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두아르트 슈트라우스

 


Eduard Strauss
1835년 3월 15일 ~ 1916년 12월 28일
오스트리아의 경음악 작곡가. 요한 슈트라우스 1세의 4남이자 요한 슈트라우스 2세요제프 슈트라우스의 동생이기도 하다. 애칭은 '에디(Edi)'. 훗날 지휘자로 활동하며 슈트라우스 가문의 마지막 음악가가 된 에두아르트 슈트라우스(1910~1969)와 구별하기 위해 에두아르트 슈트라우스 1세라고 부르기도 한다.
1. 생애
2. 주요 작품들
3. 사생활과 사후의 평가


1. 생애


근교의 레오폴트슈타트(지금은 빈 시에 편입됨)에서 태어났고, 외교관으로 성장하라는 아버지의 뜻 때문에 각국의 언어들과 정치학 등을 배웠다. 하지만 형들처럼 역시 주 관심사는 음악이었고, 음악 이론과 작곡, 하프바이올린 등의 악기 연주법을 배웠다.
사교계 데뷰는 1855년에 했는데, 무도악단 지휘자이자 작곡가로 비교적 화려하게 출발한 형들과 달리 큰형 슈트라우스 2세가 이끌고 있던 슈트라우스 악단의 하피스트로 간소하게 출발했다. 지휘 활동은 1861년에, 작곡 활동은 1863년부터 본격적으로 시작했는데, 마찬가지로 왈츠폴카, 카드리유, 행진곡 등 무도음악 위주의 작품들을 써냈다.
1870년에 둘째형 요제프가 과로사한 뒤, 오페레타 작곡에 주력하려던 큰형 요한 2세의 부탁을 받아 슈트라우스 악단의 지휘자가 되었다. 동시에 형들과 대립 기믹을 취하던 칼 미하엘 치러의 최대 경쟁 상대로도 부각되었고, 빈 사교계의 인기를 양분하다시피 했다.
1882년에는 요한 2세의 후임으로 황실무도회 음악감독이 되어 무도음악 작곡가로 누릴 수 있는 최고의 권위를 차지했는데, 미국영국, 프랑스, 독일 등 국외 순회 공연도 활발하게 진행했다. 하지만 1899년에 요한 2세가 세상을 떠나고 세기가 20세기로 바뀌면서 점차 '시대에 뒤떨어짐' 을 느끼게 되었고, 결국 1901년 2월 13일의 공연을 마지막으로 악단을 해체하고 자신도 은퇴했다. 은퇴 후에는 작곡과 지휘를 비롯한 일체의 음악 활동에서 손을 뗐지만, 1906년에는 슈트라우스 집안의 과거를 회고하는 '기억들(Erinnerungen)' 이라는 책을 내기도 냈다.
여기까지만 보면 19세기의 '좋았던 시절' 을 그럭저럭 잘 마무리한 음악인으로 볼 수 있겠지만, 1907년 10월에 '''형들의 것까지 포함한 자필보 상당수와 악기를 불쏘시개로 써버렸다.''' 이 때문에 요한 2세, 요제프의 미발표 작품과 편곡물 대다수가 사라져 버리고 말았는데, 자세한 집계는 불가능하지만 악보를 소각장에 싣고가는 데 일곱 대의 마차가 필요했다는 증언을 감안하면 최대 100만 장에 이르는 악보가 잿더미가 되었다고 여겨진다.
에두아르트는 '기억들'에서 이 분서 행위에 대해 병약했던 작은 형 요제프와 생전에 맺은 밀약이라면서 '우리 둘 중 하나가 일찍 죽어서 아내가 과부가 될 경우 아내의 부양을 위해 살아남는 형제에게 저작권과 소유권을 넘겨주고, 또 슈트라우스 가문의 후계자들이 음악 활동을 끝낼 때 제3자가 표절이나 도용 등 허튼 짓을 못하게 만들기 위해 악보를 없애버리기로 했다'고 주장했지만, 합의문 자체는 실존하지도 않는 상태고 에두아르트 자신만의 일방적 주장이라 신빙성이 의심된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다소 양상은 달랐지만, 20세기에도 프란츠 레하르와 오스카 슈트라우스[1]를 비롯한 이들이 전통을 이어받아 계속 인기몰이를 하고 있었던 터라 지나치게 성급하고 경솔한 '과거청산' 이었던 셈.
아무튼 1907년의 충공깽 분서 이벤트 이후에는 거의 자택에만 칩거하면서 여생을 보냈고, 1차대전이 한창이던 1916년에 지병인 심장병으로 타계했다. 유해는 유언에 따라 궁정무도회 감독의 정복이 입혀진 뒤 아버지와 형들이 묻혀 있는 빈 중앙 묘지에 안장되었다.

