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예태후

 

'''고려의 역대 왕후'''
예종
경화왕후
문경태후
문정왕후

'''인종비'''
폐비(연덕궁주)
폐비(복창원주)
'''공예태후'''
선평왕후

의종
장경왕후
장선왕후
'''시호'''
'''공예태후(恭睿太后)'''
'''존호'''
연덕궁주 왕비(延德宮主 王妃)
왕태후(王太后)
'''작위'''
연덕궁주(延德宮主)
'''관저'''
연덕궁(延德宮)
후덕전(厚德殿) 선경부(善慶府)
'''본관'''
장흥 임씨(長興 任氏)
'''능호'''
순릉(純陵)
'''생몰연도'''
1109년 음력 9월 7일 ~ 1183년
1. 개요
2. 생애
2.1. 인종왕후가 되다
2.2. 태후가 되다
2.3. 사후
3. 대중매체에서


1. 개요


고려 인종 공효대왕의 3비. 시호는 인종 恭효왕과 恭 자 돌림이다.
본관은 장흥, 출생지는 전라도 장흥군 관산읍 옥당리이다. 문하시중을 지낸 정안공(定安公)[1] 임원후(任元厚)와 진한국대부인(辰韓國大夫人) 이씨의 딸이며, 인종과의 사이에서 고려 18대 왕 의종, 대령후 왕경(王璟), 원경국사 충희, 19대 왕 명종, 20대 왕 신종, 승경궁주[2], 덕녕궁주, 창락궁주[3], 영화궁주의 5남 4녀를 보았고, 고려 21대 왕 희종, 22대 왕 강종의 할머니이다.
자신의 본관인 장흥이란 지명의 유래가 된 인물이다. 본래 장흥의 고려 시절의 이름은 정안현이었고 공예태후의 가문 역시 정안 임씨였으나, 인종이 직접 '길이 길이 번창하라'는 의미로 장흥으로 개칭하며 장흥부로 승격시켰다. 이 장흥부라는 지명이 지금까지 이어져 대한민국의 전라남도 장흥군으로 남아있는 것이다.

2. 생애



2.1. 인종왕후가 되다


고려사에 따르면 공예태후가 태어나던 날 밤, 문하시중이자 외조부 이위(李瑋)의 꿈에 큰 황색 깃발의 꼬리가 고려 본궐의 정전인 선경전(宣慶殿)을 감싸고 도는 꿈을 꾸자, 외손녀가 왕후가 될 것이라 예언했다고 한다. 본래 문종의 왕후까지 냈던 명문가 경주 김씨와 혼인할 예정이었으나, 태후가 갑자기 병이 도져 혼사가 무산되었다. 이 때 부친인 임원후가 점을 치니 그녀가 더욱 귀하게 될 것이라는 점괘가 나왔다고 한다.
기록의 면면을 따져보면 병이 도져서 혼사가 무사된 뒤 점을 쳤다...는 이야기로 두루뭉술하게 써있지만 사실상 정략적으로 왕후의 자리를 노리고 있었다고 봐도 무방한 상황이었다. 임원후의 부친인 임의가 정2품 문하시랑평장사까지 올랐기에 장흥 임씨는 충분히 왕후의 자리에 오를만한 가문이었기도 했고. 이 때문인지 당대의 실력자 이자겸이 그를 개성 부사로 좌천시키는 등 견제했다는 기록이 있다.
하지만 결국 이자겸은 권력을 넘어 임금의 자리를 노리고 이자겸의 난을 일으켰다 곧바로 진압당한 탓에 실각했고, 이후 인종은 이모이기도 한 이자겸 을 폐비시키고 공예태후와 1126년 혼인하면서 이 길몽은 현실이 되었다. 처음엔 연덕궁주로 불리다가 1129년 정식 왕비로 책봉되었다. 마침 인종 또한 꿈을 꾸었는데, 이에 대해 척준경은 '장차 임씨 성의 후비를 들일 것이며, 왕자는 5명을 얻을 것이고 그 중 3명이 왕위에 오를 것'이라는 꿈풀이를 했다. 이 내용이 맞아 떨어진 것. 그래서 한편으로는 척준경이 단순한 꿈풀이를 해준게 아니라, 공예태후를 들이는 과정에서 척준경이 직간접적으로 개입했음을 암시한다는 주장도 있다.#
부부의 금슬은 꽤 좋았던 것으로 보인다. 혼례한지 10개월만에 후일 의종에 오르는 장자를 출산한 후로 5남 4녀를 낳았으며, 인종이 왕후를 특히 총애해 앞에서도 언급했듯 왕후의 고향을 부로 승격시켜주기도 했다.

