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 미하엘 치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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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를 미하엘 치러 Karl Michael Ziehrer. 1843.05.02~1922.11.14
오스트리아의 경음악/오페레타 작곡가이자 군악대장. 빈 사교계에서 요한 슈트라우스 2세를 비롯한 '슈트라우스 형제들' 의 강력한 라이벌로 활동한 인물이다.
빈에서 태어났고, 음악이론가 지몬 제히터에게 배운 뒤 10대 후반에 무도음악계에 뛰어들어 왈츠와 폴카 등의 춤곡을 쓰기 시작했다. 우연한 기회에 빈의 유력 음악출판업자인 칼 하슬링어에게 발탁되었고, 그의 출판사와 전속 계약을 체결했다.
그러나 슈트라우스 형제들과 달리 군악대장으로 본격적인 명성을 얻기 시작했고, 1870년대 중반에는 자신이 편집장을 맡아 '독일 음악신문' 이라는 음악 잡지를 출간하기도 했다. 비슷한 시기에 하슬링어에서 되블링어로 출판사를 옮겼고, 오스트리아 뿐 아니라 폴란드나 독일 등 국외 순회 공연을 개시해 호평을 받았다.
1885년에는 오스트리아 황제로부터 군악 발전에 기여한 공로로 '도이치마이스터(Deutschmeister)' 라는 군악대장 최고의 명예 칭호를 하사받았고, 1893년에는 시카고 세계 박람회의 초빙으로 미국 순회 공연을 개최하는 등 최전성기를 누렸다. 요한 슈트라우스 2세가 타계한 뒤에는 오페레타 영역에서도 성공했고, 후배인 프란츠 레하르 등과 빈 오페레타 제2의 전성기를 구가했다.
1909년에는 무도음악가로서 최고의 직책인 황실 궁정무도회 감독에 임명되었으나, 제1차 세계대전의 패전과 함께 합스부르크 제정 체제가 무너지면서 실직하고 말았다. 대전 중에도 향락 산업의 여러 가지 제약 때문에 일거리를 계속 잃었고, 그 동안 쌓아온 명성도 흐지부지해져 버렸다. 1922년에 극심한 빈곤 속에서 세상을 떠났고, 유해는 빈 중앙묘지에 묻혔다.
사육제의 아이들 (Faschingskinder op.382)
빈 아가씨 (Weaner Madl'n op.388)
빈 시민들 (Wiener Bürger op.419)
어서옵쇼! (Herreinspaziert! op.518)
빠른 폴카 '놓아줘요!' (Loslassen! op.386)
20세기 속으로! (Auf In's XX.Jahrhundert! op. 501)
초기에는 너무 하슬링어의 푸쉬를 많이 받은 탓에, 슈트라우스 형제 등 경쟁자들로부터 '하슬링어 공장의 노동자' 라는 비아냥을 듣기도 했다. 하지만 하슬링어와의 계약 기간은 '생애' 란에 언급한 것처럼 그리 길지 않았고, 오히려 군악대장이라는 길을 택해 자수성가한 인물이기도 했다.[1]
그러나 치러 자신도 슈트라우스 형제들을 자신의 가장 큰 라이벌로 여기고 있었고, 특히 요한 슈트라우스 2세와는 춤곡 뿐 아니라 오페레타 영역에서도 계속 경쟁을 벌이고 있었다.[2] 요한 슈트라우스 2세의 타계와 에두아르트 슈트라우스의 은퇴로 인해 결국 승리했다는 인상을 주기도 했지만, 세기가 바뀌면서 쇠락하는 빈 사교계의 흐름에 같이 쓸려나간 비운의 인물이라는 것이 일반적인 평가.
슈트라우스 형제들이 세계 각지를 돌며 화려하고 다채로운 면모를 추구하고 이국 취미까지 끌어모아 작품에 도입한 반면, 치러는 빈이나 오스트리아 어디를 가도 들을 수 있는 민요 등 보편적인 대중음악의 맛을 작품에 잘 살려넣기로 유명했다. 이런 점에서 소위 '빈 식' 의 전통을 우선 순위로 꼽는 보수적인 취향의 사람들은 치러의 작품에 더 높은 점수를 주기도 한다.
