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 슈트라우스 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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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 스트라우스 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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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하네스 브람스와 한 컷. 브람스가 1833년생으로 여덟 살 어리다.
▲ 예술가의 생애 (Künstlerleben Op.316),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연주, 2002년 신년 음악회. 지휘 세이지 오자와.
Johann Baptist Strauss, Sohn(Junior) 또는 Johann Strauss II
1825년 10월 25일 ~ 1899년 6월 3일
1. 개요
오스트리아의 경음악/오페레타 작곡가이자 바이올리니스트. '''왈츠의 왕'''이라는 별명으로 불릴 정도로, 19세기 유럽의 무도음악계에서 지배적인 위상을 누린 거장이었다. 애칭은 샤니(Schani)."내가 이런 곡을 한 곡만 쓸 수 있었다면 나머지 다른 작품은 다 내버려도 상관 없겠다"[1]
- 요하네스 브람스
2. 생애
오스트리아의 수도 빈에서 요한 슈트라우스 1세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부터 이미 빈에서 날리던 경음악 작곡가였던 탓에 그 가업을 쉽게 이었을 것으로 생각하기 마련이지만, 오히려 그 반대였다. 아버지인 요한 1세는 자식들이 자신의 뒤를 이어 음악을 하는 것을 격하게 반대했고, 장남인 요한 2세의 경우 은행에 취직시키려고 온갖 술수를 다 썼다.
하지만 어릴 적부터 기초적인 음악 이론이나 바이올린 연습 등 취미삼아 음악하는 것까지 반대하지는 않았는데, 자식들이 이걸로 밥벌이를 하려는 낌새만 보이면 불호령을 내리거나 폭력을 휘두르기까지 했다. 예로 요한 2세의 경우, 아버지의 눈을 속여 전문가 수준까지 바이올린을 배웠다는 이유로 채찍으로 심하게 맞아 떡실신한 적도 있다고 한다.
그렇다고 해도, 항상 곡 주문 받느랴, 무도회장 출연하느라 정신없던 아버지가 아들들이 뭐하는지 일일이 알아낼 수는 없었다. 게다가 외도하던 여자와 바람을 피운 끝에 가정을 포기하는 돌이킬 수 없는 일을 저지른 뒤에는 막강한 통제력도 잃었고, 아들들은 거리낌없이 대놓고 음악을 배우고 연주하게 되었다.
아버지의 뜻을 제일 먼저 거스른 것은 물론 요한 2세였고, 1844년 10월에 빈 근교의 히칭에 있는 유명한 도박장 겸 무도회장이었던 돔마이어 카지노에서 자신의 악단을 조직해 출연했다. 물론 연주곡들도 대부분 직접 작곡한 왈츠나 폴카 등이었는데, 아직 20대도 안된 초짜였음에도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다. 물론 요한 2세가 아버지와 같은 이름을 쓰고 있었기 때문에, 본의아니게 부친 덕을 입었다고 해석할 수도 있다.
이후 죽을 때까지 일거리 없어서 걱정할 필요가 전혀 없을 만큼 각지의 무도회와 여타 공연에 불려다니면서 수백 곡이나 되는 춤곡들을 작곡했고, 아버지의 명성마저 버로우시킬 정도의 명사가 되었다.[2] 하지만 이미 불륜크리를 저지른 아버지로서는 뭐라고 태클을 걸기 힘든 상황이었고, 결국 부자 간의 거듭되던 경쟁 끝에 아버지의 이른 죽음으로 대립 관계가 끝나게 되었다.
요한 1세 사후에는 아버지의 악단을 자신의 악단에 그대로 흡수해 규모를 더욱 키웠고, 자신과 마찬가지로 몰래 음악을 배워왔던 차남 요제프 슈트라우스와 4남 에두아르트 슈트라우스까지 끌어들여 ' 슈트라우스 형제' 로 빈의 사교계를 석권했다. 하지만 대중적 인기와 달리, 황족이나 귀족들로부터는 '공화주의자' 라는 이유로 요주의 인물로 찍혀 궁정무도회 감독 같은 알짜배기 직책을 얻지 못하는 안습 상황이 잠시 있었다. 반대로 요한 1세는 보수적인 황실 지지파였고, 부자간의 대립은 정치적인 문제 때문에도 격하게 진행됐다.
