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선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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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제4대 합동참모의장
백선엽
白善燁 | Paik Sun-yup
'''[1]
<colbgcolor=#801a24><colcolor=#fff> '''출생'''
1920년 11월 23일
평안남도 강서군 강서면 덕흥리
(現 남포특별시 강서구역)
'''사망'''
2020년 7월 10일 (향년 99세)
서울특별시 종로구 연건동 서울대학교병원
'''묘역'''
국립대전현충원 장군제2묘역
'''본관'''
수원 백씨
'''호'''
우촌(愚村)·운산(雲山)·산남(山南)
'''재임기간'''
제7대 육군참모총장
1952년 7월 23일 ~ 1954년 2월 13일
제10대 육군참모총장
1957년 5월 18일 ~ 1959년 2월 22일
제4대 합동참모의장
1959년 2월 26일 ~ 1960년 5월 31일
제19대 교통부 장관
1969년 10월 21일 ~ 1971년 1월 2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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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ki style="margin: -6px -1px -11px"<colbgcolor=#801a24><colcolor=#ffffff> '''부모''' 아버지 백윤상, 어머니 방효열 '''형제자매''' 누나 백복엽, 동생 백인엽 '''배우자''' 노인숙 '''자녀''' 아들 백남혁, 백남흥
딸 백남희, 백남순 '''학력'''
약송소학교 (졸업)
평양사범학교 (졸업)
국방대학교 (행정학 / 학사)
'''종교'''
개신교
'''신체'''
174cm
'''경력'''
제4대 주중화민국 대사
제19대 교통부 장관
충주비료 사장
한국종합화학공업 사장
대한화학펄프 사장
한국화학연구소 이사장
국토통일원 상임고문
신민주공화당 상임고문
'''군사 경력'''
'''임관'''
봉천군관학교 (9기)
군사영어학교 (1기)
'''복무'''
만주국 육군
1941년 ~ 1945년
대한민국 육군
1946년 ~ 1960년
'''최종 계급'''
중위 (만주국 육군)
대장[24] (대한민국 육군)
'''주요 보직'''
제5보병사단장
제1보병사단장
제1군단장
제2군단장
제1야전군사령관
육군참모총장
연합참모본부총장
'''병과'''
보병
'''참전'''
제2차 세계 대전 (태평양 전쟁)
여순사건
6.25 전쟁

1. 개요
3. 박정희와의 관계
5. 저서
5.1. 《군과 나》
5.2. 《실록 지리산》
5.3. 《내가 물러서면 나를 쏴라》
5.4. 《노병은 죽지 않는다 다만 사라질 뿐이다》
5.5. 《백선엽의 6.25전쟁 징비록》
6. 여담
7. 주요 경력

[clearfix]

1. 개요


[image]
2013년 백선엽 지휘소[2] 기념 행사에 참여한 백선엽의 모습
대한민국의 전직 군인, 정치인, 외교관, 기업인이자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된 친일반민족행위자.[3]

