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이코스루 소랍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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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
영국의 피아니스트, 음악 평론가 겸 작곡가.
2. 생애
1892년 영국 에섹스주 칭포드(현재는 대런던의 일부)에서 출생했다. 인도계 파르시(인도의 조로아스터교도)와 에스파냐, 시칠리아 사람의 피가 몸속에 흐르고 있었고 원래 이름은 "레온 더들리 소랍지"였지만 자신이 파르시임을 드러내기 위해 "카이코스루 샤푸르지 소랍지"로 개명했다.
독학으로 피아노를 공부했고 20세기 초의 위대한 피아니스트 페루초 부소니가 그의 재능을 알아보고 음악계에 데뷔시켜 본격적으로 피아니스트로서의 경력을 쌓아나갔다. 고도프스키, 시마노프스키, 딜리어스 등의 독특한 스타일을 가진 후기 낭만파~근현대 음악가들의 영향을 받았고 다른 한편으론 자신의 혈통답게 인도 탄트라 음악을 연구하기도 하면서 자신만의 경지를 개척하기 시작했다. 또한 친구 피터 워록의 도움으로 음악평론가로도 활동했다.
그러나 1930년대에 여러 갈등으로 인해 결국 자신의 작품들을 출판하는 것을 포기하고 다른 사람이 자신의 작품을 공개 석상에서 연주하는 것도 허락하지 않아서 이후 수십년간 소랍지의 작품들은 공식 연주회에선 연주되지 못했다.
1930년에 작곡한 피아노 독주곡 "Opus Clavicembalisticum"은 그의 독창성이 본격적으로 드러나는 곡으로 그의 작품 가운데 가장 유명한 곡이 되었는데, 전곡 연주 시간이 무려 4시간이 넘는데다가 연주 난이도도 극악을 달리기 때문에 연주를 도전하는 피아니스트들에게 악몽을 선사하는 작품이다. 하지만 소랍지의 전체 작품들을 놓고보면 이 오푸스 클라비쳄발리스티쿰은 2기로 막 접어들기 시작할 때 작곡된 작품이기 때문에 이후의 본격적인 2기 작품들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컬트성이 약한 무난한 작품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이후 2기에 해당되는 1940년대에 소랍지는 엄청나게 긴 연주 시간과 극단적으로 어려운 난이도를 가진 작품들을 써내려갔다. 1940년부터 1944년까지 작곡된 "100개의 초절기교 연습곡"은 전곡을 쉬지 않고 연달아 연주할 경우 7시간 15분에 달하는 연주 시간을 가진 대곡이며, 1948년부터 1949년에 걸쳐 작곡된 "'분노의 날' 주제에 의한 세쿠엔티아 시클리카"는 8시간이 넘는 곡으로 소랍지의 개성을 가장 잘 드러낸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계속 창작 활동을 해나갔고 자신의 작품을 본인이 직접 연주하여 많은 레코딩을 남기기도 했다. 그러다가 1970년대에 이르러서야 다른 사람이 자신의 작품을 연주하는 것에 대해 마이클 하버만과 욘티 솔로몬에게 허락해 세간에 화제를 모았다.
마이클 하버만은 소랍지의 피아노 작품들 중 연주가 비교적 용이한 소품들을 레코딩했고, 욘티 솔로몬은 1977년 "피아노 소나타 3번" 등의 초대곡들을 초연해 화제를 모았다.
1970년대에는 "교향적 녹턴", "피아노 교향곡 제6번"[1] 등 1940년대에 작곡한 곡들만큼은 아니지만 매우 방대한 분량을 가진 작품들을 작곡했다.
1982년엔 피아니스트 존 오그돈과 제프리 더글러스 맷지의 간곡한 부탁과 열의에 두 피아니스트에게 자신의 작품 "Opus Clavicembalisticum"의 연주를 허락해 네덜란드 유트레히트에서 맷지의 연주로 "Opus Clavicembalisticum"이 공개 연주되었고 존 오그돈은 런던에서의 연주를 맡았다. 이때 소랍지의 나이가 이미 90이 넘었으나 말과 행동이 느리지 않았다고 한다.
오그돈의 런던 공연 이후 소랍지는 사망했다. 오그돈은 이후 소랍지의 몇 개 작품을 녹음하여 남기기도 하였다.
3. 음악 성향
소랍지는 기본적으로 피아니스트였기 때문에 그의 작품 대부분은 피아노 독주곡 또는 피아노가 포함된 작품이다. 소랍지의 피아노곡들의 전반적인 특징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 방대한 분량을 가진 곡이 많다. 소품 수준의 짧은 곡도 여럿 있지만 대부분은 기본 15분이 넘어가고 가장 유명한 "Opus Clavicembalisticum"은 전곡 연주에 4시간 45분 가량이 걸린다. 하지만 이 정도 연주시간도 후기작에 비하면 무난한 수준인데, 교향적 변주곡(KSS59)이나 세퀜티아 시클리카(KSS71)같은 곡은 연주시간이 8시간을 훌쩍 넘어간다. 단일 작품 중 이보다 러닝타임이 긴 곡은 아방가르드 음악 중에서도 극단적인 실험성을 추구하는 작곡가들의 작품들 중에서나 간간히 보이는 수준이다.[2] 소랍지는 이렇게 엄청난 분량을 가진 곡들을 작곡하기 위해 반복적 구조(파사칼리아 등)를 활용했으므로, 활용한 작품의 경우에는 최소한의 반복 구조가 있으나 그렇지 않은 작품들은 그 긴 러닝타임 내내 반복되는 부분이 거의 없이 시종일관 불규칙한 진행이 이어지기 때문에 연주자가 곡을 암보할 엄두를 못 내게 만든다.
