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라브리아 해전
1. 배경
칼라브리아 해전은 2차 세계대전 당시 지중해 전역에서의 영국, 호주 연합 해군과 이탈리아 왕립 해군의 교전이었다. 푼타스틸로 해전이라고도 한다.
먼저, 북아프리카의 리비아에 배치되어 있던 이탈리아 육군은 본격적인 침공준비가 덜되었기에 이탈리아 해군은 리비아에 있는 육군과 공군에 보급을 행하러 가야만 했다. 우선 1940년 7월 6일, 4척의 상선으로 이루어진 선단은 이탈리아의 트리폴리로 가는 것처럼 위장해 리비아의 항구도시인 뱅가지로 가기위해 나폴리를 출항했다.
1.1. 양 측 해군의 배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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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해전의 주역인 퀸 엘리자베스급 전함 HMS 워스파이트와 이탈리아 해군의 전함 줄리오 체자레
다음 날, 알렉산드리아 주재의 영국 해군과 호주 해군의 연합 함대가 출격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이탈리아 해군은 타란토에서 선단호위를 위한 함대를 출발시켰다. 선단호위를 위한 함대는 세개의 전대로 나누어졌는데 첫 번째 전대는 선단을 직접 호위하는 어뢰정 4척과 구축함 8척이었으며, 두 번째 전대는 선단 동쪽 35km에 있던 중순양함 6척과 구축함 12척, 그리고 3번째 전대는 주력 함대로 전함 2척(콘테 디 카보우르, 줄리오 체자레)와 콘도티에리급 경순양함 등 순양함 8척, 구축함 13척이었다.
한편, 영국군은 다가오는 전투에 대비해서 몰타에서 민간인을 피난시켰다. 그리고 몰타에서 알렉산드리아로 향하는 2개 수송선단(MF 1 선단과 MS 1 선단)의 호위를 위해 앤드류 커닝햄 대장이 이끄는 영국해군 지중해함대를 7월 7일부터 8일에 걸쳐 알렉산드리아에서 출격시켰다. 이 선단은 6월 28일, 에스페로 선단의 전투에서 호위함대가 탄약을 소모해버리는 바람에 출발이 연기되었던 것들이었다. 출격한 영국과 호주해군도 역시 3개의 전대로 나뉘었다. 순양함 5척, 구축함 1척의 1전대와 전함 HMS 워스파이트, 구축함 5척의 2전대, 그리고 리벤지급 전함 로얄 소버린, 퀸 엘리자베스급 전함 말라야, 항공모함 이글, 구축함 10척으로 이루어진 3전대였다. 또 양동함대로서 사르데나 섬, 칼라브리아 반도의 공습을 위해 제임스 서머빌 중장이 이끄는 H 부대의 전함 퀸 엘리자베스급 전함 발리언트, 리벤지급 전함 레졸루션, 어드미럴급 순양전함 HMS 후드, 아크로열급 항공모함 아크로열, 기타 순양함과 구축함 13척이 7월 8일에 지브롤터에서 출격했다.
2. 전개
그러나 H 기동부대는 이동 중 공습을 받아 되돌아가야만 했는데 귀환하던 중에 이탈리아 잠수함의 공격을 받아 e급 구축함 에스코트가 격침당했다. 7월 8일 새벽에 연합군은 이탈리아군의 암호통신을 접수, 해석하여 연합군 함대에 통보했는데 그 중 몇 가지 정보는, 이탈리아 함대가 전투를 피하면서 되돌아가고 있다고 전했다. 실제로 이탈리아 함대는 공군의 지원을 얻기 위해 연합군 함대를 이탈리아 공군기지가 있는 해역까지 유인해서 끌어들이려고 북상을 계획했다.
그 와중에 이탈리아 함대는 진형을 편성하던 중 연료 부족으로 몇 척의 구축함이 시실리 섬으로 가 버리고 말았다. 이 때 구축함은 모두 16척으로 이탈리아 함대는 전력감소를 우려해 타란토에 있던 구축함 전대에 지원을 요청했다.
2.1. 첫 번째 공습
그리고 7월 8일에 이탈리아 공군의 폭격기가 연합군 함대를 발견해 공습하여 경순양함 HMS 글로스터의 함교에 폭탄을 명중시켰다. 함장 및 다수의 수병들이 사망했지만 글로스터는 예비 함교를 이용해 전투와 항해를 속개했다. 이탈리아 함대는 자국의 공군기들이 연합군 함대에 심각한 타격을 주었다고 착각하여 전투준비를 소홀하게 하고 말았다.
