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 슈트라우스 1세
▲ 라데츠키 행진곡,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2011년 신년음악회 실황 영상이다. 지휘는 프란츠 벨저-뫼스트(Franz Welser-Moest).
1. 개요
Johann Strauss, Vater(Senior) 또는 Johann Strauss I.
오스트리아의 경음악 작곡가 겸 바이올리니스트이자 요한 슈트라우스 2세와 요제프 슈트라우스, 에두아르트 슈트라우스의 아버지. '''왈츠의 아버지'''라는 별명으로도 불리며, 초기 빈 왈츠의 확립에 크게 기여한 인물이다.
2. 생애
빈에서 여관을 운영하는 부모의 아들로 태어났지만, 일곱 살때 어머니가 열병으로 죽고 열두 살에는 아버지가 도나우 강에서 익사하는 바람에 고아가 되고 말았다. 이웃집 재단사가 그를 양자로 맞아 키웠고, 견습 제본공으로 도제 수업을 받을 수 있도록 주선했다.
도제 수업 중에 마을 악사로부터 바이올린과 비올라 연주법과 음악이론, 작곡도 배웠는데, 결국 제본공 대신 무도음악 연주가의 길을 택했다. 처음에는 미하엘 파머의 악단에서 바이올린을 연주했는데, 얼마 안 가서 동료였던 요제프 라너와 '라너 4중주단' 이라는 현악 4중주단을 결성해 미뉴에트나 초기 왈츠, 콩트르당스, 독일 춤곡, 렌틀러 등을 공연했다.
라너 4중주단은 점차 인기를 얻으면서 현악 합주단과 소규모 관현악단으로 차츰 편성을 보강했는데, 라너와 슈트라우스는 연주만 하던 위치에서 바이올린을 켜며 악단을 지휘하는 지휘자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1] 이러한 관습은 이후 자신의 아들과 다른 무도음악인들도 그대로 잇는 전통으로 확립되었다.
1825년에 슈트라우스는 라너 악단으로부터 독립해 자신의 악단을 결성했고, 라너와는 선의의 라이벌로 빈 사교계의 인기와 영향력을 나눠가지게 되었다. 실제로 자신의 악단을 이끌면서 슈트라우스는 그 동안 가난에 찌든 생활에서 점차 벗어날 수 있었고, 동시에 자작 춤곡들을 쉽게 발표할 수 있는 기회를 잡을 수 있었다.
1837년에는 프랑스에서 첫 국외 순회 공연을 했는데, 이 때 메들리 식의 춤곡인 카드리유를 접하고 빈에 들여오기도 했다. 빈의 왈츠 열풍이 계속 확산되면서 악단 규모를 정규 관현악단 수준까지 늘렸고, 약 4~5분 정도였던 초기 왈츠의 간소한 구조도 8~10분에 달하는 대규모로 확대시켰다. 이렇게 확립된 것이 '빈 왈츠' 라는 명칭으로 굳어졌고, 후배와 자식들도 이런 양식을 전수받아 활동했다.
말년에는 바다 건너 영국에서 순회 공연을 하면서 큰 성공을 거두었고, 빅토리아 여왕을 비롯한 왕족들을 알현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1844년에 자신의 뜻을 거스르고 사교계에 데뷔한 장남 요한 슈트라우스 2세의 성공 소식에 크게 충격을 받았고, 이후 죽을 때까지 피말리는 경쟁을 해야 했다. 어느 정도였냐 하면 빈 근교의 최고급 행락지였던 돔마이어 카지노가 요한 2세의 데뷔 무대로 쓰였다는 이유로 아예 발길을 끊었다.
1846년에는 3년 전 세상을 떠난 라너의 후임으로 오스트리아 황실의 궁정무도회 감독에 임명되었는데, 이는 당시 오스트리아 무도음악 작곡가로서 가질 수 있는 최고의 직책이었다. 대표작인 '라데츠키 행진곡' 도 이 시기에 나온 곡이었는데, 대신 제도권에 편입되면서 그 동안 확보해둔 서민층의 지지를 잃게 되는 자충수를 두고 말았다.[2]
결국 그 동안 해왔던 격무로 얻은 과로에 성홍열까지 겹치는 바람에 1849년에 갑작스러운 죽음을 맞았고, 되블링 공동묘지의 라너 묘소 옆에 안장되었다. 1904년에는 라너의 유해와 함께 발굴되어 빈 중앙묘지로 이장되었다.
