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와나카지마 전투
1. 개요
일본 전국시대에 일어난 전투. 다케다 신겐과 우에스기 겐신을 필생의 라이벌로 만든 사건이다.
2. 전투의 배경
카이의 다케다 신겐은 아버지 다케다 노부토라를 축출하고 가문을 승계했다. 이후 신겐은 스와씨를 공격해 멸망시켰다. 이후 시나노로 눈을 돌린 신겐은 매년 시나노를 공격해 영토를 확장해 나갔다.
이 당시 시나노는 통일된 다이묘가 없었고 각지의 성을 중소 다이묘[1] 가 장악하는 형태였던 데다가 서로 반목하는 사이인 탓에 신겐의 침공을 막을 방법이 없었다. 신겐은 두 번의 패배를 당한 적이 있었지만[2] 이후 전세를 역전시켜 마침내 신겐은 시나노 대부분을 장악하는 데 성공했다.
이리되자 위기감을 느끼게 된 것은 에치고의 우에스기 가문이었다. 시나노가 다케다의 영향권에 들기 전에는 카이와 에치고 사이에 시나노가 완충지대 역할을 했지만 시나노 대부분이 다케다에게 장악되면서 까딱하다간 '''다케다가 바로 에치고로 쳐들어올 수도 있는''' 위급상황이 된 것이다.
2.1. 카와나카지마
카와나카지마는 치쿠마 강 유역의 젠코지(善光寺) 평야 남부에 사이강과 치쿠마 강이 합류하는 지점에서 넓게 땅이 펼쳐지는 지역을 일컫는 말이다. 직역하면 강 한가운데 섬이라는 의미로서 실제로는 삼각지대.
이 땅은 매우 중요한 지점이었다. 다케다 입장에서는 '''카와나카지마를 통해서만 에치고를 침공하는 것이 가능'''[3] .했고, 우에스기 입장에선 '''카와나카지마를 빼앗기면 에치고로 가는 길이 활짝 열리는 것'''을 의미했다.
게다가 경제적 입장에서도 이 땅은 중요한 곳이었다. 두 개의 강이 실어온 토양이 퇴적되어 비옥해진 토양덕에 쌀의 수확량은 에치젠을 능가할 정도였다고 한다. 거기에 가마쿠라 시대때부터 시작된 보리의 이모작도 꽤나 성공적이었고 두 개의 강이 합류하는 지점이라 연어 같은 어종도 풍부했다. 한마디로 전략적 요충지이자 알짜배기 땅이었다는 이야기다.
이곳은 중소 고쿠진(国人)[4] 들이 난립하던 곳이었지만, 시나노 북부에서 세력을 떨치던 무라카미를 중심으로 여러 세력들이 연합하여 다케다에 맞섰다. 양자간의 대결은 초반엔 대등하다가 1551년 무라카미의 지성인 도이시 성이 함락되면서 다케다의 우세가 굳어졌다. 이후 다케다군에 대항할 능력을 상실한 무라카미 요시키요는 가츠라오성을 버리고, 에치고로 도주. 1553년 8월 에치고의 나가오 카게토라, 즉 우에스기 겐신에게 도움을 요청하기에 이르렀다.
우에스기 입장에서는 카와나카지마가 매우 중요한 요충지였을 뿐만 아니라 이 지역의 고쿠진들과 오랫동안 동맹을 맺어온 사이였기 때문에[5] 이곳을 지킬 필요가 있었다.
3. 전투의 전개
3.1. 제1차 카와나카지마 전투
후세 전투라고도 한다.(布施の戦い) 1553년(텐분 22년) 4월. 다케다 신겐은 북시나노를 침공해 오가사와라 가문의 잔존세력과 무라카미 가문의 성들을 잇달아 공략했다. 이리되자 카츠라오성에 칩거하고 있던 무라카미 요시키요는 어마 뜨거라 하면서 에치고로 도망쳐서 우에스기에 구원을 요청했다.
이에 겐신이 구원병을 파병했고 북시나노의 다른 고쿠진들도 지원군을 보내 무라카미 요시키요는 5천의 병력으로 반격에 나섰다. 무라카미의 반격에 신겐은 일단 병력을 철수했다.
이후 7월, 신겐은 다시 전력을 재정비하고 북시나노에 재침공해 무라카미 요시키요가 지키고 있던 시오다성을 공략했다. 다케다군의 맹공에 무라카미 요시키요는 다시 성을 버리고 에치고로 도망쳤다.
