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벤지급 전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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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1. 제원
2. 소개
영국 해군의 전함. 일반적으로는 로열 소버린급이라는 이름으로 더 많이 알려져 있으며, 모든 동형함의 함명이 R로 시작하기 때문에 R급으로 불리기도 한다.[4]
퀸 엘리자베스급 전함에 뒤이어 건조된 전함이지만 기본적인 설계는 전혀 다르다. 최초의 고속전함으로 평가받는 퀸 엘리자베스급이지만, 쩔어주는 성능만큼이나 건조비도 꽤 비쌌던 탓에 아무리 당대 최강을 자랑하던 영국이라도 꾸준히 이런 고성능함을 건조하는 것은 부담스러울 수 밖에 없었다. 또한 퀸 엘리자베스급은 그 고속을 내기 위해 중유 전용로를 채용하였는데 당시만 해도 확실한 석유 공급 라인이 없었던 영국으로서는 막상 전쟁이 터졌을 때 충분한 연료를 확보할 수 있을지 의문스러워하는 목소리도 많았다. 이 당시에는 북해의 해상 유전같이 첨단 기술이 필요한 물건 따위는 당연히 없었고, 아라비아 지역은 아직 탐사조차 되지 않았던 시절이다. 유일하게 페르시아 일대에서 막 유전 개발이 시작되던 참이었는데, 전쟁 발발시 해로의 위협을 감안하면...
이러한 점 등을 고려하여 리벤지급은 이전의 아이언 듀크급의 기본설계를 이어받되 퀸 엘리자베스급과 동일한 15인치 주포를 올리는 형태가 되었다. 기관은 석탄-중유 혼합로로 되돌아갔고 기관수도 줄여 최고속도 21노트의 비교적 저속의 염가함으로 설계되었다. 그 결과 전함임에도 연돌이 하나뿐인 보기 드문 형태가 되었는데, 외관상 유사한 퀸 엘리자베스급과 구분할 때 가장 눈에 띄는 부분이다.
그런데 기공 직후에 드레드노트 탄생의 주역인 존 피셔 제독이 제1해군경으로 복직했다. 속도가 곧 방어라는 원칙의 신봉자인 피셔가 당연히 이러한 저속함의 건조를 내버려둘 리 없었고, 결국 리벤지급의 석탄-중유 혼합로를 다시 중유 전용로로 변경할 것을 주장하여 이를 관철시켰다. 그 결과 설계상 최고속도는 23노트로 상향되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제 시운전시 23노트를 달성한 함이 없었다고 한다. 더구나 막상 만들어놓고 보니 퀸 엘리자베스급에 비해 건조비가 그렇게 싸게 먹힌 것도 아니었다.
8척의 건조가 예정되어 있었으나 제1차 세계대전 발발로 3척(리나운, 리펄스, 레지스턴스)이 취소되고 5척만이 건조되었다. 취소된 함들 중 두 척은 후일 순양전함으로 설계를 변경하여 새로이 건조되었는데, 이것이 리나운급 순양전함.
3. 계륵
리벤지급은 1916년에서 1917년에 걸쳐 차례차례 완공되었으나, 이 무렵쯤 되면 이미 독일 해군이 거의 히키코모리 모드로 들어간 상태라 1차 대전 중에는 별반 활약을 보이지 못했다. 그래도 리벤지와 로열 오크는 유틀란트 해전 직전에 완공되어 이 역사적인 전투에 참여했다.
유틀란트 해전에서 수선부 방어의 중요성이 부각되면서 함체 외부에 벌지를 붙이는 개장을 받았는데, 그 때문에 기껏 늘어났던 최고속도가 다시 21노트 중반 정도로 떨어졌다. 진수 중 키에 손상을 입는 바람에(...) 가장 늦게 완성된 라밀리즈만은 완공 당시부터 벌지를 달고 나왔고, 나머지 함들은 1920년대에 사격통제장치 개장을 받으면서 같이 장착했다.
1차대전 종전 당시로서는 쌩쌩한 신형 전함이었기 때문에 당연히 워싱턴 해군 군축조약의 폐기대상에서도 제외되었으며, 15인치 8문이라는 화력으로 영국 해군의 든든한 전력이 되어야 마땅했으나...