2. 일생




3. 박정희와의 관계


여순사건 이후 남로당 계열의 군인을 숙청하는 '숙군' 과정에서 박정희는 체포되어 조사를 받고, 이후 1949년 2월 '군병력 제공죄'로 사형을 구형받은 뒤 결국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이때 백선엽은 육군본부에서 정보국장으로 재직 중이었는데 김안일 방첩대 과장을 통해 직접 면담한 후 만주 시절 동료 20명으로부터 '박정희는 공산주의자가 아니다'는 보증서를 제출받고 무죄 방면시켜줬다.
뿐만 아니라 백선엽은 불명예 제대한 박정희를 정보국에서 문관신분(현 군무원)의 북한반 상황실장으로 일할 수 있게 배려해 주었다.[4] 당시 정보에서 예산 문제로 문관 월급을 보장해 줄 수 없다고 했지만 백선엽은 자신의 판공비 일부를 떼어서 박정희의 월급으로 지불했다.
[image]
제5사단장으로 부임한 박정희의 보직신고를 받는 백선엽[5]
1953년에 박정희[6]를 장군으로 만들어준 이도 백선엽이었다. 경무대에서는 남로당 전력을 문제삼아 제외하려 했으나 백선엽은 인사를 강행했다.
[image]
백선엽을 교통부 장관으로 임명하는 박정희 대통령
그러나 5.16 군사정변 직후 중화민국 주재 대사로 타이페이에 있던 백선엽은 미국 대사와의 면담에서 박정희의 전력을 이유로 사상을 의심해봐야 한다고 발언했다.[7] 직후 중화민국 주재 대사에서 유럽/아프리카 총괄대사로 전임[8]되어 한국에 들어오지 못하고 유럽과 아프리카, 캐나다를 떠돌다가 모친 병환을 이유로 잠시 귀국했을 때 박정희를 면담하고 나서도 2년 뒤인 1969년 12월에야 교통부 장관으로 임명되어 10년 만에 한국에 돌아올 수 있었다.[9] 그 후에는 교통부 장관직 이후 전경련 이사와 한국종합화학 등 공기업체 사장을 두루 거치며 보상받았다. 박정희는 대통령이 된 뒤에도 세 살 아래였던 백선엽을 '형' 또는 '백형'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여담으로 백선엽은 박정희보다 3살 어리지만 항렬로는 외할아버지뻘이다. 박정희의 모친 백남의수원 백씨 28세손으로 남(南)자 항렬이었고, 백선엽은 수원 백씨 27세손이다.[10] 박정희의 모친쪽 가문과 인연이 있다는 점이 박정희와의 친분에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보인다.[11]

4. 사건사고 및 논란




5. 저서



5.1. 《군과 나》


6.25 전쟁 개전부터 종전에 이르기까지 전후방 곳곳에서 격전을 치룬 고위 지휘관의 입장에서 6.25 전쟁 경험을 중심으로 서술한 회고록이다. 경향신문에서 1988년 6월 24일부터 1989년 5월 11일까지 약 1년간 매주 1회씩 총 42회에 걸쳐 연재되었다. 지면 1면을 통째로 할애한 비중 있는 연재물이었다. 내용은 6.25 전쟁 시기에 집중되어 있고, 전쟁에 대한 이야기가 끝난 뒤에는 휴전 이후 한국군 증강과 전후 복구, 개전 이전의 여수·순천 10.19 사건과 숙군 등에 대한 이야기를 실었다. 자유당 정권 말기 이승만 대통령에 얽힌 기억, 민주당 정권 등장 이후 예편과 박정희와의 인연 등에 대해서는 마지막회(42회)에 한꺼번에 몰아 서술되어 있다.
이 연재물을 엮어 대륙연구소에서 1989년에 단행본을 출판했다. 앞에 말한 이유뿐 아니라 문장이 수려해서 가독력이 좋아 6.25 전쟁에 대해 입문하는 사람들에게 추천할만한 작품이다. 대륙연구소 판본이 절판된 뒤에도 여러 차례 다른 출판사에서 재판되었다. 1999년에는 『길고 긴 여름날 1950년 6월 25일』(지구촌)이란 이름으로 나왔으며, 이후 시대정신에서도 2009년, 2016년에 개정판을 내놓았다. 2000년에는 오세영의 작업으로 만화화되어 3권 짜리 『한국전쟁』(지구촌)으로 나오기도 했다. 영어로도 번역되어 1992년에 《From Pusan to Panmunjom (부산에서 판문점까지)》이라는 제목으로 미국에서 출간되었다. 이 영역판에는 무려 당시까지 생존해있던(!) 리지웨이밴 플리트 장군[12]이 서문을 쓰기도 했다.[13] 일역판은 『若き将軍の朝鮮戦争 (젊은 장군의 조선전쟁)』(2000년 소시샤(草思社) 출간) 등으로 나온 바 있다.[14]
이전에도 6.25 전쟁 회고록, 수기는 많이 나왔지만, 공산권 자료의 미비, 일제 치하 전력이라든가 작전 실패, 민간인 학살 관련 등 여러 문제에 대한 당사자들의 증언 회피, 어른의 사정 등으로 객관성이 떨어졌다. 반면 이 연재물은 1987년 6.10 민주 항쟁 이후 이념의 굴레에서 벗어나 객관적이고 거시적으로 6.25 전쟁을 바라보기 시작된 시기에 나온 최초의 회고록이라는데서 의의가 있다. 당시까지도 대놓고 이야기하지 않던 현리 전투, 사창리 전투 등의 참패에 대해 자세히 기록한 것이 그 예이다. 본인의 간도특설대 경력에 대해서도 김백일 장군의 사망 사건을 언급하며 '그는 나와 각별한 사이였다. '''간도특설대에서 같이 근무'''했었고, 해방후 함께 38선을 넘어 월남했으며 나란히 군문에 투신했었다'는 식으로 건조하게 적고 넘어갔다. 이 책과 비슷한 시기에 이형근, 정일권이 회고록을 냈지만 자신이 비판받을 부분은 '''언급조차 하지 않은 것'''에 비해 진일보된 자세라 할 수 있다.

