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제국군

 


대한제국군
大韓帝國軍
Korean Imperial Armed Forc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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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0 대한제국의 국장인 이화문.
국가
[image] 대한제국
창설
1894년(갑오개혁)
1897년(대한제국군 개칭)
해체
1907년(군대 해산)
소속
원수부
통수권자
[image] 대한제국 황제
(대한제국군 대원수)
군령권자
대한제국 황태자
(대한제국군 원수)
편제
대한제국 육군
대한제국 해군
대한제국 상무영
•대한제국 호위대
•대한제국 훈련대
•대한제국 시위대
•대한제국 헌병대
•대한제국 친위대
•대한제국 진위대
충원 방식
모병제
상비군
약 2만 6천여 명(1901)
1. 개요
2. 상세
3. 군종
4. 장비
5. 실전 사례
5.1. 의화단 운동과 영유권 분쟁
5.2. 의병 진압
5.3. 일본에 대한 저항
6. 군축과 해산
7. 여담
8. 같이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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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제국의 군대이다.
대한제국군의 전신은 조선군이다. 갑오개혁 때 편제가 개편되었다가 아관파천과 대한제국 건국을 거쳐 창설되었다.
친위대, 시위대, 진위대 등의 삼군영 조직을 통해 세를 불려나갔고 청의 의화단 운동간도 영유권 분쟁에 참전하였다. 그러나 러일전쟁 이후 일본에 의해 군제가 대폭 축소되었고 군대해산을 거쳐 일부의 명맥만 유지하다 대한제국과 함께 최후를 맞았다.

2. 상세


병력 충원에 있어서는 국민 개병제에 의거한 징병제를 실시해야 한다는 의견이 있었고 실제로 법령도 제정되었으나 여건과 의지의 부족, 현실적인 한계로 인해 모병제를 유지하였다.[1] 군 통수권자는 대한제국 황제였다.
갑오개혁 직후에는 군무아문(軍務衙門)에 담당하였으나 을미개혁군부(軍部)로 개칭되었다. 군부대신이 오늘날의 국방장관 역할을 했다.
대한제국 시절 편찬된 근대적 교본의 번역본을 현재에도 볼 수 있는데, 당시 대한제국군이 어떠한 훈련을 받았는지 가늠해 볼 수 있다.
  • 대한제국 군사교범(보병조전) 國防軍史硏究所 #
  • 대한제국 군사교범 전술학교정(상) 國防軍史硏究所 #
  • 대한제국 군사교범 전술학교정(하) #

3. 군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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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 육군의 .

