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오폴드 고도프스키
1. 개요
고도프스키가 연주한 쇼팽의 장송행진곡.
고도프스키가 작곡한 Alt Wien.(보리스 베레좁스키 연주.)
레오폴드 고도프스키(Leopold Godowsky[1] , 1870년 2월 10일 ~ 1938년 11월 21일)는 폴란드계 미국인 작곡가이자 피아니스트이다. 별명은 피아니스트 중의 피아니스트(The Pianist of Pianists)[2]
2. 생애
리투아니아에서 유대계 부모 사이에서 태어났다. 태어난 지 얼마 안 돼 아버지를 일찍 여의었기 때문에[3] 그의 홀어머니와, 어머니와 친했던 파시노츠크(Passinock) 부부 셋 밑에서 자랐다. 파시노츠크 부부는 자녀가 없었고 남편 루이스(Louis)는 피아노 악기점을 운영하는 아마추어 바이올리니스트였는데, 고도프스키가 어릴 때부터 음악에 천부적인 재능이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바이올린을 가르쳤으나[4] , 사실 그는 바이올린보다는 피아노에 관심을 더 보였다.[5] 5살엔 이미 피아노와 바이올린을 능숙하게 연주했고 이 때부터 '''작곡을 시작'''했으며 '''9살 때 첫 연주회'''를 가지면서 연주 여행을 다녔다.[6] 이 때까지 루이스는 본인이 음악 업계에 발을 들이고 있다는 것 때문인지 고도프스키에게 피아노 레슨이나 정규 음악 교육의 기회를 별로 주지 않았다.[7] 그 결과 고도프스키는 '''대부분[8][9] 독학에 의존할 수 밖에 없었고 그렇게 공연으로 이름을 알리는 데에 성공했다.'''
사실 연주 여행 도중 쾨니히스베르크의 은행가 파인베르크(Feinberg)의 눈에 들어 베를린의 왕립음악대학(Königliche Hochschule für Musik; 현 베를린 예술대학교) 입학 권유를 받았고 파인베르크로부터 학비를 지원 받으면서 다녔었는데 위 자서전에 언급된 3개월이 바로 이 시기이다. 여기서 고도프스키는 모리츠 모슈코프스키, 요제프 요아힘(Joseph Joachim), 볼데마르 바길(Woldemar Bargiel) 등과 함께 호흡을 맞추며 에른스트 루도르프(Ernst Rudorff) 밑에서 교육을 받았다.I would be very glad could I have stated with truth that I was a pupil of [Franz] Liszt or any other great man, but I was not. I have not had three months lessons in my life. I have been told I was playing the piano before I was two. I think, however, an imaginative family perpetrated this story. I cannot vouch for the truth one way or the other. I have had some extraordinary experience, and this may have happened. I do not remember whether anybody taught me the value and meaning of notes and the use of the fingers of the keyboard, or whether I acquired my knowledge in an autodidactic way, but I do remember that I had no help from my fifth year on.
내가 정말 리스트나 그 밖의 위대한 음악가의 제자라고 말할 수 있었다면 참 좋았을 텐데 그렇지 못했다. 내 인생에 있었던 모든 레슨은 3개월을 넘기지 못했다. 나는 내가 만 2살이 되기 전부터 피아노를 쳤다는 얘기를 들어왔으나, 내 생각엔 상상력 풍부한 가족들이 지어낸 이야기인 것 같다. 그걸 어떻게든 증명할 방법이 없기도 하고. 사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그런 이야기로 보일법한 기이한 경험을 몇 번 겪긴 했다. 나에겐 음표의 의미와 건반을 누르는 손가락의 사용법을 가르쳐줬던 사람이 있었는지, 아니면 그것을 독학으로 터득했는지에 대한 기억이 없다. 그러나 확실한 건 만 5살부터 주변의 도움이 필요치 않았다는 점이다.
- 자서전 '회고(''Retrospect'')'에서 발췌
1884년까지 베를린에 머물러 있다가 가족과 함께 미국으로 이주하여 공연을 계속했으며, 1886년 리스트에게 가르침을 받고자 바이마르로 향하나 프랑스에 도착하기 며칠 전 리스트가 사망하여 파리의 생상스로 방향을 바꾼다. 이후 생상스와 친하게 지내며 차이콥스키와의 교류를 시작으로 샤를 구노(Charles Gounod), 쥘 마스네(Jules Massenet), 앙브루아즈 토마(Ambroise Thomas), 가브리엘 포레 등 당대 유명한 프랑스 음악가들과 친분을 쌓았다. 그러던 와중 생상스는 갑자기 고도프스키에게 양자로 들어올 것을 권유[10] 했는데 고도프스키가 이를 거절[11] 하여 둘 사이가 크게 틀어졌다.