워싱턴 조약의 결과 15척으로 줄어든 전함으로 대영제국의 그 넓은 세력권을 다 커버쳐야 하는 상황에서 21노트라는 속도는 지나치게 느린 것으로 판명되었다. 더구나 원체 염가함으로 건조되어 함내 용적이 적은 탓에 일본군 해군의 공고급 순양전함처럼 대대적인 개장을 통한 성능 향상도 거의 바랄 수 없었다.
물론 1920년대 당시에만 해도 전함들의 성능이 다들 고만고만한 수준이었던지라 큰 문제로 보이지는 않았으나... 이미 일본이 나가토급 전함[5] 을 건조한 상태였고, 30노트의 고속을 내는 프랑스의 됭케르크급 전함이나 독일의 도이칠란트급 장갑함[6] 등 차원이 다른 신형함들이 속속 등장하면서 리벤지급의 가치는 점점 미묘해져갔다.
그래도 1930년대 중엽에는 어떻게든 퀸 엘리자베스급과 비슷한 수준으로 개장할 계획도 세워졌다. 그러나 퀸 엘리자베스급의 개장이 예상보다 많은 비용이 들어갔고[7] 리벤지급은 그보다 더 비용이 많이 들어갈 것으로 예상되었던데다가 제2차 런던 조약이 무산됨으로써 전함 건조의 중단이 끝나게 되자 굳이 비용을 들여서 개장할 이유가 사라지게 된다. 더 이상 구형 전함의 전투력 유지에 힘을 쓰기보다는 킹 조지 5세급 전함 등 신형 전함의 건조 정비를 우선시하게 되면서 결국 리벤지급의 개장안은 물 건너가고 말았다. 이쯤되자 영국 해군도 사실상 관리를 반쯤 포기했는지,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할 무렵에는 기관의 노후화가 심각해져 심한 경우 실제 속도가 18노트밖에 안나오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결국 리벤지급은 이후 건조될 라이온급 전함으로 대체하기로 계획이 되었으나 2차 대전이 발발하면서 취소되고 만다.
4. 제2차 세계대전에서
이런 상태에서 2차 대전을 맞이한 리벤지급의 이력은 안습하게 시작되었다. 개전 직후인 1939년 10월 14일에 귄터 프린 대위가 지휘하는 독일 잠수함 U-47이 스카파 플로에 잠입, 정박중인 로열 오크에게 어뢰 공격을 날려 격침시키는 사건이 일어났다.[8] 이 공격으로 1,400여명의 승무원중 833명이 전사했다.
영국 함대의 본거지로 철통같은 방어를 자랑하던 스카파 플로에 잠수함이 침입해서 금쪽같은 전함을 한순간에 날려버렸으니, 독일로서는 그야말로 더없는 큰 전과였다. 귄터 프린은 이 공적으로 기사 철십자 훈장을 수여받았다. 영국 입장에서는 1차대전 당시의 유보트의 악몽이 되살아나는 순간이었고, 더구나 로열 오크는 리벤지급들 가운데 그래도 상태가 가장 멀쩡한 함이었던지라 전력적으로도 큰 손실이었다.
게다가 나머지 함들의 활약도 안습 그 자체였다. 전함 주제에 심각하게 발이 느리고, 대공화기도 그렇게 많이 증설되지 못해서 본격적인 전투에 써먹기에는 영 못 미더웠기 때문에 사실상 선단 호위 임무만 수행한 것이다. 이런 임무에서는 선단 자체도 느린데다가 그래도 전함이므로 독일의 샤른호르스트급 순양전함이 접근하다가 교전을 포기하고 다시 물러가는 등 그럭저럭 쓸만은 했다.
그래도 전쟁 초반에는 함선 자체가 부족했기 때문에 이곳 저곳 최전선에 많이 불려다니기는 했는데, 앞서 말했듯이 느린 속도 때문에 지브롤터같은 곳에서는 사실상 붙박이로 항구나 지키는 신세로 전락하기도 했으며, 캐터펄트 작전이나 칼라브리아 해전에서는 아군함의 속도를 쫓아가지 못해 뒤로 처지는 등 안습한 모습만 보였다.
