에서 초등학교 1학년 때 배운 바른생활 교과서의 내용을 다 지키는 사람은 없듯, 조선 시대에서도 그걸 다 지키려는 사람은 없었다. 더구나 시대는 사화가 2번 일어나고 반정도 일어나던 터라 더 그러했는데, 이러한 시대상황에서 조광조는 소학대로 기초적인 유교적 도덕을 지켜가며 이러한 일들이 두 번 다시 없기를 바랐으리라는[80] 짐작이 가능하고, 그래서 강경하게 되어갔을 가능성도 있다.
게다가 스승이 일명 소학동자라 불리는 김굉필이다. 스승의 학문을 계승하고 발전시키는 게 덕목이던 시절이라 소학을 중요시할 수밖에 없었고, 이런 기초적인 도덕에 충실한 조광조는 현실과 맞지 않았을 가능성이 다분하다. 학교에서 배운 도덕을 다 지키고 사는 건 가능할 수도 있다. 그러나 타인에게도 그것을 강요하며 지키라고 하는 경우는 없다. 그러나 조광조는 이걸 실천하려다 실패했다고 할 수도 있다.[81]
그러나 문제는 이 도덕과 원칙이 매우 자기중심적이었다는 데 있었다. 당장 조광조와 그 일파는 "내 편 아니면 다 소인"이라고 하며 자기 일파가 아닌 사람들을 내쫓으려 들었고 이를 위해 시험지의 봉인을 뜯고 내쫓는 등 공정성을 어기는 행패를 부리는 것조차도 옹호하는 것을 보면, 결국 도덕이라는 기준이 일반적인 도덕이 아닌 그냥 자신의 입맛에 맞는 도덕이라고도 볼 수 있다. 또한 조광조 일파가 행한 사람을 군자-소인으로 나누는 것은 매우 위험하다. 그 행위를 좋게 봐도 정작 그러는 것도 어려운 것이 을사사화 당시 "나라를 위해선 군자를 부르며 소인을 내쳐야 합니다"라는 이언적의 말에[82] 문정왕후"군자와 소인을 구별하는 것은 예로부터 어려웠던 바, 왕안석도 처음 나왔을 때는 군자로 알려졌지만 소인으로 밝혀졌다."라고 했다. 옛날 사람들조차 사람을 군자와 소인으로 구별한다는 건 얼마나 어려운지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 즉 사람을 군자와 소인으로 나누는 것은 어려운 일이라 자칫하면 군자가 소인으로 몰리고 소인이 군자로 몰릴 수 있어 절대 쉬운게 아닌데 조광조와 그 일파는 자신만만하게 자신들만을 군자라 하고 반대파는 소인이라 칭했다.
사실 성리학이라는 학문 사상을 정치이론에다가 100% 적용하면 반드시 파탄이 날 수밖에 없다.[83], 이 부분을 무시했던 것이 조광조의 문제점이다. 반대로 원시유가의 경우, 현실적이고 정치철학적인 면모가 아주 강했다.[84]

3.3. 조광조의 승진 속도


조광조의 승진 속도는 조선사의 여러 권신의 예에 비견할 정도로 이례적인 속도였다. 조광조와 비슷한 속도로 승진한 사람이 없을 정도. 물론 굳이 찾자면 27살에 영의정이 된 구성군 이준을 들 수 있지만, 왕족이니 제외.[85] 굳이 있다고 하면 일본의 침공에 대비하기 위해 사간원의 반대를 무릅쓰고 선조 24년인 1591년 2월 13일, 하루만에 8단계를 건너뛴[86] 이순신이나 일개 갑사에서 1년만에 병조 참지(정3품)까지 급상승한 유자광 정도다. 두사람 모두 전쟁과 반란이라는 비상시국으로 파격승진한 것[87]을 생각해보면, 조광조의 승진속도를 체감할 수 있다. 또한 전형적인 청요직의 경로를 타고 승진한 것으로, 조광조의 직책에 실무를 맡은 관직은 단 하나도 없다. 이러고도 현재의 장관 격인 판서와 같은 정2품까지 승진한 것.
