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행정구역)

 

1. 개요
2. 한국
3. 일본


1. 개요



동아시아의 지방행정단위 중 하나.
한국사에서는 과거 지방의 행정을 구역별로 나눈 휘하 부, , 대도호부, 도호부, , 중 상위 등급이었다.
부의 지방관은 과거 한국에선 부윤 또는 부사라고 했지만, 지금도 부가 있는 일본에서는 부지사라고 부른다.

2. 한국


발해에서 전국을 5경 15부 62주로 설정했다. 가령 수도가 있는 상경용천부(上京龍泉府)가 그렇다.
한반도에서는 고려 초기 왕건이 행정구역 단위로 부를 사용하기 시작했는데, 995년 수도 개경을 개성부라 하였고, 여기에 개성부지사를 두었으며 1308년 개성 성내만 관할하는 부윤과 성외를 관할하는 개성현령으로 나누는 등 개편이 있었다. 전국 주요 지방도시에는 대도호부, 도호부가 설치되었다.
조선왕조 역시 고려왕조의 행정구역 체계를 거의 계승했다. 부는 여러 종류가 있었는데, 개중 한성부는 일반 부와 다르게 지금의 서울특별시와 유사하게 경기도의 지휘를 받지 않는 별개의 행정구역이었으며, 정2품의 판윤(判尹)이 다스렸다.
한성부 이하 부 중 가장 지위가 높은 부는 유수(留守)가 다스리던 유수부인데, 유수부는 품계 자체도 종2품 경관직이었으며 종종 정2품도 보임되었고 실제 행정 면에서도 도 관찰사의 지휘에서 벗어나 있었다.[1] 조선 초 개성을 유후사(留後司)라 하고 유후와 부유후를 두던 것을, 세종대에 유후사를 부로, 유후를 유수로 고쳐 유수부를 만든 것이 시초였다.[2] 경국대전 시기까지도 유수부는 개성뿐이었고 개성유수는 2인이 보임되었는데 2인 중 1인은 경기도관찰사가 겸임하였다. 서열로 따지면 개성유수가 경기관찰사보다 위라서 경기관찰사가 개성유수에 묻어서 경관직 대우를 받는 모양새였다. 다른 행정구역의 경우 아래에서 보듯이 관찰사 겸직인 지역에서는 서윤이 실무를 관장했는데 개성부는 관찰사 겸직 외에 유수를 한 명 더 둔 것만 봐도 취급이 남다르다. 또한 개성유수는 조정의 참판과 각도의 관찰사직을 역임한 이후에 가는 자리로 위상 자체가 관찰사보다 확실히 높았다. 이들 유수는 외관직(지방관)이 아닌 경관직(중앙 관리) 취급을 받았으며 덕분에 경기관찰사가 한성에 상주하면서도 외관직이 되는 사태를 피할 수 있었다. 이후 강화(1627년), 광주(1683년), 수원(1793년), 춘천(1888년)이 유수부로 승격되었는데, 강화와 광주는 병자호란을 겪으면서 군사적 요충지가 된 점이 반영됐고 수원은 수원화성 축조로, 춘천은 임오군란으로 인해 승격된 것이다.
조선시대의 유수부는 그 위상으로 치면 현대 한국의 광역시에 가까운 개념으로 비유될 수 있지만, 지방이 아닌 수도권 주요 거점들만이 유수부로 지정되었다는 점에서 조금 애매하다. 지방 거점도시라는 측면에서 볼 때 차라리 아래의 윤급 부들이 현 광역시에 더 적합하다. 현재로서는 그나마 제2수도를 상징하는 지역에 설치되었다는 점에서 특별자치시가 가장 유사하다.
도 휘하의 일반적인 부는 종2품 부윤(府尹)이 다스렸으며, 이 일반 부로는 경주, 전주, 함흥, 평양, 의주 5곳이 지정되었다. 참고로 각 도의 관찰사 역시 종2품이니 품계상으로는 부윤과 관찰사가 동급이었지만, 실제 행정 면에서는 명백히 도의 지휘 하에 있었다. 일반적으로 전주부윤과 평양부윤, 함흥부윤은 각각 전라관찰사, 평안관찰사, 함경관찰사[3]를 겸임하고 이들 부에는 이방을 겸임하는 종4품의 서윤(庶尹)을 두었다. 이러한 겸임체제는 윤급 부만 이런 것이 아니고 대체적으로 도 소재지에는 비슷하게 적용되어, 강원도관찰사는 원주목사를 겸임하고 충청도관찰사는 공주목사, 경상도관찰사는 상주목사를 겸임하는 경우가 잦았다. 흔히 회자되는 '피양(평양)감사(=관찰사)도 제 싫으면 그만'이라는 속담에서 평양인데도 평양부윤이 아니라 평양감사라고 불리는 것이 이 때문이다. 물론 관찰사와 부윤이 별도로 임명되는 경우도 있었다.[4][5]
그 다음으로는 대도호부(大都護府)가 있었는데 안동, 강릉, 영흥, 영변, 창원 5곳이 지정되었으며[6], 목사와 같은 정3품의 대도호부사(大都護府使)[7]가 다스렸다.
이보다 낮은 도호부(都護府)는 종3품 도호부사(都護府使)가 다스렸다. 부, 대도호부는 중요 지역에만 특별히 지정되었지만, 도호부는 그냥 군의 인구가 많아지면 승격해서 도호부가 되는 식이라 그 수가 계속 증가하였다. 원래 도호부라는 명칭은 중국에서 새로 정복한 이민족을 통치하기 위해 변방에 둔 군정기구를 가리키는 것이었는데, 이 제도를 고려에서도 이를 모방하여 후삼국 호족 잔당 세력들이나 말갈 부락들의 요충지에 설치했다가 후에 삼국인들이 동화되며 일반 행정구역화되었고 명칭은 그대로 남아 조선시대에도 보편화되었다. 현 안동, 안변이 그때의 이름(안동도호부, 안변도호부)이 그대로 남은 것. 안주, 북청, 길주도호부사는 절도사가 겸임했다.
1895년에는 23부제가 실시되고 도가 폐지되며, 여러 개의 군을 묶는 상위 행정구역의 이름으로 의미가 크게 바뀌었으며 이의 수장은 부장관(府長官)이라고 불렀다. 기존 부목군현들의 등급은 모두 군으로 통일되었다. 1년 뒤 13도(道)제로 바뀌면서 부는 다시 도 아래의 행정구역으로 환원되었고, 현재의 시에 해당하는 행정단위로 사용되기 시작했으며 모든 부의 장관이 윤(尹)으로 통일되었다. 이 경향은 일제강점기로도 이어졌다. 경성부처럼. 광복 이후 1949년 8월 15일에 모조리 (市)로 바뀌었다.[8]