이리되자 겐신은 직접 출격하기로 결심하게된다. 8월 그믐 우에스기군은 후세(布施)에서 다케다군의 선봉대와 격돌 이를 물리치고 9월 1일에는 야와타의 방어군을 패퇴시키며 진군, 다케다의 방위망을 차례차례 쳐부수며 남하하였다. 그 후 바로 아라토 성을 함락시키고 9월 3일에는 아오야기성도 함락시킨다. 다케다군은 이에 맞서 아라토성에서 야간 기습공격으로 우에스기군의 퇴로를 차단했다. 하지만 신겐은 시오다성에서 나오지 않고 겐신과의 정면대결을 회피했기 때문에 겐신은 이정도면 되었다라고 판단하고 9월 20일 에치고로 귀환한다. 신겐도 우에스기군이 돌아간 이후 10월 17일에 가이로 돌아갔다.
이 전투의 주무대는 젠코지 평야가 아닌 젠코지 평야 남부의 치쿠마강 일대에서 벌어졌는데 아직 젠코지 평야에는 반 다케다성향의 고쿠진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다만 양측이 결전을 치루지 않고 퇴각한 것은 다케다 입장에선 젠코지 평야로의 진출은 이뤄지지 않았지만 무라카미 가문의 중심지인 하니시나군을 장악하는 성과가 있었고, 우에스기 입장에서는 무라카미 가문의 회복이란 원래 목표는 이루지 못했어도 북시나노의 중소영주들이 급속히 다케다 쪽으로 붙는 것을 막을 수 있었기 때문에 성과를 거둔 셈이었다.
우에스기 겐신은 교토로 올라가 덴노를 알현하고 "사적 치벌의 윤지"를 얻어내는 데 성공했다. 이 칙명은 한마디로 '''우에스기 겐신에게 맞서는 자는 국적이 된다'''라는 것을 인정한 것인데 이는 우에스기가 다케다 가문과 전쟁을 치루는 데 정당성을 부여하는 의미가 있었다. 반면 다케다 신겐은 시나노의 사쿠군, 시모이나군, 키소군을 장악해나갔다.
3.2. 제2차 카와나카지마 전투
1차 카와나카지마 전투가 벌어진 지 2년 뒤인 1555년(텐분 24년), 다케다와 우에스기는 다시 전투를 벌이게 되는데 이때의 전투는 사이강에서 벌어졌다고 해서 사이카와 전투라고 하기도 한다.
1차전투 이후 다케다는 이나군을 장악하고 사가미의 후호조씨 가문[6] 과 스루가의 이마가와 가문과 관계를 개선해 동맹을 맺는 데 성공했다. 사가미와 스루가는 카이의 배후에 있었기 때문에 이들과의 동맹으로 배후를 안정시킴으로써 안심하고 우에스기를 상대하기 위함이었다.
한편으로 우에스기의 유력한 가신인 키타조 타카히로에게 반란을 일으키도록 충동하여 결국 키타조는 반란을 일으키게 된다. 겐신은 이를 진압했지만 키타조의 반란 배후에 다케다가 있음이 밝혀져 양측의 골은 깊어지게 되었다.
이런 가운데 1555년, 젠코지 평야의 유력한 고쿠진이던 쿠리다 가문이 다케다에게 항복하면서 젠코지 평야 남부가 다케다의 영역이 되었다. 이리 되자 위기감을 느낀 우에스기는 1555년 4월, 젠코지 평야의 탈환을 위해 북시나노로 출격해 쿠리다 가문의 아사히 산성으로 쳐들어갔다. 이에 쿠리다는 다케다에 구원병을 요청했고 다케다의 구원병과 쿠리다의 병력 3천이 아사히 산성에서 우에스기에 맞섰다.
겐신은 아사히 산성을 압박하고 북시나노의 거점확보 차원에서 카츠야마 산성을 지었다. 이리 되자 신겐이 직접 병력을 이끌고 카와나카지마로 출격해 겐신군과 대치했다.
7월 19일, 우에스기군이 사이강을 건너 다케다군을 공격했지만 결판이 나지 않았고 이후 200여 일에 걸쳐 양측은 지리한 대치를 이어갔다. 다케다에서는 보급선이 길어져서 군량미 조달에 어려움을 겪었고 우에스기는 내부 장수들간에 동요가 일어나자 겐신은 장수들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문서를 요구했다고 한다.