  • 중종 10년 9월 문과 급제
  • 중종 10년 11월 종6품 사간원 정언
  • 중종 11년 봄 호조좌랑 → 예조좌랑 → 공조좌랑
  • 중종 11년 3월 홍문관 부수찬 겸 경연검토관 겸 춘추관기사관
  • 중종 12년 2월 홍문관 부교리 (종5품)
  • 중종 12년 3월 홍문관 교리 (정5품)
  • 중종 12년 7월 홍문관 응교 (정4품)
  • 중종 12년 8월 홍문관 전한 (종3품)
  • 중종 13년 1월 홍문관 부제학 겸 경연참찬관 (정3품)
  • 중종 13년 5월 승정원 동부승지 겸 경연참찬관 (정3품)
  • 중종 13년 7월 동지성균관사 겸 가선대부 (종2품)
  • 중종 13년 11월 사헌부 대사헌 (종2품)

4. 드라마




4.1. 역대 사극에서 등장한 배우들


1985년 방송된 MBC조선왕조 오백년》에서는 유인촌, 1996년 방송된 KBS 2TV조광조》에서는 유동근, 같은 해 SBS임꺽정》에서는 태민영, 2001년 방송된 SBS여인천하》에서는 차광수가 맡았다.

5. 기타


  • 묘는 경기도 용인시 수지구 포은대로 125(상현동 산55-1)에 있다. 묘 자체는 잘 꾸며놓기는 했는데 주위가 온통 공사판이다(…). 묘 바로 앞으로 난 43번 국도(포은대로) 밑으로 신분당선이 지나갈 예정이라 도로를 다 뜯어놨고, 설상가상으로 묘 바로 앞이 광교신도시 끝자락이다. 그래서 과거 수지로의 상현동 구간의 이름을 정암로라고 이름 붙여 놓았는데, 이 이름은 사라졌다.
  • 라는 이름과 기묘사화 라는것이 맞물려 한 네티즌에 의해 모 일본만화로 패러디 되었다.
  • 열린민주당 비례대표 8번 후보자인 황희석 전 법무부 인권국장은 조국 전 법무부장관을 조광조, 윤석열 검찰총장을 윤임·윤원형에 비유하는 발언을 하기도 했다. 이에 대해 조광조의 문중인 한양 조씨 대종회에서 "정암 선조와 우리 한양 조씨 문중과 국민을 모독하는 것"이라며 "조국을 윤임, 윤원형에, 윤석열을 정암에 비유하는 사람들이 대다수"라고 비판했다. # 한양 조씨 대종회

6. 둘러보기




[1] 야담집어우야담》에 의하면, 조광조는 자신의 얼굴이 남자답지 않다는 이유로 좋아하지 않았다고 하는데, 거울로 자기 얼굴을 보며, '이게 어찌 남자의 길한 상이란 말이냐'며 탄식하곤 했다고 한다.[2] 음력 8월 10일[3] 음력 1519년 12월 20일[4] 삼국지의 인물인 법정과 자가 같다.[5] 한성 수지구에서 오래된 학교 중에 하나인 문정중학교의 교명은 조광조의 시호에서 따왔다.[6] 박원종이 연산군이 거느렸던 미녀들을 모두 소유한 부도덕에 대한 반발 심리도 있었다.[7] 혼자 해먹는 걸로 모자라서 좌의정으로 승진하고 일가 친척들까지 죄다 공신에 봉했다.[8] 세종대왕소헌왕후 심씨의 8남인 영응대군의 맏사위. 연산군과 거창군부인 신씨의 장녀인 휘신공주의 시아버지이다. 구수영은 사돈 연산군을 배신하고 중종반정에 가담했고 며느리 휘신공주도 내쫓았다. 그러나 훗날 중종의 명으로 휘신공주는 남편 구문경과 재결합하게 된다.[9] 태조 이성계의 조카 조온이 그의 5대조. 태조 이성계와 태종 이방원을 보필하며 무공을 세운 인물로, 그의 자손 조광조와는 느낌이 참 많이 다르다. 조광조의 가문인 한양 조씨이성계의 할아버지인 도조의 벼슬 계승 문제 때문에 처음에는 이성계 집안과 사이가 좋지 않았다. 게다가 한양 조씨 가문은 시조의 외아들인 조휘가 원나라에 포섭되어 초대 쌍성 총관이 되면서부터, 쌍성총관부의 수장인 총관을 세습해 온 원나라의 끄나풀 집안이었는데, 어찌어찌해서 후손 중 1명인 조돈이 환조와 함께 쌍성총관부를 무너뜨리고 고려에 귀순하였다. 