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닐리어스 밴더빌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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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름 '''
'''코닐리어스 밴더빌트 (Cornelius Vanderbilt)'''
''' 출생 '''
1794년 5월 27일, 미국 뉴욕 주 뉴욕
''' 사망 '''
1877년 1월 4일, 미국 뉴욕 주 뉴욕
''' 재산 '''
1877년 사망 당시 2억 달러,
현재 가치 기준 한화 약 360조
''' 가족 '''
밴더빌트 가문
'''종교 '''
개신교(모라비아교)
1. 개요
2. 역사
3. 재산
4. 가족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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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철도왕'''과 '''선박왕'''으로 불리는 당대 미국 최고의 대부호로[1] 밴더빌트 가문을 창시한 인물이다.

2. 역사


1794년 5월 뉴욕 스태튼아일랜드에서 태어났다. 11살 때 학교를 그만두고 아버지 밑에서 여객선 일을 도왔다. 16살 때 여객선을 구입해 본격적으로 선박업에 발을 디딘다. 부유하다고 할 수 없는 집안에서 태어나 교육도 제대로 배우지 못했지만 끝없는 노력과 냉철한 판단력을 통해 당시 빠르게 성장하고 있던 선박업을 독점하고 큰 부와 지위를 손에 넣게 된다. 남북전쟁 때는 자신이 운영하는 여객선을 해군에 기부하고 남부군의 무역선을 파괴하는 공을 세운다. 애석하게도 남북전쟁 동안 본인이 가장 아꼈던 막내아들이 병에 걸려 죽고 만다. 남북전쟁 이후 코닐리어스는 급부상하는 철도 산업에 관심을 가졌고 그 당시 모두가 기피하던 뉴욕/할렘 철도선을 포함한 네 개 철도선의 대주주가 된다. 이때 먼저 떠난 막내아들을 대신해 첫째 아들 빌리 밴더빌트를 다시 후계자로 정하고 할렘 철도선을 키워보라고 시킨다. 놀랍게도 빌리는 매우 성공적으로 할렘선을 키웠고 코닐리어스는 선박업을 처분하고 철도업에 올인하게 된다. 현재 미국의 3대 철도사라고 할 수 있는 CSX의 일부인 뉴욕 센트럴 철도선을 세우게 된다. 물론 미국이라는 나라가 원체 땅이 크다 보니 그 수많은 철도선을 독점 운영하지는 못했지만 경쟁자를 따돌리고 가장 많은 이윤을 남겼다. 쉽게 말하자면 북동부와 중서부에 위치한 모든 철도는 그의 손안에 있었다.[2]
하지만 이 밴더빌트도 제이 굴드(Jay Gould)한테 한방 먹는데, 이리 철도(Erie Rail)[3]에 대한 적대적 M&A 과정에서 발생한다. 밴더빌트는 뉴욕 시에 진입하는 철도 회랑을 장악하고 있는데, 하필이면 이 철도 회랑 바로 앞에 있는 선로가 이리 철도의 것이었다. 결국 밴더빌트는 자기 재산을 모조리 쏟아부어 이리 철도를 인수할 생각을 한다. 그래서 뉴욕증권거래소를 통해 이리 철도 주식에 대한 공개매수 선언을 했다. 이 선언을 들은 당시 이리 철도의 2대 주주였던 제이 굴드는 이리 철도 사장 대니얼 드루, 기업사냥꾼 제임스 피스크와 작당했다. 이들이 뭉친 이유는 “밴더빌트의 돈을 빼앗아버리자!” 어떤 방법을 썼냐면, '''등록되지 않은 미등록 불법 주식을 마구 찍어내어 뉴욕증권거래소 및 미국 재무부에 신고하지 않고 시장 내외에서 주식을 마구 팔아치운 것'''[4]이다. 굴드는 많을 때는 하루에 700만 달러 어치(하루에 50만 주 가량)씩 미등록 불법 신주를 찍어내며 밴더빌트의 공개매수 시도를 정말 기어이 좌절시킨다. 밴더빌트가 굴드의 작전을 알게 된 것은 아들이 가져온 주식이 이전에 가져온 주식과 달리 '''재무부의 발행인가가 없는''' 부분인 것을 발견한 때로, 이미 밴더빌트가 무려 5,000만 달러를 이리 철도 공개매수에 투입했을 때였다.(...) 밴더빌트는 분명히 주식을 계속 사고 있으므로 지분율이 높아져야 정상인데 생각보다 지분율이 올라가지 않아 의심하던 차에 이 불법 주식을 발견한 것. 그제서야 밴더빌트는 돈을 제이 굴드한테 삥뜯겼다는 것을 깨달았지만 굴드, 드루, 피스크는 이미 이리 철도에서 돈을 나눠먹은 후 이리 철도에서 도망간 뒤였다.(...)[5] 결국 밴더빌트는 1차 이리 철도 인수전에서 돈을 날려먹은 이후에 록펠러의 석유 수송을 하면서 번 돈으로 4년 후 2차 이리 철도 인수전을 벌여야 했고, 이 때는 공개매수에 성공하여 기어이 이리 철도와 합병하는데 성공했다.

