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천이궁
1. 개요
'''春川離宮'''.
1890년, 춘천유수부에 고종이 세운 이궁이자 행궁. 위치는 지금의 강원도청과 세종호텔 일대였다. 1940년 2월 22일에 원인불명의 화재로 사라졌다.#
2. 상세 및 역사
1888년(고종 25년)에 당시 초대 춘천유수이자 춘천도호부사였던 김기석이 고종의 명을 받고 공사를 시작하여, 1890년(고종 27년)에 제 2대 춘천유수인 민두호가 완공하였다. 완공 이후 대한제국 황실의 관리를 직접적으로 받았다.[1] 한편 이러한 고종의 이궁 건설에는 이유가 있었다. 당시 고종은 서구열강과 국운을 건 외교를 하면서 여러 상황을 주시해야 했는데, 만약 전쟁이 나거나 큰 사건이 터지면 피신할 곳이 여러 곳 필요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크고 작은 화재로 그나마 남아있던 춘천이궁의 건축물이 대부분 소실되었다. 유일하게 남은 위봉문과 문루 조양루마저 1916년 외곽으로 이전되었다.[2]
춘천이궁은 다른 행궁들과 달리, 고종이 직접 명하여 지었음에도 불구하고, 기존 춘천관아를 중축을 하며 건설되었기 때문에 편전이 있었던 외전과 침전구역인 내전이 명확하지 않았다.
3. 건축물과 구성
춘천이궁의 구성은 크게 3가지의 공관으로 나뉜다. 춘천관아의 객사가 있었던 수춘관(객사) 구역, 춘천도호부가 위치하였던 춘천이궁 구역. 그리고 춘천동헌이 있었던 동헌구역이다. 당연히 이중에서 가장 우대되었던 공관은 이궁 구역이다.
3.1. 조양루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2호이자 춘천이궁의 건물들 중 유일하게 남아있는 2군데의 건물중 하나이다.
조선시대 말기와 대한제국 시절 춘천지역의 행정을 담당하던 춘천이궁의 외삼문이자 문루이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2층 중층 누각식 건물로 지어졌으며, 팔작지붕을 하고있다. 조양루는 본래 현 강원도청의 서쪽에 위치하였으나 일제강점기인 1938년에 일제가 새 청사와 관공서를 지을려고 하였으나, 주변 부지가 협소하여 조양루를 훼철한 후 우두동의 우두산 자락으로 옮겨져 있었다. 이후 2013년에 춘천시의 춘천이궁 복원과정에서 현재의 위치로 이전되어 복원되었다.
3.2. 문소각
'''聞韶閣'''
'문소각'은 춘천이궁의 정전이자 침전으로, 춘천이궁 내에서 가장 높은곳에 위치하였다. 문소각이 최초로 건축된 년도는 인조 재위 26년인 1648년으로, 당시 춘천부사로 부임한 엄황이 건축하였다. 또한 김득신의 「수춘문소각서」 에 의하면 당시 춘천의 주산인 봉의산의 봉의에 대응하기 위하여 이름을 '문소'로 정하였는데 여기서 말하는 ‘봉의’는 ‘봉황이 와서 춤을 추다’라는 뜻으로 이에 대응하는 의미로 ‘문소’라는 의미의 건물을 지었다고 전해진다.[3] 이러한 문소각은 1750년대에 14칸의 규모로 건립되었다가 1869년 춘천부사 김병육에 의하여 더욱 웅장하게 바뀌며 24칸으로 확장되었다. 이후 1890년에 고종의 왕명에 의하여 김기석의 공사 감독하에 민두호가 기존의 건물인 문소각을 활용하여 춘천이궁을 완성하였다. 이러한 문소각은 이후 지속적으로 관리를 받아오다가 일제강점기인 1940년, 춘천이궁 전역에 번진 화재로 소실되며 본래의 건물이 완전히 소실되었다. 그러나 일제는 이러한 문소각을 다시 재건하였는데 한국전쟁 당시에 다시 소실되며 완전히 사라지게 되었다.
3.3. 신영
이궁의 관리와 보호를 맡았던, 조선군과 대한제국 군대가 주둔하던 곳이다.
4. 관련 자료
춘천관아(官衙)와 춘천이궁(離宮)의 건물배치 및 변천에 대한 검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