그리고 귀순 후 환조를 돕게 된 조돈의 후손만 대가 이어지게 되면서, 한양 조씨는 대표적인 조선 개국공신 집안이 된다.[10] 찰방이 비록 외직이긴 하나, 문관 종6품에 해당하는 결코 낮지 않은 관직이다. 권세가 없는 자리라고 하지만 집안 자체는 그다지 크게 몰락한 상태가 아니었던 듯하다. 물론 조선 자체가 공신 후손에 대해서 음으로 양으로 만만치 않은 혜택들을 주기도 했다.[11]연산군의 왕비 거창군부인 신씨는, 단경왕후 신씨의 고모가 된다. 고모와 조카가 동서지간이 되었다가 나란히 폐비된 것.[12] 대간 중 하나인 사헌부의 수장.[13] 이를 현대식으로 풀이하면, "국가의 발전과 안위가 언론의 자유보다 더 중요하다"는 말과 비슷하다.[14] 대간이 계속 교체되다 보니, 3번째 교체에선 아예 국가 인재 풀에 더 이상 추천할 사람이 없어지는 지경에 이르렀다. 당시 이조판서 안당이 만류하여 없었던 일로 했다.[15] 아닌 게 아니라 성삼문, 박팽년이 시도하려 한 게 무엇인지 상기하면 시기상조라 판단될 만하다. 물론 두 사람이 문묘에 종사되는 날은 끝까지 오지 않았지만.[16] 김굉필김종직의 제자로, 연산군 때 일어난 무오사화로 인해 김종직이 부관참시 당하자 유배되었고, 곧 사사(賜死 : 죽음을 내림, 즉 사약을 내림)된다.[17] 우왕신돈의 첩 반야의 소생이었기 때문에, 공민왕의 아들이 아닌 신돈의 아들이라는 의혹이 있었다. 이성계가 집권하자 이것을 공식화한다. 그래서 세종대왕 대에 편찬된 《고려사》에서도 우왕과 그 아들 창왕은 신우, 신창이라고 불리고 있다.[18] 실제로 공헌을 했다고 보기 정말 어렵다. 고작해야 소학 연구에 몰두한 정도. 이황, 이이, 조식 등과 비교하면 암만 봐도 억지다. 당장에 김굉필 문서만 봐도 앞의 세 사람에 비해서 내용이 썰렁하다. 그나마 정몽주는 이미 조선 초부터 충신으로 평가받았고 이색도 '동방 이학의 시조'라 말할 정도였으니 문묘종사에도 대신들도 동조했지, 김굉필은 대신들 입장에서는 한마디로 듣보잡이다.[19] 직첩(職牒)이라고도 하며, 벼슬아치의 임명 사령장(辭令狀) 혹은 사령서(辭令書)[20] 정작 향거리선제에서는, 피천자가 사고를 치면 천거한 사람도 처벌했다. 그러나 조광조의 현량과에는 이런 연좌제가 없었다.[21] 이후 숙종~영조 시기의 이익성호사설에서, 그리고 정조시기의 박제가북학의에서 조광조와 같은 주장을 한다.[22] 종6품을 받으려면 과거에서 장원급제 즉 1등으로 합격하거나 착착 승진을 밟거나 그것도 아니면 공신이 되는거 밖에는 없다.[23] 사실 김우증은 조광조와 친척이었다. 때문인지 조광조는 "그 사람은 원래 좀 그런 사람이었어요." 라고 실드쳤다.[24] 향거리선제도 처음부터 이러지는 않았다. 명목상으로는 그래도 '지방의 인재를 찾기 위함'이었기에 처음에는 지방에서 올라오는 이들이 많았고, 심지어 천거할 권한도 태수 등 지방 관리에게 있어서, 현량과보다야 더 지방민들이 천거될 확률이 높았다. 물론 향거리선제도 현량과처럼 썩을 소지가 없는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제도 자체의 구조는 현량과보단 나았다. 그에 비해서 현량과는 말 그대로 눈 가리고 아웅하는 격이었다.[25] 더욱이 안당은 정승이었다![26] 이 폐단은 심각해도 그냥 심각한 게 아니었다. 구품관인법마저 극초반기에는 목동 출신의 등애가 등용되기도 했는데, 현량과는 처음부터 막장이었다. 가정하자면 만일 조광조 세력이 쫓겨나지 않고 오래오래 집권해 현량과도 유지되었다면, 현량과는 조선판 구품관인법이 되었을 것이다. 