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희

 

<colcolor=#670000> '''시호'''
원경국사(元敬國師)
'''법명'''
충희(冲曦), 현희(玄曦)[1]
'''부왕'''
인종
'''모후'''
공예태후
'''생몰년도'''
? ~ 1182년[2]
1. 개요
2. 생애


1. 개요


고려의 왕자이자 승려.

2. 생애


인종공예태후의 아들로 의종의 동복동생, 명종신종의 동복형이다. 의종 2년(1148) 흥왕사의 법존(法尊)에서 증세승통(拯世僧統)이 된다. 충희는 흥왕사에 있으면서 숙종의 손자로 사촌지간인 사공 왕장(王璋)과 놀기를 즐겼다. 왕장이라는 사람은 말타기, 도박, 격구를 즐기는 무뢰배였다. 의종 9년(1155) 흥왕사의 내시가 '두 사람이 품은 뜻을 알 수 없다'며 반역의 뜻을 품었음을 왕에게 고하니 의종은 왕장의 작위를 삭탈했으나 충희는 처벌받지 않았다.
의종 11년(1157) 의종이 목친전에서 연 기복재(祈福齋)에 불린 200명의 승려 중 하나였다. 의종 21년(1167)에는 형 의종을 위해 청녕재(淸寧齋)에서 음식을 바쳐 연회를 벌였다. 예종의 서자로 충희의 삼촌인 승려 각예(覺倪)와 시중을 들던 신하들까지 불러 마셨으며 중미정(衆美亭)의 연못에 배를 띄워 밤까지 놀았다.
명종 7년(1177) 흥왕사의 한 승려가 승통 충희가 승려들과 왕위를 찬탈하려는 음모를 꾸민다고 고변한다. 명종은 충희의 종자들을 불러 국문했으나 무고였음을 알고 풀어준다. 명종 10년(1180) 공예태후가 유종을 앓자 명종은 충희를 불러 간호하게 했다. 충희는 궁궐에 있으면서 궁녀, 공주들과 음행을 벌였는데, 우사간 최선이 충희를 탄핵해 궁궐 밖으로 내보낼 것을 청했다. 그러나 명종은 최선이 형제 사이를 이간질한다고 해서 오히려 최선을 파직시켰다. 대간들은 다시는 충희를 탄핵할 수 없었고, 조정의 신하들은 모두 충희에게 붙어 뇌물이 끊이지 않았다고 한다.
사서에 따르면 명종이 충희를 감싼 이유를 명종이 의종을 반면교사로 삼아 형제간의 우애를 중요하게 생각했기 때문이다. 사서에서는 의종이 도참을 믿어 동생을 꺼렸다[3]거나 명종은 의종이 불효하고 우애가 없던 것을 벌했다[4]는 등 의종이 폐위된 이유를 효나 우애같은 유교적 덕목의 부족으로 서술한다. 이는 인종이 참언을 믿고 충희의 형인 대령후를 유배보낸 것을 비판하는 것이다.
고려사 후비전에 따르면 명종 12년(1182)에, 고려사 종실전에 따르면 명종 13년(1183)에 죽는다. 후비전 기록에 공예태후가 충희의 죽음에 상심할 것을 우려해 이를 아뢰지 않았다. 태후도 몇 달 뒤에 충희의 죽음을 알았고 화병이 생겨 명종 13년에 죽었다. 흥교사에는 충희를 기리는 충희선사탑비가 세워졌으나 지금은 전해지지 않고 비편의 탁본만이 남아있다.

[1] 충희, 현희를 이름으로 파악하고 '왕충희'라고 하기도 하지만 이름에 담긴 불교적 뜻으로 보아 법명일 것으로 추측된다.[2] 또는 1183년.[3] 『고려사』 권19, 명종 총서.[4] 『고려사절요』권12, 명종 10년 6월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