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페레타

 

1. 개요
2. 프랑스의 오페레타
3. 오스트리아
4. 영국 / 미국


1. 개요


오페레타는 가벼운 음악극(音樂劇)의 하나다. 오페라와 비슷한데, 오페라보다 더 대중성이 있고, 음악적으로나 내용적으로나 오페라보다 가벼운 것이 특징이다. 쉽게 말해 오페라와 뮤지컬의 중간쯤에 해당하는 장르.[1][2]
오페라처럼 오페레타도 대사가 있고, 무용이 포함되어 있으며, 당연히 음악이 있다. 물론 오페레타도 음악이 주가 되며, 따라서 연기와 춤은 보조적이다. 이처럼 오페레타는 오페라와 비슷한 면이 많은데, 현대 작품에 와서는 딱 구분하기 애매한 작품들까지 생겼다.
오페라와 오페레타를 비교했을 때 오페레타의 특징을 들자면,
  • 일반적으로 오페라보다 짧다.
  • 가볍고 재미있는 등장 인물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 시사 풍자가 흔히 등장한다. 물론 오페라 쪽에서도 시사 풍자가 있는 작품이 있다.
  • 대사 일부는 노래로 표현되는 것이 아니라 그냥 말하는 것으로 대체된다. 오페라처럼 음악들로 연결되는 것이 아니라, 아리아레치타티보, 합창 등이 대화 사이 사이에 배치된다. 대화에는 보통 반주되는 음악이 없다.
오페레타의 내용은 희극적인데, 그렇다고 희극적인 음악극이 모두 오페레타인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오페라 부파도 희극적이지만 오페레타는 아니다.
오페레타는 프랑스, 독일, 영국에서 각각 그들 특유의 방식으로 발전하였다.

2. 프랑스의 오페레타


짧고 가벼운 작품에 대한 수요에 부합하기 위해, 19세기 중반에 오페라 코미크라는 장르에서 오페레타가 갈라져 나왔다. 여기서 오페라 코미크는 비록 코미크라는 이름이 붙었지만 전부 희극인 것은 아니었고, 일부 비극도 있었다. 비극적 결말의 카르멘도 오페라 코미크다.
프랑스 오페레타에서 빼놓을 수 없는 사람이 자크 오펜바흐. 그는 프랑스 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오페레타에 영향을 미친 사람이다. 오펜바흐는 프랑스의 오페레타를 더욱 발전시키고 대중화해서, 1850년 경부터 오페레타의 대 유행을 이끌어 낸다. 오펜바하의 첫 정규 오페레타 중 성공작이 지옥의 오르페(천국과 지옥, Orphée aux enfers, 1858)라는 작품으로서 현대에도 사랑받는 오페레타 작품이다. 특히 서곡은 매우 유명하다. 오펜바흐 오페레타의 특징은 극단적인 천박함을 통해 인생을 기괴하고 암울하게 묘사한다는 것이다. 오펜바흐 오페레타의 특징은 로베르 플랑케트와 앙드레 메사제 등에 의해 계승되기도 한다.
오펜바흐의 오페레타는 외설적인 면이 많아 19세기 당시에는 일부 보수적인 관객들이 분개하기도 했다. 오펜바흐의 오페레타에 종종 등장하는 캉캉 춤만 봐도 치마를 입고 다리를 번쩍번쩍 들어 올리는 것이니, 당시 기준으로서는 꽤나 외설적이었던 셈이다. 1800년대면 미니스커트는 커녕 종아리가 드러나는 치마조차 없었고, 다들 치렁치렁한 긴 치마를 입고 다니던 시절이다. 오펜바하 오페레타의 외설적인 면 때문에 주연을 일반 배우가 아니라 고급창녀가 맡기도 한다. 오히려 이런 점들 때문에 오펜바흐의 오페레타는 큰 인기를 끌어, 프랑스의 여러 극장들에서 매일 저녁 관객들이 가득 찼다. 이런 관객의 대부분은 "있어" 보이고 싶어한 부르주아 남자들이었다. 빈이나 베를린의 상류층 관객들도 자신들의 도시에서 이런 공연을 보기를 원했고, 그러다보니 오펜바흐 작품이 세계적으로 퍼져나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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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벤바흐의 '천국과 지옥'(지옥의 오르페) 포스터.''' 그리스 로마 신화를 19세기 사회상으로 패러디 한것으로 오르페우스는 에우로디케를 싫어하지만 "여론"에 밀려 지옥으로 내려간다.
지금과는 달리 당시에는 오페레타가 천박하고 경박한 예술로 인식되었다. 사실, 기괴한 묘사와 결합된 천박함은 오펜바흐와 헤르베의 오페레타를 규정짓는 한 요소다. 관객들의 폭이 넓어지고 중류층과 하류층까지 관객층이 확대된 훗날에서야 오페레타가 좀 더 심각한 내용을 담게 되고 과거를 그리는 스타일이 되었다. 원래는 고급창녀가 연기할 정도로 외설적이었던 프랑스 오페레타들도 나중에는 완곡한 내용으로 변형되어 공연되었는데, 현재 공연되는 것도 이렇게 변형된 형태다.