그나마 다행인 건 조광조가 반대파를 의식해 과거제도를 남겨뒀던 거고, 조광조 자신도 과거제 폐지까지는 외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구품관인법의 사례를 생각해보면, 조광조가 조정에 계속 있었더라면 장애물거리에 불과한 과거제는 결국 폐지했을 것이다.[27] 한나라 시절 현량과만 해도 천거 받은 사람이 사고치면 천거한 당사자도 처벌하는 견제책이 있었다. 사실 조선 시대에 천거 받고 등용된 사람이 반란이라도 일으키면 그를 천거한 사람과 삼족까지 멸하는 제도를 그대로 시행하는 건 무리수였지만, 천거제의 특성상 견제 혹은 감시 체계는 반드시 필요했는데 그런 것을 찾아보기 어려웠다.[28] 위의 내용을 보면 알겠지만 과거제도가 등장한 것이 이것의 폐단의 이후니까, 돌려 말하면 그만큼 현량과가 문제가 많다고 지적한 것이다.[29] 여기서 중요한 사실이 있는데, 관리들이 공자맹자왈만 해서 과거시험을 치는 걸로 알겠지만 뭘 모르고 하는 생각이다. 툭하면 '옛날에 ~제도가 있었는데', '옛날에 ~한 사례가 있었는데' 등으로 옛날 일에 대한 언급을 할 때가 많다. 심지어 왕에게 간언할 때도 "옛날에 ~한 일이 있었으니 하지 마셔야 합니다." 라는 식으로 하기까지 했다. 즉 역사 심지어 한국사뿐 아니라 중국사까지 관리들에겐 필수 학문이었다. 즉 관리들도 대충 한나라가 향거리선제로 말아먹었다는 건 알고 있었을 것이다. 이걸 감안해보면, 김정의 발언은 그냥 망언급의 발언 아니면 김정이 역사도 모르는 무식쟁이라는 말이 된다.[30] 그나마 이게 지역별로 차이가 날 수 있는 일이면 모르겠지만, 안타깝게도 향거리선제의 실패는 권력, 인맥 등 인류 보편적으로 통용되는 것과 연관이 있는 일이었다(…)[31] 정승의 아들이 3명이나 뽑히며, 결정적으로 자파 세력만 있다는 건, 그것도 기준이 덕이나 인품 등이라면 "우리 빼곤 그리고 지방민들은 덕도 인품도 없는 새퀴들" 딱 이거다. 반대로 보면 자기네들은 엄청난 덕과 인품을 지닌 고고한 존재쯤으로 봤다는 소리. 하지만 공자자로의 사례를 보면 알듯, 공자는 행실 엉망이던 자로를 제자로 받아들여 반듯한 인간으로 만든 반면, 이들은 "저놈들은 소인배이니까 대할 가치도 없음ㅋ 우리만 잘난 놈들" 수준의 태도를 지녔으니, 과연 기존 세력들보다 인품이 좋았는지도 의문이다. 오히려 이런 모습이 전형적인 소인배와도 비슷한데, 진정으로 공자의 이상과 가치를 따르고 진정으로 덕과 인품을 갖추었다면 배척하기보다는 차라리 포용하는 태도를 갖추어야 한다. 더군다나 그 기준마저도 객관적으로 따지는 것도 아닌 자기네들의 자의적인것에 불과하니까 말이다. 특히 유교에서 내세우는 관점과 정면으로 충돌하는데, 유교에서는 "누구라도 공부하고 수양하면 성인군자가 될 수 있다"고 했고, 심지어 조광조마저도 그렇게 생각했다.[32] 이 때문에 추천할 권한을 지닌 자가 심지어는 추천을 하지 않는 일도 벌어졌다. 물론 그 반대로, 그렇기에 추천한 자와 추천받은 자와 끈끈한 인맥이 형성되긴 했다만.[33] 오히려 세도정치기의 안동 김씨의 유망주(?)에 올랐던 김좌근은 과거에 급제하기 전까지 이렇다할 벼슬을 하진 않았다. 그나마 아버지인 김조순의 환갑 선물삼아 순조가 김좌근에게 종 6품직에 제수한 적이 있다지만 그 이후 과거 급제 전까지 이렇다한 벼슬한 적이 없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전근대에 집안 배경으로 벼슬하는 일이 적지 않았음을 감안하면, 그만큼 조선이 과거제도를 중시했다고 볼 수 있다. 과거제가 막장이 된 시대에도 말이다.