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안문 6.4 항쟁/사건 진행

 


1. 4월
1.1. 4월 17일
1.2. 4월 22일
1.3. 4월 26일
2. 5월
2.1. 5월 13일
2.2. 5월 15일
2.3. 5월 18일
2.4. 5월 19일
2.5. 5월 20일
2.6. 5월 23일
2.7. 5월 24일 또는 5월 27일
2.8. 5월 30일
3. 6월
3.1. 6월 1일
3.2. 6월 3일
3.3. 6월 4일
3.3.2. 민주주의의 여신상


1. 4월



1.1. 4월 17일


학생들과 시민들은 후야오방의 추모를 위해 인민영웅기념비로 몰려들기 시작했으며, 수백 명의 대학생들로 시위대가 형성되었다. 중국정법대학의 대학원생들 약 600여명과 청년 교사들이 스스로 만든 화환을 들고 진혼곡을 부르면서 천안문 광장까지 행진했고, 약 60여명이 후야오방의 집에 문상을 갔다. 오후 3시 베이징대학 역사학과 학생 왕단이 교내에서 530위안을 모금해서 화환을 사 천안문 광장으로 보냈고, 후야오방의 집에 추도하러 갔다. 24시부터 베이징대학, 베이징사범대학, 중국정법대학, 칭화대학 등 베이징 소재 대학생 약 6,000여 명이 각 학교로부터 행진을 시작하여 천안문 광장에 집결한 뒤 후야오방에게 화환을 바쳤다. 그리고 수만 군중들이 정좌한 상태에서 후야오방에 대한 정확한 평가, 공무원의 직권을 남용한 불법 전매에 대한 처벌 등에 대한 내용을 담은 7개조 요구를 내놓았다.

1.2. 4월 22일


후야오방의 장례식이 거행되었다. 시안(西安)에서는 군중 300여명이 10여 대의 차량에 불을 지르고 성(省) 정부를 습격. 구호는 ‘공농(工農)과 연합해 폭정을 타도하자'였으며 시위는 점점 내륙으로 확산되기 시작한다.

1.3. 4월 26일


'덩샤오핑(鄧小平), 시위가 커지자 북경 시위 통제 지시.' 인민일보는 이 날짜 사설을 통해 시위대와 근로자, 농민공 시위를 ‘반혁명 폭란'으로 규정했다.

2. 5월



2.1. 5월 13일


1,000여 명의 학생들이 천안문 광장에서 단식을 시작했다. 학생 대표들이 <단식서>를 작성해 전국 인민들에게 발표했다. 이 글을 읽은 인민들은 학생들의 마음에 감동을 받아 시위대에 점차 동조하게 된다.
우얼카이시가 천안문 광장을 반쯤 비워서 소련 손님맞이를 하자는 의견을 내기도 하였으나 차이링 같은 초강경파들의 의해 거절당했다. 천안문 항쟁 다큐에 의하면 자신은 이때쯤 운동이 실패할 것이라고 예측하기도 했었다는데 글쎄...

2.2. 5월 15일


5월 15일에 소련미하일 고르바초프가 방중하기로 했으나 천안문 광장이 시위대로 가득 찬 것 때문에 예포는커녕 카퍼레이드도 할 수 없었기 때문에 결국 천안문 앞의 장안가(長安街)를 통과하지 못하고 뒷길로 돌아 숙소인 베이징 서쪽의 조어대(釣魚臺)로 향했고, 회담을 하면서도 광장과 거리의 시민들과 시위대가 내는 소리가 들리는 등 중국 지도자들로서는 대단히 창피한 일이 벌어졌다. 특히 개혁개방으로 타임지에 두 번이나 올해의 인물로 선정이 된 덩샤오핑에게는 더더욱 얼굴을 붉힐만한 일이었다. 거기다 중-소 국경분쟁에 중월전쟁으로 전통적인 공산주의 우방국들과의 관계가 개판인 것을 추스르고 중-소관계를 회복시키기 위해 소련의 서기장이 직접 내방한 역사적 상황에서 국제적 망신을 당한 중국 공산당은 이 사태를 '''난동'''으로 규정한다.

