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백일

 



일제강점기 친일반민족행위자
김백일
金白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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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colcolor=#fff> 생애
1917년 1월 30일 ~ 1951년 3월 28일
출생지
중화민국 만주 지린성 연길시
국적
만주국대한민국
본관
수안 김씨
별칭
개명 전 이름: 김찬규(金燦奎)
창씨개명: 가네자와 도시미나미(金澤俊男)
직업
군인
가족
김영학(조부), 김창근(부)
김영화(처) 김동명(자) 2남1녀
경력
만주국 육군 상위
대한민국 육군 소장·중장(추서)
1. 개요
2. 생애
3. 논란
4. 대중매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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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군인.
만주국에서 항일/항만 빨치산 토벌을 목적으로 창설된 간도특설대에서 중대장으로 활동하며 일본 제국 정부로부터 서보장을 수여[1]받은 바 있다. 이 경력으로 민족문제연구소친일인명사전 군(軍) 부문에 등재되었다.
광복 이후 대한민국 국군 창설에 참여하였고, 6.25 전쟁 당시 육군본부 행정참모부장 겸 작전참모부장, 제1군단장을 역임했다. 낙동강 방어선 전투에서는 제1군단(수도사단과 제3사단으로 구성)을 이끌고 기계, 안강, 영덕, 영덕, 포항 일대에서 북한군 제5사단과 제12사단의 공격을 저지했다. 인천 상륙작전 이후 반격작전 단계에서 제1군단 예하 제3사단은 가장 먼저 삼팔선을 돌파하였으며, 중공군의 참전으로 인한 흥남 철수작전 과정에서는 미군 제10군단장 에드워드 알몬드 장군을 설득하여 10만 피난민 수송을 성공시키기도 했다.

2. 생애


1917년 만주 옌지 시에서 태어났다. 1935년 보성고등보통학교를 나온 후, 1937년 봉천군관학교를 5기로 졸업하고 만주군 보병 소위임관하였다.
1938년 강재호, 신현준, 송석하, 마동악 등과 함께 간도특설대 창설 멤버로 참여하여 일제가 패망할 때까지 복무하면서 만주 지역의 항일무장세력을 진압하는 활동을 지휘했다.
광복 후 선대의 고향인 함경북도 명천군으로 돌아왔는데, 북한 정권으로부터 인민군 창설에 참여하라는 제의를 받자 거절하였고, 신변에 위협을 느껴 월남하였다. 이후 세상이 다 붉게 물들어도 나는 청천백일하여 반공을 견지한다는 의미를 담아 '김백일'이라는 이름으로 개명하였다.
1946년 군사영어학교를 졸업한 뒤 중위(당시에는 부위)로 임관(군번 10055)하여 남조선국방경비대 제3연대를 창설하여 연대장에 올랐는데, 10월 전북 이리에서 군 보급품인 C-레이션을 처분하여[2] 화려한 결혼식을 한 것 때문에 연대장에서 해임되기도 했다.[3]
1948년 여수 14연대 반란사건이 일어났을 때는 전라남도 광주에 소재한 대한민국 국군 제5여단의 여단장 대리로 임명되어 반란을 진압했다. 이후 1949년 1월에 제6여단 여단장에 임명되었다. 6.25 전쟁 이전에도 삼팔선 인근에서는 남북 양측의 무력 충돌이 끊이지 않았는데, 1949년 5월 21일에는 북한군이 대담한 무력 도발로 두락산과 5개 리를 점령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이에 6월 5일 한국군은 김백일을 옹진지구 전투사령관으로 임명하고 탈환작전을 지휘하게 한다. 김백일은 6월 10일까지 두락산을 제외한 대부분의 피탈지역을 탈환하는데 성공한다. 북한군이 다시 8월 4일에 반격을 가해 은파산을 점령하자 재반격에 나서 또 피탈지역을 탈환했다.
1950년 1월에는 제3사단장에 임명되었고, 이어 4월에는 육군본부 행정참모부장에 보임되었다. 6.25 전쟁이 발발한 뒤에는 당시 공석이던 작전참모부장까지 겸임하며 초기 전투 지휘의 일익을 담당하였다. 그 후 1950년 8월 낙동강 방어선 형성 이후 북한군의 공세가 거세지자, 9월 1일자로 제1군단장에 임명되어 수도사단과 제3사단을 지휘하며 안강, 포항 일대에서 전개된 북한군 제5사단과 제12사단의 공격을 막아내었다. 이 전공으로 10월에 육군 소장으로 진급하였다.
9월 중순 인천 상륙작전 이후 반격작전에서는 군단을 이끌고 동해안 지구에서 북진을 거듭하여, 예하 제3사단이 최초로 삼팔선을 돌파하는데 성공했다. 참고로 삼팔선을 돌파한 날짜가 1950년 10월 1일로, 후일 국군의 날이 이 날로 제정되는 계기가 되었다. 제1군단은 중공군이 개입하기 전에 원산-함흥-청진을 거쳐 압록강 상류의 혜산진까지 북진한다.
중공군의 기습적인 참전으로 흥남 철수작전이 전개될 당시에는 쏟아져오던 함경도 피란민들을 철수 함정에 태우도록 미 10군단 사령관 에드워드 알몬드 장군을 설득하는데 공헌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이로 인해 10만 5천 명의 미군 및 한국군 병력과 함께 약 9~10만 명의 피란민들이 해로로 남한으로 탈출하는데 성공한다.[4]
1951년 항공기 사고로 사망하였고,[5][6][7] 육군 중장으로 추서되고 태극무공훈장을 받았으며, 시신은 사망한지 3개월 뒤에 수습되어 부산 금련산에 묻혀 있다가 1966년에 국립서울현충원으로 이장되었다. 아들 김동명(전 함경북도 도지사) 또한 육군사관학교를 진학하여 육군 준장으로 예편하였다.[8]