3. 재산


사망 당시 1억 달러의 유산을 남겼는데 당시 미국 GDP의 1.5%라는 후덜덜한 거액이다. 2016년 기준으로 환산한 결과 2,150억 달러라는 말도 안 되는 수치가 나왔다. 현재는 앤드루 카네기의 재산을 더 높게 쳐주지만 과거만 해도 록펠러의 뒤를 잇는 미국 역사상 두 번째로 가장 많은 부를 축적한 인물로 여겨졌다. 아들 윌리엄 밴더빌트는 그의 재산을 두 배로 늘린 걸로 유명하며 그 후 4세대까지 호의호식하면서 살 정도로 엄청난 부를 모았다. 요즘은 록펠러 가문과 비교당하면서 인터넷에서 망한 가문 취급받지만, 로스차일드 가문처럼 대를 거치면서 자식들에게 재산이 많이 분할돼서 그럴 뿐 5세대 인물인 글로리아 밴더빌트와 6세대인 앤더슨 쿠퍼를 보면 망한 것과는 전혀 거리가 멀다.
현재 그의 유산은 미국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대표적인 것이 테네시내슈빌에 위치한 밴더빌트 대학교[6]이다.

4. 가족사


비록 성공적인 사업가였지만 가족한테는 냉혹했고 좋지 않은 가장이었다.특히 자식들에게도 무자비했는데, 자식이 11명이 넘는 것도 아들을 많이 가지고 싶어서 생긴 결과였다. 하지만 자식 11명 중에서 오직 3명만 아들이었다는 게 아이러니하다. 그럼 아들들한테는 관대했나? 그것도 아니다. 첫째 빌리는 너무 어리숙하다고 어렸을 때 시골로 내쫓았고 둘째는 정신병원에 강제 입원시켰다. 오직 막내아들한테만 관심을 두었는데 남북전쟁때 아쉽게도 병에 걸려 요절하고 말았다. 부모님의 반대를 무릅쓰고 결혼한 부인한테도 차갑게 굴었고 시도 때도 없이 창녀촌에 가서 놀았다고 한다. 이런 가족사를 가지고도 4세대까지는 대중적인 관심을 받을 정도로 모두 호의호식하고 살았다는 게 오히려 기적에 가까울 지경이다. 가족사에 있어서는 정말 실드가 불가능한 인물. 그래도 양심은 있었는지 죽을 때는 딸들한테도 상당한 유산을 남겼다.
둘째 부인과 딸들한테 각각 $200,000~$500,000을 남겼다고 하는데 19세기 당시에는 엄청난 돈이었다. 자식들은 이 돈을 가지고 흥청망청 쓰면서 건축물들을 세웠는데, 현재 이 건축물 대부분은 국가 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다. 나머지 9천만 달러는 첫째 빌리한테 갔고 빌리는 뛰어난 사업 수완으로 죽을 당시 2억 달러 모았다고 한다. 록펠러와 카네기가 나오기 전까지 미국 역사상 가장 많은 부를 축적한 부자였다.
[1] 이 시기 말 그대로 자유방임주의였던 미국의 경제 구조 상, 그의 축재는 말 그대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이루어졌고, 그래서 밴더빌트를 비롯한 당시 미국의 대부호들을 도적 귀족(Robber Baron)이라고 부른다.[2] 미국의 거인들이라는 다큐에서 그의 영향력을 단적으로 보여는 것이 있었는데, 무슨 일로 그의 심기를 거스르는 바람에 뉴욕으로 가는 모든 철도 운송을 막아버렸다. 대도시의 소비되는 물자가 막혀버리자 그에게 항복한 일이 있었다. 즉 그의 의지로 뉴욕과 같은 대도시의 숨통을 막아 버릴 수 있다는 소리다.[3] 현재는 CSX의 일부 선로이다. 애당초 이리 철도는 노선 총연장이 50km도 안 될 정도로 작은 회사였다. 그러나 이 작은 노선이 하필이면 뉴욕으로 진입하기 위한 '''유일한''' 철도 노선이었기에 밴더빌트의 눈에 들 수밖에 없었다.[4] 미등록 주식을 시장에 팔아치운 사례로는 무려 160년이나 지난 뒤에 나온 한국2018년 삼성증권 유령주식 사태와 비슷하다.[5] 나중에 굴드는 이때 밴더빌트의 돈을 빼앗아 나눠먹은 대니얼 드루를 피스크와 손 잡고 배신해서 재산을 모조리 강탈해 비참하게 죽게 만들었고, 나중에 같이 일하던 피스크도 에드워드 스톡스에게 호텔에서 암살당하면서 그의 재산도 모조리 차지한다.[6] 당대 사업가들은 기업의 대한 사회적 비판을 피하고 합법적인 조세회피를 위해 교육과 문화에 많이 투자했는데, 대표적인 다른 작품들이 록펠러의 시카고 대학교 및 뉴욕 MoMA와 카네기의 카네기 멜런 대학교이다