2.3. 5월 18일


베이징 일부 지역에 한정해서 계엄령이 선포되었다. 오전 11시 인민대회당에서 중국 공산당 원로들은 우얼카이시, 왕단 등 학생 측 대표와 전격적으로 면담을 가졌다. 신임 총리 리펑은 당내 강경파들을 대신해서 학생들을 강한 어조로 설복시키려 했으나, 학생 지도층들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고 협상은 결렬되었다. 그리고 당일 당내 회의에서 계엄령을 선포하기를 결정했고, 중국공산당 중앙군사위원회 주석으로 군통수권을 쥐고 있던 덩샤오핑은 출동명령서에 사인했다. 오직 쉬친셴(徐勤先, 당시 중장)만이 "인민해방군은 인민에게 총부리를 돌릴 수 없다."라며 출동을 거부했는데, 그는 군법에 의해 직위해제 처분되어 소식이 끊겼고, 서방에서는 사형에 처해졌다는 보도가 있었다. 실제로는 명령불복종죄로 군사재판에 회부되어 5년형을 받고 이후 스자좡(石家圧)시에서 거주지 제한조치에 취해졌다고 한다. 사건 20여 년 후 홍콩언론인 빈과일보가 수소문 끝에 그를 찾아가 인터뷰했는데, 그는 군인연금도 끊기는 등 상당히 어렵게 살고 있었음에도 "전혀 후회하지 않는다. 다시 그 때로 되돌아가도 그렇게 하겠다"고 대답했다.

2.4. 5월 1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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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총서기 자오쯔양은 5월 17일 북한 평양 방문을 마치고 돌아왔다. 하지만 결국 5월 20일 발효될 계엄령을 막지 못하고 19일 새벽 4시 45분에 '''"죄송합니다, 여러분. 제가 너무 늦게 왔습니다. 상황이 아주 안 좋습니다. 제발 광장을 떠나주십시오!"'''라고 눈물로 호소했다.[1] 그리고 병가를 사유로 사임장을 제출하고 공산당을 떠났지만, 결국 체포된 이후 2005년 사망할 때까지 가택연금되었고, 현재까지도 복권되지 못했다. 이후 몇 차례 덩샤오핑의 마음을 돌려보려 시도했지만, 그는 죽을 때 까지 천안문 사건에 대한 입장을 선회하지 않았다.

2.5. 5월 20일


5월 20일, 마침내 '''계엄령이 선포된다.''' 중국 당국은 계엄령을 내린 후 약 5만명의 대군을 베이징에 투입했으나, 예상 외로 시민들과 학생들의 강한 저항으로 교외에 머물러야 했다. 알려진 바에 따르면 계엄 집행의 임무를 받은 인민해방군 장교들은 텔레비전, 신문, 라디오 등을 보고 듣지도 말고 오직 공산당이 발표한 <4.26 사설>만을 보도록 명령받았다. 따라서 이들은 자기가 하는 일이 군중들을 진압하는 것이라는 것을 몰랐다.
한편 이 시기 시위대에게 포위된 인민해방군에게 시위대측은 군인들에게 시위대를 지지하기를 호소했고, 시민들은 오히려 포위된 병사들에게 물과 음식을 가져다주었다고 한다. 반대로 진압명령이 떨어지기 전 천안문광장에서 단식투쟁 중이었던 학생이 탈진해 쓰러지면 군의관이 돌보거나 군차량으로 병원에 후송시키곤 했다. 이렇게 군과 인민이 서로에게 호의적인 모습을 보고, 1970~80년대 악랄한 정부의 민주화 시위 탄압을 겪은 한국인들 사이에서는 "중국이 공산 국가라지만 저렇게 국민을 사랑하는 점은 배워봄직하다."는 여론이 강세였으나, '''그 끝은...'''
결국 중국 공산당은 바로 무력을 사용하지 않고 계속 군중들에게 천안문 광장을 비울 것을 종용했다. 하지만 군중들은 해산하지 않았고, 결국 당내에서는 강경파들이 득세하게 된다. 시위대 내부의 지도층에서도 군대가 베이징 시내를 장악하자 위험을 느끼고 해산할 것을 논하기도 했으나, 소식을 듣고 전국에서 학생들이 몰려들었고, 결국 주도권을 장악한 것은 강경 급진파 세력이었다.

2.6. 5월 23일


후난성에서 온 세 사람이 천안문 마오쩌둥 초상화에 페인트를 뿌리고 성루 벽에 ‘독재는 종식되어야 한다’, ‘개인 우상화는 종식되어야 한다’라는 현수막을 붙여놓아 당국에 연행되었다. 각각 버스회사 직원, 신문사 디자인 편집국장, 초등학교 교사였던 그들은 당시 당국에 탄압의 구실을 잡힐까 두려워했던 대학생들에 의해 공안에 연행되었다. 학생운동이 탄압된 후에 베이징 중급법원에서 ‘반혁명파괴죄’와 ‘선전선동죄’로 각각 16년, 20년과 무기징역에 언도되었다고.