1904년에서 1914년까지 비엔나의 음악예술대학교(Akademie der Tonkunst)의 교수로 재직했고, 제1차 세계대전 발발 이후 미국에 정착했다. 1915년에 미주리주 세인트 루이스에 있는 예술출판협회(Art Publication Society)에서 발행하는 피아노 관련 출판물의 편집장을 역임했는데, 페달링 설명, 프레이징, 교수법을 비롯하여 기본적인 연습법, 편곡법 등 교육과 관련된 출판물을 담당했다. 이러한 간행물들은 음악실기학교(conservatory)에 굳이 들어가지 않아도 고도프스키 자신처럼 혼자서 공부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자 하는 목적을 띠고 있으며, 그 예로 핑거링이 매우 자세하게 표기[12] 되어있는 것이 특징이다.
1930년 런던에서 음반을 녹음하던 도중 뇌일혈로 쓰러졌으며, 이 후유증으로 오른손이 마비되어 쓸 수 없게 되었는데, 설상가상으로 2년 뒤인 1932년에 아들 고든 고도프스키(Gordon Godowsky)가 자살하였고, 그 후 1년 뒤 아내마저 심장발작으로 사망하게 되면서 그 충격으로 공식적인 공연에서는 완전히 손을 떼게 되었다.[13] 이런 예상치 못한 악재가 겹치게 되면서 당시 추진 중이던 '음악 및 음악가의 세계 회의(World Synod of Music and Musicians)'와 '음악 및 음악가의 국제 의회(International Council of Music and Musicians)'의 건립이 모두 무산되었고, 1938년 위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3. 작곡가 및 연주자로서
20세기 가장 뛰어난 피아니스트 중 한 명인 전성기가 막 시작될 무렵의 젊은 아르투르 루빈스타인조차 “내가 고도프스키의 기교를 모방하려면 5백년이 걸려도 모자를 것이다”라고 고도프스키의 실력을 인정했다. [14]
너무나 복잡하고 자세하게 수식된데다가 내성부가 너무 많이 교차되어 있어 당시 고도프스키 말고는 아무도 그 곡을 연주할 수가 없었다는 이야기가 떠돌기도 했다. (실제로는 연주하는 사람들이 많지는 않아도 생전부터 꾸준히 있었다). 때문에 그의 음악의 대부분은 보편적인 레퍼토리에서 사라졌지만 테크닉이 굉장히 좋은 피아니스트들이 때때로 '박쥐'나 '예술가의 생애'에 쓴 패러프레이즈를 연주해 보려고 시도하기도 한다.
미국의 평론가 해롤드 숀버그[15] 는 “고도프스키가 미래 세대의 피아니스트들을 위한 작곡을 한다고 말했는데, 그렇다면 아직 그 세대는 오지 않은 것이다”라고 그의 저서에서 기술했다. 21세기 초반에 들어선 현재, 그 세대는 기교가 매우 뛰어난 마르크 앙드레 아믈랭이 선두에 서서 열었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그가 가장 정교하게 쓴 곡들이 시리즈로 있는데, 쇼팽 에튀드에 의한 연습곡집이 그 중 하나다. 이 곡들은 엄청나게 힘든 연습곡으로 '''프란츠 리스트 이후로 등장한 상상하지 못했던 고난도 테크닉으로 가득 찬 곡[16][17] '''으로 피아노 테크닉을 올려 놓았다. 애초에 2019년 기준 상업용 음반으로 전곡을 발매한 피아니스트는 아믈랭 포함 단 세 명뿐이다 (발췌 연주, 비공식 음반 및 영상 제외). Op. 25-7을 제외한 모든 곡에 최소한 한 버전을 썼으며 흑건의 경우 7개의 버전을 자랑한다.
고도프스키는 '''왼손만을 위한 곡'''[18] 도 상당수 썼다. 쇼팽의 연습곡 Op. 10-12 (혁명), 10-4, 흑건, Op. 25-9와 25-12 등이 모두 왼손 하나로 클리어되며, 그 수도 상당하여, 쇼팽 연습곡에 의한 연습곡집 53곡 중 22곡이 왼손만을 위한 곡이다.