1870년에 동생 요제프가 갑자기 세상을 떠난 뒤에는 무도회 출연 횟수를 줄이기 시작했고, 프랑스의 자크 오펜바흐가 석권하던 장르인 오페레타의 작곡에 뛰어들었다. 춤곡 대부분이 폭발적인 인기를 자랑하던 것과 달리 오페레타는 실패작도 있었고 뜨뜻미지근한 평을 받은 범작도 있었는데, 성공했던 아니었건 그 오페레타에서 선율을 뽑아 행진곡이나 춤곡 등으로 2차 창작을 하는 식으로 경음악계의 명성을 유지하는 약삭빠른 모습을 보여주었다.
빈 뿐 아니라 오스트리아 전역에 유명세를 떨치면서 아버지처럼 해외 순회공연까지 했는데, 폴란드나 독일, 프랑스, 러시아 뿐 아니라 대서양 건너 미국에까지 가서 공연할 정도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다. 1860년대에는 황족과 귀족들도 슈트라우스의 재능을 무시못할 정도로 거물급 인사가 되었고, 1863년에 오랫동안 노려왔던 궁정무도회 감독에 임명되었다. 슈트라우스는 젊었을 적에 공화론자였기는 했지만, 높은 지위에 대한 야망도 컸던 인물이었다[3] . 결국 자신의 명성이 세계적으로 퍼져나갈 정도였던 무시못할 인기를 이용해 황실에 컨택을 시도했고, 결국 성공했다. 당시 오스트리아 황제 프란츠 요제프 1세도 요한 2세의 음악을 높이 평가했고, 오페레타 '니네타 공비'초연 때는 극장의 특별석에서 관람한 뒤 요한 2세를 불러 직접 축하해주기도 했다.
1899년 폐렴으로 타계할 때까지 18편의 오페레타와 500여 곡의 춤곡/행진곡 등을 남겼는데, 개중에는 바쁜 순회공연 일정 때문에 구작들에서 땜빵하고 짜깁기하거나 미국과 러시아 등에서만 출판된 곡들, 다른 작곡가의 소품 편곡 같은 것들도 포함되어 있다. 사후 오스트리아 전체가 국상 분위기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고, 장례도 성대하게 치러졌다. 날카로운 독설 비평으로 유명했던 음악평론가 에두아르트 한슬리크도, 마치 황제 사후에나 걸맞을 듯한 통절한 추도문을 발표할 정도였다. 유해는 빈 중앙묘지에 안장되었고, 묘소는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금삐까 동상의 폭풍간지로도 유명하다.
3. 주요 작품들
대중적으로 좀 더 알려진 작품에는 유튜브 영상을 링크했다.
3.1. 왈츠
가속도 (Accelerationen Op. 234)
▲ 카를로스 클라이버 지휘, 1989년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신년음악회
조간신문 (Morgenblätter Op. 279)
▲ 주빈 메타 지휘, 1995년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신년음악회
빈 봉봉 (Wiener Bonbons Op. 307)
▲ 조르주 프레트르 지휘, 2010년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신년음악회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 (An der schönen, blauen Donau Op. 314)
예술가의 생애 (Künstlerleben Op. 316)
▲ 세이지 오자와 지휘, 2002년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신년음악회
빈 숲속의 이야기 (G'schichten aus dem Wienerwald Op. 325)
▲ 주빈 메타 지휘,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신년음악회
술과 여자와 노래 (Wein, Weib und Gesang Op. 333)
▲ 주빈 메타 지휘, 2015년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신년음악회
천일야화 (Tausend und eine Nacht op. 346)
▲ 카를로스 클라이버 지휘, 1992년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신년음악회
빈 기질 (Wiener Blut Op.354)
▲ 발레리 게르기예프 지휘, 2011년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여름음악회
남국의 장미 (Rosen aus dem Süden Op. 388)
▲ 주빈 메타 지휘, 1998년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신년음악회
봄의 소리 (Frühlingsstimmen Op. 410)