말레이 해전으로 영국 동양함대가 괴멸상태에 놓이자 인도양 방면으로 4척이 모두 전속되기도 했지만, 영국 해군 참모본부가 직접 '''빚이 늘어난 것 같다'''고 언급할 정도로 대접을 못 받았다. 물론 여기서도 결국 일본 함대와의 해전은 못하고 선단호위에만 집중하다가 라밀리즈가 일본의 특수잠수정으로 인해 손상을 입기도 했다.[9]
이렇게 시간을 보내다가 킹 조지 5세급 전함들이 취역을 완료한 1944년에는 예비역이 되어 상륙작전의 함포사격지원함으로 용도가 변경되었으며, 제2차 세계대전이 종료된 후 즉시 해체가 시작되어 1948년까지 3척이 해체되었다.
다만, 이탈리아가 일찍 패전하는 바람에 추축국에서 밀려나자, 소련이 평소 탐을 내던 리토리오급 전함을 이탈리아의 항복을 인정하는 대가로 내놓으라고 요구했다. 하지만 이탈리아의 거센 반발과,[10] 소련에게 최신예 전함이 넘어가는 것을 그냥 보고 있을 수 없었던 영국과 미국은 논의 끝에 일단 로열 소버린을 대신 소련에 대여해주고 배상 문제는 추후에 논의하기로 합의했다.
그래서 소련에 넘겨진 로열 소버린은 아르항겔스크로 함명이 바뀐다. 그러나 소련 해군 소속이 된 이후에도 별 활약이 없던 건 매한가지라서 통상적인 훈련이나 순찰을 겸한 단거리 항해를 제외하고는 항구에서 조용히 있던 게 고작이었다. 이후 1949년에 결국 리토리오급 대신 구형 전함인 줄리오 체자레[11] 를 배상함으로 넘기는데 합의하면서 로열 소버린은 영국에 반환되어 동년도에 해체되었다. 이것이 리벤지급의 종말이다.
5. 동형함 일람
5.1. 리벤지(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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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MS Revenge(06)[12] (복수)
1916년 2월 1일 취역. 유틀란트 해전에 제1전함전대 소속으로 참가해 독일 함대와 교전했으나 별다른 전과를 올리지는 못했다. 전간기에는 자매함들과 함께 주로 지중해에 배치되었다. 2차대전기에는 주로 선단호위에 종사했으나 노후화가 심각해져 1943년 10월에 일찌감치 예비함으로 돌려졌다. 이때 노르망디 상륙작전에 참가 예정인 동급함들의 예비용으로 쓰기 위해 주포신도 떼어냈다. 1948년 해체.
1916년 2월 1일 취역. 유틀란트 해전에 제1전함전대 소속으로 참가해 독일 함대와 교전했으나 별다른 전과를 올리지는 못했다. 전간기에는 자매함들과 함께 주로 지중해에 배치되었다. 2차대전기에는 주로 선단호위에 종사했으나 노후화가 심각해져 1943년 10월에 일찌감치 예비함으로 돌려졌다. 이때 노르망디 상륙작전에 참가 예정인 동급함들의 예비용으로 쓰기 위해 주포신도 떼어냈다. 1948년 해체.
5.2. 레졸루션(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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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MS Resolution(09)[13] (결의)
1916년 12월 30일 취역. 1940년에 지중해 함대에 배치되어 캐터펄트 작전에 참가했다. [14] 동년 북아프리카 작전 중 프랑스 잠수함의 공격을 받아 손상을 입기도 했다. 이후 지중해와 인도양을 전전하다 1944년에 예비함으로 돌려졌고, 1948년에 해체되었다.
1916년 12월 30일 취역. 1940년에 지중해 함대에 배치되어 캐터펄트 작전에 참가했다. [14] 동년 북아프리카 작전 중 프랑스 잠수함의 공격을 받아 손상을 입기도 했다. 이후 지중해와 인도양을 전전하다 1944년에 예비함으로 돌려졌고, 1948년에 해체되었다.
5.3. 로열 오크(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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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MS Royal Oak(08)[15]
함명은 청교도 혁명 당시 찰스 왕세자(후일의 찰스 2세)가 의회군에게 쫓기던 도중 몸을 숨겼던 Royal Oak라는 나무에서 유래되었다. 1916년 5월 1일에 취역, 유틀란트 해전에 참가하여 독일 순양전함 데어플링어와 교전, 3발을 명중시켰다. 1939년 10월 14일에 스카파 플로에서 정박 중에 독일 잠수함 U-47에 의해 격침되었다.[16][17] 1986년에 영국 정부는 침몰한 해역에 허가되지않은 다이빙을 금지시키고 현재는 전쟁묘지로 보호되고 있다. 전함에 설치되어 있던 종은 커크월의 세인트 마그누스 교회의 추모관에 전시되어 있다.