2.2. 본격적인 함대전
7월 9일 정오에 양 군의 함대는 145km의 거리를 두고 있었다. 속도가 느린 리벤지급 전함 HMS 로열 소버린에 맞추어 말라야를 위시한 함대는 거리를 두고 커닝햄 대장은 HMS 워스파이트를 단독으로 전진시켰다. 다른 쪽에선 13시 15분에 항공모함 이글이 페어리 소드피시 공격기 9대를 출격시켜 이탈리아 함대의 중순양함 볼차노를 노렸지만 전과를 올리진 못했다.
연합군 함대의 순양함은 전함 워스파이트의 전방에 진열을 정비했다. 15시 15분에 이탈리아 함대의 주력을 발견하곤 2개의 진열로 나누어 거리 21,500m에서 포격을 개시하였다. 의외로 이탈리아의 거리측정기는 연합군보다 성능이 우수했었다. 연합군 함대의 거리측정은 정확하진 않았지만 정밀한 조준에 의해 효율적인 집탄이 가능했다. 쌍방의 포격은 2, 3분이 지나자 거리 20,000m까지 좁혀들었는데 연합군 함대의 사격이 우위에 섰었다.
15시 22분에 이탈리아 함대의 포화가 연합군 함대의 순양함을 덮치자 지휘관이던 존 토비 중장은 이탈을 결심했는데 여기서 이탈리아의 경순양함 주세페 가리발디의 함포사격이 영국군 경순양함 HMS 넵튠에 명중했다. 명중탄은 넵튠의 정찰기와 정찰기를 사출하는 캐터필러를 파괴시켰다. 순양함 부대는 거리를 벌리다가 15시 30분에 사격을 중지했다. 이탈리아 경순양함 전대가 연합군 함대에 몰래 접근해왔는데 콘도티에리급 경순양함 알베르토 디 발비아노, 알베르토 디 주사노 2척은 워스파이트의 사정권 내에 있어 함포사격을 받을 가능성이 있었다. 그러나 그들을 확인못한 워스파이트는 말라야를 기다리며 선회하기 시작했는데 HMS 로얄 소브린은 당시 후방에 위치하고 있었다. 이탈리아 함대의 사령관이던 이니고 캄피오네 중장은 HMS 워스파이트를 끌어들이기로 결정하고 전함 2척을 이동시켰다.
2.3. 전함간의 초장거리 포격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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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MS 워스파이트가 23km 떨어진 줄리오 체자레를 향해 주포 사격을 하는 모습이다.
15시 52분에 줄리오 체자레는 워스파이트와 거리 26.4km를 둔 채 사격을 개시했다.줄리오 체자레의 사격 중 하나가 워스파이트를 호위하던 H급 구축함 하워드와 D급 구축함 디코이에게 피해를 입혔다. 하지만 복수의 함정이 한 개의 목표에 사격하면 탄착 측정을 구분하기 힘들다는 유틀란트 해전의 전훈을 배경삼아, 이탈리아 해군은 조준을 쉽게 하기위해 1척의 함정이 1척을 맡아 공격하라는 목표를 세우고 있었다. 이 때문에 다른 전함인 콘테 디 카보우르는 말라야와 로열 소버린을 담당하기로 하였다. 이에 대해 HMS 워스파이트에서 대응 사격을 했는데 연합군 함대는 이탈리아의 전술을 알지 못해 전함 워스파이트의 포격은 분산되어 버렸다. 그리고 15시 54분에 HMS 말라야가 이탈리아 함대에게 혼란을 주기 위해 사정권 바깥에서 함포사격을 개시했다. 볼차노를 위시한 이탈리아의 중순양함 전대는 15시 55분에 워스파이트를 목표로 사격을 개시했지만 연합군 함대의 순양함들이 돌아오자 사격을 중지했다.
2.4. 계속되는 교전
15시 59분에 줄리오 체자레의 포탄 2발이 워스파이트 가까이에 떨어졌다. 이에 워스파이트는 380mm 함포 포탄 1발을 줄리오 체자레의 후방갑판에 명중시켰다. 이 명중탄에 37mm 대공기관포의 탄약이 폭발하고 화재가 발생하였는데 화재 연기가 보일러실로 흘러 들어가 승무원이 숨을 쉴 수 없게 돼 보일러 4기를 멈추어야 했고 줄리오 체자레의 항행능력을 떨어트렸다. 줄리오 체자레의 속력이 18노트로 떨어져 콘테 디 카보우르가 이를 커버하기 위해 전진했다.