5.2. 《실록 지리산》


이태의 『남부군』 출간 이후 동아일보 연재로 '''토벌대의 입장에서 대국적으로 그린 빨치산 기록'''이다. 저자 자신이 백야전사 작전에 참가했던 기록을 바탕으로 이야기를 구성하고 있다. 이태의 남부군이 자신이 겪은 이야기 → 남한 빨치산 약사 → 자신이 겪은 이야기 후기의 형식인 반면에 이 작품은 백야전사 작전 → 남한 빨치산 약사의 형식으로 되어 있다. 단행본은 고려원 출간.
백야전사 부분을 제외하고는 빨치산 종군기자였던 이태의 『남부군』에 대한 토벌대의 입장이기 때문에 『남부군』을 읽지 않으면 갑툭튀한 서술이 좀 이상할 정도이다. 사실 『남부군』은 이후 나온 모든 빨치산 관련 작품(전향한 빨치산 작품)들이 인용하거나 비판하는(비전향 종북주의자 작품) 가장 중요한 텍스트인데, 『실록 지리산』 역시 국군 토벌대의 입장을 반영한 매우 중요한 텍스트로, 전투경찰대 연대장인 차일혁 총경의 아들이 쓴 『빨치산 토벌대장 차일혁의 수기』와 함께 가장 많이 빨치산 문학에서 인용된다.[15] 『실록 지리산』에 워낙 중요한 내용이 많아 이태는 이를 바탕으로 자신이 잘못 알고 있던 사실을 대폭 수정하여 개정판 『남부군』을 집필하고, 남부군만 집중적으로 다룬 후속작 『여순병란』에서도 『실록 지리산』을 가장 중요한 텍스트로 쓴다.
이태의 『남부군』이 나오자 이를 반박하기 위해 백선엽의 『실록 지리산』이 나왔고, 이태를 이를 보고 자신의 작품을 보강하여 개정판 『남부군』이 나온 것이다.[16]
여담으로 차일혁 총경은 만주에서 팔로군계 항일유격대에 소속되어 일본군, 만주군과 목숨걸고 싸운 독립군이었다. 해방 후 군사영어학교를 갈 기회가 있었지만 "좌파들과 일본육군사관학교 출신들이 득세"한다는 소리를 듣고 입교를 포기한다. 다시 말해 만주에서 백선엽의 만주군과 싸우던 독립군이 바로 차일혁으로, 백선엽 같은 일본군 출신자들이 군사영어학교에 득실거린다는 소리를 듣고 안간 것이다. 독립기갑연대 기마대대장으로 한국전쟁 당시 전사한 장철부 중령 역시 팔로군계 항일유격대 소속으로 일본군, 만주군과 싸웠다. 전사 전에 항일유격대 동료였던 북한군이 귀순을 종용했지만 부상입은 몸을 이끌고 끝까지 전투를 지휘하다 전사한다. (한국전쟁 과정에서 중공군으로 참전했던 조선인들이 많은데, 이들이 자원한 이유가 국군 지휘부를 구성하고 있던 '친일파'들 때문이었다고 한다.)
토벌대 사령관 입장으로 썼기 때문에 색안경을 끼고 볼 수 있겠지만 '''의외로 객관적이다.''' 자료 조사를 위해 지리산 곳곳을 다녔고 구빨치산 출신의 참전자들을 일일히 인터뷰했다. 토벌에 참가했던 국군의 '''잔학행위 증언도 빠짐없이 실어주었다'''. 이를테면 생포한 여자 빨치산을 바세린을 발라가면서 집단으로 강간하는 류의 이야기가 버젓이 나온다.
이런 증언을 소개하면서 토벌작전 책임자로서 사과문을 올리기도 했다.
자세한 것은 빨치산(조선인민유격대) 참조.