3.1. 육군



대한제국군 편제가 잘 정리된 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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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5년 5월 을미개혁 때 기존 경군[2]을 개편하여 시위대와 진위대가 창설되었다. 시위대는 을미사변 당시에 경복궁에 난입한 훈련대, 일본군과 교전하였다.[3] 이후 해체, 대한제국군 친위대가 되었다가 아관파천 이후 중앙군은 시위대와 친위대로 나뉘고 지방대는 진위대로 개편되었다.
청일전쟁을미사변을 겪은 고종에게 가장 큰 관심사는 일본의 침략을 막을 군사력의 증강이었다. 이에 러시아에 군사 고문을 요청하여 시위대를 재창설, 지방대를 진위대로 개편해나갔고 대한제국이 건국되면서 대한제국군이 탄생하였다. 또한 장교 양성을 위해 1898년에 육군무관학교가 창설되었다. 육군무관학교는 1909년에 폐지되기 전까지 졸업생 282명을 배출했다.
이후 점차 그럴듯한 모습을 갖춰가면서 제주에도 진위대가 설치되고 한성에는 육군 법원과 병원까지 만들어지게 된다. 1897년에는 중앙군인 시위대가 약 2600명, 지방의 진위대는 7천 명이었다.
1898년에는 시위대 1대대와 2대대를 합치고 포병 중대(포대)를 설치하여 연대로 개편하였다. 1900년에는 포병 중대를 포병 대대로 확장하고 기병 대대를 설치하여 보병 대대 2개에 포병 1개 대대, 기병 1개 대대 등 제대로 된 4각 편제의 형태를 띄게 된다. 군악대(소대급)도 2대를 설치하였고 1902년에는 보병 연대가 2개로 늘어나 총 병력이 5천에 이른다.
지방군의 경우 1896년 2월 아관파천 이후 5월 30일 각 지방의 친군영들[4]을 재편성하면서 명칭을 지방대로 바꾸었다. 통영과 북청, 대구와 강화, 청주, 공주, 해주, 춘천, 강계 등지에 지방대가 설치되었다. 1897년 6월에는 지방 군사력을 강화하기 위해 수원, 청주, 공주, 안동, 광주, 황주, 안주, 종성, 원주 등 9개 지방대가 더 설치되었다. 1898년 12월에는 전국적으로 14개 지방대대 병력을 대대본부, 중대부(2개 중대), 곡호대(曲號隊 군악대) 등으로 통일하였고 전체 병력은 5,000명이었다.
1899년(광무 3년) 6월에는 최고 통수 기구인 원수부와 참모 본부인 참모부가 개설되어 근대 군 통수 기구가 도입되었다. 원수부 산하에는 군무국, 검사국, 기록국, 회계국이 설치되었으며 1900년 6월에는 육군헌병사령부가 창설되어 원수부 직속에 편제되었다. 또한 황제의 근접 경호를 맡는 경호실 격의 호위대가 창설되었는데, 원수부 군무국 총장이 호위 대장을 겸임하였다. 또한 지방대가 원수부의 통제를 받게 되었다.
1899년 11월부터 청에서 의화단 운동이 발발하였고 이후 의화단과 청군 비적이 평안도와 함경도를 침략하자 군사력의 강화를 느끼고 국방비를 증강시킨다.
1900년 6월 30일 평안북도와 함경남·북도의 4개 지역에 1개 대대 규모 진위대를 새로 편성한 것을 계기로 같은 해 7월 20일 진위대와 지방대로 양분되어 있던 지방군 조직을 진위대로 통일시켰다. 같은 달 25일 칙령 26호로 진위대를 연대로 확대 개편하였다. 각 지역의 진위대를 연대 단위로 통합하여 진위 제1연대는 경기도 강화, 제2연대는 경기도 수원, 제3연대는 경상북도 대구, 제4연대는 평안남도 평양, 제5연대는 함경남도 북청 제6연대는 의주에 본부를 두었다. 1901년 8월 이후에는 평양 진위대가 확대되는 등 6개 연대 18개 대대로 확장되어 10600여 명에 378명의 곡호대(曲號隊)를 두었다. 시위대와 진위대를 합쳐 1만 8378명에 이르렀다.
1902년에는 시위대는 2개 연대에 포병1개 대대와 기병 1개 대대를 합친 5000명, 친위대 2개연대 4개대대 4천여명을 두었고 이후 진위대는 확장을 거듭하여 18개 대대에 18000명으로 늘었고 호위대 730여 명과 호위대, 헌병대 등을 합쳐 최대 28000여 명에 달했다.
러일전쟁을 일으키며 경운궁을 점령했던 일본은 승기를 잡은 1905년 4월 대한제국군에 1차 군축을 감행하여 5000여 명의 시위대는 2513명으로 축소되고 4000여 명의 친위대는 폐지되었으며 18000여 명의 진위대는 4438명으로 줄었다. 1907년엔 다시 시위대 병력이 늘어나 4215명이 됐지만 진위대는 4305명이었다.
1907년 군대 해산 시점에서 편제상의 정원은 약 9천 명이었지만, 실제로는 약 8천 명 정도 있었다고 본다.