양적인 면에서는 다작으로 유명한 요한 2세보다 더 많은 600편의 춤곡/행진곡과 30편의 오페레타 등 무대 작품을 남겼으나, 지금까지 계속 연주되는 유명 레퍼토리는 훨씬 적은 편이다.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신년음악회 등의 무대에서도 선곡 빈도는 안습 그 자체이며, 심지어 요한 슈트라우스 1세나 요제프 라너 같은 올드비들에게까지 캐발리는 경우도 허다하다.
이런 불균형을 보다못한 오스트리아의 치러 팬들이 '칼 미하엘 치러 재단' 을 설립해 치러 음악의 국내외 보급에 주력하고 있지만, 아직까지 해외에서의 인지도는 그리 높지 않은 것이 현시창.[3] 춤곡이나 행진곡의 경우 그래도 국내외 무대에서 연주가 가끔 이뤄지고는 있지만, 오페레타는 요한 2세나 레하르와 달리 고정 레퍼토리의 자리에서 싸그리 탈락해 거의 상연되고 있지 않은 상태다. 지못미.
하지만 1990년대 후반부터 클래식 음반사인 낙소스 산하의 서브레이블 마르코 폴로에서 치러 작품만을 담은 CD를 네 장 내놓았고, 2007년에는 오페레타의 서곡들을 담은 CD를 추가로 발매해 레어템 발굴에 여념이 없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오스트리아의 음반사인 프라이저에서 2005년 무렵 치러 에디치온(Ziehrer-Edition)이라는 음반 시리즈를 내기 시작하면서 처음으로 전집 녹음에 도전하고 있다.
카를 미하엘 치러 Karl Michael Ziehrer. 1843.05.02~1922.11.14
오스트리아의 경음악/오페레타 작곡가이자 군악대장. 빈 사교계에서 요한 슈트라우스 2세를 비롯한 '슈트라우스 형제들' 의 강력한 라이벌로 활동한 인물이다.
1. 생애
빈에서 태어났고, 음악이론가 지몬 제히터에게 배운 뒤 10대 후반에 무도음악계에 뛰어들어 왈츠와 폴카 등의 춤곡을 쓰기 시작했다. 우연한 기회에 빈의 유력 음악출판업자인 칼 하슬링어에게 발탁되었고, 그의 출판사와 전속 계약을 체결했다.
그러나 슈트라우스 형제들과 달리 군악대장으로 본격적인 명성을 얻기 시작했고, 1870년대 중반에는 자신이 편집장을 맡아 '독일 음악신문' 이라는 음악 잡지를 출간하기도 했다. 비슷한 시기에 하슬링어에서 되블링어로 출판사를 옮겼고, 오스트리아 뿐 아니라 폴란드나 독일 등 국외 순회 공연을 개시해 호평을 받았다.
1885년에는 오스트리아 황제로부터 군악 발전에 기여한 공로로 '도이치마이스터(Deutschmeister)' 라는 군악대장 최고의 명예 칭호를 하사받았고, 1893년에는 시카고 세계 박람회의 초빙으로 미국 순회 공연을 개최하는 등 최전성기를 누렸다. 요한 슈트라우스 2세가 타계한 뒤에는 오페레타 영역에서도 성공했고, 후배인 프란츠 레하르 등과 빈 오페레타 제2의 전성기를 구가했다.
1909년에는 무도음악가로서 최고의 직책인 황실 궁정무도회 감독에 임명되었으나, 제1차 세계대전의 패전과 함께 합스부르크 제정 체제가 무너지면서 실직하고 말았다. 대전 중에도 향락 산업의 여러 가지 제약 때문에 일거리를 계속 잃었고, 그 동안 쌓아온 명성도 흐지부지해져 버렸다. 1922년에 극심한 빈곤 속에서 세상을 떠났고, 유해는 빈 중앙묘지에 묻혔다.