2.2. 태후가 되다


인종이 붕어한 후 아들인 의종대에는 왕태후에 올라 왕실의 큰어른이 되었고 거처 역시 후덕전(厚德殿)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얻었으나, 왕후 시절에 비하면 굉장히 불우한 삶을 살았다.
우선 의종 시절부터 의종과 갈등을 겪으며 마음 고생을 하는 일이 있었다. 공예태후가 의종이 왕자였던 시절, 장자인 의종보다는 차남 대령후를 총애해 왕태자로 삼고자 했던 일이 있었는데, 의종이 이로 인해 대령후를 의심하여 유배보내게 된다. 공예태후가 의종에게 대령후를 살려줄 것을 청하자 오히려 의종이 지난날의 섭섭함을 표출하며 거절했다. 결국 태후는 버선발로 궁전 밖으로 나가 아들에게 억울함을 호소하는 굴욕을 겪었고, 이에 하늘에서 갑자기 천둥과 번개가 치자 의종 또한 자신의 잘못을 뉘우쳤다고.
그렇게 의종과의 갈등이 잘 마무리되나 했더니 '''무신정변이 일어나 아들이 폐위되고''' 유악한 명종이 왕위에 올라 바야흐로 무신정권의 난세가 열린다. 한창 왕궁에서 살육이 일어나는 와중에 의종의 태손까지 살해당하는 등 왕실마저 무신정변의 피바람을 피하지 못한 탓에 마음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던 모양인데, 자신의 병을 간병하던 넷째 아들 원각국사 충희가 죽었다는 소식이 늦게 전해지자 무신들에게 살해되었다고 생각하여 마음의 병을 얻었다고 한다. 후일 신종에 오르는 다섯째 아들 평량공 역시 치질로 오랫동안 태후를 문안하지 못하자 평량공 역시 무신들에게 죽었다고 생각하며 슬퍼했다고 한다.
그 외에도 공예태후의 친가 쪽 사람들도 무신들의 핍박을 받았던 모양인데, 특히 이의방의 형 이준의가 귀법사의 난 직후 이의방에게 3가지 잘못이 있다며 대차게 팩트 폭력을 날릴 때 언급했던 것 중 하나가 무려 '''태후의 여동생을 겁간한 것'''이라고 한 것[4]을 보면... 그래도 여동생을 제외한 남자 형제들[5]은 가문의 후광도 있거니와 다들 성품이 올곧아 무신들의 어그로를 끌지 않은 덕분에 비교적 순탄하게 관직생활을 한 것으로 보인다.
아무튼 태후가 된 뒤로 마음고생만 실컷 하던 공예태후는 결국 1183년(명종 13) 7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고, 순릉에 안장하였다.

2.3. 사후


고려사 예지 기록에 따르면 명종은 어머니의 죽음을 크게 슬퍼하며 직접 별궁에 빈소를 차렸고, 별궁에서 공예태후의 원찰까지 '''직접 걸어가며''' 재궁을 실은 가마를 보냈다. 또한 어머니의 장례식을 인예태후의 전례에 따라 국왕의 장례식과 동등하게 하였다.
공예태후의 장례식이 끝나지 않았을 때, 금나라에서 사신을 보내왔다. 당시 금나라는 고려의 상국이었고, 그렇기에 비록 태후의 장례식이 끝나지 않았더라도 연회를 열고 풍악을 울려 웅장하게 맞이해 주길 요구했다. 그러나 고려는 끝까지 허락해주지 않고 조용한 분위기에 그들을 맞이했다.