3. 오스트리아


독일어 오페레타의 개척자로는 프란츠 폰 주페(Franz von Suppé, 1819~1895)가 있었다. 주페는 독일어 대본으로 작곡을 하기는 했지만 전체적인 틀은 오펜바흐 등 프랑스 오페레타의 스타일을 따랐고, 또 오스트리아-헝가리라는 2중 왕국의 특성을 감안해 헝가리를 비롯한 동유럽이나 남유럽 민속 음악의 어법도 일부 차용해 후배 작곡가들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 주페의 오페레타들로는 경기병(Leichte Kavallerie), 아름다운 갈라테아(Die schöne Galathée), 유쾌한 도적(Banditenstreiche), 보카치오(Boccaccio), 파티니차(Fatinitza) 등이 있지만, 오스트리아 밖에서는 상연이 극히 뜸한 실정이고 서곡들만이 자주 연주되고 있다.
주페의 뒤를 이어 오스트리아 오페레타의 틀을 정립한 작곡가는 요한 슈트라우스 2세였다. 주로 춤곡이나 행진곡을 작곡하던 요한 2세는 소프라노 가수였던 첫 아내 헨리에타의 충고를 받고 오페레타를 쓰기 시작했고, 오스트리아를 뛰어넘어 세계적 성공을 거두고 오페레타 하면 떠오를 만큼의 명성을 얻은 박쥐(Die Fledermaus)를 작곡해 오펜바흐의 라이벌로 격상되었다. 요한 2세는 생애 동안 총 16편의 오페레타를 작곡했고, 대부분 초연 때 성공을 거두었고 초연 직후 오페레타에서 2차 창작한 여러 춤곡이나 행진곡을 추가로 선보이는 비즈니스 감각도 보여주었다. 박쥐 외에 지금까지 자주 상연되는 요한 2세의 오페레타들로는 베네치아의 하룻밤(Eine Nacht in Venedig)과 집시 남작(Der Zigeunerbaron)이 있다.
요한 슈트라우스 2세와 비슷한 시기에 오스트리아 오페레타계를 풍미한 작곡가들로 거지 대학생(Der Bettelstudent)과 가스파로네(Gasparone) 등을 작곡한 카를 밀뢰커(Carl Millöcker, 1842~1899), 새 장수(Der Vogelhändler)와 광산 감독(Der Obersteiger) 등을 작곡한 카를 첼러(Carl Zeller, 1842~1898)와 방랑자들(Die Landstreicher) 등을 작곡한 칼 미하엘 치러, 오페라 무도회(Der Opernball) 등을 작곡한 리하르트 호이베르거(Richard Heuberger, 1850~1914) 등이 있다. 이 당시에 빈의 각 극장들은 아예 상주 작곡가를 고용해 오페레타를 정기적으로 만들어 상연할 정도로 급상승한 인기에 대비할 정도였다. 빈 오페레타의 승승장구에 힘입어 오스트리아 외에 같은 독일어권 국가였던 독일에서도 오페레타 붐이 일기 시작했는데, 베를린을 거점으로 활동하던 파울 링케(Paul Lincke, 1866~1946)는 작중의 행진곡 '베를린의 공기(Berliner Luft)'가 베를린 시의 시가처럼 애창되는 루나 부인(Frau Luna)을 비롯한 히트작들을 만들었다.
하지만 20세기에 접어들며 오페레타와 왈츠, 폴카 등 이전 세기에 대인기였던 춤곡들의 인기가 점차 시들해지면서 오페레타의 상연 빈도도 점차 줄어들기 시작했다. 이 시기에 요한 2세에 이어 두 번째 빈 오페레타의 부흥기를 이끈 작곡가로 헝가리계 오스트리아 작곡가인 프란츠 레하르(Franz Lehár, 1870~1948)가 있었는데, 레하르는 자신의 최대 히트작 유쾌한 미망인(Die lustige Witwe)을 비롯해 룩셈부르크의 백작(Der Graf von Luxemburg), 집시의 사랑(Zigeunerliebe), 미소의 나라(Das Land des Lächelns), 파가니니(Paganini), 러시아의 황태자(Der Zarewitsch) 등을 연이어 성공시켰다. 레하르의 오페레타는 아시아나 아프리카 등지를 무대로 하는 등 선배 작곡가들보다 더 국제적인 색채를 띠었고, 미소의 나라부터 작곡된 후기 오페레타들에서는 기존의 해피 엔딩이 아닌 다소 씁쓸한 여운을 남기는 새드 엔딩으로 끝맺는 독특한 전개 방식을 사용했다.