2. 주요 작품들
2.1. 왈츠
사육제의 아이들 (Faschingskinder op.382)
빈 아가씨 (Weaner Madl'n op.388)
빈 시민들 (Wiener Bürger op.419)
어서옵쇼! (Herreinspaziert! op.518)
2.2. 폴카
빠른 폴카 '놓아줘요!' (Loslassen! op.386)
2.3. 행진곡
20세기 속으로! (Auf In's XX.Jahrhundert! op. 501)
3. 창작 상의 특징
초기에는 너무 하슬링어의 푸쉬를 많이 받은 탓에, 슈트라우스 형제 등 경쟁자들로부터 '하슬링어 공장의 노동자' 라는 비아냥을 듣기도 했다. 하지만 하슬링어와의 계약 기간은 '생애' 란에 언급한 것처럼 그리 길지 않았고, 오히려 군악대장이라는 길을 택해 자수성가한 인물이기도 했다.[1]
그러나 치러 자신도 슈트라우스 형제들을 자신의 가장 큰 라이벌로 여기고 있었고, 특히 요한 슈트라우스 2세와는 춤곡 뿐 아니라 오페레타 영역에서도 계속 경쟁을 벌이고 있었다.[2] 요한 슈트라우스 2세의 타계와 에두아르트 슈트라우스의 은퇴로 인해 결국 승리했다는 인상을 주기도 했지만, 세기가 바뀌면서 쇠락하는 빈 사교계의 흐름에 같이 쓸려나간 비운의 인물이라는 것이 일반적인 평가.
슈트라우스 형제들이 세계 각지를 돌며 화려하고 다채로운 면모를 추구하고 이국 취미까지 끌어모아 작품에 도입한 반면, 치러는 빈이나 오스트리아 어디를 가도 들을 수 있는 민요 등 보편적인 대중음악의 맛을 작품에 잘 살려넣기로 유명했다. 이런 점에서 소위 '빈 식' 의 전통을 우선 순위로 꼽는 보수적인 취향의 사람들은 치러의 작품에 더 높은 점수를 주기도 한다.
4. 사후의 평가
양적인 면에서는 다작으로 유명한 요한 2세보다 더 많은 600편의 춤곡/행진곡과 30편의 오페레타 등 무대 작품을 남겼으나, 지금까지 계속 연주되는 유명 레퍼토리는 훨씬 적은 편이다.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신년음악회 등의 무대에서도 선곡 빈도는 안습 그 자체이며, 심지어 요한 슈트라우스 1세나 요제프 라너 같은 올드비들에게까지 캐발리는 경우도 허다하다.
이런 불균형을 보다못한 오스트리아의 치러 팬들이 '칼 미하엘 치러 재단' 을 설립해 치러 음악의 국내외 보급에 주력하고 있지만, 아직까지 해외에서의 인지도는 그리 높지 않은 것이 현시창.[3] 춤곡이나 행진곡의 경우 그래도 국내외 무대에서 연주가 가끔 이뤄지고는 있지만, 오페레타는 요한 2세나 레하르와 달리 고정 레퍼토리의 자리에서 싸그리 탈락해 거의 상연되고 있지 않은 상태다. 지못미.
하지만 1990년대 후반부터 클래식 음반사인 낙소스 산하의 서브레이블 마르코 폴로에서 치러 작품만을 담은 CD를 네 장 내놓았고, 2007년에는 오페레타의 서곡들을 담은 CD를 추가로 발매해 레어템 발굴에 여념이 없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오스트리아의 음반사인 프라이저에서 2005년 무렵 치러 에디치온(Ziehrer-Edition)이라는 음반 시리즈를 내기 시작하면서 처음으로 전집 녹음에 도전하고 있다.
[1] 당시의 군악대장은 지금과 달리 굳이 군인 신분이 아니어도 맡을 수 있는 직책이었고, 군악대도 마찬가지로 군인 뿐 아니라 민간인도 단원으로 입단할 수 있었다. 무도회 등에 출연할 때는 현악기 연주자들을 추가 기용해 정규 관현악단으로 완편하는 것도 매우 일반적인 관행이었다.[2] 음악적인 경쟁 외에도, 사진에서 보듯 요한 2세와 흡사한 콧수염을 길렀다고 해서 '짝퉁 슈트라우스' 로 취급받는 등 다소 초딩스러운 까임을 당하기도 했다.[3] 참고로 치러 재단 홈페이지는 http://www.ziehrer.at. 독일어 외에 영어와 프랑스어도 지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