3. 논란


  • 광주 서구 광주학생독립운동 기념관 앞의 도로명이 김백일의 이름을 딴 '백일로'라서 문제가 불거졌다. 백일로 외에도 백일초등학교, 백일 어린이공원, 백일산 등도 마찬가지였다. 서구 화정동의 '백일'이란 지명은 1950년대 이 지역에 만들어진 백일사격장을 유래로 하고 있다. 육군이 초대 육군보병학교장인 김백일의 이름을 따 사격장 명칭으로 삼았고, 이후 1990년대 초반 '백일택지개발지구' 등의 이름이 붙은 도시 조성사업이 진행되어 지금껏 백일이란 지명이 이어진 것. 결국 도로명이 학생독립로로 변경되었고, 백일초등학교도 성진초등학교로 바뀌었다.
  • 경남 거제 거제포로수용소 유적공원에 세워진 김백일 동상에 대해 철거 논란이 있다. 흥남 철수 당시의 공로를 기려 (사)흥남철수작전기념사업회와 함북6·25전적기념사업회에서 세운 것인데 거제시와 시민단체에서 철거를 요구한 것이다. 결국 대법원에서 동상 존치 확정판결을 받았다.#
  • 2019년 3월 1일 경남 거제시 시민단체들이 김백일 동상 옆에 친일행적 단죄비를 세웠다.#

4. 대중매체에서


1985년작 KBS1 특집드라마 <전웅실록: 오성장군 김홍일>에선 배우 정상철이 연기했다.

[1] 김백일의 할아버지 김영학은 독립운동가였고 일제에 의해 투옥된 적도 있다.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5등급)이 추서되었다.[2] 이렇게 군수물자를 빼돌려서 약 150만원을 벌었다. 몇년 뒤, 한국전쟁 당시 중령 월급을 탈탈 털어도 암시장에서 1만원에 팔던 C-레이션 한 상자도 못 샀었다고 백선엽이 회고했던 걸 감안하면 상당한 액수의 비리였다.[3] 김백일의 부인 김영화는 후일 대한민국 국회의사당에 개원 후 최초의 기념품 가게를 운영했다고 한다.[4] 정확히는 김백일만의 공로는 아니고, 여러 뜻 있는 조력자들과 우발적인 상황이 겹쳐져서 일어난 기적과도 같은 일이었다. 김백일은 함경도 출신이기도 했기에 동향 피란민들을 어떻게든 데려가겠다는 의지를 육군 수뇌부 및 예하 지휘관들에게 강하게 피력했다. 미군이 피란민들을 함께 데려가지 않을 경우, 한국군 제1군단은 육로로 피란민들을 엄호하며 퇴각하겠다는 엄포도 놓았다. 하지만 김백일은 이를 직접 영어로 호소할 수는 없었기 때문에, 실제 미군 지휘관들을 설득하는데는 당시 미군 제10군단 민사부 고문으로 통역을 맡고 있던 현봉학과 다른 제1군단 참모장교들이 큰 역할을 담당했다.[5] 여담으로 김백일이 탄 비행기 기종은 L-5 센티넬이다.[6] 일설에 의하면 당시 기상이 좋지 않아서 조종사가 이륙을 만류했음에도 불구하고 김백일은 권총까지 내밀면서 조종사를 협박하여 이륙을 강행하였고, 결국 좋지 않은 날씨로 인해 대관령 인근에 추락으로 사망했다. [7] 사망 당시 입었던 자켓과 군화가 육군사관학교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자켓의 팔 부분을 보면 응급처치 흔적이 남아 있다. 한동안 생존한 것으로 추정[8] 단, 돌이 되기 전 아버지가 사망해서 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없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