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리이 모토타다
1. 일본 전국시대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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鳥居元忠 [토리이 모토타다/조거원충]
1539년 ~ 1600년
도쿠가와 가의 가신으로 타다요시의 아들.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이마가와 가에 인질로 있을 때부터의 최고참 가신이다. 이에야스를 따라 각지를 전전한 역전의 장수로 이에야스가 다케다 신겐에게 대패한 1572년의 미카타가하라 전투에서는 부상을 당해 죽을 때까지 한쪽 다리를 절게 되었다고 한다.
1585년 도쿠가와에 신종하던 사나다 마사유키가 우에스기 카게카츠에게 붙자 이를 응징하러 도쿠가와군 7천을 끌고 우에다성을 치러가지만 사나다군 2천에게 탈탈 털려서 20% 가량인 1300명의 병력을 잃는다.
1600년 이시다 미츠나리가 이에야스를 치기위해 거병할 것이라 예측되는 상황에서 이에야스는 모토타다에게 후시미성을 맡긴다. 미츠나리가 거병하면 후시미성을 공략할 것이 명백했기에 사실상 희생양으로 선발된 것이지만, 모토타다는 끝까지 후시미성을 사수하겠다고 결의를 보였다. 이때 이에야스와 마지막 술자리를 가지면서 50여년간의 회포를 풀었는데, 이에야스는 그와 헤어지면서 눈물을 흘렸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비정하다는 이미지가 강한 이에야스가 눈물을 보였다는 몇 안 되는 기록 중 하나.
모토타다에게 주어진 병력은 1800명이었는데, 미츠나리 거병 직후 우키타 히데이에등이 4만명으로 포위했다.[1] 후시미성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지은 성으로 견고해서 20배가 넘는 병력으로 들이쳐도 쉽게 함락되지 않았지만, 결국 성은 함락되었고, 모토타다는 자결하지 않고[2] 끝까지 싸우다 스즈키 시게토모의 손에 죽었다.
생전 이에야스가 자신에게 표창장을 주려 하자 표창장은 다른 다이묘에게 등용될 때나 필요할 뿐 나에게는 전혀 필요 없다 말할 정도로 곧은 충절을 가진 인물로 훗날 미카와 무사의 귀감이라 불리게 된다. 정확히는 '간죠(感狀)'라고 해서 이건 단순히 오늘날의 표창장 정도의 역할만 한게 아니라 전국시대의 무사들은 이것을 일종의 경력증명서로 삼아서 녹봉을 더 많이 받을 수 있는 가문으로 이리저리 가문을 옮겨다녔다.[3] 흔히 있던 일이라서 당시에는 주군을 바꾸거나 한 번에 두 명의 주군을 함께 섬기는[4] 등의 행동이 딱히 의리 없는 행동으로 인식되지 않았다. 그게 일상적이었던 시기였기 때문에 모토타다처럼 한 가문에서 오래 근속한 무사는 '충의'의 상징이 될 만했다. 야마나카 시카노스케가 칭송받았던 이유와 비슷하다고 볼 수 있다.
모토타다 사후, 토리이 가문은 요절한 장남 대신 차남 토리이 타다마사가 가독을 이었고, 아버지의 모토타다의 전공 덕분이었는지 시모우사 야나기번 4만석, 무츠 이와키타이라번 12만석, 데와 야마가타번 24만석으로 차례차례 승진했다. 그러나 손자 때 부터 뭔가 일이 꼬여 가이에키(영지몰수)를 당하고, 여차저차 해서 다시 시모츠케 미부 번을 받아 번은 막말까지 이어진다. 하지만 이 미부 번의 고쿠다카는 24만석에 비하면 초라한 3만석. 그나마 이것도 모토타다 덕분에 막부로부터 다시 받은 거였다.[5]
2. 대중 매체에서
2.1. 에이지 오브 엠파이어3: 아시아 왕조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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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른쪽의 뿔 투구를 쓴 장수. 왼쪽은 사쿠마 키치로.
'''Daimyo Torii Mototada'''[6]
성우는 손종환. 아시아 왕조의 일본 캠페인에서도 첫 미션인 오사카 성 점령부터 도쿠가와 이에야스 휘하의 장군으로 등장하며, 가상의 인물인 미숙한 청년 장군 사쿠마 키치로에게 조언을 하는 등의 역할을 보였으나, 역사처럼 후시미 성(伏見城)에서 열세의 병력으로 농성하다 생을 마감한다.
다만 죽음에 관해서는 서사적인 장엄함을 더하기 위해서인지 할복 자살로 표현하였는데, 실제로는 적병을 하나라도 더 처치하기 위해 할복을 거부하고 전사하였다 한다.[7]
2.2. 바사라의 토리이 모토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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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우는 호리카와 진. 다테 마사무네 스테이지의 중간보스로, 수송기를 타고 등장. 쉬운 편이나, 조심하지 않으면 다소 어려운 상대.
2.3. 노부나가의 야망
능력치는 그냥저냥한 B급이지만 의리 하나는 97로 상당히 높다.
2.4. 사무라이 디퍼 쿄우
주역급 인물인 적호(베니토라)의 회상에서 가끔 등장한다. 여기서는 백발의 수염이 없는 무사. 가끔 적호가 '토리이 아저씨'라고 부르는 사람이 바로 이 사람이다. 작중에서 적호가 굉장히 따랐던 인물로 묘사되며, 역사대로 세키가하라 전투 전에 후시미 성에서 전사한 상태. 아버지 이에야스가 토리이 모토타다의 죽음에 대해 냉정한 태도를 유지한 데 실망한 것도 부자 사이가 나쁜 원인 중 하나로 묘사된다.
[1] 시마즈 가의 문서에선 이 전투 때 도와주러 온 시마즈 요시히로를 받아주지 않아 시마즈가 서군에 가담했다(...)라고 서술되어 있다. 2000년 사극 아오이 도쿠가와 삼대에도 동일하게 묘사된다.[2] 성이 함락될 것 같으면 대장은 적의 손이 아니라 스스로의 손으로 자살하는게 클리셰였다.[3] 오늘날 직장생활 때 신입사원이 작은 회사에 입사해서 경력을 쌓고 그 회사 근무 실적을 경력 삼아서 연봉을 더 많이 주는 회사로 이직하는 것과 비슷했다고 생각하면 된다.[4] 예를 들면 아케치 미츠히데가 아시카가 요시아키와 오다 노부나가를 동시에 섬겼다가 요시아키를 토벌하는데 앞장선다.[5] 도쿠가와 막부는 후다이에게 전혀 친절하지 않았다. 이이 나오마사의 히코네번을 제외하면 대부분 개역(가이에키)당했을 정도.[6] 한국판에서의 명칭은 '''토리이 모토타다 영주'''.[7] 한국의 선죽교 전설과 비슷하게 모토타다가 죽은 후시미 성에는 그와 병사들이 흩뿌린 피가 말라붙은 '''혈천정(血天井)'''이 남아 '''있었다.''' 슬프게도 현재의 후시미 성은 당대의 것과는 다른 건축물로, 정식 명칭은 후시미 모모야마 성(伏見桃山城)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