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왕사

 



1. 개요
2. 역사
2.1. 창건
2.2. 소실과 복원
2.3. 몰락
4. 고려 왕실과의 관계
5. 규모
6. 가람
7. 흥왕사 13층 금탑
8. 교장과 초조대장경
9. 기타
10. 같이보기


1. 개요


興王寺
고려시대에 개경 근처에 있던 거대 사찰. '''고려 최대의 사찰'''로 추정되며, 정치적인 집합소로 이용되어 왕실과 관련된 기록에 자주 등장한다. 현재는 폐찰이 되었으며 개풍군 봉동면 흥왕리에 흥왕사지를 둘러싼 성터가 남아있다. 광통보제사와 함께 고려를 대표하는 사찰이다.
아쉽게도 개성북한 영토이기 때문에 대한민국 측에선 발굴이나 세밀한 측량을 제대로 실시하지 못해 많은 부분이 베일에 싸여있다. 현 흥왕사지에는 석탑의 옥개석과 갑석이 무너진 채 남아있다.

2. 역사



2.1. 창건


고려 문종 10년(1056년)부터 12년간 공사한 끝에 창건하였다.[1] 위치는 고려 개경 개성부 덕수현이었다.[2]
당시는 최충으로 대표되는 유학이 막 고려에 본격적으로 뿌리내리던 시점으로, 최초의 사립학교인 12학도가 설립되던 시기였으며고려시대의 유학자들 중에서도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3] 불교의 교세를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많아서 최유선을 위시한 신하들이 흥왕사 건설을 크게 반대했다고 한다.[4] 그러나 불교는 고려의 국교이기도 하고, 문종의 뜻이 강력해서 공사를 강행하였다. 문종 21년(1067년)에 낙성연등회(落成燃燈會)[5]가 열렸다는 기록이 있어, 이 즈음에 완성된 것으로 보인다.

2.2. 소실과 복원


여몽전쟁의 시기 고려 왕실은 강화도로 천도하고 전국토는 전화에 휩싸였다. 이때 수많은 문화재들이 소실되었는데[6] 흥왕사도 불타서 없어졌다. 그러나 흥왕사가 왕실의 원찰이므로 원 간섭기 무렵에 권위 진작 차원에서 재건했다. 하지만 원나라의 과도한 공납 요구에 허리가 휘는 판이었으므로 문종 시절 규모에는 훨씬 못 미쳤다.

2.3. 몰락


고려가 망하면서 흥왕사도 결국 좋았던 시절에 막을 내렸다. 흥왕사는 조선 초까지는 존속한 듯 보이는데 어느 순간 부터는 폐사가 된 것으로 보인다.

3. 흥왕사의 변



1363년김용공민왕을 시해하려고 한 사건. 자세한 내용은 해당 문서 참조 바람.

4. 고려 왕실과의 관계


의천이 제1대 주지이며, 제2대 주지는 숙종의 3남으로서 승려가 된 징엄. 의천과 징엄의 묘지는 모두 흥왕사 터에서 발견되었다.
송나라에 가서 천태종을 배워 고려에 도입하고 교선통합에 나섰던 인물이기도 한 의천이 흥왕사의 초대 주지였다는 점은 문종이 흥왕사 건립을 밀어붙인 이유를 시사해 주는데, 고려 중기 불교계의 주류이자 현종 이래로 왕실과 사돈을 맺은 경원 이씨[7] 가문과 커넥션이 있었던 법상종에 맞서 왕자 출신의 승려 의천과 천태종을 내세워서 고려 왕실이 직접 불교계를 장악하기 위한 정치적인 의도도 흥왕사 건립의 한 동인이었다고 해석되고 있다.
어쨌든 흥왕사는 그렇게 고려 왕실의 원찰로 번성하였다.

5. 규모


흥왕사(興王寺)는 국성 동남쪽 한구석에 있다. 장패문을 나가 2리 가량 가면 시냇물에 닿는데 '''그 규모가 극히 크다'''.

고려도경』中

기록에 의하면 규모가 2800여 칸이었다고 하는데 이는 거의 왕궁 수준이다. 면적은 너비 800 m, 길이 400 m로 32만㎡에 이르렀는데, 이는 경복궁과 맞먹는 면적이다.[8] 자금성의 면적이 72만㎡인데, 자금성과 비교해도 거의 반절 정도 되는 크기로 정말 엄청난 크기이다.
다만 면적 관련한 자료는 북한 평양방송의 발표라서 신뢰성이 좀 의문시된다. 그러나 규모가 큰 사찰이었음은 분명하다.
대륙의 기상을 가지고 있는 중국인의 시각에서 쓴 고려도경에도 `극히 크다`라는 표현이 있다. 심지어는 1070년에 사찰을 둘러싼 을 축조하였는데, 그 길이가 약 4 km 남짓이며 동서남북 성문 터 4곳이 확인되었다고 한다. 이 절이 창건된 뒤 열린 팔관회는 고려 최대 규모였다고 한다.

6. 가람


가람배치는 2탑 2금당식으로, 상당히 특별한 양식이다.