3.2. 해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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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는 대한제국군의 첫번째 군함 양무호, 그 밑은 두 번째로 도입한 군함 광제호와 승조원들. 맨 뒷줄 오른쪽 끝이 초대 함장 신순성이다.
일단 대한제국이 정식으로 성립하기 전, 조선군에서의 수군 체제 및 개혁 시도에 대해 간략히 설명한다. 관련 블로그
기존의 진관 체제에선 통제영을 최고 기구로 하는 수군이 존재했다. 수군 기지는 주로 해안을 방어하는 임무를 맡았다. 1883년 12월 기연해방영(畿沿海防營)이 설치되고 민영목이 기연해방사무(해군참모총장)에 임명된다. 기연해방영은 1888년 4월 통위영으로 개편되었다.
조선 조정은 해군 양성을 위해 1892년 영국에 교관 파견을 요청하고, 1893년 3월 통제영학당(總制營學堂)을 설치하였다. 통제영학당에서는 1893년 9월 사관생도 38명과 수병 300명을 대상으로 교육을 시작하였고 이듬해(1894) 4월 영국에서 콜웰(W. H. Callwell) 예비역 해군 항해 대위와 커티스(J. W. Curtis) 하사가 파견되어 왔으나, 일본을 비롯한 대외의 압박으로 1894년 11월 통제영학당은 폐교된다.
같은 해 갑오개혁으로 수군을 혁파하면서 해상 방위 전력이 아예 존재하지 않게 된다.
그래서 대한제국이 성립된 이후 한동안 해군이 없었다. 원래 고종은 영국의 최신 기선 전함 구입을 원했는데 일본의 지속적인 방해로 무산되었고 대신 일본이 제시한 화물선 한척을 구입했다. 1903년에 중고상선 (석탄운반선)을 한 척 구입하여 갑판대포를 얹어 군함으로 개조하는데, 이것이 한국의 첫 근대식 군함인 양무호(揚武號)이다. 양무호 구입은 일본의 강매였는데 그 과정은 양무호 항목 참조. 양무호는 80 ㎜ 포 4문과 5 cm 포 2문을 장착하여 화력도 빈약했다. 참고로 동시기 일본 해군연합함대 기함으로 쓰였던 전함 미카사는 305 ㎜ 주포에 152 ㎜ 부포를 달았다. 일본이 미카사를 비롯한 시키시마급 전함 4척을 영국에서 구입하는데 5800만엔의 예산이 들어갔는데 이는 대한제국 국방예산의 30년치와 맞먹는 액수다. 안습. 양무호는 1904년엔 러일전쟁 때 일본 해군이 징발해 사용하였고, 대한제국군이 해산된 후에는 부산에서 견습 선원들을 위한 실습선으로 쓰이다가 1909년 일본 해운회사에 매각되었다.
1904년에는 1,056t급 광제호(光濟號)를 구입한다. 3인치 포를 3문 장착하고 있는 광제호는 배 자체도 일본 가와사키 조선소에 발주하여 건조한 새 배로, 양무호와 비교하면 훨씬 괜찮은 함정이었다. 하지만 1905년 을사조약 이후 광제호는 해군 함정이 아니라 세관의 연안 감시선 역할을 맡게 되고, 제2차 세계대전 때는 석탄 운반에 쓰이다가 8.15 광복 후 귀국 일본인들을 싣고 일본으로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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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무호와 광제호 두 척의 초대 함장은 모두 신순성(愼順晟, 1878년 ~ 1944년)이었다. 그는 대한 제국 해군 해체 이후 상선사관으로 근무했다. 경술국치 전날, 신순성 함장은 광제호에 게양되어 있던 태극기를 내려 보관하고 있었는데, 조국 해방을 1년 앞두고 사망한 아버지를 대신해 아들 신태범 박사가 광복 이후 열린 한국 기선 취항식에서 이 태극기를 게양했다고 한다.
대한 제국 해군을 다룬 책으로 한국 근대 해군 창설사가 있다. 대한제국 해군 군복에 대해 다룬 블로그
  • 관유 함선 목록
조선 말부터 들여온 대한 제국 황실 혹은 정부 소유 함정들(기선, 500톤이상)[5] - 해군 함정은 아니지만 편의상 여기에 서술한다.
창룡호(蒼龍號, Signal) 경하 혹은 기준 403톤 만재 536톤 - 1887년 도입
‧ 현익호(顯益號, 붕기복호, Bankchef Henrikssen) 만재 709톤 - 1892년 도입
‧ 이운호(利運號, 조주부호, ???) 1000톤급 - 1893년 도입