워스파이트는 24,000m이상 떨어진 지점에서 줄리오 체자레를 명중시켰기에 오늘날에도 이동하는 적 함선에 대한 최장거리 함포 사격 명중기록으로 남아있다. 워스파이트는 줄리오 체자레에게 일격을 가해 우위에 섰지만 후방의 말라야와 합류하기 위해 포격을 중지하고 선회했다. 그리고 HMS 말라야의 견시는 이탈리아 함대가 이탈행동을 준비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16시 1분에 이탈리아의 구축함대는 줄리오 체자레를 보호하기 위해 연막을 치기 시작했다.
15시 58분에 이탈리아 해군의 차라급 중순양함 피우메가 연합군 함대에 대해 포격을 재개하자 HMS 리버풀과 이탈리아 순양함 2개 전대 사이에서 전투가 시작되었는데 연합군의 순양함들도 여기에 가세하였다. 쌍방의 함대는 우위를 점하기 위해 포격을 실시하여 16시 7분에 이탈리아 순양함 볼차노가 3발의 명중탄을 맞고 키가 고장나버렸다.
3. 마지막 전투
전투가 거의 막바지에 이르고 이동하던 구축함 빅토리오 알피에리가 피해를 입고 후퇴하던 볼차노와 부딫쳐 손상을 입었다. 한편 전함 줄리오 체자레는 워스파이트에게 피해를 입은 보일러 4기 중 2기를 수리하여 속도는 22노트까지 끌어올려졌다. 캄피오네 중장은 콘테 디 카보우르가 연합군 함대의 전함 3척과 항공모함과 대치중인 것을 알고는 숫적으로 불리하다고 여겨 메시나로의 후퇴를 결정했다.
양 군의 구축함은 적의 함대에게 어뢰를 일제히 발사했지만 그 중 명중된 것은 없었다. 14시 40분에 이탈리아 공군의 항공기 126대가 연합군 함대를 공격해 전함 워스파이트, 말라야, 항공모함 이글에 손상을 입혔다고 자국 함대에게 보고하지만, 연합군 함대는 피해가 없었고 오히려 이탈리아 공군기 50대가 돌아오는 길에 아군 함대의 상공을 지나칠 때 적으로 오인받아 이탈리아 함대의 대공 사격을 받았다. 전투는 양 군 함대가 철수하여 16시 55분에 종료되었다.
다음날 오후 10시, 시칠리아의 아우구스트항에서 항공모함 이글이 소드피쉬 공격기 9기를 출격시켜 이탈리아 구축함 리오네 반카르트를 어뢰로 격침시켰다. 하지만 리오네 반카르트는 바닷속에서 끌어올려져 1941년 12월에 다시 현역에 복귀하였다.
4. 전투가 끼친 영향
전투 후, 연합군과 이탈리아 함대는 기지항구로 돌아갔다. 연합군 함대는 호위함대가 귀항해버렸기에 이탈리아 수송선단은 무사히 리비아에 도착하여서 어려움을 겪었지만 이탈리아는 목적을 달성했다. 한편 연합군 함대는 이탈리아 함대에 대해 함포전에서 우위를 가졌음이 판명되었다. 이 전투에서 중파된 줄리오 체자레는 1달가까이 수리를 거쳤지만 연합군 함대의 피해는 거의 없었다. 어이 없게도 이탈리아는 이 전투를 승리했다고 선전에 이용했다. 그러나 타란토에 정박해있던 이탈리아 전함 중 출격하지 않았던 리토리오급 전함 2척이 만약 출격했더라면 이탈리아 해군이 우위에 섰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탈리아 해군은 주력함대의 손실을 우려해 구축함만 내보냈기에 이들 전함을 투입하지 않았다고 한다..
여담으로 이 전투는 영국과 이탈리아 양측 모두가 승리를 주장한 전부이기도 하다. 하지만 대부분의 역사가들은 양측 모두 대등한 교전하에 거의 엇비슷한 손살비를 낸 점을 들어 이 전투는 무승부였다고 평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