▲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 지휘, 캐슬린 배틀 소프라노, 1987년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신년음악회 (오리지널 버전)
[4]
보물 왈츠 (Schatz-Walzer Op. 418)
황제 왈츠 (Kaiserwalzer Op. 437)
▲ 다니엘 바렌보임 지휘,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3.2. 폴카 & 갈롭
안넨 폴카 (Annen-Polka Op.117)
트리치 트라치 폴카 (Tritsch-Tratsch-Polka Op.214)[5]
무궁동 (Perpetuum Mobile op. 257)
빠른 폴카 '관광열차' (Vergnügungszug Op.281)
빠른 폴카 '바람기' (Leichtes Blut Op.319)
빠른 폴카 '천둥과 번개' (Donner und Blitz Op.324)
사냥에서 폴카 op. 373 (Auf der Jagd op. 373)
피치카토 폴카 (Pizzicato-Polka. 동생 요제프 슈트라우스와 공동 작곡)
3.3. 행진곡
황제 프란츠 요제프 1세의 회복을 축하하는 행진곡 (Kaiser Franz Joseph I Rettungs-Jubel Marsch Op.126)
회전목마 행진곡 (Caroussel-Marsch Op.133)
나폴레옹 행진곡 (Napoleon-Marsch Op.156)
페르시아 행진곡 (Persischer Marsch Op.289)
이집트 행진곡 (Ägyptischer Marsch Op.335)
오스트리아 만세! (Hoch Österreich! Op.371)
러시아 행진곡 (Russischer Marsch Op.426)
3.4. 카드리유
디노라 카드리유 (Dinorah-Quadrille Op.224)
가면무도회 카드리유 (Maskenball-Quadrille Op.272)
노래 카드리유 (Lieder-Quadrille Op.275)
3.5. 무대 작품
오페레타 '박쥐' (Die Fledermaus)[6] [7]
오페레타 '심플리치우스' (Simplicius)
오페레타 '베네치아의 하룻밤' (Eine Nacht in Venedig)
코믹 오페라 '집시 남작' (Der Zigeunerbaron)
오페레타 '빈 기질' (Wiener Blut) - 예전에 작곡해둔 춤곡들을 가지고 말년에 짜깁기한 작품. 슈트라우스 사후 지휘자 겸 작곡가 아돌프 뮐러 2세가 완성했다.
발레 '신데렐라' (Aschenbrödel) - 역시 생애 막판에 시도한 첫 발레였지만, 관현악 편곡 작업 직전 세상을 떠나면서 작곡가 요제프 바이어가 이듬해에 완성했다.
4. 동시대의 라이벌
초기에는 아버지인 요한 1세와 빚어진 라이벌 관계가 빈 사교계의 주요 떡밥이었고, 이후 동생들인 요제프와 에두아르트가 음악계에 뛰어들면서 선의의 경쟁자로 떠올랐다.[8] 이외에 빈 토박이들에게 어필하던 카를 미하엘 치러가 최대 경쟁 상대였고, 프랑스 오페레타계의 본좌였던 오펜바흐나 자신을 벤치마킹해 경음악 작곡가로 성장한 에밀 발퇴펠도 생전의 라이벌이었다.
5. 다른 작곡가들과의 관계
슈트라우스의 춤곡들은 당대 유명 작곡가들까지 사로잡았는데, 요하네스 브람스의 경우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 의 악보를 받아들고는 "불행히도 브람스의 작품이 아니군요." 라고 할 정도로 춤곡에 특화된 재능을 부러워했다. 실제로 브람스는 수시로 슈트라우스의 집과 휴양지를 방문해 친교를 나누던 사이였다.
브람스와 극점에 서 있었던 리하르트 바그너도 브람스 만큼은 아니었지만 슈트라우스 춤곡의 애호가였고, 바이로이트에 축제극장과 자택을 짓기 위해 땅을 살 때 지주에게 마찬가지로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 를 들려주면서 협상을 유리하게 이끌기도 했다. 이런 탓에 슈트라우스 생전에 신문 등에 실린 풍자화나 실루엣을 보면, 브람스건 바그너건 브루크너든 대립 파벌을 초월한 당대 유명 작곡가들이 슈트라우스 악단의 연주에 맞추어 춤을 추는 장면을 많이 볼 수 있다.
6. 사생활
슈트라우스는 도합 세 번 결혼했는데, 1862년에 맞이한 첫 아내인 헨리에타(애칭 예티) 트레프츠는 연상의 오페라 가수였다. 슈트라우스가 오페레타 작곡가로 입신하는데 크게 기여했고 부부 금슬도 좋은 편이었지만, 1878년에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다.