5.3. 《내가 물러서면 나를 쏴라》


경향신문 연재를 토대로 발간된 『군과 나』 이후 22년 만에 중앙일보에서 6.25 전쟁 경험을 회고하는 연재를 한 번 더 진행하였다. 이는 6.25 전쟁 발발 60주년을 맞아 2010년 1월 4일부터 2011년 2월 28일까지 〈6·25 전쟁, 1128일의 기억〉이라는 제목으로 총 277회에 걸쳐 연재되었다. 이 연재물은 전작과 달리 1월 4일부터 진행된 관계로 중국 인민지원군의 참전과 1.4 후퇴에 대한 이야기부터 풀어나가기 시작했다. 1988년과 비교하여 남북화해가 모색되고 훨씬 더 자유로와진 사회 분위기를 반영하여 중국 인민지원군의 엄정한 군기를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과거의 패배를 좀 더 상술하는 등의 내용 변화가 있었다. 이 연재물은 『내가 물러서면 나를 쏴라: 1128일의 기억』(중앙북스)라는 제목의 3권 짜리 단행본으로 정리되어 출간되었다.

5.4. 《노병은 죽지 않는다 다만 사라질 뿐이다》


이전에 내놓은 회고록들이 모두 현역 군인으로 있던 6.25 전쟁자유당 정권 시기를 중심으로 서술되어 있다면, 이 회고록은 그 이후 1960~70년대의 행적을 다루고 있다. 구체적으로 4.19 혁명과 예편, 그 이후 박정희 정권 하에서 각국 대사를 지내던 시절, 귀국 후에 교통부 장관과 한국종합화학 사장을 지내던 시절까지 서술되어 있다. 역시 『내가 물러서면 나를 쏴라』 저술에 참여한 유광종[17]이 정리하여 책밭에서 출간되었다.