[34] 가령 대한민국 교육부에 있던 어떤 인간이 "민중은 개돼지와 같다." 라고 한다든가.[35] 하다못해 구품관인법조차 처음엔 향거리선제조조의 구현령의 장점을 섞은 제도라고 내세웠을 정도였다.[36] 어떤 나라라도 장점은 하나도 없는데 단점투성이인 제도를 채택할 리 없다. 아니, 그렇다고 해도 겉보기에는 장점으로 가득해 보여야지 그래도 채택할 것이다.[37] 여기에서 반대파란 단순히 현량과에 반대한 정광필, 남곤뿐 아니라, 조광조 일파를 싫어하던 이들 전부.[38] 그나마 내시보다 나은 점이라면, 내시와는 달리 조광조는 사림파 전반의 지지를 얻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이 조광조를 살리는데 힘이 되지 못했음을 보면, 분명 조광조의 기반은 그리 강하지 못했음을 알 수 있다.[39] 단 조광조가 토지개혁, 신분제 완화 등의 개혁의 신호탄으로 소격서 혁파를 선택했는지는 그가 개혁을 해보기도 전에 숙청당했으므로 알 수가 없다.[40] 이런 남의 탓 하기는 중종이 평생에 걸쳐 써먹은 정치 생존술이었다. 조광조를 붕당죄로 몰고 죄안을 작성해야 하는데, 이때 중종은 남곤을 콕 집어 맡긴다. 남곤은 중종의 기대에 부응해 죄안을 작성한다. 이를 본 정광필의 만류에도 중종은 "조정의 뜻" 운운하며 남곤이 쓴 명단에 기어이 몇 명을 더 추가로 쓰라고 종용한다. 또 중종은 "이 무리들 중에 조광조가 바로 우두머리"라면서 조광조에 대한 강한 증오심을 드러낸다. 한편 남곤은 이때 중종의 명을 받들어 조광조를 죄인으로 모는 죄안을 작성했다고 후대에 더 까인다.[41] '역사를 기록하는 관리'라는 뜻의 사관(史官)은 사실(事實)과 사실(史實)을 있는 그대로 기록하는 것이 의무였으며, 사관으로 뽑히면, 가문에서 이를 자랑스러워 할 정도로 명예로운 직책으로 여기기도 했다. 그러나 기록 후에 짤막하게 사론(史論)의 형식을 빌어, 개인적인 감상, 즉 사론(私論)을 덧붙이는 것은 그리 드물지 않았고, 별 흠도 되지 않았다. 물론 개인감정 등으로 사실을 왜곡하여 기록한다든지 하는 것은 엄청난 불명예였다. 그러면 왜 안 되는지에 대한 자각조차 없었던 인물로 인해, 이전에 일이 터졌다. 물론 가끔 현대 기준으로 보면 이뭐병스런 사론도 있긴 했다. 병자호란 이후 "사대부들이 환향녀와 이혼하는 것을 금해달라"고 말한 최명길을 "삼한을 오랑캐로 만든 놈"이라고 디스한 것이라든가…[42] 상술(上述)했듯, 이런 비판에는 근거가 충분하다. 전국에서 인재를 뽑는다는 현량과가 사림파의 사람들만, 게다가 조광조를 처음 천거했었던 안당은, 그의 아들 3형제 모두가 현량과에 뽑혔다. 과연 이를 어떻게 평해야 할까?[43] 즉 무효처리를 하지 않고 합격 사실을 인정해주되, 그에 따른 벼슬을 주지 않기로 하는 절충안. 신하들은 무효처리를 주장하고 있었다.[44] 그나마 이것은 초반기 일로 나중엔 잊혀졌다. 사실 조광조가 주목을 받은 건 이 사건 때문이었다.[45] 병조 판서 이장곤, 판중추부사 김전, 호조 판서 고형산, 화천군 심정, 병조 참지 성운. 병조 판서나 병조 참지의 경우 군사의 최고 책임자였고, 판중추부사는 왕명 출납과 숙위(宿衛)·군사 기무를 담당하던 관청의 수장이었다.[46] 위에 나와 있듯 사림파는 무관들에게 원한을 사고 있었고, 만약 더 심하게 나가면 결국 쿠데타 혹은 내란에 준하는 사건이 일어날 것을 예감한 중종이 먼저 손을 쓴 것일 수 있다. 아니면 이를 명분으로 조광조를 숙청했던가.[47] 走肖爲王 走와 肖를 합치면 趙가 되니 조씨, 즉 조광조가 왕이 된다, 라는 의미.[48] 현재 전라남도 화순군 능주면. 