2.1. 부 부활 논의


현재 부 제도는 철폐되었지만, 1995년 지방자치제가 부활하면서 내무부 직할이라는 의미의 '직할시' 명칭이 지방자치제의 취지와 모순된다고 하여 개칭안으로 현행 '광역시'와 함께 '부'가 고려되기도 했으며, 도 폐지론자들을 중심으로 부 행정구역을 부활시키자는 의견도 있다. 도 폐지 논의 참조.

3. 일본



현재 일본의 경우 광역자치단체 이름으로 사용하고 있으며 오사카부교토부가 있다. 도도부현 참고. 동양에서 부는 본래 주요 도시에 설치되는 것이어서 현재 한국의 광역시와 비슷했지만, 현재 일본에서는 패전 이후 제정된 지방자치법에 따라 일반 행정구역인 현과 동일한 법령을 적용받으며, 영어 명칭도 현과 같은 Prefecture를 쓴다. 그냥 좀 더 유서 깊은 도시였다는 상징성 정도만 남아있다. 설치 당시에는 부 산하의 중심도시는 원래 부지사 직속이었지만, 지금은 전부 별도의 시로 분리되었다. 오사카부 오사카시, 교토부 교토시처럼 말이다. 따라서 이 시들도 지금은 별도의 시장을 뽑는다.
1943년 이전까지는 도쿄도 도쿄부였고, 오늘날의 도쿄 구 지역도 도쿄부 도쿄시였다. 1943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도쿄부가 도쿄도로 개편되며 도쿄시가 사라지고 구가 도쿄도 직할의 지방행정구역이 되었다.
현재 일본의 부나 구한말 23부제의 부, 현대 한국의 도 폐지 개편안에서의 부는 영어로 Prefecture로 번역될 수 있지만, 일제강점기 당시 조선의 부는 City로 번역되는 편이다. 일제강점기 한반도의 부는 광역 행정구역이 아니라 도 산하의 일개 도시에 설정된 행정구역이었기에 Prefecture라고 보기 힘들었기 때문.