레하르와 비슷하게 오스트리아-헝가리 시대의 헝가리 지방 태생이었지만, 레하르와는 달리 자신의 정체성을 헝가리인으로 삼았던 에메리히 칼만(Emmerich Kálmán, 1882~1953)도 빈 오페레타의 두 번째 부흥기를 이끈 작곡가로 평가받았다. 칼만의 대표작 오페레타들로는 차르다시 공비(Die Csárdásfürstin), 마리차 백작부인(Gräfin Mariza), 서커스의 공주(Die Zirkusprinzessin) 등이 있다. 이외에 빈 오페레타의 황혼기를 대표하는 작곡가들로 왈츠의 꿈(Ein Walzertraum) 등을 작곡한 오스카 슈트라우스(Oscar Straus, 1870~1954), 달러의 여왕(Die Dollarprinzessin) 등을 작곡한 레오 팔(Leo Fall, 1873~1925), 빅토리아와 그녀의 경기병(Viktoria und ihr Husar) 등을 작곡한 파울 아브라함(Paul Abraham, 1892~1960) 등이 있다. 이 에머리히 칼만은 유대계 헝가리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아돌프 히틀러가 굉장히 좋아하던 음악가 중 한명이었다고 한다. 오히려 칼만에게 “명예 아리아인”으로 추대하주겠다고 나섰지만, 정작 칼만 본인은 히틀러를 씹고 짐싸고 미국으로 가버렸다. 결국 나치는 칼만의 음악을 유럽 내에서 금지시켜버렸다.
하지만 1차대전 종전과 함께 미국에서 건너온 재즈 등 다른 음악들이 대중적 인기를 얻게 되자 오페레타도 사양길을 걷게 되었고, 설상가상으로 히틀러나치가 득세하면서 진행된 오스트리아 병합 후 오페레타계에서 활동하던 많은 유대인 대본 작가들이나 작곡가들도 활동 금지를 당하고 망명하거나 강제수용소로 끌려가 목숨을 잃으면서 결정타를 맞았다. 전후에도 오페레타 상연과 창작은 계속 이어지고는 있지만, 사실상 뮤지컬에 전성기의 자리를 넘겨주고 현재는 주로 구작들을 중심으로 추억팔이처럼 상연되고 있다.

4. 영국 / 미국


영어로 된 오페레타는 영국에서 1860년대에 처음으로 작곡됐다. 그 당시 인기를 끌었던 작품들은 대본 작가 윌리엄 쉐크 길버트와 작곡가 아서 설리번이 합작한 오페레타들이다. 사보이 오페라라고도 불렸던 이 오페라들은 영국 및 미국에서 엄청난 인기를 끌었다. '군함 피나포어, '펜잔스의 해적', '이올란테', '미타도'가 대표적인 작품이다. 20세기에도 영국 오페레타는 계속 작곡되었는데, 점점 더 코믹 뮤지컬에 가까와지는 특징을 보였다.
미국에서는 빅터 허버트를 필두로 그 뒤를 이은 시그먼드 롬버그, 루돌프 프리멀 같은 작곡가들이 활약했지만, 1930년에 이르러서는 뮤지컬에 밀려 쇠퇴한다.

[1] 실제로 학자들이 출판한 사전에 의하면 영미권 뮤지컬의 형성에 오페레타의 영향이 존재한다고 한다[2] Shepherd, John; Horn, David (2012). Continuum Encyclopedia of Popular Music of the World Volume 8: Genres: North America. A&C Black. p. 104. ISBN 1-4411-4874-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