3.3. 계급


제정 러시아군의[6] 계급 체계를 모방했으나, 계급 상하 관계를 러시아군의 대 - 중 - 소 체계와 달리 정 - 부 - 참 체계라는 독자적인 용어를 사용하였다. 조선군의 관례상 대 - 중 - 소는 부대의 전투 서열상 상하 관계를 나타내는 데 주로 사용되었기 때문에 혼동을 피하기 위한 것. 현재도 구세군 대한민국 지부에서는 정 - 부 - 참 체계로 계급명을 나타낸다. 영관이란 표현은 현재 동북아에서 한국에서만 독자적으로 쓰이는 명칭이다. 중화권에선 교관급 장교로 표시하며 일본에선 좌관급 장교이다. 조선경비대 시절에 잠시 다시 정 - 부 - 참을 도입했으나 1948년을 지나서 대 - 중 - 소로 고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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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원수급
    • 대원수 - 황제가 군 통수권자 자격으로 겸임
    • 원수 - 황태자가 겸임. 통수 기구인 원수부의 명목상 수장.
  • 장군급
    • 대장 - 참모부 총장, 황제 시종 무관부 무관장. 종 1품.[7]
    • - 참모부 총장, 교육 총감, 황태자 배종 무관부 무관장. 정 2품.
    • 참장 - 참모부 국장, 원수부 산하 각 국 총장, 교육부 총감 / 부감 / 참모장, 헌병 사령관. 종 3품.
  • 영관급
  • 위관급
  • 교관급(한국군의 부사관)
  • 군졸급(한국군의 )
병사와 부사관들은 계급장에 소속 부대를 표기했으며, 참교부터 계급이 올라갈 때마다 줄이 하나씩 추가되었다.
장교부터는 계급장 양 옆에 별이 표시되며, 장군부터는 별이 금색으로 바뀌었다.
위관급은 중앙에 태극 문양, 영관급과 장관급은 중앙에 대한제국의 국화인 오얏꽃과 오얏나뭇잎이 태극 문양을 둘러싸고 있었다.
계급장이 잘 정리된 사이트들 1 2
1894년에 해당 계급을 설치했다. 실록에 따르면 대장은 연령 정년이 없고 부장이 70세, 참장이 65세, 영관급 장교는 54세, 대위에 상당하는 정위는 47세, 기타 위관급 장교부사관은 45세였다.
주요 장성급 장교대한제국군/장관급 장교를 참고할 것.

4. 장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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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군이 구매했던 맥심 기관총#[8]
현실적인 여건상 소화기부터 중화기까지 모두 외국에서 수입한 장비가 주류를 이루었다.
대한제국군이 사용한 주요 장비는 아래와 같다.
  • 게베어 1871
  • 그라 소총
  • 레밍턴 롤링블럭 M1867
  • 무라타 13년식
  • 베르단 소총
  • 30년식 소총
  • 개틀링 기관총
  • 맥심 기관총[9]
  • 암스트롱포[10]
  • 크루프 포[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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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원수 고종황제와 원수 순종황태자
보다시피 피켈하우베도 도입되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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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군 군복들. 육군의 복제는 러시아, 프랑스, 프로이센 군복을 참고했다고 하며, 예장(예복), 정장(정복), 상장(常裝, 근무복), 군장(전투복)이 있었다. 자세한것은 대한민국 군복을 참고할 것.