결국 10월 15일, 이마가와 요시모토가 중재에 나섰다. 양측은 중재에 따라 퇴각했는데 중재의 내용은 다케다가 북시나노의 고쿠진인 스다, 이노우에, 시마즈 가문의 복귀를 인정하고 아사히 산성을 파괴하는 것이었는데 이는 사실상 젠코지 평야를 반으로 나누는 결정이었다. 사이강을 경계로 젠코지 평야의 북쪽을 우에스기가 차지하고 남쪽을 다케다가 차지하는걸로 결론을 내린것이었다.
이후 다케다는 기소군의 기소 가문을 제압해 남시나노를 평정했다.
3.3. 제4차 카와나카지마 전투
1561년에 벌어진 '''일본 역사에 남는 혈전'''. 특별한 부가설명 없이 그냥 '카와나카지마 전투'라고만 하면 일반적으로 이 4차 전투를 일컫는다. 카와나카지마의 하치만바라에서 전투가 벌어졌기 때문에 하치만바라 전투라고도 불린다.
후호조씨의 호조 우지야스와 혈전을 벌이고 우에스기 씨를 계승하는 등 겐신의 힘이 커지자 우지야스는 삼국동맹을 맺은 바 있는 맹우 신겐에게 원군을 요청하고, 신겐은 북시나노로 북상, 겐신의 뒤를 치려고 한다. 물론 이는 겐신에게 중요한 위협이었기 때문에 겐신은 시나노의 신겐 측 중요 거점이었던 카이즈 성을 공략하기 위해 군대를 이끌고 에치고를 출발하고, 양군은 카와나카지마의 하치만바라에서 대치하게 된다.
겐신은 약 13000의 병력을 이끌고 남하를 계속하여 카이즈 성을 바로 공격할 수 있는 사이죠 산에 진을 치는데,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카이즈 성을 공격하지 않고 가만히 전황을 관망하기 시작한다. 이 때문에 북쪽이 본거지인 우에스기 군이 다케다 군보다 더 남쪽에 진지를 구축하게 된다. 게임 등에서 처음 카와나카지마 전투를 접하는 사람들은 남북이 뒤바낀 군의 배치를 보며 의아해하는 부분. 지리한 대치가 이어지자 신겐의 군사 야마모토 간스케는 "딱따구리 전법"을 제안하는데, 겐신의 진을 별동대로 야습하여 겐신을 벌판으로 몰아 내고 기다리고 있던 본대와 협공을 퍼붓는다는 전법이었다[7] .
신겐은 총 병력 2만 중에서 바바 노부후사. 코사카 마사노부등이 이끄는 별동대 12000을 떼어 산을 공격하기 위해 보내고, 본대 8천을 스스로 이끌고 하치만바라에서 대기하는 행동을 취하는데, 어찌된 일인지 '''겐신에게 보기 좋게 역습당했다'''.
겐신은 별동대가 올 것을 예견했는지[8] , 전격적으로 산을 내려와 13000의 군대로 8000의 신겐 본대를 기습해버린다. 새벽 동이 틀 무렵 안개 속에서 "지금쯤 우에스기 군을 몰고 내려오겠지"하고 느긋하게 기다리던 신겐 본대는 소리없이 우에스기의 진이 안개 속에 나타난 것을 보고 기겁하게 되는데... 우에스기 측의 선봉은 카키자키 하루이에로 처음 안개가 걷혔을때 양군은 정면으로 서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우에스기 군이 직진하면 다케다 군의 우측을 비스듬히 찌를 수 있는 배치가 되어있었다고 한다.