- 독자적인 화성 체계를 구축했다. 조성적인 요소와 무조성적인 요소를 복잡한 구조로 섞어 놓은 것이 돋보이는데, 소랍지와 마찬가지로 독자적인 화성 체계를 사용한 스크랴빈의 후기 작품처럼 악보 전체에 임시표가 떡칠되어 있어서 연주자가 악보를 읽기 상당히 힘들게 만든다. 더욱이 톤 클러스터가 부분적으로만 끼어 있는 화음, 관절로 검은 건반을 눌러야 되는 운지법 등 건반 누르기도 난감한 구조의 화음이 빈번하며, 속주 음형들도 불규칙하고 손가락 굴리기 불편한 음형이 매우 많다.
- 대위법적인 경향이 두드러진다. 그의 주요 작품에는 대부분 푸가나 푸가 스타일의 곡이 포함되어 있으며 푸가가 아니라도 다성부 작법으로 곡이 구성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 특히 고도프스키의 다성부 작법에 많은 영향을 받아서 전반적인 곡 구성이 매우 복잡한데, 소랍지의 푸가는 통상적으로 작곡되는 2~4성부를 넘어 종종 6성부나 7성부까지 확장되기도 하며 여기에 장식음과 화성까지 추가되기 때문에 음악적으로나 연주적으로나 통상적인 피아노곡과는 차원이 다른 난이도를 구현하고 있다. 이 다양한 성부 구성을 표기하기 위해 서너 줄 보표는 기본이고, 몇몇 작품에서는 일곱 줄 보표까지[3] 사용한 적이 있다.
- 장식음을 빈번하게 사용했다. 그냥 성부들을 꾸역꾸역 맞춰가며 연주하기도 벅찬데 장식음이 한 성부를 통째로 차지하는 경우도 많아서 주 선율과의 박자를 맞추기도 까다로워지며, 장식음들 자체도 연주하기 난감한 구조의 음형이 많다.
- 복잡하게 얽혀 있는 폴리리듬을 즐겨 사용했다. 폴리리듬은 성부간 박자와 속도를 다르게 진행하는 수법을 말하는데, 잇단음표 안에 또 잇단음표가 들어있는 구조는 기본, n1:n2 잇단음표[4] 등의 듣도 보도 못한 난해한 박자 구조가 밥 먹듯이 나온다.
소랍지 본인의 의사로 인해 곡들이 오랫동안 세상에 공개되지 않았고, 악보들 역시 초기작 몇 곡을 제외하면 소랍지 생전에 정식 출판이 되지 않아서 대부분의 곡들은 가독성이 떨어지는 소랍지의 자필악보만이 남아 있는 상황.[5] 기본적으로 그의 음악 성향이 워낙 독자적이고 생소한 탓에 아직까지 대중적인 인지도는 낮은 편이며 그의 음악에 관심을 가지는 연주자도 손에 꼽을 정도로 적다. 다만 끝모를 난해한 구성과 독자적인 음악성을 갖고 있는 소랍지의 음악에 매료된 연주자와 음악팬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기 때문에 아직 발표되지 않은 그의 음악들이 지속적으로 발굴될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소랍지의 작품들에 붙는 작품 번호는 KSS로, 이는 카이코스루 샤푸르지 소랍지('''K'''aikhosru '''S'''hapurji '''S'''orabji)의 약자이다.
4. 작품 목록
5. 기타
- 소랍지는 숫자의 상징성을 중요하게 여겼기 때문에 그의 여러 작품에서 제곱수, 대칭수와 같은 수가 사용되었다. Opus Clavicembalisticum의 9c악장 파사칼리아는 주제와 81변주로 되어 있고, 교향적 변주곡의 자필보는 484페이지로 되어있는 것 등이 예시이다. 이외에도 반복된 수(피아노 교향곡 0번의 자필보 - 333페이지), 연속하는 소수의 곱(Messa alta sinfonica의 자필보 - 1001페이지)도 사용하였다.
- 소랍지의 지인인 Alistair Hinton이 소랍지에 관한 정보, 작품 목록 등을 저장해 놓은 The Sorabji Archive를 만들었다. 이곳에서 그가 작곡한 곡들의 악보를 구매할 수도 있다.
- 소랍지와 관련된 또 다른 사이트로 Sorabji Resource Site가 있다. 이곳에서는 소랍지와 관련된 여러 가지 정보와 통계[6] 를 볼 수 있다.
- 전술한 사이트에서 소랍지의 일생과 작품을 하나의 책으로 정리해 놓은 600페이지 가량의 Opus Sorabjianum을 무료로 다운로드받을 수 있다.
[1] 총 7악장으로 구성되어있는 4시간 45분 길이의 독주곡으로, 특이하게도 4악장에 “알캉처럼” 연주하라는 지시가 쓰여 있다.[2] 그나마 4개의 시리즈 오페라를 단일 작품으로 묶었을 때 바그너의 니벨룽의 반지가 완곡하는 데 14~15시간이 걸린다.[3] 이곳에서 볼 수 있듯, 피아노 교향곡 0번과, Opus Archimagicum과 같은 작품이 예시이다.[4] 이때 n1, n2는 자연수. 예를 들자면, 32분음표에 35:24 표시가 되어 있다면 32분음표 24개를 연주하는 길이 동안 35개를 연주하라는 뜻이다.[5] 그러나 현재는 몇몇 사람들의 도움으로, 악보 제작 프로그램으로 만들어진 악보가 후술할 The Sorabji Archive에서 판매되고 있다.[6] ex. 푸가가 포함된 그의 작품, Messa alta sinfonica의 구조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