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오쯔양

 



'''자오쯔양 관련 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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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age]
'''중화인민공화국 3대 국무원 총리 '''
'''본명'''
자오슈예(赵修业/趙修業, Zhào Xiūyè)
'''정체'''
趙紫陽
'''간체'''
赵紫阳
'''한국식 독음'''
조자양
'''영문'''
Zhào Zǐyáng
'''출생'''
1919년 10월 17일 중화민국 허난성 화현
'''사망'''
2005년 1월 17일 중화인민공화국 베이징시
'''국적'''
중화민국 [image]
중화민국 [image]
중화인민공화국 [image]
'''학력'''
없음
'''직업'''
관료, 정치가
'''종교'''
무종교 (무신론)
'''민족'''
한족
'''총리
재임기간
'''
3대 1980년 9월 10일 ~ 1987년 11월 24일
'''당총서기
재임기간
'''
직무대리 1987년 1월 16일 ~ 1987년 11월 1일
2대 1987년 11월 1일 ~ 1989년 6월 24일
1. 개요
2. 생애
2.1. 초기 이력
3.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이후
3.1. 덩샤오핑 집권 이후
3.2. 천안문 사태
3.3. 실각 이후
4. 평가
5. 주요 경력


1. 개요


중화인민공화국의 3세대 정치인이다. 덩샤오핑의 후계자로 유력하게 거론되었고, 국무원 총리에 올랐으나, 천안문 6.4 항쟁시에 시위대에 동정적이었다는 이유로 실각한 후 야인으로 지냈다.[1]

2. 생애



2.1. 초기 이력


허난성 안양시 화현[滑縣] 출생. 중소 지주의 아들로 태어났다.
원래 이름은 씨우예(修xiū業yè)였으며 후베이성 우한에서 고등학교를 다닐 때쯤 이름을 쯔양으로 개명했다. 1935년 중국 공산당의 청년 조직인 공청단에 가입하였고, 홍군에 가담하였다. 1938년 정식당원이 된다.
국공합작이 이뤄지자 홍군은 8로군으로 개편되어 중일전쟁에서 일본군과 싸우게 되었고, 자오쯔양은 유백승-덩샤오핑이 지휘하던 129사단에 가담하게 되어 그 능력으로 주목을 받았다.

3.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이후


1945년 일본군이 항복하고 곧 국공내전이 재개되자, 자오쯔양은 공산군이 점령한 해방구에서 토지 개혁 담당을 맡아 공산당이 농민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는 데 큰 공을 세웠다. 이때문에 자오쯔양의 상관인 덩샤오핑은 자오쯔양을 "토지 개혁 전문가"로 공개적으로 칭찬할 정도였고, 덩샤오핑 사단의 핵심 인물이 된다.
공산당이 국공 내전에서 승리하고 중화인민공화국이 성립되자, 자오쯔양은 군직을 나와 광동성의 농업 담당자가 된다. 1959년 대약진운동 시기에 숨겨진 재산 찾아내기 운동 등을 벌여 농민들이 숨겨놓은 식량과 재산을 매우 적극적으로 수탈하여 정부에 조달했는데, 결과적으로 광동성에서 수백만의 인명을 아사시키는 참극이 벌어지게 된다. 이런 사태에 책임을 통감한 자오쯔양은 좀 더 실용적인 스탠스를 취하게 된 것으로 판단된다.
1965년에는 일약 46세의 나이로 광동성 당 서기로 승진했다.[2] 하지만 문화대혁명 시기에는 여러 다른 고위직처럼 공직에서 쫓겨나서 4년간 공장에서 일하게 된다. 1971년 복권되어 다시 광둥성 당 서기가 되었고, 1975년에는 저우언라이와 덩샤오핑의 후원 하에 사천성 당 서기로 옮겨가 사천성의 농업 개혁에 착수했다. 이때 발표된 것이 사천성 12조다. 그가 당 서기로 부임한 이후 사천성은 풍년이 들어서 "밥을 먹으려면 자오쯔양을 찾아라"는 말이 떠돌 정도였다.
이어 1976년 마오쩌둥이 사망하고 1979년 자오쯔양의 후견인인 덩샤오핑화궈펑을 실각시키고 대권을 장악하자, 자오쯔양은 출세 가도를 달리게 된다. 1979년에는 대약진운동 기간에 중국이 입은 피해가 어느 정도인지를 추산하기 위한 조사 사업을 실시했는데, 이때 나온 규모가 상상을 초월하는 수준이라 해당 조사의 결과는 은폐되었다.[3] 이후 호요방은 공식 사망자를 2천만명으로 발표했다.

3.1. 덩샤오핑 집권 이후


1980년부터 87년까지 국무원 총리로 재직했고, 이후 2년 동안 후야오방의 후임으로 중국 공산당의 당수격인 총서기로 재임했다. 등소평과 함께 중국이 문화대혁명의 상처를 딛고 사회 경제를 복구하는데 크게 일조했고, 이후 경제 발전의 밑거름을 만들었다는 평가도 받고 있다.