2.7. 5월 24일 또는 5월 27일


자오쯔양 총서기의 해임이 결정되었다. 정확한 날짜는 문헌과 증언에 따라 5월 24일과 5월 27일로 갈린다.

2.8. 5월 30일


베이징 소재 여덟 곳의 예술대학 교원들과 학생들이 공동 제작한 '민주주의의 여신상'이 새벽 천안문 광장에 세워지기 시작했다. 높이 8미터, 직경 2미터 남짓했다. 받침돌은 석고로 제작되었고 전체는 발포수지로 제작되었다.
5월말 갑자기 이상한 낌새를 느낀 왕단과 우얼카이시가 천안문 광장에서 학생들을 철수시키자는 의견을 몇번 내기도 했었으나 차이링같은 초강경파들에 의해 거절당했다.

3. 6월


이 기나긴 운동이 절정에 도달한 달이었다.

3.1. 6월 1일


중국 공산당은 세계 언론들의 라이브 방송을 제한하고 시위사진과 인민해방군의 사진도 찍는 것을 금지했다.

3.2. '''6월 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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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에 표시된 핏자국은 유혈 진압이 일어난 곳이며, 보라색 화살표는 진압군이 들어온 방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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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압 과정을 묘사한 그림. 그림이지만 상당히 잔인하다.

6월 3일 밤에 촬영된 영국 BBC 뉴스 영상[2][3]

