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자바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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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대 중화인민공화국 국무원 총리
원자바오
温家宝

<colbgcolor=#cc0000><colcolor=#ffd700> 이름
간체자: 温家宝 / 번체자: 溫家寶 (병음: Wēn Jiābǎo)
한국 한자음: 온가보
출생
1942년 9월 15일 (81세)
중화민국 왕징웨이 정권 톈진시
국적
[image] 중국
학력
중국지질대학 학사
정당

직업
정치가
전직
중화인민공화국 6대 국무원 총리
이력
중국공산당 중앙판공청 주임
중국공산당 중앙정치국위원 중앙서기처 서기
중국공산당 중앙정치국위원 중앙서기처 서기 국무원 부총리
중화인민공화국 국무원 부총리
[image]
1. 개요
2. 생애
2.1. 총리 전
2.2. 총리 기간
2.2.1. 일가의 부패의혹
2.3. 퇴임 이후
3. 여담


1. 개요


중화인민공화국의 제 6대 국무원 총리. 후진타오 전 국가 주석과 콤비를 이루어 2003년 ~ 2013년 초까지 10년간 중화인민공화국을 이끌었다. 후진타오 전 중국 주석처럼 이공계 출신으로서 지도자의 자리까지 올라왔는데, 원자바오 총리는 1960년 베이징 지질 학원(현 중국 지질 대학)에서 수학한 경력이 있다. 그래서 지질학 분야에서는 전문성이 검증된 인물이다.

2. 생애



2.1. 총리 전


[image]
천안문 사태 당시 자오쯔양 총서기. 옆에 검은 옷을 입은 사람이 바로 원자바오이다.[1]
천안문 사태를 옹호하다 숙청당한 자오쯔양 총서기의 측근이었던 원자바오는 민주주의 등 금기시된 정치 개혁을 주창하면서 외부 세계의 주목을 받았다. 1986년부터 1993년까진 당 중앙 판공청 주임을 맡았는데, 원자바오의 능력을 높게 본 덩샤오핑의 조치였다고 한다. 1997년 중앙 정치국 위원 중앙서기처 서기, 1998년 중앙 정치국 위원, 중앙서기처 서기 국무원 부총리 등 중국 공산당의 주요 보직을 모두 거친 뒤에 주룽지의 후임으로 2003년 중국 국무원 총리가 되었다.