3. 대중매체에서



3.1. 무인시대


[image]
KBS 드라마 무인시대에서는 중견 배우 김윤경이 공예태후로 분하였다. 유약한 명종을 대신해 서슬퍼런 무신 집권자들과 대립하는 왕실의 큰 어른이자 여걸로 각색되어, 명종이 집권 말기 흑화해 황제로서의 위엄를 갖추기 전까지 황실의 무게감을 보여주는 꽤 비중있는 조연으로 나온다.
작품의 묘사에 따르면 왕실의 큰 어른다운 카리스마와 어느 정도의 식견은 갖추고 있으나 그 판단이 때때로 틀리기도 하고 계책을 꾸몄다가 무신 집권자들에게 간파당하는 등 빈틈을 보여주는 경우가 잦다. 대표적으로 이의방의 딸을 태자비로 맞아들인 것인데, 이의방이 작중에 호걸로 평가되는 인물이긴 하나 무비의 아들을 장차 왕으로 만들 야심 또한 품고 있었음을 고려해보면 훌륭한 오판이었다.
또한 이의방을 외척으로 받아들인 후 방패막이가 되어주리라 다짐을 하고 의종의 시해를 청부해놓고 막상 명종과 조정이 이의방을 탄핵하려고 하자 아들의 죽음에 충격받아서 몸져 누운 뒤 그냥 드르렁을 시전했다. 어찌보면 이의방을 토사구팽하는 신의 없는 행동을 보여주기도 했지만, 적당히 이의방을 써먹고 버리려던 계책이었다고 볼 수도 있는 부분. 결국 이의방은 무력으로 쿠데타를 일으켜 마구잡이로 숙청을 단행하고, 공예태후는 어쩔수 없이 자신의 동생인 임씨 부인을 인질로서 이의방에게 안겨준다.
특히 이 임씨 부인이 정균의 정인이었다는 점으로 인해 임씨 부인의 인생을 대차게 꼬아놓은 것은 물론 정중부의 가문과도 아예 척을 지게 되는데 이 역시 꽤나 오판이었다. 공예태후는 정중부를 결코 믿을 수 없는 인물이라며 견제했으나, 사실 정중부가 교활한 간신이긴 했으나 적어도 명분의 중요성은 알고 있었다는 점, 그리고 정균이 본격적으로 미친 놈이 되어 황실을 능멸했던 원인이 임씨 부인과의 실패한 로맨스였음을 생각해보면 차라리 선평왕후의 제안대로 임씨 부인을 정균과 맺어주고 해주가문을 적당히 막후에서 조종하는 편이 나았을 것이다.
기왕에 정중부 가문과 척을 졌다면 그 뒤에라도 잘 했으면 좋은데, 이 과정에서 이의민에게 밀지를 전해 친위 쿠데타를 일으키려는 계책을 꾸미려다 그대로 정균에게 적발당해 오히려 약점을 잡혀버린다. 이를 빌미로 수안궁주와 혼인하려는 정균의 음모를 어떻게든 막아보려했지만 신료들을 단체로 끌고나와 시위를 벌인 정중부의 정치 공세를 이겨내지 못하고 결국 정균의 혼사를 허락하며 황실의 권위가 나락으로 떨어질 위기에 처한다. 다행히 이 위기는 경대승이 기해정변으로 정중부 일가를 도륙냄으로서 극복했고, 그 과정에서 태후전에 자기 몸을 숨겨달라고 들어온 정균을 쫓아내며 그동안 자신을 능욕해온 정균에게 복수하는데 성공한다.
정권을 잡나 싶었던 경대승마저 이런 저런 일이 겹쳐 젊은 나이에 병사한 뒤 황실은 조원정이라는 소인배에게 무시당하는 지경에 이른다. 간난신고를 겪던 공예태후는 이 시점에서 병세가 위독한 지경에 이르렀고, 죽기 전에 조원정의 통수에 충격을 받은 명종에게 "경대승의 죽음으로 태평성대를 만들 방법은 물 건너갔으니, 황실을 지키는 것만을 생각해야 된다"는 팩트폭력을 가한 뒤 이의민이라는 호랑이를 불러들인 뒤 그 등에 올라타 황실의 권위를 지키라는 마지막 조언을 남긴 후 눈을 감게 된다.
작품 내내 무게감있는 모습을 보여준 공예태후가 남긴 최고의 명장면으로는 정중부가 감옥에서 처형을 기다릴 때 찾아가 나눈 마지막 대화가 꼽힌다. 한 때 인종의 젊은 왕후와 인종의 총애를 받는 젊은 무신이었던 때를 함께 추억하며 "그 시절엔 참 좋았는데 나이를 먹은 뒤에는 어찌 이렇게 되었을까"라는 말을 나누며 함께 눈물을 흘리는 모습을 보여준다. 정중부가 한창 공예태후와 대립하던 시절 천추태후를 들먹이며 폭언을 할만큼 사이가 나빠졌던 둘이었기에 공예태후는 "참으로 원망스럽다"는 말을 꺼냈고, 이에 정중부가 눈물을 흘리며 사죄한다. 공예태후가 이를 받아들이듯 "문하시중... 나중에 보십시다."라는 말을 하며 손을 잡아준 뒤 퇴장하고, 그런 공예태후에게 큰절을 올린 뒤 비통에 젖어 몸을 떠는 정중부의 모습이 많은 여운을 남겼다.

[1] 공작위로 정안후(定安侯)에서 진작됨. 시호는 문충공(文忠公).[2] 공화후의 아내.[3] 원덕태후의 어머니이자 고종 안효왕의 외할머니.[4] 참고로 나머지 둘은 의종을 폐위한 뒤 그 사저와 첩을 취한 것, 국정을 마음대로 좌지우지한 것이었다.[5] 공예태후에게는 여동생 한 명 외에는 다섯 명의 남자형제가 있었다. 이중 남동생인게 확실한 4남 임유, 5남 임항을 제외한 임극충, 임극정, 임부는 생몰년이 확실치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