우에스기는 차륜진(車懸りの陣쿠루마가카리노 진)으로 각 부대가 시간차 없이 교대로 적을 타격해 쉴새없이 맹공을 퍼붓는 전술을 택하고, 신겐은 학익진으로 안개 속의 적을 급히 맞아들이지만 때는 이미 늦어 신겐의 본진은 다대한 타격을 입는다. 단 한번의 돌격에 신겐의 참모이자 카게무샤로도 유명했던 동생 다케다 덴큐 노부시게는 전사하고[9] 작전을 제안한 본인인 야마모토 간스케는 자신의 실책에 절망해 적진에 뛰어들어 무수한 총상을 입은 채 근처의 산에 올라가 할복, 그리고 기타 수많은 이름 있는 무장이 전사했다. 마침내는 신겐의 본진마저 적의 공격에 노출되어 겐신이 직접 돌격해 칼을 휘둘렀고 신겐이 이를 군바이[10] 로 방어했다는 일화가 유명하다.[11] 여담으로 이 일화의 주인공이 우에스기 겐신이 아닌 겐신의 카게무샤인 아라카와 나가자네라는 설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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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신겐은 생각 외로 잘 버텼고, 적진이 빈 것을 보고 경악해 달려온 바바와 코사카의 1만 2천 별동대가 바로 사이죠 산을 내려와 겐신의 뒤를 찌른다. 전황은 혼란에 빠지고 새벽에 시작된 전투는 오후까지 지속되어 피로 피를 씻는 격전이 벌어진다. 오후에는 결국 신겐과 겐신 모두 분루를 삼키며 하치만바라에서 진을 물렸다. 이때 우에스기 군에서는 아마카스가 전군(殿軍:퇴각시 후미를 맡아 적의 공세를 받아내며 아군을 지키는 부대)를 맡아 질서정연하게 물러서는 모습을 보여 다케다 군을 감탄시키기도 하였다.
3.3.1. 결과
본 전투는 양군 다 엄청난 손해를 입었으며[12] 결국 신겐은 시나노 점령이라는 소기의 목적을 달성했으나, 말 그대로 상처 뿐인 전투가 되고 말았다(참고: 우에스기 켄신 측의 사상자 비율은 72%, 다케다 신겐측의 사상자 비율은 88%). 우에스기의 경우 북시나노에 대한 영향력을 상실하긴 했으나 본인의 영지는 잃지 않았으므로 패배라 하기도 애매. 이 전투는 말 그대로 용호상박의 박빙이었는데, 특히 켄신의 용맹이 드러난 전투라고 할 수 있다. 더불어 신겐 측에서는 고급 장교에 해당하는 여러 중진 하타모토와 다이묘들이 전사했지만 켄신 측에서는 사상자 대부분이 잡병이었기 때문에 인적자원의 손실은 신겐 측이 더 극심했다고 본다.[13]
켄신 측의 여러 무사 집안들에게 카와나카지마 전투 후 내린 감사장[14] 이 해당 일족 구성원의 목숨을 대가로 얻은 값비싼 승리라는 뜻에서 "피로 물든 감사장"으로 전해내려오고 있는데, 학계에서는 위조품으로 취급되고 있다.
후에 히데요시가 카와나카지마에 방문했을 때 인근 마을의 주민들이 카와나카지마 전투 당시의 신겐과 겐신의 뛰어난 군략과 무용 등에 대해 칭찬을 늘어놓자 "바보도 하지 않았을 전쟁이었다." 라고 대꾸를 했는데, 주로 외교나 모략 등으로 아군의 손실을 최대한 줄이는 전략을 선호했던 히데요시의 관점이 드러난 일화라 할 수 있다. 사실 이 시점에서 우에스기 켄신이 굳이 다케다 신겐과 서로 피투성이가 되는 싸움을 벌인 이유는 자존심이나 라이벌 의식이 아니고선 설명하기 힘들다는 평가도 많다. 시나노 지방을 지키고 싶었으면 4차 전투 이후에 다시 군을 모아 공격했어야 했고, 지킬 마음이 없었으면 카이즈성 남쪽까지 내려갈 이유가 없었던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제 우에스기 켄신의 행동은 말그대로 시원하게 한판 붙고는 손을 턴 모습이라 봐도 될 정도.
요충지이긴 하나 여기에만 매달려 10여 년 이상 시간을 낭비한 까닭에 노부나가의 급격한 성장을 견제하지 못하여 결국 신겐, 겐신 양자 모두 지방의 다이묘에 그쳤다는 평이 있는가 하면, 고-소-슨 3국 동맹을 전략의 큰 줄기로 삼았던 다케다 신겐 입장에서는 후 호죠씨의 숙적 우에스기 겐신과의 충돌은 피할 수 없었고 겐신 역시 북 시나노는 본거지 에치고로 통하는 곳으로서 방위를 위해서라도 결코 버릴 수 없는 곳이었기에 양자의 대결은 필연적이었다는 주장도 존재한다.
4. 기타 매체에서
1989년작 초대작 영화 천과 지가 이 전투를 다루고 있다. 얼마나 대작이었는지는 해당 항목 참조.