1995년 제작된 다큐멘터리 "The Gate of Heavenly Peace (국내개봉명 태평천국의 문)"의 일부.
마지막 진압 당시의 상황을 담은 영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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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압군을 설득하는 베이징 시민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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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령을 하달받자 즉시 출동하는 중국 인민해방군. '''인민해방군이 인민에게 총부리를 겨누기 시작했다.'''
그리고 운명의 6월 3일 밤, '''무력 진압명령'''이 떨어졌다. 중국 공산당은 6월 4일 새벽 6시까지 일체의 예외 없이 시민들을 천안문 광장에서 해산시키기를 명령했고, 밤 10시 베이징 동서에서 진입한 인민해방군 제38집단군과 공군 제15공수부대, 육군 제39집단군, 육군 제54집단군 등은 전차와 총기를 동원한 무차별 발포로 군중을 강제해산시켰다. 먼저 비무장 군인들이 도열해서 전진했으나 시민들의 저항에 후퇴했고, 그 다음으로는 곤봉을 든 채 접근했다가 마찬가지로 후퇴했으며, 끝내 경기관총과 소총으로 시위대에 발포했다. 군인들 뒤에는 탱크와 장갑차가 전진했다. 장갑차 위에 탄 군인은 공포심을 불러일으키기 위해 하늘에 대고 총을 쏘다가 시민들이 보이면 총구를 시민 쪽으로 들이대서 거부감 없이 쏴죽였다. 그리고 잔인하게도 도망가는 시민들까지 '''탱크를 몰고가서 짓밟아 죽였다고 한다.''' 더 무서운 것은 시위와는 전혀 상관없이 집에서 쉬고있던 시민들도 사살당하거나 부상당했다는 것이다. 군대가 일반 가정집에도 총을 난사해서 벌어진 일이었다. 심지어는 외국인 전용 거주구역에도 총을 난사했다고 한다.
베이징 위수 지역 군인들은 공안과 더불어 시민들에게 우호적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진압 과정에서 차출된 중국군 부대는 베이징에 지인이 없고, 베이징 시민에게 무차별 발포하는 데 큰 저항감이 없을 가능성이 큰, 신장 자치구 등 베이징 외 지역 군인이 대부분이었다. 현장에 투입된 인민해방군들은 군부의 통제에 의해 베이징의 실상을 모르고, 당에서 주입한 강령과 명령을 지속적으로 교육받았다. 거기다 베이징 시민들의 보통화를 타지 출신인 이들은 잘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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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히 시민들은 격분해서 돌과 화염병을 던지며 저항했다. 버스나 택시 등을 동원해 전차가 도심으로 진입하는 것을 막고, 돌과 벽돌을 던졌으며, 화염병으로 전차와 장갑차를 폭파시키고 전차병을 끌어냈다. 그들이 끌어낸 군인들은 격분한 시민들에 의해 무차별 구타를 당해 맞아 죽었고, 시민들은 시체를 질질 끌고다니면서 불을 붙여서 다리에 매달거나 버스 채로 태워버리기도 했다. 총탄에 맞아 다친 부상자들은 시민들이 자전거와 수레에 실어 병원으로 옮겼다고 한다. '''"파시스트 정권 물러가라! 덩샤오핑은 학살자다! 정신이 있는 거냐? 형제같은 학생들에게 총부리를 들이대다니!"'''라고 외치는 시민들로 거리는 가득했다. 중국의 양심 의사라고 불리는 장옌융의 증언에 의하면, 이 때 진압군은 국제적으로 사용이 금지되는 덤덤탄(관통력을 낮추고 대인 제압, 살상 능력을 높힌 탄환)을 썼다고 한다.[6] 이때 광장에서는 학생들이 '민주대학'이라는 사설 기관을 설치해 서로 교수로 임명하고 있었다.
결국 시민들의 저항을 뚫고 천안문 광장에 진입한 인민해방군은 대학살이 벌어지는 와중에도 류샤오보를 포함해 광장을 지킨 학생 지도층들을 상대로 협상을 제시했다. 인민해방군은 먼저 광장의 조명을 모두 꺼버린 다음, 저항할 수 없게 만들었다. 그리고 광장에서 해산한다면 시민들을 더 이상 죽이지 않고 진압을 끝내고, 학생 시위대를 무사히 보내주겠다, 그렇지 않으면 모조리 죽여버리겠다고 했다. 말하자면 시민들의 목숨을 인질로 삼은 것이다. 이때 강경파를 제외한 다른 학생 시위대는 협상을 받아들여 해산했다. 남겨진 사람들은 잔인하게 학살당했고[7], 시위대가 세운 거대 조형물인 '민주주의의 여신상'은 전차로 뭉개졌다. 강경파의 리더 차이링의 증언에 의하면 사실 복지부동인 중국 공산당의 태도에 실망해서 5월 말을 전후로 많은 대학생들이 광장을 빠져나갔으나, 아직 많은 수의 대학생들이 단식 투쟁을 하고 있었고 천막 안에서 더위에 지쳐 누워 자고 있었던 많은 시민들이 계엄군의 탱크에 치어 숨졌다고 한다.
그리고 2017년에 공개된 영국의 외교문서에서는 저녁에 시작돼 모두 4단계로 나뉘어 진행됐는데 1∼3단계는 선양(瀋陽) 군구에서 집행했다. 장병들이 무기를 휴대하지 않는 1단계, 장비를 소지하는 2단계, 휴대 무기로 시위대를 위협하는 3단계로 구분됐다. 선양군구 운전병들은 당시 베이징에 가서 훈련과 촬영을 지시받고 현장에 투입됐다. 이들은 공포감 분위기를 형성하여 시위대를 해산시키기 위해 천안문의 모든 조명을 끄게한 후 학생과 시민들을 갈라놓고 학생들에게 1시간내에 광장을 떠날 것을 통보했다. 대부분의 학생들이 광장을 떠났지만 강경 투쟁파들은 광장에 남겠다고 하였고, 군부에서는 3단계 해산 임무가 실패했다고 판단, 베이징군구 27집단군이 투입되어 장갑차 발포를 시작해 현장에 흩어져 있던 '''선양군구 군인들까지 모두 사살했다.''' 장갑차는 두 차례에 걸쳐 시위대를 압살했고 시신들은 불도저로 수습했다. 시위대중 1,000여명은 정이루(正義路)로 현장을 떠날 수 있도록 허가받았지만 기관총을 든 병사들에게 희생당했다.