2.2. 총리 기간


총리 시절 검소하고 소탈한 모습으로 중국 인민들에게 인기를 끌었는데, 부패의 최고 해법은 민주주의라는 파격적인 발언을 하기도 했다. 다만 원자바오는 "민주와 법제, 자유, 인권, 평등, 박애 등은 자본주의 특유의 것이 아니라 세계 역사 발전 과정에서 중국에도 형성된 성과이며 인류가 공동으로 추구하는 가치관"이란 것을 강조하며 서방식 민주주의가 아닌 중국식 민주주의를 주창하는 입장이다.
원자바오는 위의 사진에서도 나와있지만 당시 천안문 시위대의 요구에 우호적이었던 자오쯔양 서기의 최측근이었고, 자오쯔양은 장쩌민에 의해 좌천된 후 무수한 회유를 받았지만 죽을 때까지 자신의 행동을 부정하지 않았던 사람이니만큼, 어느 정도 민주적인 개혁에 우호적인 사상을 가질 수 있었을 개연성은 충분하다. 이후에도 사회 국가주의적 성향이 짙은 보시라이의 충칭 모델과 대립되는 민주주의적 요소를 가지고 있는 왕양 광둥성 서기의 광둥 모델을 적극 띄우는[2] 등 지속적으로 본인의 성향을 유지했다.
[image]
원자바오는 오래 된 국산 운동화를 즐겨 신고 버스를 타고 다니는 등 '서민 총리'로 사랑을 받았는데, 특히 2008년 쓰촨성 대지진이 발생했을 땐 쓰촨 성으로 직접 날아가서 피해자들을 위로하고 격려하기도 했다.
2011년 4월에 중국도덕성이 땅에 떨어졌다고 비판했는데, 중국 공산당 기관지가 2012년에 들어서 도덕적 상태가 양호하다고 반격했다. 뭔가 국민들에게 인기는 있는데 인기에 비해 실세 라인은 아닌 모양(...). 원자바오가 후진타오 계열인 공청단과 그나마 가깝다고는하나 파벌 싸움에서 거의 언급이 되지 않고 중립인걸 보면 딱히 조직을 만들지 않는 성격인듯.
2012년 전인대에서는 중국에서 금기시되는 단어인 문화대혁명이라는 단어까지 써가며 정치개혁을 강조했다. 아마 중국 내 구태 정치인으로 대표되는 보시라이[3] 등 몇몇 수구파를 겨냥한 발언인 듯 하다. 임기 말에 이렇게 추진하는 거 보면 정말 개혁을 뼈저리게 느끼는 듯.
다만 그의 의도를 달리 보는 해석도 있는데, 보시라이로 대표되는 태자당 가운데서도 좌파 + 국가 중심주의 노선이 떠오르자 공청단의 힘이 약해질 것을 우려해서 자신의 최강점인 청렴을 통해 (혹은 태자당의 최약점인 부패를 통해) 공산당의 신주류가 될 태자당 세력을 미리 견제한 것이라는 견해다. 즉, 후진타오가 직접 하질 못한걸 총리가 나섰다...라는 이야기고, 이 가설이 맞다면 보시라이 숙청을 주도했다고 볼 수도 있다. 다만 시진핑 역시 태자당 우파로서 보시라이가 부담이었는지 결국엔 그의 해임에 동의했다.
[image]
일본에서 그 일있은 후, 한중일 정상회의에서 간 나오토 총리가 후쿠시마오이대접해 먹었다. 원자바오 총리는 딱 한 입만 베어 먹었고, 이명박은 일단 주어진 양은 다 먹었다.

2.2.1. 일가의 부패의혹


임기가 말년에 접어들면서 퇴임을 준비하고 있던 2012년 11월, 뉴욕 타임즈에서 그의 일가가 3조원대의 부정 자산을 모았다는 의혹 기사를 내면서 파문이 일기도 했다. 그리고 이때를 노리고 평소 원자바오의 언행에 반감을 가지고 있던 원로와 보수파들이 파면까지 거론하며 원자바오에게 해명을 요구하자, 원자바오는 자신의 재산에 대한 조사를 요구하고 공직자 재산을 공개토록 하는 '양광 법안' 실행을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민심을 잃진 않았는지 실각하진 않았고, 2013년 3월 전인대 마지막 정부 업무 보고 연설을 마친 후 이례적으로 1번이 아닌 3번 허리를 숙여 인사하는 행동을 취했는데, 이 행동이 중국 네티즌들에게 감동을 줘 일명 총리의 삼국궁이라 불리며 그해 전인대의 스타로 나름 화려하게 총리 인생을 마감하였다.#

2.3. 퇴임 이후


이러쿵저러쿵 상반된 평가를 받는 인물이긴 하지만 중국에선 명 총리 중 한명으로 손꼽힌다. 또 자서전을 집필해 정치 개혁을 주장하면서 부딪혔던 반발 등 내막을 폭로하고, 뉴욕 타임스에 의해 까발려진 일가의 비밀 재산 문제를 해명할 것으로 알려졌다. 미국내 중화권 매체 보쉰에선 이것도 이미지 메이킹이라고 까긴 했다만.(...)[4]
근데 이후 자서전을 다시 안쓰기로 했다는 소식도 들리고 이래저래 여러 루머가 떠돈다. 자식들이 사업에 뛰어드는 것을 말리지 못한 데 대해 ‘중대 착오’라며 후회의 뜻을 밝혔다는 기사가 보도되기도 한걸로 볼때 자식 농사는 실패한 듯도 보인다.(...)
이후 학생들에게 강연 등을 하며 노후 생활을 보내고 있는데, 결과적으로 그가 물러나고 시진핑 체제가 들어서면서 중국의 민주화는 한층 더 요원해진 것으로 보인다. 그렇지만 명백히 중국공산당의 원로인지라 시진핑도 원자바오에게 정치적인 보복을 가할 정도로 막 대하지는 않고 있다.