그때 당시 능주는 인조 때까지는 능성현이었다.[49] 당시 죄인을 다스리던 의금부에 속한 관리.[50] 경전공부 등의 도덕수양도 중요시하지만, 시와 문학 역시 중요시하는 파.[51] 그의 친구인 김안로의 영향이란 말도 있다.[52] 사실 그 뿐만은 아니다. 영의정까지 지낸 홍언필은 조광조와 내종간이었지만, 조광조의 신원을 끝내 반대했는데 그 이유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홍언필이 조광조의 신원을 반대한 이유는 자기 장인이던 송질도 영의정을 지냈지만 송질 역시 조광조에 의해 탄핵당한 것을 보고는 조광조에 대해 좋지 않은 감정을 품었을 수도 있는데 그 이유도 있을 것이다.[53] 다만 '속고내는 범죄자였다'는 서술은 조금 조심스럽게 이해할 필요가 있다. 속고내는 당시 조선과 군사적 갈등관계에 있던 여진족의 추장(여진족의 군사지도자)중 하나였다. 즉 단순히 조선의 법질서를 어지럽히는 범죄자보다는 세력은 작더라도 정치군사적 적대세력의 지도자로 간주하고 그에 걸맞게 대응하는 것이 더 적절하다는 것. 말하자면 '죄인은 네 죄를 네가 알렸다!' 식으로 대응해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고, 조선의 대 북방 정치외교-군사전략의 일부로 대응할 상대였던 것이다. 유목민의 입장에서 주변의 농경민을 약탈하는 것은 일반적인 경제활동의 일부나 다름없었다. 글을 보내 죄를 꾸짖고 뉘우치기를 권한다고 '앞으론 약탈 안하고 가난하더라도 법을 지키며 살겠습니다' 할 리가 없다는 것. 여기서 굳이 속고내가 당시 조선의 법으로도 범죄자였음을 강조하는 것은 적대적 정치군사세력의 수괴를 무슨 자국 내 범죄자처럼 대응하자는 조광조의 논리 자체가 비현실적이며, 그 논리에 따라 보더라도 이미 조선을 약탈한 전력이 있는 속고내에 대한 대응으로 '글을 보내 꾸짖고 뉘우치게 하는 것이 먼저' 라는 조광조의 주장이 불합리했음을 지적하기 위한 것이라 보아야 한다.[54] 《중종실록》 권34 13년 8월 17일 갑신 1번째 기사[55] 괜히 사극에서 반란 꾸미려고 사람 모을 때 사냥을 이용하는 것이 아니다. 보통 반역을 위해 사람을 모을 때는 광산에서 광물 캐려고, 대규모 사냥을 나가려고 등의 명분으로 사람을 모으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특히 사병이 혁파된 조선에서는 칼 든 사람 여럿이 대놓고 모이는 것 자체가 거의 불가능했기 때문에 이런 저런 명분을 갖다붙였는데 대표적인 것이 바로 사냥이었다.[56] 기록을 옮기면, "세종대왕이나 성종대왕이나 성군이셨어도, 소격서를 폐지하지 않은 건 잘못이었습니다." 《중종실록》 권34 13년 8월 28일 을미 4번째 기사[57] 연산군 초반기에 유생들이 과격한 상소를 올리자 연산군이 관련자들을 죄다 잡아들이려 했는데, 판서급 대신들이 "군주의 마음을 움직이기 위해 과격한 표현을 쓴 경우도 있었습니다."라며 해명하기도 했다.[58] 오히려 조광조(와 사림)를 비판하는 사람들이, "군주의 절대권력에 반항했다"는 이유로 비판하기도 한다. 이는 강한 군주의 권력에 대한 선호가 사람들에게 많이 퍼져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59] 사실 그렇게 된 데에는 중종의 탓도 있다. 사림파가 과감을 넘어 왕권에 대한 도전으로 보일 정도의 발언을 거리낌없이 내뱉은 것은 중종의 무한해 보이기까지 했던 신임을 믿었던 탓이 크다. 