5.5. 《백선엽의 6.25전쟁 징비록》


조선일보는 2013년 11월 온라인 뉴스 사이트 '프리미엄조선'을 출범시키며 내놓은 5대 특별기획의 하나로 백선엽의 〈6·25 징비록〉 연재를 시작했다. 2013년 11월 8일부터 2015년 11월 26일까지 2년 여에 걸쳐 총 184회로 연재되었다. 이 시리즈는 과거 경향신문, 중앙일보에서 연재된 회고들과는 조금 결을 달리 한다. 이는 남북화해 이후 안보의식이 이완되어 전쟁과 같은 국난에 대한 이해와 극복 노하우가 사장되고 있다는 보수진영의 인식을 대변하고 있다. 따라서 내용 면에서 6.25 전쟁 당시 한국군의 약점과 실책들에 대해 더 노골적으로 서술되어 있으며, 이와 대비되는 미군 및 유엔군, 중공군의 강점도 강조하고 있다. 전반적인 내용은 이전의 회고록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 부분들이 많으나, 중간중간에 숨은 비화나 새로 드러난 사실들도 언급하고 있다. 이 역시 유광종이 정리하여 『백선엽의 6.25전쟁 징비록』(책밭)이라는 제목의 3권 짜리 단행본으로 출간되었다.
비슷비슷한 자서전을 하도 많이 출판하다 보니 본인도 서문에 "내가 이미 펴낸 회고록은 6권이 넘는다. 그럼에도 나는 이 책을 다시 펴내기로 했다."라고 사정 설명을 하며 '(책의) 성격이 대우 달라서다'라고 밝히고 있다.
1권은 중공군 개입부터 서술하는데 연대기식 서술이 아니라, 중공군의 강력함이라는 주제와 이를 뒷받침하는 여러 에피소드 소개인지라 시점이 과거로 갔다, 미래로 갔다 한다. "6.25 전쟁의 80%는 중공군과의 싸움이었다.", "한국군은 용문산 전투를 제외하면 중공군을 이겨 본 적이 없다."라는 파격적인 전재가 돋보인다.
2권의 전반부는 6.25 당시 미 8군 사령관인 월튼 워커, 매튜 B. 리지웨이, 제임스 밴 플리트와의 일화와 그들의 인간적인 면모를 다루고 있는데 징비록 시리즈에서 가장 독창적인 부분이다. 그리고 이야깃거리가 떨어졌는지 2권의 후반부부터는 6.25 개전부터 다루는데 과거의 회고록을 조금 압축시켜 놓은 것 같다.
3권 전반부도 과거의 개인 회고록 내용과 겹치는데, 문제는 징비록 시리즈의 1권 내용과도 겹치는 중공군 개입 이후 부분이다. 3권 후반부는 백선엽이 직접 격지 않은 장진호 전투, 현리 전투, 용문산 전투를 다루며 별다른 마무리 없이 끝난다. 딱히 백선엽의 관점에서 쓴 게 아니라 그냥 사건을 평면적으로 요약한 수준.
서문에 나온 것처럼 이미 회고록을 6권이나 펴내신 이력이 있어서, 대부분의 내용이 이전에 출판한 내용과 겹친다. 징비록만의 특징은 중공군이 강력함을 집중적으로 분석하였고, 미 8군 사령관과의 일화가 좀 더 자세하게 기재되어 있다. 백선엽 장군의 특징이 적을 만드는 성격이 아니라, 책 서술에 필수 불가결한 부분이라도 절대로 다른 한국군 장성이나 정치인을 비판하지 않거나 가명 처리한다. 이번 징비록에도 이런 성향을 유지한 것은 마찬가지였지만, 문제가 있는 개별 사건에 대해서는 강력하게 비판하였다.
그에 반해 2권 후반부부터는 그냥 과거 회고록의 자기 복제에 불과하고, 3권 후반부는 누가 대신 써준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평면적이다. 또한 6.25의 시작부터 끝까지를 순서대로 다루는 게 아니라, 그때그때에 주제에 맞는 내용을 쓰다 보니 1~3권 전체적으로 보면 같은 내용이 여러 번 반복해서 나온다.[18] 조선일보와 계약으로 중간까지는 야심 차게 연재하였지만, 후반부터는 할 얘기가 떨어져 그냥 과거 회고록 복제로 나간 게 아닌지 생각 드는 다소 아쉬운 작품.

