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르디치
1. 웨식스의 시조이자 잉글랜드의 시조
한글로는 서딕, 세르딕, 체르딕, 케르딕, 체르디크 등 표기가 통일되어 있지 않다. 그래서 국제 음성 기호를 따라 비슷한 표기를 한다. 세드릭(Cedric)이란 이름의 시초이다.
서로마 제국 멸망 후 브리타니아 땅에 들어온 색슨족 지도자로 웨식스 왕국의 시조이다.
앵글로색슨 연대기에 따르면 495년에 아들 킨리치와 함께 5척의 배에 무리를 이끌고 지금의 햄프셔 해안에 상륙했다. 그가 상륙한 땅을 그 이름을 따서 Cerdic's-ore라고 이름지었다. 이후 그는 죽을 때까지 누구와 싸웠다라는 식의 기록이 계속된다.
508년에 체르디치와 킨리치는 나탄레오드(Natanleod)라는 브리튼의 소왕과 5천 명을 죽였다. 후에 그 땅은 죽은 왕의 이름을 따 네틀리 마시(Netley Marsh)라고 이름지어졌다.
519년에 체르디치는 웨식스의 왕을 칭했다.[2] 같은 해에 체르데포르드(Cerdeford, 체르디치의 여울)에서 브리튼인들과 싸웠다.
527년에 Cerdic's-ley에서 브리튼인과 싸웠다.
530년에 와이트(Wight) 섬을 점령하고 캐리스브룩(Carisbrook)의 많은 사람들을 죽였다.
534년에 체르디치가 죽고 그 아들 킨리치가 그 지위를 이어받는다.
2. 혈통 논란
노섬브리아 출신의 앵글로색슨계 수도자인 성 베다(Bēda, 672~735)에 의하면 웨식스는 이전의 앵글로색슨 소왕국인 예위세(Ġewisse[3] ) 왕국에서 발전하였고 체르디치도 예위세 왕국의 왕자라는 것. 그 가계를 쭉 올라가면 무려 오딘까지 거슬러 올라가는데, 오딘이 체르디치의 9대조라고 한다. 성 베다는 브리튼을 넘어서 전 기독교계의 유명 인물이다. 그의 업적으로는 기존의 각종 서적으로 나뉜 라틴어 성경을 하나로 묶은 역본을 제작한 것이 있는데, 이 역본은 종교개혁 이전 교황령에 의해 공인되어 전 유럽에서 쓰이게 되었다. 종교개혁 이후에도 가톨릭 교권에서는 1966년까지 공식 역본으로서의 위상을 유지한다.
베다나 앵글로색슨 연대기의 오딘 기원설은 다른 나라의 건국 설화도 흔히 그러듯 왕권의 정당성을 위한 선전에 가깝다. 다만 체르디치가 크게 논란이 일어나는 이유는 Cerdic이라는 이름은 동시대의 게르만계 계열 이름으로 추적되지 않고, Crytic 또는 Caradog 같은 브리튼계 이름, Caratacus 같은 로만 브리튼계 이름과 연관이 깊다는 연구가 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체르디치의 후손인 웨식스의 왕과 귀족의 이름들 중에는 Ceawlin, Cedda 및 Caedwalla 같은 것들이 있는데 켈트계의 영향이 존재하다는 것을 시사한다. 왜냐하면 다른 칠왕국 왕가들은 딱히 피정복민인 브리튼계 이름을 짓는 일이 없다시피 하기 때문에 이렇게 많은 켈트계 이름을 지은 것이 켈트계 가문이라는 증거라는 것이다.
심지어 체르디치의 아버지인 엘레사(Elesa)는 기독교 성인 오세르의 게르마누스(Germanus Autissiodorensis, 378~448)가 펠라기우스파 척결 및 앵글로색슨 축출을 목적으로 브리튼으로 선교 갔을 때 만나서 불구가 된 아들을 기적으로 치료해 줬던 켈트 브리튼의 대군벌[4] 인 엘라시우스(Elasius, 혹은 Elafius 및 Elaphus라고도 한다.)이라는 설도 존재한다. 로마 지배 말기에 병력 부족으로 브리타니아에서 로마군이 철수하자 브리타니아의 국방력 공백을 앵글로색슨 용병으로 메울 때, 군사력의 대부분을 차지하던 색슨족 용병의 거주지역인 Saxon's shore의 앵글로색슨 정착민과 주종관계로 군벌을 유지하던 체르디치의 가문은 켈트족 세력을 전복시킨 앵글로색슨 용병 왕국들[5] 과 다르게 휘하의 색슨계 부족민들을 휘어잡기 위해 스스로 앵글로색슨화 되어가며 라이벌 브리튼계 군벌들을 정벌했다는 설이다.
하지만 고고학적으로 체르디치가 바다에서 건너와 햄프셔로 상륙했다는것이 밝혀지자, 기록대로 색슨족이라는 주장도 다시 힘을 얻었다. 여전히 켈트족 기원설을 주장하는 학자들은 체르디치의 생모가 혼란 시기 브리타니아를 떠난 켈트 브리튼인이었다는 주장을 하며 반박한다. 수많은 브리튼인이 치안 공백으로 각종 게르만 부족들의 학살에 직면하자 도망쳐서 아르모리카(브르타뉴) 등 갈리아 북서 지방에 피난을 갔다. 이 지역들은 토착민인 갈리아인을 압도해 브리튼화가 진행되었다.[6]
혈통 논쟁이 크게 번지는 이유는 웨식스 가문이 잉글랜드 왕가의 기원이며 잉글랜드 역사의 시작이기 때문이다. 우리나라가 해씨 고구려설이나 성한왕의 혈통에 관심을 가지는 것과 비슷하다고 보면 된다. 만약 웨식스의 기원이 켈트계 군벌 세력이라면, 기존의 인식처럼 잉글랜드의 역사는 이전의 켈트 문화가 단절된 역사가 아니라, 켈트계의 브리튼족과 게르만계의 앵글로색슨족이 상호작용하면서 융합되었다는 해석이 제시될 수 있다.
3. 대중 문화
2004년 미국 영화 킹 아서에서는 혼혈은 피가 더러워지며 반편이로 나약해진다는 아돌프 히틀러스러운 개드립을 치며 켈트족과 기독교인을 모조리 학살하는 인종청소를 저지르는 잔학하고 노회한 색슨족 추장으로 나온다. 상술한 켈트족 혈통 논란을 생각하면 아스트랄해지는 부분. 결말에서는 아들 킨리치와 함께 아서 왕에게 패하여 죽는다(!). 스텔란 스카스가드가 연기했다.
[1] /ˈtʃɜːrdɪtʃ/. Cerdik, Kerdik라는 표기도 존재.[2] 영어로 "king of the West-Saxons"으로 서쪽 색슨 사람들의 왕이라는 말인데 정확히는 그 동네에 사는 사람들의 지도자라는 거다. 이 시대에 다른 앵글로색슨 왕국들 또한 다 이런 식으로 중국식의 칭왕, 칭제 같은 게 아니라 그 동네 사람들에게나 지도자로 받들여지는 두목이라는 의미다.[3] [jeˈwisːe\][4] 심지어 브리튼 남부 군벌의 맹주라는 설도 있다.[5] 앵글로색슨 왕국의 대다수는 브리튼 왕국 산하에서 반란한 용병에서 기원(노섬브리아, 켄트, 동앵글리아, 서식스, 에식스 등)[6] 애초에 브르타뉴라는 지명 자체가 프랑스어로 ‘브리튼 족의 땅’이라는 의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