3.3. 6월 4일


악몽의 밤이 지나가고 시위대는 대부분이 해산되었다. 광장에 남은 학생 시위대에게 정부 측에서 나온 지식인들이 협상을 하자며 다가왔다. 시위대에게 시민들의 목숨을 담보로 해산을 강권했고, 이후 시위 지도층에게 책임을 묻지 않겠다는 조건을 내걸어 학생들은 해산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 학생들과 진압군 사이를 중재한 사람들은 대만계 가수 허우더젠, 훗날 노벨평화상을 수상하는 류샤오보 등 '천안문 사군자'라고 불리는 지식인들이었는데, 이들 덕분에 천안문 광장에서는 '''그나마''' 평화롭게 시위대가 해산할 수 있었다. 그 당시 학생들은 인터내셔널가를 부르며 해산하였다. 그러나 중국 공산당은 처음의 이 약속을 저버렸고, 이후에 수많은 민주화 운동가들이 수배되어 체포되거나 추방되었다. 학생지도부 대표인 왕단, 훗날 노벨평화상을 수상하는 류샤오보 역시 이 중 한 사람이었다.
이 날은 베이징 전체가 죽음의 도시가 되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거리 곳곳에는 시민들이 군인들에게 짓밟히고 있었다. 도로에는 차가 다니지 않고 탱크와 장갑차가 지나다녔다. 날은 밝았고 창안제는 전부 진압군에 의해 제압되었다. 그때까지도 저항하는 시민들은 군인들에게 무자비하게 짓밟혔다. 광장과 거리에는 시체들이 널브러져 있었고 전소된 탱크와 장갑차, 차량들이 버려져 있었다. 도시 곳곳에는 분노한 시위대가 죽인 진압군의 시체 여러 구가 그슬려지고 훼손된 상태로 방치되어 있었다. 심지어 다리에 목을 매달아 전시해 놓은 것도 있었고, 불타버린 버스에 목이 매달려 음경 부위에 막대기를 꽂아넣은 시체도 있었다. 하지만 시체의 대부분은 탱크에 깔려죽거나 총에 맞아 죽어 신원을 확인할 수 없는 시민들이 대부분이었다. 그 후 시체들은 (군인과 민간인을 막론하고) 인민해방군이 증거인멸을 위해 비닐팩에 담아 모조리 수거해서 어디론가 운반해갔고, 이후 도심 곳곳은 시체들과 유류품을 태우는 연기로 가득했다. 심지어 중국 정부도 정확히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사상당하고 실종되었는지는 기록하지 않아 누가 어디서 얼마나 죽었는지는 지금도 불분명하다.

3.3.1. 탱크맨




3.3.2. 민주주의의 여신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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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29일에 대학생들의 주도로 건립된 조형물이다. 폴리에스테르수지로 만들어진 이 석상은 미국의 '자유의 여신상'을 본따 만들어진 것으로 '민주주의의 여신'으로 불렸으며, 공산당의 독재를 반대하고 민주주의를 이루겠다는 민중들의 뜻을 형상화하는 의미에서 마오쩌둥의 초상화를 '''정면으로''' 쳐다보는 위치에서 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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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불과 4일만에 이 석상은 탱크에 의해 분쇄되어 철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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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콩중문대학교의 여신상.
많은 사람들이 탱크맨과 더불어 천안문 항쟁의 상징으로 기억하고 있으며, 철거된 원본을 본따서 1996년 6월에 홍콩 빅토리아 공원[8], 1994년에 샌프란시스코의 차이나 타운, 캐나다의 요크 대학교브리티시 컬럼비아 대학교 등 세계 각지에 모본들이 세워졌다.


[1] 참고로 사진에서 자오쯔양의 뒤에 서 있는 남자는 바로 원자바오.[2] 본 영상에 등장한 특파원은 현재 BBC Radio 4의 From Our Own Correspondent를 진행하는 케이트 애디(Kate Adie). 여담으로 주영 이란 대사관 점거농성 사건(님로드 작전)과 같은 굵직한 사건사고를 보도를 담당했다. 근황[3] 1분 45초경에 군중이 인터내셔널가를 부른다.[4] 사실 이건 중국사 고유의 전통이다. 말이 통하면 관군과 반군이 내통할 위험이 있기 때문에 일부러 반란을 진압할 때에는 먼 지역에서 군대를 동원했다. 명나라 때 섬서에서 반란이 났을때 이들을 진압하기 위해 광동, 상해 일대의 관군을 동원하는 식으로.[5] 비슷한 경우로 제주 4.3 사건, 대구 10월 사건때도 당시 진압군으로 온 정부군측이 제주어(제주어는 사투리가 아니라 따로 언어로 봐야한다고 할 정도로 육지(내륙)과 단어자체가 매우 이질적인 경우가 많다.)를 몰라 당황해 하거나, 대구 10월 사태를 겪은 생존자가 "진압하러온 서남방언을 쓰는 군인이 우리 말을 잘 이해하지 못한 것 같았다"라고 증언했다고 한다.[6] 존 레논이 이 총알에 맞았는데, 거의 하나만 맞아도 사망 확정인 근거리 살상전용 총알이다. 실제로 레논의 경우 총알을 하나만 맞았더라도 사망 확정이었다고 한다.[7] 기관포를 갈겨대고 시위대를 앉아 쏴 자세로 정조준해서 죽여 댔으며, 전차로 깔아 죽인 게 부지기수였다.[8] 결국은 중국령이 되어버린 홍콩으로서는 유일하게 중국내에서 천안문 항쟁에 대한 여신상을 세운 곳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