7. 흥왕사 13층 금탑


[image]
고려시대 불화중 하나로 황금탑의 모양을 짐작할수 있다.
흥왕사 경내에는 가람을 이루는 탑 2기 외에도 427근으로 안을, 144근으로 겉을 장식한 매우 화려한 13층 금탑이 있었다고 한다. 무신정권 시절에 최이가 금탑과 꽃병을 만들어 흥왕사에 헌납했다는 기록으로 보아 그때 만들어 진것으로 보인다.
이 금탑을 여러 번 옮겼다는 기록이 있으므로 그리 크지는 않았던 듯하다. 고려 후기의 학자 목은 이색마니산 기행 도중 흥왕사 금탑을 보고 시를 한 수 짓기도 했다.
그러나 몽골 침입시기에 몽골군이 개경을 점령하여 싸그리 불태우면서 흥왕사도 함께 불타 없어졌으나 금탑은 이후에도 기록상으로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건재 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고려사절요에는 충렬왕 시절, 원나라에서 시집온 제국대장공주가 흥왕사에 갔다가 금탑을 보고 필이 꽃혀서 금탑을 강탈해 궁으로 돌아왔다는 이야기가 있다. 금탑을 녹여 다른 곳에 사용하려는 의도였던 모양인데, 갑자기 충렬왕이 원인을 알 수 없는 병[9]으로 쓰러져서 사경을 헤매자 제국대장공주는 일관(日官)[10] 오윤부에게 치료법을 물어보았다. 그러자 오윤부는 금탑을 도로 흥왕사에 돌려주게 했고, 그 뒤로 충렬왕의 병이 씻은 듯이 나았다고 한다.
후대이 인물인 이색이 금탑을 보고 시를 남기기도 한것으로 보아 여말선초 까지는 남아 있었던것으로 보인다.
야사에 따르면 흥왕사의 보물인 금탑을 명나라 사신들이 조선에 올 때마다 탐냈다고 한다. 심지어 영락제까지도 "금탑을 가져올 수 없을까?" 라고 했단다. 결국 명의 요구가 귀찮았던 태종 이방원은 금탑을 명나라 사신들 손에 들려 보내줬다고 한다.
야사답게 정확한 출처를 알 수 없는 이야기로 조선왕조실록이나 명사 조선열전 및 명실록에서 흥왕사나 금탑으로 검색을 해보아도 영락제가 금탑을 달라고 요구했다는 내용은 전혀 나오지 않는다. 심지어 명사나 명실록에서 興王寺로 검색을 하면 아무런 기사도 안 뜬다. 조선왕조실록에서 흥왕사나 금탑으로 검색을 해봐도 태종 이방원 시기에는 관련 기사가 전혀 없다.
하지만 명나라 황제가 가져가지 않았다 해도 이후의 일을 생각하면[11] 대한민국에서 국보로 지정되기도 전에 소실되었을 가능성도 높다. 생각해보자. 명나라 황제야 야사라고 쳐도 그 전 원나라 황족도 탐을 낼 정도의 보물인데 조선시대 유생들, 임진왜란 왜군들, 청나라 군인들, 개화기 서구인들, 일제강점기 일본인들, 도굴꾼들이 환장을 안 할까? 그 수많은 역사의 난리를 겪고도 제자리에 그대로 있을 수 있으리라는 기대는 지나치게 낙관적인 생각이다. 어쩌면..
어쨌거나 금탑의 행방은 묘연하다. 만일 남아있다면 당연히 대한민국의 국보가 될 자격이 충분한 귀중한 문화재였을 텐데 애석하다.

8. 교장과 초조대장경


대각국사 의천교장도감(敎藏都監)을 설치하여 교장을 간행한 곳으로 유명하다. 교장은 훗날 완성된 팔만대장경프로토타입이나 마찬가지로 교장의 목록에 해당하는 '신편제종교장총록(新編諸宗敎藏總錄)'은 지금까지도 불서 목록 가운데 가장 뛰어난 것에 속한다. 또한 동양 최대의 분량이었던 초조대장경의 경판이 바로 이 흥왕사에 보관되어 있었는데 여몽전쟁 때 사찰이 타면서 같이 전소되었다.

9. 기타


  • 경기도 여주시에 흥왕사라는 동명의 절이 있다. 한자는 다른데, 개성의 흥왕사는 '흥王사'지만 여주 흥왕사는 '흥旺사'이다.
  • 흥왕사는 사찰의 창건자인 문종 인효대왕의 원찰이기도 했다. 그래서 문종의 어진이 흥왕사에 걸려 있었다고 한다.
  • 고려사 공민왕 세가엔 흥왕사의 재궁이 등장한다. 이를 보아 안화사처럼 사찰 내에 별궁이 따로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 고려사 예종 세가 재위 3년에 흥왕사 대시원(大施院)이 등장한다. 당시 명의태후가 이 곳에 거주했다고 한다.
  • '홍원사광제승통총서묘지명'에선 흥왕사 감덕원(感德院)이 등장한다.


10. 같이보기



[1] 1055년부터 13년이 걸렸다는 이야기도 있다.[2] 현재는 북한의 개성직할시 개풍군이다.[3] 조선과 달리 고려 이전에는 삼교의 조화를 이상적으로 보는 시각이 많았다.[4] 훈요십조에서도 "신라처럼 아무 데나 절 함부로 지어서 지기(地氣)를 흐트러뜨리지 마라"라고 무턱대고 절을 짓는 행위를 왕건이 제재시킨 내용이 있기는 한데, 고려 후대왕들이 훈요십조의 내용을 안 지킨 게 한두 가지가 아니라서...[5] 낙성식을 겸하는 연등회.[6] 신라의 왕실사찰이자 고려시대에도 남아있던 경주시황룡사도 이 때 없어졌다.[7] 인주 이씨라고도 함.오늘날의 인천 이씨.[8] 100% 복원된 경복궁 면적이 34만㎡이다.[9] 이라고는 했는데 흥왕사 금탑이 문제가 되어 발생한 홧병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선대왕이 만든 금탑을 후손으로써 지켜야 했는데 그러자니 성깔 지랄맞은 제국대장공주나 그 뒤에 있는 원나라와 또 맞서야 하니까.[10] 별로 점을 치는 관직.[11] 조선시대 유생들의 회암사분황사 등 사찰 반달, 임진왜란, 병자호란, 일제강점기, 6.25 전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