[1] 때문에 조선 전기 전국 광역행정구역의 수령을 일컬을 때는 '각 도 관찰사와 개성유수'라 하였다.[2] 원래 유수는 당의 동도(낙양), 송의 동경(개봉-이 때는 응천부 도읍 시절) 등 제2수도를 관장하는 관직으로 개성에 대한 조선왕조의 특별대우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3] 조선 초 영안도 시절에는 감영이 영흥에 있었고 영안관찰사가 영흥부윤을 겸임했다.[4] 윤(尹)이라는 관직이 현대인들에게는 워낙 생소한데, 윤은 과거 중국 한나라 군현제에서 수도권 지역 특별 행정구역 장관의 관직명인 동시에 행정구역명 그 자체로 쓰여 좌풍익과 우부풍 역시 관직명인 동시에 사실상 행정구역명이다. 낙양 관할지역은 하남윤, 장안 관할지역은 경조윤으로 편성되었다. 한 말기 군웅들 중 위, 촉, 오는 칭왕 혹은 칭제 이후에도 수도를 윤으로 편성하지 않고 모두 군으로 놔두었다. 하지만 원술중나라는 본거지인 구강군을 회남윤으로 개칭하였다.이후 한의 멸망을 거쳐 경조와 하남이 군 혹은 부로 편성되면서 윤은 행정구역명의 성격이 사라지고 관직명으로 남았다.[5] 더불어 위에서 설명한 서윤의 경우, 목급 행정구역에서도 서윤이라는 직위가 있었다. 이방은 아전으로 중인 신분이며 직위도 낮았지만, 서윤은 비록 이방을 겸임한다 해도 대도시의 실무를 관장하며 중앙 조정의 임명을 받는 엄연한 양반이었으며 양반가의 족보에도 당당히 관직이 올라갔다. 관찰사가 윤이나 사를 겸임하는 도시에서는 서윤이 사실상 부정(府政)을 도맡았으며 이때문에 특히 평양서윤은 꽤 비중있는 자리였다. 한성부에도 서윤이 있었는데 한성서윤은 그 위에 정2품 판윤과 3품의 좌윤, 우윤이 있어 평양서윤만한 실세는 못 되었다. 다만 어쨌거나 경관직이라는 점에서는 평양서윤보다 위상이 높았다. 더불어 함흥부의 경우는 판관이 최선임 전임직이었다.[6] 안동은 정조시기 정치적인 사건에 연루되어 대도호부에서 강등당한 전적이 있다. 영흥은 원래 윤급 부였는데 감영이 함흥으로 옮겨가면서 격하되었다.[7] 원래 중국의 도호부, 도독부 제도에서의 장은 도호, 도독이었는데 한국에서 현지화되면서 도독부사, 도호부사로 불리웠으며 대도호부사와 도호부사는 고을 이름 뒤에 붙일 때는 '부사'(府使)로 줄여서 부르기도 했다. 현 대한민국에서 '○○광역시장'을 줄여 그저 '○○시장'이라고 곧잘 통용하는 것과 비슷한 이치다. 마찬가지로 대도호부, 도호부 자체도 '부'로 줄여서 불렀다.[8] 이에, 1949년 8월 14일에 읍에서 부로 승격된 수원, 김천, 포항, 순천, 여수는 '''단 하루만''' '부'로 존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