5. 실전 사례



5.1. 의화단 운동과 영유권 분쟁


청나라와 간도 영유권을 두고 1885년과 1887년에 두 차례의 회담이 결렬되자 조선과 청나라는 간도에 적극적으로 자국민 이주를 장려하고 영향력을 행세하며 갈등이 심화되고 있었다.
그러던 1899년 청에서 의화단 운동이 일어나 대한제국 내 평안도와 함경도에도 의화단과 청군 비적이 쳐들어와 대대적으로 약탈하는 사례가 발생한다. 당시 열강 8개국이 참전하였고 러시아 제국고종에게 참전을 제안하였다. 그러나 초기의 대한제국군의 군세는 열악하고 국내에 침입한 의화단을 막기에도 벅찬 관계로 고종은 거절했다. 이후 국방비를 대폭으로 늘려 대한제국군의 전력을 강화시켰고 고종은 평안북도 관찰사에게 진위대 예하 대대들을 나누어 배치하였고 이들과 교전하였다. 진위 5연대의 소대장 조기설, 김성열, 강희규 등이 청나라 비적 400명을 격파했다는 기록도 있다. 1900년에는 이범윤을 북간도로 파견하여 한국인 보호 정책을 추진하였다.
의화단 운동 진압으로 자신감을 얻은 대한제국군은 1902년부터는 산발적으로 압록강과 두만강을 넘어 요동과 간도에도 진출하여 영유권을 두고 청군과 전투하였다. 1903년에는 규모가 훨씬 커져 지금의 선양시인 만주 봉천일대와 지린성인 간도일대에 대대적인 참호전을 벌이기도 하였다. 통감부의 문서에 따르면 만주에 주둔했던 청군은 15,000여명으로 평안도와 함경도의 진위대, 이범윤의 사포대에 비해 병력 수는 압도적이었으나 훈련 수준과 무장이 열악하여 대한제국군이 일방적으로 승리하는 전투가 대부분이었다. 청나라와의 영유권 분쟁은 러일전쟁 직전에 중단되었고, 간도 방어를 맡은 사포대만 활동을 지속하다 일본이 체결한 간도협약으로 끝났다.
청나라와 대한제국의 무력충돌 ##

5.2. 의병 진압


그외 지역에 배치된 진위대의 주된 실전 대상은 의병 및 화적 진압이었다. 일본은 1905년 4월에 18개 진위대를 8개 진위대로 감축시키지만 그래도 군대해산 전까지는 남겨뒀는데 가장 큰 이유는 의병 진압에 효과적이었기 때문이다. 1905년 을사조약으로 일어난 을사의병에 주로 투입되었다. 을사의병 당시 폐하의 군대에게 대적할 수 없다며 교전을 피하다 잡힌 최익현의 사례에서 알 수 있듯이 의병들은 일본군에겐 적의를 가지지만 대한제국군에겐 교전을 피하거나 소극적이 되어 알아서 해산하는 경우가 많았다.

5.3. 일본에 대한 저항


청일전쟁을미사변을 일으킨 일본군의 만행을 겪고 아관파천으로 탄생한 대한제국군이었기에 당연히 일본군에 대한 감정이 좋을 리가 없었다. 1904년 러일전쟁을 일으킨 일본은 서울과 덕수궁을 점령하고 대한제국의 항일 장교들을 교체시키거나 추방하고 용산에만 일본군 5만명을 주둔시키는 등 대한제국 각 거점에 주둔하기도 하였는데 이 때문에 같은 곳에 주둔한 대한제국군과 일본군 간의 사이는 매우 험악했다. 사병들은 상대편의 장교를 봐도 경례를 하지않고 무시했으며 사소한 충돌도 잦았다. 당연히 장교들도 서로 경례를 하지 않았다.
을사조약의 횡포를 알리기 위해 1907년 헤이그 특사를 파견한 고종을 일본이 퇴위시키려 하자 이에 반대하는 군중 시위가 연일 발생하였다. 7월 20일에는 시위혼성여단 소속1연대 3대대 소속 병사 100여 명이 동조하여 종로의 병영을 뛰쳐나와 고종 퇴위 반대시위를 벌이던 군중과 함께 종로경찰서를 습격하여 일본 경관들을 살상한다. 대한제국군이 걸림돌이 될 것을 염려한 일본은 대한제국군을 해체하기로 하고 7월 31일 순종의 군대해산 칙명을 받아내어 8월 1일에 시위대를 해산시키고 9월까지 진위대를 해산시킨다. 이 과정에서 시위대는 일본군에 대항하여 남대문 전투를 벌였고 원주 진위대, 여주 파견대, 강화 분기대, 홍주 분견대, 진주 분견대, 안동 분견대 등 진위대가 각지에서 봉기를 일으키고 을사의병과 합류 정미의병이 되어 전국에서 일본군과 전투하며 저항하였다.