3.2. 천안문 사태


[image]
'''천안문 사태 때의 모습.''' 그리고 옆에 검은 옷을 입은 남자는 훗날 총리가 되는 원자바오.
천안문 광장에서의 민중 집회가 장기화되고, 당국과 학생시위대간의 대화가 무산되자 공산당 지도부는 군대를 동원한 유혈진압을 결정한다. 상황이 파국으로 치닫자 직접 천안문 광장에 나가 군중들과 만나는 모습이다. 당시 자오쯔양은 북한을 방문해 김일성과 회담 중이었는데, 천안문 상황을 전해듣고는 급거 귀국했던 것이다. 사진을 자세히 보면 '''울고 있다'''. 지금 와서 보면 안타까울 따름.
훗날 나온 그의 회고록을 읽어본 한 독자의 의견에 따르면, 자오쯔양은 당시 시위대의 주장에 완전히 동조했다기보다는 같은 인간으로서의 동정심이 더 컸었던 것으로 보인다고 한다.# 공산당 노선을 전면 부정하진 않지만, 시위대에 대해 폭력적으로 진압하기보다는 대화하고 소통하는 것을 우선시하려 했던 것으로 해석된다는 것. 물론 이것만으로도 본인 권력 인생을 걸어야 하는 결단이긴 했지만. 이 점은 당시 시위대 앞에서 한 연설에서도 엿볼 수 있다.
> “학생 여러분, 우리가 너무 늦게 왔습니다. 학생 여러분 미안합니다. 여러분이 우리를 꾸짖고 비판하는 것은 모두 당연한 일입니다. .. 여러분이 단식한지 벌써 7일째이며 더 이상 지속해나갈 수 없습니다...단식을 조속히 끝내...저도 여러분이 제기한 요구에 대해 당과 정부에서 만족스러운 답을 내놓길 원해서 단식한다는 것을 압니다. 그러나 만족스러운 답을 얻으려면 대화 채널을 활짝 열어 놓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
허나 당시 그의 행보는 등소평의 무력 진압 지시와 상충하는 것으로 여겨졌고, 한때 등소평의 유력한 후계자로도 거론되었던 그는 끝내 등소평과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고 말았다. 이후 공산당 총서기에서 해임되었고, 사망 때까지 계속 가택 연금 상태에서 풀려나지 못했다.

3.3. 실각 이후


이런 감시 상태에서, 언론 기관과 접촉하거나 공개 석상에 나오는 것은 금지되었고, 감시원이 따라붙기는 했지만 삶 자체는 큰 어려움은 없었다. 전직 고위 관리들이 지내던 북경의 주택을 배정받고 연금을 받았으며, 가끔 골프 라운드를 돌기도 하며 지냈다고 한다.
또 당직은 박탈되고 대권의 길은 막혔지만, 공산당에서 추방되지 않고 당원 자격은 죽을 때까지 유지되었다. 그러니까 당 차원에서는 "그가 과오를 범하기는 했지만, 딱히 사법적인 책임을 질만큼 큰 잘못을 저지른 건 아니다"라는 입장이었다. 실제로 천안문 사태 당시 그의 행적을 보면 자기 권한으로 최대한 진압군을 지연시켰고[4], 위로부터 내려진 진압 결정을 듣고 시위현장에 나타나 "곧 진압군이 나타날테니 어서 빨리 집으로 가세요"라고 말했을 뿐이었으니 위법을 저지르거나 무리한 행동을 한 것은 아니다. 다만 덩샤오핑 입장에서는 자기가 대권을 물려주려 했던 심복이 자기의 뜻을 거스르고 시위대에 더 동정적이었다는 것에 실망과 함께 괘씸죄를 느꼈던 듯 하다.
가택 연금 기간 동안 회고록을 구술했고, 삼엄한 감시하에 살고 있었으나, 가족들에게조차 알리지 않은 채 손자의 장난감에 테이프를 숨겨(...) 국외로 반출, 흐루쇼프처럼 국외에서 회고록을 출판하였다. 한국에서도 <국가의 죄수>라는 이름으로 번역 출간되었다.
이렇게 지내다가 연금 상태 중인 2005년 1월 17일, 북경의 한 병원에서 호흡기 및 심혈관질환으로 생을 마감했다. 2019년 10월에 가족들이 참석한 가운데 장례 의식을 거쳐 묘지에 안장됐다.#