6. 여담


전설적인 사채업자 명동 큰손 '백 할머니' 백희엽이 사촌 누나이다. 백희엽은 '광화문 곰'이라는 별명으로 유명한 고성일과 더불어 '백 할머니'라는 별명으로 불렸던 대한민국 사채업의 양대 거물이었고, 미래에셋 박현주 회장의 스승으로도 유명한 70~90년대 슈퍼개미(개인 주식투자가)였다. 영화 '마스터' 에서 주인공 김재명 팀장(배우-강동원)이 사기꾼 진현필 회장(배우-이병헌)을 유인하기 위한 작전 자금을 빌린 할머니(배우-박정자)가 바로 백할머니 백희엽을 모델로 만든 캐릭터이다.
뉴욕에서 어느 기자가 '''동양 사람들은 대개 키가 작고 안경을 쓰면서 금니를 했는데, 당신은 왜 그런 모습이 아니냐'''[19]라고 묻는 해프닝이 있었다. 이에 백선엽이 그런 질문엔 대답하지 않겠다고 하자 기자가 머쓱하게 물러났다고.
[image]
알레이 버크 제독과 담소를 나누는 백선엽 장군
6.25 전쟁 때 여러 차례 만남을 계기로 알레이 버크 제독과 절친이 되었다. 버크 제독이 사망했을 때, 그의 장례식에 참석해 해상자위대 대표들에게 버크 제독이 자위대 창설에 크게 기여했음을 잊지 말아 달라고 부탁하기도 했다.
예비역이 된 지 오래지만 대한민국 육군에서는 지금도 각별한 대우를 받고 있다. 육군본부 방문시에 군악대와 의장대가 동원된 공식적인 의전도 받는다. 현역 육군참모총장이 예비역 백선엽에게 경례를 하는 모습이 나올 정도다.
상당한 노년까지도 대식가였다고 한다. 2009년 2월 전쟁기념관에서 열린 육군협회 관련 행사에 참석한 이의 증언으로는, 계속 꾸벅대다가 만찬이 시작되자마자 접시를 순식간에 비워낸 어르신이 백선엽인 걸 나중에 알고 황당했다고 한다. 사실 군인 출신인 걸 감안하면 크게 이상할 건 없다.[20]
2013년 9월 민주당 김광진 국회의원이 국방부 등으로부터 입수한 자료에 의하면 백선엽은 지난 2003년 11월부터 지난해까지 근 10년간 업무용 에쿠스 차량 1대와 운전병, 그리고 4급 상당의 개인 보좌관 등을 국방부로부터 지원받아 사용하고 있었다. 한국전쟁 당시 그가 세운 공 덕택에 상당한 예우를 받았던 편이다.
육군사관학교와도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육사를 방문해 생도들에게 자신의 저서를 나눠주거나 장학금을 기탁하기도 했다.
6.25 전쟁 당시 백선엽이 사단장으로 근무했던 육군 1사단에는 그의 동상이 있다.
JSA 경비대대 주둔지 내 소재하고 있는 막사 신관의 이름은 그의 이름을 딴 '''백선엽관'''이다.
노신영 전 국무총리와 같은 평안남도 강서군 강서면 바로 옆마을 출신이라고 한다. 이러한 인연 덕분인지 2019년, 노 전 총리의 사망 직전까지 자주 연락했다.
2013년 9월, 한미동맹 60주년을 맞아 그의 이름을 따 '백선엽 한미 동맹상'이 제정되었다.
친일 행보에 대해 논란이 있는 백선엽이지만[21], 한국전쟁 내의 학살과 부패에는 부정적인 모습을 보인다. 국방일보 '''노병이 걸어온 길''' 칼럼에서는 인민공화국 치하 마을을 약탈한 병사를 즉결처형한다고 일부러 빗맞춰서 돌려보낸다던지, 빨치산에 대한 관대한 처분을 긍정하는 내용을 쓴다던지... 그 중에서 백선엽도 가장 안타깝다는 어조로 서술한 내용이 있는데, 본인은 다만 전후에 들은 이야기라고 한다. 24세의 수도사단 김 대위가 지리산에서 작전중 오양수라는 이름의 20살 여성 빨치산 포로에 한눈에 반하여 주변의 시비를 물리치고 군인가족증명을 만들어줘서 본가로 보냈는데 결국 둘다 방첩대에 체포되어 심문을 받았다. 오양수는 심문에 답하지 않고 다만 김대위의 안부를 묻다가 감시병의 총으로 자살했고 김대위는 남원감방에 있다가 백야전부대의 작전이 끝나고 떠난뒤 후임사단장의 특사로 원대복귀하여 오양수의 유해를 찾으려고 노력하다가 73년 중령으로 예편하였다고....
2017년에는 주한 미 육군의 평택 이전 행사에 초청받았는데, 모두 휠체어를 탄 모습이었다. 하기야 그도 어느덧 '''100세'''를 바라보는 백전노장이니 딱히 이상할 것도 없다. 애초에 백선엽과 비슷한 시기에 군생활을 했던 이들은 물론이고 한국전쟁시기 백선엽보다 10년 가랑 어린 10대후반에서 20대 초반의 참전용사들도 대부분 늙어서 사망한 상태이다.
2018년 11월 21일에 98세 생일을 맞이했다. 이날 잔치에는 정경두 국방부 장관, 해리 해리스 주한 미국대사, 로버트 에이브람스 주한미군 사령관 등 한미 양국의 군사 및 외교 주요 당국자들이 대거 참석했다.
2018년에도 활동하고 있는데 비상국민회의에 이름을 올렸다.
육사 학술정보원(원장 오경두 대령)은 육군사관학교 교내 포털사이트에 자서전 '군과 나'를 기초로 한 웹툰을 올렸다. 그림은 현역병 차출###
슬하에 2남 2녀를 뒀으며, 2020년 사망 기준 한국 나이로 '''101세'''였다.