함명은 청교도 혁명 당시 찰스 왕세자(후일의 찰스 2세)가 의회군에게 쫓기던 도중 몸을 숨겼던 Royal Oak라는 나무에서 유래되었다. 1916년 5월 1일에 취역, 유틀란트 해전에 참가하여 독일 순양전함 데어플링어와 교전, 3발을 명중시켰다. 1939년 10월 14일에 스카파 플로에서 정박 중에 독일 잠수함 U-47에 의해 격침되었다.[16][17] 1986년에 영국 정부는 침몰한 해역에 허가되지않은 다이빙을 금지시키고 현재는 전쟁묘지로 보호되고 있다. 전함에 설치되어 있던 종은 커크월의 세인트 마그누스 교회의 추모관에 전시되어 있다.
5.4. 로열 소버린(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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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MS Royal Sovereign(05)[18] (군주)
1916년 4월 18일 취역. 유틀란트 해전에는 기관고장을 일으켜 수리중이었기 때문에 참가하지 못했다. 1940년 지중해 함대에 배치되어 칼라브리아 해전에 참가했으나, 느린 속도로 인해 전투가 끝날때까지 현장에 도착하지도 못하는 결과로 끝났다.[19] 대신 1940년 10월 10일과 11일 사이에 미디엄 작전에 참여했다. 왕립공군이 영국 본토 항공전에서 승리하기는 하였으나 독일이 영국 본토 침략을 위해 준비한 상륙용 바지선이 눈에 거슬린 영국은 폭격으로 모두 제거하려고 하였으나, 원하는 효과를 얻지는 못했다. 따라서 명중율 낮은 폭격으로 주의를 끄는 동안 리벤지와 호위함선들이 어둠 속에서 셰르부르에 접근, 120발의 15인치 포탄과 800발 이상의 4.7인치급 포탄을 발사한 뒤 피해 없이 퇴각했다. 이후 지중해와 인도양을 전전하다가 1944년에 소련에 대여되어 아르항겔스크로 이름이 바뀐다. 1949년 다시 영국에 반환된 후 해체.
1916년 4월 18일 취역. 유틀란트 해전에는 기관고장을 일으켜 수리중이었기 때문에 참가하지 못했다. 1940년 지중해 함대에 배치되어 칼라브리아 해전에 참가했으나, 느린 속도로 인해 전투가 끝날때까지 현장에 도착하지도 못하는 결과로 끝났다.[19] 대신 1940년 10월 10일과 11일 사이에 미디엄 작전에 참여했다. 왕립공군이 영국 본토 항공전에서 승리하기는 하였으나 독일이 영국 본토 침략을 위해 준비한 상륙용 바지선이 눈에 거슬린 영국은 폭격으로 모두 제거하려고 하였으나, 원하는 효과를 얻지는 못했다. 따라서 명중율 낮은 폭격으로 주의를 끄는 동안 리벤지와 호위함선들이 어둠 속에서 셰르부르에 접근, 120발의 15인치 포탄과 800발 이상의 4.7인치급 포탄을 발사한 뒤 피해 없이 퇴각했다. 이후 지중해와 인도양을 전전하다가 1944년에 소련에 대여되어 아르항겔스크로 이름이 바뀐다. 1949년 다시 영국에 반환된 후 해체.
5.5. 라밀리즈(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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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MS Ramillies(07)[20]
함명은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 당시의 라미예 전투[21][22] 에서 유래되었다. 진수 중 사고로 인해 자매함들보다 거의 1년 가까이 늦은 1917년 9월 1일에 취역했다. 1941년 2월 수송선단 호위 도중 샤른호르스트와 그나이제나우를 만났지만 라밀리즈의 15인치 함포를 우려한 독일 측에서 발을 빼는 바람에 교전은 벌어지지 않았다. 1942년 자매함들과 함께 인도양 방면에 배치되었다가 갑표적의 공격을 받아 큰 손상을 입기도 했다. 1944년에는 노르망디 상륙작전에 포격 지원으로 참가, 작전 기간중 모두 1,002발의 15인치 포탄을 발사했다. 남프랑스 상륙작전(드라군 작전)에도 참여했으며, 이후 1945년 1월에 예비함으로 돌려진 후 1949년 해체되었다. 이 전함의 주포 하나는 현재 제국 전쟁 박물관에 레졸루션의 주포와 함께 전시되어 있는데 이는 현존하는 둘 뿐인 15인치 마크-I 함포이다. 다만 해체될때 제거된건 아니고 다른 용도로 쓰다가 전시된것이다.