2. 주요 작품들


  • 헬레나 카드리유 (Helenen-Quadrille op.14)
▲ 빠른 폴카 "무료 열차!"(Bahn Frei!) Op.45
  • 빠른 폴카 '무료 열차!'[2] (Bahn frei! op.45)
  • 빠른 폴카 '전속력으로' (Mit Dampf op.70)
  • 빠른 폴카 '위아래로' (Auf und davon op.73)
  • 왈츠 '멋진 영혼들' (Fesche Geister op.75)
  • 왈츠 '공론' (Doctrinen op.79)
  • 프랑스풍 폴카 '아모르의 인사' (Amors Gruß op.83)
  • 왈츠 '원고' (Manuscripte op.90)
  • 왈츠 '대학생 무도회' (Studenten-Ball-Tänze op.101)
  • 왈츠 '유람여행' (Lustfahrten op.177)
  • 카르멘 카드리유 (Carmen-Quadrille op.134)
  • 왈츠 '판결' (Verdicte op.137)
  • 프랑스풍 폴카 '프라하의 인사' (Gruß an Prag op.144)
  • 파티니차 왈츠 (Fatinitza-Walzer op.147)
  • 왈츠 '인생은 정말 아름다워' (Das Leben ist doch schön op.150)
  • 프랑스풍 폴카 '전화' (Telephon op.165)
  • 빠른 폴카 '제멋대로' (Außer Rand und Band op.168)
  • 왈츠 '발차 신호' (Glockensignale op.198)
  • 빠른 폴카 '가볍고 얇은' (Luftig und duftig op.206)
  • 프랑스풍 폴카 '친애하는 친구' (Chère amie op.223)
  • 빠른 폴카 '기꺼이!' (Mit Vergnügen! op.228)
  • 빠른 폴카 '제동을 걸지 않고' (Ohne Bremse op.238)
  • 왈츠 '유쾌한 이들을 위하여' (Für lustige Leut' op.255)
  • 빠른 폴카 '속달 우편으로' (Mit Extrapost op.259)
  • 왈츠 '미르테의 마법' (Myrthenzauber op.272)