쇼팽의 에튀드를 편곡한 연습곡들은 David Stanhope라는 피아니스트가 간단한 해설과 함께 두 곡을 비교할 수 있도록 직접 연주한 영상을 업로드 해놓은 것이 있다. 참고
또 G♭ Major로 된 에튀드 2곡,'나비'와 '흑건'을 '농담'이라는 제목으로 하나로 합치기도 했다. 아믈랭에 의하면, 3개의 에튀드를 대위적으로 융합한 연습곡이 계획상으로는 만들어질 예정이었으나 소실되었다고 한다.[19] 구체적으로는 쇼팽의 모든 에튀드 중 가 단조(A Minor)인 10-2, 25-4, 25-11을 '''대위적으로 합체'''한 곡이며, 아믈랭이 이를 재현했다.[20] 연주 영상[21]
본인의 말..."26곡의 쇼팽 에튀드에 기초한 53곡의 연습곡은 다양한 목적이 있습니다.
피아노 연주의 기계적, 기교적, 음악적인 가능성을 향상시키는 데 목적을 두고 있는 것입니다.
다성음악적이고, 복리듬적이며, 복다이나믹적인 작품을 다루게 할 뿐만 아니라
피아노 음색에 있어서도 다양성의 가능성을 넓히는 데 그 목적이 있습니다."...
하나의 에튀드를 다른 에튀드와 결부시키는 다성음악적 재주, 피아노 테크닉이 전부 한결같이 독창적인 점, 다양한 음색을 활용할 수 있는 비범함이야 말로 고도프스키의 천재성의 증명이다.
고도프스키의 패러프레이즈들은 피아노가 무엇인지를 말해 준다. 그리고 낭만 다성음악의 치밀함이 갖고 있는 논리성의 정점을 이루고 있다.
프란츠 리스트와 프레데릭 쇼팽 이래로 피아노의 악기로서의 특색을 그렇게 잘 살려 쓴 곡은 없었다. 그리고 그는 그의 패러프레이즈 곡들이 끔찍하게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화려한 묘기(기교)를 과시하는 곡으로 연주되는 것을 원치 않았다.[22] 아믈랭 등장 이전에는, 이 패러프레이즈 곡들이 20세기에 들어서자 '미학상의 획기적인 전환이 일어나지 않는 한, 지금으로부터 한 세대 이후에는 완전히 잊힐 상태'에 처해 있었다. 그러나, 아믈랭의 등장으로 다행히 다시 고도프스키의 수많은 작품들이 알려지기 시작했다.
-이상 해롤드 숀버그의 '위대한 피아니스트'에서 인용
4. 교육자로서
그 자신이 독학가였던 만큼 피아노 앞에 앉아 혼자 연구하면서 터득한 것을 피아노 교육에 적극 도입했던 걸로 잘 알려져 있다. 테레사 카레뇨(Teresa Carreño)와 더불어 타건 시에 단순한 근력을 이용하기보다는 중량-이완(frei Gewichtkeit, Gewichtsspiel und vollständige Freiheit[23] ) 원리를 이용할 것을 최초로 널리 알렸는데, 오늘날 피아노 테크닉의 기본이 되는 릴랙스에 해당하는 개념이다.
리흐테르, 길렐스 등을 가르쳤던 20세기 피아노 교사 네이가우스(Neuhaus)에 의하면, 고도프스키가 비엔나 음악예술대학교에서 교편을 잡았을 때 당시 레슨비가 가장 비싼 걸로도 유명했음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피아니스트들이 그의 비르투오소 테크닉을 듣기 위해 각지에서 몰려들었는데, 중량-이완 원리를 제외하고 테크닉 그 자체에 대해서는 거의 얘기를 않았으며 음악성 자체에 초점을 맞춰 손가락의 민첩함보다는 정확도를 중요시했다고 한다.