6. 군축과 해산


1904년 러일전쟁을 일으킨 일본은 2월 9일에 서울을 점령하였고 한일의정서를 체결 후 군축을 요구하여 1905년 4월 16일에 3000여명의 대한제국군 친위대를 해산시키고 5000여명의 시위대를 2500여명의 혼성시위여단으로 감축시켰다. 지방의 진위대의 병력도 크게 감축시켰다.1901년 이후 6개 연대이자 18개 대대 18000명의 병력이었던 진위대는 수원·청주·대구·광주·원주·황주·평양·북청의 8개 대대로 축소되었다. 편제는 과거 1개 대대가 5개 중대였던 것을 4개 중대로 개편시켰으며, 1개 중대 병력을 장교 이하 256명으로 줄여서 8개 대대를 모두 합쳐도 2,365명에 불과했다.

일본은 대한제국을 병합하는데 가장 큰 걸림돌인 대한제국군 해산을 위해 통감부를 통한 비밀 작업에 들어갔다. 우선, 대한제국군의 화포, 기관총 등의 중화기를 보관하던 용산 육군 병기창을 점령하고 600만발의 탄약과 무기류의 관리를 일본군 일임하에 두도록 했으며, 대한제국군 사병들이 반발하여 봉기할 것을 대비하여 대한제국군 일원에게 금족령를 발령하여 일본군이 대한제국군의 탄약고 및 무기고를 관리 감독하도록 하였다. 또한 이미 한반도에 주둔한 일본군 사병들에게 신형 총기 및 탄약을 추가 보급하였다. 그리고 1907년 7월 31일 순종에게 대한제국 군대의 해산 발령과 대한제국의 국방 및 병무 분야를 통감부와 일본군에게 인계할 것을 요청하였다.
그리고 군부에서는 다음날인 8월 1일 시위대의 해산을 시작으로 8월 3일부터 9월 3일 사이에는 진위대까지 해산시켜 일부 호위대 병력을 제외한 전 대한제국군을 해체하였다. 이 과정에서 해산에 반발한 박승환 참령이 자결하였고 시위대 소속 2개 대대 등이 저항하여 일본군과 남대문 전투를 벌였다. 지방의 진위대들은 각지에서 봉기하고 을사의병에 합류해 정미의병이 일어났다.
호위대 일부는 황제의 호위병으로 유지되었다. 해산인원 중 257명은 경찰관이나 헌병보조원으로 채용되어 옛 동료들의 반대편에서 총을 잡았다. 관련 페이지 1907년 이후에도 조선 보병대, 조선 기병대와 군부의 일부 기관은 남아 일부 군인들이 근무했으나 1910년에 일본군으로 소속을 완전히 옮긴다. 노백린 등은 군대 해산 후에도 근무하다가 이때 군문을 떠났다. 일본군 소속으로 옮긴 뒤에 계급 명칭은 그대로 유지하고 일본군의 계급에 상당하는 것으로 대우하다가 1920년에 계급 명칭까지 일본군과 완전히 합친다.
가장 오래 살아남은 대한 제국군은 병합 후 조선왕가의 호위를 맡은 조선보병대였다. 조선기병대가 해체된 뒤에도 명맥을 유지하다 1930년대에 사라진다. 1931년에 대부분 군인들이 전역 조치되고 조선군과 대한제국군의 흔적은 사라졌다.
정미의병에 합류한 대한제국군은 훈련과 무기의 질에 있어서 상당한 전력 향상을 가져왔다. 1907년 11월에 일어난 서울진공작전에 참여한 13도 창의군의 1만 병력 중 3000여명이 대한제국군 출신이었다. 이들은 이후에도 전국 각지에서 1910년까지 국내에서 의병에 가담해 일본군과 싸우다 이후에는 만주로 이동해 독립군이 된다.