3. 여담


젊었을적 하루 공부 시간의 절반을 중국 고전을 공부하는데 썼으며, 훗날 이 고전 실력을 바탕으로 책을 내기도 했다.
처음 총리로 발탁됐을 때, 중국 당국이 한국 기자들에게 한국의 바둑 기사 이창호의 기국과 흡사한 유형의 인물이라 설명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인터넷상에서 그를 우회적으로 언급할 때에는 텔레토비(...), 즉 톈셴바오바오(천선보보 天线宝宝)라고 불린다고 한다. 후진타오(호금도)는 금호타이어(...) 링크,[5] 즉 진후룬타이(금호윤태 錦湖輪胎) 혹은 당근(후뤄바오), 저우융캉은 캉스푸[6], 보시라이는 출신대로 충칭훠궈(火锅)라고 불린다고 한다. 넷상에서 종종 이렇게 지칭되는 이유는 역시나 명불허전인 중국의 금순공정 때문.
의외로 타이완에서도 원자바오를 추앙하는 사람들이 있다. 타이완의 일부 인사가 원자바오의 양안관계 개선 노력을 높이 사서 2016년 지룽그의 동상을 세웠다. 설립자의 변으로는 '대만을 사랑하는 이는 대만의 영웅으로 충분히 불릴 자격이 있다'라고. 실제로 그의 재임 기간 양안 관계가 좋아지기 시작했고 2010년 초반에 가장 상승 가도를 달렸다.[7] 다만 아직까지 양안은 적대 관계인지라 이를 비판하는 목소리도 적지 않아 하루만에 철거 위기라는 기사가 뜨기도 했다.(...) 한국으로 따지면 김영남보다 조금 더 나은 사람의 동상을 인천에 세운 격이라나... 결국 얼마 못가 설립자가 자진 철거했다.
2009년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강연을 했는데, 강연 도중 누군가 신발을 던져서 당혹스러운 일을 당한 겅험이 있다. 온가보 본인은 평소의 성품 그대로 온화하게 대처했으나, 분명히 당황했을 듯.

[1] 이때 자오쯔양의 한 말이 "죄송합니다. 여러분, 제가 너무 늦게 왔습니다. 상황이 아주 안 좋습니다. 제발 광장을 떠나주십시오!"였다. 그리고 이 말을 한 자오쯔양은 막후 실세 덩샤오핑에 의해 당 총서기직에서 해임됐고, 이후 사망시까지 가택 연금에 처해졌다(...). [2] 기사에는 경제적인 측면만 나와있지만, 광둥 모델은 정치적 측면에선 민주주의 요소를 상당히 가지고 있다.[3] 다른 많은 태자당들처럼 홍위병 출신이기도 하다.[4] 보쉰은 기본적으로 망명객들이 운영하는 반중 황색 언론이기 때문에 어찌보면 까는게 당연하다. 또 이 매체는 찌라시성 기사도 많은데 보시라이 몰락을 보도하면서 장쯔이의 성매매설을 보도했다가 고소미에 걸려 보상금과 사과를 한 바 있으며, 장쩌민이 체포되었다며 합성 사진을 올렸다가 얼마안가 허위로 밝혀지기도 했다.[5] 결국 금호타이어가 중국의 타이어 기업인 더블스타에 인수된 것을 생각하면 아이러니.[6] 대만라면 업체로 중국 라면 시장을 휘어잡은 브랜드다. 현재는 우육면 레스토랑을 열고 있다. [7] 2000년대 초반 소삼통, 2000년대 후반 대삼통을 통해 양안간 직접 교류가 가능해진 탓에 있다. 참고로 소삼통을 주도했던 이는 다름아닌 현 민주진보당 출신 총통인 차이잉원. 현재 중국 당국에서 차이잉원에게 정치 외교적 압박을 가하는 걸 생각하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