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선(문의공)

 


1. 개요
2. 생애
3. 가족관계

崔詵
? ~ 1209년(희종 5)

1. 개요


고려 후기의 문신. 고려사 열전에 따르면 문학으로 널리 알려졌으며 욕심이 없고 말이 적었다. 문벌귀족으로서의 지위를 자부하지 않았고 현명한 이와 낮은 선비에게 예를 갖췄다.

2. 생애


본관은 동주(東州)[1]. 태조 때의 공신 최준옹의 후손이다. 문종, 순종, 선종을 섬기며 수태보 문하시랑 동중서문하평장사 판이예부사까지 오른 예숙공 최석(崔奭)의 손자이고, 예종, 인종, 의종을 섬기며 중서시랑평장사를 지냈으며 무신정변에서 살아남은 문숙공 최유청동래 정씨 정항의 딸 사이에서 8형제 중 여섯째 아들로 태어났다.
1160년(의종 14) 문과 경진방(庚辰榜)에 병과 1위로 급제하였으며#, 명종 때 우사간이 된다. 명종 8년(1178) 공부낭중으로 흥화도(興化道)에 찰방사로 파견돼 관리들의 근무 성적을 평가했다. 명종 10년(1180) 공예태후가 유종을 앓자 의종의 동생인 원경국사 충희(冲曦)가 불려가서 태후의 간병을 하게 된다. 충희가 궁녀들, 공주들과 사통해 궁궐 밖까지 소문이 들리자 최선이 홀로 나서 충희를 내쫓으라는 상소를 올린다. 명종은 오히려 대간이 형제 사이를 이간질한다며 최선을 파면했다.
명종 22년(1192) 판비서성사를 지내며 이부상서 정국검과 함께 유학자들을 모아 『증속자치통감』을 교정했고, 같은 해에 송나라 사신이 『태평어람』을 바치자 이를 교정했다. 명종 24년(1194) 동지공거, 명종 26년(1196)과 신종 2년(1199) 지공거가 되어 진사를 뽑았다.
신종 때 여러 차례 승진한다. 신종이 즉위한 1197년에 지추밀원사 태자소사에 임명됐는데, 최선이 나이가 많고 덕이 있다고 해서 신종 3년(1200) 바로 수태부 문하시랑 동중서문하평장사 판이부사로 승진한다. 최선은 얼마 뒤 벼슬에서 물러난다. 이듬해인 신종 4년(1201) 개부의동삼사 상주국이 더해진다. 신종 5년(1202) 식목도감사로서 문반의 5~6품 참외관을 모두 참상관으로 삼을 것을 상주하나 그 인원이 너무 많다고 해서 예닐곱명만 늘었다.
신종 7년(1204) 등창에 걸려 한달동안 병석에 누운 신종이 최충헌을 불러 태자에게 선위할 수 있게 해달라는 뜻을 밝힌다. 최충헌은 그 자리에서는 명령을 따를 수 없다고 사양했으나, 다음날 최선과 기홍수를 불러 의논한 뒤에야 희종이 즉위하게 된다. 희종 5년(1209)에 죽어 시호를 문의(文懿)라고 했으며, 후일 희종의 묘에 배향된다.

3. 가족관계


  • 부: 최유청
  • 모: 동래군부인 정씨
    • 본인: 최선
      • 아들: 최종원
      • 아들: 최종준
      • 아들: 최종재
        • 손자: 최온
      • 아들: 최종번
        • 손자: 최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