7. 여담


요동간도 영유권 분쟁을 두고 진위대 외에도 1902년부터 간도에 주둔한 '북간도관리사' 이범윤이 사포대를 조직하여 1905년까지 청군과 전투를 벌였다. 당시 의화단을 진압한 러시아군 이 만주에 주둔하며 철도부설을 하던터라 처음에는 러시아 공사가 이런 월경 공격에 대해 침략 행위라며 항의하는 서한을 대한제국 외부(외무부)에 보낸 적이 있다. 그러나 곧 러시아는 청군에 공동대응하자며 대한제국과 이런 합의를 맺었다. 첫째, 대한국 정부와 대러시아 정부는 간도 및 그 부근 3마일 이내의 지역에 주를 설치하여 관리한다. ~넷째, 간도에 소란이 생겨 주장(州長)의 권한으로 대응할 수 없을 때, 대한국 정부와 대러시아 정부는 협동하여 적절한 방어책을 강구한다.
이범윤의 사포대는 어디까지나 정식으로 대한제국군 편제에 속한 정규군이 아니었으나 고종은 이범윤을 간도관리사로 임명하고 세를 걷어 사포대를 유지함을 허가했다. 그러므로 대한제국 정부의 통제 아래에 있는 민병대준군사조직으로 볼 수 있다.


8. 같이보기


  • 구세군 - 대한제국이 존속하던 1908년 처음 선교를 시작했기 때문에, 그 영향으로 아직까지 대한제국군의 직책명을 사용한다.
  • 조선군 - 대한제국군의 전신이다.
  • 대한민국 국군 - 정부는 국군의 전신을 대한제국군, 구한말 의병, 광복군이라 명시했다. 정부 자체도 대한제국 정부를 계승한다고 명시했다.#


[1] 징병제는 생각 이상으로 돈이 많이 든다. 징병제로 대군을 유지할 수 있는 경제여건이 되지 못한다면 안 하느니만 못한 상황이었다.[2] 친군장위영, 친군통위영, 총어영, 경리청[3] 이때 훈련대장 홍계훈은 전사한다. 훈련대는 시위대와 자주 충돌하였는데 훈련대의 반란을 막기 위해 고종이 신임하는 홍계훈을 훈련대 연대장으로 맡기고 해체를 앞두고 있었으나 일본에 포섭된 훈련대대장 3명이 이끄는 훈련대가 궁궐로 들어오자 꾸짖으며 막아서다 일본군에게 사망한다.[4] 예를 들어 대구광역시의 친군남영, 평양직할시의 친군서영, 경성군의 친군북영 등.[5] 창룡호와 현익호에 양무호와 광제호 두 척의 초대 함장인 신순성이 부함장으로 근무했다.[6] 1895년 갑오개혁 당시 조선군 개편은 독일식 일본군을 참고했으나 1897년 대한제국 수립 원년에 창설된 대한제국군은 프랑스식 제정 러시아군 체계를 따랐다.[7] 원래는 정장이 되어야 하나 대장이라는 용어가 예전 조선군 시절부터 있었기 때문에 대장 계급명 사용.[8] 해당 블로그에서는 대한제국군의 장비수준을 다소 고평가하는 경향이 있는데 아래에서 보듯 대한제국군이 보유한 크루프 야포는 청나라군이 청일전쟁 당시 쓰던 모델과 별 차이가 없는 수준이었고 기관총의 경우 일본은 맥심 기관총 대신 호치키스 기관총을 국내에서 면허생산, 봉천회전에서만 250정이 넘는 기관총을 배치하는 수준에 도달해있었다.[9] 6정 보유[10] 다만 주력은 아니었다. 주력은 밑의 크루프 포.[11] 알프레드 크루프가 세운 크루프 사에서 만든 그 명품 독일제 포 맞다![12] 그러나 구매시점을 생각해볼때 흔히 생각하는 주퇴복좌기가 설치된 최신예의 속사포는 커녕 당시 청나라군이 쓰던 크루포 야포와 동일한 모델로 추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