함명은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 당시의 라미예 전투[21][22] 에서 유래되었다. 진수 중 사고로 인해 자매함들보다 거의 1년 가까이 늦은 1917년 9월 1일에 취역했다. 1941년 2월 수송선단 호위 도중 샤른호르스트와 그나이제나우를 만났지만 라밀리즈의 15인치 함포를 우려한 독일 측에서 발을 빼는 바람에 교전은 벌어지지 않았다. 1942년 자매함들과 함께 인도양 방면에 배치되었다가 갑표적의 공격을 받아 큰 손상을 입기도 했다. 1944년에는 노르망디 상륙작전에 포격 지원으로 참가, 작전 기간중 모두 1,002발의 15인치 포탄을 발사했다. 남프랑스 상륙작전(드라군 작전)에도 참여했으며, 이후 1945년 1월에 예비함으로 돌려진 후 1949년 해체되었다. 이 전함의 주포 하나는 현재 제국 전쟁 박물관에 레졸루션의 주포와 함께 전시되어 있는데 이는 현존하는 둘 뿐인 15인치 마크-I 함포이다. 다만 해체될때 제거된건 아니고 다른 용도로 쓰다가 전시된것이다.
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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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대전의 발발로 인해 건조 중지. 이후 포클랜드 해전 등에서 순양전함의 효용성이 주목받으면서, 아래의 리펄즈와 함께 순양전함으로 재설계되어 리나운급 순양전함이 되었다. 대서양 상선호송 임무때 독일 해군의 전함 샤른호르스트와 그나이제나우 2척을 맞아 격퇴하는 기염을 토했다.
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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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나운과 마찬가지의 경위로 순양전함으로 변경. 일본의 진주만 공습으로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자 전함 프린스 오브 웨일스와 함께 파견되었으나 말레이 해전 당시 일본 공격기들의 공습을 받고 프린스 오브 웨일스와 함께 침몰했다.
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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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대전 발발로 인해 건조 취소.
6. 매체에서의 등장
전함소녀에서 로열 오크가 등장한다.
[1] 노르망디 상륙작전 당시 소드 비치에 화력 지원 중인 리벤지급 전함 라밀리즈. [2] 1944년 소련 해군에 유상으로 대여되어 아르항겔스크로 이름이 바뀌었던 시절의 전함 로열 소버린[3] 포신길이/포 직경[4] 공교롭게도 함명이 전부 영국의 전노급 전함 로열 소버린급 장갑함 (로열 소버린, 엠프레스 오브 인디아, 후드, 리벤지, 리졸루션, 로열 오크,라밀리즈)의 이름을 계승했다. 로열 소버린급은 ''' '리벤지'를 제외하곤 모두 침몰로 함생을 마감했다''' [5] 공식적으로는 최고속도 23노트지만 실제로는 26노트 이상, 주포 16인치 8문.[6] 다만 장갑함의 경우 그 실체에 비해 주변국들에게 매우 과대평가되었다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 자세한 것은 해당 항목 참고.[7] 워스파이트의 경우 건조시 비용이 2,524,148파운드 였는데 개장하는데 들어간 비용이 2,363,000 파운드로 새로 만드는것과 비슷한 수준의 비용이 들어갔다. 