같은 해 두 번째로 여배우 안젤리카 디트리히와 재혼했는데, 이번에는 성격과 나이 차이, 아내의 음악에 대한 몰이해 등으로 현시창인 생활이었다. 하지만 로마 가톨릭 신자였던 슈트라우스는 교회법에 따라 이혼이 금지되어 있었기 때문에, 개신교로 개종하고 독일 시민권(정확히는 작센-코부르크-고타 공국 시민권)을 얻어 1882년에야 간신히 이혼 수속을 밟을 수 있었다.
이혼 직후 마지막으로 아델레 도이치와 재혼했는데, 이번에는 다행히 성공적인 결합이었다. 슈트라우스는 아델레의 이름을 딴 왈츠를 써주는 등 애정을 과시했고, 아델레도 남편의 음악 활동에 대한 좋은 조언자이자 일생의 동반자가 되었다.
무도음악 작곡가라는 직업 때문에 대단한 바람둥이이자 탁월한 댄서의 이미지를 상상하곤 하는데, 실제로는 훨씬 가정적이고 금욕적인 성격이었다고 한다. 춤곡을 쓰는 작곡가였음에도 춤 실력이 대단히 서툴렀는데, 비만 오면 우울해지는 성격에 주변에서 안좋은 소리만 들어도 창작력이 뚝 떨어지는 등 심약한 면도 있었다고. 음주 문제에 있어서도 꽤 엄격했는데, 슈트라우스 악단 단원이 되려면 반드시 술을 포기해야 한다는 규정 때문에 많은 연주자들이 전전긍긍했다는 일화도 있다.
7. 사후에도 이어지는 인기
슈트라우스가 19세기의 거의 끄트머리에 세상을 뜨면서 '좋았던 시절의 종말' 이라는 아이콘으로까지 거론됐는데, 실제로 20세기에 들어서면서 왈츠를 비롯한 빈 춤곡의 인기는 하락세를 보이기 시작했다. 제1차 세계대전과 세계 대공황 등 치명타도 있었고, 미국에서 들여온 재즈나 블루스 등 새로운 오락거리의 영향력도 큰 위협 요소였다.
하지만 그럭저럭 명맥을 유지하던 사교계에서 여전히 슈트라우스 왈츠는 인기곡이었고, 무도회 뿐 아니라 일반 공연장에서 감상하기에도 무리가 없다는 점에서 옛 시절의 영화를 추억하는 이들에게는 여전히 유효한 떡밥이었다. 심지어 나치의 오스트리아 병합 후에는 정치적인 목적으로 슈트라우스의 춤곡들이 악용되기까지 했는데, 하마터면 나치는 이 일로 망신을 당할 뻔하기도 했다(무슨 소리인지는 '혈통에 관한 비화' 항목 참조).
미국에서도 독일에 병합되기 전의 오스트리아를 상징하는 모토로 슈트라우스 왈츠를 내세웠는데, 할리우드의 빵빵한 자본과 막대한 인력을 들여 'The Great Waltz(1938)' 라는 슈트라우스 전기 영화를 제작할 정도였다. 1941년에는 오스트리아의 대표 관현악단인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가 슈트라우스 가족들의 작품 위주로 개최하는 신년음악회를 시작했고, 지금도 클래식 음악회 역사상 유례없는 인기몰이를 하며 이어지고 있다.
방송과 영화의 발달로 라디오와 텔레비전에서도 심심찮게 인용되는 것을 들을 수 있는데, 마지막 황제의 무도회 장면 같이 나름 어울리는 것 외에도 다종다양하다.
모차르트와 함께 오스트리아로 음악 관광을 오는 이들에게 중요한 셀링 포인트고, 오스트리아 국가를 모르는 외국인은 많지만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 왈츠는 거의 다 안다는 점을 강조하곤 한다. 오스트리아의 오페라극장들에서는 12월 31일 밤이면 어김없이 오페레타 '박쥐' 를 상연해 한해를 끝마치는데, 이웃 독일과 스위스에서도 종종 벤치마킹하곤 한다.