3. 주요 작품들
3.1. 왈츠
비둘기 왈츠 (Täuberln-Walzer op.1)
티볼리의 소풍 (Tivoli-Rutsch op.39)
파리 왈츠 (Paris-Walzer op.101)
영국의 빅토리아 여왕에게 바침 (Huldigung der Königin Victoria von Grossbritannien op.103)
로렐라이와 라인의 메아리 (Lorelei-Rhein-Klänge op.154)
3.2. 갈롭 & 폴카
탄식 갈롭 (Seufzer-Galopp op.9)
중국인 갈롭 (Chineser-Galopp op.20)
슈페를 갈롭 (Sperl-Galopp op.42)
갈롭 '청년의 열정' (Jugendfeuer-Galopp op.90)
인도인 갈롭 (Indianer-Galopp op.111)
폴카 '사랑스러운 안나' (Beliebte Annen-Polka op.137)
3.3. 행진곡
'''라데츠키 행진곡''' (Radetzky-Marsch op.228)
4. 사생활
무도음악가로 얻은 명성과 부에 반해 가족 관계는 꽤나 막장이었다고 한다. 특히 자식들이 자신의 뒤를 이으려고 하는 낌새만 보여도 공공연히 협박을 했고, 심지어 두들겨 패서까지 자기 말을 들으라고 할 정도였다.
이렇게 까칠하게 나간 이유에 대해서는 두 가지 관측이 있는데, 하나는 자식들이 자신이 걸은 가시밭길을 걷지 않게 하려는 부성애가 다소 비뚤어지게 나왔다는 주장이고, 다른 하나는 자식들이 음악가가 되었을 경우 자신의 명성을 위협하는 대항마가 될 지도 모른다는 설레발이었다는 견해다.
이렇게 아들들이 음악가로 나서는 것을 철저히 반대하는 것으로도 모자라 아예 자신이 자식들의 진로를 멋대로 결정하기까지 했는데, 요한 2세는 은행원, 요제프는 군인, 에두아르트는 외교관이 최상의 직업이라고 여겼다고 한다. 하지만 기본적인 소양으로서 음악을 배우는 것까지 말리지는 않았는데, 어쩌면 이 최소한의 관용이 패착이었을지도 모른다. 다들 몰래 숨어서 전문적인 단계까지 배웠으니.
하지만 가장 큰 문제는 자식들이 아닌 자기 자신에게 있었고, 1825년에 결혼한 마리아 안나 슈트라임[3] 과의 애정이 식어버리자 에밀리에 트람푸슈라는 여성과 불륜을 저지르기 시작했다. 심지어 사생아까지 여섯 명이나 낳는 단계까지 갔는데, 결국 안나가 이 사실을 알게 되었고 슈트라우스도 거리낌없이 그 사실을 대중들에게 알리면서 1844년의 이혼 수속으로 이어졌다.
부모의 이혼 소식은 다른 의미로도 자식들에게 충격이었는데, 특히 장남인 요한 2세는 이때다 라고 생각했는지 몇 달 뒤에 아예 자신의 악단을 조직해 무도음악가로 공식 데뷰 무대를 가졌다. 이 소식에 요한 1세는 예상대로 길길이 날뛰며 열폭했지만, 이미 가정 버린 못난 아버지라는 소문이 파다하게 난 이상 돌이킬 수도 없었다. 게다가 불륜 관계로 얻은 아이들까지 슈트라우스의 이른 죽음에 한몫 했는데, 아이들이 걸린 성홍열이 아버지에게 전염된 것이었다.
5. 사후의 평가
당대에는 라너와 함께 최고의 인기를 구가한 유명 음악인이었지만, 장남 요한 슈트라우스 2세의 성공적인 데뷔와 나머지 아들들의 가세로 인해 제대로 관광당하고 말았다. 심지어 '왈츠의 아버지' 라는 별명에 수긍하면서도 "그런데 유명한 왈츠로 어떤 곡이 있죠? 어헣?" 하고 상큼발랄하게 질문을 던지는 이들이 대다수인 현시창.[4] 오늘날 그의 작품 중에 후세의 기억에 남은 것은 라데츠키 행진곡 뿐이다.