7. 주요 경력


'''연도'''
'''계급'''
'''발령지'''
'''비고'''
1941년 12월
소위
(만주국)
만주국 봉천군관학교 졸업
[22]
1946년 2월

군사영어학교 졸업

1946년 2월
부위
제3여단 제5연대 제1중대장

1946년 9월

제3여단 제5연대 제1대대장

1947년 1월
중령
제3여단 제5연대장

1947년 12월

제3여단 참모장


제5연대 연대장

1948년 4월

통위부 정보국장
국방경비대 총사령부 정보처장

1948년 12월
대령


1949년 5월

육군정보학교 교장

1949년 7월

제5보병사단 사단장

1950년 4월

제1보병사단 사단장

1950년 7월
준장


1951년 4월
소장
제1군단 군단장

1951년 7월

휴전회담 대한민국 대표

1951년 11월

야전군사령부 사령관

1952년 1월
중장


1952년 4월

제2군단 군단장

1952년 7월

육군참모총장 겸 계엄사령관

1953년 1월
대장

[23]
1953년 5월

육군대학 총장 겸직

1954년 2월

제1야전군사령부 사령관

1957년 5월

육군참모총장

1959년 2월

연합참모의장

1960년 5월

'''전역'''

[1] 일제강점기에 사용했던 일본식 이름은 시라카와 요시노리(白川義則)였다는 전직 일본 헌병대 장교의 증언이 있으나, 공식 문서로 검증된 사실은 아니다.[2] 연합합동특수임무부대 미8군 작전지휘소[3] 일제강점기 시절 일본제국의 괴뢰국이었던 만주국 중앙육군훈련처(봉천군관학교) 출신으로 간도특설대에서 복무한 경력으로 인해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되었다.[4] 여기서 김종필과 이후락을 만난다.[5] 왼쪽 세번째의 인물이 당시의 박정희 준장, 가장 왼쪽의 인물이 백선엽 대장이다.[6] 전쟁 발발 이후 육군 포병 소령으로 복직[7] #[8] 지금과는 사정이 달라서 당시 중화민국은 미국 다음으로 중요한 국가였다. 부임한 지 1년도 못 되어 전임한 건 사실상 미국과 군내 신망이 있는 그를 부담스러워한 조치였다.[9] #[10] 수원 백씨 27세손들로는 백낙준, 백낙청 등이 있고 이들은 낙(樂)자 항렬을 썼으나, 백선엽 집안은 엽(燁)을 돌림자로 썼다.[11] 과거에는 현대보다 가문이나 족보, 항렬, 혈통 등을 중시했다. 집성촌도 있었다. [12] 두 장군은 둘 다 19세기에 태어나 장수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리지웨이는 1895년 생으로 98세(1993년 사망)까지, 밴 플리트는 1892년 생으로 100세(1992년 사망)까지 생존했다.[13] 공동 명의의 서문이 실린 것으로 보아, 당시 90대의 고령으로 건강이 좋지 않던 두 장군은 간단하게 구술하고 다른 사람이 글로 정리한 것으로 보인다.