4. 평가


후야오방 등과 더불어 사실상 '좌절된 중국 민주화'의 상징적 인물 중 하나로, 중국 당국은 그의 부음 기사를 통해 "2005년 1월 신화 통신을 통해 "당과 인민 사업에 유익한 공헌을 했다. 하지만 1989년 정치적 풍파 속에 엄중한 잘못을 저질렀다"고 상반된 평가를 동시에 내린 이래 단 한 번도 자오쯔양을 공개 거론한 적이 없다. 중국 공산당 기관지 인민일보 자매지 환구시보(環球時報)는 이날 자오쯔양 관련 기사에서 "중국 당국은 자오쯔양 10주기에 대해 그 어떤 평가도 내놓지 않았다"며 "침묵 역시 일종의 태도 표명"이라고 전했다.
중국이 이처럼 자오쯔양을 금기시하는 이유는 그가 천안문 시위대에 온정적인 태도를 취했다는 이유로 덩샤오핑에 의해 쫓겨난 인물이기 때문이다. 당연히 중국 공산당의 전현직 지도부는 자오쯔양에 대한 재평가나 섣부른 언급이 천안문 사태에 대한 재평가 더 나아가서는 덩샤오핑과 중국공산당의 일당독재에 대한 논쟁으로 발전할 가능성을 심각하게 우려하였다. 그 때문에 매장도 민주주의를 주장하는 사람들의 성지가 될까봐 허락하지 않다가 2015년 4월 시진핑이 매장을 허락했다. 화장된 유해는 베이징 교회의 한 묘원에 묻혔다.
중국의 민주화 운동가들에게는 무력 진압을 반대하고, 자유화를 촉진했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 받는다. 그래서인지 중국 공산당에서 언급하기를 꺼리는 인물이지만, 중국 반체제 인사들과 타이완중국 국민당, 민진당 그리고 홍콩 민주파 인사들에게는 추앙받는 인물로 그가 죽은 이후부턴 추모제를 열고 묵념도 한다.
아직까지 중국 공산당 내에서는 이렇다할 재평가는 없다. 중국 당국에 의해서 검열되고, 특히 중공 인사에 대해서는 당의 방침을 그대로 서술하는 바이두 백과에서도 자오쯔양의 항목에서는 서술 중심이며, 개혁 개방 전반기에 당과 인민에 공헌을 했다고 짤막된 평가가 나올 뿐("在改革开放前期,赵紫阳同志先后担任过中央和国家重要领导职务,为党和人民的事业作出过有益的贡献"[5]), 천안문 항쟁과 관련된 평가는 일체 없다.
하지만 유가족들과 그의 지지자들은 2010년대에도 복권 요구를 하고 있으며 천안문 사태에 대해서도 재평가가 필요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일각에서는 자오쯔양이 생전 시진핑의 아버지인 시중쉰과 친밀한 관계였기 때문에 복권 가능성이 높아질 것이라고 말하기도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자오쯔양이 주장했던 의회 민주주의가 시진핑의 일당 독재 행보와 맞지 않으므로 그럴 가능성이 불투명하다는 시각도 있다. 다만 여기서 자오쯔양이 의회 민주주의를 주장했다는 대목은 논쟁의 여지가 있는게, 조자양과 쌍벽을 이루던 후야오방은 당시 '''다당제까지 검토'''할 정도로 당내에서 파격적인 진보개혁 인사가 맞았지만 자오쯔양은 일단 표면적으론 유혈 진압 반대나 완화된 통치를 주장했을 뿐, 의회 민주주의 주장은 하지 않았다고 보는 의견도 있다.
탄생 100주년을 맞아 대만에서 전기로 출간되었다.#

5. 주요 경력


'''중화인민공화국 역대 국무원 총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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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대

3대

4대
화궈펑

자오쯔양
(1980년 9월 10일 ~ 1987년 11월 24일)

리펑

[1] 중국 정부 내에서도 유혈 진압을 극구 반대한 사람들이 있었으며, 베이징 주둔 38 집단군(한국군의 군단에 해당) 사령관인 쉬친셴 중장도 발포 명령을 거부해서 강등 후 5년형을 받았으며, 현재도 거주지 제한 조치에 처해져 있다.[2] 한국 공무원으로 치면 '''40대 중반에 차관급 직책'''을 맡은 것이다. 그렇지만, 광동성이 복건성과 더불어 중국 경제성장의 핵심이라는 것을 고려하면 미국의 캘리포니아 주지사급 자리를 맡았다고도 볼 수 있다. 그야말로 고속승진의 끝판왕.[3] 천안문 사태 도중에 미국으로 망명한 당시 조사원인 천이쯔의 언급에 따르면 최소 4300만, 최대 4600만이라는 주장도 있다. 이러한 주장은 3천만명 대를 일반적으로 잡고 있던 학계에선 지나치게 높은 숫자라고 무시되었으나 재스퍼 베커는 이 숫자가 신빙성이 높다고 판단했으며 이후 프랑크 디쾨터가 지방 문서고를 바탕으로 해당 숫자가 맞다고 주장하기도 했다.[4] 이 때문에 "국내사건의 군개입에는 중앙군사위원회보다는 총리의견을 들어야 한다"고 주장했던 친지웨이 국방장관이 사태 이후 연임하지 못하고 단임으로 끝났다.[5] 개혁개방 전, 조자양 동지는 당중앙과 국가의 중요 영도 직무를 맡았고, 당과 인민의 사업에 유의미한 공헌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