음악적으로 봐도 자식들의 화려하고 다채로운 면모에 비해 다소 매력이 떨어진다는 평가가 있다. 다만 이는 온당한 평가라고 보기 힘든데, 슈트라우스가 베토벤과 슈베르트, 멘델스존, 슈만 등과 동시대 인물이었다는 사실을 알아야 이해가 가는 대목이다. 이 때까지도 왈츠는 고전 시대와 초기 낭만 시대에 어정쩡하게 걸려있던 발전 단계에 있던 춤이자 춤곡이었던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소품 수준이었던 왈츠의 모양새를 말쑥하게 다듬고, 서주와 후주를 붙이거나 형식을 확대하는 등의 업적을 수행한 것만으로도 높이 살 만하다. 하지만 업적은 업적이고 인기는 인기인데, 실제로 빈 필의 신년음악회 같은 무대에서 선곡 빈도를 따져봐도 안습 그 자체다. 그나마 최고의 인기작인 '라데츠키 행진곡' 은 고정 앙코르곡으로 정립되어 절대 빠지지 않지만, 나머지 작품들은 많아야 두세 곡, 심할 때는 아예 한 곡도 없는 경우까지 있다.
연주상의 문제로는 자식들의 작품보다 연주 편성이 작고 다소 불균형하다는 점이 지적되곤 한다. 요한 1세와 라너 등이 정규 편성에 가까운 악단을 이끌었다고는 해도, 현대의 실내 관현악 정도나 혹은 그보다 더 작은 편성을 위해 쓴 곡이 많다. 이런 이유로 정규 관현악을 쓰는 자식들이나 후배들의 작품과 같이 연주하는 무대에서는 아예 새롭게 편곡해서 올리는 경우가 많다. 특히 초기 춤곡들은 아예 실내악의 범주로까지 분류될 정도로 소편성인 것들이 대부분인데, 빈 필 신년음악회 무대에서 요한 1세의 초기 춤곡들이 원곡 악보가 아니라 막스 쇤헤어 등이 정규 편성의 관현악단용으로 재편곡한 악보로 연주되는 일이 다반사인 것도 이 때문이다.
하지만 슈트라우스 자신이 작성한 악보와 당대의 연주 편성에 충실하고자 하는 시대연주의 경향이 반영된 리바이벌도 진행 중인데, 낙소스 산하 희귀 레퍼토리 전문 레이블인 마르코 폴로에서 출반되고 있는 '요한 슈트라우스 1세 전집' 도 그러한 시도의 하나로 주목받고 있다. 해당 음반사의 홈페이지에 나와 있는 음반 소개글에 따르면, 2013년 12월에 발매된 25집을 끝으로 완결되었다.
6.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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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유럽 음악계를 풍미했던 슈트라우스 일가의 음악사를 다룬 TV 드라마 <슈트라우스 왕조>(Die Strauß-Dynastie)의 초반 주역으로 등장한다. 배우는 안소니 히긴스(Anthony Higgins).
뛰어난 바이올리니스트 겸 지휘자지만 외도를 일삼으며 가정에 소홀하고, 메테르니히 재상을 위시한 친정부 왕정 성향을 나타냈던 모습도 묘사했다. 아들인 요한 2세가 음악가의 길을 걷지 못하게 막으려 했으나 막상 성공적으로 데뷔한 후에는 악단 통합을 제의할 정도로 재능을 인정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악단 통합은 요한 2세의 데뷔를 지원했던 부인의 강력한 반대로 무산되었다. 실제 역사에서처럼 얼마 후 자식들에게 성홍열이 옮아 죽었다
[1] 이렇게 바이올린 연주와 지휘를 겸하는 무도음악 지휘자를 가리키는 '포어가이거(Vorgeiger)' 라는 독일어 단어가 생겼다. 뜻은 '(악단) 앞에서 바이올린 켜는 사람' 정도.[2] 당시 오스트리아의 중산층을 비롯한 서민들은 계속되는 크고 작은 전쟁과 경제난 가속화 등으로 황실에 상당한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게다가 요한 1세는 궁정무도회 감독에 부임하면서 공공연히 황실을 찬양하는 발언을 했고, 이것이 언론으로 흘러나가면서 문제가 되기 시작했다.[3] 4남(이 중 3남 페르디난드는 요절) 2녀(안나, 테레제)를 슈트라우스와의 사이에서 낳았다.[4] 그래도 막내아들 에두아르트보다는 적어도 이름값을 더 쳐주는 것이 대세. 역시 명불허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