[14] 1988년에 Japan Military Review 출판사에서 『韓国戦争一千日 : 白善燁回想録 (한국전쟁 1천일 : 백선엽 회상록)』이 나온 바 있는데, '군과 나'가 연재하던 도중에 출간된 것이라 《군과 나》와의 관계는 불분명하다.[15] 여기에 하나 더 추가하여 비전향 종북주의자 빨치산을 부모로 둔 정지아의 『빨치산의 딸』이라는 작품이 있다(철저하게 종북주의자 시점에서 집필되었다). 이상 4개의 작품이 수십 종이나 되는 빨치산 문학에서 가장 많이 이용되는 텍스트이다. 3개의 작품은 이태의 『남부군』의 문학적 대성공을 보고 시기적으로 거의 동시에 나왔고, 다시 『남부군』 개정판에서 이들 3개 작품을 대폭 인용하여 기술하였다.[16] 사실 이태는 시기적으로 인천상륙작전 이후에 입산하여 1차 대토벌작전 때 잡혀 활동기간이 1년 남짓으로 짧았고, 게다가 쫄다구라 사건을 잘못 알고 있던 것이 매우 많았다(문학적 재능만 최강). 그래서 남부군 창설 부터 관여한 간부 출신 부모를 둔 정지아의 『빨치산의 딸』이나 토벌군 사령관이 쓴 『실록 지리산』, 『빨치산 토벌대장 차일혁의 수기』가 그가 잘못 알고 있는 사실을 수정하는데 큰 도움을 주었다.[17] 중앙일보 외교안보 기자 출신의 작가로, 2010년대에 나온 백선엽의 회고록은 사실상 모두 백선엽이 구술한 것을 유광종이 집필한 것들이다.[18] 중공군 2차 공세에 7사단장, 8사단장이 빤스런 했다는 에피소드와 6사단이 담당구역이었던 영월 광산에서 차량을 징발하여 기동성이 좋다는 자세한 설명은 각각 4번을 반복해서 나온다. 그외 1권에 설명한 내용이 2권과 3권에 다시 나오는 경우가 너무 많다. 심지어 과거에 회고록에 썼던 내용이 징비록에 또 나오고, 또 나오고 한다.[19] 1970년대 미국인의 평균 키는 172.7cm이었고 그 당시 백선엽의 키는 174cm이었다. 따라서 미국인 기준으로는 평균 키 이상이었고 한국인 기준으로도 엄청 큰 편이었던 것이다.[20] 박정희 탓에 군인들이 검소한 소식을 한다고 생각하는데, 그 쪽은 이상한 경우고 강도의 훈련량과 업무가 주는 스트레스 탓에 군인들 중에서는 대식가가 많을 수밖에 없다. 어느 나라나 군대밥이 맛없어서 문제지....단 다 그런 건 아니고 특공대나 해군 선상 근무,카투사의 경우에는 꽤 잘 나온다고.[21] 친일 경력 자체는 인정하나 독립군 토벌 여부가 현재까지도 확실치 않다.[22] 제2차 세계대전 종전시 만주군 육군 헌병 중위 신분이었는데, 당시 헌병은 Military Police가 아닌 지금의 정보, 기무, 특수전 병과와 유사했다.[23] 국군 1호 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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