1980~90년대에는 물량공세로 유명한 클래식 음반사 낙소스의 듣보잡 레퍼토리 전문 서브레이블 '마르코 폴로' 에서 총 52장의 슈트라우스 작품 전집 CD 세트를 제작해 대인배이자 용자의 기질을 유감없이 보여주었다. 오페레타 등 무대 작품은 제외한 것이라 엄밀히 따지면 전집은 되지 못한 물건이지만, 지금도 이 기록에 재도전하는 음반사는 찾아볼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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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유럽 음악사를 풍미했던 슈트라우스 일가를 다룬 TV 드라마 <슈트라우스 왕조>(Die Strauß-Dynastie)에서 주인공으로 등장했다. 배우는 스티븐 맥간(Stephen McGann). 가문 음악가들 중에서 단연 최고인 만큼 당연한 일.
8. 혈통에 관한 비화
나치는 슈트라우스 춤곡, 특히 '황제 왈츠'를 히틀러의 이미지에 대입해 총통의 권위 강화와 오스트리아인에 대한 회유용으로 줄곧 사용할 정도로 선전 떡밥에 유용하게 활용했다. 동부전선에 나간 군인들을 위해 위문품으로 슈트라우스 춤곡이 녹음된 레코드를 보내기도 했고, 국내에서 고달픈 생활을 이어나가던 국민들의 기분 전환용으로도 방송했다.
하지만 1941년에 유대인 색출을 위해 암약하던 나치 조사관들이 장크트 슈테판 성당의 세례 기록부를 열람하던 중 슈트라우스의 선조가 '세례받은(개종한) 유대인' 이라고 기록된 것을 찾아냈다.[9] 이는 즉시 상부로 보고되었고, 대가리 안돌아가는 어떤 간부는 이것을 언론에 알리려고까지 했다고 한다.
다행히(?) 괴벨스를 비롯한 선전부의 고위 간부들이 이 문제를 덮어두도록 해당 조사관들에게 압력을 넣었고, 유대인 혈통이 없도록 조작한 호적까지 새로 발급하면서 간신히 무마할 수 있었다. 만약 공표됐다면 히틀러부터 시작해서 나치의 고위층 다수가 자가당착에 가까운 망신을 당할 뻔 했겠지만, "누가 유대인인지는 우리가 결정한다."는 고위층의 불문율이 작동해 까임방지권을 발급해준 셈.[10]
[1] 이 말을 브람스가 실제로 했는지는 정확지 않으나 브람스가 슈트라우스 아내의 팬에게 사인을 해주며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의 유명한 오프닝 음표를 덧붙여쓰고 "불행하게도 제 작품이 아닙니다"라고 한 적은 있다.[2] 하지만 초기에 너무 격무에 시달린 나머지, 1853년에 신경쇠약으로 발작을 일으켜 잠시 활동을 중단하기도 했다. 그 기간동안 악단을 이끈 대리인은 동생인 요제프였다.[3] 이 점은 리하르트 바그너도 동일하다. 둘 다 나치의 선전음악으로 쓰인것도(...)[4] 타짜(영화)에서 고니가 훼이크 밑장빼기를 걸었을 때 아귀가 입브금으로 부른 곡이다. 이로 인해 봄의 소리 하면 거의 대부분 '''동작그만 밑장빼기냐'''를 떠올리게 된다. (...)[5] 가사 빼고 오케스트라만 편성할 수도 있다. 아줌마들 수다를 떠는 노래라고도 한다...[6] 톰과 제리 시리즈를 챙겨봤던 사람이면 알 법한 음악이다. 지휘자 톰(The Hollywood Bowl) 편에서 사용된 곡.[7] 김연아의 07-08시즌 쇼트 프로그램 음악으로 사용되기도 하였다.[8] 물론 아버지와의 대립 기믹에 비하면 훨씬 건전했고, 심지어 형제들끼리 공동 창작한 작품들도 있다.[9] 요한 1세의 할아버지였던 요한 미하엘 슈트라우스(1720~1800). 하지만 혈통 비율에 관한 상세한 기록은 없었고, 지금도 슈트라우스에 관한 위키피디아 등 사전의 카테고리에서 '유대인 음악가' 혹은 '유대인 작곡가' 라는 분류가 없는 것을 보아 유대인의 피는 대단히 엷었던 것 같다.[10] 슈트라우스 가문의 혈통 문제 외에도, 슈트라우스의 오페레타 대본 작가들 중 이그나츠 슈니처와 빅토르 레온, 레온 슈타인 등이 유태인이었다는 것도 나치의 골칫거리였다. 결국 이들의 이름을 슬그머니 공연 프로그램 등에서 삭제하는 선에서 마무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