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남근

 


崔楠根
창씨명 松山忠義
1911~1949
간도 특설대에서 근무한 친일반민족행위자.
1911년 만주에서 태어나 지린(吉林)제일고급중학교를 거쳐 봉천군관학교를 졸업, 만주국군 보병 소위로 임관하여 간도 특설대에 배치되어 보병 제1련 배장(排長)으로 복무하였다. 일제 패망 당시 만주국군 중위로 간도특설대의 신병교육대 부대장을 맡고 있었다.
해방 후 북한에서 반공분자로 사형 선고를 받았으나 사상전향을 서약하고 나서 풀려났다. 이후 백선엽, 김백일과 같이 월남하여 조선 군사영어학교를 졸업하고 국방경비대 부위(중위)로 임관했다.
군 복무 중 해방 신학을 가진 이재복 목사에게 포섭되어 남로당에 입당하여 김종석과 나란히 당내 거물이 되었다. 춘천 8연대에 재직할 때 포섭되었을 것이라는 설이 가장 유력하다.
여순사건이 나면서 마산 15연대 연대장 신분으로 진압 명령을 받고 출동, 반군의 포로가 되었다가 탈출했으나 위장 탈출했다는 혐의를 받았다. 반란군을 쫓다가 우연히 조우하였으나 적극적으로 대항하지 않고 부관 조시형 소위와 같이 포로로 잡혀 지리산에 입산하여 지리산에서 반란 주모자인 김지회를 설득하려다가 실패하고 김지회의 처가 묵인하여 탈출하여 화개장터에 나타난 것. 진압군 답지 않은 우유부단한 태도로 부하들을 지휘한 것과 스스로 포로로 잡힌 정황이 여러 사람들에게 의심을 받았다. 과거 부하였던 김점곤 소령에게 수사를 받고 풀려난 후에 상부에서 임명 받은 부대[1]에 부임하지 않고 충북으로 탈영하였다.
수 일 후 대전에서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되어 고문 끝에 남로당이라고 자백을 했다. 박정희와 같이 남로당의 거물이었으나 박정희는 조직 세포를 불어서 목숨을 건지고 최남근은 조직을 불지 않아 모진 고문을 당하게 된다. 1949년 육군 중령으로 불명예 파면 후, 중앙군법회의에서 사형을 선고 받고 수색에서 처형됐다.
미군 고문관 하우스만 대위는 훗날 백선엽에게 왜 친한[2] 최남근을 살리지 않고 박정희를 살려 주었냐고 물었는데, 백선엽은 자기는 공적인 일을 한 것 뿐이라며, 최남근은 현역 연대장으로 반란군과 내통하였으며 지은 죄가 너무 무거워서 살릴 수 없다고 하우스만에게 대답했다.[3]

[1] 국방경비대 제4여단 참모장[2] 최남근은 백선엽의 만주 군관학교 1년 선배로, 같이 월남해서 같이 군사영어학교를 수료하고 같이 임관할 때 군번이 백선엽 보다 1개 더 앞섰다. 최남근 53번, 백선엽 54번[3] 여러 정황을 고려했을 때 백선엽은 최남근을 살릴 의지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후배들의 기억에 의하면 최남근은 금전적인 면과 거리가 멀고 머리가 좋고 호탕한 성격, 뛰어난 지휘력으로 명망이 높았다고 하니, 후환을 없애기 위해 그를 살리지 않았으니라는 추측도 있다. 최남근은 찾아온 백선엽에게 조국에 죄를 지었으면 벌를 달게 받아야 한다고 오히려 백선엽을 위로 했다고 한다. 이는 백선엽의 회고록에 기록되어 있다. 최남근은 총살 당하기 직전에 애국가를 부르고 대한민국 만세 라고 외치고 의연했다고 총살장에 입회했던 만주군 후배 국군 장교들이 기억했다. 아울러 그를 재판한 재판장도 최남근이 진정한 공산주의자라고 보기는 어렵다고 술회했다. 최남근이 남로당과 연대하여 대한민국 정부를 전복하려고 했던 것은 사실일 가능성이 높으나 자세한 조사나 심문 없이 고문에 의한 자백만으로 국군 장교를 형장의 이슬로 보낸 것은 아닌가 의문이 제기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