하지만 중종 입장에서는 조광조의 세력이 너무 커지는 것은 처음부터 바라지 않았고, 단지 왕권 강화를 위하여 사림파와 훈구파의 상호견제를 통한 힘의 균형을 꾀했던 것이다. 만약 너무 커진 조광조 일파를 제거하지 않았다면, 조광조의 성품으로 보아 언젠가 그가 왕에 준하는 권력을 잡고 전횡할 여지가 있었기에 중종의 판단은 올바르고 현명하다고 봐야 할 것이다.[60] 이게 얼마나 말같잖은 소리냐면, 사람에 대한 평판은 한 사람의 평가에 좌우되어선 안 된다. 한 사람의 평가만으로는 그 사람을 공정히 판단할 수 없는데 조광조는 이 짓을 한 거다. 이쯤 되면 자신을 공자, 맹자, 주자의 환생이나 그에 맞먹는 인간으로 여기지 않는 이상 불가능하다. 그리고 너무나도 당연하겠지만 조광조는 저 셋에 비하면 학자도 아니었다.[61] 오히려 이런 모습은 공자가 추구했던 모습과 상반된다. 공자는 "소인도 군자가 될 수 있다"는 말을 하면서 소인을 교화시키려고 노력했던 사람이다. 문제는 이런 기류가 조선 후대로 갈수록 점점 심해져간다는 거다.[62] 현량과의 실시 방법이 추천을 통해서 면접을 보는 방식인데, 문제는 추천하는 사람 맘대로 고를 수 있다는 것. 덕분에 안당의 아들 3명이 현량과를 통해 급제했다.[63] 후한에서는 광무제의 휘인 유'수'를 피휘하여 무재리고 한다.[64] 황제는 지방에서 올라온 이런 이들을 견제하기 위해 환관, 외척을 키워줬고 매작령이라고 해서 돈받고 벼슬파는 일이 많았다.[65] 이 시기에 향거리선제는 의미가 없어졌다고 보기도 하지만 그래도 이 시기에도 향거리선제는 존속했으며 명사들의 추천이 출세에 큰 도움이 되던 시기이기도 했다.[66] 구품관인법도 천거라는 방식은 같지만 추천권한도 중앙관료인 중정에게 있었고 중정이 추천을 잘못해도 처벌받는 장치도 없다. 그리고 그 결과 중앙귀족인 문벌귀족들이 다 해먹을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었다.[67] 다만 그럼에도 조광조는 "사람을 쓴다면 천인이라 해도 써야 한다"고 생각했다.[68] 사실 남곤은 신진세력에 좀 더 가까운데, 애초에 공신세력도 아닌 김종직의 제자로 학통상 조광조와 더 가까웠다.[69] 역사적 식견이나 지식이 없이 조선 시대를 비판, 비난하는 사람들이 종종 내세우는 논리가 이것과 비슷한 경우가 많다. "시를 읊고 글 짓고 하는 걸 뛰어나다고 하니 그 모양, 그 꼴로 망했다"는 것. 그러나 이는 오늘날 수학, 영어 등에 열심인 사람에게, "현실적으로 아무 쓸모도 없는 걸 왜 그렇게 열심히 공부하냐"는 소리와 어찌 보면 통한다.[70] 헌데 아이러니한 게, 공자논어에서도 제자들에게 "옳은 심경을 자극한다"고 시를 많이 권장했던 사람이다. 심지어 제자들에게 "왜 시를 안 배우느냐"라고 타박했다고 할 정도.[71] 이를 오늘날로 치면 사림파외교관에게 "현실적으로 아무 쓸모도 없는 영어를 왜 열심히 공부하냐?"고 비난하고, 외교관인 남곤은 "미국외교할 때 영어 실력이 없으면 어떻게 할 것이냐?"고 반박한 것에 비유할 수 있다. 당시 명나라와 현재 미국의 위상, 그리고 외교의 기본을 생각해보면, 남곤의 반박은 당시에는 무척 현실적인 것이었던 셈이다.[72] 외교에 왜 시가 중요하지 ? 식으로 의문을 가질 수 있으나 당시에는 시를 통하여 친분을 쌓거나 시를 통해 의견을 교환하는 것도 외교의 한 방법이었다.[73] 사실 시와 문을 짓는 것은 오늘날로 보면 실무를 중시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공무원들의 일이 대부분 서류작성인 것이다.) 당장 세상물정 모르는 사람을 남산골 샌님이라고 하는데 이 남산골 샌님은 바깥 일에는 신경쓰지 않고 하루종일 경전만 읽는 사람들을 비꼬는 말이다.