태합입지전 5에서 4차 카와나카지마 전투 이벤트가 구현되어 있다. 겐신 쪽으로 플레이할 경우 특별할 게 없지만, 신겐 쪽으로는 카드 수집을 위해서라면 놓칠 수 없는 이벤트. 1561년 1월 이후부터 일어나며, 조건은 기본적인 이벤트 참가 무장들이 각 세력에 속해 있을 것에 추가로 겐신과 신겐의 거성의 병력, 군량이 모두 13000 이상일 것. 역사대로 겐신군 13000 vs 신겐군 8000인데 5턴 후에 별동대가 도착하여 신겐군은 2만이 된다. 겐신군은 속전속결로 신겐을 점사하여 끝내면 되고(신겐 본부대의 병력은 2천 정도) 신겐은 풍림화산 쓰고 별동대가 올 때까지 버티면 되는데, 야마모토 간스케와 다케다 노부시게의 주인공 카드를 얻으려면 여기서 져야하니 그냥 신겐 혼자 닥돌하면 된다. 신겐군이 패할 경우 야마모토 간스케와 다케다 노부시게가 전사하며 주인공 카드를 얻는데 이상하게 겐신으로 진행하여 승리할 경우엔 야마모토 간스케와 다케다 노부시게가 안 죽는다.(...)
토탈 워: 쇼군2의 역사적 전투에 들어있다. 우에스기 겐신 진영으로 플레이 할 수 있다. 시작하면 다케다군은 분열된 상황이고 우에스기 군은 한데 모여서 다케다의 본진 앞을 바로 칠 수 있다. 카타나 사무라이와 카타나 기병, 승병들로 별동대가 도착하기 전에 중앙을 돌파하는 것이 포인트. 본래 우에스기 가문에서는 뽑을 수 없는 화승총 승병까지 2부대나 있으므로 잘 활용하자. 다케다 본대가 모랄빵이 터져 패주할 때쯤 별동대가 평원으로 내려와 공격대형으로 정렬하는데 이때 야리 아시가루 창벽진을 중심으로 빠르게 방어진을 펼치고 멈춰서 체력이 회복되길 기다렸다가 별동대의 공격을 받아치면 된다. 아니면 다케다 별동대가 더 다양한 병종이라 야전에서 더 까다로운 만큼 병력을 둘로 나누어 하나는 본대를, 다른 하나는 최대한 빨리 달리게 해 개천을 건너고 있는 별동대를 각개격파해도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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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림화산에서는 몇 가지 해석이 가해졌는데, 우선 1차 전투 직후에는 우에스기 겐신이 군을 이끌고 강을 사이에 두고 다케다가와 대치하다가 겐신이 말을 타고 단기로 강가까지 내려온다. 이에 겐신 가의 장수들이 놀라는데, 우사미 사다미츠만이 겐신 곁으로 내려와 이유를 묻자. 작별의 인사라고 한다. 아마 겐신 특유의 기질을 표현하기 위한 부분인듯.
이외의 2차, 3차는 나레이션으로 전투 장면을 때우다시피했으나 가장 격렬했던 4차에서는 전쟁이 본격화. 전쟁 초반에 겐신이 "인간의 전쟁이라면 우리가 지고, 신의 전쟁이라면 우리가 이긴다"라고 하여 결말을 어느 정도 암시했다.
또한 신겐을 향해 단기로 돌격해서 군바이를 든 신겐과 대결하는 장면을 상당히 포스 있게 그려냈다.[15] 위의 사진이 바로 그 장면. 특히 이 4차 가와나카지마는 사실상 이 드라마의 주인공인 야마모토 간스케가 죽는 전투였기 때문에 더욱 힘이 들어갔으며, 거의 3화에 걸쳐서 진행이 되었다. 종국에는 작전의 실패에 좌절한 간스케가 마지막 순간까지 다케다 가의 앞을 가로막을 겐신을 무리하게 추격하다 결국 죽음에 이르는 것으로써 마무리된다.
코에이 초창기인 1981년에 나온 전략 시뮬레이션 게임으로 동명의 전투 이름을 내건 '카와나카지마 전투'라는 게임이 있는데, '''이 물건이 지금 노부나가의 야망 시리즈의 프로토타입이다.''' 시부사와 코우 35주년 기념 아카이브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스팀에 올라와 있는데, 초창기 버전과 함께 노부나가의 야망 천상기가 그랬듯 리메이크되어 나왔으며 둘 다 즐길 수 있게끔 출시되었다. 다만 작품이 작품인지라 리메이크된 일러스트나 게임 인터페이스가 심히 노부나가의 야망스럽다. 그 후 노부나가의 야망 시리즈에서도 이벤트로 구현되기도 했으며, 노부나가의 야망 대지에서 시나리오를 추가했다.