물론 화폐 가격의 변화를 고려해야겠으나 결코 저렴한 가격은 아니다.[8] 이때 귄터 프린은 자신이 격침시킨 배가 순양전함 리펄스인줄 알았다고 한다.[9] 이건 영국 측이 교전을 회피한 것도 있기는 하다.[10] 일단 형식상으로는 이탈리아 스스로 무솔리니를 내몰고 연합군에 참여한 것이니 속내야 어쨌든 한창 전쟁 중에 대놓고 패전국 취급할 수는 없었다.[11] 1차 대전 시기의 구형 전함이었으나 프랑스의 신형 전함 됭케르크급의 건조에 자극을 받은 이탈리아가 그야말로 마개조하여 외관이 완전히 바뀌었다. 소련에게 넘어간 후 노보로시스크로 함명이 바뀐 체자레는 1955년 항구에 정박중 2차 대전 당시에 설치해둔 기뢰가 떠다니다 접촉/폭발하여 서서히 침몰하다가 전복되어 버렸다.[12] 휘장은 그리핀[13] 휘장은 돌격하는 기사[14] 덕분에 후드는 빠른 속력이라는 장점을 살리기 위해 바로 다음 작전인 덴마크 해협 해전에서는 그나마 고속전함 축에 끼는 프린스 오브 웨일스와 같이 작전하게 된다. 문제는...[15] 휘장은 잎에 둘러싸인 왕관[16] 이때 로열 오크에 100여명의 15세~17세의 해군 견습생이 많이 타고 있다가 침몰하면서 대부분이 사망했고 이 사건 이후에는 18세 미만은 전투함에 승선하지 못하도록 법이 생겼다.[17] 첫피격을 당했을때 승조원들은 불발한 어뢰가 배에 충돌했을 때 보일러가 폭발한 줄 알았을 정도로 U보트가 군항에 침투한 것은 상상도 못했었다고 한다.[18] 휘장은 왕관을 쓰고 왕관 위에 올라간 사자[19] 이 해전에서 퀸 엘리자베스급 워스파이트가 함포간 최장거리 명중 기록을 내며 이탈리아 전함을 두들겨 패는 활약을 펼친데 비교하면 이건 뭐...[20] 휘장은 깃발을 든 사자[21] 프랑수아 드 뇌빌(1644-1730, 이 사람은 2대 빌레루아 공작인데 아버지가 뛰어난 군인이어서 공작이 된 덕에 자동으로 2대 공작이 되었다.)이 일방적으로 외젠과 존 처칠에게 두들겨 맞았기에 빌라르가 이 전투 이후 나서게 된다. 이 전투의 영국측 사상자는 대략 1300명인데 프랑스 사상자는 13,000(...)명 거기다가 뇌빌은 키아리에서도 40,000명으로 20,000명 이끄는 외젠에게 깨진 적도 있다. 거기다가 크레모아에서는 외젠에게 포로가 되었다. 여담이지만 뇌빌과 루이 14세는 절친한 친구였기에 패배 이후 ''너 그저 운이 없어서 그래.라는 말과 함께 뇌빌은 '죄를 용서받고 빌라르가 말플라케 전투와 드냉에서 죽어라고 구르는 동안 궁정귀족으로 편히 살다가 이후 86세에 죽는다. 같은 또래인 부플레르(1644-1711)가 전쟁 중에 객사하고 방돔(루이 조제프 드 부르봉, 1655-1712, 여기서 빌라르와 함께 제일 능력이 있는 장수다.)은 전쟁 중 스페인에서 다 이겨놓고 객사하고(엘 에스코리알에 매장) 탈라르(카미유 도스튄, 1654-1726)는 블렌하임에서 털린 이후 영국에 포로로 간 걸 생각'''하면........심지어 방돔은 후사도 없이 죽고 부플레르는 3대만에 집안이 단절되고 탈라르는 아들 하나 있는데 아들에게 후사가 없어 단절되지만 뇌빌은 아들이 꽤 많다. 거기다가 후손들도 프랑스 혁명 때 꽤 호의적이어서 친구들의 후손들이 목이 잘릴 때 살아남았다. 일례로 부플레르의 증손녀인 마리 드 부플레르는 남편인 비론 공작이 방데반란 진압에 소극적이었다는 이유로 남편과 같이 사형된다 그런데 군사적으로는 무능했지만 인간적으로는 꽤나 좋은 평을 들었던 것 같다. [22] 오십보백보이긴 하지만 이게 차라리 그 블레넘에 비하면 낫다. 블레넘 전투에서는 프랑스 사상자 40,000명이고 생존자는 겨우 16,000명'인데(손실율 72퍼센트=사실상 프랑스 궤멸+지휘관이 포로가 됨)여기는 그 정도는 아니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