3. 사생활과 사후의 평가


형들인 요한 2세, 요제프와 비교하면 작곡가로서의 명성과 재능은 뒤처진다는 게 일반적인 평가고, 실제로도 형들 만큼 유명한 작품들이 별로 없는 실정이다. 다만 창작력과 별개로 지휘자로서의 역량과 쇼맨십은 형들보다 낫다는 평을 받았고, 요한 2세가 오페레타 작곡에 집중하기 위해 슈트라우스 악단의 지휘를 맡겼을 때도 '나나 요제프보다 지휘를 더 잘한다'면서 안정적으로 악단을 이끌던 모습을 높이 평가하기도 했다. 또 외교관을 목표로 교육받은 덕에 그리스어라틴어, 스페인어, 이탈리아어, 프랑스어 등 유럽 주요 언어 구사력도 뛰어나 국외 연주 여행도 무난하게 수행했다.
아버지의 불륜과 외도 등에 대한 반발심이었는지 어떤지는 모르지만, 형들과 마찬가지로 별다른 스캔들 없이 비교적 건전한 가족 관계를 유지했다. 1863년에 마리아 클렝크하르트와 결혼한 뒤에도 죽을 때까지 부부로 지내며 요한 에두아르트와 요제프 에두아르트 두 아들을 남겼는데, 장남인 요한 에두아르트 슈트라우스는 요한 슈트라우스 3세라는 예명을 사용해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뒤를 이어 무도음악 작곡가이자 지휘자로 활약했다. 다만 요한 2세가 에두아르트에게 '궁정무도회 감독으로 활동하며 안정적 소득을 얻고 있다'는 것을 이유로 가문 유산의 상속을 하지 않겠다고 결정하면서 1890년대부터 형과의 관계도 소원해졌고 1897년에는 파산 신고까지 하는 등 만성적인 생활고에 시달렸다. 이는 에두아르트 자신보다는 그의 아내인 마리아와 자식들의 낭비벽 때문이었지만, 요한 2세는 죽을 때까지 유산 상속권을 에두아르트에게 주지 않았다.
작곡한 작품들은 약 250여 곡으로 추산되는데, 작품 번호가 붙어 공식 출판된 것에 한한 집계고 1907년의 분서 때 자필보가 잿더미가 된 곡들은 복원이 불가능한 상태다. 그 외에는 아주 드물게 슈트라우스 악단의 순회공연 등 행사 때 흘리고 간 미출간 파트 악보나 총보 정도가 문서 수장고 등지에서 운좋게 발견될 따름이다.
형들이 워낙 전설은 아니고 레전드급 인기를 자랑하는 본좌들이었다 보니 생전에도 자주 비교가 돼서 꽤 스트레스를 받은 모양이었는데, 그 평가는 지금도 별반 다를 바 없다.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신년음악회 등의 공연에서도 선곡 빈도가 바닥을 기는 작곡가로 대접받고 있고, 형들이나 아버지와 달리 전집 음반 제작 계획도 아직 없는 상황. OTL[3]
작품 제목들 중 철도와 관계된 것들이 의외로 많아서 극렬 철덕으로 의심되는 인물이기도 하다.[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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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유럽 음악계를 풍미한 슈트라우스 일가의 이야기를 다룬 TV 드라마 <슈트라우스 왕조>(Die Strauß-Dynastie)에도 등장한다. 배우는 애드리언 러키스(Adrian Lukis). 자신보다 실력, 명성에서 훨씬 우월한 형을 질투하며 사사건건 방해하려는 찌질이로 묘사되었다. 분서갱유 사건만 봐도 틀린 묘사는 아닌 듯 하다. 마지막 장면은 야외 공연을 지휘하던 중, 형 요한 2세의 사망 소식을 전해듣고서[5] 황급히 자리를 뜨고서는 형제들의 미발표 악보들을 불에 태우는 장면으로 끝난다.[6]

[1] Oscar Straus. 성의 끝 s자가 하나인 것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슈트라우스 집안과는 무관한 유대인 혈통의 작곡가였다.[2] 그런데 단어 자체가 "자유로운 거리", "자유의 거리" 로도 번역이 가능하다. 일부러 중의적인 의미를 담은 것일 수도 있고... 아무튼 실제로 국내 모 교향악단 연주회에서는 "자유의 거리" 라는 이름으로 이 곡을 소개한 적이 있다.[3] 그나마 지난 2016년 사망 100주년 계기로 음반사 마르코폴로에서 2개의 선집을 발매한 바 있다. 1집, 2집[4] 역시 마르코폴로에서 철도음악 시리즈의 전 2집을 출반했을 때 상당수 음악들을 수록했다. 1집, 2집[5] 이 장면에서 에두아르트가 지휘하던 악단은 시키지도 않았는데 요한 2세의 대표작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를 연주하기 시작한다.[6] 여기서 에두아르트가 형제들의 악보를 태우며 울음을 터뜨리는 모습이 나오는데, 평소에는 다투었음에도 끝내 살아서 화해하지 못했던 점에 대해 일말의 죄책감이나 회한이 있었음을 암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