[1] 고쿠진이라고 한다.[2] 북시나노의 명족인 무라카미 가문과 우에다하라에서 격돌했는데 이때는 신겐이 크게 패했다. 이후 도이시 성을 공략하다가 또 무라카미에게 참패를 당하는데 이를 도이시 쿠즈레(戸石崩れ)라 한다. 양군의 사상자는 무라카미 측이 190명 남짓, 다케다 측은 1200여명 정도였다고 한다. [3] 현재야 오이토선과 치쿠니도로가 개통되어 유일한 루트가 아니지만, 험한 히다 산맥을 넘는 이쪽 길은 과거엔 군대의 이동이 불가능한 산길 수준.[4] 가마쿠라 막부 시기에 장원이나 공령을 관리하기 위해 파견된 관리로 시작하여 오랜세월을 거쳐 그대로 눌러앉은 지배계층에 대한 통칭이며, 또한 막부와 슈고등 외부에 대항하여 독자적인 세를 구축하길 바라는 토착집단을 일컫는 말이기도 하다. 특히 혼란이 극에 달하는 센고쿠 시대 무렵부터는 이들 고쿠진 출신의 다이묘도 여럿 등장한다.[5] 겐신의 고모는 이 지역의 고쿠진 타카나시 마사요리의 부인이었다.[6] 호조씨를 사칭해서 후호조씨라고 한다.[7] 야마모토 간스케가 실존인물임은 의심할 여지가 없으나 그가 어느 정도의 위치에서 어떠한 활약을 했는지는 사실 불명확하고, 카와나카지마 전투 자체가 설화가 많이 섞여 사실과 설화의 경계선이 희미하다. 다만 딱따구리 전법을 쓰기는 했고 겐신에 의해 깨지자 책임을 지기 위해 일선에 있다가 전사했다는 것은 사실로 보인다.[8] 일설에 따르면 다케다 군의 저녁 짓는 연기의 양이 평소보다 많은 것을 본 우에스기 겐신이 야습을 알아차리고 역습을 준비시켰다고 한다.[9] 일설에는 이 8천의 본대를 이끈 것이 노부시게고, 신겐 측이 만이천 별동대를 이끌었다고도 한다[10] 무장의 지휘봉으로 쓰이는 부채[11] 대단히 유명한 일화로, 일본에서도 후대의 창작으로 여겨지고 있지만 카와나카지마에는 현재도 이 일화를 재현한 동상이 서 있다.[12] 양군 모두 사망자가 약 25% 정도에 부상자가 마찬가지 수였다. 무려 '''절반 정도의 병사들이 사라진 것.''' 참고로 대한민국 육군의 교리 상 손실율이 30%만 돼도 전멸로 취급한다.[13] 물론 이게 겐신 측의 손실이 없었다는 걸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전투 이후 얼마 가지 않아 호조 씨와 다시 맞붙게 되는데, 켄신의 그 엄청난 전투력에도 불구하고 고전했다고.[14] 感狀. 단순한 감사장이기도 하지만 논공행상에 주로 사용되었고 주군을 바꾸는 일이 흔하던 무사에게는 공로나 무훈 등의 증명이 되어 과거 이력서 역할을 했다. 도쿠가와 가의 무장 토리이 모토타다는 "나는 평생 주군만 섬기다 귀신이 될 놈인데, 이력서가 무슨 소용이오! 필요 없소!"하고 이 감사장을 거절했다는 얘기도 있을 정도. 그래서 토리이 모토타다는 훗날 '미카와 무사의 귀감'이라 불리며 충신의 대명사가 된다.[15] 이때 신겐은 겐신의 공격을 3번 받아치는데, 이후 부하들이 달려와 겐신이 물러난다. 이후 신겐은 감탄하면서 "봐라, 코마이 나는 내려치는 칼을 3번을 막았으나 군바이에는 7개의 상처가 났다."라며 감탄하면서 "이러한 싸움을 하다니 이것이 에치고의 용신."이라고 평했다. 여담으로 이 부분은 각색이 아니라 해당 지역에서 기록으로 남아있는 부분을 극중에 삽입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