5. 작품 목록
5.1. 관현악곡
- 12개의 인상중 12곡 '빈' (12 Impressions no.12: Viennese)
- No. 11 옛 빈 - "트리아콘타메론" 중에서 (No. 11 Alt Wien - from Triakontameron)
5.2. 실내악곡
- 피아노연탄을 위한 미니어처 (Miniatures (46) for Piano 4 hands)
5.3. 독주곡
- "왈츠마스크" 모음곡 ("Walzermasken" suite)
- "트리아콘타메론" 모음곡 ("Triakontameron" suite)
- '박쥐'에 의한 연주회용 파라프레이즈 (Concert paraphrase on 'Die Fledermaus')
- 18세기의 아리아 (Airs of the Eighteenth Century)
- J. 슈트라우스 II의 "술과 여자와 노래" 주제에 의한 교향적 변용 (Symphonische Metamorphosen Johann Strauss’scher Themen "Wein, Weib und Gesang")
- J. 슈트라우스 II의 "예술가의 생애" 주제에 의한 교향적 변용 (Symphonische Metamorphosen Johann Strauss’scher Themen "Kunstlerleben")
- R. 슈트라우스 세레나데 편곡 (R. Strauss Ständchen (No.2) from 6 Lieder, Op.17 — concert arrangement for solo piano (1922))
- 르네상스 2권 (Renaissance, book II)
- 마지막 왈츠 (Die letzte Walzer (with Oscar Straus))
- 박쥐 주제에 의한 교향적 변용 (Symphonic Metamorphosis on Themes from Die Fledermaus)
- 비제 아를르의 여인 모음곡 1번 중 아다지에토 편곡 (Bizet Adagietto (No.3) from L'Arlésienne Suite No.1 — concert arrangement for solo piano (1927))
- 생상스의 동물의 사육제 中 백조 (Le cygne (from Le carnaval des animaux))[24]
- 쇼팽의 에튀드에 대한 연습곡(Studies on Chopin's Études)
- 슈베르트 가곡에 대한 12개의 피아노 편곡 (Schubert Song Transcriptions (12) for Piano)
- 슈베르트의 로자문데 중 발레 음악 편곡 (Schubert Ballett (No.9) from Rosamunde, D.797 — concert arrangement for solo piano (1922))
- 왼손을 위한 엘레지 B단조 (Elegy in B minor, for the left hand (1929))
- 자바 모음곡 (1925) (Java Suite (1925))
- 토카타 op 13 (Toccata for Piano, Op. 13)
- 파사칼리아 (Passacaglia for piano)[25]
- 폴로네이즈 C장조 (Polonaise for Piano in C major)
- 피아노 소나타 (Piano Sonata in E minor)
- 피아노를 위한 2개의 왈츠 시 (Waltz Poems (2) for Piano)
- 피아노를 위한 3개의 소품 op 12 (Pieces (3) for Piano, Op. 12)
- 피아노를 위한 3개의 소품 op 14 (Pieces (3) for Piano, Op. 14)
- 피아노를 위한 3개의 소품 op 15 (Pieces (3) for Piano, Op. 15)
- 피아노를 위한 4개의 시 (Poems (4) for Piano)
6. 사족
작품목록에서 느꼈겠지만 상당수의 작품이 편곡들이다.
혹시라도 위의 곡들을 연주할 생각이 있으면 일찌감치 접는 것이 좋다. 아마추어 연주자에게는 한두 곡을 제외하고는 넘사벽이고, 프로에게도 힘들다. 보리스 베레조프스키가 이분의 쇼팽 에튀드에 대한 연습곡집 중 일부를 연주했다. '추격', '혁명' 왼손으로 편곡한 곡들을 주로 연주하였다. 마르크 앙드레 아믈랭은 고도프스키 음반을 발매한 피아니스트 중 가장 유명하며, 2018년 기준 쇼팽-고도프스키 연습곡집 전곡을 음반으로 낸 3인방 중 한 명이다.[26][27] 워낙에 넘사벽인 테크닉 덕분에 연주자가 그리 많지는 않다. 이 문서를 보고 있으며 피아노 실력이 뛰어나다고 자부하면 쉬운 곡부터 찾아서 시작해보자.
7. 여담
고도프스키는 음악 외에도 영화, 과학 등 다방면에 관심을 보였고 특히 찰리 채플린, '''알베르트 아인슈타인'''(!)과도 매우 친했다.[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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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고도프스키] (중)[아인슈타인] (우)[쇤베르크]
한 때 호로비츠가 고도프스키의 '파사칼리아'를 보고 '희망이 없다, 손 6개가 필요하다.'[29] 라는 '''농담'''을 한 사례가 있다.[30] 그리고 이게 치프라 빠들이 호로비츠 빠들을 깔때 쓸 좋은 구실이 되었다(...). 같은 논리라면 요제프 호프만이 라흐마니노프의 3번 협주곡을[31] 정말 실력이 안돼서 시도안했다고 하는거나 마찬가지다. 다른 피아니스트들이 파사칼리아를 녹음한 사례가 버젓이 존재하는데 '''최고의 피아니스트가''' 귀찮아하면 귀찮아했지 정말로 능력밖이어서 안했다고 단정짓는 것은 호로비츠 항목에 서술 되어 있듯이 그저 무지의 산물이다.
이에 대해선 유튜브에 아믈랭이 쓴 말을 번역해 놓은 블로거가 있다. 일독을 추천. 링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