[74] 속고내 일을 봐도 그렇다. 이건 그냥 송양지인이나 다름없는, 혹은 그 이상으로 한심한 일이었다.[75] 이기론으로 인해서 방식이 갈리긴 했지만 어쨌든 민생을 살려야 한다는 것에선 별로 다르지 않았다. 특히 양란()을 거치며 나라가 완전히 너덜너덜해지자 이를 위한 대책을 내놓기 시작했다.[76] 정확하게는 관학을 포함하여 양반계급 모두.[77] 쉽게 말하면 정치판에서 적과 아군을 구분해낼 능력도 없었다는 뜻이다.[78] 사실 남곤은 소장파에 가까웠다. 사장(詞章/辭章), 즉 시가(詩歌)와 문장에 능했고 훈구파들과도 친했기에, 조광조의 당과 멀어지고 소인으로 몰렸던 것.[79]소학》의 내용은 간단히 말해, 기초적인 유교적 도덕이랄 수 있다. 한 번 정도는 들어봤을, “身體髮膚, 受之父母, 不敢毁傷, 孝之始也”(신체발부, 수지부모, 불감훼상, 효지시야: 신체와 모발, 피부는 부모로부터 받은 것이니, 감히 훼손하지 않는 것이 효의 시작이다) 역시 소학에 있는 내용이다. 이렇듯 4글자로 된 구절로 이뤄졌기에, 《사자소학(四字小學)》이라고도 하며, 한학(漢學)을 배우는 입문서로 널리 쓰였다.[80] 사실 유교 중심 국가에서, 사화니 반정이니 일어난다는 것 자체가 이론적으로는 거의 힘든 일이다.[81] 사실 따지고 보면 현대에 와서도 어떤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 문제점을 구조적 문제에서 보기보다는 개개인의 도덕성, 의식 문제, 혹은 국민성 문제로 보는 사고방식은 상당히 흔한 관점이다. 이를테면 한국/정치에서 "정당과 이념보다 정치인의 도덕성과 청렴이 더 중요하다"고 보는 논리가 그런 것.[82] 의도는 을사사화 당시 윤임, 유관, 유인숙 세 사람이 걸렸는데 이게 확대될까 사람들이 우려했고, 이언적은 이 일 자체를 막아 사화를 막고자 하는 것이었다.[83] 원래 성리학 자체가 도덕적 자기수양을 목적으로 한다. 그래서 전공자들이 공부를 하다 보면, "이걸 유학(儒學)이 아닌, 유교(儒敎)라고 부르는 이유를 알겠다"고 토로(吐露)하는 경우를 많이 본다.[84] 처음 유교가 탄생했을 시기에는 춘추전국시대의 혼란기로서 이 시기에는 여러 제자백가들과 사상들이 탄생했지만 이들의 공통점은 이 혼란스러운 세상에서 어떻게 해야 하는가가 주 목적이라고 볼 수 있다. 그 중에서 유교는 주나라의 질서가 붕괴되기 전으로 즉 주나라 질서의 회귀를 주창한 계열이다. 물론 이건 공자 때 이야기, 전국시대의 맹자 때에는 오히려 주나라를 대신해 새로운 주나라가 될 이를 찾는게 목적이었다. 하지만 근본적으로 혼란기를 잠재우고 올바르게 이끌어줄 군주와 나라를 찾는데서는 똑같다. 대상이 다를 뿐[85] 세조 말년에 영의정이 되었는데, 구성군 이준은 세조의 조카이다.(세종대왕의 4남 임영대군의 아들) 더구나 세조가 죽을 때가 다 되어가면서 기존 공신들을 견제하려고 일부러 왕족 중에서 골라서 자신의 후대가 되는 예종의 세력을 만들어주려고 공적 만들어주고 밀어올린 감이 있다. 현대로 치자면 재벌그룹 회장 중 한 명이 그룹 승계하면서 자기 친척을 계열사 사장으로 올린 거다. 후에 공신들을 포함한 신하들은 이걸 막기 위해서, 왕족은 관직에 오를 수 없게 경국대전에 못을 박아버린다.[86] 정읍현감(종6품)→진도군수(종4품)→가리포진 수군첨절제사(종3품)→전라좌도 수군절도사(정3품)[87] 특히 유자광세조가 일부러 키워주기 위해서 높은 자리에 앉힌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